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사념처를 바르게 닦는 공덕
부처님이 쿠루수의 수도 캄마싯담마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사념처 닦는 법에 대해 말씀했다.
"중생들을 깨끗하게 하고 근심과 두려움을 없애주며 괴로움과 번뇌를 멸하게 하는 수행방법이 있으니 사념처(四念處)가 그것이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사념처를 바르게 닦아 위없는 깨달음을 얻었으며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사념처를 바르게 닦아야 위없는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사념처란 무엇인가 몸(身)과 느낌(受)과 마음(心)과 만유(法)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그 생각에 머무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몸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인가. 다니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거나 자거나 깨거나 할 때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또 바깥을 출입하거나 옷을 입고 벗을 때, 말하거나 침묵할 때, 들숨과 날숨을 쉴 때 그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관찰하는 것이다. 또 몸이 잘생겼든 못생겼든 머리끝에서 발끝가지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관찰하고, 송장이 까마귀에 솔개에 쪼아 먹히고 불에 태워지거나 땅에 묻히고 썩어문드러지는 것을 보고 자기 몸도 그렇게 될 것을 관찰한다. 몸을 관찰할 때는 윗니와 아랫니를 서로 붙이고 혀는 입천장에 대고 마음을 다스려야 번뇌를 끊고 멸하여야 한다. 몸을 이렇게 있는 그대로 관찰해 아는 것을 신념처관(身念處觀)이라고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인가. 몸이나 마음의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 옥가 일어날 때의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마음의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느낌을 이렇게 있는 그대로 관찰해 아는 것을 느낌을 있는 수념처관(受念處觀)이라고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인가. 욕심과 노여움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거나 어리석음과 슬기로운 마음, 겸손함과 의시댐, 더러운 마음과 깨끗한 마음, 안정된 마음과 산란한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상태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마음을 이렇게 있는 그대로 관찰해 아는 것을 심념처관(心念處觀)이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만유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인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인연하여 번뇌가 생기는 것이니 마음에 번뇌가 있으면 있는 그대로, 없으면 없는 그대로 관찰해 아는 것이다. 만유를 이렇게 있는 그대로 관찰해 아는 것을 법념처관(法念處觀)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했다.
"만약 어떤 수행자가 7년 동안 사념처를 바르게 닦으면 현세에 구경지를 얻거나 최소한 아나함과를 얻을 것이다. 7년은 그만두고 7개월 동안만, 7개월은 그만두고 7일 동안, 7일은 그만두고 아침저녁 동안만 사념처에 바르게 머물게 되면 그에 합당한 경지에 나아가게 될 것이다."
-중아함 24권 98경 <염처경(念處經)>
팔정도(八正道) 가운데 '정념(正念)'이라는 항목이 있다. '바른 생각'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바른 생각이란 사념처를 바르게 닦는 것을 말한다. 대체로 인간의 생각은 네 가지 문제와 관계가 있다. 몸과 관련된 것, 느낌과 관련된 것, 마음에 관한 것, 어떤 이념에 관한 것 등이다. 우리는 매순간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지낸다. 사념처란 이때 항상 바른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념처란 신수심법(身受心法) 즉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에 대해 관찰하되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념처(身念處)는 부모로부터 받은 이 몸은 아무리 건강하고 아름다워도 반드시 무너지는 것이며 깨끗하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수념처(受念處)는 음욕이나 재물이나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즐거운 것은 그것이 참다운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심념처(心念處)는 우리의 마음이란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념처(法念處)는 모든 만유는 실체가 없고 나에게 속한 모든 것도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신수념법(身受念法)에 대해 깨끗하지 않고(不淨) 괴로운 것이며(苦痛) 영원하지 않고(無常) 실체가 없다(無我)고 관찰하는 것이 바른 생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은 일체의 집착과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만 닦아나가면 누구라도 열반의 과보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에 오면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 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이 다시 긍정된다. 즉 열반의 덕은 영원하며(常) 즐거운 것이며(樂) 능동적인 자재자이며(我) 청정한 것(淨)이라는 것이라고 보게 된다는 것이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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