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스크랩] 청화큰스님 법문

수선님 2018. 10. 28. 12:46

-. 안심법문(安心法門) [1]


이번 법회는 참으로 의의 있는 희유(稀有)한 법회입니다.

경륜이 깊으신 대덕 스님들도 오시고, 또 우리 법사님, 거사님, 보살님들도 오셔서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법회입니다.

저는 한국에서는 더러 우리 스님 네들끼리 사흘이나 일주일이나 강의식 법문을 한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모인 가운데서 일주일씩이나 강의를 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특히 한국이 아니라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이렇게 여여한 여러분들을 모시고 법문을 하게 된 것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여기 모이신 여러 대덕 스님들과 강사스님 그리고 주지스님들은 모두 참선방에서 20년 이상씩 공부를 하신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거사님들 가운데는 법사도 여러분 계시고 학문적으로 높으신 박사들도 여러분 계십니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제가 법문을 할 만한 사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때그때 분주히 지내다 보면 부처님의 핵심 사상을 놓치고서 그냥 현실 생활에 매몰되기가 쉽습니다. 그러한 우리 일상적인 부족을 이런 때 서로 피차 반조(返照)하고자 하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시대적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움에 봉착해 있습니다. 전에는 동서 양 진영이 서로 겨루고 다투는데서 그때그때 긴장을 고조해 왔지만 이제는 한 쪽 공산세계가 붕괴(崩壞)되면서 더욱 혼란이 가중되어 오고 있습니다.

대체로 어떻게 하여야 우리 인류를 구제(救濟)할 것인가?

그런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관(價値觀),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치관을 우리는 어디서 구해야 할 것인가?


사실 지금까지 이루어진 대부분의 혼란상은 주로 서구문화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훌륭한 석학들이 다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만 서구사상으로 해서는 앞으로 오는 21세기 이른바 새로운 문명에 있어서 참다운 지도원리(指導原理)를 구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반 위대한 분들도 역시 동양사상이 아니면 앞으로 오는 새로운 시대의 지도 원리를 구할 수가 없다고 말씀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저희 불교인들은 더욱 확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가르침, 다른 문화 현상들은 모든 것을 나누어 분열해서 보는 경향이 있는데, 부처님 가르침만은 모두를 하나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만이 본래 하나가 아니라, 자연계라든가 또는 어떠한 것이나 다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일원주의(一元主義) 사상이기 때문에 이른바 동일률(同一律)이라!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로 통합이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불교 사상의 일원주의, 소위 동일률적인 사고방식, 이런 가르침만이 비로소 세계를 하나로 평화스럽게 묶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게 됩니다.


순선(純禪)

그런 의미에서 이번 법회의 제목도 『순선안심탁마법회(純禪安心琢磨法會)』라. 이렇게 법회의 명칭을 붙였습니다.

여러분께 나누어 드린 복사물이 아주 서툴게 됐습니다.

강사 스님들한테 부탁했으면 더 잘 될 것인데 여러모로 바쁜 일이 있어서 미루지 않고서 제가 스스로 한다는 것이 더러 오자도 있을 것이고 그럴 것입니다. 그런 점을 감안해 주십시오.

참선(參禪)은 비단 우리 불교인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인 일반 세간인도 참선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것입니다. 우리 몸과 정신 건강을 위해서나 기타 산란스러운 일들을 헤치고 나가는데 참선은 지극히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기독교 쪽에서도 참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일반 사람들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참선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참선이면 참선이지 왜 이와 같이 순선(純禪)이라. 순수한 참선이라 이렇게 명칭을 붙였는가? 이것부터 의심이 생기실 것입니다.

불교를 전문적으로 안하신 분들은 여러 가지고 어려운 술어가 있어서 가급적으로 풀이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더라도 어려운 술어가 나오면 그때그때 불편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번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이 법문 정도는 꼭 알아두셔야 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렇게 문제를 제기 했습니다.

보통 참선이 아니고 순선이라는 것은 이른바 순수한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을 순수한 참선이라 하는 것인가? 중국의 초조(初祖) 달마스님 때부터서 육조(六祖) 혜능 스님까지의 시대를 순선시대(純禪時代)라 하고 그때의 선을 순선(純禪)이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육조 혜능스님 이후에 다섯 파로 참선이 갈라지고, 그래서 서로 반목하고 옥신각신하는 그런 것을 주로 수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순선 그러면 참선하는 사람들도 그런 쪽으로 공부를 안 하신 분들은 다소 생소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달마스님 때부터서 육조혜능 시대까지를 가장 순수한 참선으로 보고 이것을 순선이라 합니다.

다시 간단히 말씀드리면 화두선(話頭禪)이 있고, 묵조선(默照禪)이 있고, 무엇이 있고 이런 복잡한 갈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 마음 그대로 닦아서 나아가는 그런 참선이란 말입니다.


안심(安心)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어느 종교나 다 우선 자기 마음이 편안하고 남과 화해하고 그렇게 청정(淸淨)하게 지내는 이런 것이 되어야 되겠지요.

그러기 때문에 어느 종교나 안심(安心)이라. 마음이 편안하고 안온한 것을 다 추구합니다. 그러나 특히 불교는 오로지 팔만 사천 법문 전부가 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보고 안심법문 그럽니다.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나가 다 자기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불안스러우면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불안스럽다는 것은 자기가 하는 일이 잘 안되기도 하고, 또는 내가 대체로 무엇인가? 자기 마음도 미처 무엇인가를 잘 모르고, 나한테는 지독한 고민이 있고, 더러는 미운 사람들도 있는데 어떻게 내가 편안할 것인가?

사실 여러 가지로 불안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천재(天災)인 지진(地震), 풍수해(風水害), 가뭄 그런 것 때문에도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굉장히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 정치를 잘못한다든가 무슨 제도를 만들어 가지고 우리한테 들씌우는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가 받는 인재(人災), 사람들 때문에 받는 재앙도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어떻게 우리가 안락스럽게 마음을 그야말로 안심하고 살 것인가? 부처님 법에는 더러 자기가 사업에 실패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가까운 사람이 죽기도 하고, 이별하기도 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능히 안락스러운 마음, 안심(安心)을 할 수가 있는 법문이 있습니다.

이런 법문은 어디서 얻는가 하면 허두에 말씀한 순선, 이른바 순수한 참선, 순수한 참선을 하여야만 그런 안심을 얻습니다. 따라서 순수한 참선을 떠나서는 우리 마음의 안심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순수한 참선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때나 안심을 얻고서 시시때때로 모두가 다 행복스럽게 지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要諦)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순선안심탁마법회』라!

이러한 순수한 참선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 어느 때나 안락스럽게 나날이 행복스러운 날이 되는 것을 서로 피차 토론(討論)도 하고 갈고 닦는 그런 법회(法會)가 이번 법회입니다.

따라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要旨)도 주로 순수한 선(禪)쪽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순수한 선 이것은 어느 것에도 막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흔한 말로 하면 이른바 원통불교(圓通佛敎)라! 원통사상, 또는 회통사상입니다.

회통사상(會通思想)은 이것저것 합해서 모두 다 호해를 시켜서 이루어진 하나의 진리(眞理)가 이른바 회통사상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뿐만이 아니라 자고로 위대한 성인(聖人)들은 다 회통사상입니다.

우리 한국만 놓고 본다 하더라도 신라 시대의 원효, 의상, 자장, 고려 때 대각, 보조, 태고, 이조 때 서산대사 모두가 다 회통사상입니다.

왜 그 분들이 회통사상일 것인가? 성자라 하는 분들은 천지 우주의 하나의 도리를 압니다. 우리 중생들은 겉만 보기 때문에 나는 나요, 너는 너요, 좋은 것은 좋다, 궂은 것은 궂다 시비 분별해서 봅니다. 형상적인 것은 그럴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인들은 모든 존재의 근본 바탕,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봅니다. 따라서 근본 성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란 말입니다. 예수도 공자도 다 그랬습니다. 근본 하나의 자리를 봅니다.

그 하나의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고 부처님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순선 도리를 가장 극명하게 나타낸 법문을 제시하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안심법문(安心法門) [2]


* 안심법문(安心法門) : 안락법문(安樂法門) 또는 안상삼매(安詳三昧)로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법문(法門)을 의미(意味)함


이 안심법문을 다른 말로 하면 안락법문이라고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마음과 몸을 하나로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이 안심하면 바로 안락스럽게 되겠지요. 복사물에 다 있습니다마는 중요해서 재차 여러분들한테 시각적으로 보다 더 인식을 깊이 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발췌 정리했습니다.

저같이 한문 세대인 나이를 많이 드신 분들은 몰라도 젊은 세대는 대학을 나오고 박사가 되고 하여도 한자를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일이 한글로 음을 달았습니다.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그야말로 글자만 봐도 마음이 편안한 법문입니다. 안심법문은 바로 안락법문입니다.

불교의 특색은 마음과 몸을 절대로 둘로 안봅니다. 하나로 봅니다. 마음도 몸도 하나요, 또는 자연과 인간도 하나요,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중요한 핵심(核心)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안심스러우면 몸도 안락스럽고, 불교 전문적인 참선하는 공부로 말할 때는 안상삼매(安詳三昧)라! 편안할 안(安)자, 자상할 상(詳)자입니다. 차분하게 우리가 조금도 서둘 것이 없단 말입니다.

불안스러워야 서두르는 것인데, 급할 것도 없고, 앞에 갈 것도 없고, 끝에 갈 것도 없고 말입니다.

자기만 잘나고 자기만 무엇이 잘되고 그런 때는 우리 마음이 안락스럽게 안 됩니다. 안심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언제나 꼼꼼하고 자상스럽고 말입니다. 이른바 유연스러운 것, 이것이 안상입니다.

안상삼매라. 삼매(三昧)라는 것은 오로지 거기에 몰입한단 말입니다.

인도 말로는 삼마지(三摩地 : Samadhi)인데, 삼매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쓰지 않습니까. 거기에 몰입하는 이것이 삼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또는 움직이나 누구하고 말을 하던지 간에 언제든지 마음이 차분하고 조금도 서두르지 않는 안상삼매에 들어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우리 마음이 안심이 되고 몸도 안락스러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안심이 되고 안락스러으려면 우리 공부하는 것도 역시 선오후수(先悟後修)라. 우선 이치로 막힘이 없어야 합니다.

이치로 막힘이 없어야 비로소 우리 마음이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룻길도 우리가 길을 잘 모르면 불안스럽고 헤매지 않습니까?

길을 가더라도 갈래를 알아야 이제 안심하고 갈 수가 있는데 하물며 우리 인생살이는 더욱 가는 길이 확실하여야 되겠지요.

더구나 현대와 같이 정보가 종횡으로 착종(錯綜)하고 있는 이런 시대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현대를 가리켜 정보화시대라 하지 않습니까. 정보화 시대가 좋기는 좋은데 정보가 너무나 범람하므로 자기 인생관, 가치관이 확립 안 된 사람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느 정보를 우리가 선택할 것인가?

혼란스럽단 말입니다. 저번에 신문 쪽지를 보니까 미국 사람들 5분의 3정도는 노이로제 증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항시 마음이 불안스럽기 때문입니다. 항시 긴장되어 있고 항시 스트레스를 풀래야 풀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병의 원인도 되고, 가정불화의 씨앗도 되고, 민족들끼리 분열도 되고, 그럴 수가 있겠지요. 아무튼 그런 것은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내일은 어떻고 우리 공부는 어떠할 것인가? 부처님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도 지금 공부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더러 대답을 확실히 못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무슨 방식으로 공부를 하는가? 그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오후수라! 선오후수라는 말을 우리가 꼭 명심해서 자기가 선오후수가 되도록 까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적어도 이론적으로만은 먼저 깨닫는단 말입니다.

 

참다운 중도(中道)를 깨닫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참선도 하고 기도도 모셔서 우리 업장(業障)이 녹아나야 되겠습니다만 그렇기 전에 이론적으로 먼저 깨닫는단 말입니다.

 

더구나 이 현대는 이론적인 논리가 앞선 시대 아닙니까? 하기 때문에 꼭 부처님의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논리로 해서 먼저 깨닫고서 뒤에 닦아야만 이른바 정수법문(正修法門)입니다. 바르게 닦는 법문입니다. 덮어놓고서 공부해라. 이렇게 해서는 지금 통할 때가 아닙니다. 부처님 법문의 요체는 어떤 것인데 그대는 지금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이 그대한테 제일 좋다. 남한테 지도를 못 받으면 스스로 연구해서라도 부처님 팔만 사천 법문 가운데서 나한테 안 맞은 것은 어떤 법문인가? 분명히 선택해서 공부를 하여야 이제 마음이 안락스럽습니다.

그래서 선오후수, 먼저 이론적으로 알고 단계, 단계 느끼면서 닦는 그러한 법문의 핵심이 여기에 있는 법문입니다.

제불여래시법계신(諸佛如來是法界身)


*제불여래시법계신(諸佛如來是法界身) 입일체중생심상중(入一切衆生心想中)

 시고여등심상불시(是故汝等心想佛時)

 심즉시삼십이상팔십수형호(是心卽是三十二相八十隨形好)

 시심작불(是心作佛) 시심시불(是心是佛)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제불여래(諸佛如來)".

제불여래는 바로 모든 부처님이십니다. 모든 부처님이라고 할 때는 수에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했을 때는 무량무수(無量無數)의 헤아릴 수 없는 그러한 우주의 순수생명(純粹生命)!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할 때 부처님은 저 어디 밖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것은 방편 가르침입니다.

방편(方便)을 떠나서 부처님을 대승적(大乘的)으로 생각할 때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우주의 생명입니다.

 

나의 생명인 동시에 동물이나 식물이나 자연계나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우주 전부의 근원적인 생명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생명이니까 '부처님!'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부처님을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이 생명인데 마음의 근본 고향인 동시에 일체생명의 근본자리가 생명이 아니라고 할 때는 우리 마음이 너무나 건조해져버립니다.

우리 신앙의 대상이 생명이 아니라 논리(論理)다, 이치(理致)다, 지혜(智慧)다, 이렇게만 생각할 때는 자기 신앙이 정말로 감성적(感性的)으로 감격(感激)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필히 부처님을 내 생명의 근본 생명인 동시에 우주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으로 느끼셔야 합니다.

 

다시 바꿔서 말씀드리면 우주가 바로 부처님이라 하는 하나의 생명 덩어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방여래(十方如來)라는 것은 바로 우주 전체를 말하는 것이며 우주 전체의 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방여래, 우주 전체의 생명이 "시법계신(是法界身)"이라.

 

법계라는 것도 우주 전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라는 것은 바로 어디 다른 데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극락세계(極樂世界)가 있어 거기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바로, 부처님은 우주를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계신이라, 부처님 몸이 바로 우주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일반적으로는 다 자기와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심리적으로 항시 불안스럽고,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부처님과 가깝지 않단 말입니다.

우주의 생명이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때는 우리는 누구나 바로 거기에 다 포함됩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주 법계를 몸으로 하시기 때문에 "입일체중생심상중(入一切衆生心想中)"이라. 모든 중생의 마음 가운데 다 들어 계신단 말입니다. 내 마음 가운데나 그대 마음 가운데나 또는 다른 동물, 식물 가운데나 다 들어 계십니다.

우리 불교에서 마음이라고 할 때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사람만의 마음을 마음이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다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도 마음이 안보이지만 마음이 바로 주인공(主人公) 아닙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산(山)도 우리는 산으로 보이지만 내내야 산에도 안 보이는 산신(山神)이라, 산에 들어 있는 정기(精氣), 산 기운, 산 에너지가 참다운 산의 한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물을 물로만 보지만 물의 정기, 그것은 바로 용왕(龍王)입니다. 물의 정기가 바로 참다운 물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우주도 태양계, 은하계 이렇게 구분해서 봅니다. 이런 것은 우리 중생의 분별로 해서 나누어 놓은 것이지 본래적인 생명 자체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가 부처님이라 하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주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모든 중생 가운데 부처님, 하나님이 다 들어 있습니다. "시고(是故)" 그러기 때문에 "여등(汝等)" 그대들이 "심상불시(心想佛時)" 이와 같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을 제한되게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광대무변한 우주 생명이기 때문에 그와 같이 광대무변한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시심즉시(是心卽是)" 이 마음이 곧바로 "삼십이상팔십수형호(三十二相八十隨形好)"라. 이런 것들은 불교 술어이기 때문에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것은 부처님한테 들어 있는 모든 공덕(功德)이 삼십이상 팔십수형호입니다.

우리 마음이 부처님같이 청정하고 번뇌가 없고 자기라 하는 것을 떠나서 무아(無我)의 진리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얼굴도 사실은 석가모니같이, 예수같이 잘날 것입니다. 사실 성인들은 얼굴도 이와 같이 일체 공덕이 다 들어 있어놔서 사람 얼굴로서 조금도 흠이 없는, 눈이나 입이나 코나 몸 어디나 조금도 흠이 없는, 그런 것을 상징적으로 서른두 가지 큰 상과 여든 가지 작은 상이라고 구분을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바로 뜻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무한의 공덕입니다.

자비나 지혜나 능력이나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하고 말입니다. 환희공덕(歡喜功德)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기계만능시대, 물질만능시대에 살고 있어 놔서 기술이면 다고 모두 그렇게만 생각하는 데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습니다. 사실 물질이 사람 마음까지 지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간성을 너무나 왜소(矮小)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람 마음으로 지금 금생에 나와서 뭘 좀 배우다 다 못 배우고 죽어지지 않겠는가?

이렇게만 가볍게 생각을 해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쓰는 이 마음이 성자와 더불어서 절대로 둘이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가르침이요, 그들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지혜도, 자비도, 사랑도, 능력도 예수나 석가와 공자와 더불어서 절대로 다르지 않습니다. 성인과 똑같습니다. 그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나 우리나 인간성은 똑같습니다. 다만 개발을 누가 얼마만큼 했는가 하는 그 차이 뿐인 것입니다.

불교가 절대적으로 평등사상(平等思想)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누구나 본래로 잠재해 있고 갖추고 있는 것은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대 천재나 우리나 다 똑같습니다. 다만 우리가 게을러서 불교 말로 하면 나쁜 버릇이 많이 붙어서 개발을 미처 못 해 있단 말입니다. 불교 신앙이라는 것은 내 본래가 하나님이고, 부처님이다. 이렇게 믿는 것이 불교의 올바른 신앙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대승적인 신앙입니다. 나는 나밖에는 안 된다. 이렇게 해서는 대승적인 신앙이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할 때에 어느 제한된 부처가 아니라 '부처님은 모든 공덕을 원만히 갖춘 우주의 생명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만 공덕을 갖춘 그 생명이 나한테나 너한테나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흔히 나한테나 너한테나 부처님이 들어 있다고 말하면, 부처님은 본래 무량무변한 그런 공덕인데, 나한테 들어가고 너한테 들어가 있는 것은 그 한 부분만 들어가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보통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란 의미는 이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크고 작고하는 그런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른바 순수 에너지, 순수한 생명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는 많고 적고 하는 그런 대립이 없습니다.

많고 적고 하는 그런 비교를 할 수가 없이 우주에 바로 충만해 있습니다.

공기는 지구의 대류권(對流圈)에만 있고 더 올라가면 없는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우주에 언제 어디에나 충만해 있습니다.

 

내 몸 속에나, 다이아몬드 가운데나 저 태양 가운데나 빈틈도 없이 충만해 있는 하나의 생명 자체란 말입니다.

 

이렇게 나한테 있는 불성과 석가모니한테 있는 불성이 똑같다. 그래야 불교의 참다운 이해가 됩니다.

 

 

이와 같이 그러한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이 곧 삼십이상 팔십수형호라. 우리 마음이 그와 같이 부처님의 만 공덕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어리석어서 다는 느끼지는 못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기에 "시심작불(是心作佛)"이라. 이 마음으로 부처를 이른다. 이 마음으로 성불(成佛)을 한단 말입니다.

다른 걸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마음이 본래 부처인 것이고, 또 부처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 마음으로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고 또 동시에 "시심시불(是心是佛)"이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불교를 공부할 때 이 시(是)자를 바로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이 시' 혹은 '바로 시' 그럽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라고도 하고, 어떤 때는 '바로'라고도 합니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이것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있는 가장 중요한 법문입니다.

여러분들한테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나누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정토삼부경 맨 허두에 가서 이와 같이 관무량수경에 있는 법문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법문이 팔만 사천 법문을 모두 다 포섭해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앞으로 두고두고 말씀드리는 것도 이러한 법문을 보다 더 부언해서 말씀드리는 것에 사실은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법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선 즉, 참다운 순수한 선 역시 이러한 사상 밑에서 이루어지는 참선입니다.

참선하면 우리가 기운도 있고 잔병도 떨어지고 기분도 좋고 개운하다. 이런 정도는 순수한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부처가 무엇인가를 바로 느끼고서 그 부처의 자리에 마음을 딱 못 박아 두고서 그 자리를 여의지 않는, 자나 깨나 남하고 말을 하나 밥을 먹을 때에도 부처님 자리, 하나님 자리를 놓치지 않는 이것이 우리들의 참다운 신앙입니다.


-. 안심법문(安心法門) [3]


하나의 도리(道理)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지금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네 것, 내 것 싸워서는 민족이나 국제간에도 절대로 화합이 못됩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가 국제화, 세계화가 되고 싶어서 됩니까? 지금은 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경제만 해도 다국적 기업이라. 한 나라만 가지고서는 자본주의 후기는 경제가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다.

모든 면에서 필연적으로 국제화가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런 때는 마땅히 경제인들만이 아니라 전 인류가 화합이 되어야 하겠지요.

화합을 하려면 바른 인생관과 세계관이 있어야 하겠지요. 세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바른 인생관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그 때는 투쟁과 반목뿐입니다. 평소에 가치관이나 인생관 문제에 대해서 별로 큰 관심을 안 두고 살아온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너무나 각박해서 그럴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알고 보면 자기 마음이 무엇인가? 천지를 다 주어도 나를 모르면 아무 가치가 없다 하듯이 자기가 무엇인가? 나라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인가?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어디서 와서 앞으로 가는 곳은 어디인가?

또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도교와 유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런 것을 지금 모르고 살 때가 아닙니다. 금방 닥쳐온단 말입니다.

금방 자기 아들이 기독교도 믿고 유교도 믿고 그럽니다. 몇 해 전에 어느 분이 자기는 지금 이른바 단군교(檀君敎)를 믿고, 자기 아내는 불교를 믿고, 아들은 기독교를 딸은 천도교(天道敎)를 믿는다. 그렇게 자랑삼아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믿는 것은 좋은데 피차 그것이 화합되게끔 하나의 도리를 딱 느끼고서 그렇게 화해가 되면 좋은데 그렇게 못된다고 생각할 때는 싸움판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꼭 '하나의 도리'를 알 때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므로 여러분들께서도 하나의 도리를 알기 위해서는 피차가 순수(純粹)해야 됩니다. 순수하다 보면 순수한 것은 같아지겠지요. 불교도 순수하고 기독교도 순수하고 사람도 순수하고 순수한 사람들끼리는 잘 통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허두에 순선시대(純禪時代)라. 참선도 그냥 화두(話頭)한 사람이 옳다, 묵조(默照)한 사람이 옳다. 뭐한 사람이 옳다. 우리 한국이나 일본 불교도 그런 시비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시비나 문중이 이루어지기 전 순수한 때에 순선 시대에 어떻게 말했던가?

그리고 석가모니께서는 어떻게 말했던가? 순수한 마태복음서나 요한복음서에 예수가 어떻게 말했던가?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두루 훑어보면 거의 같아 버린단 말입니다. 이번 법회의 목적도 그런 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이런 도리를 '천지 우주는 다른 것은 하나도 없이 모두가 일체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님뿐이 아닌가?'

부처뿐이라고 생각할 때에 나나, 너나, 미운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나, 내 딸이나, 남의 아들이나 다 포함됩니다.

불교에서 무아(無我)라! 내가 없다. 무소유(無所有)라! 본래 내 소유가 없다. 이런 것도 그러한 심심미묘(甚深微妙)한 종교철학(宗敎哲學)적인 의미에서 그때는 필연적으로 무아가 되고 무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무아가 되고 무소유가 되어야지 어거지로 뭐 내가 제일 좋은데, 제일 훌륭한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한테 무아가 되라 하면 무아가 되겠습니까. 내 것은 어디까지나 내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다. 이런 사람한테 남에게 보시(布施)하라 하면 함부로 보시하겠습니까? 기본적인 철학이 확립돼 놓으면 그때는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지금 사회를 맑혀야 한다, 어떠해야 된다. 그런 캠페인이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한마음 운동, 한 몸 운동. 이러한 운동도 분명히 이와 같이 하나의 도리로 해서 본래가 한 몸이요, 한마음이요, 알고 하면 좋을 것인데 그걸 모르고서 뿔뿔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한테 한 몸 운동, 한마음 운동하라고 하면

그것이 노력은 많이 하지만 별로 성과는 없단 말입니다. 어떠한 분야나 지금은 바른 가치관, 바른 철학이 앞서는 때입니다. 법학을 하나, 정치를 하나 다 그렇습니다. 정치를 하시는 분들도 '천지 우주가 본래로 하나의 생명이다'

이런 철학과 도리를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설사 정당을 따로 한다 하더라도 요새같이 그렇게 추태되는 일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삼십년, 사십년 정치한 사람들 지금 보십시오. 그런 분들 가운데는 기독교도 믿고 불교도 믿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아닙니까. 그런데도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가 종교를 믿어도 피상적(皮相的)으로만 보통은 믿고 있다. 이렇게 한탄을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때는 서로 피차 자기반조(自己返照)를 해 가면서 부처님 법문의 핵심을 공부하시도록 그렇게 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출처 : 무인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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