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수행전통
수행이라고 하면 설명할 수가 없다. 보이는 수행도 있고, 보이지 않는 수행도 있고, 몸소 하는 수행도 있고, 아무도 모르게 마음으로 이루는 수행도 있어서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보통 아주 기본적이고 전체적인 수행 말고 스님들이 출가해서 절에 들어와 가지고 수행을 전문적으로 하시는 분들이 어떤 수행을 했을까? 그 내용이다. 전통적으로 스님들이 아주 전문성 있게 한 수행을 말한다.
그게 수행전통이다.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에 전해지는 과거이다. 과거가 현재에 전해질 때 그것이 전통이다. 현재에 전해지지 않으면 그것은 역사가 된다. 그런데 수행은 신라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현재에 살아 있다.
그래서 현재에 살아 있는 과거만을 전통이라고 하고 과거에는 있었는데, 현재에는 전해지지 않고 기록으로만 남아있다든지, 유물과 유적으로만 남아 있으면 그것은 역사이지, 전통은 아니다.
우리 나라의 수행 전통에는 무엇이 있는가?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신중단 축원에 보면, 신중단, 신장님께 축원을 올리는 축원문에 그런 말씀이 있다.
첫째, 참선자(參禪者) 의단독로(疑團獨露) 둘째, 염불자(念佛者) 삼매현전(三昧現前) 셋째, 간경자(看經者)혜안통투(慧眼通透) 이런 법문이 있다. 이 세 가지가 나와 있다. 참선, 염불, 간경 이것이 한국 불교의 수행전통이다.
그러면 참선은 어떻해 하는가? 의단(화두)이 독로하는 것이다. 화두, 의심 덩어리가 홀로 들어나게 하는 것이 참선이다. 또 염불은 어떻해 하는 것인가? 염불로 삼매를 하는 것이 염불수행이다. 간경은 어떻게 하는가? 혜안, 지혜의 눈이 통투, 다통한다는 이야기다.
지혜의 눈이 훤이 열리는 것, 지혜의 눈이 부처님처럼 훤히 열리는 것, 그것이 간경수행이다. 그럼 세 가지다.
그런데 관음시식 대비주 착어에 보면,
자광조처 연화출(慈光照處 蓮花出), 자비광명이 빛추는 곳에 연꽃이 피어나고,
혜안관시 지옥공(慧眼觀時 地獄空), 지혜의 눈으로 볼 때는 지옥도 공허하며
우황대비 신주력(又況大悲 神呪力), 관세음보살님의 자비한 다라니의 힘을 입으면,
중생성불 찰라중(衆生成佛 刹喇中) 중생의 성불이 찰나에 이루어진다.
여기서 우황대비 신주력(又況大悲 神呪力),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의 신비로운 다라니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 중생성불 찰라중(衆生成佛 刹喇中) 중생이 성불하는 것은 찰나에 이루어진다. 라고 하는 말씀이 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송주(誦呪), 다라니를 외우는 것, 그 송주(誦呪) 수행이 계속되어 왔다. 그래서 한국불교의 수행전통은 참선, 염불, 간경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인가? 송주(誦呪), 이것을 주력(呪力)이라고도 하고 여러 가지 말을 한다.
그런데 송주(誦呪), 주문(呪文)을 외운다. 주(呪)가 다라니다. 이 네 가지가 한국 불교의 수행 전통이다. 이것은 신라시대부터 오늘 날까지 계속된 전통이다.
조선조 후기 1769년 지은 삼문직지(三門直指)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의미는 삼문으로 바로 가르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수행을 염불문(念佛門), 원돈문(圓頓門), 경절문(經截門)이라고 설명하였다.
염불문(念佛門)은 정토수업문(淨土修業門)으로 내내 염불하는 것이고, 원돈문(圓頓門)이라고 하는 것은 화엄(華嚴)을 중심으로 하는 교학문(敎學門)이다. 그래서 염불 수행, 화엄 수행 그리고 경절문(經截門), 바르다는 경자, 끓어질 절자로서 바로 된다고 한다.
중간의 과정이 없다. 바로 뜨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참선이다. 일초직입 여래지(一超直入 如來地), 한 번 딱 뜨면 범부의 지위에서 여래의 자리에 올라 간다고 해서 선지참구[(禪旨參究 참선(參禪)]의 수선문(修禪門)이다.
그래서 염불 수행, 화엄 수행, 참선 수행 이렇게 세 가지로 삼문직지에서 설명을 했다. 조선 시대 후기에 쓰여진 책이다. 그리고 나머지 주력(呪力), 송주는 누구나 아침 저녁으로 일상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송주(誦呪) 수행이다.
그러니까. 그 책에서 송주(誦呪), 다리니 외우는 것, 경전을 보는 것, 화엄이라고 하는 것이 내내 원돈(圓頓)이라. 그게 화엄인데, 화엄 속에는 전체가 다 들어 가니까. 그래서 경을 보는 수행, 참선하는 수행, 염불하는 수행, 역시 네 가지를 이야기 했다.
서산대사는 언제 스님인가? 7년 전쟁이라고 임진왜란 전에 태어나서 임난 후에 까지 사셨는데, 그 당시 85세를 사셨다. 서산대사(1520~1604)는 굉장히 오래 사신 것이다. 조선 중기에 태어나서 후기에 돌아 가셨다. 그 분께서 당신의 제자, 동호선자라고 하는 분이 계셨다.
동호선자(東湖禪子)에게 보내는 글이 있는데, 그게 서산집(西山集) 7권, 4권, 2권 가운데 4권에 있는 내용인데 다 비슷하다. 서산 스님은 대도인인데, 제자한테 편지에 무엇이라고 했을까? 아주 재미있다.
그런데 도인이라도 제자한테 편지할 때는 잔소리도 많이 했다. 여러 가지 걱정도 많이 했다. 그것이 도인의 두 가지 면이다.
진리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하나도 걸림없이 굉장하다. 의심이 하나도 없고, 장애와 고뇌같은 것이 전혀 없다. 그런데 제자한테 막상 할 때는 걱정이 그렇게 많고 염려된다. 염려된다. 뭐하느냐? 뭐하느냐? 라고 보통 말씀 하는게 아니다.
그게 진제(眞諦), 속제(俗諦) 그것이 바로 불격(佛格), 인격(人格)이다. 여러 가지 편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 이런 편지가 있다.
기동호선자서(寄東湖禪子書) 서산스님께서 동호선자에게 보낸 글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다.
옛날부터 앓든 병은 지금은 낫는지 모르겠다.
염려가 되고 염려가 된다. 또 근래에
네가 참선을 하느냐? 염불을 하느냐?
대승경을 보느냐? 비밀주를 외우느냐?
라고 이렇게 편지를 했다. 그래서 이런 것을 보면 그 당시에도 참선, 염불, 간경, 송주가 스님들이 보편적으로 하는 전통 수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자세하게 써 놓았다. 그것이 수행 전통이다.
그리고 조선조 초, 성종 때, 동문선(東文選), 해동 즉 우리 나라의 글들을 뽑아서 모아 놓은 책을 간행했는데, 신라 시대 때부터 고려 시대 때까지 이루어진 많은 사건들을 분야별로 모범이 되고, 후대 사람들에게 필요하겠다 싶은 글들을 뽑아서 모은 책이 동문선이다.
중요한 책인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종파를 이야기하였는데, 거기서는 종이라고도 표현하고 업(業)이라고도 표기하였다. 그래서 예를 들면, 조계종이라고도 표현하고 조계업이라고도 쓰고 화엄종이라고도 하지만 화엄업이라고도 썼다. 이 업이라고 하는 말은 무슨 업, 무슨 업이라고 해서 참 재미있다.
염불을 하면 염불업이다. 율행을 전문적으로 하면 율업이고, 또 신라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유가종이라고 해서 유가업(瑜伽業), 유가종이 무엇인가? 하면 유식종(唯識宗) 그 유식불교가 굉장히 발달했다. 그래서 신라 시대에는 그 유식을 전문으로 하는 분을 선사라고 했다.
삼국유사에 보면, 순교를 해서 불교를 크게 믿게 하신 분이 한 분 계신다. 이차돈이다. 그 이차돈을 기록한 조항이 있는데, 법흥왕하고 이차돈하고 함께 기록한 조항이 삼국유사에 있다. 거기에 보면, 유가종 승려, 유가종 계층의 스님을 다 선사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선은 유가선이다. 오늘 날 유식을 한다고 하면 학문적으로 말하는 줄 아는데, 그 때는 관행으로 겸하였다. 그게 유가선이다. 이 유식 공부를 할 때는 마음 공부까지 같이했다.
유가(瑜伽)라는 것이 그게 요가라는 말과 같고, 요가라는 것이 몸과 마음이 상응, 서로 통일이 된다. 그래서 이 유식 공부를 하는데, 마음 공부까지 하지 않으면 그게 않들어 온다.
그냥 팔식, 칠식, 육식, 전오식, 아뢰야식, 이것만 배워 가지고는 않온다. 실지 수련을 해가면서 유식 공부를 해야 그게 된다. 과거에 그렇게 했기 때문에 유식을 설명한 것을 보면 들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체험한 것 그대로 눈 앞에 보이는 것을 기록하듯이 그렇게 써놓았다.
고려 시대에도 그 유가종(瑜伽宗), 화엄업(華嚴業) 율업(律業) 조계종(曹溪宗) 지염업(持念業) 해동종(海東宗) 소승업(小乘業), 비밀종(秘密宗)도 있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나라에서 수좌로도 책봉을 하고 선사, 또 왕사, 국사로도 책봉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불교가 국교였다.
동문선에는 그런 책봉문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렇게 여러 분야의 [무슨 종(宗)스님이다], [무슨 업을 하는 스님이다] 이런 것이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면 고려 시대에 어떤 수행을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거기 보면 역시 참선, 염불, 간경, 송주 이것이 기본이다. 이것은 직접 가본 곳인데,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면 숭오동 선봉사지라고 하는 곳에 가면, 고려 선봉사(高麗 僊鳳寺) 대각국사 비음기(大覺國師 碑陰記)가 있다. 선봉사지가 있고 지금은 조그마한 암자가 있다.
산속에 있는데 1132년경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의천대각국사비(義天大覺國師碑)가 있다. 그 당시 대각국사가 천태종을 열었다. 천태종을 열기 전, 선대 시대, 고려 초기부터 크게 신행된 화엄, 조계, 유가와 더불어 천태종의 그 법도가 같다.
이런 기록이 있다.
그러니까. 고려 초에서부터 크게 신행되던 학풍이라든지, 종풍은 화엄종, 조계종, 유가종인데, 천태종이 창립이 되면서 천태종이 이런 세 가지 가풍과 법도가 같아서 세상에서는 이것을 사대업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대업이 무엇인가? 화엄업, 조계업, 유가업, 천태업이다. 이렇게 사대업이 되었다. 그러니까. 고려 시대에도 조계, 화엄, 유가(유식), 그 가운데 이 유식이 대승불교의 기초다.
대승불교를 이해하고 설명하는데는 유식이 없으면 않된다. 그러나 안타깝게 한국 불교는 조선 시대에 유식학이 끊어졌다. 그래서 불교학이 발달하지 못했다. 화엄학이나 무슨 무슨 대승 불교학을 할 때, 그것을 설명할 때는 유식이나 소승불교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구사론, 아비달마 구사론인데, 이것을 동원하지 않고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화엄의 대 종장들도 화엄을 저술할 때는 구사, 유식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게 왜 그런가? 하면 말 하나 하나에 의미를 구사나 유식 같은 데서 정확하게 집어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데 신라 시대부터 고려 시대 때까지 유식학이 발달해서 불교가 흥했는데, 조선 시대 유식학이 침체하니까. 불교 교학이 발달하지 못하고 강독학, 강의하고 해독하는 것으로 전통을 삼았다.
교학을 연구한다든지 하는 것은 전부 침체했다. 고려 시대 때는 유가종이 아주 발달했다. 그리고 고려 시대에 비밀 불교, 송주 수행을 하는 분들에게 높은 승려의 지위를 부여한 글이 있는데, 이 분들은 병을 고치는데 아주 큰 도움을 주었다.
진언을 자꾸 외운다든지, 다라니를 자꾸 외우는 분들은 병을 고치는데 굉장한 영험을 가지신 분들이다. 그래서 그분들은 일종의 신승(神僧)이라고 하였다. 아주 신비로운 스님들이었다. 누가 아플 때 가서 독경을 한 번 하면 그냥 회복하였다. 또 심지어는 독경을 했는데, 여우가 도망을 갔다. 그리고 병이 나았다.
삼국유사에 그 기록이 있다. 그것이 신승들이었다. 그래서 참선하는 분, 염불하는 분, 교학하는 분, 그렇게 다라니로 신비로운 신통력을 갖추신 분, 이런 분들이 교단을 대표하는 고승들이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고려 시대에만 그렇게 했는가? 그렇지는 않다. 신라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신라 시대에도 보면, 신라를 대표하는 고승이 자장, 원효, 의상 이런 분들이 있는데, 이런 분들이 학문은 거의다 화엄을 하셨다. 그리고 태현화상(太賢和尙)이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태현스님은 유식학에 아주 최고 권위자라고 자타가 존경을 했다.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 시대에 염불 수행하신 스님들은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 염불사(念佛師)라고 해서 따로 수행하신 분이 있다. 또 삼국유사에 보면, 신주(神呪)라고 하는 제목이 있는데, 그 신주(神呪)가 있어서 당나라에서 신라를 공격한다고 하면, 그냥 갑자기 천을 치고, 거기서 비법으로 당나라 군대를 막는다.
그것을 명랑신인(明朗神人), 명랑법사(明朗法師)가 비밀주(秘密呪)로 당나라 군대를 다 막는다. 다른 스님도 누가 아플 때, 약사경을 읽으니까. 바로 나았다. 삼국 유사에는 이 분들만 모아 놓은 한 편의 기록이 따로 있을 정도로 비밀주(秘密呪) 수행을 많이 하신 분들이 많다.
자장이나 의상같이 화엄을 하신 분, 태현같이 유식으로 수행하신 분, 또 염불로 평생을 정진하신 분, 원왕생가, 삼국유사에서 아주 유명하다. 명랑법사(明朗法師)와 같이 비밀주(秘密呪), 다라니로 수행하신 분들이 신라 시대의 수행 전통이다.
그래서 이것은 오늘 날만 형성된 것이 아니고, 이것이 조선 시대에 이루어졌다. 그 것도 아니고, 조선 시대에 따로 생긴 것이 없다. 전부가 신라 때부터 오늘 날까지 내려 오는 것이다. 그게 아주 중요하다.
불교 역사를 깊이 모르면 그것이 다 조선조 때, 불교가 산중에 있으면서 된 것이 아닌가? 라고 하는데, 천만에 신라 시대에 있던 것을 그대로 고려 시대의 전통이 되고, 그것이 또, 조선의 전통이 되고 그것이 오늘 날의 전통이 되었다.
종교의 전통과 관습은 좀처럼 변화지 않는다. 그래서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에 살아 있는 과거다. 현재에 살아 있지 않으면 전통이 않된다. 그것은 하나의 역살일 뿐이다. 역사와 전통은 다르다. 이런 신라 시대의 수행 방법이 오늘 날까지 쭉 내려와서 참선, 염불, 간경, 송주가 오늘 날까지 전문적 수행을 하는 아주 대표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수행을 왜 하는가? 염불을 목적으로 하는가? 세상에 할 일도 많은데 왜, 염불만 하겠는가? 간경이 목적인가? 세상에 볼 것도 많은데 왜, 경만 보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아니다.
경전을 보는 것은 경이 거울이기 때문이다. 성인의 가르침으로 거울을 삼는다. 성인의 가르침이 거울인데 거울로 무엇을 보는가? 내 마음을 비추어 본다. 그리고 자기 마음으로 지혜의 등불을 삼아서 경의 깊은 뜻을 또 비추어 본다.
경전은 명경(明鏡), 거울이다. 그래서 거울 앞에 간다. 그리고 거울을 본다. 그러면 무엇이 보이는가? 자기를 본다. 결국 경을 보는 것은 나를 보는 것이고, 거울을 보는 것은 나를 보는 것이다.
거울 앞에 가서는 거울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러 간다. 내가 나를 보러 거울 앞에 가는 것이지, 거울을 연구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경을 열심히 본다는 것은 내가 나를 찾는 것이다.
참선도 마찬가지다. 내가 나를 깨닫는 것이며, 염불도 마찬가지다. 내가 나를 부르는 것이다. 아미타불이 바로 나(我)다. 또 주력도 마찬가지다. 내가 나를 찾는 길이다. 그래서 중생성불이 찰나 중이다. 이것이 송주공덕이다.
중생이 성불하는 것은 찰나 가운데 이루어진다. 석문의범에는 잘 없지만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는 말이 있다. 이 몸 그대로 성불한다. 이것이 송주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밀교에서 주장하는 말이다.
이 가운데 송주를 하든, 경을 보든,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이것이 목적이 아니고, 이것을 통해서 나를 찾는 것이다. 그것이 성불이다. 그래서 성불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지, 염불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거나 성불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보기 위해서 거울을 보는 것이지, 거울을 보기 위해서 거울을 보는 것은 아니다. 그게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큰 스님들의 법문이 두 가지가 있는데, 이 법문은 경봉스님 법어집이 있는데, 두 가지 사례를 지적하였다.
수행하는 것을 비유로 말하자면, 중국의 유명한 미인 양귀비가 있었다. 양귀비가 데리고 있는 시녀가 한 명 있었는데, 소옥(小玉)이라고 했다. 그런데 저녁만 되면 이 양귀비가 소옥을 애타게 불렀다. 그런데 왜 소옥을 불렀겠는가? 왜 불렀을까? 양귀비에게는 애인이 있었는데, 안록산이었다.
안록산을 부르려고 하니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안록산을 부르려면 안록산이라고 하면 않되었다. 부르는 것은 안록산을 부르는 것인데, 궁궐에서 후궁이 자기 애인, 안록산의 이름을 부르면 않된다.
그러니까. 소옥을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소옥을 부르면 안록산이 소옥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궁으로 들어간다. 여기에 대한 시가 경봉스님 법어집에 있는데, 내용이 이렇다.
빈호소옥원무사 지요단낭인득성(頻呼小玉元無事 祗要檀郞認得聲)
자주 자주 소옥이를 부르지만 원래 소옥에게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네.
다만 낭군님에게 자기 소리를 알게 하기 위해서 소옥을 부르는 것이다.
소옥아, 소옥아를 부르는 것은 소옥이를 찾기 위해서 부른 것이 아니고,
그 향기나는 님에게 자기 소리를 전하기 위해서 부르는 것처럼 참선을 한다든지, 염불을 한다든지, 간경을 한다든지, 송주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기를 찾고 도를 깨닫는데 있다.
도를 깨닫기 위해서 참선을 하고, 도를 깨닫기 위해서 염불을 하고, 도를 깨닫기 위해서 간경을 하고, 또 하나 도를 깨닫기 위해서 송주를 한다. 그것을 하면 내가 나를 깨닫는다. 그것이 수행이다.
그러면 내가 나를 깨닫는데, 다라니나 자꾸 외우고, 화두나 들고, 경이나 봐서 어떻게 알겠는가? 라는 의심이 생길 수가 있다. 그러니까. 경봉 큰 스님이 거기에 대한 법문이 있다.
비단 장수와 망두석이라는 내용이 있다. 망두석(望頭石)은 묘 앞에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사람 머리처럼 조각해 놓은 것이 망두석이다. 비단 장수는 어떤 비단 장수가 비단을 한 짐지고, 고개를 넘어가다가 하도 고단하고 피곤해서 무덤 앞에 비단을 내려 놓고 쉬었다.
잠깐 쉬다 보니까.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까. 비단이 없어졌다. 큰일 났다. 비단이 곧 생계고 재산인데, 잠 한 번 자는 바람에 다 잃어버렸다. 그래서 기가 막혀서 지방 원님에게 가서 민원을 내었다.
“제가 비단 장수인데 길을 가다가 무덤 앞에서 비단을 다 잃어 버렸습니다. 비단을 찾아 주세요.“ 그러니까. 원님이 ”너의 비단을 훔쳐가는 것을 누가 보았냐?“ 물었다. 그러자 비단 장수는 ”도저히 누가 가져 갔는지 모릅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도 원님은 “비단을 가져가는 것을 누구라도 보았겠지, 않봤겠느냐?” 자꾸 물으니까. 비단 장수는 “그 옆에 망두석이나 봤겠지, 나는 모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원님은 “망두석을 잡아 오라”고 하였다.
망두석을 잡아왔다. 그리고 망두석에게 “비단 훔쳐간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서 망두석을 매일 매일 계속해서 때렸다. 하염없이 망두석을 때렸다. “왜 말이 없느냐“고 또 때리고, ”빨리 불어라“고 또 때리기를 그렇게 자꾸 때리니까.
망두석을 때린다는 말이 소문이 나서 윗 마을, 아랫 마을 사람들이 그냥 전부 모여들기 시작는데 망두석을 계속 때리니까. 계속 많이 모여 들었다. 그래서 망부석을 때릴 때마다 웃기도 하고 조롱도 하였다.
그렇게 하기를 사람이 많이 모였을 때, 갑자기 명령을 내렸다. “지금 여기 고을 원내에 들어와서 웃고 떠드는 사람을 다 잡아다가 하옥하라”고 하였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왜 옥에 갇혀야 됩니까?” 물었다.
“원내에서 공무를 집행하는데, 웃고 떠들어서 공무를 방해한 죄다” 고 하였다. 결국 공무 방해죄로 잡힌 것이다. 그러면 “나가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부 비단 한 필씩 사오면 방면 시키겠다” 고 하였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감옥에 오래 있으면 되겠나? 하고는 전부 각자 비단 한 필씩 준비를 해왔다. 그래서 비단이 많이 쌓이게 되었다. 그리고 원님이 그 비단 장수보고 “여기서 네 비단을 찾아 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비단 장수는 자기의 비단을 금방 금방 찾아냈다. 찾아낸 비단에는 그 비단을 가지고 온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으니까. 원님이 “너는 그 비단을 어디서 샀느냐?” 물었다. 그렇게 하니, 범인을 금방 잡아 내었다.
그래서 경봉 스님 법문에, 처음에 그 비단 훔쳐간 사람을 잡는데 망두석에 곤장을 때려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았는데, 망두석을 갖다 놓고 계속 치니까. 거기서 비단 훔쳐간 사람을 금방 찾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다.
선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렇다. 내가 나를 찾는데,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 “뜰앞에 잣나무다” 이런 것을 해 가지고는 나를 찾을 것 같지 않고, 내가 나를 찾는데 경전을 보아 나를 찾는다? 다리니를 외워서 나를 찾는다? 염불을 해서 내가 나를 찾는다? 도저히 이것은 않될 것 같았는데, 해보면 된다고 하는 것이다.
많은 대중들을 그 당시, 비단 훔쳐간 사람을 붙잡는데, 망두석 잡아다가 곤장을 쳐서 거기서 범인을 찾는다는 것이 있을 수나 있겠나? 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禪)이라고 설명을 한다. 이것이 수행이다.
또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산에 올라 가는 것과 같다. 산에 왜 올라 갈까? 산에 올라 가기 위해서 올라 가는 것이 아니고 멀리 바라 보기 위해서 산을 올라 가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하기 위해서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기를 찾으니까. 그것이 수행이다. 산에 올라 가면 올라 가는 그 만큼 멀리 보인다.
또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집에서 자기 집을 찾는 것이다. 왜 자기 집에서 자기 집을 찾는가? 자기 집에 있으면서 그냥 갑자기 이 집이 내 집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들어 버렸다. 자기 집에서 매일 “내 집에 가자 내 집에 가자” 라고 한다.
노인들 돌아가실 때쯤 되면 이런 분 많다. 그럴 때는 노인을 모시고 밖으로 나가야 된다. 노인하고 절대 싸우면 않된다. 마당을 한 바뀌 빙글 돌아서 다시 자기 방으로 오면 “아 여기가 내 집이구나”를 안다. 이것이 수행이다.
가다 가다 보면 자기 자리가 나온다. 자기 집에서 자기 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이전으로 돌아 가는 것이 수행이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열심히 하면 된다. 이것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지혜로 돌아 가는 것이다. 중생이 무슨 죄, 무슨 죄 하지만 어리석은 죄가 가장 큰 죄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게송이 하나 있다.
등아견화불지화(燈蛾見火不知火) 비비투화실상명(飛飛投火悉傷命)
담저영상임의견(潭低影像任意見) 막입수중전신몰(莫入水中全身沒)
(癡網), 어리석은 그물에 걸리지 말아야 된다. 중생이 치망에 걸려서 고통을 당한다. 치망에서 벗어나면 고통이 없다. 그것을 비유로 말하면 불나방이 불을 보고 불인 줄 모른다. 불나방이 불을 보고 불인 줄을 알면 그곳에 않들어 간다.
그러나 날으고 날라서 불어 들어간다. 그래서 목숨을 다 잃는다. 사람이 연못에 가서 그 속을 내려도 보면, 그림자가 보인다. 그처럼 연못 속의 그림자를 마음대로 보되, 물에 들어가 온 몸을 물 속에 빠지게 해서는 않된다.
이것이 어리석음을 경계하고 지혜를 닦아야 한다는 게송이다. 기도와 수행의 목적은 어리석음을 여의고 지혜를 얻는 것이다.
- 종범스님 법문 가운데서
수보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haha723/14000413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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