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離苦得樂(이고득락)

수선님 2018. 11. 25. 12:45

離苦得樂(이고득락)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 이고득락(離苦得樂)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고통이라고 하면 그것은 장애다. 무엇이 장애인가? 무엇이 잘 않되는 것이다.

 

 

또 즐거움이라고 하면 복덕이다. 그래서 복이 많으면 장애가 없는 것이다. 장애가 전혀 없으면 무엇을 하든 하는데로 잘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복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복”의 정의는 “장애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뜻대로 다 되는 것, 마음대로 되는 것, 좋은 것이 복이다. 복(福)이란 좋은 것이다.

 

 

눈 밝은 것도 좋은 것이고, 귀 밝은 것도 좋은 것이고, 몸 건강한 것도 좋은 것이고, 오래 사는 것도 좋은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따라주고, 인정하는 것도 좋은 것이고, 하여튼 좋은 것은 전부 복이다.

 

 

그래서 복과 장애에 대해 알아 보았는데, 중국 유교의 5대 경전 중 하나인《서경(書經)》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그 1편에 <홍범(洪範)> 이라고 하는 부분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좋은 복하고, 않 좋은 장애하고 “오복육극(五福六極)”으로 설명해 놓았다.

 

 

복, 다섯 가지로 설명을 하고, 않 좋은 것을 여섯 가지로 설명을 해 놓았는데, 다섯 가지 복을 오복이라고 하고, 여섯 가지 않 좋은 것을 극할 극(極), 극한 상황이라는 극자를 사용하여 육극이라고 하였다.

 

 

왜, 육극이라고 하였는가? 여섯 가지 극히 피해야 할 것, 닿아서는 않되는 극히 피해야 하는 사항이라고 해서 육극이라는 용어를 썼다.

 

 

그러면 오복은 무엇인가? 우리가 다 아는 것이다. 오래 사는 것(壽), 하여튼 오래 살아야 된다. 빨리 죽으면 다른 복을 다 누릴 수가 없다. 그래서 수(壽)가 제일 먼저 들어 간다.

 

 

그 다음에 부(富), 부자로 사는 것이다.

 

 

재물이 없으면 여러 가지로 불편하다. 그 다음에는 건강해야 된다. 강녕(康寧), 돈도 많고, 오래 살아도 매일 몸이 아프면 별로 재미가 없다. 건강하다는 것은 몸에 질병도 없고, 마음에 근심도 없는 것을 강녕(康寧)이라고 말한다.

 

 

그 다음에 호덕(好德), 덕을 좋아한다. 근심도 없고, 질병이 없어도 성격이 악하면 그것은 복이 없는 것이다. 또 너무 유약하면 또 복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안으로는 강하고 밖으로는 부드럽고, 이것을 호덕(好德), 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것을 낙도(樂道), 도를 좋아하는 사람이 호덕(好德)이라고 한다. 도(道)를 알아야 힘(力)이 있어도 강하지 않고, 힘들어도 약하지 않는 덕성(德性)이 있는 것을 네 번째 복(福)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은 고종명(考終命), 자기 마음대로 자기 명(命)대로 사는 것을 복이라고 했다. 고종명(考終命)의 의미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당시 서경(書經)을 기록할 때만 하더라도 최고 오래 사는 사람을 백이십세(一百二十歲)로 보았다.

 

 

그런데 당나라, 조주(趙州)스님같은 분은 백이십세를 살으셨다. 그 당시도 그렇게 살으셨다. 그래서 수명(壽命)으로 고종명(考終命), 명대로 사는 것은 육십세(六十歲)까지는 살아야 [명대로 사는 것] 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다.

 

 

육십세 전에 죽으면 명대로 사는 것에 조금 부족한 것이다. 두 번째 고종명(考終命)은 비명(非命)에 않가는 것, 무슨 사고를 당한다든지, 인위적으로 목숨이 끊어진다든지 하는 것, 화재(火災)를 당한다든지, 수재(水災)를 당한다든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든지, 그것은 전부 고종명(考終命), 명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마지막 수명(壽命)을 순리적으로 마치는 것, 순리에 의해서 마치는 것이다. 연명(延命)치료를 해서 억지로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고종명(考終命)이 아니다. 순리적으로 자기 명을 다하는 것을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한다. 그것을 오복(五福)이라고 했다.

 

 

그러면 육극은 무엇인가? 첫째는 단명하는 것, 흉하게 죽는 것, 빨리 죽으면 그것을 피해야 될 것이 아닌가? 그 다음에 질병(疾病), 몸에 병이 많은 것, 그 다음에 우환(憂患), 마음에 근심이 있는 것, 이것 전부가 않 좋은 것이다.

 

 

명(命) 짧고, 질병이 있고, 근심이 있는 세 가지다. 그 다음 네 번째는 가난한 것, 귀한 것의 반대되는 것이다. 가난하면 너무 힘들다. 그 다음에 도(道)가 없는 것, 도(道)가 없으면 악(惡)해진다. 그래서 악(惡)을 다섯 번째 넣었다. 성격이 고약한 것, 사나운 것, 악(惡)한 것은 도(道)가 없는 것이다.

 

 

악(惡)한 것이 무엇인가? 강(强)이 지나친 것이 악(惡)이다. 도(道)가 있는 사람은 자기가 힘(力)이 있어도 힘을 다른 사람에게 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는 겸손(謙遜)과 덕성(德性)을 베푼다. 그것이 도(道)가 있는 사람이다.

 

 

그 도(道)가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막 힘을 행사해 버린다. 그래서 강(强)이 밖으로 드러나면 악(惡)이 된다. 강(强)이 지나친 것이 악(惡)이다. 강(强)해 버리면 않된다. 약(弱)한 사람에게 강(强)하게 하면 그것은 도(道)가 없는 사람이다. 호덕(好德)이 바로 도(道)다. 그러니까. 도(道)를 가지고 사는 것이 큰 복(福)이다.

 

 

강(强)해도 악(惡)해지지 않는 것, 그것이 도(道)이다. 그런데 강(强)하면 대체로 악(惡)에 빠진다.

 

 

그 다음 여섯 번째는 약(弱)한 것이다. 약(弱)한 것은 부드러움이 지나친 것을 약(弱)이라고 한다. 부드러움은 참 좋은 것이다. 그런데 부드러움이 지나치면 약(弱)해진다.

 

 

그렇다면 약(弱)한 것은 무엇인가? 자강(自强), 스스로는 강(强)해야 하는데, 스스로 강(强)한 중심이 없이 그냥 딸려 가버린다. 세월에 딸려가고, 사람에 딸려가고, 환경에 딸려 가서 자기가 없어져 버린다. 자기가 허약해진다. 이렇게 하자고 하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자고 하면 저렇게 한다.

 

 

부드러운 것은 좋은데, 부드러움이 지나치면 약(弱)해져 버린다. 강(强)한 것은 좋은데 강(强)이 지나치면 악(惡)해져 버린다. 힘(力)이 있고 그렇게 강(强)해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면 그것은 않된다. 다른 사람을 힘(力)으로 눌러 버리는 것, 그것은 않된다. 그것은 도(道)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육극(六極)은 피해야 되고, 오복(五福)은 가져야 된다. 이것이 오복육극(五福六極)이다.

 

 

그런데 우리 불교에서는 부처님께 축원을 할 때, [일일유천상지경(日日有千祥之慶)하고 시시무백해지재(時時無百害之災)하옵소서] 라고 한다. 그 뜻은[하루하루 천 가지 상서로운 경사가 있고, 때때로 백 가지 해로운 재앙이 없도록 하여 주십시오]이다.

 

 

상경(祥慶), 상서(祥瑞)와 경사(慶事), 천상지경(千祥之慶) 그리고 백해지재(百害之災) 두 가지 내용 가운데, 백해지재(百害之災)의 해(害)와 재(災)는 같은 말인데, 재앙이라고 하는 것은 해로운 것이다. 그 다음 천상지경(千祥之慶), 이 말은 천 가지 상서(祥瑞)와 경사(慶事)이다.

 

 

[백 가지 해로운 재앙(百害之災) 가운데 천 가지 상서(祥瑞)와 경사(慶事)는 일일유(日日有) 하루 하루 계속 있고, 백 가지 해로운 재앙(百害之災)은 때때로 시간시간 없어지기를 바라옵니다]라고 축원한다.

 

 

그것은 무엇 말인가 하면, 복(福)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한정이 없다. 오복(五福) 뿐만이 아니라 불교에서는 백복(百福)이라고도 하고, 만복(萬福)이라고도 한다. 또 무량대복(無量大福), 한량없는 대복이라고도 한다.

 

 

숫자로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은 다 복(福)이라고 하는 것이 불교이다. 나쁜 것도 여섯 가지만 피해야 할 정도가 아니라 한량없이 많다. 무량죄과(無量罪過)한량없는 죄과라, 이게 전부가 다 나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천재설소(千災雪消)하고 만복운흥(萬福雲興)하소서] “천 가지 재앙은 눈처럼 녹아지고, 재앙은 해로운 것인데, 해로운 것이 많다. 그래서 해로운 것은 눈처럼 슬슬 녹아서 소멸하고, 만 가지 복은 구름처럼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라고 축원한다.

 

 

그래서 딱 줄이면, [수산고흘(壽山高屹) 복해왕양(福海汪洋)] “수(壽)라고 하는 것을 산(山)에다가 비유를 했다. 수명(壽命)의 산(山)은 높고 높아지고(高屹), 복(福)의 바다(海)는 넓고 넓어서 넘치고 넘치게(汪洋) 해주십시오.”라고 축원한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수복(壽福), 수명(壽命)과 복덕(福德)이다. 그래서 수복(壽福)이라고 한다. 수명(壽命)이 있고 복덕(福德)이 있어야 그게 좋은 것이다.

 

 

그런데 이고득락(離苦得樂), 이런 것이 다 기쁨(樂)인데, 지금까지 이야기한 복(福)들이 기쁨인데, 그것을 복락(福樂), 복에 의한 즐거움이라고 한다. 오래 살고, 재산 많고, 무엇이든지 않되는 것없이 다 잘되고, 즐겁지 않는가? 그것이 복락(福樂)이다.

 

 

그런데 이런 복(福)이 없어서 괴로운 것이 있는데, 복부족고(福不足苦)가 있다. 복이 부족한 고통이 있다. 몸이 아프다든지, 가난하다든지, 성격이 않좋다든지, 성격이 않좋은 것은 도(道)가 없다든지, 무엇이든지 부족한 것이 있다. 이것을 복이 부족한 고통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혜(知慧)가 부족한 고통이 있다. 지혜(知慧)가 부족하면 한없는 고통을 또 격게 된다. 지부족고(知不足苦)가 있는데, 지부족고(知不足苦)고 라고 하는 것은 축원(祝願)할 때 삼장(三障), 세 가지 장애라고 하는 것이 있다.

 

 

첫째가 번뇌장(煩惱障),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여 어리석은 고통을 받는 것, 또 조업장(造業障), 말이나 동작 또는 마음으로 업을 지어 장애를 받는 것, 그 다음에 한없는 고통을 받는 고통장(苦痛障), 악업으로 지옥, 아귀, 축생 따위의 과보(果報)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번뇌장(煩惱障), 조업장(造業障), 고통장(苦痛障)인데, 번뇌(煩惱)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우치(愚癡), 어리석은 것인데, 우치(愚癡)가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치암(癡暗)이라고 해서 어리석으면 깜깜한 어두운 방에 있는 것처럼 무엇을 보지 못한다. 그것을 치암(癡暗)이라고 한다.

 

 

아무리 방에 무엇이 많이 있어도 불이 없어서 깜깜하면 소용이 없다. 그래서 번뇌(煩惱)가 앞을 가려 버리면 못본다. 어리석은 치암(癡暗)이 된다. 또 우치(愚癡)가 끼어들게 되면 무엇이 생기는가 하면 치혹(痴惑)이라고 해서 무엇을 잘못 보게 된다. 혹(惑)해 버린다.

 

 

혹(惑)이 무엇인가 하면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잘못 보게 된다. 그게 혹(惑)이다.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잘못 보게 된다. 그것을 치혹(痴惑)이라고 한다. 그 다음 우치(愚癡)가 끼어들어 어리석어 지면 산란(散亂)해져 버린다. 그게 치란(治亂), 어리석을 치(治)와 어지러울 난(亂)자이다. 이것이 번뇌장(煩惱障)이다.

 

 

불국토의 세계에 중생이 있는데, 번뇌가 앞을 가려 가지고 깜깜하게 못본다. 그게 치암(癡暗)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밖에 좋은 것이 있는 줄 알고 항상 따라 가는데, 그것을 치혹(痴惑)이라고 한다.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무상해서 목표는 없어지고, 죄만 남는다. 그게 치혹(痴惑)이다.

 

 

온갖 것을 생각하고 온갖 것을 매달리니까. 생각이 산란(散亂)해지게 된다. 잠시도 편안하지 않는다. 그게 치란(治亂)이다. 이런 것에 의해서 밤이나 낮이나 생각하는 것이 십악(十惡)을 짓게 되어 있다. 그게 십악(十惡)범부이다. 이런 우치(愚癡), 번뇌(煩惱)가 있기 때문에 번뇌장(煩惱障)이다.

 

 

그 다음, 조업장(造業障)이라고 해서 온갖 업을 짓는다. 지을 조(造)자, 일 업(業)자를 쓴다. 업(業)이 무엇인가 하면, 십악(十惡)이다. 몸으로도 악한 것을 짓고, 말로도 악한 것을 짓고, 생각으로도 악함을 짓는 것이 조업(造業)이다. 십악(十惡)을 지어 놓으면 십악(十惡)의 과보(果保)가 없어지지 않는다.

 

 

아뢰야식(阿羅耶識)에 저장이 된다. 이것이 무몰식(蕪沒識)이다. 다 쌓인다. 이것이 함장식(含藏識)이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악업(惡業)을 지으면 내일 또 무엇이 되고, 다음에 무엇이 되고, 짓는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자꾸 자꾸 바뀐다. 금생에 짓으면 내생으로 받게 되어서 바뀐다.

 

 

이것을 이습(異習)이라고 해서 다르게 형성이 된다. 짓기는 저 멀리 부산에서 지었는데, 태어나기는 서울서 태어난다. 이것을 이숙(理熟)이라고 한다. 부산에서 짓은 것이 부산에서 받는 것만 아니다. 그러면 동숙(同熟), 똑같이 성숙해 가는 것이다. 유식(唯識)의 가르침 중에 [이숙(理熟), 다르게 익는다]이 있다.

 

 

남자로 업을 지었는데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이숙(理熟)이다. 이숙(理熟)이라는 말이 아주 중요한 뜻이 있다. 사람으로 업을 지었는데, 축생이 된다면 이것도 이숙(理熟), 다르게 형성되는 것이다.

 

 

전생에 내가 돼지였는데, 금생에 사람이 되었다면 이것도 이숙(理熟)이다. 지을 때는 돼지로 지었는데, 과보를 받을 때는 사람으로 받았다. 돼지가 되어서 온순하게 살을 찌워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몸을 보호하도록 영양을 많이 제공해 주었다면 과보로 사람도 될 수 있다는 것이 이숙(理熟)의 인연이다.

 

 

이것이 인과의 고통이다. 이런 것이 고통장(苦痛障), 고장(苦障)이다. 그래서 삼장(三障), 번뇌장(煩惱障)과 조업장(造業障) 그리고 고통장(苦痛障)이다. 축원(祝願)할 때, 삼장돈제(三障頓除), “삼장을 일시에 제거해 주십시요“ 라고 한다.

 

 

그리고 오복증숭(五福增嵩), “오복은 많아지고 더욱 높아지게 해주십시오” 라고 축원한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복(福)이 없는 고통도 있지만 어리석은 고통이 이게 진짜 문제다. 어리석은 고통이 비록 문제지만 사실은 복(福)도 다 지혜(智慧)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지혜(智慧)하나 뿐이다. 지혜(智慧) 하나만 이루어지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지혜(智慧)만 있으면 복(福)이 없어도 그 복(福)없는 고통은 별개 아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 있다.

 

 

내가 어디를 가다가 스스로 넘어져 다리가 부러진 경우와 누구에게 몽둥이를 맞아서 다리가 부러진 경우가 있다면 아프기는 비슷하게 아픈데, 괴로움의 차이는 서로 전혀 다르다.

 

 

자기가 스스로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진 경우는 아프기는 아프지만 별로 괴로움은 없다. 고통은 있는데, 고뇌는 없는 것이다. 통증이 오는 것은 고통이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는 고뇌다. 다리를 부러뜨린 사람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픈 것보다 다리를 부러뜨린 사람에 대한 괴심한 마음과 원망이 더 괴로운 것이다. 아픈 것은 뒷전이다.

 

 

그리고 가끔 산불이 나는 경우를 보면, 산불이 나면 집이 많이 전소(全燒)되는데, 화재로 집이 없는 사람은 참 괴롭다. 그런데 산불로 집이 타버린 사람과 어떤 사람이 일부러 방화를 해서 집이 타버린 것과는 전혀 다르다.

 

 

집이 없어진 것은 두 사람의 경우 똑같다. 그런데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산불이 집을 태운 것은 원망할 수도 없고 오로지 집없는 고통 뿐이지만 누가 와서 일부러 집에 불을 질렀다면 보통일이 아니다.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다. 한없는 고뇌가 생기게 된다.

 

 

이렇듯 지혜(智慧)가 있는 사람이 복(福)없는 고통을 받을 때, 스스로 넘어지는 아픔이라든지, 산불에 의해 집을 잃는 괴로움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지혜(智慧)가 없는 상태로 괴로움을 당하면, 누구에게 몽둥이로 얻어 맞는다든지, 방화로 집을 잃는다든지 하는 고통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지혜(智慧)하나만 있으면 복(福)이 없어도 별로 괴로운 것이 없고, 죽는 것도 전혀 무섭지 않고, 무엇이든지 후회가 전혀 없다. 그래서 즐거움 중에는 복락(福樂)보다 지락(智樂)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지혜(智慧)를 도(道)라는 말로도 표현을 해서 도락(道樂)이라는 말로도 표현을 하고

지혜(智慧) 지혜(智)를 법(法)이라는 말로도 표현을 해서 법락(法樂)이라고 한다. 복락(福樂)보다 법락(法樂), 도락(道樂), 지락(智樂) 지혜(智慧)의 즐거움, 그것을 얻어야 죽어도 두렵지 않고 힘들어도 원망스럽지 않다.

 

 

원망스럽지 않고, 두렵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원망과 고통, 그것이 사람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이다. 지혜(智慧)만 있으면 원망, 고통, 이것이 없게 된다. 고통(苦痛)을 당해도 그 밑에는 즐거움이 있다.

 

 

도인(道人)이라고 몸이 않아픈가? 도인(道人)도 죽을 때, [아이고, 죽겠다. 아이고 죽겠다] 고함을 지른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것 보고 실망을 한다. [어떻게 도인(道人)이 저렇게 고함을 지르냐?] 도인(道人)도 아프면 고함을 질러야 한다.

 

 

그런데 그 아픔을 맞이하는 생각은 전혀 다른 것이다. [아이고, 죽겠다. 아이고 죽겠다] 고함 지르는 것만 보고 그 잘못 생각하면 영원히 삐끌어 지는 것이다. 그렇게 다른 것이다. 그토록 아파 죽겠다고 하면서도 그 속에는 즐거움이 있다.

 

 

이것은 땅거죽(표면)을 보면 먼지만 풀풀 날라도 그 속에는 지하수가 흐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막 고함을 지르고 온갖 나쁜 짓을 다해도 도(道)를 얻어서 지혜(智慧)를 이룬 사람은 그 밑에 편안함이 있고, 즐거움이 있다.

 

 

그것을 안락(安樂)이라고 한다. 이 안락(安樂)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智慧)로써 얻는 것이기 때문에 몸이 아파도 그것에 안락(安樂)이 있고, 죽어도 그것에 안락(安樂)이 있고, 밥을 굶어도 그것에 안락(安樂)이 있고, 모든 일에 안락(安樂)이 항상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락(智樂)이다. 그런데 이 지락(智樂)이 또 어떠냐? 다 똑같은 것이 아니고, 여기서도 차이가 있다. 지락(智樂), 법락(法樂)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첫 번째 느낄 수 있는 것이 선정락(禪定樂)이다. 선정(禪定)을 굳게 닦으면 어떤 즐거움이 있는가? 지금까지는 우리가 매일 번뇌(煩惱) 속에서만 살았는데, 번뇌(煩惱)로부터 벗어나는 체험을 할 수가 있다.

 

 

선정(禪定)에 들기 전에는 번뇌(煩惱)로부터 벗어나 본 경험이 없었다. 전혀 없었다.

 

 

예를 들어 선정(禪定)에 들기 전에는 천날(天日), 만날(萬日) 나그네(客) 생활만 했다.

 

 

그래서 한 번도 편안한(安樂) 경험을 못해 보았다. 그런데 선정(禪定) 경험을 하면 그 번뇌(煩惱), 망상(妄想), 근심(根尋), 걱정이 싹 가라 앉으면서 평온함을 얻어지는데, 그것이 선정락(禪定樂)이다. 선정락(禪定樂)이 아주 지락(智樂) 가운데 하나 들어간다.

 

 

그 다음에 열반락(涅槃樂)이다. 천날(天日), 만날(萬日) 중생이 나(生)고 죽(死)고 나(生)고 죽(死)는 이런 생사(生死)만 경험을 했는데, 생사(生死)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그것이 열반락(涅槃樂)인 제일락(第一樂)이다.

 

 

번뇌(煩惱), 생사(生死)만 경험하고 살다가 번뇌(煩惱)없는 즐거움(樂), 번뇌(煩惱)가 가라앉은 기쁨(樂), 선정락(禪定樂) 천날(天日), 만날(萬日) 죽고 살기만을 반복하다가 죽고 삶이 없는 그런 것을 체험한 락(樂)이 열반락(涅槃樂)이다. 고락을 다 떠나버린 무량의 청정무비한 안락이다.

 

 

그리고 성불하기 위해서 보살도(菩薩道)를 닦는 지락(智樂)이 또 있다. 그래서 보살도락(菩薩道樂)인데, 보살도락(菩薩道樂)은 같은 지혜(智慧)를 성불하기 위해서 닦아도 그 지혜(智慧)의 단계가 마음을 딱 내어서 노력해서 닦는 지혜(智慧)가 있고, 그 다음, 마음을 내지 않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닦아지는 지혜(智慧)가 있다.

 

 

화엄경(華嚴經)에서 십지(十地)를 이야기 하였는데, 땅 지(地)자를 쓴다. 그 땅 지(地)자가 전부 지혜(智慧)다. 땅(地)에서 모든 것이 나오듯이 지혜(智慧)에서 온갖 공덕이 나온다. 그래서 땅(地)은 지혜(智慧)라고 한다. 열 가지 지혜(智慧)를 닦는 것이 십지(十地)다.

 

 

그런데 지혜(智慧), 지(智)자를 쓰지 않고 비유로 땅 지(地)자를 써서 십지(十地)라고 한다. 땅(地)이 무슨 열 가지가 있겠나? 그것이 아니고 지혜(智慧)의 열 가지 단계를 말한 것이 십지(十地)다.

 

 

십지(十地)에 보면, 초지(初地)에서 제 칠지(七地)까지는 어떻게 설명 했는가? 하면 유공용지(有功用地), 유, 있을 유(有), 공, 공덕이라는 공(功)자, 작용이라는 용(用)자, 공용(功用)이 있는 지혜(智慧)라고 했다.

 

 

공용(功用)이란, 공덕(功德)을 자꾸 쓴다는 말이다. 공덕(功德)을 자꾸 짓는 작용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공덕(功德)을 자꾸 지어서 스스로 노력해서 닦아가는 지혜(智慧), 그것을 유공용지(有功用地)라고 한다.

 

 

유공용지(有功用地) 단계는 조작(造作)이 있다. 자꾸 만들어진다. 않만들면 않된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닦고 또 닦는다. 그래서 이것을 닦을 수(修), 이룰 성(成)자를 써서 수성(修成)이라고 한다. [닦아서 이루는 것]이라고 이것을 유공용지(有功用地)다.

 

 

그런데 팔지(八地), 구지(九地), 십지(十地) 여기서부터는 무공용지(無功用地)라고 한다. 공용이 없는 지(地), 쉽게 말하면, 공용은 노력인데, 노력 않해도 저절로 닦아지는 지혜(智慧)라고 한다.

 

 

처음 단계는 애를 쓰고 또 애를 쓰고, 애를 써야 되는 단계가 있다. 그렇게 단계가 한 단계 한 단계 높아질수록 지혜(智慧)가 점점, 점점 넓어져서 그 기쁨이라는 것이 한량이 없다.

 

 

그러나 완성된 지혜(智慧)는 아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수분지(隨分地), 분수에 따르는 지혜(智慧)라고 한다. 초지만큼 닦았으면 그 초지만큼 분수(分數)에 따라서 지혜를 얻는다. 그 지혜(智慧)를 얻는 순간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그래서 첫 번째를 환희지(歡喜地)라고 한다. 그것을 유공용지(有功用智)라고 한다. 그렇게 팔지(八地), 부동지(不動地)쯤 올라 가면, 무공용지(無功用地)가 된다.

 

 

왜, 무공용지(無功用地)가 되는가? 초지(初地)에서부터 팔지(八地)까지는 [나를 움직이는 번뇌(煩惱)]가 있었다. 그래서 번뇌(煩惱)와 지혜(智慧)가 있다. 지혜(智慧)가 더 강할 뿐이지, 번뇌(煩惱)는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팔지(八地), 부동지(不動地)에 올라 가면, 번뇌(煩惱)가 나를 움직이지를 못한다. 그래서 이것을 부동지(不動地), [움직일 수 없다]라고 한다. 내가 번뇌(煩惱)에 의해서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부동지(不動地)가 되는 것이다.

 

 

팔지(八地)쯤 올라 가면, 어떤 탐욕(貪慾)도, 어떤 분노(忿怒)도 나를 움직일 수 없다. 탐욕(貪慾)과 분노(忿怒)에 내가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탐욕(貪慾)과 분노(忿怒), 번뇌(煩惱)에 내가 부동(不動)의 경지(境地)가 되니까. 지혜(智慧)를 닦을려고 특별히 애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지혜(智慧)가 닦아지는 것이다.

 

 

그것이 무공용지(無功用地)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비유를 했는가? 하면 초지(初地)에서부터 칠지(七地)까지는 육지에서 물건을 등에다 짊어지고 옮기는 것이고, 팔지(八地)서부터는 바다에 배를 띄우고 그 배에다 짐을 실어서 그냥 바람 따라서 물건이 저절로 슬슬 가는 것에다 비유를 했다.

 

 

이것이 무공용지(無功用地)와 유공용지(有功用智)의 차이다. 이렇게 해서 십지(十地)까지 간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노력은 보살이 자기 분수(分數)에 따라서 닦을 수 있는, 닦아서 무엇이 이루어지는 보살지(菩薩地)의 마지막이다.

 

 

화엄경(華嚴經)에 보면, 십지(十地) 다음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화엄경 약찬게(華嚴經 略纂偈)에 혹시 보시면 [십회향급 십지품(十回向及 十地品), 십회향품 모두 합해 세 개품이 설해지고 여섯째로 욕계정상 타화자재 궁전에서 오직 한품 설해지니 십지품(十地品)이 그것이라]

 

 

그리고 [십정십통 십인품(十定十通 十忍品), 일곱째로 보광법당 설법장소 거듭하여 열 한품이 설해지니 십정십통 십인품과 그 다음, 아승지품 여수량(阿僧祗品 與壽量) 그리고 보살주처 불부사(菩薩住處 佛不思), 보살주처의 부사의한 법, 그 다음, 여래십신 상해품(如來十身 相海品)과 또, 여래수호 공덕품(如來隨好 功德品)과 보현행급 여래출(普賢行及 如來出) 이와 같은 품이로세. 이세간품 입법계(離世間品 入法界), 팔회, 구회 법회로서, 보광법당 서다림서 차례차례 설해지니] 이렇게 나온다.

 

 

이 부분이 여래지(如來地)다. 여기서는 수분지(隨分地)가 아니다.

 

 

구경각(究竟覺), 구경지(究竟地)를 말하는 것인데, 지혜(智慧)의 구경각(究竟覺)을 얻어서 구경지(究竟地)를 이룬 지혜(智慧)가 여기 화엄경(華嚴經) 십지(十地) 다음에 나오는 십이품(十二品)이다.

 

 

십이품(十二品)이 있는데, 십일품(十一品)은 칠처구회(七處九會) 화엄경(華嚴經) 설법 중에 몇 번째 설법한 것인지 알고 있는가? 일곱 번째 칠회(七會), 보광명전(普光明殿)에서 설했다.  

 

 

여덟 번째, 이세간품(離世間品) 한 품이다. 일은 십지품(十地品)이고, 다음에 십일은 그게 십일품(十一品)이고, 그 다음에 일, 그것이 여덟 번째 이세간품(離世間品)이고, 그 다음에 역부일(亦復一), 마지막에 입법계(入法界)이다.

 

 

일곱 번째 법회에서 십일품을 설하셨는데, 그것이 전부(全部)가 부처님의 가장 높은 지혜(智慧), 구경각(究竟覺), 구경지(究竟智) 그 지혜(智慧)를 설명한 것이다.

 

 

여기는 단계(段階)가 전혀 없다. 그래서 거기서 보면, 십정품(十定品)과 십통품(十通品), 십인품(十忍品), 아승지품(阿僧祗品)과 여래 수량품(如來 壽量品), 보살 주처품(菩薩 住處品)의 육품(六品)을 등각(等覺)이라 한다.

 

 

등각(等覺)이라고 하는 것은 묘각(妙覺)이 최고의 구경각(究竟覺)인데, 묘각(妙覺)하고 같은 깨달음이라고 해서 등각(等覺)이다.

 

 

그 다음의 다섯품, 불 부사의품(佛 不思, 여래십신 상해품과 여래수호광명 공덕품, 보현 행원품과 그 다음에는 무엇일까? 여래 출현품(如來 出現品)이 역시 그게 구경각(究竟覺), 묘각(妙覺)이고, 입법계품(入法界品) 역시 묘각(妙覺)의 세계이고, 그 품을 달리 해서 설명을 했다.

 

 

그 단계가 없이 어떻게 가능한가? 지혜(智慧)를 항상 펼 뿐이다. 이것을 무구지(無垢地)라고 한다. 때 구(垢)자를 쓰는데, [때는 곧 번뇌(煩惱)]를 말한다. 무구지(無垢地), 번뇌(煩惱)없는 지(地), 구경각(究竟覺)에 올라가면 번뇌(煩惱)는 전혀 없다.

 

 

등각(等覺)까지만 올라가도 번뇌(煩惱)는 없다. 그래서 십정품(十定品)과 십통품(十通品), 십인품(十忍品)만 올라 가면 번뇌(煩惱)는 없다. 그게 전부 지혜(智慧)다. 여기서 십정품(十定品)을 쭉 읽어 보면, 화엄경(華嚴經)은 전부 지혜(智慧)다.

 

 

십통품(十通品)도 지혜(智慧)고, 십인품(十忍品)은 참는다는 인(忍)자를 쓰는데, [忍은 認에 통한다]고 해서 지(智)라고 한다.

 

 

참는 것이 무엇인가? 지혜(智慧)다. 그래서 십지(十地)의 지혜(智慧)가 있고, 십인품(十忍品)의 지혜(智慧)가 있는데, 십지(十地)의 지혜(智慧)는 보살이 단계별로 닦아 올라 가는 수분지(隨分地)고, 십인품(十忍品)의 지혜(智慧)는 구경각(究竟覺), 여래지(如來地)다. 그게 화엄경(華嚴經)이다.

 

 

그래서 구경각(究竟覺), 여래지(如來地)에 올라 가면, 그냥 지혜(智慧)를 베풀 뿐이다. 단계는 없다. 지혜(智慧)하나 뿐이다. 중생은 뭐니 뭐니 해도 지혜(智慧)하나 모자라는 것, 그것이 중생이다. 지혜(智慧)만 하나 있으면 생사(生死),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지혜(智慧)만 하나 있으면 복(福)없는 것, 괴로운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지혜(智慧)하나 없어 가지고 그 야단이다. 그래서 불(佛)도 지혜(智慧)고, 지혜(智慧)없는 부처님은 없다.

 

 

그러면 그 부처가 무슨 부처인가? 대방광불(大方廣佛)인데, 대(大)도 지혜(智慧)고, 방(方)도 지혜(智慧)고, 광(廣)도 지혜(智慧)고, 화엄(華嚴)도 화엄(華嚴)하는 것이 지혜(智慧)고, 경(經)도 지혜(智慧)고, 지혜(智慧)하나 뿐이다.

 

 

그래서 지락(智樂)을 닦아야 한다. 지혜(智慧)의 즐거움을 닦아야 한다. 복락(福樂)이라고 하는 것은 무상하고 허망해서 건강하다가도 언제 탈이 날지 모른다.

 

 

아주 후회를 많이 하는데, 북한산을 연거푸 세 번을 올라 갔더니, 몸이 부어서 탈이 났다. [몸이 예전 같지 않구나] 현재의 몸은 생각하지 못하고, 올라가니 재미가 있어서 또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했더니, 그냥 탈이 났다. 몸이 정상이 아니다.

 

 

마음이 턱 밝아지면, 감기 좀 들면 어떤가? 지혜(智慧)만 하나 있으면 다리 아픈 것, 감기 든 것, 죽는 것, 몸 아픈 것, 아무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그것을 구족안락(具足安樂)이라고 한다. 지혜(智慧)로써 얻어진 지락(智樂), 안락(安樂)인데, 구족(具足)한 안락(安樂)이다.

 

 

부처님의 그 즐거움을 각지락(覺地樂)이라고 한다. 각지락(覺地樂)은 구경각(究竟覺) 지혜(智慧)의 깨달음이다. 그 각지락(覺地樂)이 부처님의 락(樂)인데, 부처님의 낙(樂)은 구족(具足)한 안락(安樂)이다.

 

 

구족(具足)한 안락(安樂)이 되면, 불(火) 속에 들어가도 안락(安樂)하고, 물(水) 속에 들어가도 안락(安樂)하다.

 

 

그리고 태어나도(生) 안락(安樂)하고, 죽어도(死) 안락(安樂)해서 안락(安樂) 밖에 없다.

 

 

그래서 구족안락(具足安樂)이라고 한다. 또 무상법락(無常法樂), 무상(無常)은 더 이상 높은 것이 없는 것이고, 법락(法樂)은 그 지혜(智慧)에서 느끼는 즐거움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고득락(離苦得樂),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 것인데, 고통 중에는 복(福)이 부족해서 얻는 고통도 있고, 지혜(智慧)가 부족해서 얻는 고통도 있는데, 복(福)이 부족해서 얻는 고통은 건강도 조심하고, 물질적으로도 노력하고 그러면 얻을 수가 있다. 그런데 복락(福樂)은 그것이 영원할 수가 없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통 중에는 지혜(智慧)가 모자라서 얻는 고통이 복(福)이 부족해서 얻는 고통보다 몇 천만배, 억만배가 더 많다. 그 어리석어서 격는 고통이 전부다. 그래서 지혜를 닦고 지락(智樂)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중생은 복락(福樂)만 복락(福樂)만 탐하다가 거기서 고통을 또 얻는다. [산에 올라가면 좋다] 라고 하니까. 몸 생각은 않하고 그냥 어디까지 올라간다고 올라가다 다리 다치고 사고가 난다. 복(福) 탐하다가 고(苦)를 받는다. 이게 어리석은 것이다.

 

 

복(福) 탐(貪)하다가 고통(苦痛)받고 복(福) 탐(貪)하다가 고통(苦痛) 받는다. 그러니까. 자꾸 기도(祈禱)하고 경전을 읽고 마음을 닦아서 지혜(智慧)를 얻어야 거기서 지락(智樂)을 얻는데, 지락(智樂)은 한 번 얻으면 끝이 없는 즐거움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것을 비유로 게송을 하나 지은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등아(燈蛾), 불나방을 등아라고 한다. 등불만 등불만 쫒아다니는 것이 불나방이다.

 

 

이 불나방 나비가 견화(見火), 불을 보고 불인 줄을 알지 못한다. 불나방이라고 하는 것은 불을 보고 그 불이 뜨거운 줄 모른다. 그저 환하고 밝은 줄만 안다.

 

 

그래서 우리 중생이 좋은 것만 알고 무상(無常)한 것은 모른다. 좋은 것을 찾아가다가 무상해서 몸이 먼저 죽고, 좋은 것을 찾아 가다가 좋은 것을 얻기도 전에 몸이 먼저 죽고 하는 이런 노릇을 한다. 그게 어리석은 중생이다.

 

 

그래서 등아(燈蛾), 불나방이 견화(見火)하니 부지화(不知火)라. 불을 보고 불을 알지 못한다. 그 다음 어떻게 되는가? 비비투화(飛飛投火), 날으고 날아서 불에다가 몸을 던져 버린다. 그러다가 실상명(悉傷命), 목숨을 잃어 버린다.

 

 

목숨을 상실해 버린다. 불나방이 살아가는 모습이 꼭 우리 중생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무상(無常)한데다가 생명을 걸어 가지고 빠지고 빠진다.

 

 

그 다음 또 비유인데, “담저영상임의견(潭低影像任意見)이나 막입수중전신몰(莫入水中全身沒)이니라.”

 

 

“연못 밑에 있는 그림자, 그것은 자기 그림자다. 자기 스스로 연못 속에 가서 그림자를 보면, 연못 속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연못을 들여다 보면, 그림자가 보인다. 그것이 자기 그림자다. 그러니까.

 

 

연못 속에 비친 자기 그림자는 마음대로 본다. 그러나 한 가지 조심해야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마음대로 그림자를 볼 수 있으나 그 물 속에 들어가서 온몸을 빠지게 하지는 말아라.”

 

 

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은 못보고, 자기가 그 연못 속에 있는 줄 알고 연못 속으로 자기를 찾으려 들어간다.

 

 

연못 속으로 자기를 찾으려 들어 가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는 없고, 물만 있다. 그래서 물에 빠져 죽게 된다. 결국, 행복은 나의 지혜에 있는데, 이것은 버리고 다른 곳으로 자꾸 가니까. 행복은 없고, 고통만 안고 돌아 오게 된다.

 

 

왜냐하면, 무엇을 얻어봐도 무상하니까. 얻어보면 무상해서 없어져 버린다. 그래서 결과는 없어지고 고통만 남게 된다. 이것이 중생이다.

 

 

그러니까. 인생여조로(人生如朝露),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으니, 근수보리행(勤修菩堤行), 부직런히 닦아라. 라고 하였다.

 

 

무엇을 부지런히 닦는가? 보리행(菩堤行), 깨닫는 행, 지혜를 닦는 행, 보리행을 부지런히 닦을 지니라. 이런 법문이 있다. 성불하십시오.

 

 

- 종범스님 -

 

 

 

 

 

 

 

 

 

 

 

수보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haha723/14000410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