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스크랩] 보리와 반야/종범스님

수선님 2018. 11. 18. 11:55

보리와 반야/종범스님

[BTV 법회 - 제 179회]  종범스님 - 보리와 반야   

얼마전 어느 지방에 갈 일이 있어서 기차를 타고 가게 되었다.

역에 도착하여 역을 빠져 나오는데 어떤 술에 취한듯 보이는 사람이 나를 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또 좀 있다가는 “옴마니반메홈”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저 사람이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의아하였다.

 

우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나 ‘마하반야바라밀’ 이라는 말을 많이 하고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말은 마하반야바라밀에서는 반야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는 보리이다.

나머지는 보리나 반야의 성격이나 역할을 설명하는 말들이다.

‘아뇩다라’라고 하는 것은 무상(無上) 즉 최고 높다는 뜻이다.

‘아’는 없다(無)는 뜻이고 ‘뇩다라’는 윗 상(上)을 뜻하는 것이므로 무상(無上)을 말하는 것이다.

 

‘삼먁’의 ‘삼’은 바를 정(正)이고 ‘먁’은 평등할 등(等)을 의미하고, ‘삼보리’는 바른 깨달음 즉 정각(正覺)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 하는데 핵심은 보리이다.

 

보리란 깨달음 즉 각(覺)이다. 각이라는 것은 안다는 것인데 느낌을 가지고 환히 비추어서 보는 것이라 하여 각조(覺照), 또 관조(觀照)라 하여 보아서 살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지혜이고 지혜란 아는 것이며 아는 것이란 반야인 것이다.

 

글자로는 보리, 반야가 다르지만 내용은 같은 것이다.

반야라는 것은 지혜이므로 보고 아는 것이고, 보리라고 하는 것도 깨달음이므로 알고 보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보는 것이다. 바로 보면 다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보리를 정견(正見)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바로 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이다.

바라밀이라는 것이 해결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바로 보면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고통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보지 못하고 사견(邢見)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견은 번뇌이고 정견은 반야보리이다. 보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반야는 마하반야바라밀이다. 마하는 역시 무상처럼 크다는 뜻이다. 그렇게 큰 지혜로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 마하반야바라밀이다.

 

문제는 보리, 반야가 다 알고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알고 보는 것을 지견(知見)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보리가 불보리(佛菩提), 부처님의 반야를 불지혜(佛知慧), 부처님의 지견을 불지견(佛知見)이라 한다. 그렇다면 중생의 지견도 있을 것인데 그것을 중생심이라 한다. 중생이 알고 중생이 보는 세계이다.

 

중생이 어떻게 보고 있고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 부처님께서는 무엇을 보았기에 해탈을 얻었으며 중생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기에 문제가 계속 따라다니는가 하는 것이다.

 

예전에 농가에서는 소를 이용해서 농사를 지었었다. 농사에 이용하는 소를 농우(農牛)라고하는데, 그 거대한 소가 사람이 이끄는 데로 간다. 힘은 사람보다 훨씬 세지만 사람이 끄는 데로 가는 이유는 코에 구멍을 뚫어서 코뚜레를 매어놓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왜 허구한날 근심 걱정을 하는 것일까?

나이가 많건 나이가 적건 많이 배우던 적게 배우던 모두가 근심 걱정 속에 살고있는 것이다. 소가 힘이 약한 사람에게 끌려 다니는 것은 코뚜레 때문이고, 사람이 근심걱정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은 구하는 마음 때문이다.

 

중생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구하고 있다. 구하는 마음만 놓으면 해탈이다. 나를 묶은 것은 구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 구하는 마음만 놓고 나면 어떤 구속도 없고 어떠한 고통도 없는 것이다. 구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해탈이다.

 

구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주 쉬운 것이지만 중생에게는 너무 힘든 것이다. 래서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 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백 척 높이(약 33m)의 난간에서 한걸음 내딛는 것처럼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일체 구하는 마음을 다 놓는 상태를 이야기 한 것이다.

또 달마대사가 면벽수련을 했다고 하는데 벽을 보고 앉았다는 것은 세상에서 일체 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무목적(無目的)인생관, 탈목적(脫目的)인생관, 초목적(超目的)인생관이 생겨야만 벽을 향해 앉을 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세상에서 구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냥 구하지 말라고 한다면 절대 되지 않는다. 바로 보아야 구하지 않을 수 있다. 금강경에 “약견 제상이 비상이면 즉견여래(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하였다.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여래를 본다는 것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모든 보이는 것은 오래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똑바로 보면 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상(相)이 상(相)이 아닌 줄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상을 상으로 보기 때문에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또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하였는데 오온을 오온으로만 보고 오온이 개공인지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 우주 만물의 실체가 불생불멸인데 그 불생불멸을 보지 못하고 만상차별로만 보기에 여기에서부터 사견과 정견이 나누어지게 된다.

 

정견으로 보면 구하는 마음이 있을 수가 없는데 정견으로 보지 못하고 사견으로 보게 되니까 구하는 마음이 끊임없이 생기고 그 구하는 마음 때문에 근심걱정이 하루도 떠날 날이 없는 것이다. 마치 소가 코뚜레에 끌려 다니듯이. 우물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사람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반가워서 그 사람을 만나려고 들어간다면 그는 사람은 만나지도 못하고 자칫 죽을 수도 있다.

 

보는 순간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물속에 보인 사람은 바로 자신의 그림자임을 보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제상이 비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있는 것을 계속 구하지만 만족하지는 못하고 인생만 늙어간다. 이와 같이 구하는 마음이 속박이다. 따로 나를 묶어서 꼼짝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다.

그림자가 보여도 나의 그림자이므로 구할 대상이 아님을 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내가 좋게 보니 좋은 것이지 본래 좋은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 보이면, ‘내가 나쁘게 보니 나쁜 것이지 본래 나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 보이면 그것이 정견이다. 그것이 반야이고 그것이 보리이다. 이것을 모르고 자꾸 좋게 보이는 것은 구하고 나쁘게 보이는 것은 버리려고 하는데, 버리려고 하는 것도 구하는 것이므로 끊임없이 구하는 것이다.

 

사람도 좋게 보이는 사람은 당기고 나쁘게 보이는 사람은 밀어내는데, 사람도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나한테 좋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나쁠 수가 있고, 나한테 나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좋을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에게서 좋은 면이 나올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는 힘은 다 가지고 있는데, 그 힘을 어떻게 끌어내는가 하는 것은 자기가 하기 나름이다.

 

원효스님께서는 기신론에서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則 種種法生)”라고 하셨다. 내가 마음을 어떻게 일으키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또 육조스님께서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두고 바람이 흔들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스님과 깃발이 흔들리는 것이라 주장하는 두 스님에게 “불시풍동 불시번동 인자심동(不是風動 不是幡動 仁者心動)”이라 하여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라 하신 것은 이 모든 것의 정답을 함축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보리이고 반야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제상이 비상인 것인데, 형상이 아닌데 형상인 것으로 잘못 보아서 구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사견이고 어리석은 치이다. 잘못 봄으로 구하는 마음이 생기고 구하는 마음대로 안 되니까 분노가 생긴다. 이것이 중생심이다. 사견과 탐욕과 분노를 계속 반복하기 때문에 중생에게 고통이 끊이질 않는다.

 

우주만물을 보면서 자기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고 자기의 그림자이고 그것 자체가 불생불멸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에게 구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는지를 알려면 분노가 얼마나 있는가를 보면 된다. 보통 때에는 화가 안 날 수도 있어 화를 안 내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 분노가 일어날 때가 있다. 그것은 분노가 자기 자신도 모르는 깊은 곳에 가라앉아있는 것이다.

 

무엇을 구하고 있느냐에 따라 화를 내는 성격도 다 다르다.

화가 나고 욕심이 났을 때 보통 싸우게 되는데 이것은 반야행으로 해결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보는 관조와 반조를 하면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되고, 그러한 욕심을 하고 깊이 생각하면 자신의 부질없는 탐욕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다.

 

또 탐욕은 허망한 생각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고 그 허망한 생각을 자세히 관조하면 허망한 생각이 없어지고 평정이 되찾아지게 된다. 그러면 미움도 고통도 없어지게 되고 해탈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천수경에서 ‘자성법문서원학(自性法門誓願學)’이라 하였다.

 

자신의 본래 성격, 반야의 본래 성격, 보리의 본래 성격을 자꾸 돌아보면 내 마음이 맑아지면 세상이 맑아지고, 내 마음이 넉넉해지면 세상이 넉넉해지는 것을 알게 된다. 행복의 근원을 자기의 마음을 맑히는 것으로부터 찾는 것이 반야바라밀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그런데 자기의 마음을 맑히지는 않고 계속 좋은 사람은 끌어당기고 미운 사람은 가서 싸우기만 하면 한날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다. 이것이 중생의 윤회인 것이다. 미운 사람과 싸우면 내 마음이 편해지지도 않는다. 미운 마음을 마음속에서 없애버려야만 마음에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점점 마음이 맑아지면 ‘세혹(細惑)이 영진(永盡)이라’ 미세한 삿된 의혹이 영원히 다 없어진다고 하였다. 중생들은 자기가 좋게 보아서 좋은 것이고 나쁘게 보아서 나쁜 것임을 알다가도 순간 잊고 그냥 좋은 것이고 또 나쁜 것이라 생각하고 화를 내게 되는 미혹함을 범하게 된다. 이러한 마음이 없이 항상 깨어있는 것을 상각(常覺), 대각(大覺), 정각(正覺) 이라 한다.

 

“원명(圓明)이 변조(遍照)”라 둥글고 끝없이 밝은 보리가 항상 두루 비추는 것, 이것이 부처님의 눈이다. 불성을 알고 인과를 본다고 하는데, 불성이라는 것은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아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제상이 비상임을 알고 인과를 볼 수 있겠는가?

 

한 손으로 다른 쪽 손가락을 잡고 세게도 눌러보고 약하게도 눌러보라. 세게 누르면 아프기도 하고 살짝 누르면 아프지는 않지만 느끼기는 할 것이다. 느끼는 것은 아는 것이고 그것을 누가 느끼는가 그것이 불성이다. 반야이고 보리이다. 또 살짝 누르면 아프지 않지만 강하게 누르면 아픔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이 인과이다.

 

우리의 몸 자체가 태어나서 이제껏 살아온 인과이다. 또 유전자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전해온 인과이다. 그래서 삼세인과(三世因果)라 하여 과거의 인과 현세의 인과 미래의 인과가 있다. 자신의 몸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인과이다. 그 몸의 어디를 눌러도 다 감각이 있는데 그것이 반야이다. 반야는 없는 곳이 없다.

 

또 내가 보는 만큼 보는 것은 인과이다.

좋게 보면 좋게 보이는 것이 인과이고 나쁘게 보면 나쁘게 보이는 것은 인과이다.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는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것은 항상 잘 보는 것이다. 언제나 물가에 가서 물에 비친 사람이 자신의 그림자임을 아는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욕심이 일어나고 화가 날 때 그것을 구하고 싸우는 것은 윤회이며, 분노가 일어났을 때 분노를 일으키는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면 자기의 욕심에서 화가 났음을 알게 되고, 욕심을 돌아보면 허망한 생각임을 알게 된다. 욕심은 허망한 것이다. 욕심의 결말은 허망한 것이다. 욕심의 대상은 현상에 있는 것이고 현상은 무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래서 이 세상의 무엇을 구해놓아도 오래가는 것이 없다.

그런데 욕심이 일어나는 순간에는 그것을 모르고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 때문에 탐욕이 일어나게 되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게 되면 불같이 화가 나게 된다. 탐욕과 분노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것이다. 탐욕과 분노는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잘못 보는 데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자꾸 닦고 자기의 마음을 자꾸 돌아보아서 자기탐욕과 자기분노로부터 점점 벗어나면 복 받은 사람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문도 잘 듣고, 예불도 잘 하고, 경전도 잘 읽고, 쓸데없는 일로 메어서 싸우지 말고,

나이가 들수록 놓고 살려고 노력하는 등 여러 가지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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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V 법회 - 제 144회]  종범스님-고향의 나그네

근대에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며 선사인 만해 한용운 이라는 스님이 계신다. 스님은 많은 글을 남겼는데, 그 중에 ‘선 밖의 선(禪外禪)’이라는 글이 있다.

 

참선이니 좌선이니 선정이니 하는 말을 전혀 쓰지 않고 또 그런 훈련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선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당시 스님이 서울의 선학원을 다니실 때 안국동 입구에서 상추를 파는 노점상이 있었는데, 상추를 살려고 온 주부가 상추를 고르며 흥정하고 있었다.

 

상추를 살려는 주부가 말하기를 “상추잎이 왜 이렇게 작습니까?”하였다. 그러자 상인이 “아닙니다. 작게 보면 작지만 크게 보면 큽니다.”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한용운 스님은 깜짝 놀라며 생각하기를 ‘저 사람들은 선정이 무엇이고 참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인데 일상생활 속에서 선을 말하고 있구나’ 하였다.

 

선은 마음이요 지혜요 실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상생활 속에 선이 있는 것이다.

‘작게 보면 작고, 크게 보면 크다’ 여기에 중요한 면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 ‘무엇이 있으니까 보인다’라고 말하고, ‘산이 있어서 산을 오른다’ 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있는 데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데로 있는 것이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달리 보이는 것이다.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세상은 하나밖에 없어야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모기가 보는 세상이 다르고, 파리가 보는 세상이 다르고, 사람이 보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에 불찰미진수(佛刹微塵數) 세상이라고 티끌같이 많은 우주가 있는 것이다. 나는 나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각자 각자가 우주를 만드는 것이다.

 

소나무 한그루를 보더라도 기분이 좋을 때에 소나무를 보면 소나무가 좋게 보이고, 괴로울 때에 보면 괴롭게 보이는 것이다. 결국 세상은 보는 대로 보이는 것이지 있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무엇이든 볼 수 있고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고향에 있는데 늘 나그네 노릇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향의 나그네 즉 중생인 것이다. 고향에 있으면서도 고향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만해스님이 1917년 정사년에 설악산 오세암에서 참선을 하고 있었는데,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무엇인가가 지붕에서 떨어졌다. 그때 깨달음을 얻고 다음의 오도송(悟道頌) 을 남기셨다.


남아도처시고향 (男兒到處是故鄕) 남아가 가는 곳 마다 고향인데 기인장재객수중 (幾人長在客愁中)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객수를 겪고 있는가 일성갈파삼천계 (一聲喝破三千界) 한 소리 큰 할에 삼천세계를 타파하니 설리도화편편비 (雪裏桃花片片飛) 눈 속에 도화가 조각조각 나는 구나


이것이 깨침의 세계이다. 우리의 마음이 진짜 고향이다.

이 고향을 모르고 항상 밖으로만 찾는데 자기가 찾는 것은 자기가 만든 것이다. 자기가 만들고 또 버리고 또 반복하는 것이 중생인데, 바로 고향의 나그네인 것이다.

 

심생법생(心生法生) 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이 생겨야 우주가 생긴다는 뜻이다. 마음이 일어나야 우주가 보이지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주가 보이지 않는다. 우주는 나의 마음이 일어나는 만큼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 밖에 세계가 있는 줄 알고 헤매기 때문에 고향에서 고향을 모르고 떠도는 나그네가 우리 중생인 것이다.

 

이것을 어리석음이라 하고 무명이라 하고 또 윤회라 한다.

자기가 만들어 낸 세계인데 그것을 모르고 끊임없이 헤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향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틱낫한 스님이 유명한 법문을 하였다. 40년 동안 가지 못한 고향을 방문했을 때 하신 법문인데, “조상이 어디에 있는가? 내 몸에 조상이 있다. 내 몸에 조상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조상을 만나려면 자신의 몸을 잘 이해하면 된다. 마음의 고향은 나의 참마음이다.”라고 하였다.

 

정신적인 고향, 신체적인 조상이 우리 몸에 다 있으므로 진정으로 행복을 얻는 길은 우리의 몸부터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바로 조상이 깃든 고향이기 때문이다.

 

몸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다음으로는 생각을 살펴보아야 한다. 매일 하는 생각은 무엇이고, 일어나는 생각, 사라지는 생각은 무엇인가를 찾아보아야 한다. 모든 행복의 열쇠는 몸과 생각에 있는 것이다. 몸을 제대로 파악하면 조상이 물려준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고, 생각을 깊이 관찰하면 거기에서 여유로움과 기쁨을 찾아낼 수 있다.

 

생각을 살피지 않고 밖으로 밖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쫓아다니고, 귀에 들리는 것만 쫓아다니면 끊임없이 따라다니게만 된다. 이것이 윤회인 것이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은 몸을 살피고 생각을 살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행복의 열쇠요 진리의 열쇠인 것이다. 몸을 살피지 않고 생각을 살피지 않고 헤맨다면 그 떠도는 행위는 멈춰지지 않는다.

 

이것은 옛부터 큰스님들께서 계속 가르쳐주신 바이다.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의 일화도 그것이다.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이 중국으로 유학길을 떠났는데, 당시는 당나라 초기로 유식불교가 번창했을 때이다.

신라의 스님이었던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은 고구려와 백제로 육로가 막혀있어서 뱃길을 이용해 유학길을 떠나게 된다. 길을 떠나 충남 직산 지역에 이르렀을 때 비도 오고 밤이 깊어 쉴 곳을 찾다 보니 토굴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토굴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깨어보니 그 토굴은 무덤이었고, 해골도 있었다. 길을 나서야 하지만 비가 계속 내려 길을 나서지 못하고 그 무덤에서 하루를 더 묵게 되었다. 그런데 원효스님은 해골이 있는 무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지난밤은 편히 잠을 잘 수 있었건만 알고 난 지금은 잠을 이루기는커녕 뒤숭숭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마음이다.

마음이 생기면 세상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세상이 사라진다는 것을 철저히 느낀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가고자 애썼던 중국유학길 이지만 갈 일이 없다고 판단하고 되돌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라는 것은 책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도라는 것은 형식으로만 닦는 것이 아니다. 생활 속에서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원효스님은 그 깨달음으로 유학길을 접었으나 의상스님은 홀로 유학길에 올라 10년 동안을 화엄경을 공부하여 도를 이루었다. 우리가 읽고 있는 ‘법성게’를 지어서 남기고 ‘법성도’를 그려서 남긴 스님이 바로 의상스님인 것이다.

 

그렇듯 시절인연이 다 있는 것이다. 마음이 열릴 때에 세상이 열리는 것이지 세상만 따라가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생각하고 있다.

 

중국의 육조 혜능스님은 마음을 깊이 깨달은 것으로 유명하다.

스님 역시 책을 읽고 깨달았다거나 규칙적인 좌선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시장에 나무를 팔러 왔다가 시장에서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디에나 다 있다. 새소리에도, 물소리에도, 바람소리에도 다 있다.

 

마음만 열리면 되는 것이다. 딴생각 많이 하지 말고 항상 깊이 보고, 생활을 단조롭게 하고, 살피고 또 살피는 생활을 하면 원래 고향 속에 있기 때문에 저절로 보이고 들리는 것이다.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꿈속의 것만 보일 뿐 자기가 누워있는 집을 볼 수 없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저절로 집이 보이는 것이다.

 

혜능스님의 일화 중에, 스님이 법문을 하게 되었는데, 법문을 하기 전에 절 앞에서 깃발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이 언쟁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바람이 흔들리는 것이라 하고, 한 사람은 깃발이 흔들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를 본 혜능스님이 말하였다.

 

“불시풍동(不是風動)이요 불시번동(不是幡動)이요 인자심동(仁者心動)이라. 바람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고,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향을 직접 본 분의 말씀인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형상을 보고 귀로 듣고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마음만큼만 보이고, 마음만큼만 들리는 것이다. 모든 느끼는 것이 자기의 마음만큼만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그림자와 같다고 한다.

 

거울 앞에서 보면 그림자가 거울에 보이는데, 저것이 나의 그림자임을 알고 보기 때문에 알지만,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한 번도 비추어 본적이 없는 사람은 그 그림자가 자신의 것인지, 거울 속의 사람이 자기인줄 모른다.

 

한용운스님의 불교대전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인도의 깊은 산속에 한 노인 부부가 살았는데, 한번은 술을 큰 독에 담궈 두었다.

 

술이 익어 걸러졌을 즈음에 할머니가 술 단지를 들여다보니까 어떤 할머니가 단지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가서 ‘왜 나 몰래 술 단지 속에 다른 할머니를 숨겨두었냐’고 따졌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영문을 몰라 하며 단지에 가 보았다. 할아버지가 들여다보자 그 속에는 어떤 할아버지가 있는 것이다.

 

놀란 할아버지는 다시 할머니에게 ‘왜 나 몰래 술 단지 속에 모르는 영감을 숨겨두었느냐’고 따져 물었다는 것이다. 술독에 비추어진 그림자는 자신의 모습인데, 자신의 모습을 본적이 없는 그 노부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모습인지를 알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이다.

잠을 자다가 꿈을 꾸게 되는데, 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자신이다. 자신의 꿈에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꿈을 꾸지 않았다면 그 꿈속의 일은 없는 것이고, 또 꿈이 사라지는 즉시 그 꿈속의 일은 사라지는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나의 생각이 사라지는 순간 나의 생각이 보았던 것은 다 사라지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수,상,행,식(受,想,行,識)이다. 이것은 몸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몸을 의지해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죽는 순간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망한 것이다. 우리가 영가시식을 할 때 ‘육진심식본래공(六塵心息本來空)’ 이라고 늘 하는 것이 그것이다.

 

환경에서 얻어진 것은 환경이 바뀌면 없어지고, 몸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은 몸이 사라지면 다 사라지는 것이다. 진짜로 마음의 고향에서 얻는 것이 불생불멸이다.

 

‘눈으로 어떻게 보느냐’ 하는 눈으로 보는 능력이 본래 마음이다. 슬프면 울면 된다. 하지만 울지만 말고 그 슬픈 마음이 어디서 왔는가를 찾아 들어가면 금방 깨칠 수 있다.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가 좋다, 나쁘다 하며 소리에만 따라가면 윤회이고 소리를 듣는 마음이 뭔가를 찾아 들어가면 마음의 고향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마음은 몸이 생겨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몸이 없어진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살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마음의 고향에 들어가는 것은 보는 대로 쫓아가지 말고 보는 마음을 돌이켜 보고, 들리는 대로 쫓아가지 말고 듣는 마음을 돌이켜보는 반조(返照) 를 하여야 한다. 몸을 가만히 살펴보면 몸은 무상한 것이다. 어제의 몸과 오늘의 몸은 다르다. 순간순간 늙어가는 데 그것을 모른다.

 

인생무상이라고 하지만 죽는 순간만 무상한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무상한 것이다. 이것을 알면 탐욕이 일어날 수가 없다.

무상을 모르기 때문에 탐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살피고 살피면 세상 어떠한 것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그네의 시름을 벗어나 죽음이나 슬픔이 없는 나의 고향에 이르게 되면 완전한 휴식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 속에 들어가려면 먼저 믿어야 한다.

그 신심만큼 자기를 확실하게 구제하는 것은 없다.

이것을 고향집 문안으로 들어가는 입문이라고 한다.

 

신심이 자꾸 성장해서 커지면 한 단계 더 나아가 마당을 지나 마루위에 올라간다고 하여 승당(昇堂)이라 하고, 마지막으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다 하여 입실(入室)이라 한다.

이렇게 단계가 있지만 믿지 않으면 입문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일단 믿어야 향상이 되어 승당을 하고 입실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입실을 하고 나면 방안에서는 모든 것이 편안한 상태가 된다. 이렇게 해서 고향에 들어왔다면 자신을 위해서는 더 할 것이 없고, 아직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들어올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일, 즉 보살행을 하여야 한다. 방에 들어왔더라도 그 방에서 기쁨과 편안함을 누리기만 한다면 덜 된 것이고, 아직 들어오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계속 길을 인도하여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훌륭한 길을 찾아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을 이해를 못해서 항상 생각을 멈추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생각을 멈추고, 놓아야 한다. 생각을 조금만 멈춰도 편안해진다.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생각을 멈추고, 생각을 놓고, 보면 그대로 고향인 것이다.

 

근세에 훌륭한 스님 중 한분인 경허스님의 오도송 중에 ‘돈각삼천시오가(頓覺三千是吾家)’라는 구절이 있다. 삼천대천세계가 모두가 나의 집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는 것이다.

생각으로 세계를 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지 지혜로 보면 보이는 것이다.

 

삼천대천세계가 나의 집이라는 말은 곧 가는 곳 마다 나의 고향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그 고향으로 갈려면 먼저 믿어야 하고, 계속 노력하면 결국 입실을 하여 깊은 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그 다음에는 아직 고향을 모르는 많은 나그네들을 위해 보살행을 펼치는 것이 부처님의 길이고 불자가 가야 할 길이다.


출처 : 영축산 반야샘터
글쓴이 : 송지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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