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붓다의 옛길 - 성서러운 고 소멸의 진리 (滅聖諦. 멸성제. Dukkha Niroda Ariya Sacca)

수선님 2018. 10. 21. 13:01

붓다의 옛길 - 성서러운 고 소멸의 진리 (滅聖諦. 멸성제. Dukkha Niroda Ariya Sacca)

 

앞에서 우리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 열반(nibbana, Skt. nirvana)이라고 하는, '괴로움의 소멸'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도록 하자. 열반의 어원을 살펴보면 ni+vana 즉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욕망을 떠남, 또는 nir+va 즉 (불이) 꺼지다라는 의미이다.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의 어원적 의미가 그 말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열반의 기쁨을 맛보도록 도와 주지는 않는다. 깨달음은 다음 장에서 보게 될 계율, 선정, 지혜를 통해서 일어난다. 열반은 설명할 수 없는 체험이다. 이것은 세속을 떠난 것, 절대적인 것, 무조건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열반은 각자가 스스로 지혜를 통해서 얻는 것이다.


열반은 말할 것도 없고, 설탕의 맛처럼 단순한 것조차도, 예전에 그것을 맛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것의 화학적 성질을 설명해 주는 책을 읽으라고 해서 그 맛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설탕 한덩어리를 혀 위에 올려 놓고 그 달콤한 맛을 보고 나면 더 이상 설탕에 대한 이론은 필요없게 된다.


'열반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는 불교도건 아니건 간에 맨 처음에 묻고 싶어하는 질문이다. 이것은 어제 오늘만의 의문이 아니다. 현명한 해답이 주어져 열반이 분명한 말로 설명된다 해도 이론적인 설명은 우리들을 한 발자국도 열반 가까이에 데려다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열반은 언어, 논리, 추론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열반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쪽이 더 쉽고 신중하다. 열반은 말로 나태낼 수 없고 전달할 수도 없다. 열반을 표현하려는 시도로서 우리는 제한된 의미를 가지고 있고 우주와 관계된 말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최상의 정신적 훈련과 지혜를  통해 실현되는 절대적 실재, 열반은 어떤 우주적인 경험이나 사변의 영역을 초월해 있다. 그렇다면 왜 이것에 대해 쓰고 있는가?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에 대한 오해를 막기 위해서이다.


붓다는 열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했다.


"비구들아, 내가 깨달은 이 법은 깊고, 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며, 단순한 추론을 넘어서 있고, 미묘해서, 현명한 사람들이아랴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사람들은 감각적인 즐거움에 빠져 있다. 감각적인 즐거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의존적인 발생 즉 연기를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의 고요함, 생성(윤회)을 낳는 모든 조건들의 포기, 욕망의 소멸, 냉정, 지멸(止滅) 즉 열반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내가 법을 설해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나를 피곤하고 성가시게 할 것이다." (중부 26)


이것은 욕망의 근절(열반)은 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붓다 자신이 명백히 지적한 것이다.


붓다는 자신의 첫 번째 설법에서  세 번째 고귀한 진리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비구들아,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고귀한 진리이니, 바로 저 욕망의 완전한 소멸, 포기, 버림, 해탈, 초연이다."

(상응부 421)


비록 여기서 열반이라는 말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욕망의 완전한 소멸'이 열반을 의미한다. 붓다는 어디에서나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라훌라야, 욕망의 소멸이 열반이다." (상응부 190)


붓다는 범천에게 대답하면서 "욕망을 버리는 것이 열반이다" (상응부 39)라고 한다. 사리풋타는 "오온에 대한 강한 욕구를 뿌리 뽑아 버리는 것, 그것이 '괴로움의 소멸 이다." (중부 28)라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열반 즉 지멸은 욕망의 소멸과 사라짐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바로 앞 장에서 보았듯이 욕망은 괴로움의 원인이고, 이 괴로움은 그 원인인 욕망이 사라질 때에만 사라진다. 욕망을 포기하면 괴로움과 관계된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래서 열반은 '괴로움의 소멸'로 풀이된다.


열반을 정의하기 위해 종종 부정적인 말들이 사용된다 하더라도, 열반이 단순히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결국 부정이란 절대적인 공허가 아니라 단순이 어떤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열반을 실현한 아라한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 그에게는 더 이상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한 자아가 없음 즉 자아의 소멸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소멸될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경전에서는 평안, 청정, 숭고, 평화, 해탈과 같은 긍정적인 말들도 조건지어지지 않은 열반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이 갖는 중요성은 중생 세계의 알려진 경험 속에 한정된다. 모든 긍정적인 정의들은 현상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사물에 대한 세속적인 개념은 생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과 관계된 모든 개념들도 생성된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열반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생각, 개념, 말들은 제한되어 있고 조건지어진 것이다. 다라서 그러한 거들은 생산된 것도 조건지어진 것도 합성된 것도 아닌 무위(無爲)의 열반에 적용될 수 없다.


관습에 따라 우리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말들을 쓰는데 그것들은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상대적이다. 그러나 열반은 긍정과 부정을 초월해 있고 조건지어져 있는 어떤 것과는 관계가 없다. 붓다는 세속적인 말들이 갖고 있는 제한성을 알고서 그것을 사용했다. 열반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붓다의 대답을 들어 보자.

 

"비구들아, 열반에는 두 가지 세계가 있다. 기본적인 남아 있는 세계(유여열반.有餘涅槃)와 남아 있지 않은 세계(無餘涅槃.무여열반)가 그것이다.
그러면 비구들아, 기본적인 것이 남아 있는 열반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한 아라한이 있다. 그는 번뇌를 소멸시켰고 청정한 삶을 살았으며, 해야 할 일을 다 했고, (번뇌의) 짐을 벗었으며, 단계를 거쳐 아라한의 자격을 얻었고, 생성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 났으며,
바르게 앎으로서 해방되었다. 그의 (육체적) 기능들은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유쾌함과 불쾌감을 느끼고, 즐거움과 고통을 겪는다. 오온은 여전히 남아 있다.
비구들아, 기본적인 것이 남아 있는 열반이란 바로 그의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소멸된 것이다.

 

그러면 비구들아, 기본적인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열반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한 아라한이 있다. 그는 번뇌를 소멸시켰고, 청정한 삶을 살았으며, 해야할 일을 다 했고, (번뇌의) 짐을 벗었으며, 단계를 거쳐 아라한의 자격을 얻었고, 생존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 났으며, 바르게 앎으로써 해방되었다. 그는 감각적인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아 청정해 질 것이다.
비구들아, 이것이 바로 '기본적인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열반' 이다.
비구들아, 이것이 열반의 두 가지 세계이다."

 

붓다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읊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다.
열반의 두 세계는
확고부동하고 집착 없이 깨달은 사람이 설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 속하는 기본적인 것들이 남아 있는 세계에서는
윤회로 인도하는 모든 것이 파괴된다.
그 기본적인 것들이 없는 세계에서는
그 뒤로 모든 생성이 끝난다.


이 무위의 상태를 아는 사람의 마음은
(내생으로) 인도하는 것을 파괴함으로써 해탈된다.
그들은 법의 진수를 깨닫고 번뇌 없는 기쁨속에서
확고하게 모든 생성을 버린다.
(Itivuttaka 38,39)


인간은 오온 즉 정신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 오온은 끊임없이 변화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다. 그것은 존재했다가 사라진다. 왜냐하면 '모여서 이루어진 모든 것은 반드시 흩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 내부에 있는 탐욕(貪 탐), 성냄(嗔 진), 어리석음(痴 치) 즉 삼독이, 되풀이 되는 생존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버리지 않으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삼독을 뿌리 뽑으면 살아 있는 동안에도 해탈하여 아라한의 자격을 얻는다. 앞에서 언급 했듯이 이것이 기본적인 것이 남아 있는 열반이다. 아라한의 오온 즉 남아 있는 구성 요소들은 그의 무한한 과거에 있었던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영향을 받는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오온은 작용한다. 그러므로 그의 감각 기능이 감각 대상과 접촉해서 일으키는 괴로움뿐만 아니라 즐거움도 느낀다. 그러나 그는 집착, 분별, 자아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들에 동요되지 않는다.


아라한이 죽으면 그의 오온 즉 남아 있는 구성요소들은 기능이 정지한다. 오온은 죽음과 함께 완전히 부서지고 그의 감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삼독이 뿌리째 뽑혔기 때문에 그는 다시 태어나지 않고 자연적으로 더 이상 감각을 받아 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감각은 싸늘하게 식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우다나(Udana)]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육체(色.색)은 무너졌고 감각(受.수)은 멈추었고
모든 지각(想.상)은 식었고 모든 의지적 형성력(行.행)은 고요해 졌으며
의식(識.식)은 사라 졌도다   


이것이 기본적인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열반이다. 아라한의 상태 즉 완성된 인간의 경지는 이미 언급한 것에 의해서 명백해 졌다.어떤 사람이, 윤회로 인도하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완전히 제거 했을 때, 그는 윤회의 족쇄 즉 되풀이 되는 존재에서 해방된다. 그는 완전히 자유롭다. 그는 윤회의 완전한 소멸, 즉 열반을 실현했기 때문에  중생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어떤 자질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평번하고 세속적인 활동을 초월했지만, 아직은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을 초월한 경지로 스스로를 끌어 올린다.


그의 행위는 결과를 낳지 않는다. 즉 업에 물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는 삼독 즉 정신적 번뇌로 유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악과 마음의 번뇌에 면역을 갖게 된다. 그에게 잠재된 번뇌가 없다. 그는 선악을 초월했으며, 좋고 나쁨 둘 다를 모두 버렸다. 그는 과거, 미래뿐만 아니라 심지어 현재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고통받지 않는다. 그는 인생의 변화에 동요되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세속에서 일어나는 뜻하지 않은 사건들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슬픔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평안하다.


이와같이 열반은 바로 이 생에서 도달할 수 있는 한 '상태'이다. 탐구적인 사람은 이 상태를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상태는 이 세상에서든 천상의 즐거움이 있는 세계에서든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아라한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중생이 인생의 불만족스러운 본질을 이해해서 직접적으로 괴로움이 무엇이고, 번뇌가 무엇이며, 갈망이 무엇인지를 안다 하더라도, 그는 번뇌를 완전히 끊어 버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자신이 한번도 경험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을 안다면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통해 번뇌가 없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 열반이 무엇인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아라한은 소문이 아닌 자신의 경험으로 열반을 말한다. 그러나 아라한도 자신이 깨달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열반을 이해시킬 수는 없다. 갈증을 해소한 사람은 자신이 갈증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 해방감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 줄 수는 없다. 그가 어떻게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은 그것을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경험이고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각자에게 개별적 이다. 각자는 자신을 위해 먹고 잠자야 한다. 그리고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자신을 치료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단지 일상적인 요구이다. 하물며 인간의 내적인 발전 특히 마음의 해탈과 관계되었을 때는 자신의 힘이 얼마나 많이 필요하겠는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기본적인 것들이 남아 있지 않은 열반, 다시 말해서 아라한의 마지막 죽음 (般涅槃. 반열반)이다.


다음은 [우다나(Udana)]에 자주 나오는 구절이다.


"비구들아, 태어난 것이 아니고 시작도 없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
태어난 것이 아니고 시작도 없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면, 태어나고
시작이 있고 만들어지고 조건지어진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태어난 것이 아니고 시작도 없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에, 태어나고 시작이 있고 만들어진 것이고
조건지어진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여기에는 견고성, 유동성, 열성, 운동성도 없고 무한한 공간의 영역도 없고, 무한한 의식의 영역도
없고, 존재하지 않음의 영역도 없고, 지각도 지각이 아닌 것도 없고, 이 세상도 다른 세상도 없고, 해도 달도 없다. 여기에는 오고 감도, 존재함도 없고, 죽음이나 태어남도 없다. 이것을 더받쳐 주는 것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으며, 감각 대상도 없다. 이것이 진정 괴로움의 끝이다."


이상에서 볼 때 반열반(궁극적인 열반)은 오온(형상, 감각, 지각, 의지적인 형성력, 의식)과 오온과 관계된 모든 것들이 사라진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상대성을 지닐 여지가 없는 상태이다. 이것은 상대적인 모든 것들을 초월해 있고, 그것들 외부에 있다. 원인의 결과도 없고 원인 때문에 결과를 낳지도 않는다. 이르는 길(道)도 없고, 결실도 없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 결합되지 않은 것이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는 세속적이지만, 열반은 세속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조건지어진 것들 밖에 있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를 초월해 있다. 세속적인 모든 것들은 상대적이지만 열반은 상대성이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연기와 사성제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경[Dvayatanupassana-sutta]에서 붓다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성자들은 완전한 이해를 통해서 허위로 본다.
반면에 성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허위라고 생각하는 것을 진실이라고 받아 들인다."


그리고 붓다는 덧붙인다.


열반은 허망한 것이 아니다.
성자들이 그것이 진리임을 밝혔기 때문이다.
성자들은 그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아무런 욕망도 없이 입멸한다.


붓다는 열반을 대신하는 말로 진리만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아, 진여(眞如)는 열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진여 속에서 그들은 생성을 낳는 갈애를 파괴하고 자유로워진다."  

 (상응부 195)

 

또 다른 경 [Dhatuvibhanga-sutta. 중부 14]에 나오는 것처럼,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완전히 사라져) 절대적으로 고요해진 아라한은 즐겁거나 불쾌하거나 또는 그 둘의 중간적인 것을 경험해도, 그 체험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나라든가 내 것이라는 생각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즐거움을 느끼지도 않는다.


"즐겁든 불쾌하든 그 중간이든 어떤 감각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그는 그 경험에 집착하지도 얽매이지도 않는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 사라진 뒤에)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모든 감각, 경험들이 냉담해 지고, 잠잠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것은 마치 기름 등불이 기름과 심지에 의해서 타다가 기름과 심지가 다 타 버리면 연료가 부족해서 꺼지는 것과 같다.


이와같이 비구는 육신이 다 되어 가는 것을 느끼면, '내 육신이 다 되어 가는구나.'라고 안다. 그리고 생명이 끝나 가는 것을 느끼면, '내 생명이 끝나 가는구나.'라고도 안다. 또한 육신이 다 되어 가고 생명이 끝남과 더불어 모든 감각이 느껴지지 않고 곧 냉담해 지리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비구들아, 이와 같은 자질을 갖춘 사람에게 최상의 지혜가 부여된다. 왜냐하면 모든 괴로움의 소멸을 아는 것이 가장 고귀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진리 위에 이루어진 그의 해탈은 동요되지 않는다. 실재가 아닌 모든 것은 거짓이다. 실재인 열반은 진실하다.


그러므로 비구들아, 이와 같은 자질을 갖춘 사람에게 최상의 진리가 부여된다. 왜냐하면 가장 고귀한 진리는 실재인(거짓이 아닌) 열반이기 때문이다."


[라타나 숫타(Ratana-sutta)]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과거는 다했고
새로운 것(여기서는 과거의 업과 미래의 업을 의미한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네
마음에 미래의 생성을 낳을 집착이 없고
싹(여기서는 다시 태어나려는 의식을 말한다)은 죽고 더 이상 성장을 바라지 않으니,
저 현자들(과 흔들리지 않는 이들)은
마치 등불이 꺼지듯이 사라져 가네. (등불이 꺼지는 것을 보고 붓다가 이 말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소멸되는 아라한의 상태이다. 하늘을 날아 다니는 새들의 자취를 쫓을 수 없듯이 그의 길을 추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라한이나 붓다가 열반에 들어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열반은 장소나 상태 또는 영원히 삶을 지속하는 천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열반은 위치를 갖고 있지 않다.

 

경전에서는 붓다나 아라한의 죽음을 '완전히 끝난', '완전히 소멸한' 이라는 의미를 지닌 파리닙부토 (Parinibbuto), 파리닙바이(Parinibbayi)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생성의 종식 즉 삶의 여행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확실히 나타내 준다.


붓다나 아라하닝 완전히 사멸한 뒤에무엇이 일어나는지 정의할 수도 이론화할 수 도 없다. 거기에는 무게도 없고 부피도 없다. 이것은 대답될 수도 없고 결정될 수도 없는 문제이다. 최상의 진리는 표현할 수도 없고 정의할 수도 없다.


우파시바(Upasiva)가,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지, 아니면 축복 속에서 영원히 존재하는지에 대해 물었을 때 붓다의 대답은 다음과 같이 명백했다.


죽은 사람에게는 그것을 측정할 기준이 없네
그에게는 이렇다 저렇다 할 만한 근거가 없네
일단 모든 것들이 완전히 제거되고 나면
말로 표현할 모든 길 또한 사라진다네

 

영혼이나 자아(attan, Skt. atman)가 없는데 무엇이 열반을 얻고, 누가 열반을 실현하는가 하는 문제는 난해한 질문이다. 먼저 이른바 존재란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 이해하도록 해 보자. 존재란 정신과 육체의 집합체이다. 그것은 두 연속되는 순간순간에도 똑가은 형태로 남아 있지 않는, 변화를 겪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속에는 영원한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적. 정신적 범주에 속하는 이 흐름, 이 작용의 완전한 소멸이 반열반(완전히 불이 꺼진, 소멸한 상태)이다. 나, 자아 또는 영혼이 열반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열반 속에서 소멸된다.


무엇이 열반을 얻는가 또는 누가 열반을 실현하는가 하는 의문은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라는 가한 관념 때문에 일어난다. 모든 의문들은 이 '나'와 관계된 것이지만, 우리들의 정신적, 언어적, 육체적인 행위(三業.삼업) 뒤에 존재하는 '나' 또는 '자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위를 행하는 '자'는 없다. 생각을 '생각하는 자'는 없다. 열반은 그것을 깨닫는 사람(존재)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현상만이 흘러갈 뿐이다. 관습적인 언어에서 우리는 남자, 여자, 나 따위를 언급하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 보면 그런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흐르만이 생겨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모여서 이루어진 모든 것은 반드시 흩어지게 되어 있다." (중부 280)


오온에 대한 집착이 '존재'를 형성한다.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는 오온에 대한 집착으로 일어난다. 갈애의 소멸도 이 오온 안에서 이루어진다. 흐름이 생겨났다 사라질 뿐 오온을 만들어 내는 영원한 '나' 또는 '자아'는 없다. 그리고 마침내는 오온마저 사라져 버리므로 영원한 어떤 것이 존재할 수는 없다. 생존이 있는 곳에 생존의 소멸도 있다. 이것이 올바른 견해(정견.正見)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최상의 행복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이 행복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완전한 적정 즉 모든 감각이 완전히 사라짐으로써 생긴다. 그런데 감각 기능을 통해서 많은 유쾌한 감각을 경험해 온 우리들로서는 이 말이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붓다의 제자인 우다이(Udayi)는 바로 이 문제에 직면했다. 사리풋타가 "벗들이여, 열반은 바로 행복이다." 라고 말하자, 우다이는 "감각이 없는데 무엇이 행복인가?" (증지부 414)라고 묻는다. 그러자 사리풋타는 "벗이여, 감각이 없는 것, 바로 그것이 행복이다." 라고 말한다. 다음과 같은 붓다의 말이 사리풋타의 말을 뒷받침해 준다. "경험되고 감각되고 지각되는 모든 것은 괴로움 이다." (상응부 53)


붓다는 괴로움을 제거하는 길 즉 열반으로 인도하는 필수적인 내용들을 가르쳤다. 그것은 순수한 행복과 삶의 혼란으로부터 최상의 휴식을 가져올 수 있도로 마음을 조심스럽게 계발하는 것이다. 그 길은 참으로 험난한 길이지만, 지속적인 조심성과 완전한 자각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바라보며 걷는다면 어느날에는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아기는 어렵게 어렵게 차근차근 일어서기와 걷기를 배운다. 마찬가지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위대한 사람들도 거듭되는 실패를 무릅쓰며 한 발자국씩 마지막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옛 수행자들을 상기하고
그들의 삶을 되새겨
비록 오늘이 그 뒤라 하더라도 (예를 들면 붓다의 입멸 후를 말한다)
영원한 평화를 얻을지어다  
(Theri-gatha 30)

출처 : 붓다의 옛길
글쓴이 : 실론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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