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가귀감(禪家龜鑑)
有一物於此하니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 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佛祖出世가 無風起浪이로다.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오심은 마치 바람도 없는데 물결을 일으킨 것이다.
然이나 法有多義하고 人有多機하니 不妨施設이로다.
그러나 법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도 온갖 기틀 이 있으므로 여러 가지 방편을 벌이지 않을 수 없다.
强立種種名字하야 惑心惑佛惑衆生이라 하니 不可守名而生解하고 當體便是니 動念卽乖니라.
굳이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서 마음이다, 부처다, 중생이라 하였으나
이름에 얽매어 분별을 낼 것이 아니다. 다 그대로 옳다. 그러나 한 생각이라도 움직이면 곧 어그러진다.
世尊이 三處傳心者는 爲禪旨요 一代所說者는 爲敎門이라 故로 曰 禪是佛心이요 敎是佛語니라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가 되고,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是故로 若人이 失之於口則拈花微笑가 皆是敎迹이요
得之於心則世間序言細語가 皆是敎外別傳禪旨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방긋 웃는 것이 모두 교의 자취만 될 것이고,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지가 될 것이다.
吾有一言하니 絶慮忘緣하고 兀然無事坐하니 春來草自靑이로다.
내가 한 마디 말을 할까 한다.
생각 끊고 반연을 쉬고 일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으니 봄이 오매 풀이 저절로 푸르구나.
敎門은 惟傳一心法하고 禪門은 惟傳見性法하니라.
교문에는 오직 한 마음 법만을 전하고 선문에는 오직 견성 하는 법만을 전하였다.
然이나 諸佛說經은 先分別諸法하고 後說畢竟空하되
祖師示句는 迹絶於意地하고 理顯於心源이니라.
그러나 모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에는 먼저 모든 법을 가려 보이시고, 나중에 空한 이치를 말씀하셨다.
조사들의 가르침은 자취가 생각에서 끊어지고 이치가 마음의 근원에 드러났다.
諸佛은 說弓하고 祖師는 說絃하시니 佛說無碍之法은 方歸一味라
拂此一味之迹하야사 方現祖師所示一心이니
故로 云庭前柏樹子話는 龍藏所未有底라 하니라.
부처님은 활같이 말씀하시고 조사들은 활줄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걸림 없는 법을 설하신 것은 바로 한 맛에 들어감이다.
이 한 맛의 자취마저 떨쳐 버려야 바야흐로 조사 가 보인 한 마음이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뜰 앞에 잣나무 이니라'고 한 화두는 용궁의 장경에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故로 學者는 先以如實言敎로 委辨不變隨緣二義가 是自心之性相이며
頓悟漸修兩門이 是自行之始終然後에 放下敎義하고 但將自心現前一念하야
參詳禪旨則必有所得하리니 所謂出身活路니라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으로써 변하지 않는 것과
인연 따르는 두 가지 뜻이 곧 네 마음의 본 바탕과 형상이고, 단박 깨치고 오래 닦는 두 가지 문이 공부의 시작과 끝임을 자세히 가려 알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 교의 뜻을 내버리고 오로지 그 마음이 뚜렷이 드러난 한 생각으로 써 참선한다면 반드시 얻은 바가 있을 것이다.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요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활구를 참구할 것이요,사구를 참구하지 말아야 한다.
凡本參公案上에 切心做工夫하되 如鷄抱卵하며 如猫捕鼠하며
如飢思食하며 如渴思水하며 如兒憶母하면 必有透徹之期하라.
무릇 공안을 참구하되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기를 마치 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것과 같이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하고, 주린 사람이 밥 생각하듯 하며, 목마른 사람 이 물을 생각하듯 하며, 어린애가 엄마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꿰뚫어 사무칠 때가 있을 것이다.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라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廢器하니라.
참선에는 반드시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큰 신심이고, 둘째는 큰 분심이며, 셋째는 큰 의심이다.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이 소용없는 물 건이 되고 말 것이다.
日用應緣處에 只擧狗子無佛性話하되 擧來擧去하며 疑來疑去에
覺得沒理路 沒義路 沒滋味하야心頭熱悶時가 便是當人放身命處며 亦是成佛作祖底基本也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도 오직 "어찌하여 개한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라고 한 화두를 끊임없이 들어,이 치의 길 끊어지고 뜻 길이 사라져 아무 맛도 없어지고 마음이 답답할 때가 바로 그 사람의 몸과 목숨을 내던질 곳이며, 또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될 대목이다.
話頭를 不得擧起處에 承當하며 不得思量卜度하며 又不得將迷待悟하며 就不可思量處하야 思量하면
화두를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아맞히려 하지도 말고, 생각으로 헤아리지도 말라.
또한 깨닫기를 기다리지도 말고 더 생각할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 생각하면
心無所之함이 如老鼠入牛角하야 便見倒斷也하리라 又尋常에 計較安排底도 是識情이며
마음이 더 갈 곳이 없어 마치 늙은 쥐가 쇠뿔 속으로 들어가다가 잡히듯 할 것 이다.
또 평소이런가 저런가 따지고 맞춰 보는 것이 식정이며
隨生死遷流底도 是識情이며 怖惶底도 是識情이어늘
今人이 不知是病하고 只管在裡許하야 頭出頭沒하나니라
생사를 따라 굴러다니는 것이 식정이며, 무서워 하고 갈팡 질팡하는 것도 또한 식정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 병통을 알지 못하고, 다만 이 속에서 빠졌다 솟았다 할뿐이다.
# 의식으로 뭘 하려고 하면 안되지요. 화두를 드는 놈을 봐야...
此事는 如蚊子가 上鐵牛하야 更不問如何若何하고 下嘴不得處에 棄命一簒 하면 和身透入이니라.
이 일은 마치 모기가 무쇠로 된 소에게 덤벼드는 것과 같아서,
함부로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떼어놓고 한 번 뚫어 보면 몸뚱이 째 들어갈 것이다.
工夫는 如調絃之法하야 緊緩에 得其中이니 勤則近執着하고 忘則落無明하리니 惺惺歷歷하고 密密綿綿이니라.
공부는 거문고 줄을 고르듯 팽팽하고 늦음이 알맞아야 한다.
너무 애쓰면 집착하기 쉽고 잊어버리면 無明에 떨어지게 된다.
성성하고 역력하게 하면서도 차근차근 끊임없이 해야 한다.
# 너무 애쓰면 도거에 빠지고, 너무 느슨하면 혼침에 빠집니다.
工夫가 到行不知行하며 坐不知坐하면 當此之時하야
八萬四千魔軍이 在六根門頭伺候라가 隨心生起하나니 心若不起하면 爭如之何리요.
공부가 걸어가면서도 걷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는 줄 모르게 되면,
이 때 팔만 사천의 마군이가 六根 문 앞에 지키고 있다가 마음을 따라 온갖 생각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무슨 상관이 있으랴.
起心은 是天魔요 不起心은 是陰魔요 或起或不起는 時煩惱魔?
然이나 我正法中엔 本無如是事니라
일어나는 마음은 천마요 일어나지 않는 마음은 음마요,
혹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도 않기도 하는 것은 번뇌마이다.
그러나 우리 바른 법 가운데에는 본래 그런 일이 없다.
工夫가 若打成一片則縱今生에 透不得이라도/ 眼光落地之時에 不爲惡業所牽이니라.
공부가 한 고비를 넘긴다면 비록 금생에 깨치지 못하더라도
마지막 눈감을 때에 악업에 끌리지는 않을 것이다.
大抵參禪者는 還知四恩이 深厚摩아 還知四大醜身이 念念衰朽摩아 還知人命이 在呼吸摩아
대저 참선하는 이는 이렇게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네 가지 은혜가 깊고 두터운 것을 알고 있는가? 네 가지 요소로 구성 된 더러운 몸이 순간 순간 썩어 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람의 목숨이 숨 한번에 달린 것을 알고 있는가?
生來値遇佛祖?아 及聞無上法하고 生希有心?아 不離僧堂하여 守節?아
不與隣單으로 雜話?아 切忌鼓扇是非?아
일찍 이 부처님이나 조사 같은 이를 만나고서도 그대로 그대로 지나쳐 버리지 않았는가? 높고 거룩한 법을 듣고서도 기쁘고 다행한 생각을 잠시라도 잊어버리지 않았는가? 공부하는 곳을 떠나지 않고 수도인 다운 절개를 지키고 있는가? 곁에 있 는 사람들과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며 지내지 않는가? 분주하게 시비나 일삼고 있지 않는가?
話頭가 十二時中에 明明不昧?아 對人接話時에 無間斷?아
見聞覺知時에 打成一片?아 返觀自己하야 捉敗佛祖?아
화두가 어느 때나 또렷또렷 하게 매하지 않는가?
남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도 화두가 끊임없이 되는가?
보고 듣고 알아차릴 때에도 한결같은가?
제 공부를 돌아볼 때 부처와 조사를 붙잡을 만한가?
今生에 決定續佛慧命?아 起坐便宜時에 還思地獄苦?아
此一報身이 定脫輪廻?아 當八風境하야 心不動?아
금생에 꼭 부처님의 지혜를 이룰 수 있을까?
앉고 눕고 편할 때에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
이 육신으로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가?
여덟 가지 바람이 불어올 때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가?
此是參禪人의 日用中點檢底道理니 古人云 此身不向今生度하면 更待何生度此身이리요 하니라.
이것이 참선하는 이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때때로 점검해야 할 도리이다.
옛 어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내 몸을 이생에 못 건지면 어느 생을 기다려서 濟度하리요"
學語之輩는 說時似悟나 對境還迷하나니 所謂言行이 相違者也라
말을 배우는 무리들은 말할 때에는 깨친 듯하다가도
실지 경계에 당하게 되면 그만 아득하게 된다.
이른바 말과 행동이 서로 틀리는 것이다.
若欲敵生死인댄 須得這一念子를 爆地一破하야사 方了得生死하리라.
만약 생사를 막아내려면 이 한 생각을 탁 깨뜨려야 비로소 생사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然이나 一念子를 爆地一破然後에도 須訪明師하야 決擇正眼이니라.
그러나 한 생각을 깨친 뒤에라도 반드시 밝은 스승을 찾아가 눈알이 바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古德이 云 只貴子眼正이요 不貴汝行履處라 하니라.
옛 어른이 말씀하시기를 "다만 자네의 눈 바른 것을 귀하게 여길 뿐이지 자네의 행실을 보려고 하지 않네"라고 하였다.
願諸道者는 深信自心하야 不自屈不自高니라.
바라건대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을 깊이 믿어, 스스로 굽히지도 말고 높이지도 말아야 한다.
迷心修道하면 但助無明이니라.
마음을 모르고 도를 닦는다는 것은 오직 무명만을 도와줄 뿐이다.
修行之要는 但盡凡情이요 別無聖解니라.
수행의 요결은 다만 범부의 생각을 떨어지게 할뿐이지 따로 성인의 알음알이가 없는 것이다.
不用捨衆生心이요 但莫染汚自性하라 求正法이 是邪니라.
중생의 마음을 버릴 것 없이, 다만 자성을 더럽히지 말라.
바른 법을 찾는 것이 곧 바르지 못한 邪道니라.
斷煩惱가 名二乘이요 煩惱不生이 名大涅槃이니라.
번뇌를 끊는 것은 이승이요,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큰 열반이다.
虛懷自照하야 信一念緣起無生이어다.
모름지기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 비춰 보아,
한 생각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이 사실은 일어남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
諦觀殺盜淫妄이 從一心上起하면 當處便寂이니 何須更斷이리요
죽이고 도둑질하고 음난 하고 거짓말 하는 것이다.
한 마음 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 일어나는 곳이 곧 비어있는데 무엇을 다시 끊으리요.
知幻卽離라 不作方便이며 離幻卽覺이라 亦無漸次니라.
환상인 줄 알면 곧 여읜 것이라 더 방편을 지을 것이 없고,
환상을 여의면 곧 깨친 것이라 또한 닦아 갈 것도 없다.
衆生이 於無生中에 妄見生死涅槃이 如見空花起滅이니라
중생이 나는 것 없는 가운데서 망령 되게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 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菩薩이 度衆生入滅度나 又實無衆生이 得滅度니라.
보살이 중생을 건져 열반을 들게 했다 할지라도 실은 열반을 얻은 중생이 없는 것이다.
理雖頓悟나 事非頓除라.
이치를 단박에 깨칠 수 있으나, 버릇은 한꺼번에 가시어지지 않는다.
帶狀修禪은 如蒸沙作飯이요 帶殺修禪은 如塞耳叫聲이요 帶偸修禪은 如漏 求滿이요帶妄修禪은 如刻糞爲香이니 縱有多智라도 皆成魔道니라
음란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 같고,
살생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제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으며,
도둑질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새는 그릇에 가득 차 기를 바라는 것 같고,
거짓말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똥으로 향 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이런 것들은 비록 많은 지혜가 있더라도 다 악의 길을 이룰 뿐이다.
無德之人은 不依佛戒하며 不護三業하며 放逸懶怠 하야 輕慢他人하며 較量是非로 而爲根本하니라.
덕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의 계율에 의지하지 않고, 삼업을 지키지 않는다.
함부로 놀아 게을리 지내며, 남을 깔보아 따지고 시비하는 것을 일삼고 있다.
若不持戒면 尙不得疥癩野干之身이온대 況淸淨菩提果를 可冀乎아
만약 계행이 없으면 비루먹은 여우의 몸도 받지 못한다는데,
하물며 청정한 지혜의 열매를 바랄 수 있겠는가?
欲脫生死인댄 先斷貪欲과 及除愛渴이어다.
생사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을 끊고 애욕의 불꽃을 꺼버려야 한다.
無碍淸淨慧가 皆因禪定生이니라.
걸림 없는 청정한 지혜는 다 禪定에서 나온다.
心이 在定則能知世間生滅諸相하니라.
마음이 정에 들면 세간의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든 일 을 다 밝게 알 수 있다.
見境心不起가 名不生이요 不生이 名無念이요 無念이 名解脫이니라.
어떤 경계를 당하여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나지 않음이라 하고,
나지 않는 것을 무념이라 하며 무념의 상태를 해탈이라 한다.
修道證滅이 是亦非眞也요 心法本寂이 乃眞滅也라
故로 曰 諸法從本來로 常自寂滅相이라 하니라.
도를 닦아 열반을 얻는다면 이것은 또한 진리가 아니다.
心法이 본래 고요한 것임을 알아야 그것이 참 열반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본래부터 늘 그대로 열반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貧人이 求乞이어든 隨分施與하라 同體大悲가 是眞布施니라.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수대로 나누어 주라. 한 몸 처럼 가엾이 여기면 이것이 참 보시니라.
有人이 來害어든 當自攝心하야 勿生瞋恨하라 一念瞋心起하면 百萬障門開니라.
누가 와서 나를 해롭게 하더라도 마음을 거두어 성내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한 생각 성내는데에 백만 가지 장애의 문이 열린다.
若無忍行하면 萬行不成이니라.
만약 참는 일이 없다면 보살의 六道萬行도 이루어질 수 없다.
守本眞心이 第一精進이니라.
본바탕 천진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첫째가는 정진이다.
持呪者는 現業은 易制라 自行可違어니와 宿業은 難除라 必借神力이니라.
진언을 외우는 것은 금생에 지은 업은 비교적 다스리기 쉬워서 자기 힘으로도 고칠 수가 있지만
전생에 지은 업은 지 워 버리기가 어려우므로 반드시 신비한 힘을 빌려야 하는 것이다.
禮拜者는 敬也요 伏也니 恭敬眞性하고 屈伏無明이니라
예배란 공경이요 굴복이다.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念佛者는 在口曰誦이요 在心曰念이니 徒誦失念하면 於道無益이니라.
염불이란 입으로 하면 송불이요, 마음으로 하면 염불이다.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 아무 도움도 없다.
聽經은 有經耳之緣과 隨喜之福하며 幻軀는 有盡이나 實行은 不亡이니라.
경을 들으면 귀를 거치는 인연도 있게 되고, 기쁨이 따른 복도 짓게 된다.
물거품 같은 이 몸은 다할 날이 있으나 참다운 행은 헛되지 않는다.
看經은 若不向自己上做工夫하면 雖看盡萬藏이라도 猶無益也니라.
경을 보되 자기 마음속을 돌이켜 봄이 없다면 비록 팔만대장경을 다 보았다 하더라도
아무런 보탬이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學未至於道하고 衒耀見聞하야 徒以口舌辯利로 相勝者인댄 如厠屋塗丹攫 이니라.
배워 도를 이루기 전에 남에게 자랑하려고 한갓 말재주만 부려 서로 이기려고 한다면
마치 변소에 단청하는 것과 같다.
出家人이 習外典하면 如以刀割泥하야 泥無所用이요 而刀自傷焉이니라.
출가한 사람이 외전을 공부하는 것은 마치 칼로 흙을 베는 것과 같아서
흙은 아무 소용도 없는데 칼만 망가지게 된다.
出家爲僧이 豈細事乎아 非求安逸也며 非求溫飽也며非求名利也라 爲生死也며
爲斷煩惱也며 爲續佛慧命也며 爲出三界度衆生也니라.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몸의 편안함 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 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 을 면하려는 것이며,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 뛰어나서 중생을 건지려는 것 이다.
佛云, 無常之火가 燒諸世間이라 하고 又云, 衆生苦火가 四面俱焚이라 하며 又云 諸煩惱賊이 常伺殺人이라 하니라 道人은 宜自警悟하야 如救頭燃하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덧없는 불꽃이 온 세상을 태운다" 하셨고,
또 "중생들의 고뇌의 불이 사방에서 함께 불타고 있다" 하셨으며,
또 "모든 번뇌의 적이 항상 너희들을 죽이려 고 엿보고 있다" 하셨다.
그러므로 수도인은 마땅히 스스로 깨우쳐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해야 한다.
貪世浮名은 枉功勞形이요 營求世利는 業火加薪이니라
세상의 뜬 이름을 탐하는 것은 쓸데없이 몸만 괴롭게 하는 것이요,
세상의 잇속을 따라 허덕이는 것은 업의 불에 섶을 더 보태는 것이다.
名利衲子는 不如草衣野人이니라.
이름과 재물을 따르는 납자는 초의를 걸친 야인만도 못하다.
佛云하사대 云何賊人이 假我衣服하고 稗販如來하야 造種種業고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도둑들이 나의 옷을 빌려 입고,
부처를 팔아 온갖 나쁜 업을 짓고 있느냐"고 하셨다.
於戱라 佛子여 一衣一食이 莫非農夫之血이요 織女之苦어늘 道眼이 未明하면 如何消得이리요.
아! 불자여. 그대의 한 벌 옷과, 한 그릇 밥이 농부들의 피요, 직녀들의 땀이거늘,
도의 눈이 밝지 못하다면 어떻게 삭여 낼 것인가.
故로 曰 要識披毛戴角底?아 卽今虛受信施者是니라 有人은 未飢而食하고 未寒而衣하니 是誠何心哉아 都不思目前之樂이 便是身後之苦也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그것은 지금 신도들이 주는 것을 공부하지 않으면서 거저 받아먹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배고프지 않아도 또 먹고, 춥지 않아도 더 입으니 이 무슨 심사일까? 도대체 눈앞의 쾌락의 바로 후생이 괴로움인 줄을 생각지 않는구나.
故로 曰 寧以熱鐵로 纏身이언정 不受信心人衣하며 寧以洋銅灌口언정
不受信心人食하며 寧鐵投以身이언정 不受信心人房舍等이라 하니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차라리 뜨거운 철판을 몸에 두를지언정 신심 있는 이가 주는 옷을 입지 말며, 차라리 쇳물을 마실지언정 신심 있는 이가 주는 음식을 억지 말고, 차라리 끊는 가마솥에 뛰어들지언정 신심 있는 이가 주는 집에 거처하지 말라"한 것이다.
故로 曰 道人은 進食을 如進毒하고 受施를 如受箭이니 幣厚言甘은 道人所畏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도를 닦는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에 독약을 먹는 것같이 하고, 시주를 받을 때에는 화살을 받는 것과 같이하라"고 한 것이다. 두터운 대접과 달콤한 말은 도를 닦는 사람으로서는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故로 曰 修道之人은 如一塊磨刀之石하야 張三也來磨하고 李四也來磨하야
磨來磨去에 別人刀는 快하되而自家石은 漸消라 然이나 有人은 更嫌他人이 不來我石上磨하나니 實爲可惜이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도를 닦는 사람은 한 개의 숫돌과 같아서 장 서방이 와서 갈고, 이 서방이 와서 갈아 가면 남의 칼은 잘 들겠지만 나의 돌은 점점 닳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도리어 남이 와서 돌에 칼을 갈지 않는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故로 古語에 亦有之하니 曰 三途苦가 未是苦라 袈裟下失人身이 始是苦也라 하니라.
그러므로 옛말에 또한 이르기를 "삼악도의 고통이 고통이 아니라,
가사를 입었다가 사람의 몸을 잃는 것이 참말 고통이다"라고 하였다.
乭哉라 此身이여 九孔常流하고 百千癰疽에 一片薄皮로다 又云 革囊盛糞하야 膿血之聚가 臭穢可鄙라無貪惜之는 何況百年將養이나 一息背恩이니라.
우습다, 이 몸이여.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나오고,
백천 가지 부스럼 덩어리를 한 조각 엷은 가죽으로 싸 놓았구나. 또 가죽 주머니에는 똥이 가득 담기고, 피고름 뭉치라. 냄새나고 더러워 조금도 탐나거나 아까울 것이 없다.더구나 백년을 잘 기른다 해도 숨 한 번에 은혜를 저버리고 마는 것이랴.
有罪卽懺悔하고 發業卽懺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 곧 참회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곧 부끄러워 할 줄 알면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다.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질 것이다.
道人은 宜應端心하야 以質直爲本하야 一瓢一衲으로 旅泊無累니라.
도인은 마땅히 마음을 단정히 하여 검소하고 곧은 마음으로 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
한 개의 표주박과 한 벌의 누더기 옷이면 어디를 가나 걸릴 것이 없다.
凡夫는 取境하고 道人은 取心이니 心境을 兩忘하면 乃是眞法이니라.
범부들은 눈앞의 현실에만 따르고, 수도인은 마음만 붙잡으려 한다.
그러나 마음과 바깥 현실 두 가지를 다 잊는다면 이것이 바로 참다운 법이다.
聲聞은 宴坐林中이나 被魔王捉하고 菩薩은 遊戱世間이나 外魔不覓이니라.
성문은 숲 속에 편히 앉아서도 마왕에 붙잡히고, 보살은 세간에 노닐어도 외도와 마군이 보지 못한다.
凡人이 臨命終時에 但觀五蘊皆空하야 四大無我요眞心無相하여 不去不來니 生時에도 性亦不生하고 死時에 性亦不去라 湛然圓寂하고 心境이 一如라 但能如是直下頓了하면 不爲三世所拘繫니 便是出世自由人也라 若見諸佛이 無心隨去하며 若見地獄이라도 無心怖畏니 但自無心하면 同於法界니 此卽是要節也라 然則平常은 是因이요 臨終은 是果니 道人은 須着眼看하라.
누구든지 임종할 때에는 다만 五蘊이 다 빈 것이어서 네 가지 원소가 나 라고 할 것이 없고, 참마음은 모양이 없어 가는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다. 날 때에도 성품은 또한 난 바가 없고, 죽을 때에도 성품은 또한 가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맑고 고요하여 마음과 경계가 둘이 아닌 하나인 것이다.다만 이와 같이 단박 깨친다면 삼세 인과에 이끌리거나 얽매이지 않게 될 것이니 이것이 곧 세상을 뛰어난 자유인이다.
만약 부처님을 만나더라도 따라 갈 마음이 없고, 지옥에 가더라도 두려운 마음이 없어야 한다. 다만 스스로 무심하게 되면 법계와 같이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요긴한 것이다. 그러므로 평상시에 좋은 씨를 심고 임종할 때에 좋은 열매를 거둘 것 이다. 도를 닦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 곳에 주의하여야 한다.
凡人이 臨終命時에 若一毫毛라도 凡聖情量이 不盡하고 思慮를 未忘하면
向驢胎馬腹裡하야 托質하며泥犁碻湯中에 煮雜 하며 乃至依前再爲瘻蟻蚊猛 이니라.
사람이 임종할 때에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성인이다 범부다 하는 생각이 끊어지지 않게 되면 나귀나 말의 뱃속에 끌려들거나 지옥의 끊는 가마 속에 처박히게 되며, 혹은 개미나 모기 같은 것이 되기도 할 것이다.
禪學者가 本地風光을 若未發明則孤超玄關을 擬從何透리요 往往斷滅空으로 以爲禪하며 無記空으로 以爲道하며 一切俱無로 以爲高見하나니 此는 冥然頑空이니 受病幽矣니라 今天下之言禪者가 多坐在此病이니라
참선하는 사람이 본래 면목을 만약 밝히지 못한다면 높고 아득한 진리의 문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왕왕 어떤 이는 아주 끊어 없어진 빈 것으로써 참선을 삼기도 하고,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이 빈 것으로써 도를 삼기도 하며일체 모두 없는 것으로써 높은 소견을 삼기도 하나니 이것은 컴컴하게 비기만 한 것이라 병든 바가 깊다. 지금 천하에 참선을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이런 병에 걸려 있다.
神光이 不昧하여 萬古徽猷로다 入此門來에 莫存知解어다.
거룩한 빛 어둡지 않아 만고에 환하여라. 이 문안에 들어 오려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선가귀감(禪家龜鑑) 원문 및 해석 - 서산대사 휴정 (西山大師 休靜)
'지혜의 공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다<以心傳心> (0) | 2018.09.09 |
---|---|
삶을 더불어 새롭고 창조적이며 아름답게 진심으로 (0) | 2018.09.02 |
[스크랩] 마치 파도 치는 물결과 같다 (0) | 2018.08.26 |
법을 외칠 만한 사람이 없구나 (0) | 2018.08.26 |
눈물이 핑 돕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부분이되어야 (0) | 2018.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