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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출가자와 재가자의 바람직한 관계...김성철교수

수선님 2018. 9. 16. 11:36

출가자와 재가자의 바람직한 관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김성철

 

 

1. 출가자와 재가자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1) 초기불전에서 말하는 출가자와 재가자

2) 대승불전의 출가자와 재가자는 보살로서 동등한가?

3) 불교지도자의 신분에 대한 재검토

2. 출가자의 삶과 재가자의 수행 목표

1) 출가자는 최소한 어떻게 살아야 할까?

2) 재가자는 최대한 어느 경지까지 오를 수 있을까?

3. 출가자와 재가자의 바람직한 관계

1) 재가자를 위한 출가자의 역할

2) 출가자를 위한 재가자의 역할

 

 

1. 출가자와 재가자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출가자와 재가자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출가자와 재가자 각각의 의미와 범위가 명확해야 할 것이다. 누가 출가자이고 누가 재가자냐고 묻는 경우, 우리는 우선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스님이 출가자이고 머리 기르고 평상복을 입은 불교신자가 재가자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부처님 당시에나 통용될 수 있었던 구분이다. 불교 발생 이후 약 2600년이 흐른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출가자와 재가자를 구분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일본의 경우는 대부분의 승려들이 결혼을 한 후 사찰 내에서 가족을 부양하며 신행생활을 하며, 사찰은 물론이고 승려직 역시 세습된다. 한국에도 많은 대처 종단이 있으며, 가정생활을 하는 승려지만 삭발을 하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또 현대 사회에서 불교지도자로서 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불교학자와 수행지도자, 포교사, 불교운동가 등의 신분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야 할 것인가? 먼저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말하는 일반종교의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또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사와 배우는 학생의 구분을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분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불교의 성직자, 즉 출가자는 불교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귀의의 대상이 되어 복전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 위상이 독특하다. 비단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분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그 어떤 분야에서도 불교를 현대적으로 풀어낼 경우, 그 작업은 철저히 불전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현대라는 그릇 속에 불교를 담아서는 안 되고, 불교라는 그릇 속에 현대를 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출가자와 재가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고찰해 보는 본 장에서는 주로 초기불전을 자료로 삼아 그 기준을 확정해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준에 의거하여 현대 사회 속의 다양한 불교지도자의 신분을 재규정해 볼 것이다.

 

1) 초기불전에서 말하는 출가자와 재가자

 

재가자란 부처님(佛)과 가르침(法)과 승가(僧)라는 삼보에 귀의한 사람이다. 더 나아가 삼귀의 후 五戒나 十善戒, 또는 八齋戒를 지킬 것을 다짐한 사람이 재가불자라고 규정되기도 한다. 재가자가 오계를 受持할 때, 오계는 권장되는 윤리지침일 뿐 강제적 규정이 아니다. 오계를 어긴다고 해서 재가불자가 불자로서의 자격을 잃는다든지, 교단에 의해 벌칙을 받는다든지 하는 일은 없다. 한편 출가자는 삼보에 귀의한다는 점에서는 재가자와 동일하나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후 具足戒를 받는다는 점에서 재가자와 차별된다. 구족계는 재가 오계와 같은 권장사항이 아니라, 강제규정인 승가의 규범이다. 이를 어길 경우 승가로부터 다양한 제재를 받는다. ?四分律?에 나열된 250가지 구족계 각각의 戒目(비구니는 348종)은 다음과 같이 분류, 정리된다.

 

바라이법(波羅夷法: pārājikā dhammā) - 4종(성교, 도둑질, 살인, 망어)

승가바시사법(僧伽婆尸沙法: saṃghādisesā dhammā) - 13종(자위, 무고 등)

부정법(不定法: aniyatā dhammā) - 2종(밀폐된 곳에서 여인에게 잡담하는 것 등)

니살기바일제법(尼薩耆波逸提法: nisaggiyā pācittiyā dhammā) - 30종(여분의 가사를 10일 이상 소유하는 것 등)

바일제법(九十波逸提法: pācittiyā dhammā) - 90종(다른 비구를 모독하는 것 등)

바라제제사니법(波羅提提舍尼법: pātidesaniyā dhammā) - 4종(친척이 아닌 비구니에게 음식을 받아먹는 것 등)

중다학법(衆多學法: sambahulā sekhiyā dhammā) - 100종(밥을 먹을 때 소리내지 않는 것 등)

멸쟁법(滅諍法: adhikaraṇasamathā dhammā) - 7종(다툼을 재판하는 방법)

 

이 중 가장 중한 죄는 네 가지 바라이죄인데, 이를 범한 자는 승가에서 영구히 추방되며, 재출가 역시 허용되지 않는다. ① 직접 성교를 한 경우, ② 일정 금액 이상의 재물을 도둑질할 경우, ③ 살인을 하거나 교사한 경우, ④ 깨닫지 못했음에도 깨달았다고 거짓말을 할 경우의 네 가지가 바라이죄이다. 그런데 ‘① 직접적 성행위’는 그것이 邪淫이 아닌 이상 재가자에게는 도덕적으로 전혀 문제시되지 않는다.

재가자의 경우 위에 열거된 다른 모든 조항들을 어기지 않으며 청정하게 살아도, 배우자와 성교를 하기 때문에 출가자인 비구일 수가 없으며, 출가자의 경우는 250계 중 다른 계목은 모두 어겨도 적법한 절차에 의해 제재를 수용하면 승가에서 축출되지 않지만, 4바라이죄를 지을 경우는 승가에서 추방된다. 정상적인 부부관계의 경우 재가자에게는 죄가 되지 않지만 출가자에게는 단 한 번의 음행도 출가자의 신분을 잃게 만드는 가장 중한 죄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출가자와 재가자를 가르는 가장 근본적 기준은 ‘淫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재가자가 아무리 학식이 높고, 인품이 고매하고, 설법을 잘 해도 부인과의 性生活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상, 결코 출가자일 수가 없고, 갓 출가한 비구승이 불교교리도 잘 모르고, 수행자로서의 인격도 아직 갖추지 못했고, 제대로 설법을 하지 못해도 성교를 금하고 수행생활을 한다면 엄연한 출가자인 것이다.

 

2) 대승불전의 출가자와 재가자는 보살로서 동등한가?

 

우리는 부처님을 닮기 위해 신행 생활을 한다. 그런데 부처님의 어떤 삶을 닮고자 하는가에 따라 대승과 소승이 구분된다. 출가 후 성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현생을 닮고자 하면 소승이고, ?본생담?에 등장하는 석가모니의 前身, 즉 석가보살을 닮고자 할 경우 대승인 것이다.

?법화경?이나 ?화엄경?, ?대반열반경? 등 대승 경전에서는 출가든, 재가든 모든 불자들에게 보살의 길을 갈 것이 권유된다. 보살이란 원래 ?본생담?에 등장하는 석가모니의 수많은 전생의 인격에 대해 붙여진 고유명사였다. 그런데 대승불전에서는, 석가모니의 전생과 같은 삶을 살아갈 경우 누구든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자각 하에 보살이라는 고유명사가, 보통명사로 전용되기 시작하였다. 즉, 석가모니의 전생을 닮고자 하는 모든 불교도에게 보살이라는 호칭이 붙여졌던 것이다.

대승불전에서는 불교도의 신행 목표가 모든 번뇌를 제거한 아라한이 아니라 번뇌도 제거하고 지혜와 복덕을 모두 갖춘 부처로 상승하였다.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삭발 출가하여 전문적 수행자의 길을 가야 하지만, 부처가 되는 것은 무량겁 이후의 일이기에 보살도를 닦는 사람이 현생에 반드시 출가해야 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재가자들은 보살의 삶을 살 경우 자신들 역시 불교수행의 당당한 주역일 수 있다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대승이란 그 목표가 원대하기 때문에 大乘(큰 수레)이며, 보다 많은 중생을 실어 나를 수 있기 때문에 대승인 것이다. 이렇게 무량겁 이후의 성불을 지향하고,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자 역시 불교수행의 주역으로 살아가는 대승불교에서는 비구와 비구니를 출가보살, 우바새와 우바이를 재가보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승불교의 출가자와 재가자는 보살로서 평등하다고 보아야 할까? 그렇지 않다. 무량겁 이후의 성불을 지향하며 보살로 살아간다는 점에서 출가자와 재가자의 수행방법은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보살의 수행법으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의 육바라밀을 말한다. 그런데 보시의 경우 대소승을 막론하고 출가자에게는 법보시가 권장되고 재가자에게는 재보시가 권장되며, 지계의 경우 출가자에게는 250내지 348계가 附與되고 재가자에게는 5계 내지 8재계, 또는 10선계가 부여된다. 소승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대승불교의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 보살의 삶을 살긴 하지만, 출가와 재가라는 점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대승의 보살도는 소승적 출가-재가 관계를 파괴하는 수행의 길이 아니라, 소승적 출가-재가 관계에 덧씌워진 수행의 길이다. 보살이란 대승불교가 출현하면서 성립된 하나의 ‘이념’이지 불교도의 ‘신분’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승불교의 출가보살 역시 재가보살에게 가르침을 주고 福田의 역할을 하기 위해 계를 지키며 청정하게 살아가야 한다. 한편, 재가보살은 출가보살에게 귀의하여 시주물을 제공해야 한다. 대승불교라고 해서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3) 불교지도자의 신분에 대한 재검토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다종다양한 불교지도자를 만날 수 있다.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스님, 삭발은 하지는 않았지만 전문적인 불교지도자로 활동하는 재가자, 불교교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불교학자, 재가자임에도 불교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신행하며 이를 남에게 전해 주는 일에 전념하는 포교사, 불교사회단체에 소속되어 현대사회의 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적극 참여하는 불교활동가 등등. 그러면 이들 중 누가 재가자이고 누가 출가자일까?

앞에서 검토해 보았듯이, 출가자와 재가자를 구분하는 가장 근본적 기준은 淫行에 있다. 그리고 대승불교라고 해서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근본불교의 신행목표인 아라한이 대승불교에 와서 부처로 바뀌었을 뿐이다. 대승불교도들은 출가자든, 재가자든 ?본생담?의 보살과 같이 살아간다. 따라서 대승불교권에 속한 불교지도자라고 하더라도 부부생활을 하는 경우에는, 출가자일 수 없다. 사부대중으로 분류하면 우바새 또는 우바이인 것이다. 대승에서든 소승에서든 출가자란 삭발염의한 독신 수행자뿐이다. 삭발하고 승복을 입고 있든 그렇지 않든 부부생활을 하는 불교지도자는 모두 우바새(또는 우바이)인 것이다. 포교사든, 불교학자든, 불교활동가든 독신 수행하지 않는 이상, 또 削髮染衣하고 출가하지 않는 이상 모두 재가자인 것이다. 이들은 학교에서의 교사, 또는 일반종교의 성직자와 같이 존경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출가자와 같이 귀의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소승에서든 대승에서든 삼귀의에서 말하는 승보는 수다원에서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四向四果의 聖人, 또는 비구, 비구니, 식차마니, 사미, 사미니의 출가 五衆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 출가자의 삶과 재가자의 수행 목표

 

현대사회에서 출가자들이 具足戒의 戒目 하나하나를 문자 그대로 지키며 수행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기후와 문화 환경이 인도와 판이하게 다른 지역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런 계목들을 시대와 지역에 맞게 변형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율의 취지’를 파악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율의 취지’가 정리될 경우, 지역이나 시대의 변화와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수용될 수 있는 출가자의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 명료하게 드러날 것이다. ‘율의 취지’대로 사는 것은 지역과 시대를 떠나 모든 출가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조건이다. 깊은 삼매에 들고, 지혜를 개발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또, 많은 재가자들은 단순히 승가를 외호하는 역할을 넘어 깨달음을 추구하며 수행에 전념하기도 한다. 그러면 재가자는 어느 정도까지 수행의 성취가 가능할까? 만일 깨달음이 출가자에게만 가능하다면 재가자의 수행은 蠻勇이 될 것이고, 재가자 역시 쉽게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굳이 출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출가자와 재가자의 차이를 보다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본 장에서는 출가자가 보여줘야 할 최소한의 삶의 모습과 재가자가 체득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행 경지에 대해 조망해 보고자 한다.

 

1) 출가자는 최소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앞에서 설명했듯이 출가자란 削髮染衣한 후 구족계를 받은 수행자들이다. 律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출가자들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조건이다. 남방 상좌부 불교권의 출가자들은 律典에 쓰여진 계목들을 거의 그대로 준수하며 수행생활을 한다. 그러나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와 기후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북방불교권의 출가자들은 율전에 기록된 계목 하나하나를 그대로 지킬 수가 없다. 세 벌을 넘는 옷을 지니지 말라는 계목은 추운 날씨로 인해 지켜질 수 없고, 노동을 신성시하는 가치관이 널리 퍼져 있어서 걸식이 심하게 비난받는 문화풍토 하의 출가자들은 경작과 생산 활동을 통해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북방불교권에서는 3벌의 승복으로 겨울을 날 수가 없기에 두툼한 장삼을 입은 후 우측 어깨를 드러내는 가사를 그 위에 걸치도록 승복이 개량되었고, 百丈은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출가자로 하여금 경작과 수행을 병행하게 하는 새로운 禪院規範集(?百丈淸規?)을 저술한 바 있다.

중국, 한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에 대승불교가 전파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율전에 쓰여진 규범들을 그대로 준수하는 철저한 출가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梵網經?이라는 이름으로 대승적 출가보살의 느슨한 戒目集이 편찬되었단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동북아시아에서 대승불교를 수용했던 것은 그 기후와 문화 조건에 비추어 볼 때 최상의 선택이었다.

서구에 신앙적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한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자생적으로 출가자들이 배출되고 있다. 그런데 가치관과 문화 풍토가 판이한 서구사회의 출가자들이 율장의 규범을 그대로 준수하며 신행생활을 하는 것은 동북아시아의 출가자 이상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또, 근대 이후 전 세계가 서구화되면서 출가자들의 수행환경은 점점 열악해진다. 물질문명, 감각문화가 과도하게 발달한 현대 사회 속에서 온갖 문명의 이기와 함께 성장한 젊은이들이 고대 인도에서 행해졌던 출가수행자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는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律典에 나열된 규범들을 가능한 한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해야 하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경우는 ‘律을 제정했던 근본 취지’를 파악하여 각 문화풍토에 부합되게 불교윤리를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이는 律學 전공자들이 南傳과 北傳의 모든 율장들을 자료로 삼아 전문적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가 될 것이다. 본고에서는 우선 ?사분율?만을 자료로 삼아 ‘律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추출해 보았다.

 

① 남을 해치는 행동을 하지 말 것

② 자신을 해치는 행동(= 고결하지 못한 행동)을 하지 말 것

③ 승가의 화합을 깨는 행동을 하지 말 것

④ 승가에 대한 재가자의 신뢰를 실추시키는 행동을 하지 말 것

⑤ 출가자의 수행에 지장을 주는 행동을 하지 말 것

⑥ 불교에 대한 신앙심을 훼손하는 행동을 하지 말 것

⑦ 번뇌를 야기하는 행동을 하지 말 것

⑧ 승가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을 하지 말 것

 

그런데 특기할 것은 ?사분율?에 열거된 250가지 계목 중 많은 내용들이 ‘승가에 대한 재가자의 신뢰를 실추시키는 행동에 대한 경계’와 관계된다는 점이다. 壞生種戒의 경우, 식물을 해치는 것이 살생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재가자들이 식물을 생명체라고 여기기에 식물 역시 함부로 해쳐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출가자의 악행을 방지하는 것이 계율 제정의 근본 목적이지만, 그만큼 중시되었던 것이 ‘승가의 명예’였다는 점이다. 설사 어떤 행동이 원래 악업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재가자들이 그것을 옳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할 경우, 그런 행동에 대한 금지가 계목에 추가되었다. 승가에 대한 재가자의 신뢰를 실추시키지 않기 위해서 출가자들은 항상 재가자의 비판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와 기후, 문화 환경이 판이한 서구나 북방 불교권의 출가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가능한 한 律典에 나열된 계목들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로 준수하기 힘든 계목의 경우는 위와 같은 ‘계의 취지’를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구체적 행동 지침에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세 벌이 넘는 의복을 10일 이상 소지할 수 없다’는 長衣戒의 경우, 각 지역의 날씨에 맞추어 의복의 수를 달리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계목 하나하나를 재해석해 내는 일에 대해서는 앞으로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그 어느 문화권에 사는 출가자라로 하더라도 위에 열거한 ‘율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출가자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출가자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모습이다.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

 

2) 재가자는 최대한 어느 경지에까지 오를 수 있을까?

 

앞에서 열거했던 ‘율의 취지’를 구현하는 삶은 비단 출가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재가자들이 출가율을 그대로 준수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재가자들 역시 상기한 ‘율의 취지’를 자신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삼보에 귀의한 재가자들에게 주로 권유되었던 것은 보시와 지계를 통해 내세의 生天을 지향하는 삶이었다. 승가에게 음식과 의복, 수행공간 등 시주물을 올리고(財布施), 5계, 8재계, 또는 10선도를 실천(持戒)하는 고결한 삶을 삶으로써 재가자는 내세에 하늘나라에 태어날 수가 있다. 그러나 天上이라고 하더라도 영원한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공덕이 다하면 언젠가 추락해야 하는 윤회의 세계일 뿐이다. 생천은 불교신행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다. 불교신행의 최종 목표는 ‘천상이든 인간계든, 짐승의 세계든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도록, 완전히 열반하는 것’이다. 부처가 되어 보다 많은 중생을 열반하게 하기 위해 무량겁 동안 보살과 같이 살아간다는 점에서 대승불교와 초기불교가 차별될 뿐이다. 궁극적으로 완전한 열반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양자의 차이는 없다.

대승불교를 신앙하는 재가자의 경우, 3아승기 100겁에 걸쳐 보살의 삶을 살 것을 다짐하고 있기에 항상 지혜를 추구하고 항상 남을 돕는 삶(上求菩提 下化衆生)을 살아감으로써 불교신행의 구심점에 설 수가 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을 닮고자 하는 삶이다.

그러면, 초기불교시대의 재가자는 어떠했을까? 보시와 지계행을 통해 생천을 지향할 뿐인 재가자는 불교의 외호세력일 뿐인가? 재가자는 불교 신행의 주변부에만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인가? 세속의 향락 속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재가자가 전문적 수행을 하기는 지극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초기불전에서 우리는 완전한 깨달음은 아니지만 성인의 경지에 오른 많은 재가 수행자를 만날 수 있다. ?잡아함경?에서는 아들, 딸을 기르며, 몸에 치장을 하고, 재물욕, 성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의 五慾樂을 누리며 살아가는 在家 우바이의 경우도, 有身見과 戒取見과 疑心이라는 세 가지 번뇌를 끊을 경우 수다원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수다원이란 내생에 결코 三惡道에 떨어지지 않고 앞으로 많아야 7회를 欲界에서 재생한 후(極七返), 色界 이상의 세계에 태어나 般涅槃(pari-nirvāṇa)하게 되는 경지까지 오른 수행자로 豫流라고 번역된다.

또 처자를 거느리고 몸에 치장을 하고 노비를 거느린 채 오욕락을 누리며 사는 재가 우바새의 경우도, 유신견, 계취견, 의심의 세 가지 번뇌를 끊고, 탐심과 치심이 희박해 질 경우 사다함이 될 수 있다. 사다함이란 내생에 한 번만 욕계에 태어날 뿐이고 그 후 색계 이상의 세계에서 반열반하는 聖人을 말한다.

재가자가 아나함이 될 수 있다는 설명도 발견된다. 재가자가 아나함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부부생활을 금한 후 수행을 통해 욕계에서 작용하는 다섯 가지 번뇌(五下分結: 탐욕, 분노, 유신견, 계취견, 의심)를 끊어야 한다. 아나함이 되면 내생에 다시는 욕계에 태어나지 않고 색계 이상에 태어나 반열반한다.

따라서 부부생활 등 오욕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재가자라고 하더라도,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 있다는 생각’(유신견), ‘잘못된 종교의식을 옳다고 착각하는 것’(계취견), ‘불교에 대한 의심’(의심) 등 세 가지 번뇌를 모두 제거할 경우 성인 중의 첫 지위인 예류과, 즉 수다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극히 힘들긴 하겠지만, 부부생활을 금하고 욕계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버릴 경우 불환과인 아나함의 성자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

초기불전에 의거하더라도 재가자의 불교신행 목표는 출가자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재가자가 체득할 수 있는 수행의 경지도 상당한 수준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출가자 이상의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재가자는 수행을 방해하는 갖가지 유혹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또 부부생활을 중단하지 않는 이상 재가자는 결코 아나함이나 아라한이 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궁극적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재가보살의 대명사인 유마거사 역시 음행을 끊은 자로 묘사된다.

이렇게 재가자에게도 깨달음의 길이 열려 있긴 하지만, 출가자와 비교할 때 그것을 체득하는 것은 至難한 일이다. 삼귀의하고 오계를 수지한 총명한 재가자라고 하더라도 괴로운 일이 생기면, 갖가지 향이나 꽃이나 음식을 준비하여 천신에게 기복적 기도를 올리게 마련이다. ‘내세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열반’을 眞心으로 추구하는 재가자는 극히 드물며 대부분의 재가자는 내세의 행복을 기원할 뿐이다. 물질문명, 감각문화의 파도가 세차게 몰아치는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재가자가 탐욕과 분노와 교만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열반의 길로 들어간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우리 사회가 문명화될수록, ‘세속적 욕락에서 벗어나 전문적 수행을 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계속 재발견해 내는 출가자’의 역할은 더욱 소중해진다.

 

3. 출가자와 재가자의 바람직한 관계

 

앞에서 ?사분율?에 의거해 검토한 바 있듯이 누군가가 출가자이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는 출가 수계 후 梵行者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청정하게 사는 출가자만이 시주하는 재가자에게 發福으로 보답하는 福田의 역할을 할 수가 있다. 이런 계행의 토대 위에서 대부분의 출가자들은 ‘깨달음’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한편 일부 뛰어난 재가자의 경우 출가자와 같이 수행에 전념하여 수다원이나, 사다함, 심지어 아나함의 경지에까지 오를 수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재가자들은 財布施를 통해 승가에 의식주를 제공하고, 승가를 외호하며, 5계, 또는 8재계를 준수하면서 청정하게 살아간다. 布施, 持戒, 生天論에서 보듯이 대부분의 재가자는 해탈, 열반보다 행복한 내생을 희구한다.

그러면 본 장에서는 이러한 일반적 출가자, 일반적 재가자가 서로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서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찰해 본다.

 

1) 재가자를 위한 출가자의 역할

 

출가자의 본분은 수행과 설법이다. 청정한 수행을 통해 福田으로서의 자질을 키우고, 자신이 체득한 조망을 재가자에게 가르친다. 여기서 말하는 청정한 수행은 律의 준수를 의미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종교인들이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권장한다. 출가자든 재가자든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 있는 병들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분명 지극히 선한 일이다. 그러나 초기불교시대의 출가자가 사회에 참여하는 방식의 주종은 ‘걸식’이었다. 출가자는 ‘걸식’을 함으로써 시주자에게 복을 주게 된다. 시주물을 받아 줌으로써 시주자에게 복을 주는 것이 초기불교적 견지에서 본 진정한 이타행인 것이다. 이 때 시주자인 재가자에게 많은 복이 발생하게 하기 위해서는 출가자의 수행의 경지가 높아야 한다. ?大智度論?의 설명에 의하면, 畜生에게 보시할 경우 보시물이 백 배로 되어 내게 돌아오고, 惡人에게 보시할 경우 천 배가 되어 돌아오며, 善人에게 보시할 경우 십만 배가 되어 돌아오고, 離欲人에게 보시할 경우 십억만 배가 되어 돌아오며, 수다원 등 사향사과의 聖人들에게 보시할 경우 무량한 복이 되어 돌아온다. 욕심도 없고 자비심을 갖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진리에 대해 올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무량한 복전이 될 수 없지만, 수다원의 경우는 아직 욕심을 모두 제거하지는 못했어도 제법실상을 파악하고 있기에 무량한 복전이 된다는 것이다. 좀 과장된 설명 같이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런 해석이 의미하는 바는 보시물을 받는 사람의 수행의 깊이에 따라 복전으로서의 위력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출가자의 사회참여 방식 중 가장 불교적인 방법은 보다 훌륭한 복전이 되어 시주물을 받아 줌으로써 시주자에게 보다 많은 복이 발생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출가자들이 시주자를 포함하여 자신이 속한 사회 전체에 보답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출가자가 할 일은 철저히 戒行을 지키며 禪定을 닦고 깨달음의 智慧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행에 전념함으로써 지혜가 열린 출가자는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를 가르치게 된다. 즉, 法布施를 하게 된다. 불전에서는, ‘출가자는 법보시에 치중해야 하고 재가자는 財布施에 치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원래 출가자에게 재보시는 권장되지 않았던 것이다. 재보시를 하려면 재물을 모아야 하는데 출가자가 재물을 모을 경우 그 과정에서 계를 범할 수 있으며, 계를 범한 출가자는 양질의 복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재가자에 대한 출가자의 역할은 수행을 통해 훌륭한 복전이 됨으로써 시주물을 올리는 재가자에게 發福케 하는 것과 법보시를 통해 재가자를 이끌어 주는 것이다. 탐욕과 분노와 교만과 우치 등의 번뇌를 끊는 치열한 수행과 그런 수행을 통해 얻어진 조망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는 것, 이 두 가지만이 출가자의 본분이다. ?대비바사론?에서는 ‘불교가 쇠퇴하는 것은 재가자들이 출가자들에게 올리는 시주물의 양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출가자들이 본분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역설한다.

아울러 출가자는 재가자의 공양을 거부함으로써 잘못된 재가자를 질책할 수 있다. 자신의 부모를 잘 모시지 않는 사람, 출가자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 출가자를 해치는 사람, 출가자를 싸우게 한 사람, 출가자 앞에서 삼보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사람 등의 경우 참회하지 않는 한 출가자는 발우를 뒤집어엎어 보임으로써 그들로부터 보시 받는 것을 거부한다. 이를 覆鉢(patta-nikkujjana)이라고 부른다.

 

2) 출가자를 위한 재가자의 역할

 

앞에서 거론했듯이, 삼보에 귀의한 후 재보시, 즉 시주를 통해 승가에 의식주를 제공하며, 승가를 外護하고, 오계 등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재가 불자의 삶이다. 본 절에서는 재가자가 승가를 위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종합적으로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먼저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재가자가 삼보 중 승보에 의지한다고 할 때 승보가 어떤 특정한 수행자 개인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잡아함경?에서는 어떤 특정한 스님 개인에 대한 믿음으로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 범하게 되는 다섯 가지 잘못을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①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스님이 멸시 당할 때, 불교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다.

②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스님이 계를 어겼을 때, 불교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다.

③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스님이 만행을 나가 만날 수 없게 될 때, 불교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다.

④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스님이 환속했을 때, 불교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다.

⑤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불교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다.

 

승가에 귀의한다고 할 때, 재가자는 삭발염의한 출가 五衆 전체, 즉 사방승가에 귀의한다는 마음을 내어야 한다. 이와 같은 마음으로 삼귀의한 재가자는 현전승가에 시주하고 외호하며 불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승가를 외호한다’는 말은 승가가 유지, 보전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승가가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재가자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스스로 출가하거나 자신의 아들, 딸 등 가족을 출가시키는 것’이리라. 출가자는 하늘에서 떨어진 분들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오른 분들도 아니다. 재가자가 발심하여 삭발염의하고 수계를 다짐할 경우 출가자가 된다. 재가 불자는 출가생활을 가장 바람직한 삶으로 생각하는 가치관을 스스로 견지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가치관이 우리 사회에 널리 보급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승가를 위해 재가자가 해야 하는 그 밖의 일들을 ?사분율?에 의거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불, 법, 승 삼보에 대해 공경하는 모습을 보이며 살아간다.

② 승가에 의식주를 제공한다.

③ 출가자의 피치 못할 세속적 업무를 대신함으로써 출가자의 犯戒를 방지한다.

④ 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스님이 발견될 경우 이를 승가에 알린다.

⑤ 승가의 화합을 파괴한 스님이 있는 경우 재가자 중 덕망 있는 자가 비공식적으로 직접 충고한다.

 

이 중 ①‘삼보를 공경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재가자의 외적 몸가짐으로 불상과 탑(불보), 그리고 경전(법보)을 소중히 대하고 출가자인 스님(승보)에게 예를 표하는 것을 의미한다. ②‘승가에 의식주의 시주물을 올린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재가자의 역할이기에 그에 대한 별도의 설명이 불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③, ④, 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③ ?사분율?에 열거된 비구의 250계 중에는 땅을 파서는 안 된다는 掘地戒, 식물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壞生種戒, 금전을 비축해서는 안 된다는 受畜金銀錢戒, 상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는 販賣戒 등이 있다. 이런 계목들을 그대로 지키고자 할 경우 출가자의 사회생활은 불가능해진다. ?사분율?에서는 출가자가 피치 못하게 이런 계목들을 어겨야 할 때에는 재가자가 그 중개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땅을 파는 토목 공사를 해야 할 때, 비구는 직접 삽을 들 수도 없지만, 땅을 파라고 남에게 시킬 수도 없다. 그 때, 비구는 죄가 되지 않는 말인 淨語를 사용하여 재가자에게 ‘이 곳을 알아서 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를 새겨들은 재가자는 그 곳의 땅을 파게 된다. 壞生種戒에 대한 재가자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일반인들은 식물이 생명인 줄 알기에 출가인이 식물의 뿌리나, 과일을 그대로 먹으려고 할 경우 출가인을 비난하게 된다. 그래서 재가불자가 과일 등에 흠집을 내어 죽은 과일로 만든 후 이를 출가자에게 제공함으로써 출가자를 비난으로부터 보호한다. 受畜金銀戒의 경우 출가자는 손수 돈을 받아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을 시켜서 받아도 안 되고, 어딘가에 놓아두고 가게 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재가자가 중개인의 역할을 하게 된다. 비구 중 누군가가 계를 어기고 돈을 받은 경우, 승가의 대표가 되는 비구가 재가자에게 ‘이를 알아서 하라’고 말하게 된다. 그러면 재가자는 이 돈으로 승가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여 계를 어긴 비구 이외의 비구들에게 제공한다. 혹 임무를 맡은 재가자가 돈을 횡령했을 때에는 비구가 이를 지적하면서 그에 대한 시정을 명령하면 된다.

④ 비구들이 가사를 격식에 맞지 않게 입고 재가자의 집에 들어가거나, 생명을 해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땅을 파거나, 재가자가 원치 않는 과도한 시주를 요구하여 재가 거사들의 비난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를 들은 다른 비구들이 당사자를 꾸짖는다. 또, 두 가지 不定法(aniyatā dhammā)의 경우, 신심 있는 우바이가 이를 승가에 고발함으로써 율로 제정되었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이 출가자의 옳지 못한 행동이 발견될 경우 재가자는 승가에 이를 알릴 수 있는 것이다.

⑤ 이는 破僧違諫戒에 대한 설명 가운데 기술되어 있는 재가자의 역할이다. 승가의 화합을 파괴한 비구가 있는 경우 승가에서는 먼저 비공식적으로 경고한다. 이것이 성공하지 못하면, 다른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왕이나 대신, 외도인 사문이나, 바라문 등 사회적 권위가 있는 자에 의해 화합을 破하지 말라는 비공식적 경고가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마저 성공하지 못할 때, 정식으로 갈마에 붙여 승가 전원이 승가의 화합을 파괴한 당사자에게 세 번 충고(三諫)하게 된다. 여기서 보듯이 승가의 화합을 해치는 출가자를 갈마에 붙이기 전에 화합을 권유하는 비공식적 조정자로서의 역할이 재가자에게도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사분율?의 가르침에 토대를 두고 재가자가 승가의 외호자로서 할 수 있는 역할들을 정리해 보자. 승가의 외호자인 재가자는 두 부류로 나누어질 수 있다. 첫째는 승가 주변에서 생활하면서 승가와 세속의 중개인의 역할을 하는 재가자이고, 둘째는 승가에 시주물을 제공하긴 하지만 승가의 생활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재가자이다. 후자의 경우 수행자의 일탈을 감시하고 조언하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자의 경우, 승가에 제공된 시주물 전체를 관리하는 역할도 해야 하고, 스님들이 계행을 지킬 수 있도록 스님들의 세속적 업무를 대리하는 역할도 해야 할 것이다. 율전에서는 이런 재가자를 淨人(kappiyākaraka)이라고 부른다. 시주금의 관리와 사찰의 증축이나 개축 등 모두가 이런 사찰 내 재가자의 업무가 될 것이다. 앞으로 사찰 내에서 이러한 淨人들의 역할이 보다 강화되고 크게 확대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재가자가 승가의 세속적 업무를 대신하고, 승가의 일탈을 감시하고 조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될 때, 출가자는 지계와 수행과 설법이라는 본연의 역할에 보다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슬기롭고 온화하게
글쓴이 : Sagess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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