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스크랩] 청화큰스님 법문

수선님 2018. 10. 28. 12:47

마음의 고향 제 15 집


성륜사 조선당에서(1995년2월27일) 청화 큰스님과 광주전남 교수불자들과의 대담 법어입니다


-. 부사의(不思議) 해탈법문 [1]

질 문 : 벽산당(碧山堂) 금타 대화상(金陀大和尙)의 재일에 큰스님께서 설법하신 불가사의 해탈법문에 대해서 유연 불자들이 信心을 북돋을 수 있도록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법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 불교를 보통은 원리로만 추구하는 주지적(主知的)인 경향이 너무나 농후하기 때문에 신앙적(信仰的)인 면에서 자칫하면 소외를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사 진여불성(眞如佛性) 그러면 하나의 우주의 원리 정도로 참구(參究)를 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역시 그 보다도 더 깊은 불가사의한 것이 있습니다. 그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문제는 보통 우리 인간이 체험할 수 없으므로

당연히 부사의한 경계가 되겠지요.

그래서 화엄경(華嚴經)을 부사의경(不思議經)이라고도 합니다.

화엄경에 보면 우리 상식으로 해서는 이해를 못하는 분야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가령 화장세계(華藏世界)라든가,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그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이 우주 바로 이대로 조금도 흠축이 없는 그야말로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연화(蓮華)의 꽃 같은 세계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여러 가지로 험난하고 반목과 갈등이 심한 사바세계(娑婆世界)가 어떻게 연화장 세계가 될 것인가?

그런 것도 우리가 납득하기가 곤란스런 문제가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화엄경에 보면 삼계이십팔천(三界二十八天)이라 그래서 인간이 사는 이 세계뿐만이 아니라 욕심(慾心)을 주로 한 욕계(欲界)에도 역시 인간 세상보다 더 수승한 천상(天上)이 더 많이 있단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욕계천상을 초월해서 색계(色界)라는 이른바 인간적인 욕망,

즉 남녀 이성적인 음욕, 식욕, 재물욕 등 오욕(五慾 : 財, 色, 名, 食, 睡)을

다 떠나버린 그런 세계가 색계입니다.

색계도 한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색계 십팔천 그래서 업장의 무게에 따라서 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색계(無色界) 그래서 물질적인 모든 흔적을 다 없애버리는 하나의 의식(意識)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무색계도 업장(業障)에 따라서 네 가지 하늘이 있습니다. 다 합해서 3계 28천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엄경에서 말하는 28천도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만을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그런 개념적인 지식으로 해서는 알 수가 없고, 상대 유한적인 범주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부사의경이라 합니다.

또 유마경(維摩經)을 부사의해탈경(不思議解脫經)이라고도 합니다. 재가 불자님들은 유마경을 꼭 보셔야 한다고 보통은 그렇게 말씀이 되어 있어요.

여러분들도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인도에서 대표적인 거사님이 유마거사(維摩居士)고, 중국에서는 방거사(龐居士), 한국에서는 부설거사(浮雪居士) 그렇게 보통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집안에서 처자를 거느리는 거사이면서도 출가 수행자 못지않게 위대한 분들이었습니다.

유마거사는 부처님을 빼놓고 문수보살(文殊菩薩)이나 누구도 대적하지 못할 정도로 법이 높으신 분 아닙니까. 유마경에는 여러 품이 있는데 그 가운데 부사의해탈품(不思議解脫品)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사의한 것을 취급한 하나의 편, 장(編, 章)이지요.

그곳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작은 겨자씨 하나 가운데 이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가 몽땅 다 들어가도 조금도 증감(增感)이 없고, 조금도 불편을 느끼지 않고, 또 일모공중(一毛孔中)에 입사대해(入四大海)라, 조그마한 터럭 끝에 사대해(四大海), 우주에 있는 모든 바다가 다 들어가도 조금도 흠축(欠縮)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지적 또는 지성적 원리적인 그런 것만 생각한 분들은 그런 부사의한 것은 대체로 부인을 많이 합니다. 저번에 어느 스님이 설법하신 것을 좀 보니까 불교는 신비로운 것은 조금도 없는 것인데 그와 같이 모두 신비를 덧붙이고 해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런 쪽으로 법문을 하신 분도 있어요. 그것은 부처님의 이른바 부사의한 법문에 비교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좀 맞지 않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유교(有敎)

보통 불교의 상식적인 분야는 전문적인 불교 술어로 있을 유(有)자 유교(有敎)라고 합니다.

나도 있고, 너도 있고, 보통 이 범안(凡眼)으로 보는 세계가 이대로 전개가 되어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그런 차원의 가르침이 유교입니다.

그래서 불교 경전으로 말하면 주로 아함경(阿含經), 아함경도 유교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하여튼 중생 차원의 근기에 맞추어서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좋으면 좋고, 궂으면 궂고 하는 유교가 있고, 따라서 그것은 상식적인 분야라고 생각을 할 수가 있겠지요.

공교(空敎)

그렇게 해서 중생의 근기가 좀 더 익어지면 그때는 공교(空敎)라, 제법이 공이라, 색즉공(色卽空)이라,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라, 모양, 소리, 향기, 맛, 촉감 등 일체 법이 공이라. 이른바 제법이 다 공이라. 공을 주로 해서 말씀한 법문인데 그런 말씀은 금강경(金剛經),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불교 경전은 무슨 경전이든지 공 말씀을 안 한데는 별로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은 우리 중생이 보는 이것은 가상(假相)이고 허망상(虛妄相)만 보기 때문에 마땅히 그것을 부정해야 참다운 진여불성의 자리가 나오기 때문에 불교는 무슨 법문이든 간에 모두가 다 공이라는 그런 말씀을 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반야심경은 철두철미하게 공으로만 이루어진 법문이 아니겠습니까. 심경 허두에도 조견(朝譴)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오온은 정신과 물질과 우주만유 모두를 통틀어서 불교에서 오온이라 합니다.

오온이 온전히 다 비어 있음을 조견이라, 비칠 조(照), 볼 견(見), 정신과 물질과 그 우주에 있는 모든 산하대지(山河大地), 두두물물(頭頭物物) 다 비어 있음을 비추어 봄으로 해서 비로소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일체 고난을 제도할 수 있다는 법문이기 때문에 사실 불교 인생관이 거의 압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제아무리 인생고를 떠나기 위해서 몸부림친다 하더라도 우선 철학적으로 모든 존재가 본래로 다 비어 있다는 것을 투철하게 조견, 비추어 보는, 통찰해서 보는 그런 것이 없으면 인생고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 반야심경의 하나의 결정적인 말씀이 되어 있습니다.

불교의 전모가 다 그렇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금강경에도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끊으라는 법문이 있지 않습니까. 나라는 상, 너라는 상은 상대적 인간의 문제이므로 알 수가 있지만 중생상을 말할 때는 어디까지가 중생일 것인가? 이렇게 의심이 됩니다.

불교에서는 중생 그러면 사람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다른 동물이나 나아가서는 식물이나 무생물이나 하여튼 존재하는 것은 다 중생이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불교 인생관과 앞서 말씀한 화엄경 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마음이라 하는 순수생명으로부터 되어있기 때문에 어떠한 것이나 어떤 물질이나 이 공간이나 모두가 다 하나의 존재라고 보아서 중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기 때문에 그런 나라는 상, 너라는 상도 중생이라는 상 가운데 다 포함됩니다. 그 다음 수자상이라, 수자라는 것은 목숨 수(壽)자, 놈 자(者)자, 이제 목숨에 관한 상인데다시 더 세밀하게 말씀드리면 시간관념(時間觀念), 수명이 짧다, 길다 하는 것이라든가, 또 확대시켜서 일체 시간(時間) 자체가 본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상대적으로 이른바 물질이 있으면 거기에 따라서 시간도 부수적으로 생기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과거, 현재, 미래 이것도 본래로 있는 것이 아닌데 인간이 물질이 변화 소모되고 진행되는 것을 대적해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공간성(空間性), 시간성(時間性)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라는 상, 너라는 상, 중생상, 수자상, 이 사상(四相)이 없으면 그때는 성자이고, 부처이고, 그러나 이 사상이 있으면 범부 중생입니다. 이렇게 판이하게 구분을 합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공사상을 말하는 것이 이른바 공교, 앞서 말씀한 반야경 계통이 공교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공사상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부처님께서 말씀을 제일 많이 하셨습니다. 일반 사람들로 해서는 뻔히 있는 것을 없다고 하므로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곤란스럽겠지요.

부처님께서 22년 동안 공사상을 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 부사의(不思議) 해탈법문 [2]

중도교(中道敎)

그러나 공에 너무나 치우쳐버리면 그때는 사람이 허무해지고 맙니다. 생의 의욕도 상실되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다만 공이 아니라.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다 허무한 공 같으면 살맛도 없을 것입니다.

인연에 따라서 존재도 분명히 있기도 있는 것인데 이것저것 몰수해서 다 없다 해 버리면 불교 말로 무기공(無記空)이라, 허무에 빠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다만 공이 아니라 정말로 깨달아서 공에 사무친다고 생각할 때는 공의 정체(正體)는 중도(中道)란 말씀입니다.

그 말은 우리 중생이 보는 이 물질계, 상대유한적인 이 세계는 공이라 하더라도 절대적인 순수세계는 이른바 진여불성, 부처님 성품이라 하는 우주의 정기(精氣)가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여불성세계(眞如佛性世界)는 공만도 아니고, 유만도 아니고, 유도 부정하고, 공도 부정하고, 이른바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합니다.

그래서 그 중도사상이 되어야 이른바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에 나오셔서 중생들을 구제하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부처님께서 꼭 우리한테 하신 가르침은 중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이 잘 못 알아듣기 때문에 맨 처음에는 중생 그릇에 맞추어서 있다, 없다 그런 차원으로 방편을 말씀 하시고, 그 다음 있는 것은 우리 중생이 보아서 있는 것이지 혜안(慧眼)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당체즉공(當體卽空)이라.불교를 이해할 때 분석할 석(析)자, 빌 공(空)자 석공(析空)이 있고, 곧 즉(則)자, 빌 공(空)자 즉공(卽空)이 있습니다.

석공은 현대 물리학적으로 분석해 들어가서 쪼개고 쪼개서 그야말로 아주 궁극적인데 이르러서 모두가 다 소립자(素粒子)가 되고, 그도 에너지의 파동(波動)이기 때문에 종당에는 다 비어버린다고 하는 그런 식 보고 석공 그럽니다.

그러나 분명히 있는 것을 보고 바로 공이라고 하므로 즉 공은 현대인들이 잘 이해를 못합니다. 더 어려운 말로 하면 당체즉공이라. 사람을 보면 사람 그대로 공이고, 금은 금 그대로 공이고, 다이아몬드도 그대로 공이고, 모두가 하여튼 "당체가 바로 비어있다" 이렇게 말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은 석공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색즉공 아니겠습니까. 왜 이렇게 바로 공일 것인가?

그것은 우리 중생들의 시각(視覺)이 짧아서 중생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이대로 있단 말입니다. 좋은 것은 좋고, 또 네가 있고, 내가 있고, 즉 중생이라는 것은 결국 허망한 물질단계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차원에서는 즉공에 대해서 잘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공부 방법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중생의 오염된 시각으로 보아서는 성형된 현상적인 물질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정밀한 현미경을 가지고 본다 하더라도 내내야 물질을 보는 것이지 물질이 아닌 그 순수에너지는 볼 수 없는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중생이 볼 때는 물질만 보기 때문에 분석한 뒤에 공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는 공이 아니다 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자는 사실 본질을 봅니다. 진여불성 경계를 직감적(直感的)으로 봅니다. 다 체험적으로 느낍니다.

그런데 그 진여불성 본질이라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고 시공을 초월하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하고 물질이 아닌 순수생명의 진여불성 자리에 혼연일치 된 그런 분상의 혜안(慧眼)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이 있는 그대로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제로(zero)를 몇 백번 보태고 곱해도 제로는 제로 아닙니까. 그와 똑같이 그 순수에너지의 파동이 이렇게 저렇게 진동해 가지고서 물질의 경계인 상(相)을 보일 뿐인데 우리 중생들은 그 순수에너지 즉 근본 본질은 보지 못하고 그 겉에 뜬 상만 보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도 많은 세포(細胞)가 결합되어 시시각각으로 신진대사(新陳代謝)해서 이렇게 움직이고 변화무쌍(變化無雙)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중생은 그 변화 과정은 못보고 현상적인 상만 보아서 이 몸뚱이가 이대로 있다고 집착을 합니다.

이 몸뚱이는 수많은 세포들의 결합이고 또 그 세포들 역시 수십억 원자들의 결합, 원자 그것도 결국은 소립자에 불과한 것이고, 소립자 자체는 물질이라 할 수 없는 하나의 에너지의 파동 아닙니까.

이와 같이 한 순간도 머물지 않는 에너지 진동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 어떠한 모양이 되었으나 순간 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도인들은 그 순수에너지 물질이 빈 것을 훤히 비추어 봅니다. 가사 다이아몬드와 같이 강도가 높은 것도 성자가 볼 때는 하나의 에너지 파동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성자가 보는 경우는 모두가 그대로 즉 공이라, 당체가 공이라, 그렇게 보기 때문에 성자는 물질에 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부들은 이렇게 성형이 되고 현상적으로 이루어진 그 허망한 모양을 실지로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치(理致)로는 비었다 해도 참말로는 비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내 몸뚱이에 집착하고 물질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자가 아닌 한 누구나 다 있는 것에 집착을 합니다. 이른바 상에 집착을 합니다.

따라서 불교 초보단계에서는 즉 공(卽空) 도리를 이야기하기가 곤란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현대는 물리학(物理學)이 증명을 하여 주므로 누구나 다 쉽게 짐작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만, 옛날 같이 물리학이 없는 시절에는 있는 것보고 비었다고 하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역시 불교에서는 그때의 술어로 해서 분석하는 석공법(析空法)을 말씀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나 참선, 주문을 통해서 정진을 바르게 지속적으로 할 때는

차근차근 자기라는 관념이 희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는 자기 몸뚱이에 대한 아무런 무게를 느끼지 않습니다. 자기 심신(心身)이 가뿐하니 한 근 무게도 없는 것같이 생각이 되고 "내 몸뚱이 하늘로 떠버려라" 하면 금방 뜰 듯이 착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사실 범부 분상에서는 착각이 될지 모르겠지만 성자의 견지에서는 정말로 그때 신통(神通)이 나와서 올라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본래 무게가 있는 것 같으면 그럴 수가 없지만 본래 무게가 없는 것인데 중생들이 이렇게 세포로 구성되고 결합된 이것보고 '무게가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무게를 이른바 중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의 수묘게(數妙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연기약존(緣起若存) 연기약망(緣起若亡)이라, 인연이 있으면 존재하는 것 같고 인연이 멸(滅)하면 없는 것 같으나 실제로 멸하는 실멸(實滅)이 아니고 실제로 있는 실유(實有)가 아니다.

인연이 결합하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고, 인연이 또 사라지면 없는 것 같이 보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의 순수생명, 진여불성 만이 여여 불가사의할 뿐입니다.

사실 유교(有敎)나 공교(空敎), 모든 것이 있다는 차원의 가르침이나 모두가 비었다고 하는 차원의 가르침에는 부사의 해탈법문, 즉 불가사의한 법문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 부사의(不思議) 해탈법문 [3]

 

≪ 불가설(不可說) 불가사의(不可思議)≫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공묘유(眞空妙有) 진여불성 자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이른바 불가사의 해탈법문이란 그런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불성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그 불성 자리는 불교 대승경전에서 불성공덕(佛性功德)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해설이 많이 되어 있습니다.

우선 쉽게 말하면 자비(慈悲)와 지혜(智慧)입니다. 또 물리적인 표현으로 하면 마이너스, 플러스, 음(陰)과 양(陽)이 되겠지요. 자비와 지혜인데 그러면 자비와 지혜만 있고 다른 것은 없을 것인가? 하여튼 불교에서는 그 불성공덕에 대해서 불가설(不可說) 불가사의(不可思議)라.

그런 불성공덕(佛性功德)은 무수한 성자가 오랜 세월을 경과하면서 헤아려도 다 능히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른바 무한의 공덕, 무한의 가능성이라 합니다. 사실 우리가 현재 원자력의 힘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일단은 유추해 생각하여 볼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얼마큼 그 물리적 에너지에 큰 힘이 포함되어 있는가를,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순수한 에너지인 진여불성, 우주의 이른바 정기 가운데는 정말 어떤 면으로나 완벽하게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힘을 좀 얻어 놓으면 그때는 부사의한 힘을 낸단 말입니다.

그것은 시간, 공간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앞서 유마경의 부사의해탈품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겨자씨 하나 가운데 삼천대천세계, 우주가 다 들어가고 또는 터럭 끄트머리에 태평양과 같은 사대해가 들어가도 조금도 부족하고 모자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결국 태평양은 더 넓고 터럭 끝은 좁고 하는 상대관념(相對觀念)에서 못 들어가고 하는 것이지 본래는 터럭 끝이고 대해(大海)고 다 똑같은 물질이 아닌 하나의 순수에너지이기 때문에 그때는 들어갈 것도 없고 못 들어갈 것도 없고 그대로 다 하나란 말씀입니다.

즉, 다시 바꿔서 말씀드리면 천지우주가 진여불성이 순수생명으로 충만해 있다. 이렇게 볼 수 있겠지요. 그래서 그런 단계에서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 그런 말도 새삼스럽게 할 수가 없지요.

그러기에 그야말로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청정광불(淸淨光佛)이라고 부처님의 대명사를 따르는 것입니다.

하기 때문에 그 부사의 해탈법문은 유교(有敎), 공교(空敎)를 초월해서 중도교(中道敎)에 들어간 차원에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사바세계 이대로 극락세계≫

그래서 소승, 대승을 구분할 때도 원칙은 공교까지는 소승으로 봅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은 소승에서 대승으로 가는 하나의 교량입니다.

반야심경이나 금강경 도리는 색즉공(色卽空)만 말한 것이 아니라 공즉색(空卽色)도 말했기 때문에 반야사상은 대승의 입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역시 대승의 온전한 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화엄경, 법화경이고, 그 대승사상은 그야말로 천지우주가 바로 화장세계이고 사바세계 이대로 극락세계라는 것입니다.

왜 이대로 극락세계일 것인가? 우리 중생은 상만 보는 셈인데 상으로 보고는 좋다, 궂다 모두가 오염되었다, 청정하다 그런 말들을 하겠지만 불교의 중도사상은 물론 반야사상에서만 본다고 생각할 때도 결국 다 비어 있습니다.

육조단경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하니 하처야진애(何處若塵埃)리요,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디에 때가 끼고 먼지가 일어나리요. 이와 마찬가지로 사실 물질이라는 것은 불교의 중도사상이나 반야에서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단지 에너지의 파동적인 상에 불과한 것을 우리 중생은 그 상만 보기 때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선 공부할 때는 물론이고 또 도덕적인 여러 가지 관념을 역설하는데 있어서도 이 공사상을 모르고서 그냥 상식적인 차원에서 도덕론을 말할 때는 항시 그것이 올바른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우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 몸뚱이 자체가 바로 비어 있는 것이고, 또 일체 물질현상은 모두가 다 본래 비어 있다는 생각을 투철히 하여야 여러 가지 그 인간의 욕심도 낼래야 낼 수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본래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물질도 있고 그런 여러 가지 폐물(幣物)도 있고

그렇게 생각을 할 때는 우리 중생들이 억지로 또는 계략(計略)으로는 도덕을 지킬는지 몰라도 자발적으로는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역시 공사상으로 잘 못 보고 있는 허상을 다 최파(摧破)하는 것이 선결문제가 되겠고, 그러나 최파가 철저하지 못하면 중도실상의 부사의한 경계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주(趙州)스님 같은 분도 "그대들이 대도를 통하려고 생각할 때 마땅히 공리(空理), 즉 제법이 공이라는 이치 위에 앉아서 십년이고 이십년을 닦아서 안 통하면 내 목을 베어가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할 때는 우선 자기 몸부터서, 자기 관념부터서 다 비워가야지 그렇지 않고서 덮어놓고 염불(念佛)하고, 덮어놓고 화두(話頭)를 하면 물론 공부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항시 빡빡합니다.

본질에서 볼 때는 본래 없는 것을 잘 못 있다고 보고 공부를 할 때는 더욱 업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선 공부에서 상을 터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공리에 입각해서 닦아야 비로소 대도를 통할 수 있다"는 그런 조사스님의 말씀이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공을 통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통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공을 느껴야 할 것인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지금까지 배우고 느끼고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있다는 상대적인 경계에서 배웠기 때문에 그걸 전부 다 부정한다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때문에 좀처럼은 우리가 공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이른바 참선에서 화두를 든다든지 또 염불 화두를 든다든지 주문을 외운다든지 할 때도 오랫동안 실상을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고 참다운 진여불성이 실지로 존재한다. 이것이 이른바 실상을 생각하는 실상관(實相觀)이 되는 셈인데 우리가 실상을 생각하면 본래가 실상이기 때문에 자기 암시로 차근차근 실상에 접근되어 가는 것입니다.

헌데 실상을 생각하고 오랫동안 공부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몸도 차근차근 가벼워오고 마음도 가벼워옵니다. 그러다가 이제 무아무중(無我無衆)이라, 삼매(三昧)에 딱 들면 그때는 자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철저하게 공화(空華)가 되어서 공이 되면 그때는 이른바 신여의통(身如意通)이라, 자기 몸도 마음대로 공중에 날릴 수 있고, 큰 것을 작게도 할 수 있고, 그렇게 신통묘지(神通妙智)를 부린다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서 공을 체험 하여야 비로소 온전히 원래는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마다 할 수가 없고 삼매에 들어서, 즉 다른 망상이 없이 오로지 한 생각, 진리만 생각하는 것이 삼매인데 좀처럼 일반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가 않지만 그래도 평상적으로 이론적인 것만은 상식적인 분야에서 머물지 않고서 제법이 공이라는 도리를 이해하여야 할 것이고, 또 거기에도 머물지 않고서 중도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서 참말로 있는 것은 중도실상(中道實相) 뿐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시고서 그때그때 평소 지내시다가 다행히 기회가 3일이나 일주일이나 한 달이나 있어서 오로지 정진하시면 그때는 앞서 말씀드린바 삼매에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참선 공부와 일반 공부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일반 공부는 이렇게 방편으로부터 올라가는 공부가 보통입니다. 그러나 선은 바로 실상 그 자리를 잡고 나간단 말입니다. 이른바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이 마음 오염된 이대로 바로 부처다. 오염이 되었다는 것은 내 생각인 것이지 본래 마음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오염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이대로 부처고 당체즉시라 모든 존재가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모든 경계를 그대로 긍정하고 들어가야 이른바 참선이 됩니다. 선과 다른 공부와의 차이는 다시 바꿔서 말씀드리면 현상적인 상을 떠나서 본체를 바로 들어야 참선이 됩니다.

이른바 방편공부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서 올라가는 공부입니다. 그래서 동남아 불교에는 선이 없습니다.

그네들은 비바사나(毘婆舍那)로 해서 이렇게 올라가는 점수법만 있습니다. 대승권인 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선 그러면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것저것 닦아서 올라가는 것은 배제하고 성자의 견해를 내 견해로 해서 닦는단 말입니다.

성자가 보는 것만이 비로소 바로 보는 것으로 결국 나와 남이 없고 또 잘남과 못남, 일체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우주가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한 오직 하나의 진여불성 뿐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참선 이것은 일체 고하 시비를 떠나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그 본질 본체(本體)를 순간도 여의지 않고 참구해가야 비로소 참선이라고 합니다.


-. 부사의(不思議) 해탈법문 [4]

≪삼종사선 ≫

그런데 참선 공부에도 삼종사선(三種邪禪) 해서 세 가지 삿된 선이 있습니다.

 첫째는 암증선(暗證禪)이라,

어두울 암(暗)자, 증할 증(證)자, 선의 방법도 모르고 한계도 몰라가지고 덮어놓고서 그냥 공부해 간단 말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고 이 마음 또한 본래 부처라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직 범부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불까지 가려면 무수한 경계(境界)를 거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그런 경계를 훤히 모르면 가사 저급한 낮은 경계에 도달 하고서도 좀 기분이 좋으면 내 공부가 다 됐다 해버립니다.

즉 말하자면 성불의 길목을 모르고서 이른바 암중모색(暗中摸索)을 한단 말입니다. 이것을 암증선 그럽니다.

또 한 가지는 문자선(文字禪)이라, 이것은 알기는 제법 아는데 책을 보아서 순서도 아는데 실지로 닦지 않고서 문자로만 따지고 있단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야호선(野狐禪)이라, 들 야(野)자, 여우 호(狐)자, 여우란 놈이 꾀가 있어서 거짓을 부리고 남을 속이고 그런 짓을 하듯이 우리 공부하는 수행자도 참말로 증하지 못하고 증명했다고 하고 도인이 못돼 가지고 됐다고 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세 가지 삿된 선입니다.

우리가 꼭 이것을 피해서 가야 한다는 것인데 사실은 이것을 피하기가 쉽지를 않습니다. 쉽지 않으므로 그런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다분히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번쇄한 것은 몰라도 어느 정도 범부가 성불되어 올라가는 간단한 체계만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만 간단히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유식오위(唯識五位)

유식오위라, 오직 유(唯)자, 알 식(識)자, 유식론(唯識論)이란 책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이것은 대승법입니다. 유식론에서 우리 범부가 성불하는 계단을 오단계로 봅니다.

다른 경에서는 여러 단계로 구분하여 너무나 복잡하므로 각자가 참고로 하시고 이 다섯 단계만은 꼭 외워 두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간단하고 누구나 다 성불하기 위해서는 거쳐 가야 되는 것이니까.

맨 처음에는 자량위(資糧位)라,

재물 자(資)자, 먹이 량(糧)자 자량위는 성불이라는 먼 길을 갈 때 준비를 하는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양식도 준비를 하고 노자도 준비하는 식으로 그런 준비 단계가 말하자면 자량위입니다. 자량위에서는 염불도 하고 주문도 하고 자기 적성 따라서 그때그때 경도 보고 자기를 상당히 훈련을 시킨단 말입니다.

내가 먼 길을 가는데 하루나 이틀이나 앉아서 공부를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시험도 해봅니다. 또 평소에 경도 많이 읽고 염불도 많이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잠재의식(潛在意識)에다 선근(善根)의 종자를 심게 되겠지요.

그와 같이 최선을 다해서 성불의 길로 성자의 길로 적응시킬 때까지 훈련을 시킨단 말입니다.

어느 정도 단련이 돼서 이만큼 되었으면 이제는 내 신명(身命)을 걸고 공부해도 내가 충분히 감당하겠구나. 이럴 때는 사흘이나 일주일이나 한 달이나 시간을 정해서 이른바 별시수행(別時修行)이라, 시간을 정해서 정진(精進)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보고 가행위(加行位)라 합니다.

더할 가(加)자, 행할 행(行)자, 불교의 다른 말로 하면 가행정진(加行精進)이라, 보통 수준이 아니라 마음먹고 자기가 힘을 내서 정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행정진 할 때는 온전히 자기 직업이나 가업은 좀 쉬어야 되겠지요.

따라서 가행정진을 하는 때는 참으로 수행자(修行者)같은 모습이 됩니다.

자량위는 재가불자나 출가불자 누구나 다 할 수가 있지만 가행정진은 재가불자는 하시기가 곤란스럽겠지요. 그러나 여름이나 겨울 3개월 동안 선방에서 결제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의 가행정진의 수행법입니다.

그래서 가행정진에서 사선근(四善根)이라, 선근이 차근차근 증장(增長)되어 간단 말입니다. 그리고 업장(業障)이 녹아져서 삼매에 딱 들면 통달위(通達位)라. 그때는 견도(見道), 도를 깨닫는 것입니다. 견성(見性), 견도(見道)는 같은 뜻입니다.

견성(見性)은 우리 본래 성품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스스로 체험할 때가 된 것이고, 견도(見道)도 내내야 도(道)라는 우주의 진리 본성, 바로 불성을 체험하는 것이므로 통달위는 견성, 견도를 하는 위(位)입니다.

그런데 통달위에서 견성을 하면 그걸로 해서 끝나 버릴 것인가? 거기에서 끝나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그것을 가지고 굉장히 논쟁이 있지 않습니까마는 불교의 그런 정통적인 해석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인 동시에 우주의 본성인 진여불성을 체험을 한다 하더라도 온전한 100%의 체험은 못된단 말입니다.

체험은 했으나 결국 이른바 습관성(習慣性)이 남아있단 말입니다. 이른바 우리가 다생겁래 동안 지은 업의 타성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견도를 했다 하더라도 겨우 가까스로 자기 과거나 좀 알지 다른 신통은 못 나옵니다.

습기가 가려서 버릇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견도(見道)한 그 자리에서 그것을 기조로 오랫동안 삼매를 닦습니다. 그걸 가리켜서 수습위(修習位)라, 닦을 수(修)자, 익힐 습(習)자, 이른바 불교말로 보임수행(保任修行)이라 합니다. 견도(見道)한 뒤에 그 견도에 입각해 가지고 닦아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보살승십지(菩薩乘十地) 

그렇게 되어야 이른바 차근차근 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가장 잘 정리된 것이 화엄경에 있는 보살승 십지입니다.

성자(聖者)의 지위가 보살 10위인데 보살 초지 환희지(歡喜地)에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통달위(通達位)라, 견성을 하는 것입니다.

견도가 되어서 차근차근 삼매가 깊어지면 초, 2, 3지로 올라간단 말입니다. 이 수습위(修習位)는 보살 초지부터 10지까지입니다. 보살초지에서 환희지라, 불성(佛性)과 하나가 되었으면 괴로움은 조금도 없고 항시 불성광명을 띠고 있으므로 그때는 환희 충만하고 몸도 가볍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더욱 정진을 하면 2지에 올라가 이구지(離垢地)라.

보살 환희지까지 갔다 하더라도 정진을 덜하면 더 못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수습위에 올라가서도 사람 기질의 차이가 있습니다.

자비심(慈悲心)이 많은 사람은 중생들이 너무 불쌍하므로 중생들 제도 때문에, 삼매에 들려면 중생들을 뿌리치고 고요히 앉아야 할 것인데,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자비가 많은 사람들은 초지만 증하고 더 못 올라가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智慧)가 수승한 사람은 본래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닌데 중생들의 고통도 역시 중생을 성숙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그래서 삼매에 다시 들어가서 차츰 올라간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비심이 많은 보살을 가리켜서 비증보살(悲增菩薩)이라 합니다.

그리고 지혜가 더한 보살을 지혜보살(智慧菩薩)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수습위가 초지부터 10지까지 있습니다.

그 다음 구경위(究竟位)라,이른바 성불을 구경 성불을 하는 것입니다. 정각(正覺)을 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수행을 준비하는 자량위(資糧位),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는 가행위(加行位), 불성을 통달 견도하는 통달위(通達位), 그리고 성불의 구경위(究竟位), 이러한 유식오위(唯識五位)정도의 수도의 위차는 외워둘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성자는 파계무참(破戒無璃)한 짓을 할 수 없습니다. 헌데 근세에 그런 경향이 두드러져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우리가 견도위가 되면 그때는 성자이기 때문에 파계를 할래야 파계를 못하는 것입니다.

나쁜 짓을 할래야 그때는 할 수가 없습니다. 자타가 없는 것이고, 이 몸뚱이도 내 것이라는 생각도 없는 것인데 그런 분상에서 무슨 욕심이 나오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견도위만 되어도 마음대로 행하여도 법도에서 어긋남이 없단 말입니다.

완전한 것은 못 된다 하더라도 견도위 이상을 올라간 사람들은 파계 무참한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남하고 쓸데없이 희락질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근세에 있어서 무애행(無碍行) 그래서 견도한 도인이라 한 분들이 이상한 짓을 한 사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앞서 말씀드린바 암증선이라, 그런 한계를 모르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도를 한번 한 뒤에는 그야말로 무거운 번뇌는 이미 다 녹여서 끝나버렸기 때문에 범행일입(梵行一立)이라. 그때는 청정한 계율을 저절로 지켜야 한단 말입니다.


-. 부사의(不思議) 해탈법문 [5]


사선근

그래서 이 유식오위를 기억을 해두시고, 두 번째 가행위(加行位)에서 세분된 법상(法相)이 있습니다. 즉 사선근(四善根) 그래서 난법(煖法), 정법(頂法), 인법(忍法),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합니다. 우리가 가행정진 할 때 나오는 경계들입니다.

난법(煖法)

맨 처음에 난법상 그럽니다. 따스울 난(煖)자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경계인가 하면 우리가 맨 처음에 공부하고 앉아 있으면 처음에는 그 어두운 구름만 왔다 갔다 하고 갑갑하고 말입니다. 답답하고 막힐 때가 즉 말하자면 보통 처음 들어갈 때고, 그렇게 되다가 오랫동안 정진을 계속하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게 확 앞이 이렇게 개오 해 온단 말입니다. 시원하게 말입니다.

그런 경계가 그 개인 따라서 굉장히 차이가 있습니다. 더러 업장이 무거운 분들은 몇 개월 동안 지나가도 그런 경계를 얻지 못합니다.

그런 경계가 나온다고 생각할 때는 이른바 꾸벅꾸벅 혼침 때문에 괴롭지는 않습니다. 혼침이 있는 것은 아직 그 난법상이 못나오기 때문입니다.

난법상은 마치 전류(電流)에 감전된 모양으로 몸이 찌르르 해지면서 몸이 아주 가뿐하고 시원해 옵니다. 가슴도 시원하고 눈도 시원하고 머리도 시원합니다. 이 난법상은 사선근 가운데 맨 처음 허두에 옵니다.

정법(頂法)

난법상에서 오히려 가행정진(加行精進)이라, 우리가 정진을 용맹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이마 정(頂)자 정법이라, 정법상은 그 시원한 것이 더 증가가 되어 가지고 그때는 어렴풋이 광명(光明)이 나온단 말입니다. 어렴풋한 광명이 말입니다. 마치 아주 그 얕은 구름 속에 달이 있는 것 모양으로 아주 밝은 그야말로 달 같은 광명이 나온단 말입니다.

그러다 공부를 그만 두어버리면 그때는 사라져 버리지요. 이렇게 되므로 출가 스님 네들도 산중에만 있을 것이 아니라 더러 나와서 무엇을 하라고 하지만 공부를 한번 시작한 사람들은 그렇게 안 됩니다. 하나의 그 과정이 있으니까요.

인법(忍法)

거기서 안 쉬고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제 정법상이 되고 또 더 나아가면 인법상이라. 참을 인(忍)자 인법상은 그야말로 보다 뚜렷하니 광명이 나온단 말입니다. 맑은 광명이 그리고 더 시원하고 말입니다.

그럴 때는 그냥 인법상만 되어도 자기 몸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자기 몸이 어디가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세제일법(世第一法)

그러다 거기서도 더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이 범부세상에서는 제일 높은 법이란 말입니다.

그때는 달 같은 광명이 아주 빛나는 금색광명(金色光明)의 해 같은 광명으로

변색이 된단 말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우리가 견성을 하기 전에 통달하기 전의 네 가지 선근입니다.

그것을 비약적으로 한 번에 해버린 분도 있고 차근차근 올라간 분도 있고 그것은 근기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튼 그것은 더디 가고 빨리 가고 비약적으로 그야말로 띄엄띄엄 넘든지 차츰차츰 가든지 간에 그것을 경과는 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런 경계가 너무나 상쾌하므로 사선근 위에서 공부가 다 되었다고 하는 분들이 있단 말입니다. 한계를 모르면 결국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때는 암증선이 되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꼭 이 수도의 위차 유식오위정도는 즉, 우리가 먼 길을 갈 때 노자를 장만하듯이 준비를 하는, 자기 몸도 함부로 안하고, 음식도 삼가고, 될 수록 근기도 기르고 그래서 하여튼 가행정진을 할 수 있는, 오로지 내가 정진을 해도 배길 수 있다는 자기 훈련을 시키는 이것이 자량위이고, 가행위는 그야말로 자기 온 힘을 다해서 용맹정진을 하는 사선근을 거치는 위이고,

그 다음 통달위에서는 사선근을 뛰어 넘어 견성오도를 하는 위이고, 다음 수습위는 같은 도인도 역시 습기가 적고 많고 차이가 있기 때문에 습기를 떼기 위해서 습관성을 녹이기 위해서 이렇게 초, 2, 3, 4지부터 10지까지 닦아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불지(佛地)에서 구경위(究竟位)이라 아주 완벽한 정각을 성취해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불교도 그런 개념적인 정리가 잘못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므로 자기 공부에 대한 점검을 제대로 잘못한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란스럽습니다. 자기 공부가 지금 가행위밖에는 안 된다. 그렇게 알게 되면 통달을 하기 위해서 애를 쓸 것인데 재미를 좀 본 사람들은 거기가 통달위라고 생각을 해서 그냥 공부를 안 하여 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이십 몇 세에 조실 되고 삼십에 조실 되고 한 분들은 제가 생각할 때는 좀 실례되는 말씀이나 통달위까지 가지 않고서 사선근 위의 적당한 곳에서 재미지고 알음알이가 생기니까 공부가 되었다고 그래가지고 평생 동안 그 자리에서 있는 것 같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문제는 저는 미국에 가서도 봤습니다만 한국불교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일본불교도 다분히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티베트불교, 일본불교, 스리랑카불교, 저는 지금 다 가봤습니다. 그런데 역시 그런 식으로 해서는 도인이 나올 수가 없다고 생각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현재 모두 정체해 있는 상태이고, 그로 인해서 이런 사람들한테 환멸을 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의 정통선 맥만이 세계 일가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역시 우리 한국에서 원효대사(元曉大師), 의상대사(義湘大師), 대각국사(大覺國師), 보조국사(普照國師), 서산대사(西山大師) 그렇게 흘러 내려오는 그 선맥(禪脈)이 역시 세계불교를 틀림없이 앞으로 제패(制覇)를 한다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그분들은 정확히 깨달은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의 정통 선 맥만이 세계일가(世界一家)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꼭 앞서 말씀드린 사선근, 난법은 우리 범부의 어둠컴컴한 마음이 가시면 마음이 활짝 열리는 단계입니다.

이른바 우리 마음이 열려 오면서 머리도 가슴도 시원하단 말입니다. 그러한 것은 우리 생리적인 건강하고는 관계가 지대합니다. 그런 경계를 맛본 사람들은 어디가 피로해도 그냥 풀려버린단 말입니다. 그리고 웬만한 병균 같은 것이나 유행병 같은 것도 침범을 못합니다. 혈액 순환이 왕성하고 맑으므로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난법상은 전신이 전류에 감전된 모양으로 시원스럽게 될 때고 정법상은 어렴풋이 이제 시원스러운 가운데 그야말로 맑은 그런 광명이 바로 나올 때고, 인법상은 그 광명이 보다 더 영롱하고, 그리고 세제일법상은 그런 광명이 그야말로 자마금색(紫磨金色)으로 변화해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우리 생리도 바꿔지는 것입니다. 그런 경계를 참고로 하셔서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 부사의(不思議) 해탈법문 [6]


≪공사상과 중도사상≫

질 문 : 큰스님의 "마음의 고향" 법어집에서 정법의 향기를 항상 느낍니다만

재가불자들이 세속에서도 닦을 수 있는 몇 가지 방편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 제 경험으로 비추어 보나 일반적인 많은 수행자들을 제접하면서 느낀 바도 있고 다 그럽니다만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먼저 공사상(空思想)에 대해서 보다 철저해야 되겠어요. 그와 동시에 중도사상(中道思想)을 우리 공부하는 수련과정에서 참구를 하셔야 되겠지요.

그래서 반야심경을 제가 먼저 많이 읽힙니다. 반야심경은 금강경에 들어있는 반야 공사상의 이른바 압축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짤막해도 저에서나 어디서나 반야심경을 독송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헌데 일반 분들은 반야심경을 읽기만 하지 사실은 별로 깊은 뜻을 음미를 별로 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반야심경을 바르게 해석하시면서 누구든지 읽어야 한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분들은 물리학도 공부도 많이 하시고 석학들이 계십니다만 사실 현대 물리학도 공 도리는 다 증명을 하고 있으므로 그런 면으로 본다고 할지라도 공사상은 현대 젊은이들이 우리가 설명만 좀 잘하면 충분히 납득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 에너지라는 것이 하나의 공간성이나 시간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공간성이나 시간성이 없는 파동이 적당히 모양을 나투고 결합해서 여러 가지 원소가 생기고 인간세포가 생기고 물질이 형성된다고 생각할 때에 원래 시공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이 결합되고 어떻게 모양을 나투어도 내내야 똑 같은 공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공으로만 일단 철저하면 모두는 슬슬 풀려 갑니다. 그러나 공이라는 것은 다만 공이 아니지 않습니까.

진여불성으로 우주는 충만해 있다. 우리가 보는 현상적인 허상보고 없다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 허무는 아닙니다.

알맹이는 결국 이른바 순수에너지는 존재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여불성입니다. 하기 때문에 진여불성 자리를 제대로 말한 것이 이른바 중도법문인데 불교에서는 가장 고도한 법문입니다.

화엄경, 법화경, 또는 용수보살의 중관론(中觀論)의 법문이 중도법문 아닙니까. 대승불교는 용수보살 때 비로소 빛이 났습니다.

그 이전에 부처님께서도 다 포함해서 말씀을 하였겠지만 정식으로 대승적인 것을 똑 떨어지게 구분해서 말씀하신 것은 용수보살 때 비로소 했습니다.

하기 때문에 부처님 때의 사상도 중도사상이 다 포함은 되어 있었지만 이렇게 별입해서 세우지는 안했는데 용수보살 때 비로소 따로 때어서 중도 대승을 말씀을 한 셈입니다.


일심삼관(一心三觀)과 보리방편문

용수보살이 내 놓은 책 가운데 보리심론(菩提心論)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용수보살이 출현하신 지는 부처님 가신지 약 250년 뒤입니다. 그러니까 서기보다는 약 300년 전의 분이지요. 헌데 그 분이 그 당시에 최고 지성들한테 설한 가장 고도의 수행 법문이 보리심론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도한 대승의 수행 법문이 있는 용수보살의 보리심론의 수행문을 보다 압축시켜서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께서는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을 찬술하셨습니다. 그것은 중도사상을 아주 간명하게 표현했습니다.

지금까지 나와 있는 모든 불교 서적을 보아도 중도사상을 이처럼 간명히 압축한 것은 저는 아직 못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도사상을 하나의 체계로 세우신 분은 중국이 천태(天台)스님입니다. 천태스님의 중도사상의 불교체계가 가장 세밀합니다.

때문에 불교를 학문적으로 공부할 때는 꼭 천태학을 먼저 하라는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천태학의 결론 같은 것이 일심삼관(一心三觀)입니다. 내 한 마음에서 세 가지의 경계를 본단 말입니다. 세 가지 경계는 공, 가, 중(空, 假, 中)이라, 빌 공(空)자, 거짓 가(假)자, 가운데 중(中)자입니다. 불교 철학에서 가장 고도한 수행법은 일심삼관입니다.

이 마음에서 느끼는 모두가 본래로 비었다. 그것이 공인 것이고, 그러나 또 인연이 있으면 다시 모양이 나오나 그것은 참말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잠시간 모양을 나투기 때문에 그때는 거짓 가(假)자 가를 써서 가라고 그러지요. 그러나 실상은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며 공과 가를 다 포함하므로 그때는 중(中)이란 말씀입니다.

그와 같이 어느 것에나 다 내 마음에도 역시 공과 가와 중이 다 들어 있고, 어떠한 존재나 우리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제 공과 가와 중이란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두를 다 일체 존재를 공, 가, 중으로 우리가 관찰하는 것이 이른바 실상관(實相觀)입니다.

그런데 그 보리방편문의 법, 보, 화 삼신불(三身佛)은 공, 가, 중하고도 유사합니다. 공, 가, 중은 하나의 원리로만, 지적으로만 추구한 것인데 보리방편문은 원리인 동시에 하나의 생명으로 추구했던 것입니다.

부처님이라는 것은 하나의 생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고

따라서 우리 마음의 본체인 동시에 우주 모두의 근본 궁극적인 것은 아미타불(阿彌陀佛)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일시삼관의 공이 바로 법신이고, 그러나 다만 빈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는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일체 만 공덕이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보신이고, 또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현상계

이것은 그때는 화신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법신, 보신, 화신해서 그때는 우주를 다 하나의 체계로 포괄해 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나 셋이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에 이른바 삼신일불(三身一佛) 그래서 아미타불(阿彌陀佛)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출처 : 무인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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