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스크랩] 수행이야기

수선님 2018. 11. 11. 12:32

 

 

                                   수행(修行)이야기. 보법수행과 일법수행

                                                                                                       종범스님

 

 

안녕하십니까?

오늘 법문은 수행이야기 ‘보법수행과 일법수행’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 이야기를 왜 계속 하냐하면요. 수행이라는 것은 정신을 지혜롭게 하는 것. 오늘날 가장 중요한 문제가 인류의 정신건강과 생태계 환경을 보존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 뜻에서 옛날 부처님,

조사님 무한한 선지식들이 가장 지혜롭고 건강한 정신을 가지신 분들이거든요.

 

그럼 수행이라는게 뭐냐?

여러 가지 방법을 말하기 전에 수행의 근본이 있습니다.

 나무도 가지가 있고 줄기가 있지만 뿌리가 있거든요. 그게 근본이죠 뿌리라는게.

수행의 근본은 저 밖에서 헤매고 다니는 나그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눈은 밖에 것은 다 볼 수 있는데 자기 눈이 자기 눈을 보지 못합니다.

①수행이라는 것은 자기 눈이 자기 눈을 보는 것이다. 오늘날 어떤 사람이 내 눈이 어디에 있을까?

하고 자기 눈을 찾으려 다닙니다. 그런데 못 봐요 눈을 그런데 딱 아는거에요. 어느 날 딱,

아, 나는 내 눈을 잃어버린 적이 한 번도 없구나! 를 압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내 눈이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하늘은 보는 것도, 땅을 보는 것도)

그게 첫 번째 자기 눈에 대한 인식 과정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내 눈을 내가 보겠다.’라는 생각이 없어져요.

그걸 구견지상(求見之想)이라 합니다.

세 번째는 ‘내가 내 눈을 못 본다.’(不見之想)라는 생각도 없어져요.

그래서 잃어버렸다는 생각 없고요, 또 내 눈을 보겠다는 생각 없고요, 내가 내 눈을 못 본다는 생각 없고요, 그대로 하늘도 보고 땅도 보고, 사람도 보고 천지만물을 다 보는게 그게 자기가 자기 눈을 보는 겁니다.

수행이라는게 꼭~ 그와 같습니다.

 

그리고 ②수행이라는 것은 알 줄 아는 마음에서 모를 줄 아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거 어려운 말인데요.

알줄 아는 마음이 있어요. 그럼 알줄 아는 마음이 뭐냐?

중생들은 분별심 즉 알줄만 압니다. 산다 죽는다, 보인다 안 보인다, 좋다 나쁘다.

이게 전부 아는 마음이에요. ‘분별’ 즉 ‘갈라놓는 마음이다.’ 이 뜻입니다.

그것만 알아요. 그러나 모를 줄 아는 마음이 이걸 ‘무분별심’이라 그럽니다.

알 줄 아는 마음은 ‘의식’ 생각과 인식이고 모를 줄 아는 마음은 ‘반야, 보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하반야바라밀’이 모를 줄 아는 마음이에요.

모를 줄 아는 마음이 본래 고향입니다. 이게

 

그래서 수행이라는 것은 알 줄 아는 마음에서 모를 줄 아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럼 그런 수행이 어떠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느냐?

 

이걸 보법수행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데요. 普法수행은 화엄학에서 쓰는 말이고(화엄학에서는 전체법을 보법이라 함) 그리고 일법수행 一法修行은 하나만을 중요시한다는 수행인데요, 선종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마음 하나 닦으면 모든 게 다 된다. 관심일법(마음을 돌아보는 한 법)이 모든 수행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법수행 임.

 

보법수행은 대승불교 전체에서 말하는 육바라밀, 10바라밀 수행이라든지 일체 선행과 일체정진을 다 닦고, 마음의 지혜가 되고 온갖 것에 복이 되는 그런 행위는 전부 수행입니다. 일체선법을 다 닦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복과 지혜를 다 닦는 것이 수행이 되어서 나중에 즉 복과 지혜가 원만구족하면 그걸 성불이라 한다.

그래서 복혜양족이라 하며 이것을 대승불교라 합니다.

그걸 보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보법이라는 것은 화엄교학에서 쓰는데 일반적으로 잘 안 쓰는데 제가 한번 붙여보았음.

 

관세음보살 보문품에서는 넓을 普자를 씁니다.

그럼 이 보법수행이라 하더라도 원 길이 하나가 있어요. 수행엔 길이 하나 뿐 입니다. 무슨 길이냐? 信心!

하나뿐이다. 수행을 어덯게 시작하냐 하면 말이죠.

처음도 마지막도 信입니다. 그럼 처음 시작하는 신심을 ①信決이다.

신심으로 딱 결정하는 겁니다. 그게 첫 번째 신결심입니다.

이 뭐 망설이고 주저하고, 의심하고 그거 소용없어요.

신이란 결정이거든요. 信이란 일심이다. 지극한 마음이다. 믿음으로 결정하면

 

그 다음은 ②信求이다. 딱 구하는 것이다.(信求心)

뭐를 구하냐? 세상이라는 것은 다 무상하고 허망하다.

어떤 것을 구해도 없어지고, 어떤 것을 만나도 사라진다. 그러니까 내가 구해야 할 것은 깨달음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이게 보리심이고 발심(發心 : 보리심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라 한다.

요게 信求이다. 세상은 무상하다. 어떤 것을 구해도 허망하고 어떤 것을 구해도 사라진다.

내가 구할 것은 깨달음의 지혜뿐이다. 그러다 보면 알아진다.

이것이 ③신해(信解)이고 앎이 깊을수록 행하게 된다. 이것이 ④信行이다.

 

행함(실천)이 지속되다 보면 그 다음은 체험(證)이 된다. 이것이 ⑤信證이다.

신증이 무엇이냐 하면, 누가 ‘염불을 오래하면 극락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믿게 됩니까?’

그래요, 그래서 염불을 오래하다 보면 믿게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눈앞에 환히 보입니다.

눈앞에 보인다는 데에는 할 말이 없잖아요.

나중에는 信 하나 뿐 이다. ⑥信滿(믿는 마음 하나로 꽉 찬 것임) 이다.

그러면 구경각(가장 높은 깨달음), 무상각의 보리도를 이룬다.

이게 보법수행이 가는 길이며 보법수행은 모든 만행을 다 닦는다.

 

바라밀 수행도 보시바라밀부터 반야바라밀까지 또 이 바라밀 수행을 보면 이 보시 지계 인욕은 세속법으로 닦는 것이고, 정진 선정 지혜(반야)는 出世間法으로 닦는 것이며, 그 다음 방편, 원, 역, 知바라밀은 출세간의 경지에서 나온다 하여 出 出世間法이라 한다.

그러니까 일체만행 공덕을 닦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 보법수행인데 원하는 것은 딱 하나이다. 보리, 깨달음, 그러니까 같은 것을 해도 무상하고 허망하다를 아니까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그 반야 보리, 깨달음만을 구하는 거에요. 요게 달라요.

많은 것을 닦지만 구하는 것은 하나이다. 그게 수행이에요.

 

그래 그걸 알아야 합니다. 수행하는데 왜 이걸 하느냐? 그러는데 그것 잘못된 거에요.

그 수행을 위해서 그것을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학계에서 보면 ‘구하는 것은 반야인데 왜 책을 봐야 하는가?’ 라고 갈등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근데 이 책보는 것이 깨달음을 구하는 일이다.

그게 보법입니다. 게 어떤 사람이 춤추는 것을 좋아한다고 그럽시다.

그럼 낮이나 밤이나 춤만 추냐? 아니지요? 그 춤출라면 잠 잘 곳도 있어야 되고, 또 마실 물도 있어야 되고, 옷도, 밥도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춤추기 위해서 옷 입어야 되니까 옷을 구하러 가야 되고, 춤을 추기

위해서 밥도 먹어야 하고, 그러니까 밥값도 벌고 물 값도 벌고 하지만은 구하는 건 오로지 춤을 추기 위해서 그걸 벌어서 먹으면서 나는 춤을 춘다. 춤추는 것 하나 하기위해서 돈을 벌기도 하고 쓰기도 하면서 온갖 일을 한다. 똑같은 거에요.

 

그런거에요. 그게 보법임니다.

그래서 만행을 닦되 구하는 것은 하나다. 이것이 인제 보법수행이죠.

그래서 다른 것을 구하면 안 돼요. 그러면 보리심을 상실한 거에요. 그래서 수행에는 보리심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생명을 잃어버린 거와 똑 같아요.

 

유마경 부사의 품에 보면, 사람은 많은데 방에 의자가 없어요. 그래서 무슨 생각을 했냐하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다 어디에 앉을까? 하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는 것을 유마거사는 알아차리고 ‘그대는 여기에 법을 위해서 왔는가? 의자위에 편안히 앉기 위해서

왔는가?’라고 질문을 합니다.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법문을 들으러 와서는 벗어놓은 신발과 우산을(가져가지 않았을까) 걱정한다는 것은 구법자의 자세를 잃어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청중들의 웃음소리)

그래서 구하는 것은 딱 하나여야 합니다.

 

마지막에 若求法者 於一切法 應無所求란 말이 있습니다.

신발, 우산 걱정(구)하는 것은 신발구하는 거지 구법이 아니다. 구하는 것은 오로지 보리, 깨달음 그것만을 구하는게 그게 한 보리심으로서 일체공덕을 다 닦는다. 이게 보법수행입니다.

 

그 다음에 일법수행이 뭐냐? 마음 하나 딱 챙기면 다 되거든요. 이게 一法修行 입니다. 일법수행에는 둘로 나뉘는데 자성문 수행이 있고 수상문 수행이 있습니다. 왜 자꾸 어려운 말을 쓰는지 참 어려운 말을 쓰는

나 자신도 딱해요. 내가 생각해도, 자성문은 자기 본래 마음 자기 심성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수상문(隨相門)은 따를 수자 입니다. 이것은 딱딱 순서를 맞추어서 수행과정을 하나하나 밟아가며 수행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자성문 수행은 뭐냐? 자성문 수행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80화엄경 범행품에 보면 초발심시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60화엄경에는 初發心時 便成正覺이라고 번역했고요.

처음 발심한 때가 성불한 때이다. 바로 부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런게 자성문 수행입니다.

육조 혜능선사가 오조 홍인대사를 만나서

육조단경에 보면 能 言下大悟 一切萬法 不離自性이란 말이 나옵니다.

행자 혜능이 오조 홍인화상의 말씀을 듣는 찰나에(끝나기도 전에), 일체만법이 자성(자기 마음)을 떠나지

않음을 크게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대오란 말은 의심이 하나 남김없이 완전하게 깨달았다는(통달했다는)

뜻입니다.

 

언하대오 다음에는 뭐냐? 따로 닦는게 아니고요, ‘여여자재’해 버리는 겁니다. 그게 돈오돈수입니다. 돈수는 따로 닦는 것이 아닙니다. 자재하는게 돈수입니다.상근대지는 돈오돈수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없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내가 돈오돈수하지 못했을 뿐이에요.

대오한 다음에는 여여자재입니다. 이런 것을 갖고 시비할 일이 아닙니다.

如如히 자재하면 그냥 부처님인 거에요. 그걸 자성문수행이라 합니다.

 

  그 다음은 수상문 수행인데, 첫 번째, 頓悟入道, 돈오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입도는 도에 든다는 뜻이고 도는 반야도 보리도를 말합니다.

돈오입니다. 그러면 돈오는 뭐냐?

나의 마음과 부처님 마음이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純一信心이라 합니다. 이개 돈오입니다.

중생과 부처가 다른 것은 번뇌심을 일으키면 중생, 안 일으키면 부처입니다

 

   순일하게 믿되 번뇌심이 다시 일어 날 때는 도 닦는 것입니다.

이런 수행을 ②觀心修道라고 합니다. 마음을 관조해서 보리도를 닦는다. 입니다.

이것을 그런데 恒一信心이어야 한다. 처음에는 돈오로 입도해서 관심으로 수도를 하는 것입니다.

관심수도가 아주 중요해요. 관심수도를 어덯게 하냐?

중요한 것이 “내가 누군가?”그러면 중생이 모자라는게 그겁니다.

중생은 몸뚱이를 나로 알고요, 저 일체만법을 나 아닌 밖의 것으로 아는 것이며, 또 나 아닌 밖의 일체를

구하는 반연심을 자신의 마음으로 아는 것 이것이 미혹입니다. 그것은 미혹이고 전도입니다.

 

그러면 정말 나는 누구인가?

나라고 하는 것은 반연심이 아니라 ‘청정심’이 그게 난데, 중생은 남자생각하고, 여자 생각하고, 오고 가고

하는 밖으로 쫓아다니는(나그네와 같은) 것을 반연심이라 합니다. 이걸 자기 마음으로 아는 겁니다.

고게 아는 마음이거든요.

 

그러나 이 청정심 보리심 반야심은 모르는 마음입니다. 무심입니다.

그 마음은 형체가 없으면서 다 알아요. 이런 마음을 空寂靈知之心이라 해요.

공적해요. 공공적적합니다.

그런데 아주 분명하게 알아요. 이걸 소소영영이라고 해요.

 

   참 나는 공공적적하면서 소소영영한 것이 난데, 중생은 그걸 잃어버리고 부모가 준 것을 나라고 여기고, 일체만법을 밖의 물건이라 보고, 그 밖의 물건을 이리저리 쫓아다니는 것을 자기 마음이라고 본다.

이런 것을 미혹이라고 합니다.

 

자기는 찾아보면 없어요. 이게 공공적적이에요. 그런데 보고 듣고 느끼고 행동하고 움직이고 소소영영해요. 공공적적하면서 소소영령한 그것을 ‘공적영지’라 하는데, 공적하면서도 신령스럽게 안다.

그게 나에요.

공적영지를 돌아보는 것이 수행이에요. 그걸 회광반조라고 그럽니다.

돌이킬 회 돌이킬 반 마음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光은 마음의 빛을 말합니다. 공적영지한 마음을 돌아

보는 것이 반조(회광반조)입니다.

 

그게 수행이에요. 그래서 수행을 할려면, 아주 중요해요.

마음하나 놓쳐서 모든 문제가 생겼으니까, 마음 하나 챙겨서 모든 문제 해결한다. 이게 수행입니다.

마음 하나 놓치면 온갖 문제가 다 생깁니다.

그런데 마음하나 챙기면 모든 문제 다 해결돼요.

 

그래서 첫 번째 觀心修行을 하려면 不取外相하고 攝心內照하라!

이게 무슨 소린지, (웃으심)밖의 상을 취하지(쫒아 다니지) 말고 마음을 거두어들여서 보는 마음을

잘 챙기라는(내 마음이 뭐냐? 보는 마음 듣는 마음)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과거에 많은 생각을 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망념이 일어나게 됩니다.

 

망념홀기 도불수지(妄念忽起 都不隨之 망념이 일어나도 도무지 따라가지 마라)

어떤 생각이라도 따라가면 그건 수행이 아닙니다. 일어나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고 오로지

보고 듣는 이 마음이 뭐냐? 그것만 살피는 것이 섭심내조입니다.

 

불파염기 유공각지 염기즉각 각지즉무(不怕念起 猶恐覺遲 念起卽覺 覺之卽無)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 오로지 아! 망상이 일어나는 구나.

망상인 줄 알고 살피는 것을 覺察이라고 합니다. 이 각찰을 해 버리면 망상이 없어져 버립니다.

오직 각찰이 더딜까를 염려하라.

망상인 줄 모르고, 어? 맞어, 그때 그 사람이 그랬지. 그럴 수가 있어?

이렇게 헤메고 다니다 보면 마음 공부가 안되고 길을 잃는거다 이거지요.

 

(좋거나 나쁘거나)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자신도 모르게 따라가는 것은 길을 잃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왕이)자기를 끌고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걸려들지 말고 아, 도불수지하고 딱 망상이다! 하고 딱 알아차리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이 일어나면 바로 깨달아라.(염기즉각)

개달으면 곧 없어지느니라.

요거이 마음을 닦는 한 방법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의식은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살핍니다.

생각이라고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생각나면 해야 돼요.

아, 이거 망상이구나 하고 안 하면 안 됩니다.

아, 지금 밥 할 때가 됐다고 생각나면 밥해야 되고요. 청소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나면 청소해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 해야 할 일이 전혀 아닌 거, 10년 후에 내가 병이 나면 어떻게 하나? 이건 망상입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바로 살펴라 이게 염기즉각입니다.

염기하면 깨달아 살펴라.

그 다음은 각지즉무 즉 망념을 알아차리고 따라가지 않으면(깨달으면) 언제 없어진 줄도 모르게 망념은

곧 사라지게 됩니다.

 

따라가면 온갖 것이 다 생깁니다. 아들 손자 증손자 고손자가 계속 생겨서 끝이 없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닦으라고 옛날 선지식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관심수도입니다. 그 다음에는 無心合道가 있어요.

무심, 마음이 텅 비워져요. 무심이 되면 도와 떠억 합해요. 보리 반야와 떠억 합하는 거에요.

 

이것이 무심합도에요. 그래서 ①돈오로 입도하고, ②관심으로 수도하고 마지막으로

③무심합도 하는 것입니다. 무심이 되면 도와 합해집니다.

무심이 뭐냐? 일체 망상(번뇌 망념)이 없는 것을 무심이라고 해요. 빈병은 속이 빈 것(물건이 없는 것)이요, 빈집은 집안에 사람이 없는 상태의 집이듯이 무심은 마음 안에 번뇌 망상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도에 있어서 무심이라는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달마대사의 무심론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00여년 전에) 돈황에서 나온 자료입니다.

부무심자 즉진심야 진심자 즉무심야(夫無心者 卽眞心也 眞心者 卽無心也)

무심은 즉 진심이다. 진심은 곧 무심이다.

 

수부무심 선능각료 제법실상(雖復無心 善能覺了 諸法實相)

비록 다시 무심은 하나 번뇌 망상은 없지만은 제법실상을 잘 알아요.

이게 무심이에요.

중생심은 번뇌 망상으로 꽉 차있는데 제법실상은 몰라요. 요게 다름.

 

구진반야 삼신자재 응용무방(具眞般若 三身自在 應用無妨)

참 반야가 구족해서 법신 보신, 화신이 자재하야 응용에 전혀 방해를 받지 않나니라.

이게 무심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래서 번뇌망상이 하나도 없어지면 무심인데 도와 합하게 됩니다.

‘열심히 해야 되겠다는 것’은 한다는 마음이 아직 남아 있는 거에요.

그 한다는 마음까지 녹아지면 저절로 되는 거에요.

그래서 무심을 專一信心(온전히 하나가 된 신심)이라고 설명합니다.

 

돈오입도는 순일신심, 관심수도는 恒一신심, 무심합도는 全一신심이라고 합니다.

(專一과 全一을 같이 봐도 착오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심이라는게 그런 겁니다.

눈에 뭐가 끼어 있으면 잘 안 보여요. 눈이 맑아지면, 맑은 눈이 라야 잘 보이듯이 마음 안에

아무것도 없어야(아무 것도 없는 맑은 마음으로 봐야) 잘 보이게 됩니다.

여러 가지 보이는 것을 照用이라고 합니다.

 

참, 용어 설명 많이 하네요, 무심은 조용히고 조용은 무심입니다.

이게 도이다. 照는 일체법이 공한 것을 보는 것이고 用을 그것을 마음대로 활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심이 돼야 생사 없는 삶을 멋지게 사는 거에요.

왜냐 일체법의 공함을 보기 때문에. 일체법이 공함을 아니까 걸림 없이 죽기도하고 살기도 하면서

마음대로 쓰는 것이지요. 무심이 되면 비춰서 쓰고 비춰서 쓰데 무심인 것이지요.

예眼(예안)은 제대로 못 보는 눈이고, 정안은 무심이다. 눈이 맑아지면 못 보는 것이 없다. 그게 조용임.

 

무심송

석일미시위유심 이시오파요무심(昔日迷時爲有心 爾時悟罷了無心) 나무아미타불~

수부무심능조용 조용상적즉여여(雖復無心能照用 照用常寂卽如如) 나무아미타불~

옛날에 미혹할 때는 마음이 있었는데, 지금 이때 깨달으니 무심을 알겠네,

비록 무심이나 능히 비추어 쓰고, 비추어 쓰나 항상 고요하니 곧 여여하도다.

 

그래서 ‘照用’이면서 ‘常寂’이요, ‘常寂’이면서 ‘照用’입니다.

상적이 무심이거든요. 항상 고요해요. 그런데, 마음이 여러 가지 껴있고 시끄러우면 중생심이에요.

고요해지면 끝나는 겁니다. 그러면 조용(照用)이 되요.

다 보고 자재해요. 그래서 ‘조용상적’ 이게 무심입니다.

 

임제스님의 법사되는 황벽선사가 계시는데 전심법요란 저술을 남겼습니다.

거기에 보면 但能無心이면 便時(卽時)究竟이란 말이 있습니다.

‘다만 능히 무심할 줄 알면 곧 가장 높은 것이다.’ 無心이면 照用이니까 그렇죠.

그럴러면 내 마음을 챙겨야 돼요. 보고 듣고 느끼는 이것이 뭐냐?

그러면 여기에 입도도 되고 수도도 되고 합도도 되고, 그 마음 하나 챙기는데서 다 되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이것이 뭐냐?”

 

오늘 법문은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_()_

 

甘露法門 信受奉行! 南無觀世音菩薩 _()()()_

출처 : 유가사(불국선원) 히말라야 선요가 수련회
글쓴이 : 워얼저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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