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음심하고 먹는 것 하고
그 두 가지 못 끊으면 아까 능엄경 말마따나
증사 작반이라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짓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바른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거기에 걸 맞는 법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 법의 능력의 한계가 무엇인가 하면은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면 분명히 거기에 상응된 공덕(功德)이 나오는 것인데,
그것이 이른바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석 三자, 밝을 明자 삼명이라. 육통은 삼명까지 포함해서 여러 가지 신통이 그기에 들어갑니다만 하여튼 삼명육통을 제대로 해야 바로 깨달았다고 본단 말입니다.
삼명육통을 못하면 아무리 자기 스스로 이제 내가 도인이다. 우리 스님이 위대한 분이고, 우리 문중(門中)을 다스리는 그런 어른이 위대한 도인이다. 이렇게 한들 우리가 믿을 수가 없어요.
우리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실 때는 그냥 보통 그렁저렁 훤히 마음이 열려가지고서 그렇게 그냥 되신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마따나 과거 무수생(過去無數生) 동안에 그 젖어온 그 여러 가지 번뇌망상(煩惱妄想)을 모조리 다 없애고서,
모조리 없애면 그냥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조리 없애면 없앰과 동시에 무량공덕(無量功德)이 거기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무량공덕이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른바 삼명육통이란 말입니다.
삼명육통을 제대로 했으면 온전한 도인이고 말입니다. 못했으면 온전한 도인이라고 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저 같은 사람도 금타대화상, 금타선사님의 법문(法門)을 소개를 그전부터서 몇 번 하려고 벼렀어요. 벼러왔는데, 기왕 할 바에는 내 스스로 훤히 그야말로 확철대오(擴徹大悟) 해가지고 해야 되겠다.
그렇게 마음먹고서 주저주저했는데 인제로 어언 간에 확철대오는 커녕 가까이도 못가면서 이제 나이가 팔십이 되었으니 인제는 미루어 놓을 수 없잖습니까.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歸依)했다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그야말로 수승한 행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 그야말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입니다. 그 몇 생을 두고, 몇 만생을 두고 범부 노릇 많이 하고, 잘못 살아서 저 지옥도 가고, 또 축생도 되고 하다가 금생에 다행히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인간 존재의 모든 존재의 궁극적 목적은 성불 아닙니까.
사람만 성불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이라 모든 존재가 다 부처의 성품이 있단 말입니다.
부처의 성품이 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모두가 다 부처라는 뜻입니다.
본래 부처니까 종국적으로 모두가 다 부처가 되어야 됩니다. 부처가 안 되어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특수한 사람만이 성불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중생이 일체중생개당작불(一切衆生皆當作佛)이라.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가장 지금 무거운 번뇌(煩惱)가 무엇인고 하면은 지금 나(我)라는 존재가 지금 내가 생각한 대로 내가 있다는 이른바 아견(我見)이라. 나 아(我)자 볼 견(見)자 아견이란 번뇌가 제일 무거운 근본적인 번뇌입니다.
그러나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我)라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불교와 다른 가르침과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가 무엇인가?
다른 종교는 아(我)라는 것이 없다하는 그런 종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그 시초 초부터서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항시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한 가르침입니다.
나(我)라는 것이 왜 없는 것인가?
그냥 무턱대로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는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일 뿐이란 말입니다.
금강경(金剛經)이나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무슨 경이나 모두가 다 ‘제법공(諸法空)’이 아닙니까. 사람 몸뚱이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이것은 현대 유물론(唯物論)과는 정 반대 아닙니까. 그러기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아닙니까. 「나」라는 것이 있지가 않은 것인데, 우리 중생이 이 번뇌(煩惱)에 가려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를 못합니다.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은 모두가 다 공(空)인 것입니다.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인(因)과 연(緣)따라서 이루어진 그 유위법(有爲法)이라 하는 것은, 대상적(對相的)으로 있는 법이 유위법이 아닙니까.
대상화(對相化)시킬 수 있는 법이 유위법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모든 것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여져서 시간적(時間的)으로 공간적(空間的)으로 나투고 있는 것은, 이것은 그때그때 고대고대 일초의 몇 천분의 일 동안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가 않습니다. 변화무쌍(變化無雙)하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부처님가르침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한 가르침입니다.
가장 철학적(哲學的)이요 가장 과학적(科學的)인 가르침입니다.
모든 법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은 이것은 어느 순간도 가만히 있지가 않는 그러한 이른바 제행무상의 법이란 말입니다.
그리스의 위대한 철인(哲人) 헤라클레이토스도 만법유전(萬法流轉)이라, 그 모든 것은 다들 움직이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존재가 없는 것은 움직일 수 없지만은 존재적으로 존재가 이렇게 인간이 대상화 시켜서 볼 수 있는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움직이고 있습니다.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한 시간 동안 움직이고 또 쉬고 그런 것이 아니라 일초의 몇 천 분의 일도 쉬지 않고 그대로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까.
그러기에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하는 것은 제행무상이라, 모두가 있는 것은 그때그때 고대고대 변화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어느 순간도 어느 공간도 그대로 있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결국 없다고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행무상(諸行無常)이기 때문에 제법무아(諸法無我)라, 무상한 것은 있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라고 볼 수가 있습니까. 결국은 무아라 나도 없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 세포가 그대로 가만히 있다면 모르지만 일 초 전과 일 초 후와 몸뚱이 세포가 같지가 않습니다. 일초의 몇 조분의 일도 우리 세포가 지금 그대로 가만히 있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런 것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불교의 가장 중요한 술어의 하나가 즉 말하자면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왜 무아인가 하면 제행무상이라, 모두가 다 움직여서 마지않고 무상한 것은 그야말로 바로 그때는 공(空)이요, 무아란 말입니다.
너무 시간을 제가 인제 다른 옆에 나가는 말로 해서 허비해버리면 안되기 때문에 다시 본래적인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역시 그러한 법집(法執)이라든가 이른바 근본주의, 근본주의를 꼭 현대인들은 지양(止揚)을 시켜야 됩니다.
지양을 시키려면 바른 정보, 바른 정보를 우리가 알아야 그래야 인제 그 정보를 기점으로 해서 순화를 시켜서 선택을 하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어떠한 수행법(修行法)이 우리가 성불하는데 가장 요긴한 수행법인가?
그 수행법 때문에도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고민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선 이제 참선하는 방법만 두고도 인제 생각해봅시다.
특히 우리 조계종(曹溪宗)에서는 참선하는 방법을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의심(疑心)해라. 그거 아닙니까.
일본(日本)도 역시 임제종(臨濟宗)이라, 임제 스님은 화두공안을 해온 분도 아니지만은 임제종이란 이름 밑에서 일본 임제종도 공안, 화두공안을 의심합니다.
허나 또 반대파가 있단 말입니다.
묵조선(默照禪)이라. 화두공안을 배격하고서 그때는 화두공안 없이 그냥 잠자코 명상에 잠긴단 말입니다.
가사 한국으로 말하면 그냥 원불교(圓佛敎)나 그런 종교의 가르침 아닙니까.
또 일본도 역시 그 조동종(曹洞宗)이 있는데, 일본 조동종은 그 화두 하는 임제종보다 훨썩 수가 많습니다.
그래 조동종은 화두 없이 그냥 잠자코 명상에 잠긴단 말입니다.
또 한 파가 있습니다. 있는데, 우리 한국은 별로 없지만 일본은 황벽종(黃檗宗)이라.
황벽종의 선원(禪院)이 그야말로 수 백 개 수 천 개나 있습니다만, 그 황벽종은 공부하는 방법을 염불선(念佛禪)이라, 이른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즉 말하자면 아미타불을 하나의 공안을 삼아서 공부하는 그런 염불선이 일본 황벽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은 자기들이 세계 불교의 주인공같이 행세를 합니다만 그래도 하여튼 어떻든 간에 화두공안을 드는 임제종도 있고, 화두공안을 안 드는 묵조선도 있고, 조동종도 있고, 또 그런가 하면은 묵조도 또는 화두공안을 의심하는 것도 아닌 염불을 주로 하는 염불선도 있고 세 파가 인제 솟발(삼발이) 모양으로 병립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저 대만(臺灣)이라든가 중국(中國)이라든가 또는 저 월남(越南)이라든가 그런데서는 주로 인제 염불선(念佛禪)을 주로 합니다.
그렇게 이제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 것인데, 그런 방법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선택해야 할 것인가?
우리 한국에 있는 스님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화두공안을 의심을 안 하면은 이것은 외도선(外道禪)이다, 이렇게 하는 풍토가운데서는 아!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요. 어느 누구나가 좋아하던 싫어하던 옳던 그르던 간에 어린애가 되었든, 노인이 되었든 화두공안을 의심해야 그래야 이제 이른바 참선이라 하는 이름을 붙인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는 근본주의 또는 무슨 법만이 옳다는 법집을 떠나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선지식들한테 말씀을 들은 경우라면 몰라도 그러지 않는 경우는 우리 스스로가 그 불교의 역사, 불교를 역사적으로 공부를 좀 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건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공부를 해야 어떤 법이 어느 시대에는 더 융성(隆盛)하고, 어떤 법이 어느 시대에는 더 쇠미(衰微)하고 그런 과정을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것을 그런 것이 참 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 인데, 금타선사께서는 그런 문제에 관해서 또 아주 관심을 많이 두고 그 육조(六祖) 혜능(慧能)스님, 육대 조사이신 혜능스님 법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 육조 혜능스님은 사실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화두공안을 의심한다든가 또는 묵조를 한다든가 또는 염불선을 특별히 한다든가 그런 것에 대해서 관심을 안두고서 오직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신수봉행(信受奉行)을 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육조 혜능스님께서 떠나신지가 지금에 1300년이나 됩니다. 그런데 1300년 동안에 제가 아는 그런 범위 내에서는 가장 육조 혜능스님의 법을 그대로 계승한 분이 이 금타선사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아까 우리 염불하는 스님께서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이라고 그래서 그 내용을 간단히 읽었습니다만은 그 보리방편문이라는 그것이 그 내용이 육조 혜능스님께서 하신 선법(禪法)하고 똑 같습니다.
저는 그 전에는 잘 몰랐어요. 잘 몰랐으나 사람들이 육조단경(六祖壇經)을 하도 번역도 많이 하고, 또 육조단경이 참선의 교과서 같은 경 아닙니까. 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우리 인제 그것에 관해서 연구 발표도 하고,
그래서 저도 육조단경을 번역할려고 마음먹고서 이제 또다시 몇 번을 봤단 말입니다. 몇 번을 보니까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육조단경에서 육조 혜능대사가 스스로 공부도 하시고 또 일반중생들한테 그 교화하신 그런 법문 내용이 즉 말하자면 보리방편문 내용하고 똑 같습니다.
육조단경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어요. 육조단경의 가장 핵심, 즉 말하자면 중심 과제입니다. 육조스님께서 이제 한 몇 천명 모인 대중 앞에서 여러분들이 지금 마음을 단정히 해서 말씀을 잘 들으시오. 해놓고서 지금 여러분들이 여러분 마음 가운데 그야말로 참하고 지성스러운 마음을 하고서 이제 잘 들어라고 해놓고서 여러분들이 지금 나 혜능 따라서, 혜능 스님이 육조스님 법명 아닙니까. 나 혜능의 입 따라서 세 번씩 되풀이 하시오.
그래 특히, 이제 육조단경의 가장 고본(古本)이 돈황본(敦煌本)인데 돈황본을 보면은 석 三자 부를 唱자 세 번 부르라고 해서 딱 삼창이라 써 있단 말입니다.
하여튼 지금 육조스님께서 내 입 따라서 세 번씩 부르시오. 한 것이 ‘우리 마음에 있는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Vairocana)에 귀의합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원만보신불(圓滿報身佛)에 귀의합니다. 또 우리 마음에 있는 천백억화신불(千百億化身佛)에 귀의합니다.’
이렇게 해서 혜능스님이 자기 입 따라서 세 번씩 되풀이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조단경이라는 하나의 경전의 핵심내용이 거기에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모두가 다 이른바 그 가르침을 하나의 주석(註釋)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내용을 즉 말하자면 금타선사께서 조금 더 풀이해서 알기 쉽게 풀이해서 한 것이 아까 스님이 읽은 그러한 보리방편문의 내용입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그래서 모두가 다 삼위일체(三位一體)로 종합해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 혜능스님께서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도 같이 참선의 그야말로 할애비 같은 분 아닙니까. 달마(達磨)스님의 가르침 따라서, 헌데 그이가 한 것이 알고 보니까 내내야 이제 염불(念佛)이란 말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염불 그러면은 아! 가장 쉽고 차원이 낮은 것이 염불 아닌가. 화두공안하면은 아주 훨썩 차원 높고 그런 것이 화두공안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 부처님을 믿고 있다면서 부처님을 믿고 있는 우리가 부처님을 너무나 소홀히 생각합니다. 너무나 홀대합니다.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부처고, 천지 우주가 바로 보면 다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 덩어리입니다.
그 부처님을 생각한 것이 염불(念佛) 아닙니까. 본래 부처인 우리 마음이 망상에 젖어 있다가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그 본래 부처인 가르침을 우리가 받아서 다시 또 부처가 되는 것이 우리 공부란 말입니다.
육조 혜능스님은 참선(參禪)의 할애비 같은 분입니다. 참선하는 사람치고 육조 혜능스님을 들먹이지 않은 분이 있습니까. 그 육조 혜능스님이 그렇게 말씀을 했는데 그것은 비단 육조 혜능스님 말씀에 국한이 안 되고서 그 오조(五祖) 홍인(弘忍)스님, 특히 사조(四祖) 도신(道信) 스님, 사조 도신 스님 말씀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그러니 이제 달마 때부터서 초조 달마, 이조 혜가, 삼조 승찬, 사조 도신인데, 삼조 승찬까지는 그때까지 이제 탁발(托鉢)하고 지내면서 일정한 처소(處所)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사조 도신스님 때부터 비로서 이제 황매산(黃梅山)에 하나의 도량을 꾸며서 오백명 칠백명 같이 집단적으로 공부했단 말입니다.
사조 도신스님께서 법문을 굉장히 많이 하셨습니다.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라 하는 그 가운데 다 나와 있습니다.
그 사조 도신스님 법문을 그대로 중요한 것을 그대로 인제 계승을 해서 밝혀 놓으신 것이 아까 말씀 마따나 인제 육조단경에 있는 귀의일체삼신자성불(一切三身自性佛)이라.
그 우리 마음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있고, 이것이 우리 마음의 본체고,
또는 우리 마음의 원만보신 노사나불이라 이것은 우리 마음의 공덕상(功德相)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천백억화신불 이것은 우리 마음의 모든 작용(作用)을 말한 것입니다.
체(體)와 상(相)과 용(用)과 모두를 다 겸비한 것이 즉 말하자면 이른바 삼신불(三身佛)을 말한 것인데 이러한 삼신불사상(三身佛思想)이 즉 말하자면 삼신불 귀의(歸依)하라는 사상이 육조단경의 중심 사상입니다.
육조 단경을 번역도 하고 그렇게 하신 분들도 별로 그런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안두는 것 같아요.
저 같은 사람도 제가 재주가 있어서 그것을 그렇게 터득한 한 것이 아니라 다행히도 그 「육조단경의 세계」라는 김지견(金知見) 박사가 낸 책이 있어요.
그 책에는 일본사람 또는 중국사람 또는 대만사람 또 세계적인 불교학자들이 육조단경에 대해서 연구한 논문이 실려 있단 말입니다.
논문이 실려 있는데, 그 논문에 일본 경도대학, 일본 경도대학은 동경대학하고 똑같이 병칭되는 아주 명문대학입니다.
경도대학 명예교수로 있는 다마찌고조란 분이 있어요. 다마찌고조 그분은 나이가 한창 고령인 분입니다.
그래서 임제종 선방(禪房)에 들어가서 공부를 열심히 또 하신 분이어요. 학자인 동시에, 그래서 도(道)를 깨달았다고 또 인가(認可)를 몇 번 받았어요. 받아가지고 있어보면 나중에 내가 깨달았다는 인가를 받았는데 깨달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아무런 공덕(功德)도 없고, 또 어떤 신통(神通)도 지혜(智慧)도 없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차 또 열심히 선방 들어가서 또 공부해가지고서 스승한테 가서 인가를 또 받았어요. 몇 번 인가를 받았지만은 내내야 결국은 범부심(凡夫心)을 떠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인제 육조단경을 다시 제차 보았더랍니다. 제차 보니까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단경(壇經)의 중심사상(中心思想)이 즉 말하자면 똑같이 모두가 다 우리마음에서 우리 마음의 법신(法身)을 관찰(觀察)하고 우리 마음의 보신(報身)을 관찰하고 우리 마음의 화신(化身)을 관찰하고 이렇게 해서 모두가 다 하나의 아미타불(阿彌陀佛)로 해서 귀의(歸依)를 시킨 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육조단경의 가장 핵심사상이 내내야 결국은 귀의일체삼신자성불(歸依一體三身自性佛)이라, 우리 자성불에 귀의하라는 그런 법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더 연구해보니까 결국은 그것이 비단 육조 혜능스님 말씀뿐만 아니라 사조 도신스님도 말씀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금타선사의 수행법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육조 대사의 그런 수행법을 그대로 인제 계승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가 어디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길의 순로(順路)라든가 한계(限界)나 그런 여러 가지 길의 안내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현재 한국의 불교계(佛敎界)에 있어서나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가 그 시간이라든가 정력을 낭비하지 않고서 올바른 정통으로 바로 갈 것인가. 즉, 다시 말하면 우리가 공부할 때 있어서의 차서(次序) 문제가 다 모호하단 말입니다.
아, 일 년 동안 참선했는데 내 마음이 지금 얼마만치 정화(淨化)가 되어 있는가. 이런 것도 우리가 잘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도 몇 십 년 동안이라든가, 몇 년 동안 인제 공부를 했으면 우리 마음이 얼마만치 정화가 되었는가 좀 가늠해야 할 것인데 통 그런 것이 없단 말입니다.
화두 들고 있다면 단박에 되어버린다? 어떻게 단박에 되는 것인가?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그렇게 점차로 이렇게 올라가는 그런 과정이 없다면 또 할 수가 없지요. 그러나 기신론(起信論)이나 또는 화엄경(華嚴經)이나 또는 그야말로 참 법화경(法華經)이나 또는 능엄경(楞嚴經)이나를 보면은 공부해서 올라가는 차서(次序)가 다 있어요. 모두가 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차서가 있긴 있는데, 우선 공부한 사람들은 마음이 급해서 인제 그런 차서를 일일이 보고 있으면 골치가 아프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예 볼려고도 않고서 아,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점수법(漸修法)이다라고, 그런 그 한계도 모르고, 자기 공부가 얼마만치 된 지도 모르고, 덮어놓고 공부하는 것을 가리켜서 암증선(暗證禪) 그래요. 암증선이라 어둠 暗자, 증명할 證자. 내 공부가 지금 얼마만치 돼 있는가. 아, 몇 십년 동안 공부했다 하더라도 아, 지금 자기 공부가 얼마만치 갔는가를 전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가늠할 수 있는 가르침이 원래 불경 가운데 없다면 그건 할 수가 없겠지요. 허나 원래가 다 있단 말입니다.
여러분 능엄경 강원(講院) 나온 분들은 다 배우셨겠지요. 능엄경에 우리가 세밀하게 올라가는 과정이 다 있습니다.
화엄경도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열 단계로 구분한 것도 있고, 또 오십 단계로 구분한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전혀 참고로 않고서 그냥 아까 말씀 말따나 암증선이라 어두운 가운데서 그야말로 암중모색(暗中摸索)하는 식이라 말입니다. 암중모색할 때는, 이따금은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이 마음이 활짝 열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마음이 활짝 열리면 그냥 이제 공부가 다되었다고, 그 한계를 알면은 공부가 얼마만치 갔겠거니 하고서 가늠할 수 있지만은 그런 것이 없으니까 갔다가 이제 그때그때 기분 좋으면 아 공부가 잘돼서 그런다. 이렇게 착각한단 말입니다.
그 일본서 18세기 경에 임제종의 아주 중흥조(中興祖)라는 위대한 선사가 있어요.
이 선사가 그 백은혜학(白隱慧鶴)선사라고, 흰 白자, 숨을 隱자, 일본에서는 아주 유명한 선사입니다. 이분이 18세기 때나 그 때 분인데 임제종 중흥조라 그래요.
그래서 화두선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부처님같이 숭앙(崇仰)하는 그런 분입니다. 그런 분인데 그이가 공부를 몇 년 동안 인제 하니까 마음이 활짝 열린단 말입니다.
마음이 열려서 통쾌하고 참 그런 참 쾌적한 기운이 어디 비길 대가 없단 말입니다.
자기가 말하기를 “내가 참 그야말로 일본 참선하는 불가에 있어서 삼백 년 동안 나같이 아주 통쾌하게 깨달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아주 자부심을 냈습니다.
그래서 참 자부심을 가지고서 아, 참 대선사가 된양하고 지내는데 나중에 얼마 안가서 그냥 차근차근 마음이 어두워진단 말입니다.
몸도 아파지고 말입니다. 그래가지고 이제 나중에는 죽을 정도로 몸이 아프고, 공부가 애매모호(曖昧模糊) 해지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깊은 산중에 그 숨어 있는, 그분은 불교인이 아니라 그분은 도가道家 공부를 하는 백유자(白幽子)라는 분인데, 그분을 찾아가서 그분한테 가서 이제 관법(觀法)공부를 해가지고서,
모두가 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마음공부만 주로 한 사람인데, 마음공부를 하는 그런 관법공부를 해가지고서 그래가지고서 자기 병을 낫고, 나온 뒤에는 지금 「야선한화(夜船閑話) 」라고 지금 선방에 돌아다니는 조그만 책자가 있어요. 거기에 즉 말하자면 공부하고 고생하고 스승 만나서 자가 병 고치는데 그런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와 같이 자기가 공부하는 것이 얼마만치 지금 깊이 들어갔는가, 그 한계를 모르면 그런 오류를 범하고 또는 고생을 많이 합니다.
헌데 그 불경(佛經) 가운데나 그런 불교의 여러 가지 논장(論藏) 가운데 아까 말씀 마따나 이런 올라가는 과정적인 말씀이 아주 부지기수로 많단 말입니다.
그런 것을 그것이 하도 복잡하고 또 보통 범부의 머리로 해서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아예 무시해 버린단 말입니다.
아예 무시해 버리니까 화두나 들고서 의심하고, 죽도록 의심하고 몇 년 동안 그렇게 지내지요.
허다가 세월이 흘러서 몸도 쇠약해지고 억지로 의심(疑心)하니까 또 상기(上氣)가 되고, 또 병(病)이 되고 약 먹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지금 우리 한국의 보통 선원(禪院)에서 하는 것이에요.
금타선사(金陀禪師)께서는 그런 것을 참 그야말로 그 자기도 해보니까 지극히 고생도 해보고 그러다가 다행히도 과거 숙생에 많이 닦아가지고 마음이 열려서 성자가 되니까 마음이 훤히 트이는 걸로 해서 각 경론을 참고해 가지고서 이런 올라가는 차서의 순서를 정했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라.
여러분 나중에 이 금강심론(金剛心論)을 받으시게 될 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가운데 해탈십육지라는 그러한 장절이 있습니다.
해탈십육지에는 아까 말
씀드린바와 같이 부처님이나 그 뒤에 위대한 조사(祖師)스님들이 우리 범부에서 성불까지 올라가는 그런 한계를 조목조목 비교해가면서 해설을 했어요.
어떠한 때에 올라가면 우리 마음이 어떻게 맑아지고, 또는 우리마음의 정도라든가 또는 증상이 어떠한 증상이 나오고 하는 것을 말입니다.
이런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참선을 오랫동안 안 해보신 분들은 별로 느끼시지 못하지만은 참선을 적어도 10년이고 이제 참 해본 분들도 그렇게 공부를 무던히 했지만은 깜깜하단 말입니다.
어떻게 되어야 깨달음인가? 아까 그 깨달음의 증상을 제가 다 말했지만 그 부처님께서 깨달으실 때는 맨 처음에 업장(業障)이 다 녹아지니까 숙명통(宿命通)이 열렸습니다. 숙명통이라. 숙명통은 과거를 다 훤히 아는 지혜란 말입니다.
자기 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과거도, 다만 바로 전에 있는 그런 과거가 아니라 무시이래(無始以來)의 무한세월동안 과거 무한세월동안의 모든 것을 다 아는 지혜가 이것이 숙명통입니다.
여러분들 공부가 좀 돼서 아무리 잘 돼서 좀 기쁜 마음이 생기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 공부할 때는 그때그때 쾌적하고 기분 좋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경솔한 사람들은 그냥 내가 공부가 이만하면 무던히 됐겠지. 이렇게 착간한단 말입니다.
그런 때라도 내가 지금 숙명통을 했는가 안했는가. 그렇게 숙명통을 못했으면 공부가 아주 멀었단 말입니다. 숙명통을 꼭 먼저 해야 됩니다. 그래야 깨달았다는 증거가 된단 말입니다.
그 다음 무엇인가 천안통(天眼通)이라, 천안통은 미래를 다 안단 말입니다. 아까 숙명통은 과거를 깨닫는 것인데, 천안통은 미래를 다 알고 또는 우주 만유를 모두를 앉아서 볼 수가 있단 말입니다. 태양의 중심도 볼 수가 있고, 아, 별의 중심도 볼 수가 있고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마음 깨달으면 다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헤아릴 수 없는 무량공덕이 우리 마음에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어디서 꿔올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천안통이 생겨서 아까 말씀마따나 미래세(未來世)를 다 내다보고, 또 우주만유(宇宙萬有)를 그대로 우리가 이제 참 통관(洞觀)한단 말입니다.
또 그다음에는 누진통(漏盡通)이라, 우리 중생의 번뇌, 번뇌망상 무명심을 다 없애버린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석 三자, 밝을 明자 삼명통인데,
삼명통을 해야 그래야 제대로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게 뚜렷이 한계가 있습니다.
또 이런 것은 공부를 무슨 학문적(學問的)으로 많이 했다고 해서 할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학문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 통하면 되는 것입니다. 학문을 많이 하면 자꾸 이렇게 따지고 저렇게 따지면 결국은 그야말로 참선을 못하니까 우리 마음이 안통하지요.
어떠한 경우나 꼭 삼매(三昧)에 들어서 참선 가운데 깨닫는 것이지 교리 체계로 해서, 교리체계를 이리 뒤지고 저리 보태고 깎고 해가지고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 학자 분들은 불교의 그 많은 교리를 체계적으로 이렇게 공부하고 저렇게 공부해서 여러 가지 훌륭한 논문을 쓰는 것은 그건 갸륵합니다. 그건 갸륵한데 그렇게만 해서는 도인이 못됩니다.
어느 땐가는 다 놓아버려야 됩니다.
금생에 인간을 위해서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의 본래면목자리 본래본분자리, 본래본분자리는 부처가 되는 것 아닙니까.
제가 아까 입이 닳도록 소개한 육조 혜능스님도 일자무식(一字無識)이라 합니다. 일자무식이 참으로 긴가 아닌가는 우리가 확증을 못하지만은 아무튼 학문을 많이 한 분은 아니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도 참선 그러면은 육조 혜능스님을 할애비같이 우리가 존중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모든 과정을 그 불경 내에 있는 모든 과정을 총 망라해서 십육 단계로 체계화 한 것이 금타 선사의 하나의 그야말로 참 하나의 후학들을 위한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아이! 5분을 무슨 말씀으로 매울까?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 우리가 인제 마음을 통해서 성자가 이제 되는 한계를 분명히 외워 두시길 바랍니다. 꼭 삼명육통이 되어야 그래야 올바른 성인입니다.
아무리 자기 문중어른이고, 또 역사적으로 그야말로 이름은 사람들이 숭앙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정작 도인인가 아닌가 말입니다. 도인인가 아닌가는 도를 통해야 도인 아닙니까.
이름만으로 해서는 그때는 도인이 못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얼마만치 공부를 해야 되는가 얼마만치 공부를 해야 되는가는 꼭 깊은 삼매에 들어야 하는데 깊은 삼매에 들라면은 또 무엇이 필요한가?
그냥 바로 삼매에 들 수가 없잖습니까.
특히, 우리 출가한 스님네들은 깊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삼매에 들라면은 철저한 계행(戒行)을 지켜야 됩니다.
시라불청정(尸羅不淸淨) 삼매불현전(三昧不現前)라. 시라(Sila)는 계율을 말하는 것인데, 계율이 청정하지 못하면 절대로 삼매에 못 듭니다.
그러면 계율이 청정한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 음식 함부로 먹지 말고, 남여 이성 간에 음욕(淫慾)을 떠나야 되고 말입니다. 이 두 가지 못 떠나면 절대로 삼매에 못 듭니다.
우리 불자님들, 특히 재가불자님들은 그야말로 참 육재일(六齋日)을 꼭 지켜야 한다고 제가 그때그때 법문 때마다 역설을 하지 않습니까.
육재일이란 것은 우리 스님 네들은 항시 육재일 기분으로 출가생활을 해야 되지만은 재가 불자들은 하다못해 육재일만이라도, 육재일만이라도 출가한 셈치고서 하루일종(日中一食)하고, 고기나 술이나 기타 그런 잡스러운 것을 먹지 말고 말입니다.
또는 육재일만이라도 남여 이성 간에 자기 내외라 하더라도 꼭 그 아주 그 순결을 지켜야 됩니다.
여러분들 능엄경을 보신 분들은 알지만은 능엄경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그 음심(淫心)을 떠나지 않고서 삼매에 들려고 하는 것은 증사작반(蒸沙作飯)이라,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짓는 것이나 같단 말입니다. 모래를 삶아서 밥이 됩니까.
음심을 떠나지 않고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내외간이라 하더라도 그 우리가 참 친밀(親密)하고 다생겁래(多生劫來) 훌륭한 도반(道伴)으로 알고 그렇게 같은 도반을 사귀어야지. 꼭 아주 그야말로 그 세속적인 속물이 되서 그렇게 사귀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렁저렁한 가르침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불하는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또는 우리 마음가운데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도 끝도 없는 무한의 공덕이 다 들어 있습니다.
숙명통도 천안통도 누진통도 또는 신여의통(身如意通)도, 신여의통은 우리 몸을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에서 욕심의 뿌리가 다 뽑히면 그냥 우리 발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성인들이 열반 드실 때는 대체로 십팔신변(十八神變)이라 공중에 올라가서 십팔신통을 다했어요. 다는 그렇지 않지만은 그렇게 한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능력이 우리한테 다 있는 것을 우리가 그 공부를 못해서...
우선 저 같은 사람도 아까 말씀 말따나 한탄스런 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무던히도 애쓰고 한다고는 했는데, 그래 제대로 못했으니까 이제 아, 지금 신통도 못하지요. 변명의 여지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온전히 제대로 다 지키지를 못하고, 공부를 못해서 그럴 뿐입니다. 그래서 삼매에 들라면은 그 전제조건으로 해서 꼭 음식,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정도로 가급적이면 일종하면 더욱 좋고 그렇게 못한다 하더라도 될 수록 적게 먹어야 됩니다. 고기나 오신채(五辛菜) 그런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지요.
그렇게 하시고, 남여 이성간도 같이 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좋은데 하여튼 그 음욕만은 금하고,
그 음심하고 먹는 것 하고
그 두 가지 못 끊으면 아까 능엄경 말마따나
증사 작반이라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짓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의 하셔서 그 삼매에 드는 아주 참 명상에 드는, 요즈음 별 명상이 다 나오지만은 가장 수승한 명상이 아, 우리 참선법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공부법으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 영광(榮光)과 행복(幸福)을 생각해서 부지런히 공부하십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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