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외칠 만한 사람이 없구나
말세에 이 슬픈 현상을 깊이 슬퍼하도다. 불법을 외칠 만한 사람이 없구나.
아직은 글 읽을 줄도 모르면서 강석에 앉고 일찍이 행각도 못했는데 법상에 앉네.
돈을 들고 절을 하는 모습은 마치 미친 개와 같고 속은 텅 비었는데
마음만 높은 것은 벙어리 염소와 같다. 뒷사람들에게 엎드려 권하노니
이러한 풍속 이제 그만 두어 오랫동안 지옥 고통 받을 일 면하기를 바라노라.
深嗟末法實悲傷 佛法無人得主張
심차말법실비상 불법무인득주장
未解讀文先坐講 不曾行脚便陞堂
미해독문선좌강 부증행각편승당
將錢討院如狂狗 空腹高心似啞羊
장전토원여광구 공복고심사아양
奉勸後賢休繼此 免敎地獄苦時長
봉권후현휴계차 면교지옥고시장
- 영지(靈芝)
이 글은 영지원조(靈芝元照, 1048~1116) 율사가 진정한 주지 노릇에 힘쓰기[勉住持]를 바라면서 경계한 게송이다. 여기에서 주지란 요즘과 같은 의미의 주지가 아니다. 도덕에 안주[住]하여 교화하는 일을 잘 지켜나간다[持]는 뜻이다. 또 진실한 마음에 머물러서[住] 그것을 지켜 잃어버리지 않는다[持]는 뜻이다.
불교의 말세적 현상을 개탄하는 말씀이다. 우선 불법을 제대로 주장할 사람이 없다. 경전을 강의하려면 먼저 경문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런데 경문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면서 경을 강의하고 불교를 이야기 한다고들 한다. 보통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또 법상에 올라 법을 거량하려면 오랫동안 행각을 하면서 총림을 두루 섭렵해서, 견문을 넓히고 지식도 많이 쌓고 무엇보다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경험은 전혀 없는데도 법상에 올라 별의별 법을 다 설한다. 심지어 사찰에서 소를 키워 장에다 소를 갖다 판 이야기까지 하면서 법문이라고 주장자를 구른다. 신문이나 주간지에서 읽은 이야기나 늘어놓으면서 할을 한다.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주지라는 소임만 보고 있으면 도가 있고 법이 있는 줄을 알고 껌벅 넘어간다. 그래서 스님들은 거기에 편승해서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모두들 돈을 싸들고 주지 한자리 맡으려고 야단들이다. 박이 터지게 싸우다가 세속의 법정 싸움으로까지 간다. 그것도 안 되면 스스로 절을 지어서라도 주지 노릇을 한다. 그래야 직성이 풀린다. 영지 스님 당시에 이렇게 미친 개처럼 날뛰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글은 강원에서 치문을 배울 때 다 들은 말이다.
또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으면서 마음만 높아서 불교에 대해서 무엇을 물으면 그만 벙어리 염소가 된다. 먹기는 잘 먹는데 소리를 못 낸다는 뜻이다. 설법하지 못하는 스님을 아양승(啞羊僧)이라고 한다. 후현들에게 엎드려 권하노니 제발 이런 풍속일랑 계승하지 말라.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다가 도는 이루지 못할망정 지옥에 가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능엄경에도 말세 중생들이 나의 옷을 빌려 입고 여래를 팔아서 의식주에 보태 쓴다는 말이 있다. 모두들 도적들이라고 하였다.
학은 세 번 울며 날아가네
십 년을 단정히 앉아 마음의 성을 굳게 지키니 깊은 숲의 새는 길들여져
놀라지도 않는구나. 어젯밤 송담(松潭)에 비바람이 사납더니 고기는 연못
귀퉁이에 모여 있고 학은 세 번 울며 날아가네.
十年端坐擁心城 慣得深林鳥不驚
십년단좌옹심성 관득심림조불경
昨夜松潭風雨惡 魚生一角鶴三聲
작야송담풍우악 어생일각학삼성
- 청허휴정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 선사의 오도송이다. 한 때 우리나라 선원에서 그 해석하는 방법을 두고 시비가 분분했던 글이다. 선원에서는 객기에 불과한 법거량(法擧揚)이라도 있을 때가 좋다. 조실스님을 법상에서 끌어내리기도 하고, 설법을 하는 도중에 밑에 앉아서 할을 하기도 한다. 법문을 듣다가 문득 나가서 절을 하거나 주장자로 어떤 행위를 지어보이기도 하면서 대중들을 긴장시키기도 한다. 그런 일이 보고 싶은데 요즘은 기백이 없는지 객기가 사라졌는지 전혀 없다.
앞의 두 구절은 별로 어렵지 않다. 십년 동안 정진하여 마음이 생각대로 잘 조복되었다. 새가 놀라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그 뜻이다. 어젯밤 송담에서 비바람이 사나웠다는 말은 경천동지하는 깨달음의 순간을 표현하였다. 문제는 마지막 구절이다. 고기가 뿔이 하나 났다고 해석한다. 상당한 명성을 날리다가 열반하신 어떤 조실스님도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고기가 한 뿔따구 나고 학이 세 번 울고 가더라.”라고 깨달음에 기특상(奇特想)을 부쳐 해석하였다.
그러나 반대의 의견은 위에서 해석한 대로 ‘깨달음에는 기특상이 붙으면 제대로 된 깨달음이 아니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비가 온 뒤에는 고기들은 당연히 못의 한 모퉁이에 모여 있고 날이 개니 학이 세 번 울고 간다고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깨달음은 평범한 것이며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무튼 서산 스님의 이 게송을 두고 선방에서 왈가왈부하던 그 시절이 좋았다.
누가 이 몸의 주인인가
명리도 구하지 아니하고 영화도 구하지 아니하며 다만 인연을 따라
한 생을 살아갈 뿐이다. 심장의 기운이 사라지면 누가 이 몸의 주인인가.
백년 세월 이후에는 부질없는 헛된 이름뿐일세. 옷이 떨어지면 겹겹이
꿰매 입고 식량이 떨어지면 가끔씩 구해온다. 일개의 허깨비 같은 몸
며칠이나 가겠는가. 쓸데없는 일을 위해 무명만 키우도다.
不求名利不求榮 只麽隨緣度此生
불구명리불구영 지마수연도차생
三寸氣消誰是主 百年身後謾虛名
삼촌기소수시주 백년신후만허명
衣裳破處重重補 粮食無時旋旋營
의상파처중중보 양식무시선선영
一箇幻軀能幾日 爲他閒事長無明
일개환구능기일 위타한사장무명
- 동산양개(洞山良价)
이 글은 치문에 나오는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 화상이 스스로를 경계하는 자계(自誡)의 내용이다. 옛 수행자의 생활과 그 정신이 물씬 풍긴다.
처음 출가하여 어릴 때부터 이런 글을 배우다 보면 수행자의 인생관이 자연스럽게 바로 선다. 동산 화상은 5대 선종의 하나인 조동종(曹洞宗)의 개조(開祖)다. 그렇듯 뛰어난 인물로 일찍부터 그의 인생관이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세상 사람들이 다 목을 매고 좋아하는 명예와 이익과 영화를 좇지 않는다. 소중한 인생으로 태어나서 그와 같은 것을 위해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문제는 구하지 않아도 인연 따라 살면 된다. 만약 심장이 멈추면 누가 나의 주인인가. 아무리 화려하게 살았다 한들 백년 뒤에 모두가 헛된 이름일 뿐이다. 누가 나를 알아주겠는가. 설사 알아준들 무엇에 쓸 것인가.
그렇다면 옷은 겹겹이 기워 입으면 될 것이고 식량은 가끔 얻어오면 된다. 그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이 한 몸 며칠이나 버티겠는가. 아등바등 해봐야 결국은 의식주 문제 해결을 위해서다.
그 외에는 다 부질없는 일이다. 그 부질없는 일 때문에 번뇌 무명만 자꾸 키울 필요가 있겠는가. 헛된 이름과 호의호식을 위해서 업장만 불리는 일이다.
“삼일 간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고, 백년 동안 탐한 물질은 하루아침의 먼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언어 밖에서 찾다
아름다운 그 맵시,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그리지 못하리니
깊고 깊은 규방에서 애만 태운다. 자주 자주 소옥을 부르지만
소옥에겐 일이 없고 오직 님께 제 소리를 알리려는 뜻이라네.
一段風光畵不成 洞房深處說愁情
일단풍광화불성 동방심처설수정
頻呼小玉元無事 只要檀郞認得聲
빈호소옥원무사 지요단랑인득성
- 『소염시(小艶詩)』
이 시는 그 유명한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애첩 양귀비(楊貴妃)와 안록산(安祿山)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 밖에서 다른 뜻이 있다는 의미를 찾아 선가에서 매우 빈번하게 인용하여, 깊고 오묘한 선의(禪意)를 언어 밖에서 찾기를 권하는 말로 잘 활용하고 있다.
소염(小艶)이란 처음 피려 할 때의 산뜻하고 아름다운 꽃송이를 뜻하는데, 양귀비를 일컬어서 하는 말이다.
양귀비는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미인 중의 한 사람이다. 양귀비는 현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그러다가 안록산과 눈이 맞아 남몰래 자주 밀회를 하였다.
밀회를 할 때는 언제나 안록산을 부르는 신호로 자신의 몸종인 소옥(小玉)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안록산은 그 소리를 듣고 비밀통로의 문이 열려 있음을 알고 몰래 들어와서 만나곤 하였다.
이 시를 선의(禪意)로써 해석하면 “아름다운 그 맵시,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그리지 못하리니 깊고 깊은 규방에서 애만 태운다.”는 말은 선자(禪者)의 선경(禪境)을 의미한다. 그 도리를 그림으로도 그릴 수 없다.
설명도 되지 않는다. 마음으로 헤아릴 수도 없는 경지이다. 깨달은 이의 저 깊은 마음속에 있는 정경이다. 표현할 길이 없고 알릴 길이 없어 답답하고 한스럽다. 터뜨리고 싶어서 몸살이 나기도 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도 보고 몽둥이를 휘둘러도 본다.
임제 스님은 군인들의 막사에 재를 지내려고 갔다가, 보초를 서고 있는 졸병을 보고 법거량(法擧揚)을 한 적도 있다. 때로는 공양간에 가서 법을 거량하기도 하고, 지나가는 나그네를 보고 법을 거량하기도 한다. 누구든 말만 걸어오면 일상적인 이야기에도 법을 거량한다.
그러나 선자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그대로 따라가면 그것은 백발백중 어긋난다. 부처를 물었는데 ‘마른 똥 막대기’라고 하였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물었는데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였다. 또 개가 불성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없다’고 하였다. 불법의 대의를 물었는데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팬다.
이러한 선자들의 말이나 행위들은 그 뜻이 다른 데 있다. 마치 양귀비가 소옥을 부르는 것이 소옥에게 있지 않고 안록산에게 있는 것과 같다. 시에서 “자주 자주 소옥을 부르지만 소옥에겐 일이 없고 오직 님께 제 소리를 알리려는 뜻이라네.”라고 하였듯이.
수보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haha723/13357585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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