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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의 공간적․시간적 조망
동국대(경주) 불교학과 김성철
1. 윤회, 무엇이 문제인가?
2. 윤회는 어떻게 증명되는가?
3. 윤회는 어디서 어떻게 진행되는가?
1. 윤회, 무엇이 문제인가?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라는 유행가의 가사 중에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는, ‘닭살 돋게 하는 구절’이 있다. 또, 최근에는 기독교권인 미국의 할리우드에서도 환생과 윤회를 소재로 삼은 영화들이 양산되고 있다. 이런 유행가와 영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소속된 종교 교단의 가르침과 무관하게, 죽은 후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 필자가 잘 아는 기독교 신자인 어느 중년 여인은 남편에게 ‘다시 태어났을 때에도 자신을 아내로 삼겠느냐?’고 물었는데 남편이 가타부타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호소하며 분개한 적이 있다.
한 편 이와 반대로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열반’을 지향하며 신행생활을 해야 하는 불교신자임에도 윤회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얼마 전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한 몽고 스님은 한국불교와 몽고불교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몽고의 불교인들은 윤회를 믿는 반면, 한국에서는 많은 불교인들이 윤회를 믿지 않는다.’고 답한 적이 있다.
종교가 허울뿐인 것이긴 하지만, 불교신자 중에도 은연중에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고 사는 사람이 많이 있고, 기독교 신자 중에도 불교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이 있다.
만일 우리들 모두가 자신의 전생을 기억해 낼 수 있다면 윤회가 사실인지 아닌지 따져 볼 일도 없을 것이고, 기독교나 이슬람교와 같이 윤회를 부정하는 그 어떤 종교도 이 지구상에 발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전생은커녕 어제나 일주일, 한 달 전, 일 년 전의 일도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직도 60억 인류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윤회를 전제하지 않은 채 형성된 셈족의 종교, 즉 기독교나 이슬람교, 유태교 등의 가르침을 삶의 지침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그의 수상집 ‘만년의 회상’에서 말했듯이,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에도 기독교는 과학과 갈등 관계에 있다. 그러나 불교만은 과학과 조화를 이룬다. 불교에서는 과학이 발달할수록 불교의 진리성이 입증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불교에 대해 ‘우주적인 종교’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찬사를 보낸 바 있다.
이렇게 합리적이고, 과학적 종교인 불교임에도, 현재 그 교리 가운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윤회와 환생의 가르침이다. 물론 윤회와 환생은 불교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종교에서 전제로 삼고 있는 세계관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윤회를 말하지 않는데, 유독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에서는 윤회를 사실로 간주한다. 궁창(穹蒼) 위에 있을 기독교 하늘나라의 신화가 허구이듯이, 윤회의 가르침 역시 불교, 더 나아가 인도종교에서 구성해 낸 신화에 불과한 것일까?
현대의 전문적 불교학자 가운데에도 윤회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윤회가 부정된다면 불전의 수많은 가르침들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고, 불교의 종교적 목표인 열반도 무의미해지고 만다. 초기불전인 아함경이나 니까야, 율장의 가르침 대부분이 윤회와 관계된 것이며, 불교 수행자가 지향하는 열반이란,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해탈한 아라한에게는 자신이 해탈했다는 자의식이 생기는데 이를 해탈지견(解脫智見)이라고 부르며 다음과 같은 정형구로 표현된다.
나의 삶은 이제 다 끝났다
고결한 삶도 완성되었고
할 일을 다 이루었으니
앞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을 나 스스로 아노라
만일 윤회가 거짓이라면, 다시 말해 우리가 죽은 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라면 불교수행자가 탐욕과 분노와 교만을 제거하기 위해 고결하게 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윤회가 부정되면 불교 전체가 무너짐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많은 불교인들이 윤회의 사실성을 의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티베트나 몽고의 불교인들은 윤회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데, 한국이나 일본의 불교인들이, 같은 불교권임에도 불구하고 윤회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원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불교학’에 있다고 생각된다. 합리주의와 과학주의의 기치를 걸고 문헌학을 도구로 삼아 서구인들에 의해 시작된 현대의 ‘인문학적 불교학’이 전 세계 불교연구의 주류를 이루는 과정에서, 서구인들의 세계관과 부합되지 않는 윤회의 가르침은 하나 둘 폐기되었고 불교의 신앙성은 말살되고 말았다. 예를 들어, 아비달마 논서는 물론이고 초기불전 도처에서는 십이연기설을 소위 ‘귀신’인 중음신(中陰身)의 수태(受胎) 및 윤회와 연관시켜 설명하는데 서구의 불교학 연구자들은 이를 후대에 조작된 교리라고 비판하며 폐기시킨다. 인문학적 불교학에서는 합리적이고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가르침만을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간주하려 한다. 오관에 의해 감각되지 않거나 신비스러운 가르침, 자신들의 종교관과 부합되지 않는 가르침은 무시하거나 비판하며 폐기시킨다. 그 결과 급기야 그들의 연구물에 의지하여 신행생활을 하는 불교인들조차 불교의 핵심 교리인 윤회에 대해서조차, ‘긴가, 민가?’하고 의심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윤회를 과학적으로 검증하지 못한다고 해서 윤회의 사실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윤회를 부정하는 것 역시 또 다른 믿음일 뿐이다.
2. 윤회는 어떻게 증명되는가?
지금 여기서는 윤회가 문제가 되어 그에 대해 왈가왈부 하고 있지만, 불전에 부처님께서 윤회를 증명하려고 애를 쓰신 흔적은 없다. 이는 윤회의 세계관이 불교 교리와 무관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윤회한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은 열반의 깨달음이기도 하지만, 윤회의 깨달음이기도 하다. 열반의 깨달음이 궁극적 깨달음이긴 하지만 이는 그 이전에 윤회를 깨달았기에 가능했다. ?사분율?과 ?잡아함경?을 위시한 초기불전 도처에서는, ‘숙명통(宿命通) → 천안통(天眼通) → 누진통(漏盡通)’이라는 세 단계의 신통력이 열리면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세 가지 신통력을 삼명(三明)이라고 부르는데, 이 가운데 숙명통이란 ‘자신의 전생을 모두를 하나하나 기억해 내는 신통력’이고, 천안통이란 ‘다른 생명체들의 전생과 현생, 현생과 내생의 윤회를 모두 기억하거나 추측하는 신통력’이며, 누진통이란 ‘모든 번뇌가 사라지는 신통력’이다. 흔히 우리가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은 이 중 누진통에 해당하는데, 여기서 보듯이 이런 누진통 이전에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의 윤회하는 모습 대한 깨달음이 선행한다. 이 과정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넓게는 연기의 법칙, 좁게는 십이연기의 법칙, 더 좁게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자신의 무수한 전생도 이런 연기의 법칙에 의해 영위되어왔고[숙명통], 다른 모든 생명체의 무수한 전생은 물론이고 그들의 내생 역시 연기의 법칙의 지배를 받을 것이기에 이는 우주와 생명을 지배하는 유일무이의 보편적 법칙이며[천안통], 궁극적 행복은 이런 연기의 세계, 윤회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번뇌가 사라진 ‘열반’을 얻는 일이다[누진통]. 여기서 보듯이 성도의 과정은 ‘윤회에 대한 직관’과 ‘열반의 체득’의 두 단계로 다시 정리될 수 있는데 이 중 전자에 해당하는 것이 ‘숙명통과 천안통’이며, 후자에 해당하는 것이 ‘누진통’인 것이다. 윤회의 교리는 불교 발생 당시 열반과 함께 불교의 중추를 이루는 중요한 교리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불교의 중추적 교리인 윤회의 사실성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윤회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가장 비근한 예가 티베트 불교일 것이다. 티베트의 종교적, 정치적 수장인 제14대 달라이라마의 중국 탈출기를 그린 영화 ‘쿤둔’에는, 어린 달라이라마가 갑자기 ‘내 틀니!’라고 외치며 작은 방으로 뛰어 들어가 틀니를 찾아내는 장면이 나온다. 일반 관객들은 그 사건의 의미를 놓치기 쉽다. 달라이라마의 전기를 보면 그 장면이, ‘어린 달라이라마가 갑자기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며 자신이 전생에 쓰던 틀니를 찾아내었던 일화’를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티베트에서는 비단 달라이라마뿐만 아니라, 모든 종파의 수많은 종교지도자들이 환생을 통해 다시 각 종단이나 사찰의 종교지도자로 양육된다. 이 이외에도 윤회를 증명하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자신의 전생을 기억할 수 있었고, 그 제자들에게도 전생 회상법을 수련시켰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 세계 각국의 민담 속에 전해오는 수많은 환생 이야기, 최면술을 통해 자신의 전생을 회상케 하는 것, 전생 직관을 통해 수많은 환자를 치료했다는 미국인 에드가 케이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윤회의 사례를 수집하여 이를 증명했던 영국의 심리학자 스티븐슨 등등. 또 앞에서 설명했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도 과정에서 보듯이 불전에서는 색계 제4선의 경지가 되면 누구나 전생을 기억해 낼 수 있다고 가르친다. 제4선은 들숨과 날숨의 흐름조차 정지할 정도로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이다. 그런데 윤회를 예증하는 상기한 사례들은 모두 남들의 얘기일 뿐이며, 자신과 남들의 전생을 기억하고 직관할 수 있다고 하는 제4선은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윤회에 대한 논리적 증명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불전에서는 윤회를 당연한 사실로 간주하기에 굳이 논증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주의와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현대인들을 설득하는 데에는 논증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윤회를 논증하는 데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을 사용할 수는 없다.
주장: 모든 생명체는 윤회한다.
이유: 식(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실례: 마치 달라이라마와 같이
이 추론식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식(識)을 갖고 있는 것은 윤회한다.’는 주연관계(周延關係: vyāpti)가 보편타당한 진리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역시 다시 증명을 요하는 명제일 뿐이다. 이와 같은 추론식을 소증상사(所證相似: sādhya sama)의 오류를 범하는 논증식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어떻게 윤회를 논증할 것인가? 그럴 듯한 방법 가운데 하나로 다음과 같은 유비추리(類比推理)를 들 수 있다; ‘모든 것은 순환한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오면 가을이 오며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온다. 그리고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 온다. 밤이 깊어 어두워지면 다시 여명의 새벽이 온다. 숨을 내쉰 후에는 다시 들이쉬게 된다. 들이 쉰 후에는 다시 내쉬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명체가 탄생하여 늙고 병들어 죽은 후에는 다시 탄생할 것이다. 이 세상에 단절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도 윤회와 재생에 대한 확신을 주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면 윤회를 논증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무한히 재생한다.’는 윤회의 사실성을 확신하게 해 주는 실마리는 바로 ‘연기(緣起)’의 자각에 있다. 연기란 간단히 말해 ‘얽혀서 발생함’을 의미한다. 세상만사는 얽혀서 발생한다. 홀로 발생하는 것은 없다. 가장 비근한 예로 내가 어떤 집을 방문했을 때 그 집이 무척 크다고 생각하는 경우, 그 집이 원래 커서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이 아니라, 내가 염두에 둔 작은 집과 비교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이 때 존재의 세계 속으로, ‘염두에 둔 작은 집’과 ‘무척 큰 집’이라는 생각이 함께 들어온다. 연기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막대기를 보고 길다고 생각했을 때, 그 막대기의 길이가 원래 길어서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이 아니다. 그보다 짧은 막대기를 염두에 두고서 그 막대기를 보니까 그에 대해 길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 막대기의 길이는 원래 짧지도 길지도 않다. 더 긴 막대기와 비교하면 짧게 생각되고, 더 짧은 막대기와 비교하면 길어진다. 어떤 짧은 막대를 생각 속에 떠올린 후 그와 비교하여 눈앞의 막대에 대해 ‘길다’는 판단을 내릴 경우, 존재의 세계 속으로 ‘생각 속에 떠올렸던 짧음’과 ‘눈앞에 보인 긺’이 함께 들어온다. 그 어떤 것도 홀로 나타나지 않는다. 언제나 한 쌍 이상의 사태[fact]가 함께 나타난다. 고기(孤起)하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연기(緣起)한다. 모든 것은 대조와 비교, 관계를 통해 나타난다. ‘나의 눈’이 존재하려면 ‘시각대상’이 존재해야 하고, ‘비’가 존재하려면 ‘내림’이 존재해야 한다. ‘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소 아닌 것’이 존재해야 하고 ‘컵’이라는 생각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컵 아닌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연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눈을 훤히 뜨고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그러면 연기에 대한 이상과 같은 조망에 근거하여 논의를 더 진전시켜 보자. 나는 이 세상을 살면서 온갖 괴로움과 즐거움을 체험한다. 어떤 때는 하루하루가 무척 괴로운 적도 있었고, 어떤 때는 하루하루가 무척 즐거운 적도 있었다. 이러한 내 일생의 길흉화복의 변화에 빗대어 남의 삶을 조망할 경우, 현재의 나보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나보다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음을 알게 된다. 시선을 다른 생명체로 돌려 보자. 짐승의 삶은 우리 인간의 삶보다 훨씬 불행하다. 매일매일 먹을 것을 찾아 헤매야 하는 짐승들은 지극히 가난하다. 조금만 게으르던지, 힘이 약해지면 음식을 구하지 못하고 굶어죽고 만다. 또, 매 순간 약육강식의 공포에 떨며 사는 것이 짐승의 삶이다. 단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자신보다 힘이 센 짐승에게 잡아먹힌다. 이렇듯이 인간계 내에서도 행복과 불행의 정도가 다양하지만, 다른 생명체까지 포함시켜 조망할 경우 행복과 불행의 정도는 개개의 생명체에 따라 천차만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런 행복과 고통의 차별은 어째서 존재하는 것일까? 앞에서 큰 집과 작은 집, 긴 것과 짧은 것 등의 예에서 보았듯이 세상만사는 모두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행복과 고통 역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남에게 고통을 주는 악업을 지을 경우, 그와 벡터(Vector)가 반대인 내가 느낄 고통이 함께 발생해야 한다. 남에게 행복을 주는 선업을 지을 경우, 그와 벡터가 반대인 내가 느낄 행복이 함께 발생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느낄 고통과 행복은 내가 그러한 선악의 업을 짓는 순간과 동시에 발생하지 않고 시간이 경과하여 무르익은 다음에 나에게 체험된다. 사물의 세계에서는 ‘긴 것과 짧은 것’과 같은 연기하는 대립 쌍이 동시에 발생하지만, 마음의 세계에서는 ‘남이 느낄 고락’과 벡터가 반대인 ‘내가 느낄 고락’이라는 연기적인 대립 쌍이 존재의 세계에 시간을 달리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불교전문용어로 ‘이숙(異熟: vipāka)’이라고 한다. ‘다르게 익음’이라는 뜻이다. 내가 남에게 지은 선악의 업을 ‘이숙인(異熟因)’이라고 부르고, 시간이 경과한 후 미래에 언젠가 그로 인해 내가 받을 고락의 과보를 ‘이숙과(異熟果)’라고 부른다. 나의 입장에서 볼 때, 내가 지은 인(因)은 선(善)이나 악(惡)인데 그로 인해 내가 받게 될 과(果)는 고(苦)나 낙(樂)이다. 가치론적으로 볼 때 인(因)은 선성(善性)이나 악성(惡性)이었는데 그것이 과(果)에서는 선도 악도 아닌 무기성(無記性)의 고락으로 성질이 달라졌기에 이(異: vi)인 것이고, 인(因)을 지은 이후 시간이 경과하여 그것이 무르익은 후 과(果)가 나타나기에 숙(熟: pāka)인 것이다.
긴 것과 짧은 것 등과 같은 사물의 연기적 성격에 대해 철저히 자각할 경우, 우리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반드시 그에 부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가 평생 살아가며 지은 갖가지 업들이, 우리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연기적 대립 쌍인 과보를 받기 위해 또 다른 내생의 삶을 초래한다는 점 역시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악행을 했던 나를 내가 처벌하고 선행을 했던 나에게 내가 상을 주기 위해서 죽음 후의 나에게 내생이 다시 전개되는 것이다. ‘자업자득의 법칙’은 이렇게 나의 마음이 주관한다.
3. 윤회는 어디서 어떻게 진행되는가?
위에서 연기설에 입각해 윤회를 논증해 보았지만, 인도 내에서 윤회는 불교에서만 인정되는 교의가 아니었다. 유물론자를 제외한 인도 내 모든 종파에서 윤회를 인정하며 그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교리를 전개하였다. 인도 내의 다른 모든 종파와 불교의 차이점은 윤회의 인정 여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윤회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 있었다. 다른 종파에서는 변치 않는 아뜨만(Ātman)이 존재해서 그것이 주체가 되어 윤회한다고 본 반면, 불교에서는 그러한 아뜨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설을 제시하며 그에 근거하여 윤회를 설명하였다. 다른 종파에서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갖가지 방법과 윤회에서 벗어난 갖가지 상태를 주장하였으나 불교에서는 삼계설(三界說)을 통해 다른 종파에서 주장하는 그런 갖가지 상태를 윤회 내의 경지일 뿐이라고 격하시켰다.
불교의 삼계설과 육도설(六道說)은 윤회에 대한 공간적 조망이고, 십이연기설은 윤회에 대한 시간적 조망이다. 삼계육도설은 생명체가 태어나 살아가는 현장에 대한 조망이고, 십이연기설은 전생과 현생과 내생의 인과관계에 대한 조망이다. 그러면 윤회하는 과정에 대한 불교의 해석을 공간적 조망과 시간적 조망으로 구분하여 설명해 보자.
1) 윤회에 대한 공간적 조망
우리는 지금 지구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허공에 떠 있는 흙덩어리인 이 지구상에는 우리 인간과 함께 종(種: species)이 다른 갖가지 짐승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살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들을 축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생명의 세계에 이렇게 인간과 축생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보다 행복한 존재로 하늘에 사는 천신과 아수라가 있고, 인간보다 불행한 존재로 축생을 비롯하여 아귀와 지옥중생이 있다. 천신과 아수라는 하늘나라인 천상에 살고, 인간과 축생과 아귀는 지상에서 살며 지옥은 이곳 인간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존재한다. 이 가운데 천신과 아수라와 인간계를 세 가지 좋은 곳이란 의미에서 삼선도(三善道)라고 부르고, 축생과 아귀와 지옥세계를 세 가지 나쁜 곳이란 의미에서 삼악도(三惡道)라고 부른다. 일반사람의 눈에는 이 중 인간계와 축생계만 보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육도 중 천상을 정밀하게 나누어 설명한 것이 삼계설이다.
삼계는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인데, 이 가운데 욕계에는 육욕천(六欲天)이라고 불리는 여섯 군데의 하늘나라와 아수라와 인간계와 축생계와 아귀, 지옥계가 속하는데 정신[무색]과 육체[색]와 욕망[욕]을 모두 가진 생명체가 태어나 살아간다. 색계는 초선천, 제2선천, 제3선천, 제4선천의 네 단계의 하늘나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단계의 하늘나라는 다시 세분되어 총 17천이 된다. 이런 색계는 식욕이나 성욕, 수면욕과 같은 거친 욕망은 없으나 미묘한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색]와 정신[무색]을 가진 생명체들이 태어나 살아가는 곳이다. 마지막의 무색계는 거친 욕망도 없고, 육체도 없고 정신[무색]만 가진 생명체가 삼매의 황홀경을 누리며 살아가는 곳이다. 현생에 무엇을 추구하고 살아갔는가에 따라 내생에 삼계 가운데 어느 곳에 태어날지가 결정된다. 성욕이나 식욕, 수면욕 등 거친 욕망을 끊지 못한 사람은 내생에도 욕계에 태어나게 되고, 거친 욕망을 끊어 계행(戒行)이 완성된 상태에서 어느 정도의 명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색계에 태어나게 되며, 그 명상이 지극히 깊어져서 오직 정신적 황홀경만 추구할 뿐 육체에 대한 집착도 완전히 사라진 사람은 무색계에 태어나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밑에 앉기 전에 배웠던 두 명의 스승, 즉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가 가르쳤던 삼매의 경지는 각각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과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으로 무색계의 정상에 태어나게 하는 삼매였던 것이다.
욕계의 하늘나라인 육욕천 가운데에는 ‘죽은 자의 왕’으로 염라대왕이라고 불리는 야마천(Yama天)도 있고, 모든 신들의 주인이라고 칭송되던 인드라[Śakra devānāṃ Indra: 釋帝桓因])가 33천인 도리천의 중앙에서 살고 있으며,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이 머문다는 도솔천도 있고, 부처님을 유혹하며 수행과 전법을 방해하던 마왕 파순이 살고 있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도 있다. 그러나 이런 하늘나라 모두 욕계에 속하기에 남녀의 성(性: sex)이 있는 곳이다. 이성에 대한 관심을 끊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착하고 고결하게 살더라도 내생에 이런 욕계의 하늘나라에 태어날 뿐이다. 육욕천 가운데 사왕천과 도리천은 이 지구와 가까운 곳에 있기에 지거천(地居天)이라고 부르고 나머지 네 가지 하늘나라는 허공에 떠 있기에 공거천(空居天)이라고 부른다.
색계의 하늘나라 중 첫 번째 것인 초선천에는 ‘자신을 창조주라고 착각한 브라만 천신’이 살고 있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가르친다. 모든 사물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하고, 모든 생명체는 생로병사(生老病死)하며,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 우주는 성립되었다가[成劫] 머물다가[住劫] 파괴되다가[壞劫] 텅 빈 상태[空劫]로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텅 빈 상태가 지나면 다시 성립되고, 머물고, 파괴되고, 텅 비게 되는 성주괴공의 순환이 되풀이 된다. 성, 주, 괴, 공 각각의 기간은 20겁인데 이를 1중겁(中劫)이라고 부른다. 네 번의 중겁이 지나는 성주괴공의 한 주기인 80겁을 1대겁(大劫)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우주가 파괴된다는 공겁의 상태가 될 때 우주 전체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욕계 전체와 색계의 초선천까지만 파괴된다는 점이다. 색계의 제2선천 이상은, 그 명칭에서 보듯이 빛[光]이나 오묘한 물질[淨色]로 만들어진 곳이기에 파괴되지 않는다. 물론 무색계는 물질이 아니기에 파괴될 수 없다. 따라서 우주가 텅 빈다는 공겁의 시대는, 모든 중생들이 색계 제2, 3, 4선천과 무색계천에 태어나 지극히 고결하게 살아가는 행복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다가 성겁이 시작되면 색계 제2선천 중의 극광정천(極光淨天)에 살던 한 중생이 자신의 선업이 가장 먼저 소진되어 색계 초선천에 떨어지면서 색계 초선천 이하의 세계를 만든 창조자로 행세하게 된다. 그가 바로 우주의 창조자로 행세하는 대범천(大梵天)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브라만 천신은 ‘자신이 이 우주를 창조했으며 마치 아버지와 같다’고 말하지만 이는 큰 망어죄(妄語罪)를 짓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후 욕계가 위의 육욕천에서부터 지옥에 이르기까지 차례차례 생겨나며 상위 세계에서 떨어진 온갖 중생들로 채워지게 되는데, 이런 모든 세계는 그 곳에 태어나는 각 중생의 업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 이를 만드는 조물주, 창조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무색계의 하늘나라에는 공무변처천, 식무변처천, 무소유처천, 비상비비상처천의 네 곳이 있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오직 삼매의 황홀경만 추구하던 사람들은 내세에 이곳에 태어난다.
이상과 같은 욕계, 색계, 무색계가 윤회의 현장이다. 그 어디든 영원한 곳은 없다. 각각에 태어나게 만든 자신의 업력이 모두 소진되면 다시 다른 곳에 태어난다. 욕계 중 인간계와 축생계, 아귀계는 지구상에 있으며 색계는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허공에 떠 있고, 무색계는 물질이 없는 정신적 경지이기에 장소와 방위가 없다. 그리고 불전에 의하면 이런 삼계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하나마다 하나씩 갖추어져 있다. 태양도 멀리서 보면 하나의 별이기에 우리가 사는 이 태양계에도 하나의 삼계가 있고, 우리의 태양과 같은 별이 천 개 모인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에는 천 개의 삼계가 있으며, 소천세계가 다시 천 개 모인 중천세계(中千世界)에는 백만 개의 삼계가 있으며, 이런 중천세계가 다시 천 개 모인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는 십억 개의 삼계가 있다. 그리고 이런 삼천대천세계는 한 분의 부처님이 관여하는 세계[일불국토(一佛國土)]로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 전체에 해당한다. 이렇게 온 우주에 생명이 가득 차 있다고 보는 것이 불교적 생명관, 세계관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밤하늘 작은 별 하나하나마다 그 주변을 도는 혹성에 갖가지 생명체들이 바글거리며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서 죽어 밤하늘 저 먼 별나라 어딘가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저 멀리의 별나라 어딘가에서 죽어 이곳에 태어나기도 한다. 이 광활한 우주에 살면서 ‘일체지자(一切智者)’이신 부처님께서 사셨던 이 지구상의 인간으로 태어나나는 일은 그야말로 ‘바다 밑을 헤엄치다가 백 년에 한 번 물 위로 오르는 눈 먼 거북이가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나무판자의 구멍에 목이 낄 정도의 확률’밖에 안 될 것이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우리는 내생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2) 윤회에 대한 시간적 조망 - 십이연기
천신이든, 아수라든, 인간이든 축생이든 아귀든 지옥중생이든 모든 생명체들은 위에서 설명한 광막한 우주 도처에서 태어나 살다가 병들어 죽곤 다시 그 어딘가에 태어났다가 다시 죽는 윤회를 무한히 되풀이한다. 생명체의 종류도 가지각색이지만, 그 삶의 모습 또한 가지각색이다. 어째서 모든 생명체는 이렇게 가지각색이고, 그 삶의 모습 또한 이렇게 가지각색인 것인가? 어째서 어떤 생명체는 잡아먹으며 살고 어째서 다른 생명체는 잡아먹혀야 하며, 어째서 누구는 잘나게 태어났고 어째서 누구는 못난 것인가? 어째서 누구는 불행하게 살고, 어째서 누구는 행복하게 사는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이런 모든 결과들이 다 그에 해당하는 원인에 의해 성립된다는 만고불변, 보편타당한 법칙을 발견하셨다. 이것을 좁게는 인과응보의 법칙, 넓게는 연기(緣起)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의 법칙을 윤회하는 생명체의 전생과 현생과 내생의 삶에 적용하여 설명한 가르침이 바로 십이연기설인 것이다.
열두 가지 개념에 의해 전생과 현생, 현생과 내생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십이연기의 각 단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①무명 ②행 ③식 ④명색 ⑤육입 ⑥촉 ⑦수 ⑧애 ⑨취 ⑩유 ⑪생 ⑫노사
無明→ 行→ 識 ↔ 名色→ 六入→ 觸→ 受→ 愛→ 取→ 有→ 生→ 老死
지금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는 어리석음[①무명] 때문에 무수한 전생 동안 갖가지 업[②행]을 짓는다. 그리고 그런 업들은 하나하나가 씨앗처럼 응결되어 우리의 마음[③식]에 저장되는데, 우리가 전생에 죽었다가 현생에 다시 태어날 때 그런 업의 씨앗들을 가진 영혼이 어머니 자궁 속의 수정란과 결합되어 태아[④명색]로 자라난다. 그리고 임신 후 5주가 되면, 태아에 눈, 귀, 코 등의 여섯 가지 지각기관[⑤육입]이 형성된다. 그 후 열 달이 지나 어머니의 자궁 밖으로 나오면 외부의 대상들을 지각[⑥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되어, 그 후 다시 죽을 때까지 갖가지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면서[⑦수] 살아간다. 여기서 무명과 행은 전생에 심은 ‘원인’에 해당하고, 식, 명색, 육입, 촉, 수는 현생에 받는 ‘결과’에 해당한다. 우리는 전생에 지었던 ‘원인’대로 몸을 받아 행, 불행이라는 ‘결과’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①‘무명’에서 시작하여 ⑦‘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전생과 현생간의 인과관계에 대한 조망이다. 그리고 이후 ⑧‘애’에서 ⑫‘노사’까지의 과정은 현생과 내생간의 인과관계에 대한 조망이다.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 우리에게 체험되는 것들 가운데 좋은 것은 추구하고, 나쁜 것은 배척한다. 이런 마음이 욕망이다. 그런데 우리의 욕망은 성(性)에 눈을 뜨는 사춘기에 이르러 강력해진다. 사춘기 이후, 성욕, 재물욕, 명예욕, 종교적 욕망 등이 모두 강력해 진다[⑧애]. 그리고 구체적인 세계관이나 종교관[⑨취]의 틀을 자신의 인생관으로 삼아 제각각의 방식으로 이런 욕망을 성취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⑩유]. 그러나 그런 삶이 욕망을 버린 삶이 아니기에 우리는 해탈하지 못하고 내생에 다시 태어난다[⑪생]. 그리고 또다시 늙어죽는다[⑫노사]. 이렇게 전생과 현생의 인과관계와 현생과 내생의 인과관계로 십이연기를 설명하는 방식을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이라고 부른다. 전생, 현생, 내생을 모두 포괄하기에 삼세(三世)이며, 인과관계가 두 번 중복되기에 양중인과(兩重因果)인 것이다. 그리고 십이연기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분위연기(分位緣起)라고 부른다.
그러나 십이연기의 각 항목은 지금 이 순간에 함께 작용하기도 한다. 이런 해석을 찰나연기(刹那緣起)라고 부르는데, 지금 이 순간의 나는 무한한 전생에서 시작한 ①무명에 덮여 있고, 전생에 지었던 나의 모든 행위[②업]들은 마치 밭에 뿌려진 씨앗과 같이 발아를 기다리며 지금 이 순간의 나의 마음[③식]속에 간직되어 있으며,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형성된 후 지금까지 성장해온 나의 몸은 임신 5주째의 태아[④명색] 상태에서 생성되었던 여섯 가지 지각기관[⑤육입]을 모두 갖고 있고, 출산 후 비로소 열린 감각기관은 지금도 그대로 열려 있고[⑥촉], 그런 지각기관을 통해 온갖 희로애락을 느끼며[⑦수] 살아간다. 그와 아울러 사춘기 때부터 시작하는 강력한 욕망[⑧애]이 지금도 끊임없이 분출되고, 그런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 구체적인 인생관[⑨취]에 따라 매일 매일을 살아간다[⑩유]. 전생의 나도 태어났다 죽었지만, 현생에 태어난[⑪생] 나도 결국 죽을 것이고[⑫노사], 내생에 태어날 나도 결국 죽을 것이다.
여기서 전생과 현생, 현생과 내생 간의 인과관계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인 ‘이숙인(異熟因) → 이숙과(異熟果)’의 인과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인 ‘동류인(同類因) → 등류과(等流果)’의 인과관계이다. 전자는 ‘착하게 살면 행복이 오고, 악하게 살면 고통이 온다.’는 ‘행위와 과보 간의 인과관계’이고, 후자는 ‘착한 사람은 그 습관 때문에 내생에도 착하게 태어나고 악한 사람은 그 습관으로 인해 내생에도 악하게 태어난다.’는 ‘성향의 인과관계’이다. 현생에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길흉화복은 전생 혹은 과거에 우리가 지었던 업에 기인하며, 우리가 현생에 짓고 있는 갖가지 업들은 우리의 미래나 내생에 받게 될 온갖 길흉화복을 구성해 낸다. 생명체의 윤회는 시간적으로 이렇게 인과응보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십이연기를 분위연기적으로 펼쳐놓을 때, 윤회와 관계되는 부분은 ‘②행→③식↔④명색’이다. 전생에 지었던 선과 악의 갖가지 업들은 모두 씨앗이 되어 우리의 마음인 식 속에 저장되는데, 이 때 씨앗은 열매로서의 씨앗을 의미한다. 그리고 생명체가 죽게 되면 이러한 업의 씨앗을 간직한 식이 고락이나 선악인 과보로서의 싹을 틔우기 위해 다시 다른 모체의 자궁 속 수정란에 부착됨으로써 심신복합체인 명색(名色)의 성장이 시작된다. 그런데 그 어떤 불전에서든 십이연기의 식과 명색의 관계를 ‘쌍 조건 관계’[↔]로 설명한다. ‘식(識)을 연(緣)하여 명색이 있고, 명색을 연하여 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현대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지만 아함경에 근거할 때 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여기서 식(識)은 전생에 죽은 귀신, 즉 중음신을 의미하는데 ‘중음신이 있어야 부모의 교합에 의해 만들어진 수정란이 명색으로 자라날 수 있고, 거꾸로 부모의 정(精)과 혈(血)이 합쳐진 수정란이 있어야 죽은 귀신인 중음신이 새 생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중음신이 있어야 수정란이 명색으로 자라나고 수정란이 있어야 중음신이 안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십이연기설의 다른 지분들은 불가역적인 한 방향의 조건관계로 표시되는데, 식과 명색만 가역적인 쌍방향의 조건관계로 표시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중 식(識)을 의미하는 중음신이란 ‘중간 단계의 오음’이란 뜻인데, 사망하는 순간의 오온인 사음(死陰)과 그 후 자궁 내에 다시 탄생하는 순간의 오온인 생음(生陰)의 중간 단계의 오음을 갖춘 몸이란 의미에서 중음신(中陰身)이라고 부른다. 중음신으로서의 삶을 중유(中有)라고 부르는데 이런 중유를 티베트에서는 바르도(bar do: between two)라고 한다. 이는 사음과 생음이라는 ‘두 가지[do]의 사이[bar]’라는 의미이다.
물론 모든 불교 부파에서 중음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승 부파 가운데 설일체유부에서는 중음신의 존재를 인정했으나, 대중부, 일설부, 설출세와, 계윤부의 본종동의와 화지부의 본종동의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중부 등에서는 생명체가 죽으면 마치 거울에 영상이 비치듯이 동시에 생음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설일체유부의 교학에서 설명하는 중음신, 즉 중유의 정체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중유의 몸은 미세하고 청정한 물질로 되어 있기에 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중유끼리는 서로 알아본다. 혹은 극히 청정한 신통력의 눈을 가진 자는 본다.
2. 중유는 순식간에 먼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3. 중유는 오근을 모두 갖추고 있다.
4. 중유는 벽이든 산이든 무엇이든 뚫고 지나갈 수 있다.
5. 다음 생으로 갈 중유가 이미 형성되면 이를 돌이킬 수 없다.
6. 욕계의 중유는 음식물의 미세한 냄새만 먹고 산다.
7. 중유의 수명은 논사마다 다르게 주장한다.
①법구 - 탄생할 인연이 없으면 무한하다
②세우 - 길 경우는 7일인데 탄생할 인연이 없으면 중유의 상태에서 계속 생사한다.
③설마달다 - 길 경우는 7×7=49일
④비바사사 - 적은 시간만 머문다. 왜냐하면 생유를 좋아하니까.
8. 사람의 경우 태어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남자의 경우는 어머니를 향해 음욕을 일으키고, 여자의 경우는 아버지를 향해 음욕을 일으켜서 부모 교합의 순간에 수정란에 부착된다. 이성에 대해서는 탐애심, 동성에 대해서는 질투심을 일으키며 수정란에 부착된다.
9. 중유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천신으로 태어날 중유: 앉아서 일어나듯이 머리를 세우고 하늘로 상승한다.
인간, 아귀, 축생: 그 모습이 사람과 같다.
지옥중생 -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 한 채 지옥을 향해 떨어진다.
이상과 같은 ?구사론?의 설명에 의거하여 우리가 사망한 후 중음신으로 떠돌다가 사람으로 재생하는 과정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현생에 사람으로 살면서, 이성에 대한 욕망, 즉 음욕을 끊지 못한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되었을 때, 즐겨 찾아가는 곳은 남녀, 또는 암수가 성교를 하는 현장일 것이다. 벽을 뚫고 지나갈 수 있고,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이 중음신이기에, 그 마음속에 음욕이 남아 있는 중음신은 가장 흥미로운 곳인 남녀가 성교하는 곳을 자유자재로 찾아다니며 구경하게 되는데 남자로 태어날 중음신은 여자에게 여자로 태어날 중음신은 남자에게 음욕을 일으켜 교합하다가, 부지불식간에 수정란에 부착되어 모태의 자궁에서 명색으로 자라나며 다시 내생의 삶을 받게 된다.
?구사론?의 설명에 비추어 보면, 지금도 남녀나 암수가 성교하는 곳에는 성교하는 남녀, 또는 암수와 오버랩 되어 이성과 교미하려는 중음신들이 가득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음욕을 끊지 못한 이상 우리는 내생에 이런 과정을 거쳐 다시 태어난다. 그리곤 다시 고통스런 윤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죽은 후 다시 윤회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다시는 모체의 자궁에 착상되지 않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현생에 음욕을 끊어야 한다. 음욕뿐만 아니라 오욕락에 대한 집착[貪]을 모두 끊어야하고, 누군가에 대한 분노심[瞋]을 모두 끊어야 하고, 교만한 마음[慢]을 모두 끊어야 하며, 자아나 법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癡]을 모두 끊어야 한다. 그래서 감성과 인식이 모두 정화되어 맺혔던 한이 모두 풀릴 경우, 다시 말해 감성적이고 인지적인 번뇌가 모두 제거될 경우 우리는 죽은 후 윤회를 위해 음욕을 갖고 자궁에 착상되는 어리석음을 다시는 범하지 않게 된다. 그럴 경우 적어도 욕계를 벗어나 색계 이상에 태어나든가 윤회를 벗어나 열반을 체득한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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