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붓다의 옛길 - 성서러운 고 발생의 진리 (集聖諦. 집성제. Dukkha Samudaya Ariya Sacca)

수선님 2018. 10. 21. 13:01

붓다의 옛길 - 성서러운 고 발생의 진리 (集聖諦. 집성제. Dukkha Samudaya Ariya Sacca)

 

환자를 치료하려면 그에 앞서 우선 그가 앓고 있는 병의 원인을 밝혀 내는 것이 필수적이다. 치료의 효과는 병의원인을 제거하는 데 달려 있다. 붓다는 괴로움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 병의 원인을 지적하여 효과적인 치료를 해 준다. 그러므로 성급한 비평가들이 붓다를 염세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낙천주의자들은 사성제의 설법 속에는 염세주의를 벗어나는 탈출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할 것이다. 그렇다면 붓다의 가르침에서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고귀한 진리(集聖諦.집성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교 사상에는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독단적인 창조주는 없다. 그래서 불교는 괴로움이나 괴로움의 원인을 외적인 존재나 초자연적인 힘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인간 자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찾는다. 초기 경전속에 들어 있는 최초의 설법과 다른 많은 설법들을 볼 때 집성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격렬한 쾌락을 동반하고 여기저기서 새로운 즐거움을 추구하는 갈애(渴愛)가 바로 재생, 윤회의 원인이다. 다시 말하면 갈애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존재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 죽은 뒤에는 모든 것이 끝나 버리기를 바라는 욕망을 말한다.'


그러므로 갈애는 분명 괴로움의 원인이다. 여기서 우리는 씨앗과 열매, 작용과 반작용, 원인과 결과 라는 자연의 법칙이 가지고 있는 힘을 본다. 이것은 전혀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정신적인 요소인 욕망 또는 갈애가 존재를 계속 유지시킨다. 욕망이 세상을 만들고 개조한다. 생명은 생명에 대한 욕망에 의존한다. 욕망이 바로 현재의 존재뿐만 아니라 과거, 미래의 존재 뒤에 숨어 있는 동기와 원인이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고, 미래는 현재의 결과가 된다.

 

이것이 의존적인 발생(緣起.연기)이다. 이 힘은 강에 비유된다. 홍수가 났을 때 강이 마을, 도시, 나라들을 물속에 잠기게 하듯이, 욕망도 윤회를 통해 끊임없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연료가 불이 계속 타도록 해 주듯이 욕망이라는 연료가 존재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 준다.


붓다는 이렇게 설했다.


"비구들아, 나는 이 욕망이라는 족쇄만큼 오랫동안 중생들을 사로잡아 윤회의 바퀴에서 헤매게 하는 다른 어떤 족쇄도 알지 못한다.
비구들아, 진실로 중생들은 이 욕망의 족쇄에 묶여 윤회의 바퀴에서 헤매개 되느니라." (
Itivuttaka)


여기서는 욕망이 제일 원인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불교에는 제일 원인이라는 것이 없다. 시작도 끝도 없는 원인과 결과만이 있지 우주를 지배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물은 단 하나의 원리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어떤 원인도 없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연기의 공식에서 설명되듯이 사물은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서 생긴다.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다른 모든 것들처럼 욕망도 조건지어져 있고, 상호 의존적이며,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욕망도 시작도 끝도 없다.

 

욕망은 괴로움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욕망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것이다. 욕망은 느낌 즉 감각에 의해서 일어나고 감각은 접촉에 의해서 일어난다.(감각이 일어 나므로 욕망이 일어나고, 감각이 소멸하므로 욕망이 소멸한다. 욕망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은 팔정도이다). 다음의 대화는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붓다의 입장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어느때 캇사파(Kassapa)라는 한 고행자가 붓다에게 물었다. (캇사파가 붓다에게 다가가서 질문하는 모습은 흥미롭기도 하지만 좀 이상스럽기도 하다.  붓다는 라자가하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날 오전에 탁발하러 나갔다. 멀리서 붓다를 보고  캇사파는 다가가 인사를 한뒤 물었다. "저희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을 기회를 주신다면  저희들은 어떤 점에 대해서 사문 고타마께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붓다는 "캇사파야, 지금은 질문 하기에 적당한 때가 아니다. 우리는(탁발을 하기 위해)마을로 들어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캇사파는 세 번이나 거듭해서 요청을 되풀이했고 동일한 대답을 들었다. 그러자 캇사파는 '저희들은 사문 고타마께 많은 질문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말했다. (그제야) 붓다는 "캇사파야, 묻고 싶은 것을 물어라."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존자 고타마여, 괴로움은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까?"
"캇사파야,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존자 고타마여, 괴로움은 다른 것에 의해 생겨는 것입니까?"
"캇사파야,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존자 고타마여, 괴로움은 스스로와 다른 것, 이둘 다에 의해서 생기는 것입니까?"
"캇사파야, 그렇지 않다."
"그렇다변 존자 고타마여, 괴로움은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에 의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원인없이 순전히 우연한 상황에 의해서 생기는 것입니까?"
"캇사파여,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존자 고타마여, 괴로움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까?"
"캇사파여, 괴로움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괴로움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존자 고타마께서는 괴로움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 캇사파야, 나는 괴로움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을 보는 사람이다."
"존자 고타마여, 당신은 저의 모든 질문에 "캇사파여, 그렇지 않다"라고만 대답했습니다. 그런데도
 괴로움은 있고, 당신은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을 본다고 단언하는 것은 어찌된 영문입니까? 저에게
 괴로움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요."
"캇사파여, 어떤 한 사람이 괴로움을 낳고 또한 그 사람이 괴로움을 경험한다고 말하는 것은 상주론
(常住論)에 속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괴로움을 낳고 다른 사람이 괴로움을 경험한다고 말하는
것은 단멸론(斷滅論)에 속한다.
 캇사파여, 여래는 이 두 극단을 피하고 중도로써 법을 가르친다.


(존재의 본질에 대한) 무지(무명)에 의해서 의지적인 형성력(行.행)이 일어난다. 의지적인 형성력에

의해서 의식(識.식)이 일어난다. 의식에 의해서 명색(名色)이 일어난다. 명색에 의해서 육입(안이비설신의)이 일어난다. 육입에 의해서 접촉(觸.촉)이 일어난다. 접촉에 의해서 감각(受.수)이 일어난다.

 

감각에 의해서 생성 작용(有.유)이 일어난다. 생성 작용에 으ㅟ해서 늙음, 죽음, 슬픔, 한탄, 고통, 비탄, 절망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이 일어난다. (이것을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고귀한 진리 (集聖諦.집성제)라고 한다)


무지의 완전한 소멸을 통해서 의지적인 형성력이 사라진다. 의지적인 형성력의 소멸을 통해서 의식이 사라진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이것을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고귀한 진리(滅聖諦 멸성제)라고 한다)."


캇사파는 붓다의 이러한 설명을 이해하고 붓다와 법과 승가에 귀의하여 비구가 되었다. 그리고 뒤에 그는 아라한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이와같이 연기의 교리는 괴로움이 어떤 원인(因.인)과 조건(緣.연)에 의해서 일어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원인과 조건을 제거함으로써 괴로우이 소멸되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붓다의 연기에 대한 설명이 앙굿타라 니카야(Anguttara-nikaya)에도 나온다.


"비구들아,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고귀한 진리란 무엇인가? 무지에 의해서 의지적인 형성력이 일어나고, 의지적인 형성력에 의해서 의식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이 일어난다.
비구들아, 이것을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고귀한 진리라고 한다.
비구들아, 그러면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고귀한 진리란 무엇인가? 무지의 완전한 소멸에 의해서
의지적인 형성력이 소멸하고, 의지적인 형성력의 소멸에 의해서 의식이 소멸한다... 이와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이 소멸한다.
비구들아, 이것을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고귀한 진리라고 한다."


이제 연기가 사성제의 두 번째, 세 번째 항목에서도 필수적이라는 것이 명확해 졌다. 그리고 몇몇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이 연기는 뒤에 가서 붓다의 가르침에 추가된 것이 아니다. 조건성의 교리인 연기는 종종 상당히 실용적인 의미로 설명된다. 설명이 간결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연기는 단순히 실용적인 가르침만은 아니다. 불경에 정통한 사람들은 붓다의 가르침 속에 있는 지(智)와 혜(慧)의 근본 원리들이 연기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오온은 조건지어져 있다는 가르침 속에서 인생에 대해 붓다가 가지고 있는 견해의 진수를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만약 세계에 대한 붓다의 설명을 바르게 이해ㅏ려면 앞에서 언급한, '어떤 것이든 원인으로부터 생겨난다."라는 설법 속에 요약된 가르침의 핵심을 완전히 파악해야 한다.


한 사물이 생겨나게 된 원인과 조건이 사라지면 그 결과도 사라진다. 붓다의 연기는 법에 대한 깊은 지식으로 유명했던 셀라(Sela)비구니가 간결하게 표현한 다음의 게송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꼭두각시 모습은 저절로 생겨난 것도 아니고
이 고뇌의 덩어리는 다른 거에 의해 생긴 것도 아니네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고
조건에 의해서 사라지네 (상응부 134)


위에서 보았듯이, "괴로움은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까? 다른 것에 의해서 생기는 것 입니까?"라고 물은 캇사파의 질문에 대한 붓다의 대답은 "캇사파야, 그렇지 않다. 캇사파야, 그렇지 않다."였다. 그 대답은 붓다가 '괴로움은 저절로 생기는 것과 다른 것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라는 두 가지 모두를 부정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 준다. 


괴로움이 오로지 각 개인에 의해서 생긴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개인은 중생 세계의 환경 속에 있고, 그 환경은 그에게 다양하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위나 행동이 오로지 외부 존재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다. 이때는 인간의 도덕적인 책임과 의지의 자유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붓다가 설한 연기 즉 중도(中道)는 이러한 두 극단을 피하고, 모든 법, 즉 존재 또는 현상은 상호간에 인과 관계로 의존하고 있다고 설한다.


이러한 조건성(연기성)은 어떤 종류의 자체 요인이나 외적인 요인에 의해 방해 받거나 통제되지 않는다. 이러한 연기의 교리를 결정론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가르침에는 개인의 물리적인 환경과 정신적(심리적)인 원인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계는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주는 반면에 인간의 정신은 물질계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붓다는 "세상은 마음에 의해 지배된다." (상응부 39)라고 말한다.


연기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연기를 기계적인 인과법이나, 생물이나 무생물 등 모든 것의 첫 시작 즉 단순한 동시 발생으로 잘못 이해하게 된다. 불교 사상에는 사물의 출발점이 없기 때문에 연기에 제일 원인이 있을 수 없다. 존재의 첫 시작 즉  생명체들의 생명의 흐름은 지각 될 수 없다. 그래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계에 대한 사유는 정신적인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증지부 80)


"비구들아, 윤회의 끝은 볼 수 없다. 그리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중생들의 첫 시작은 무지에 쌓여 있고, 욕망에 사로잡혀 있어서 지각될 수 없다. (상응부)


사실 첫 시작을 지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아무도 어떤 것의 궁극적인 기원을 추적할 수 없다. 인류는 말할 필요도 없고 모래 한 알의 기원조차도 추적할 수 없다. 시작이 없는 과거 속에서 시작을 찾는 일은 무의미하고 소용없는 것이다. 새명은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발달 과정이다. 생명이란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변화의 흐름이다.


누군가 제일 원인을 인정한다면 '제일 원인'의 원인이 무엇인지 입증해야 한다. 왜냐하면 원인과 조건의 법칙(연기)은 그것을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누가 보아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와 사건을 전능한 창조신의 탓으로 돌리는 유신론자는 단호하게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 이다. 하나님의 권위를 의심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라고 말한다. 이 하나님이라는 관념이, 탐구하고 분석하고 자세히 조사하려는 인간의 자유를 억누르고, 이 육안 너머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도록 해서 통찰력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X가 제일 원인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이 가정이 우리를 해탈에 한 발자욱 이라도 더 가까이 데려다 주는가? 그것은 해탈로 가는 문을 막아 버리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시작도 끝도 없는 원인과 결과로 이뤄진 자연법(인과법)을 안다. 그러므로 우주를 지배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연기에서 설명했듯이 욕망의 원인은 감각이다. 욕망은 그 근원을 가지고 있다. 욕망은 감각 속에서 일어난다.


모든 형태의 욕망은 갈애에 속한다. 탐욕, 애착, 욕구, 욕망, 사모, 동경, 열망, 기호, 애정, 가족애들은 붓다의 가르침 속에서는 생성(존재가 생겨나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인도하는 갈애를 나타내는 말들이다. 괴로움, 좌절, 고통스러운 자극, 불만족이라는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는 생성은 우리 자신의 경험이다.


이 세상의 적(敵)은 모든 악들이 그것을 통해서 생명체를 이루려는 욕망, 갈망 또는 갈애이다. 그것은 감각, 부, 재산에서 오는 즐거움과 다른 사람을 파괴 시키고 다른 나라를 정복하려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에 대한 탐욕, 즉 집착뿐만 아니라 이상,관념, 견해, 믿음에 대한 집착이다. 그런데 후자는 전 국가들을, 사실은 온 세상을 종종 재난과 파괴로 이끌어서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빠뜨린다.


그렇다면 이 갈애는 어디에서 일어나고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곳, 갈애는 그곳에서 일어나고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무엇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가?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이것은 인간이 앞에서 설명한 눈, 귀등 오근을 통해서 감각대상, 즉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여섯 번째 의근(意根)을 통해서 사고와 생각을 가지기 때문이다. 갈애는 이 육근에서 일어나고 육근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형체, 소리, 냄새, 맛, 감촉, 관념이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리고 갈망은 거기에서 일어나고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장부 22)


인간은 항상 기쁨과 즐거움에 집착한다. 그래서 그는 즐거움을 찾아 다섯 가지 감각 대상을 쫓아 다니고 관념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것들에 집착한다. 그는 육경(六境)의 양이 결코 육근을 만족시켜 주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재산이나 욕망의 만족을 향한 강한 갈애에 쌓여 있는 중생들은 윤회의 굴레에 묶이게 되고, 고통 속에 짓눌려 마지막 해탈로 가는 문을 단단히 닫아 버리고 만다. 붓다는 이 미친 듯한 돌진에 대해 아주 단호했으며,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쾌락은 속박, 즐거움은 잠시
아무런 맛 없이 끝없는 괴로움을 가져다 주네
현명한 사람은 미끼를 낀 낚시를 아네 (Suttanipata 61)


다음의 게송이 붓다의 말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즐거움은 양귀비 꽃과 같네
꽃을 만지면 꽃잎은 떨어지고 마네
마치 강물에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한 순간 희었다가 영원히 녹아 버리고 마네


이러한 대상에 대한 욕망이 감각적인 즐거움과 관계할 때, 이것을 '감각적인 욕망'이라고 한다. 영원한 개인적 존재에 대한 믿음과 관계할 때, 이것을 '존재하려는 욕망'이라고 한다. 이것이 영원히 존재하기를 바라는 욕망이나 집착과 관계 있을 때는 상주론이라 한다. '영혼 소멸'에 대한 믿음과 관계 있을 때는 '비존재에 대한 욕망' 이라고 한다. 이것을 단멸론이라고도 한다.


갈애는 즐겁고 기분 좋은 감각뿐만 아니라 불행하고 불쾌한 느낌에 의해서도 조건지어져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은 그 고통이 사라지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행복과 해방을 간절히 바란다. 달리 말하자면 가난한 사람과 곤궁한 사람, 환자와 불구자 즉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행복, 즐거움, 위안을 갈망한다. 반면에 이미 즐거움을 경험하고 있는 부자와 건강한 사람은 점점 더 강한 즐거움을 갈망한다. 그러므로 갈망이나 욕망이라는 것은 만족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덧없는 즐거움을 추구하고, 이 삶의 격정을 채울 연료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들의 탐욕은 끝이 없다.


사람들은 욕망의 결과로 오는 괴로움을 겪고 나서야, 욕망 근본 뿌리인 무지를 완전히 제거한 아라한 즉 완전한 청정을 얻은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주변에서 불어 대는 욕망의 해악을 깨닫게 된다. 욕망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괴로움을 겪게 된다. 슬픔은 우리가 욕망을 가짐으로 해서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다.


욕망으로부터 슬픔이 일어나고
욕망으로부터 두려움이 일어나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으니, 어디서 두려움이 생기겠는가? (법구경 216)


그러므로 이 욕망이 당신으로 하여금 중생으로 계속 살아가게 하고 그것을 되풀이 하도록 하며, 다시 태어나게 해서 '존재의 집'을 짓게 하는 적(敵)임을 알아야 한다. 붓다는 "욕망의 뿌리를 뽑아라." (법구경 337)라고 말한다.


튼튼하고 뿌리가 상하지 않은 나무는
잘리더라도 다시 살아나듯이
숨어 있는 욕망을 뿌리 뽑지 않으면
괴로움은 계속 일어나네 (법구경 338)

 

지각 있는 사람은 중생 세계에는 괴로움 즉 불만족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겠지만 욕망이나 갈애가 어떻게 윤회를 초래하는지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인 업과 윤회를 이해해야 한다.


만약 우리의현재의 태어남이 시작이고 우리의 죽음이 이 생(生)의 끝이라면, 괴로움의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도 없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해 주는 우주 내의 도덕적 질서는 우리들에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 짧은 생애 동안 어떻게 해서라도 즐기고 괴로움을 피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로는 인간의 불평등을 설명할 수 없다.


일반으로 인간은 도덕적인 인과 관계를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이 문제의 원인을 찾을 필요를 느낀다. 팔리어(Pali)어인 캄마(Kamma. 업. 業.'하다'라는 의미의 어근 kr 에서 파생된 것)는 문자 그대로는 활동이나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행위가 업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머리카락과 손톱의 성장, 음식의 소화도 일종의 활동이지만 업은 아니다. 반사 작용도 업이 아니라 도덕적인 중요성이 없는 활동이다.


"비구들아, 의지 작용이 업이다." (증지부 415)


이것이 붓다가 내린 업의 정의이다. 의지 작용은 의지적인 형성력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충동인 마음의 한 요소이다. 그래서 의지 작용은 '개인'을 형성하는 오온의 일부가 된다. 업은 행위 또는 씨앗이다. 그래서 업으 ㅣ결과 내지 결실을 업보(業報)라 한다.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한다. 이 의지 작용들은 선하거나 악하며 그 결과에 따라 행위는 선하거나 선하지 않거나 그 중간이 되거나 할 것이다. 작용과 반작용, 원인과 결과, 씨앗과 열매의 끊임없는 활동은 끊임없는 운동 속에서 계속된다. 그리고 이것이 존재의 육체적.정신적 현상이 갖는 지속적인 변화 과정을 형성한다. (윤회)


업이 의지, 힘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 힘은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욕망, 존재에 대한 욕망, 비존재에 대한 욕망 등 세 가지로 분류된다.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몸과 말과 생각을 통해서 행위한다. 그리고 그 행위는 반작용을 가져온다. 욕망이 행위를 낳고, 행위는 결과를 낳는다. 그 결과는 다시 새로운 욕망과 갈애를 낳는다.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의 이러한 과정은 자연 법칙이다. 이것은 저절로 이루어진 법이며, 법을 만든 사람이 따로 있을 이유가 없다.


악을 징계하고 선한 행위에 보상을 내리는 외부적인 존재, 힘, 하나님은 불교 사상에서 설 자리가 없다. 인간은 선을 위해서건 악을 위해서건 항상 변해 간다. 이 변화는 피할 수 없으며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행위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것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는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 윤리의 영역에까지 확장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작용이 반작용을 일으키고, 원인에 의해 결과가 일어나며, 씨앗이 열매를 맺게 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많은 과학적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업의 힘 즉 의지적인 행위가 어떻게 이 몸이 사라지고 난 뒤에 또 다른 탄생의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불교에서는 죽은 후나 태어나기 전에 독립된 의지적 행위(업)는 없다고 한다. 업과 윤회는 맞물려 있다. 업은 윤회를 낳고 윤회는 업을 낳는다. 그러나 여기서 불교의 업 이론은 운명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그것은 인간의 행위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 작용하는 외부적인 힘 또는 하나님의 예정의 애해서 결정 된다고 하는 철학적인 교의가 아니다.붓다는 모든 것은 변경할 수 없게 고정되어 있다는 즉 불가피한 필연성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일어난다는 엄격한 결정론도 인정하지 읺았을 뿐만 아니라 완전한 비결정론도 지지하지 않았다.


불교 사상에는 지옥이나 극락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존재는 없다. 태어남은 죽음으로 향해 가고 또한 죽음은 태어남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태어남과 죽음은 당혹스러운 순환을 끝없이 계속한다. 더욱이 영혼, 자아 또는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이동하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 비록 인간이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정신.육체적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할지라도, 이 정신은 뭔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 영원한 실체라는 의미에서의 영혼이나 자아는 아니다. 이것은 이 생뿐만 아니라 전생의 기억도 저장할 수 있는 힘, 역동적인 연속체이다.


과학자에게 물질은 진저한 물질이 아니라 긴장과 변화 상태에 있는 에너지이다. 심리학자에게 정신이란 더 이상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붓다가 이른바 존재 즉 개인은 단지 육체적. 정신적인 힘(또는 에너지), 지속적인 변화의 결합에 지나지 앟는다고 강조한 것으로 보아, 그는 현재 과학과 심리학보다 2,500년이나 앞선 것이 아닐까?


이 정신적.육체적 유기체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간순간 새로운 정신적.육체적 흐름을 창조한다. 그리고 미래의 유기체적인 흐름을 일으키기 위한 잠재력을 보존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 순간과 다음 순간 사이에 틈을 남기지 않는다. 우리는 인생에서 매순간 살고 죽는다. 이것은 마치 일었다 사라지는 파도처럼 단순히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 생에서 우리들에게 명백한 변화의 지속성 즉 정신적.육체적인 흐름은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된다. 이것은 업 에너지를 형성하는 의지, 갈애, 욕구, 욕망이라 불리는 역동적인 의식의 흐름이다. 이 강력한 힘, 살려는 의지가 생명을 계속 유지시켜 준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 세계가 선과 악이라는 정신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이라는 거대한 힘에 의해 초래된다고 본다.


현재의 태어남은 전생에 있었던 욕망과 갈애의 업력에 의해 있게 된 것이고, 이 생의 업력은 미래의 생을 초래한다. 불교에서는 업에도 높은 것과 낮은 것이 있다고 한다.(중부 135)


"중생들은 그들이 행한 행위의 상속인 즉 그들의 행위를 나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는 그들을 낳은 자궁이다."
(중부 135)


행위를 통해서만 그들이 더 좋은 상태로 변화할 수 있고 자신들을 다시 형성 할 수 있으며, 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과거의 행위(업)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붓다 당시 니간타 나타풋타(Nigantha Nataputta)와 같은 고행주의자들은 즐겁든 불쾌하든, 그 둘 다가 아니든 간에 개인이 경험하는 모든 것이 이전의 행위, 즉 과거의 업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붓다는 과거에 의한 이 배타적 결정론을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 많은 것들이 이 생에서 했던 우리 자신의 행위에 외부적인 원인의 결과이다.


탐구심이 있는 사람은 '전생(轉生)하는 영원한 영혼 또는 자아의 환생이 없다면 윤회하는 것은 무엇인가?'하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 해답은 환생 즉 윤회하는 영혼, 자아의 성질을 갖고 있는 영원한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변화 없이 계속되는 어떤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의 상태로 존재한다. 이른바 삶이란 앞에서 언급되었던 오온의 작용 또는 단순한 에너지, 힘의 형태로 된 몸과 마음의 작용이다. 그것들은 연속하는 순간순간에조차도 결코 동일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몸과 마음의 집합체 속에서 영원한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다.


어른은 어린 시절의 자신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둘 사이에는 단지 연속적인 관계성만 있을 뿐이다. 몸과 마음의 집합체 즉 정신적.육체적인 에너지는 죽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힘, 에너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화를 받고, 새로운 조건 속에서 다시 형성된다. 이것을 윤회, 전생이라고 한다.


업유(業有. 업의 작용, 흐름)는 끊임없이 현재의 생으로부터 미래의 생을 조건 짓는 에너지이다. 이 과정에서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전생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변화의 운동만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 여기서 죽어 다른 곳에서 태어난 존재는 이곳에서와 동일한 존재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존재도 아니다.


바로 이전의 생에 속하는 마지막 순간의 의식이 있고, 바로 그 다음 순간에 이 의식은 소멸한다. 그러나 이 의식에 조건지어져서 (영향을 받아서 ) 재생 의식이라 불리는 현생의 첫 의식이 생긴다 (이것이 12연기의 세번째인 식(識)이다). 마찬가지로 이 생의 마지막 순간의 의식이 다음생의 첫 의식을 조건 짓는다. 이 런방식으로 의식은 생겼다가 사라지고 새로운 의식에게 자리를 내준다. 이렇게 이 의식의 영속적인 흐름은 존재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된다. 어떤 면에서 존재란, 의식 즉 살고 지속하려는 의지이다.


현대 생물학에 따르면 새로운 인간의 생명은 아버지로부터 아온 정자가 어머니의 내부에 있는 난자와 합쳐지는 기적적인 순간에 시작된다. 이것이 탄생의 순간이다. 과학에서는 이 육체적인 두 공통 요소만을 언급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순수하게 심적인 세번째 요인을 말하고 있다.


[마하탕하상카야 숫타(Mahatanhasamkhaya-sutta) 중부 39]에 의하면,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야 임신이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있어도, 어머니가 임신 주기가 아니고, 다시 태어나야 할 존재가 존재하지 않으면 생명의 싹이 트지 않는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있고 어머니가 임신 주기에 있다 하더라도 다시 태어나야 할 존재가 존재하지 않으면 임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있고, 어머니가 임신 주기에 있으면서 다시 태어나야 할 존재도 존재 할 때 비로소 생명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여기서 말한느 세 번째 요소는 재생 의식(意識.의식)을 말한다. 이 재생 의식은 선하거나 악한 행위의 고보를 겪는 영혼이나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명백해 이해해야 한다. 의식은 또한 조건에 의해서 생긴다. 조건이 없다면 의식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의식의 흐름에다 태어남, 죽음, 사고 작용 따위의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의식의 순간들만이 존재한다. 위에서 보았듯이 의식의 마지막 순간을 죽음이라고 하고, 의식의 첫번째 순간을 탄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탄생과 죽음은 이 의식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의식의 순간들이 계속 이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지와 욕망 때문에 사람들이 존재에 집착하고 있는 한 그들에게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다. 그들은 존재의 수레바퀴를 윤회할 것이다. 이것은 욕망에 사로잡힌 무지에 의해 숨겨진 업의 영원한 활동 속에서 붙잡힌 작용과 반작용의 시속게임이다. 업 즉 행위는 우리 자신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윤회의 끝없는 사슬을 부수어 버릴 힘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존재의 굴레(윤회)는 무지와 욕망이라는 맹렬한 힘, 존재하려는 갈망, 살려는 의지를 뿌리째 뽑아 냄으로써 사라진다. 그래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어떻게 해야 미래에 윤회하지 않을 수 있는가? 무지를 소멸시키고, 지혜를 계발해서, 욕망을 소멸시키면 미래에 윤회하지 않는다." (중부 43)


깨달음을 얻은 후 붓다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되풀이되는 탄생은 고통이네
'집을 짓는 자(윤회의 주체)'를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하고
나는 수많은 윤회를 통해 방황했네
'집을 짓는 자여', 너는 알았으리라
너는 다시 집을 짓지 못한다는 것을
모든 서까래는 흩어졌고
대블보는 무너졌다
너의 마음은 열반을 성취했고
욕망의 소멸을 이루었네 (법구경 153,154)

출처 : 붓다의 옛길
글쓴이 : 실론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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