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하면 스타일 구긴다
집착하면 고통이요 내려놓으면 열반이요 평화다. 집착이 조금이라도 남아 마음을 흔들면 그것이 자신을 무겁게 하고 거기에 걸려 발을 헛디디고 진흙탕 속에서 발버둥 친다. 이전투구다. 고통스러운 외마디와 한숨을 질러댄다. 그것 때문에 완전히 스타일 구기기까지 한다. 반면 내려놓으면 마음에 걸림이 없어 호수처럼 평화롭고 허공처럼 탁 트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내려놓으라고 한다. 심지어는 요즘에 기독교인들도 내려놓음을 강조한다. 그 내려놓으란 말이 ‘방하착(放下着)’이다. 흑씨범지라는 선인(仙人)이 오동나무 꽃 두 가지를 양손에 들고 부처님께 공양하려하자, 부처님은 내려놓으라고 한다. 그래서 그 선인은 둘 다를 내려놓는다. 그런데 부처님은 또 내려놓으라고 한다. 선인은 당황한다. 그때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나’ 내려놓으면 마음 고요해져
“내가 그대로 하여금 두 손에 들고 있는 꽃을 내려놓으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지금 마땅히 밖으로는 6가지 인식대상과 안으로는 6가지 인식주관, 그리고 그 중간으로는 6가지 인식작용을 일시에 다 내려놓고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이것이 그대의 생사를 벗어나는 경지이니라.” -《오등회원 (五燈會元)》〈세존장(世尊章)〉-
내려놓고 내려놓아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다는 말은 완전한 내려놓음을 말한다. 완전히 내려놓으면 생사의 고통에 걸리지 않고 바람처럼 자유로운 삶을 산다. ‘나’, ‘나’하는 그 나에 대한 집착이 완전히 끊어졌기에 마음은 호수처럼 고요해진다. 그것이 열반이고 해탈이다. 그래서 내려놓는 것은 쉬는 것과 통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려놓으란 말인가? 엄양존자가 어느 날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을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조주가 대답한다. “내려놓아라(放下着).” 어리둥절한 엄양이 다시 묻는다.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내려놓으라는 말입니까?” 그러자 스님은 한마디 지른다. “그렇다면 들고 있게.” 이 말을 듣고 엄양은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
아상의 벽 무너뜨려야
사실 엄양존자와 조주선사와의 대화는 선문답이다. 이것은 일종의 화두다. 내려놓았다는 생각에 걸리고 들고 있다는 생각에 걸리면, 그것은 알음알이다. 그 모든 것이 부서져야 한다. 아상의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야 한다. 내려놓는다는 것이 그 정도로 철저해야 완전한 내려놓음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경지까지 가지 못하더라도 내려놓는 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좌선할 때도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올라오는 잡념과 망상이다. 그럴 때는 왜 나는 집중이 안 될까, 왜 이렇게 망상이 피어오를까 하며 조바심 낼 게 아니다. 생각이 올라오면 올라오는 대로 내려놓으면 된다. 그 올라오는 생각을 배꼽 밑 단전부위로 내려놓고 또 내려놓아 보라. 다리가 저리다는 생각이 올라오면 그것도 쑥쑥 내려놓는다. 그렇게 거듭 하다보면 어느덧 망상은 사라지고 마음은 고요해 진다. 그런 뒤에 화두를 들던 염불을 하던 자신이 택한 수행 주제에 몰입해보라. 훨씬 정진이 상쾌할 것이다.
일과 정리하는 내려놓는 시간 갖자
잠들기 전에라도 하루를 정리하면서 내려놓는 시간을 갖는다. 하루를 돌아보면서 마음에 걸렸던 일, 상처 받은 일, 속상한 일, 화나는 일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면서 다 내려놓고 수용해 보라. 그렇게 하루를 완전히 정리해 앙금이 없어야 한다. 내려놓지 못하면 그 생각에 걸려 마음에 업이 쌓이고 업장이 되어 다시 삶을 괴롭히게 된다. 마음의 상처가 병을 불러온다. 내려놓지 못하고 그 상처에 자꾸 억울하고 분한 생각을 보태어 병을 키운다. 따라서 마음의 상처가 병근으로 자리 잡지 못하도록 내려놓고 또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루를 정리한다. 그러면 죽을 때도 여한이 없이 편히 죽는다.
물론 집착의 뿌리까지 남김없이 끊으려면 철저한 깨달음과 해원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마음이 확 트여 있으면 어떤 걸리는 경계가 오더라도 다시 넘어지지 않는다. 깨달음, 그것은 어쩌면 모든 집착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이다. 그렇게 확 트이게 되면 너무나 자유로운 삶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루하루 조금씩이라도 내려놓은 삶을 살아가는 것도 깨달음을 향한 길이지 않겠는가.
출처:불교저널(http://www.buddhism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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