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불교

[스크랩] 운명과 숙명

수선님 2018. 11. 11. 12:04

-운명과 숙명-

 

운명(運命)

1.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

2. 앞으로의 생사나 존망에 관한 처지.

 

숙명(宿命)
날 때부터 타고난 정해진 운명. 또는 피할 수 없는 운명

 

이렇게 해석되어 있는데

언뜻 그 내용을 보면 그 뜻이 비슷비슷해서 어떻게 해석을 해야 좋을지 난감하지만,

운명과 숙명의 한자를 생각해보자.

 

운명에서 運자는 옮기다. 움직이다 라는 뜻으로 쓰이고

숙명에서 宿자는 묵다, 머무르다 라는 뜻으로 쓰이고

 

이런 것을 보았을 때, 운명은 옮길 수 있는 목숨이고, 숙명은 옮길 수 없는 목숨이라는 것이다.

, 개척할 수 있는 것이 운명, 개척할 수 없는 것이 숙명이다.

 

 

운명과 숙명그리고 사주팔자

 

중국전학시대 경학가 유향((BC77BC6)은 운명을 아는 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자기를 아는 자는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본인의 운명(運命)에 대해 궁금해 하는데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야 하며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알아보기 위해 점()을 치고

부귀빈천(富貴貧賤)과 길흉을 가늠하기 위해 사주를 보아 왔다.

 

()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길흉을 알아보기 위한 방법으로 한시적이고 즉발적인 사항을 판단하는 것이고,

사주는 각자개개인의 타고난 숙명(宿命)또는 운명(運命)부귀빈천길흉화복의 장기적인 사항을 알기 위한 방법이다.

숙명은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어서 바뀌지 않는 것으로

부모 자식관계에서 내가 부모가 싫다고 바꿀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싫어서 보지 않을 망정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며, 남자나 여자의 성별구분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라는 정의는 숙명적인 이야기가 되고

운명은 후천적인 성향이 가미되어 본인의 선택과 노력으로 변화가 가능한 것이다.

더 쉬운 예를 든다면 숙명은 내 뒤에서 날아오는 돌맹이가 되어 피할 수가 없는 것이며,

운명은 내 앞에서 날아오는 돌멩이라 날라오는 것을 막거나 피할 수는 있는 것이다.

사주팔자를 갖고 상담을 해주는 역학원은 숙명과 운명론 사이에서 길흉화복과 부귀빈천을 간명하여 주는 것이다.

 

고급 자가용 자동차를 한 대 뽑았다면 그것으로 내 차가 되는 것으로 숙명이 되는 것이고,

그 차를 잘 간수하고 운전을 조심하게 하여 사고 없이 오래 잘 타고 다니게 되는 것이 운명이다.

 

사람들은 팔자소관(八字素官)이란 말을 많이 한다.

그 사람이 타고난 팔자(八字)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소질을 이야기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원하지 않는 직업을 갖게 된다든지

특별히 당하는 불행 등 좋지 않은 숙명(宿命)을 타고난 사람을 두고 하는 예가 많다.

다시 말해서 팔자(八字)란 사주(四柱)와 같은 뜻이다.

태어난 년 월 일 시를 각각 간()과 지()로 따져 합하면 모두 여덟 자가 된다.

 

그러므로 소위 팔자소관(八字素官)이란 생 년 월 일시 때문이란 뜻이 된다.

태어난 그때를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숙명(宿命)이라고 한다면 그 숙명(宿命)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타고났더라도 팔자(八字)에 얽매이어 살지 않고 그것을 본인의 노력과 의지로 성실히 살아간다면,

숙명(宿命)은 하늘이 내린 것이니 우리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지만

운명(運命)은 우리 각자가 개척하고 노력한다면 분명히 바뀔 수 있다.

 

사주팔자 즉 운명(運命)을 논하는 데는 수천 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여러 가지 학설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명리학(命理學)또는 추명학 당사주(唐四柱) 자미두수 신살론(神殺論) 육임() 육효()

기문둔갑(奇門遁甲) 토정비결(土亭秘訣) (占 무속인)등의 학설들이 있으며 각각마다 특징이 있는 것으로

어느 한 가지를 가지고 만능으로 사용할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수천 년부터 이어 내려온 학문이므로 옛날에는 제왕학이라고 하여 위정자들이 그들만 알고

생활이나 전쟁 시에 사용해 왔으며 대중화를 꺼리던 것이다.

 

인생의 행로를 강물의 흐름으로 비유한다면 대운은 강물이 흘러가는 방향이다.

세운은 강물이 흐르면서 만나는 지류다.

한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데 이 물줄기를 돌려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게 하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결코 뜻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같은 물줄기라도 홍수가 잘나는 지역은 제방을 쌓고 미리 대비를 함으로써

물을 다스리는 치수(治水)를 할 수 있으니 이와 같이 운의 흐름을 미리보고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므로

사주팔자로 이러한 지혜로움을 찾아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다.

 

 

 

선택에 따라 운명과 숙명도 바뀐다.   -칠통 조 규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부딪침은 상처다.

부딪쳐 상처 입었을 때 어느 쪽을 보고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운명과 숙명도 바뀐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살아오면서 업에 의하여 굴러왔고 굴러가고 있고 지금도 구르고 있다.

업에 의하여 굴러오고 굴러가고 구르고 있는 것을 두고,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고 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어떤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틀 속에서 흘러오고 흘러가고

흘러가는 것 같다는 생각 속에서 저마다 이것을 운명이니 숙명이니 말을 한다.

 

운명이니 숙명이니 말하는 업에 맞게 구르며 흘러오고 흘러가고 흐르고 있는 업의 굴레를 이야기한다.

업으로 뭉쳐져 있는 업 덩어리가 굴러오고 굴러가고 구르면서 부딪치지 않을 수 없고,

구르다 보니 부딪칠 수밖에 없고 부딪치는 것은 당연 하다.

부딪치면 부딪친 것으로 인하여 상처 입게 되어 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상처를 입힌다.

구르던 업 덩어리가 부딪쳐 입는 상처는 선업이 떨어질 수도 있고 악업이 떨어질 수도 있다.

 

선업이 떨어질 경우 선업이 떨어짐으로 인하여 좋은 일들이 드러나고

악업이 떨어질 경우에는 악업이 드러나게 되니 나쁜 일이 드러나 있게 된다.

부딪침의 상처로 선업이 떨어져 선업이 드러나 있을 때는 선업이 드러나 있는 만큼

선업이 소멸되어 감은 잊은 채 선업이 드러난 사실에 대해서만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부딪침의 상처로 악업이 떨어져 악업이 드러나 있을 때는 악업이 드러나 있는 만큼

악업이 소멸되어 감은 잊은 채 악업이 드러난 사실에 대해서만 나빠하고 싫어한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선업이 드러나면 좋아하고 즐거워하고 악업이 드러나면 나빠하고 싫어하지만

업에서 보면 악업이 떨어져 나갔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할 일이며 선업이 떨어져 나가면 싫어하고 나빠할 일이지만,

물질을 가지고 물질에 의하여 물질로 살면서 업을 잊고 업을 짓고 다하는 현실에 드러나 있는

물질적 현상에 매여서 살다 보니 살아가는 현실에 드러나 있는 물질적 현상에 더 영향을 받아

선업이 떨어짐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악업이 떨어짐에 나빠하고 싫어하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서 싫어하고 기뻐할 뿐 기뻐할 일도 싫어할 일도 없다.

 

선업이 다하면 악업이 도래하고 악업이 다하면 선업이 도래하는

돌고 도는 수레바퀴 속에서 무엇을 기뻐하고 슬퍼할 일이겠는가?

업이 있고 없고 떠나서 업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 속에서 뛰어내려서는 구름처럼 바람처럼

구르며 부딪칠 것들에 자연스럽게 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흘러가면 더 없이 좋을 일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업 덩어리를 가지고 굴러갈 수밖에 없다.

업 덩어리로 구를 수밖에 없다.

 

업으로 구를 수밖에 없다면 구르면서 부딪치지 않을 수 없고 부딪칠 수밖에 없다.

구르면서 부딪친다면 부딪침으로 업 덩어리는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부딪침으로 떨어지는 생채기가 선업이든 악업이든 떨어질 수밖에 없고 떨어진 생채기의 상처로 인하여

업 덩어리가 있는 마음의 그릇 안에서는 떨어진 생채기로 인하여 마음 안에서 작용이 일어나서는

선업이 떨어지면서 기분 좋아하며 기뻐하거나 즐거워하고, 악업이 떨어지면 기분 나빠하거나 싫어하게 된다.

 

선업이 떨어져서는 기분 좋은 마음에 좋은 쪽으로 마음먹거나 좋은 생각을 갖고 좋은 쪽으로 뛸 수도 있고,

기분 좋은 마음에 좋지 않은 행위를 할 수도 있다.

악업이 떨어져서는 기분 나쁜 마음에 나쁜 쪽으로 마음먹거나 나쁜 생각을 갖고 나쁜 쪽으로 뛸 수도 있다.

이는 부딪침으로 업식 덩어리에서 떨어진 생채기로 인하여 마음의 작용을 일으켜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업식 덩어리의 부딪침은 만남과 만남 속에서,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말을 주고받는 속에서 말을 듣는 속에서, 자기 자신 스스로의 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자기 자신의 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생각의 행 의식의 행 마음의 행, 보는 행,...

자기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자기 자신 안의 모든 행과 밖의 모든 행으로부터 부딪침으로 인하여 마음 안에서 작용하여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이루어지는 속에서 좋은 것 기쁜 것은 모두 다 잊고 나쁜 것 상처 입은 것에만 신경을 쓰고,

좋은 것에는 상처란 말을 하지 않으며 복 받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쁜 것도 좋은 것도 모두 다 상처다.

부딪쳐 일어나는 모든 작용은 상처다

그것이 좋고 나쁘고 모두 다 상처다,

업 덩어리로 굴러오고 굴러가고 구르면서 부딪치는 모든 것은 상처다.

부딪쳐 일어나는 상처는 자기 자신 안에 상처 입을 대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처 입을 대상의 업이 없었다면 업 덩어리에 부딪치지 않았을 것이지만

부딪칠 대상의 없이 있었기에 부딪치고 부딪쳐서는 상처를 입은 것이다.

부딪쳐 상처를 입을 때마다 마음 안에서는 마음 작용이 일어난다.

부딪쳐 마음작용을 일어날 때마다 업 덩어리는 뛴다.

어디로든 뛴다.

 

뛴 것이 어디든 그곳은 자기 자신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마음먹은 대로 마음먹은 것을 통하여

마음이 뛰고 마음에 이끌려 업 덩어리가 내려앉으며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업 덩어리는 내려앉으며 내려앉은 자리에서 또 다시 업 덩어리는 굴러가기 시작된다.

그렇게 끝임 없이 부딪치며 뛰었다가 자리 잡고 뛰었다가 자리 잡으며

굴러가다가 멈추고 멈추었다가 굴러간다.

굴러오고 굴러가고 구르는 업 덩어리는 부딪칠 때마다 조금씩

또는 크게 마음작용에 따라 움직이며 굴러오고 굴러가고 구르고 있다.

 

구르고 있지 않을 때 없이 구르는 것 같지만 부딪칠 때마다 부딪쳐 상처를 입을 때마다

허공에 떠서 자리 잡을 곳을 찾고 자리 잡을 곳을 찾아서는 자리를 잡고 또 굴러간다.

이와 같이 업 덩어리는 구르는 것을 멈추지 않고 굴러가는 것 같지만

맨 순간순간 부딪치면 구르던 것을 잠시 잠깐씩 멈추며 허공에 떠 있다가

마음먹음에 따라 내려앉고 마음을 일으키는 쪽으로 내려앉으며 굴러간다.

그렇게 업식 덩어리는 굴러왔고 굴러가고 있고 구르고 있다.

 

이와 같이 굴러오고 굴러가고 구르고 있는 업 덩어리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 따라

마음작용에 따라 마음먹는 방향을 바꿔가고 굴러가고 있고 구르고 있다.

지금 그대가 처하여 있는 상황의 상태는 그렇게 그대가 만든 것이다.

그대가 그대를 이끌어 온 것이다.

그대의 마음으로 그대의 마음작용으로 업식 덩어리를 지금 있는 곳에서 굴러가도록 한 것이다.

이것을 어찌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겠는가?

 

운명이라고 하고 숙명이라고 하는 것 역시도 업식에 따라 굴러왔고

굴러가고 있고 구르고 있지만 자기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그 누구도 그대를 그곳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대의 마음이 그곳으로 인도한 것이다.

 

그냥 단순하게 일순간에 선택하고 인도한 것 같지만 단순하게 일순간에 자기 자신이 선택했던

습관대로 선택을 했거나 일순간 자기 자신을 어떻게 다스리지 못하고 선택하기도 하지만

선택은 분명 자기 자신이 해서 지금 처한 그곳으로 이끌고 온 것이다.

자기 자신이 자기를 이끌고 온 것이다.

우리들은 흔히 편안한 쪽을 선택하고 좋아하는 쪽을 선택한다.

 

편안하다는 것은 그만큼 습관이 되어 있고 습벽이 되어 있어서 해오던 대로 하기 때문에 편안할 뿐이고,

불편하거나 싫은 것은 하기 어려워서 하지 않으려 하고 선택하지 않으려 한다.

선택할 때는 이런 부분들이 작용을 일으켜서 선택을 하게 된다.

선택할 때는 습관대로 선택하거나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쪽, 자기 자신이 편안한 쪽,

자기 자신이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쪽, 자기 자신의 삼독심을 만족시키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면서 운명이니 숙명이니 말하고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기도 하고 선업을 쌓아가기도 하고,

또는 맑고 깨끗한 쪽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업을 내려놓기도 하고, 반면에 업을 짓기도 한다.

우리들은 부딪칠 때마다 선택을 한다.

선택할 때마다 업을 놓기도 하지만 업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선업을 짓기도 하지만 악업을 짓기도 한다.

 

부딪침이 좋고 나쁘고 떠나서 부딪침을 통하여 자기 자신 안에 부딪침의 대상이 있는지를 알고

부딪침의 대상을 내려놓는다면 더 없이 많이 내려놓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위 상황들에서 보는 것과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자기 자신의 걷는 길이 판이하게 다르게 드러날 수 있다.

그런 만큼 부딪칠 때마다 자기 자신의 업식에 따라서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부딪침으로 일어나는 생채기의 상처를 통하여 그러한 대상이 자기 자신 안에 있는지를 알고 내려놓는 것이

가장 자기 자신을 바르고 좋은 쪽으로 업이 다하는 쪽으로 자기 자신을 이끌고 안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악업이 많은 사람이 착한 사람들 틈에 있으면 그곳이 좋은 곳이라 할지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괴로우니 악업을 가진 사람으로는 좋은 곳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괴롭히니 나쁜 곳이 될 수도 있는 반면 나쁜 곳에 있으면 똑같이 모두 다 나쁘니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으니 괴로울 없이 편안할 수 있는 만큼 좋은 곳일 수도 있다.

선업이 많은 사람이 착한 사람들 틈에 있으면 좋지만 악한 사람들 틈이나 나쁜 곳에 있으면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느껴서 괴롭고 싫을 수 있지만 좋은 곳에 있으면 좋고 편안하다.

 

이와 같이 좋은 곳과 나쁜 곳, 편안한 곳과 불편한 곳은 그 장소나 처하여 있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안에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악마의 소굴에 있어도 편안할 수 있고

천국에 있어도 괴롭고 불편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편안함과 불편함으로 저곳이 좋다 나쁘다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업에 따라서 그곳이 편안하거나 불편할 뿐,

업식을 모두 다 놓고 보면 불편할 것도 편안할 것도 없다,

 

업식을 가지고 업 덩어리 굴러오고 굴러가고 구르고 있는 것이라면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딪침 속에서

선택을 잘해야 하고 마음씀을 바르게 써서 마음작용을 바르게 일으켜서 바른 쪽으로 선택하게 하고

올바른 쪽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고로 살아가는데 8정도가 근본바탕이 된다면 결코 나쁜 쪽으로 빠지기보다는,

좋은 쪽으로 밝고 맑은 쪽으로 자기 자신을 이끌어 가게 될 것이다.

 

비록 악업이 많다 할지라도 8정도에 의지하여 8정도를 근본바탕에 두고 선택하여 행하여 간다면

행하고 실천하기에 악업의 습관으로 인하여 힘들지 모르지만 좋은 쪽으로 바른 쪽으로 선택하게 되고

그러면서 운명이나 숙명도 바뀌게 되는 것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물질적으로 보면 좋은 것이 꼭 좋은 것만이 아니라 나쁜 것이 꼭 나쁜 것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업식의 작용에 있어서 업식을 본다면 좋은 일이 나쁜 일일 수도 있고

또 나쁜 일이 좋은 일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물질 속에서 물질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물질의 필요에 의하여 물질을 필요하기에

물질을 도외시 할 수는 없지만 물질만을 보지 말고 물질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부분도 보아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둘 다에게 이로운 쪽을 선택할 수 있으면 선택하는 것이 좋고,

보이는 물질보다는 보이는 않는 부분이 더 많은 많은 만큼 보이지 않는 부분도 생각해 보고

선택하고 나아가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다.

 

(펌)

 

출처 : 제이제이
글쓴이 : 제이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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