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도 읽으신 분들은 보셨겠지만 마명대사(馬鳴大師)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기신론에서 보면 진여연기(眞如緣起)라, 우주는 우리 중생이 느끼고 안 느끼고 상관없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순수생명이 상주불멸(常住不滅)이라, 상주불멸의 진여불성은 대승에서만 말을 합니다. 소승에서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대승기신론은 연기법의 마지막 근본 본체적인 해석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다 조건부이기 때문에, 개시(皆是) 인연법(因緣法)이기 때문에 고(苦)요, 공(空)이요,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라고 보통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범주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소승법(小乘法)에 해당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진여불성은 항시 존재한단 말입니다. 화엄, 법화, 열반경이나 능엄, 유마경이나 그런 대승경전은 다 이런 사상을 말씀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승이 못됩니다.
우리가 소승적인 한계로만 불법을 이해한다고 할 때는, 우리가 팔정도를 닦아서 번뇌가 멸하면 공이 아닌가. 종당에는 모두가 공으로 귀결된다. 우리 몸뚱이도 금생에 이대로 있다가 인연이 다하면 소멸되면 그뿐이 아닌가. 소승적인 그런 견해에서는 이것이 자칫하면 인과적인 우리 업(業)사상으로 해서 과거 전생, 금생, 내생에 삼세윤회(三世輪廻)하는 그런 사상마저 긍정하기가 곤란스럽습니다. 이런 것도 역시 소승적인 사상으로 해서는 논리체계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대승이 돼야 진여불성이라 하는, 우리 인생과 더불어서 우주 만유의 본체, 우리 사람의 본성일 뿐만 아니라 우주만유 두두물물의 본성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귀일(歸一)이 된단 말입니다. 이른바 일원적인 형이상하를 다 통달한 투철한 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중생이 금생에 업을 많이 짓고, 전생부터 내려오는 숙업으로 해서, 숙업에다 금생 업을 보태서, 우리 행동이 규정 당하는 것이니까, 금생에도 더욱더 죽을때까지 복을 많이 짓지 않겠습니까. 그런 쪽으로만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인생은 참 답답합니다. 인생은 고해(苦海)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번뇌(煩惱)의 본체는 무엇인가. 생명의 본체는 무엇인가. 이렇게 들어 갈 때는 번뇌, 비록 우리 인간의 가시적인 현상만 보는 중생의 눈에서는 번뇌이지만 본 성품을 보는 성자의 맑은 안목에서는 번뇌 그대로 바로 보리(菩提)입니다.
따라서 본 성품에서는 번뇌가 본래 없습니다. 현상적인 중생의 견해에서만 번뇌가 있고 보리가 있고 그런 구분이 있는 것이지 성자의 모두를 다 평등하니 모든 존재의 근본 성품을 뚜렷이 보는 성자의 분상에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봐져야 그대 맘과 내맘이 한맘이 아닌가. 따라서 마음에서 일어난 그런 몸뚱이도, 그저 내 몸뚱이 현상적인 상으로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이지, 본래는 수파(水波)의 비유라, 물에서 일어나는 천파만파 파도가 모두 다 똑같이 물이듯이, 비록 두두물물이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성품자리는 모두가 일여(一如)하게 진여불성이다. 진여불성으로 돌아가야 이른바 성불이 된단 말입니다.
앞서 제가 말씀다린 바와 같이 소승에서는 진여불성이라는 말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사람이 업을 지으면 업을 지은 만큼 고가 가중됩니다. 과거 전생부터서, 지금은 과거 전생 문제는 저명한 의사도 물리학자도 증명을 합니다. 심령과학적으로 증명하고, 또는 최면술로 우리 의식을 퇴행시켜서 증명을 합니다.
우리가 쓰는 의식은 기껏해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 육식(六識)의 범위 내에서만 씀이다. 그 육식의 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제 7 말나식(末那識)에서 옵니다. 그러면 또 말나식은 어데서 오는가. 말나식은 제 8 아뢰야식(阿賴耶識)에서 옵니다. 아뢰야식은 또 어데서 오는가. 아뢰야식은 제 9 암마라식(菴摩羅識)이라, 암마라식은 청정식(淸淨識), 무구식(無垢識) 진여식(眞如識)이라, 제 9 암마라식은 바로 불식(佛識)입니다. 불심(佛心)이란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본심이기 때문에 불심인 것이고 우주 만유의 본성이기 때문에 불성입니다.
진여불성 이것은 하나의 생명자체이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 가운데는 자비(慈悲) 지혜(知慧) 행복(幸福) 능력(能力) 모두를 원만히 다 갖추고 있습니다. 불교를 믿는 분이 특히 대승법을 믿는 분이 불성공덕(佛性功德)을 분명히 확신을 안 하면 참다운 신앙인(信仰人)이 못 됩니다.
아바라밀은 삼명육통을 위시해서 만공덕을 갖춘 자리입니다. 열반경을 보면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라. 본래 자기 진아(眞我)가 가지고 있는 공덕을 여덟 가지로 구분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한 몸을 여러 몸으로 보이고, 마음대로 공중에도 날 수가 있고, 미진(微塵) 속에 자기 몸을 다 넣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유마경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삼천대천 세계를 겨자씨 한 알에 다 넣을 수가 있다. 왜 넣을 수가 있는 것인가. 본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간성(空間性)이 있고 시간성(時間性)이 있다고 했을 때는 큰것은 작은것 속에 못들어가겠지요. 그러나 부처님 법은 대소장단(大小長短)을 다 떠나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물질이라는 것도 중생의 눈으로 보아서 물질인 것이지 성자가 물질의 근본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만법유심(萬法唯心)이라. 모두가 다 마음 식 뿐입니다.
조금 이해를 못 하신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이니까 믿으셔야 됩니다. 형이하학적인 문제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니까 믿고 아니 믿고 하겠지만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눈에 아니 보이므로 보통은 부정을 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세계만 가지고 따지는 사람들은 경험론이나 실증론 그것만이 진리인 것이지 관념론은 진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불교의 형이상학이 성립이 못되겠지요. 불교에는 경험론 관념론 다 들어 있습니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다 들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는 가장 투철한 과학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현대 물리학은 물질의 저 끄트머리는 전자, 양자, 중성자라는 소립자 더 분석하면 쿼크라는 초소립자들 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요 그러면 그 초소립자들은 어떻게 태어나는 것일까.
다음에는 청정할정(淨)자 정바라밀입니다. 조금도 번뇌의 흔적이 없습니다. 육조단경을 보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하니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리요’라는 법문이 있지 않습니까. 본래무일물이라는 것은 물질은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염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본래가 청정하단 말입니다.
그것은 중생으로 보아서 청정한 것이 아니라, 본 성품자리를 볼 수 있는 성자의 안목으로 보아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개가 보면 모두 개로만 보이고, 부처가 보면 다 부처같이 보인다는 말도 역시 그런데서 연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죽을 때까지 나쁜 생각을 하고 나쁜 행동을 하고 나쁜 말만 해서 그 업으로 그야말로 구속된 그런 영혼이라 하더라도 그 마지막 임종 때 한 생각 바꿈으로 해서 극락세계도 왕생하는 것입니다. 불자님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미심쩍게 생각하시겠지요.
그러나 우리 인간존재 이것도 역시 참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참말로 바로 본다면 원래 무아(無我)입니다. 원래 모든 상(想)은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 내가 살고있는 이 세계도 역시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 허망한 의미에서 지옥도 있고 아귀세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실존적인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세계가 허망ㅅ하듯이, 고,공,무상,무아 이듯이, 개의 세계도 그렇게 있는 것이요, 아귀의 세계도 분명히 그렇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불교의 육도 윤회는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다만 중생이 보고 아니 보고 할 뿐입니다.
그러면 극락세계는 무엇인가. 마음이 편하면 극락인 것이고, 마음이 찌뿌드드하고 마음이 어딘가 메인 데가 있고 또 남도 미워도 하고 그러면 지옥이 아닌가. 물론 그것도 그렇습니다. 일체가 유심조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안락하면 극락이지만, 그러나 그런류의 극락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본래 나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아는 불교에서 중생들이 욕심을 내지 말라고 방편으로 무아라고 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본래가 참말로 무아입니다. 어째서 무아인가. 모든 법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화합되어서 순간 찰나도 머무름이 없이 변동무상하단 말입니다. 어느 한 순간도 어느 한 찰나도 똑같은 우리 존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현상적인 문제는 절대로 실존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본 성품자리 들어가야 실존이고 실상이 있는 것이지 현상적인 문제는 모두가 다 무아고 무소유(無所有)입니다. 본래 무일물이고 물질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와 똑같이 나요너요 내것이요 하는 것이 사실로 봐서는 없는 것입니다. 김아무개 박아무개 모두가 다 가상(假相) 가명(假名)인 것입니다. 모양이 없거니 이름도 역시 가짜에 불과 합니다.
마치 개란 놈이 못(池) 가운데 비친 자기 그림자보고 짖어대고 앞발을 들어 발악을 하듯이 우리 중생들은 자기 번뇌(煩惱) 가지고 스스로 성내고 스스로 사랑하고 하는 것입니다.
본래 내가 없거니 내가 없는 그 사실의 자리에서는 사람도 이름도 없습니다. 내 것도 내 몸뚱이도 없습니다. 이렇게 알고 사업도 하시고 공부도 하시고, 이렇게 알고 도(道)도 닦고 그래야 우리 부처님 공부가 빠르단 말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이른바 반야바라밀입니다.
그러나 모두 허망하다고만 생각하면 그때는 참다운 반야가 못됩니다. 그러면 공도리만 아는 것이지 공이 아닌 진여불성은 모른단 말입니다.
공밖에 모르면 그때는 허무주의 적인 것밖에는 느끼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중생 제도(濟度)를 참다웁게 못합니다.
대비심(大慈悲心)이 아직 못나옵니다.
마음자리에서는 절대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의 흐리멍덩한 눈으로 봐서 현상적인 상으로 봐서 물적인 환경에 그런 자타가 있는 것이지 물질을 떠나버린 근본 성품자리 진여불성 자리에서는 그러한 상은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나라는상 너라는상 또 중생이라는상 목숨이 길다짧다하는상, 개나 소나 돼지도 역시 본래에서는 사람과 똑같은 진여불성입니다. 우리 목숨도 80년 70년 그런 장단이 없습니다. 원래 생명은 영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만이 부활(復活)해서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어떤 누구나 다 본래로 영생합니다. 죽음은 본래가 없습니다.
담나 그 업식 때문에 삼계육도에서 윤회를 합니다. 우리 업식이 윤회 하니까 앞서 말씀드린 삿된 단견은 없습니다. 또 금생에 나쁜 짓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마지막 판에 바른 마음먹고 바로 행동하면 그냥 극락도 갈 수 있기 때문에 이른바 상견도 없단 말입니다. 업장대로 내생을 받으니까 상견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은 부처가 될 때까지 몇생도 헤맵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 본 고향은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되기 전까지는 몇생도 헤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구윤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금생에 잘 못 살면 잘 못 산만큼 고를 받고, 금생에 잘 살면 잘 산 만큼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금생에 잘 닦아서 육도윤회를 면하면 영생의 영역에 들어가기도 하겠지요. 영생의 영역은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하고 만덕을 원만히 갖추어 놓아서, 그 자리에서는 우리 중생들의 삶이 불쌍하게 보이므로 그때는 수원수생(隨願受生)이라, 대비심으로 원력을 세워서 중생계로 다시 태어나고 지옥에도 태어나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육조스님께서는 80생의 선지식(善知識)이라,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께서는 80생 동안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서 중생을 제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모이신 사부대중 우리 불자님들은 모두가 다 금생에만 태어난 불자님들이 아닙니다. 과거 전생에 무수생 동안에 닦아오신 분들입니다. 금생에 꼭 성불하실 분들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성불(成佛)의 길이 탄탄 대도(大道)로 지금 놓여져 있습니다. 우리 인간사회는 그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외길 성불의길 하나의 길 뿐입니다. 다만 중생이 나쁜습관성에 젖어 빨리 못 가고 더디 갈 뿐입니다. 빨리 가면 가장 행복스러운 사람인 것이고, 우주의 궤도 우주의 정리에 따르는 것이 빨리 가는 길입니다.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빨리 못 가는 것은 우주의 궤도에서 이탈된 것입니다. 그래서 궤도에 따르면 힘 안들이고 갈 수가 있습니다. 불교 술어로 임운등등(任運等等)이라. 저절로 그 궤도에서 성불로 지향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궤도에서 이탈해 놓으면 이제 애쓰고 다시 궤도에 진입해야 쓰겠지요.
부처님께서 계행(戒行)을 지켜라. 참선 염불을 해라. 또는 반야의 지혜를 가져라. 반야의 지혜는 제법은 모두가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거품이요 그림자란 말입니다. 꿈이요 허깨비요 거품이요 그림자 같은 것이 아니라 사실 꿈이요 허깨비요 거품이요 그림자 인 것입니다.
중생의 흐리멍덩한 눈으로 보니까 그림자가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실체가 있지 않습니다. 허수아비를 쫓아서 우리가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선은 바른 이해를 갖추어야 바른 신앙이 나옵니다. 모든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서 반야심경 금강경대로 제법은 허망 무상하단 말입니다.
부처님이 되는 길이 절대로 어렵다고 생각을 마십시오. 저 같은 사람도 칠순이 넘었지만 지금도 행자 같은 비구 마음입니다.
제가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한번도 생각 못해봤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부처님의 공덕 부처님의 그 무량 공덕을 제가 어떻게 얼마나 하는가. 부처님 경전 따라서 참선 좀 했다고 그래서 조금 아는 소리 할 뿐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그런 아(我)를 떠나서, 자기라는 모두를 다 떠나서 무량의 공덕을 갖추고 있는 공덕에 비추면 그야말로 태양과 반딧불의 비유입니다. 그런 처지에서 어떻게 공부를 좀 했다고 하겠습니까. 저는 그래도 다행히 부처님 덕으로 출가한지 올해로 꼭 50년입니다. 무던히 공밥 많이 먹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만나면 저는 항시 마음이 부끄럽습니다.
부처님 길이 절대로 먼길이 아닌 것이고, 도인들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풀쩍 비약적으로 뛰어서 여래지에 갈 수가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했고, 조금 더디게는 7일 동안만 불면불와(不眠不臥)를 해서 닦으면 꼭 견성오도(見性悟道)하다. 더 멀리는 90일 이라. 좀더 멀리는 100일이라. 3년이라. 몇 사람들은 변칙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절대로 저와 같이 게으름 피우지 않으실 것을 확신을 합니다. 여러분들께서 저한테 이렇게 풍기는 분위기나 기(氣)가 그렇게 느껴집니다. 제가 겸허하는 그런 의미에서는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꼭 부처님의 정법을 그대로 공부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참말로 별로 먼 길이 아닙니다. 저는 굉장히 헤맸습니다. 근본 불교라, 무슨 불교라 갔다 왔다, 또 무슨 철학이라, 하여튼 나름대로 피상적이나마 동서철학(東西哲學)은 다 섭렵했습니다. 신학(神學)도 중요한 것은 대체로 떠들어 봤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독교를 저와 같이 17억이나 믿는가. 진리가 아니면 그렇게 믿을 것인가. 그러한 의심 밑에서 또 역시 봐진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 석가모니 가르침하고 똑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리 고도한 이론 체계가 있다 하더라도 내 스스로 어떻게 공부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가장 절실한 문제입니다. 그 문제가 해결이 안되면 모두가 그야말로 하나의 이론에 그쳐버리는 공염불이 되기가 쉽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당장에 지금부터서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되는 길 가운데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지름길인 것인가.
아무리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삼매에 들어야 됩니다.
삼매라는 것은 다시 일반적인 술어로 하면 명상(冥想)아닙니까. 석가모니 6년 고행 달마 9년 면벽, 예수 같은 천재도 요단강 강하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선근이 좋은 사람인지라 금식기도 할 때에 마음을 통했지요. 마호메트도 실라산 동굴에서 3년 동안 명상에 들어 그 때 역시 영원적인 영원상을 음미를 했겠지요.
우리가 통하려면 틀림없이 아무리 재주가 좋다 하더라도 사선정(四禪定) 멸진정(滅盡定)을 거쳐야 됩니다. 우리 범부신을 성자의 청정신으로 이른바 육근을 청정하게 하는 삼매가 사선정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외도들도 사선정은 합니다.
멸진정은 우리 아상(我相)을 온전히 없애는 것이기 때문에 성자만이 합니다. 멸진정을 성취해서 우리 선정이 제대로 되어야 아(我)가 떨어집니다. 그러면 그때는 천지 우주가 무아요 대아요 진아요, 우주가 나가 되고 그야말로 내가 우주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주를 하나의 생명 자체로 보는 이것이 일상 삼매입니다.
단경의 부촉품에 가서, 부촉품은 경론의 결론 같은 품입니다. 육조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대들이 만약 여래의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으려면’ 그냥 좀 이론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우리 생리와 심리가 바꿔져서 증명한다는 말입니다. 불성을 증명하는 그 자리를 얻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하는고 하면은 ‘그대들이 먼저 마땅히 뻑뻑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증할 지니라’ 일상삼매 이것은 모두가 진여불성 일원 뿐 이란 말입니다. 일행삼매는 일상삼매라는 그 경계를 일체 모두가 진여불성뿐이라는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생각이라는 생각에 상속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행삼매입니다.
일행삼매란 말이 앞서 말씀드린대로 단경에 다섯 군데나 있습니다.
그래서 단경 부촉품에서 ‘그대들이 만약 여래의(부처의) 일체종지(모든 공덕을 갖춘 지혜)를 얻으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증할 지니라’ 그러면 마치 종자가 대지에 묻혀서 적당한 온도와 습기가 갖추어 지면 차근차근 싹이 터서 나무가 무성하고 꽃이 피고 또 열매를 맺듯이 우리 공부도 역시 원래 부처인지라. 그와 같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하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차근차근 업장이 녹아서 그때는 우리의 진성, 맑은 반야의 지혜는 점점 증장 되어가서 종당에는 해탈을 한다. 이런 법문이란 말입니다. 이걸로 해서 단경이 끝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잘 모르니까 무자 화두가 생기고, ‘개도 불성이 있다’ 개도 불성이 있다 하니까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개의 머리나 심장 어디에 불성이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또 개가 불성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우리 눈으로 봐도 불성이 안보이니까 말입니다. 없다고도 할 수가 있겠지요. 부처님 법은 그런 식이 아닙니다. 불성이 있다고 할 때는 어디 몸 한쪽 귀퉁이 뇌나 시각이나 그런데 가서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온몸 그대로 혼신 그대로 바로 불성이란 말입니다. 무량 무변의 우주 가운데는 불성이라 하는 순수생명 순수 에너지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꼭 법집을 마십시오. 기독교 인구가 지금 17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많은 인구와 우리가 갈등을 한다고 생각하여 보십시오. 불성자리에서는 다 똑같습니다. 자기들도 역시 불성이 되고자 해서 자기들 마음 안에서는 몸부림칩니다.
다만 그 법집 때문에, 하나님은 저 하늘위에 있다. 기도를 모시면 은총을 베풀어준다. 이런 식으로 믿으니까 그때는 안되지요.
중생을 제도 할 때는 절대로 병도사라. 병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정말로 회통한 부처님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법을 우리가 모를 때는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 됩니다. 그래서 참선을 우리가 하다보면 공부가 익어지면 몸도 자기 몸 같이 안 느껴지고, 우주가 하나로 두루 통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아! 이렇구나 이러니까 모두가 다 원융무애라 하는구나. 이렇게 느껴진단 말입니다.
명상(瞑想)을 떠나서, 참선(參禪)을 떠나서 마음 구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입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염불을 해서 염불삼매에 들든 상관이 없습니다.
염불해서 삼매에 들면 염불삼매요, 주문해서 삼매에 들면 주문삼매가 되겠지요. 또 화두를 들어 삼매에 들 수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다만 우리 마음이 상을 떠나서 오로지 청정무비한 영생불멸한 그 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자성입니다. 자성이고 불성입니다. 진여청정성이라 자성이라 불성이라 모두가 다 같은 뜻입니다. 여래장, 법성, 도, 열반, 극락 모두가 같은 뜻입니다. 다 동일이명(同一異名)입니다. 이름만 다른 것이지 뜻은 똑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절대로 길 잃어버린 양을 찾는데 이길 저길 갈림길에서 헤매는 그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 앞서 말씀드린 바 달마스님이나 또는 육조스님같이 그런 모든 번쇄한 교법을 해치고 말입니다. 오직 순수하니 마음 깨달아서 가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바로 우리 마음이 산 생명이거니 그 마음 자리를 바로 딱 집어서, 그 자리를 가리켜서 해탈의 법문을 주었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마음 이외는 다른 것은 없다. 우주에는 진여불성 뿐이다. 이렇게 확실히 믿고, 그 마음을 앞생각 뒷생각에 딴 생각이 끼지 아니하도록까지 지속을 시킨단 말입니다. 그러면 하루 앉으면 앉은 만큼은 일좌자일좌불(一坐者一坐佛)이요 일일좌일일불(一日坐一日佛)이라. 하루 앉으면 앉은 만치 부처가 되어가고 또 이를 앉으면 이를 앉은 만큼 부처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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