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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수선님 2018. 9. 23. 11:42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부처님께서 깨쳤다는 ‘중도(中道)’는 곧 ‘한마음[一心]’‘연기(緣起)’‘진여자성(眞如自性)’ ‘공(空)’‘불성(佛性)’ 등의 다른 이름으로도 표현된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 따르면, 생멸문과 진여문이 둘이 아닌 한 마음이므로 ‘불공(不空)’또한 여기에 포함할 수 있다. 헌데 이러한 이름은 지극히 추상적이라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또한 <지금, 여기>의 현실과 동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마음’이라는 표현은 모호한 구석이 커서 어떤 때는 중생심으로, 또 어떤 때는 불심으로 읽어야 하는지 헛갈릴 때가 종종 있다.


좋은 예를 들어보자.


어떤 스님이 선사에게 물었다.

“스님께서는 도를 보십니까?”

“그럼 보지!”

“그런데 왜 저는 보지 못합니까?”

“그것은 네가 있어서 그렇다.”

다시 스님이 물었다.

“그러면 스님께서 도와주시면 보겠습니까?”

“너만 있어도 보지 못하는데 나까지 있으면 도대체 어떻게 보겠느냐?”

그러자 그 스님이 말했다.

“그러면 제가 없으면 보겠습니다.”

“야! 이놈아, 네가 없으면 누가 보겠느냐!”


여기에서 “네가 있어서 그렇다.”의 ‘너’는 분별심으로 가득한 중생심이요, “네가 없으면 누가 보겠느냐!”의 ‘너’는 분별심이 사라진 평등무애한 불심이다. 이렇게 말하면, 불심과 중생심이 제각기 다른 당처로 착각할 수 있지만, 그 둘은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진여의 본체에서 보면 다르지 않고, 생멸의 묘용에서 보면 같지 않다. 이를 임제 선사의 3구에 대입해 보자. 3구는 곧 세 가지 마음이라 읽어도 틀리지 않다. 먼저 임제 선사의 설법을 인용해 본다. (무비스님이 옮기고 해설한 <임제록 강설> 참고)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오르자,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제일구(第一句)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시길,

“삼요(三要)의 도장(印)을 찍었으나 붉은 글씨는 그 간격이 좁아서 숨어 있으니, 주객이 나누어지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제이구(第二句)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시길,

“묘해(문수보살)가 어찌 무착선사의 물음을 용납하겠는가마는, 방편상 어찌 뛰어난 근기(무착)을 저버릴 수 있으랴.”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제삼구(第三句)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시길,

“무대 위의 꼭두각시 조종하는 것을 잘 보아라. 밀었다 당겼다 하는 것이 모두 그 속에 사람이 있어서 하는 것이다.”


제일구는 ‘너와 내가 존재하지 않는 진여의 무차별평등계’를, 제이구는 ‘너와 내가 존재하나 무차별한 연기의 현상계’를, 제삼구는 ‘너와 내가 따로 존재하는 차별번뇌의 현상계’를 가리킨다. 제일구와 제이구는 불심, 제삼구는 중생심일 터이다. 유식학(唯識學)의 이치로 따지면, 일구는 원성실성(圓成實性), 이구는 의타기성(依他起性), 삼구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겠다. 비유하자면, 일구는 거울, 이구는 거울에 비친 사물, 삼구는 거울 속의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

 

이 셋을 모두 ‘마음’이라 하는 데서 착각이 생긴다. 말썽을 일으키는 놈은 늘 제삼구인 중생심이다. 이는 곧 번뇌로, 너와 내가 존재하나 서로 동떨어진 관계가 아님을, 또한 존재 즉 만법(萬法)이란 영원히 존재치 않고 인연 따라 나투어 찰라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에 ‘전도망상(顚倒妄想)’이라 하지 않는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옳음과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얻음과 잃음 등 이분법적인‘분별심’은 제삼구이다. 현상계(사물과 생각들)가 진여의 묘용임을 보지 못하고, 모든 사물과 생각들을 따로이 분별하여 자신의 관념으로 덧칠하는 것이 분별심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사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수만큼, 생각의 수만큼 다른 사과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별심, 번뇌마저도 번뇌가 아니다. 육조 혜능선사께서 일갈하셨듯이, 곧 번뇌가 보리(菩提)이다. 이 말은 번뇌를 번뇌로 받아들이는 그 마음이 번뇌라는 뜻이다. 번뇌더러 ‘너 번뇌 맞냐?’하고 물어보면 뭐라 답하겠는가. 누가 그랬던가? ‘알음알이가 장애라는 얘기는, 알음알이가 장애라고 여기는 그 마음이 바로 장애이다.’번뇌가 보리라는 진정한 뜻은, 물거품처럼 우리 마음에서 수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각들을 내버려두라는 뜻이다. 절로 생겼다 절로 사라지는 생각들은 곧 청정한 진여자성의 현묘한 작용이므로. 생각들 자체가 번뇌인 것은 아니고, 그 생각들이 번뇌라고 여기는 생각이 곧 번뇌이자 분별심인 것이다.


그리하여 육조 혜능선사께서

진여는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활용이니라. 자성이 생각을 일으켜 곧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않고 항상 자재하느니라.”  

“앞생각에 미혹하면 범부요, 뒷생각에 깨치면 부처이니라.”

 

하지 않으셨던가. 생각은 찰라 존재하는 것이라 그 생각을 붙잡으려 하면 결코 잡을 수 없다. 이미 사라져 버린 생각을 지금도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붙잡으려 하고 집착하면 범부이고, 오직 존재하는 것은 ‘지금, 여기의 생각’뿐이고, 그것마저도 휙휙 지나쳐 버려 결코 잡을 수 없음을 깨치면 곧바로 부처의 경지인 것이다.


그리하여 선사께서 또 이르시길,

무주(無住)란 사람됨의 본성이 생각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니라. 앞생각과 지금의 생각과 뒷생각이 생각생각 서로 이어져 단절됨이 없으니, 한 생각이라도 끊어지면 법신이 곧 색신을 떠나느니라.”


 ‘한 생각이라도 끊어지면...’이란 말씀은, 생각생각마다 머무르지 않음이 사람됨의 본성인데, 머무른다고 착각하여 집착하면 우리의 청정한 자성을 망념의 뜬구름이 가려 빛을 잃는다는 뜻이겠다. 이는 곧 부처다 중생이다 말하지만, 부처에 집착하고 중생을 버리고자 하면 이 또한 분별심이며 번뇌라는 준엄한 설법이다. 진여 당처에서 보면,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는 것이다. ‘머무르지 않음’이 바로 연기이고 중도이고 공이고 불공이다. (내 생각에는 진리를 드러내는 그 어떤 표현보다도 ‘머무르지 않음’이 가장 쉽고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가급적이면, 진여니 불성이니 자성이니 중도니 연기니 하는 추상적 표현보다는 ‘머무르지 않음’을 많이 쓰는 것이 좋지 않겠나 싶다.)


육조께서 인가하신 현각 영가 스님 또한 <증도가(證道歌)>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노인은

망상도 없애지 않고 배움도 구하지 않나니

무명의 참성품이 곧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법신이니라


또한 <금강경(金剛經)>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설법하셨다.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響味觸法生心 

應無所住而生其心


‘應無所住而生其心’은 너무도 유명한 문구이다. 육조께서 불법을 대하기 이전, 이 한마디를 우연히 엿듣고 깨쳤다 하지 않은가. 헌데, 대개의 해설에는 표현은 조금씩 달라도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이다. 여기서 生에 대한 해석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낸다’가 아니라 ‘펼쳐진다’로 옮겨야 정확하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펼쳐지나니.”


‘마음을 낸다, 내라’ 는 작위적이고 당위적인 곧 유위의 행위로 이 또한 분별심이자 번뇌일 따름이다. 본래 머무르지 않는 성품인 마음에 대해서 무슨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또 덧붙여서 낼 것인가. 이는 소리를 지르면서 메아리를 그치게 하려는 것과 같고, 그림자를 떨구려 부지런히 발을 놀리는 것과 같다.

 

내버려두라. 억지로 말을 하자니 그런 것이지만, 사실 내버려둘 것도 없다. 뭐가 있어야 내버려둘 것 아니겠는가. 그런 즉, 마음을 낼 것도 아니고 내버려둘 것도 아니다. 색성향미촉법, 곧 모든 사물과 경계, 생각에 우리 마음이란 놈이 인연따라 찰라 펼쳐질 뿐 결코 머무르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닫기만 하면 된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며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인식론적인 전환은 존재론적인 전환을 이끌어내어, 전(全)인격적으로 이제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한다.  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그리하여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무위(無爲)의 삶이 전개되는 것이다.

 

  나아가,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펼쳐지나니’로 위의 법문을 이해하면, 옛어른들의 간절한 가르침조차도 사족이 될 터이다. 


백장선사가 이르길,

“한편 유·무 모든 법에 머물지 않고 머묾 없는 데에도 머물지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다면 그를 큰 선지식 또는 오직 한 분이신 부처님이라 한다. 이 큰 선지식에는 두 사람이 없으니 나머지는 모조리 외도이거나 마군의 말이다.”

“지금의 '비추어 깨달음'이 자기 부처라는 것까지 설명하면 처음 선(初善)이며, 지금은 ‘비추어 깨달음'에 붙들고 머물지 않는다면 중간 선(中善)이며, 붙들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다면 이는 마지막 선(後善)이다.

이상과 같다면 연등부처의 뒷 부처에 속하니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다. 그렇다고 부처는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라고 잘못 말하지 말라.”


또한 황벽선사가 이르길,

“인연을 만나면 곧 베풀고 인연이 쉬면 곧 고요해지나니

만약 이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믿지 못하고

모양에 집착하여 수행으로서 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그 모든 것들이 다 망상이어서 도와 더불어 서로 어긋나 버린다.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따로 부처가 없으며 또 다른 마음도 없다.”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이 곧 ‘모양’이며, 이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생각을 낼지니’로 이해하고 마음을 ‘내고, 버려두는’ 데서 비롯된 해프닝 아니겠는가. 


蕭湛 拜.

 

출처 : 여여불여 如如不如
글쓴이 : slowdrea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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