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般若) / 여해스님
사전적 정의는 모든 사물의 본래의 양상을 이해하고 불법(佛法)의 진실한 모습을
파악하는 지성(知性)의 작용 또는 최고의 진리를 인식하는 지혜로
여실지(如實智)이다 라고 설명하는데 읽어도 반야가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반야는 경전마다 논서마다 동의어로 사용되는 말이 많아서 참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입니다.
아래에 나열한 몇 줄은 글자는 다르지만 반야와 같은 용어들입니다
정확히 식별하여 판단함, 판단력, 식별력 등과 같이 표현되기도 하고,
팔정도 가운데 정견과 정사유로 말하기도 하며
지(智), 견(見), 명(明), 각(覺), 해(解), 혜(慧), 광(光), 관(觀)이라고도 부릅니다
무루혜 또는 무루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라 부르고, 무분별지(無分別智),
여실지, 마하반야, 대반야, 대지(大智)라고도 하며, 대원경지(大圓鏡智)
또는 구경각(究竟覺)이라고도 합니다
반야에 대한 동의어가 넘치다보니 반야를 이해하기가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금강경에 의거해서 반야를 풀이하면
반야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곧 보리(깨달음 또는 깨달음의 지혜)입니다.
반야 즉 보리는 아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드러나는 지혜입니다.
그러니 반야를 알려고 하지 말고 나한테 있는 뿌리 깊은 아상을 없애는 방법에
관심두는 것이 올바른 공부입니다
반야(보리)는 보통 대승불교에선 지혜, 자비, 원력이란 세 가지 요소가
두루 원만한 것을 말합니다
반야는
일체 중생에 대해 차별함이 없는 평등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나다 너다 라고 차별하는 마음은 광대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좁고 편협한 마음이 작동합니다.
이런 좁은 마음이 작동할 때 알아차리고 평등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반야(보리)입니다
반야는
세간의 오욕칠정이나 길흉화복을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해탈 열반만을 지향합니다.
무엇이 괴로움이고, 왜 괴로움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찰한 후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모색합니다.
잘 되기를 원하고 잘 살기를 원하는 것이야 대다수 사람들의 소원입니다.
설령 그 소원이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아서 궁극에는 허망하다는 것을 알기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가장 으뜸가는 복덕인 해탈열반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가겠다는
원력을 잃지 않는 마음을 반야라고 합니다
반야는
자기만 이로운 것이 아니라 다른 이도 이로운 길을 가겠다는 마음입니다.
이로운 것 가운데 최고의 이로움은 재벌이나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붓다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다른 사람도 붓다가 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되, 한두번 해보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하겠다는 마음이 반야입니다
반야는
어둠이 없는 밝은 마음입니다. 탐진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지혜로운 마음입니다.
탐욕이 일어나면 그것을 알고서 내려놓습니다.
성냄이 일어나면 그것을 알고서 내려놓습니다.
사견이 일어나면 그것을 알고서 내려놓습니다.
탐진치가 일어났는데, 그것을 알고서도 계속 탐진치에 끌려가는 이유는
마음이 해탈열반보다는 여전히 이쪽 세상에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반야는
아상이 있기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상은 자신을 보기보다는 바깥을 보게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누구 때문이다 라는 생각의 골자는 '누구'에 있지 않고 '나'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깥에 가 있기에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에 아상에 걸린 것조차 모르는 것이 범부중생입니다
반야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에게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존심은 에고이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능한 방법은 모두 사용합니다.
사실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이치를 전혀 믿지 않기에 오히려 나를 내세우는 것으로
나를 보호하려 합니다.
이치를 알면 보호할 것이 없으니 상처도 없고, 상처가 없으니 원망도 없고,
원망이 없으니 분노도 없고, 분노가 없으니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누가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고 불편하게 하는가. 나 자신입니다.
아상입니다. 바깥에 있는 무엇 또는 누군가가 아닙니다.
깨달음이라고 할만한 일정한 법이 없듯이 나라고 할만한 일정한 것이 없건만,
이런 이치에 어두우니 반야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상만 사라지면 그 자리가 반야입니다.
금강경에서 이런 것을 아상이라고 합니다
반야는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저 사람은 이상하다,
나는 사람으로 할 도리를 다하는데 저 사람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나의 상처는 모두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하는 저 사람 때문이다 라고
시시비비와 분별이 일어나는 마음에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꾸짖고 비난하고 분노하고 질책으로 돌고도는 분별심을 내려놓는 자리에
반야가 저절로 드러납니다. 금강경은 이것을 아상 가운데 하나인 인상이라고 규정합니다
반야는
몸 바깥에 있는 사람과 환경과 그리고 소유물에 대한 허망한 생각을 멈추지 않을 때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신도 공하고 바깥도 공한 줄 아는 자리에 반야가 드러납니다.
인연화합에 의해 생겼다가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무상하기에
무아임을 아는 마음이 반야입니다.
금강경은 이것을 아상 가운데 하나인 중생상이라고 부릅니다
반야는
나는 일정한 수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리에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수명 역시 무상하여 정해진 것이 없음을 알고서 지금 할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않고
매순간 해 나가는 자리에서 반야가 드러납니다.
과거에 살지 않고 미래에 살지 않으며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할 때
반야가 작동합니다. 금강경은 이것을 아상 가운데 하나인 수자상이라고 합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 네 가지 상이 결국 아상 하나를 나누어 설명한 것입니다
결국 반야는 지혜이며, 지혜는 보리입니다.
반야는 아상이 소멸된 지혜로운 마음이며,
그 지혜로운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부릅니다.
처음 보리심을 낸 보살이 곧 반야보살이니,
반야는 구하고 바라는 마음없이 베푸는 무주상보시를 통해 조금씩 조금씩 드러납니다.
조금씩 조금씩 아상이 사라지는 만큼....
http://blog.daum.net/mirinae19/17205885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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