<벽암록(碧巖錄)> 제45칙은 선문에서 고금제일의 거장으로 평가되는 조주종심스님(778~897)의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지만, 하나는 어디로 가나”라는 유명한 법문을 싣고 있다.
한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물었다.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만, 그럼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조주스님이 대답했다. “나는 청주에 있을 때 베 적삼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지.”
擧. 僧問趙州, 萬法歸一, 一歸何處. 州云, 我在靑州, 作一領布衫. 重七斤.
본칙의 공안은 〈조당집〉 제10권, 〈전등록〉 제10권, 〈조주록〉 중(中)권에 전하고 있다. 조주는 조주종심선사로 〈벽암록〉 제2칙과 5칙 등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기 때문에 그의 약전은 생략한다.
〈운문어록〉에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 하나(一)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다. 무엇이 만법(萬法)입니가?’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처럼, 이 공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만법(萬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불법(佛法)을 만법(萬法), 제법(諸法)이라고 하는 것처럼, 불교는 법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불법은 인연법과 연기법을 토대로 만법의 진실을 밝히고 만법의 근본인 마음으로 깨닫도록 제시한 종교이다. 그래서 불법(佛法)은 심법(心法)이며, 마음 밖에서 법을 구하는 것은 외도(外道)이다.
불법의 근본정신과 본질을 모르고는 이 공안의 의미와 정법(正法)의 안목(眼目)을 체득 할 수가 없다. 〈화엄경〉 등 대승경전에서 주장하는 ‘삼계는 오직 마음(三界唯一心)이며, 마음 밖에 별다른 법이 없다(心外無別法)’ ‘일체의 모든 것은 마음이 조작한 것(一切唯心造)’ 설법이나, ‘만법은 일심(一心)이며 일심이 만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선어록〉에서 한결같이 강조하는 심법(心法)이나, 심지법문(心地法門)은 불법의 본질을 단적으로 설한 말한다.
그런데 만법이 하나(歸一)로 돌아간다고 한 그 하나(一)는 어디이며 무엇인가? 〈돈오요문〉에 다음과 같은 설법이 참고가 된다. ‘이 법신은 수만 가지 변화의 근본이 되기에 장소에 따라서 이름을 세운 것이다. 법신의 지혜 작용은 다함이 없기에 무진장이라고 한다. 능히 만법을 생성하기에 본래의 법장(法藏)이라고 하며, 일체의 지혜를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지혜장(知慧藏)이라고 하며, 만법이 본래(如)로 돌아가기에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한다. 〈금강경〉에 “여래는 곧 모든 법이 여여하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세간의 일체 생멸법이 모두 본래(如)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다.’ 즉 만법이 곧 진여인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며, 진여가 곧 만법인 것은 인연에 따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一)는 진여인 마음의 본체를 가리키며, 법성(法性), 청정법신이라고 한다. 선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 일물본래인(一物 本來人), 진인(眞人), 본래무사인(本來無事人)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체의 만법은 일심(一心)의 인식과 지혜의 판단으로 성립되는 심법(心法)이기 때문에 만법은 근원적인 깨달음의 경지인 일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는 또 어디로 돌아가는가(一歸何處)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근본정신과 보살도의 사상인 불법의 대의를 잘 알아야 한다. 선어록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는 ‘백척의 장대 끝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百尺竿頭進一步)’는 주장과 마찬 가지로 수행을 통한 절대 깨달음의 경지(一)를 체득한 사람은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깨달음의 경지에 머물 것인가? 깨달음의 경지를 체득하기 어렵다고 해서 그 곳에 머문다면 그 곳이 또 집착의 대상이 되고 중생심으로 타락되는 장소가 되고 만다. 그래서 하나(一)가 되돌아가는 곳을 안다면 불법수행을 마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만약 하나(一)를 지키고 놓치 않는다면 귀신의 소굴에서 사는 지혜없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반야경〉에서는 번뇌 망념을 텅 비우는 공(空)의 실천으로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는 구체적인 수행으로 제시한 무주(無住), 무박(無縛), 무상(無相), 무애(無碍), 무아(無我) 등을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깨달음의 경지인 하나(一)를 어떻게 벗어나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선에서는 크게 한번 죽어야 한다는 ‘대사일번(大死一番)’을 강조하고 있다. 죽는다는 말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등 자아의식의 중생심 분별심을 모두 떨쳐버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임제록〉에서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고(殺佛殺祖)라는 말이나, 사람을 죽이는 칼과 살리는 칼(殺人刀 活人劍)이라는 표현은 공의 실천으로 체득한 반야의 지혜(칼)로 번뇌 망념인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일어키는 중생심을 비운다는 말이다. 죽인다는 표현은 번뇌 망념의 중생심, 분별심을 비워 버린다는 반야사상인 공(空)의 실천을 선어록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깨달음의 경지(一)까지 초월한다는 것은 어떻게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다시 중생의 사바세계로 되돌아가서 깨달음의 지혜와 부처님의 인격을 자비 광명으로 중생구제의 위대한 보살도의 실천으로 회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만법의 근본을 체득한 부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부처는 중생을 위한 지혜와 자비 광명의 보살도를 실현함으로써 부처로서의 존재의미가 있는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은 깨달음을 이룬 부처로서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실현하는 보살도를 의미하는 말이지,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하거나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정신을 하화중생(下化衆生)과 이타중생(利他衆生)이라고 하며, 〈십우도〉에서는 중생이 살고 있는 저자거리에 나아가 자비와 지혜의 광명을 베푸는 보살행으로 ‘입전수수’라고 하며 법계유희이라는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 깨달음을 이룬 부처의 역할은 만법의 차별세계로 되돌아가서 중생과 함께하며 원력을 세운 보살도를 실행하는 일 뿐이다. 사실 부처나 깨달음은 중생과 미혹을 극복하기 위한 상대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중생이 없는 세계에 부처 또한 존재할 이유가 없다.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라는 공안은 대승불교의 모든 실천정신을 함축하여 일상의 대화 속에서 불법의 정신을 체득하고 실천 수행할 수 있도록 궁구된 문제인 것이다. 질문한 스님은 이러한 불법의 수행구조와 실천체계를 토대로 조주화상에게 질문하고 있다. 그러나 조주화상은 ‘나는 고향 청주에 있을 때 승복 한 벌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다.’라고 담담하게 대답하고 있다. 조주화상은 만법이니 깨달음의 경지인 일심(一心. 一)이니 이론적인 불법의 수행체계나 객관적인 불교이론에 전혀 관심 없이 내가 입고 있는 이 승복의 무게나 일곱 근이나 된다고 자신의 일을 말하고 있다. 즉 조주화상은 자신이 만법과 하나가 되어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다. 원오도 ‘과연 종횡무진이다 하늘을 뒤덮는 그물을 쳤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만법이니 하나니 관계하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 조주가 입고 있는 한 벌의 승복은 하늘을 덮고 땅을 덮고 우주 만법을 모두 그 속에 끌어넣고 있다고 평했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한쪽으로 몰아치는 질문으로 조주화상(老古錐)을 다구쳤네.’ 스님은 원숙한 조주화상에게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라는 질문했네. 편벽(偏僻)은 〈인천안목〉에 분양화상의 18문(問)의 하나인 편벽문(偏僻問)으로 일방적인 견해를 세워서 조주선사에게 질문한 것을 읊고 있다. ‘일곱 근 승복의 무게 몇이나 알까?’ 질문한 스님을 포함하여 조주화상이 대답한 말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는 납승은 몇이나 될까? ‘지금 서호(西湖) 속에 내던져 버렸네.’ 이 말은 설두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대기대용을 들어낸 전구(轉句)이다. 즉 조주화상이 입은 일곱 근의 승복은 만법과 하나를 포용한 일체를 초월한 대단한 옷이지만, 지금 설두는 그러한 옷은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서호(西湖)에 내던져 버렸다고 한다. 나는 조주화상처럼 일체를 초월한 경지에도 머물지 않고 있다는 입장을 읊고 있다. ‘얕은 맑은 바람을 누구에게 전할까?’ 만법과 하나, 불법이나 선법도 텅 비우고 얕은 바람에 강을 건너는 빈 배처럼, 상쾌한 이 마음을 누구에게 전해줄까.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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