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반야심경

[스크랩] 금강경 공관법이란 무엇인가

수선님 2018. 8. 26. 12:55

그 동안 "공관" 이라는 말은 귀에 익도록 들어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공관법을 어떻게 하면 닦을 수 있느냐고 물으면 그리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공' 이라는 말이 너무 심오한 뜻을 내포하고 있고 또 그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해 놓은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해 '공'의 경지는 수행을 통한 체험에서 나타나는 것이지

 지식이나 관념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까지 없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데

 어찌된셈인지 공관을 닦는 방법에 대해서 말들을 잘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체의 법을 밝히 깨달으신 부처님의 안목에서 볼 때는 세상의 온갖 존재는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타난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인 까닭에 있는 것 같지만 일시적으로 거짓되게 존재합니다. 이것을 대승 불교에서는 공 이라고 합니다. 존재하는 것  같으나 그 본질은 모두 비어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공관법이란 이미 대승의 선정에서 말했듯 자신과 세계의 근원인 마음을 관찰하여. 일체를 진실되게 있다고 보지않고 공하다고 보는 공부법입니다. 이 공관법을 다른 표현으로는 허망관(虛妄觀)이라고도 하고 환관(幻觀)이라고도하며 무상관(無相觀)이라고도 합니다. 허망관이란 모든 것을 보되 헛되고 망령된 것으로 관찰하는 법이고, 환관이란 역시 모든 존재를 허깨비나 환상으로 관찰하는 법이며, 무상관이란 일체의 모습이 본래는 모습이랄 게 없는 것으로 관찰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유의할 것은 공관법(空觀法)은 절대 모든 존재들이 완전히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있다고

보는 것도 중생의 큰 사견(邪見)입니다. 그러나 더 큰 사견은 모든 것을 없다고  보는 견해입니다.간혹 잘못 알고 모든 존재는 아주

없다고 보는 것이 공관법이라는 견해를 지을수도 있습니다만 이는 매우 적절치 못한 생각입니다. 공(空)의 뜻은 말로써는 다 할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에서나 파악되는 자리입니다. 공을 깨닫게 되면 생명과 우주의 참모습이 무엇인지를 바로 보고 바로 알게 되는데,

이 경지에서는 있다느니 없다느니 허망하다느니 하는 등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중생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 있다는 고정 관념을 지니고 모든 것을 대하므로 이것을 깨뜨려 주기 위해서 공관 선정을 닦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불교의 모슨 수행은 공통적으로 공관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로부터 불문(佛門)을 공문(空門)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불교의 완성은 공의 완성으로 팔만 사천의 경전이 공을 바탕으로 그 설법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공덕을 짓고 참선을 많이하고 염불을 많이 했어도 모든 법이 공한 줄을 모르면 그는 불문에 제대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까닭에 불교의 팔만 사천 경이 동일한 공관(空觀)을 닦을 것을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기 경전인 법구경에서는 "몸을 보기를 한 조각 거품처럼보고, 느낌을 보기를 하나의 물방울처럼 보며, 생각을 보기를 아지랑이처럼 보라. 또 의욕을 보기를 파초나무처럼 보고 의식을 보기를 환영처럼 보라."고 하셨고, 반야심경에서는 "오온이 모두 공했음을 비추어 보고서야 일채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하셨으며, 유마경에서는 "보살은 세상 보기를 소리의메아리, 물 위에 뜬 달, 더운 날의 아지랑이처럼 본다."고 하셨습니다. 또 원각경에서는 "수행하는 보살은 모든 것이 허깨비(幻)와 같음을 보고 마음 가운데의 그림자를 멸하면 끝없는 청정과 깨달음을 얻으리라..." 하셨고 , 능엄경에서는 부처님의 움직이지 않는 마음자리를 '여환삼마제' 곧 환과 같이 보는 마음의 지혜라고 하시면서 "금강과도 같은 부처님의 여러 가지 지혜는 열 가지 허망한 법을 깊이 관찰함으로써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통해 들어가느니라."고 하셨으며 화엄경에서는 "몸을 허깨비 같이 보면 부처의 몸을 보고, 마음을 꼭두각시처럼 보면 부처의 마음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이 밖에도 무수한 경전마다에는 거의 빼놓지 않고 일체법을 공, 혹은 환으로 관찰할 것을 한결같이 설하고  있는데 이는 수행에 있어 공관이 얼마나 긴요한 것인가를 일러 주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부처님 가르침들 가운데에서도 '공' 의 뜻을 가장 철저하게 설파한 경전으로는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단연 으뜸으로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승의 학설에 따르면 부처님은 성도 후에서 열반에 드시기까지 수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무엇보다도 중점을 두셨던

 내용이 반야경 계통의 가르침이었다고 합니다.

 반야경은 모든 법이 '공'하다는 전제 아래 보살도를 닦고 반야를 증득할 것을 설한 경전입니다. 부처님의 45년 설법 기간중  자그만치 21년 간을 이 반야경 계통을 설하는 데 보내셨다고 하니 불교에 있어서 '공'한 이치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금강경은 바로 이러한 반야경 계통 속에 들어 있는 주요 경전으로, 여러 반야경들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이들은 불교의 최고 경전으로 화엄경이나 법화경 같은 경전을 꼽기도 합니다만 이런 경들도 알고 보면 공사상을 밝힌 금강경과 같은 경전에 기초에서 설해지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불교 역사에 있어 수행자들에게 금강경처럼 널리 존숭되고 영향을 끼친 경전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리석고 박복한 사람들에게는 무량한 공덕을 이루게 하는 복밭이 되어 주기도 했고, 길을 잃고 헤매는 수많은 이들에게는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어 주었습니다. 여기에 맞춰 저희 유마선원에서도 항상 금강경을 의지하고 봉행 공양하는 방법으로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전통적으로 이 금강경을 가지고 수행했던 방법은 거의가 처음부터 끝까지 경전을 수지독송하는 식의 방법이었습니다.

 자주자주 반복해서 읽으므로 말미암아 큰 지혜와 공덕에 성취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는 경전에서 부처님이 금강경을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 주면 그 공덕이 한량이 없다고 한 데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에는 반드시 부처님의 마음과 그 마음을 볼 수 있는 방법이, 때로는 드러나게 때로는 비밀되게 설해져 있습니다. 이것을 선지(禪旨)라고 하는데, 선지란 마음 닦는 법을 가리킨다는 뜻으로 곧 관법 선정의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럼 이제 금강경에서 말하려는 관법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금강경을 읽다 보면사구게(四句偈)라는 것이 나옵니다. 다른 경들도 마찬가지지만 사구게란 경전의 전체적인 내용을 간략하게

 시구(時句)형식으로 설한 네 구절로 된 말씀입니다. 이사구게는 경전의 핵심이며 요체며 진수이므로 경전 전체의 뜻이 모두 들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는 경이고 사구게를 완전히 이해하고 터득할 것 같으면 경전 전체를 이해하고 터득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깨달음까지도 완성시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부처님께서는 경전 전체도 전체지만 사구게를 수지 독송하고 남들을 위해 설해 줄 것을 매우 강조하셨습니다. 특히 금강경에서는 아주 여러 번에 걸쳐서 사구게를 수지하고 전파할 것을 권고하고 계신 것을 알 수있습니다. 이는 금강경에 있어서 사구게 수지독송만으로도 얼마든지 불법의 교리를 깨닫고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려 주신 것이라 보여집니다.

 유마선원에서는 바로 이 금강경 사구게에 의해서 경전적 근거와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매우 새롭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금강경공관법이란 '금강경 사구게를 통해서 일체법이 공한 도리를 깨닫게 하는 선정수행법'이라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려드리고 싶은 것은, 본 수행법은 이 말을 하고 있는 적연 법사 자신이 금강경을 평생 신봉하고 연구하면서 스스로 발견한 하나의 진실이며 방편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금강경을 읽다 보면 몇 개의 사구게가 설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구게로는 금강경 제5,

여리실견(如理實見)분에 나오는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를 꼽습니다.

 옛 어른들은 이 사구게를 실상 사구게, 반야 사구게라고 하여 늘 기억하고 암송하고 하였는데 이는 이 사구게가 인생과 세계의 참모습을

밝혀 주고 지혜를 깨닫게 하는 뜻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관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우선 이 게송에 대한 이해가 철저히 이루어져햐

합니다.

 먼저 첫 구절 ' 범소유상(凡所有相)을 봅시다. 이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여기서 상(相)이라는 말은 좁은 의미로는 모습이라고 해석하지만 이보다는 매우 넓은 의미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눈,귀,혀, 몸, 마음 뿐만아니라 보이고 들리고 냄새, 맛, 감촉이 느껴지고 본별되는 모든 것들, 그리고 나다 너다 ,옳다 그르다, 높다 낮다, 과거다 미래다, 성스럽다 속되다 하는 등의 온갖 가치들

 뿐만 아니라 삶이다 죽음이다, 천국이다 지옥이다, 부처다 중생이다 하는 등 중생들이 그릴 수 있는 개념들을 통칭합니다. 여기에 예외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삼라만상의 유형무형이 모두 상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범소유상 '을 두번째 구절에서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헛되고 거짓되어 진실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곧 모든 것은 그 무엇이 되었건 존재하는 것같지만 환상이고 꿈이고 그림자라는 것입니다.눈에 보이는 세계와 역시 그 세계를 보고 있는 몸뚱이와 마음이 몽땅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허상이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갖가지 인연을 통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몸도 마음도 본래 있었던 게 아니고 헤아리기 어려운 많은 조건들이 인연으로 결합함으로써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믿건 믿지 않건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엄연한 법칙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연으로 나타난 모든 법은 무상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세상에 천만년 영원히 존재하는 것들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역시도 하나의소멸과정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소멸하고 있는 존재는 이미 존재가 이닙니다. 있다 해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있다면 그것은 단지 허상으로 있는 체할 뿐인데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으로 속고 있을 뿐입니다. 금강경에서는 바로 이와 같이 중생들이 속고 있는 어리속은 착각과 무지를 사상(四相)

이라고 말하고, 이사상을 제거하여 일체의 상들이 모두 공한 존재임을 깨달으라고 하셨습니다. 사상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있다'는데서 일으키는 네 가지 착각 현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나는 실재한다는 착각(我相),상대와 세계가 실재한다는 착각(人相)

모든 생명이 실재한다는 착각(衆生相),삶과 죽음이 실재한다는 착각(壽者相)으로, 이게 모두 '개시허망임'을 깨닫치 못한데서 일으키는

잘못된 생각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이러한 미망(迷妄)에 대해서 세번째 게송으로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할 것을 설파하셨습니다.

 약견세상비상이란 "만약에 모든 상들을 접하더라도 그 상들이 진실한 상이 아니라고 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고 있는 한은 온갖 존재와 만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고, 더불어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 해도 눈을 뜨고 있는 한 보게 되고, 귀가 있는 한 듣게 되고 , 마음이 있는한 분별하게 됩니다.상과 자기 육신과자기 마음 역시도 상일진대는 우리들에게 있어 상(相)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동반자입니다. 그렇다면 수행자는 모든 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온갖 모습들을 접하고 느끼는 데 있어서 어떠한 시각과 안목을 가지고 대처해야 하는가는 큰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모든 상(相)을 상이 아니라고  보라 " 고 하셨습니다.

 이는 온갖 존재들을 접하되 실재한다고 보지 말고 헛되고 망영된 것으로 보라는 뜻으로 일체에 대해 공관(空觀)을  닦을 것을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견(見)이라는 말이 관(觀)이라는 말을 뜻하고 있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상(非相)은 허망상(虛妄相)

 이요 공상(空相)이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공관을 닦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한 가지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공관이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에 빠지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의구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염려하시고 금강경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에서 "깨닫고자 마음을 일으킨 이는 모든 것이 다 끊어져 없어진 것을 진리라고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법을 허망하다고 관찰하는 공관(空觀)의 진정한 목적은 세상을 저버리고 회피하고 등한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강조하고 싶은 말은 공관의 목적은 절대 허망한 마음을 얻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에 있어서는 오히려 허망한 현실을 바로 보고 바로 깨달아 허망치 않고 거짓되지 않은 부처의 실상법계(實相法界)에 들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진실이란 무엇이겠습니까.

허상을 허상이라고 바로 안 그 마음이 진실입니다.

우리가 공관을 닦으려고 하는 것은 허망을 허망이라고 바르게 보고 깨달아 허망에 빠지지 않고 속지 않게 되기 위해서입니다.

 불교를 잘못 수행하는 사람들  중에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공(空)이나 허망(虛妄)을 잘못 이해하여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허무공(虛無空)에 빠지거나, 육체도 마음도 세상도 다 사라진다는 단멸공(斷滅空)에 빠지거나, 아무 생각도 없이 멍청한 무기공(無記空)에 빠지는 이들이 있습니다.공하다고 하고 허망하다고 하니까 공하다는 상(相) 하나를 붙이고 허망하다는 상 하나를 붙혀서 공관 수행을 그르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상을 상이 아니게 관찰하게 되면 필경에는 게송의 마지막 귀절인"즉견여래(卽見如來)를 할

수 있는 계기가 옵니다. '즉견여래'란 곧바로 부처님을 본다는 뜻입니다. 여래는 누구인가.그는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려는

여래는 대상화되고 형상화된 모습으로의 여래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일체를 공하다고 관찰한 수행자의 마음에 나타난 참된

 지혜 그 자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래야말로 허망을 깨달은 자신의 마음에서 나타난 진실과 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무형 부처로 꽉 차있습니다. 이세계가 곧 정토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이자리야말로 치우침이 없는 중도(中道)며 온갖 굴레를 벗어난 해탈이며 진리의 세계인 법계(法界)입니다.
 무지와 집착으로 모든 것이 있다고 여길 때는 나고 죽는 온갖 고통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을 헛되고 망녕된 것으로

관찰하여 여래가 나타난 지혜의 마음으로 보면 '생사우비고뇌'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한 바탕이며 한량없는 공덕과 자비로 충만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공관법을 말함에 있어 수행하는 모든 이들을 향해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은 "어떤 수행이라할지라도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임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출처 : 공관실 * 모든 현상이 공(= 연기= 무아)이라고 알아차림
글쓴이 : 방글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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