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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여 머물 것인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숲으로 가서, 혹은 나무 밑으로 가서, 혹은 공터로 가서 결가부좌하고 몸을 곧게 하여 생각을 가다듬고 앉는다.
마음을 바르게 하여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숨을 내쉬고, 혹은 길게 들이마시면서 '나는 숨을 길게 들이마신다.'라고 생각하고, 또한 숨을 길게 내쉬면서 '나는 숨을 길게 내쉰다.'라고 감지한다. 또한 숨을 짧게 들어오게 하면서 '나는 숨을 짧게 들이마신다.'라고 알아차리고, 또한 숨을 짧게 내쉬면서 '나는 숨을 짧게 내쉰다.'라고 감지한다.
'나는 온몸을 인지하고 숨을 들이마신다.'고 익히고, '나는 온몸을 인지하고 숨을 내쉰다.'고 익혀 닦는다. '나는 몸의 움직임을 그치고 숨을 들이마신다.'고 닦고 '나는 몸의 움직임을 그치고 숨을 내쉰다.'고 닦는다.
비구들이여, 마치 숙련공 고패 장인(오지 그릇을 만들 때 발로 물레를 돌려 모양과 균열을 잡는 사람)이나 그의 제자가 천천히 깊게 고패를 돌리면서 '나는 길게 돌린다.'고 알아차리고, 혹은 빠르고 짧게 돌리면서 '나는 빠르고 짧게 돌린다.'고 알아차리듯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와 같이 숨을 들이마시면서 '나는 숨을 길게 들이마신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숨을 길게 내쉬면서 '나는 숨을 길게 내쉰다.'고 알아차리고, 혹은 숨을 짧게 들이마시면서 '나는 숨을 짧게 들이마신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숨을 �게 내쉬면서 '나는 숨을 짧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나는 온몸을 인지하고 숨을 들이마신다고.' 익혀서 닦고 '나는 온몸을 인지하고 숨을 내쉬다.'고 닦는다. '나는 몸의 움직임을 그치고 숨을 들이마신다.'고 닦고 '나는 몸의 움직임을 그치고 숨을 내보낸다.'고 닦는다.
이와 같이 혹은 안으로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여 머물고, 혹은 밖으로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여 머물며, 또한 몸에서 없어지는 것을 관찰하여 머물며, 또한 몸에서 생하고 멸하는 것을 관찰하여 머문다.
또한 지식으로 안 것과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내 몸에 있다.'고 생각하여 머물면 의지함이 없이 머물고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여 머문다.
해설 나는 작은 우주이다. 그러므로 나를 떠나서 달리 찾을 것이 없다. 또한 나는 나 외의 일체와 다르지 않다. 나와 만물은 다르면서도 같으므로 내 속에서 나를 보면 우주의 비밀도 모두 알게 된다. 내 몸과 내 마음, 내 모든 움직임이 나인 동시에 진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나의 호흡은 우주의 숨이다. 내 몸을 고요히 안정시키고 마음을 가다듬어 조용한 곳에 결가부좌하고 앉으면 몸과 마음이 가라앉는다. 마음은 몸에 따르고 몸은 마음에 따른다. 몸을 곧게 하여 중심을 아랫배에 두고 척추를 펴고 앉으면 마음과 몸이 바르게 된다. 특히 결가부좌가 가장 안정된 자세이다.
호흡을 떠나서는 내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숨의 들어오고 나감과 마음이 서로 떠나지 않으면 나 자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나를 관찰하여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나 자신으로 돌아와야 한다. 길게 나가는 숨, 짧게 나가는 숨, 길게 들어오는 숨, 짧게 들어오는 숨에 마음을 일치시키면 인지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나의 숨을 보고 나의 몸을 알고 내정신의 움직임을 안다. 숨의 움직임은 몸의 작용이다. 몸의 작용은 마음과 관련이 있다. 항상 마음과 숨이 함께하여 숨의 출입을 감지하는 것은 나를 관9觀)하는 수행이다.
붓다는 숨만이 아니라 어떤 것을 보면 '내가 지금 본다.'고 인지하고, 어떤 소리를 들으면 '내가 지금 소리를 듣는다.'고 인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몸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마음을 거기에서 떠나지 않게 하되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마음을 매어 두면서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관이다. 범어로 위파샤나vipasyana인 관은 사물을 분별하여 달리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의지함이 없이 머물고 또한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 대하여 몸을 관하여 머문다.'고 한 것이다.
몸에서 일어나는 일, 몸에서 사라지는 일 등 생멸법(生滅法)을 그대로 알면 이 세상 모든 것의 생멸법을 알게 된다. 숨이 들어오는 것은 생의 법이요, 나가는 것은 멸의 법이다. 생멸은 되풀이된다. 생의 집착하지 않으므로 숨이 나가고, 멸에 끌리지 않으므로 다시 들어온다.
생멸의 법 속에 있으면서도 그에 집착하지 않고 머물기 때문에 자재의 상태에서 자연 그대로의 리듬을 타며 호흡한다. 호흡은 무의식중에 행하지만 의식을 집중해서 호흡이 잘 조절되면 무의식 속에서도 자연의 법대로 올바른 호흡이 이어진다. 이것이 몸의 법을 보고, 몸의 법 그대로 살며, 나를 보는 동시에 나를 살리는 것이다. 붓다는 가장 친근한 나의 몸과 마음을 관하는 명상으로부터 우주의 이치를 보는 명상법으로 나아갈 것을 가르치고 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곧게 앉아서 호흡을 하면 아랫배가 꺼지면서 숨이 나가고, 배가 불러오면서 숨이 들어온다. 이때 마음은 코끝에 머물러 있으므로 숨이 나가는 과정과 들어오는 과정만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익숙해지면 숨이 끝나고 시작되는 것까지 인식되므로, '나는 숨을 길게 들이마신다.' '나는 숨을 짧게 들이마신다.' '나는 숨을 길게 내보낸다.' '나는 숨을 짧게 내보낸다.' 고 인식하면서 역으로 마음에 따라 숨이 길게도 되고 짧게도 되어 숨과 마음이 하나가 된다.
이처럼 신체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여 그것을 통해 연기와 공의 도리를 깨닫는다. 이를 '몸에 대한 관찰kaya nupassa'이라고 한다. 숨이 생멸하는 것을 보는 지혜를 얻는다고 하여 '우다야와야팟사나냐나udayavayapassananana라고 한다.'우다야'는 생이요, '와야'는 멸이며 '팟사나'는 보는 것이고 '냐나'는 지혜이다.
의지함이 없이 머물러 집착이 없으므로 중생이 청정해지고, 생과 멸의 도리를 알게 되므로 근심과 슬픔이 없어지고, 멸의 도리를 통해서 공의 인연을 알면 고뇌가 없어져서 인연에 따라서 인연을 살리는 삶을 살게 된다. 그리하여 올바른 도리를 얻고 드디어는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안온한 세계에서 즐기게 되므로 열반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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