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의 세계와 사이버 세계의 구조 비교
조윤호 :
전남대학교 철학과 및 일본 東京大學 대학원 석, 박사과정 졸업. 문학박사. 현재 전남대 철학연구교육센터 전임연구원. 논문으로 <종밀을 통해서 본 중국전통사상과 불교의 만남><원각경 해명을 위한 시각-경전성립사적 관점에서> 등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현대과학의 비약적인 발달로 인하여 전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 세계에서는 일상적 의미의 시공은 초월되어, 개개의 사물과 사건들은 서로 아무런 걸림 없이 교차하여 드나들며, 진실의 세계와 가상 세계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매트릭스〉라는 영화는 이러한 세계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세계에서 전개되는 일들은 《화엄경》이나 화엄사상가들에 의해 묘사되는 세계에서나 가능함직한 현상들과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화엄의 세계와 사이버 세계는 과연 같은가 또는 비교 가능한가를 문제삼을 수 있다. 두 세계가 같다면 어떤 의미에서 같으며, 다르다면 무엇이 다른가? 화엄의 법계는 경전에서 빠져 나와 사이버 공간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현대과학에 의한 사이버 세계의 구현은 불교적 세계관의 과학성과 진리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일까?
이 문제를 추적함에 있어 먼저 화엄의 세계관과 사이버 세계의 특징들을 밝히고, 나아가 두 세계를 비교하도록 한다. 이 작업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사이버 공간에서 전개되는 현상들에 대한 불교적 이해방식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며, 아울러 화엄불교의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명확히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1) 화엄불교의 세계관
화엄불교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세계’라는 개념과 의미상 가장 가까운 개념은 ‘법계(法界)’라는 용어이다. 따라서 화엄불교에서 세계에 대한 논의는 엄밀히 말하면 ‘법계론’이다.
법계론은 징관(澄觀, 738∼840)의 4법계설로 대변된다. 징관이 말하는 ‘법계’는 표면적으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의미의 ‘세계’와 거의 같은 뜻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법계’는 진여(眞如)의 의미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현상적 세계’와 구별된다. 세계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의 이법(理法)으로서의 진여에 의해 존재한다. 따라서 법계는 ‘진여·진리 그 자체의 현현으로서 현실의 세계’를 의미하며, 현상으로서의 세계뿐만 아니라 그 근거인 본질적 측면을 동시에 지시하고 있다. 이것이 법계의 의미이며 화엄불교의 세계관이다. 화엄불교에서 파악한 세계 즉 법계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묘사될 수 있을까? 법계의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① 연기로서의 법계
모든 존재와 현상이 진여에 의한 것이라 할 때 진여는 법(dharma)을 의미한다. 법의 구체적 내용은 무한한 관계맺음, 다시 말해 연기(緣起)이다. 법계의 본래 모습(實相)은 연기이며, 세계를 진여연기(眞如緣起)라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진여연기는 또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도 일컬어진다.법계연기는 화엄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의 궁극적 모습을 의미하며, 진리 그 자체의 현현으로서 모든 사물(事物)·사상(事象)이 서로 상대의 조건(緣)이 되어 걸림이 없고 끝이 없이 교류·융합하여 드러나 있음(起)을 의미한다.
② 중중무진(重重無盡), 무장애(無障碍)로서의 법계
법계는 중중무진법계, 무장애법계 등으로도 불린다. 중중무진법계란 모든 것이 서로 상대의 조건이 되어 교류·융합하는 세계의 모습이다. 이때의 교류와 융합은 일회적·단선적이 아니라 무한히 중층적인 세계의 모습을 의미한다. 하나의 사물·사태를 들어 그것의 인과적·논리적 관계를 추적해가다 보면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이 직간접적으로 그 사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장애법계란 모든 것이 서로 교류·융합함에 있어 아무런 걸림이 없이 자재(自在)함에 주목한 세계의 설명이다화엄경》은 모든 개체의 존재방식으로서 상호작용의 무한성을 인드라의 그물망(Indra-ja?a, 帝釋網)으로 비유한다. 인드라의 그물망은 하나 하나의 매듭에 보석이 달려 있어 그것들이 서로를 비춘다. 보석들이 이렇게 서로를 비추는 관계는 쌍방향적이며 무한히 반복되며 끝이 없다.
이러한 모습을 원융무애(圓融無碍)라고도 한다. 이같은 세계 이해 방식의 근저에는 모든 것이 그 어떤 실체성·고정성도 갖고 있지 않다는 공(空)·무자성(無自性)의 사상이 놓여 있다.
③ 상즉상입(相卽相入)으로서의 법계
법계의 속성을 화엄불교는 종종 상즉상입(相卽相入)으로 표현한다. 상즉상입이란 체용의 관점에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상즉은 본체(體)의 관점에서, 상입은 작용(用)의 관점에서 모든 현상이 밀접한 관계에상즉이란 특수와 보편은 대립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전제로 하고 의지하여 동시적으로 성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둘은 본체의 측면에서 서로(相) 떨어질 수 없는 일체화된(卽)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자연수 1이 없으면 2, 3 등 모든 자연수도 있을 수 없으며, 2, 3 등이 상정되지 않고 1이 성립할 수 없다. 또 2, 3 등의 수가 있으면 거기에는 반드시 1이라는 수가 전제되어 있으며, 1이 있으면 반드시 2, 3 등의 수도 이미 상정되고 있다. 그 어떤 자연수도 홀로 성립하여 의미를 가질 수 없으며 모든 자연수 각각에는 자신 이외의 모든 자연수가 이미 동시적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손바닥이 없는 손등, 손등이 없는 손바닥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상입이란 사물·사상의 작용(用)과 관련된다. 어떤 것이 어떤 작용성을 갖는가는 그것을 구성하는 조건(緣)들의 역학관계에 전적으로 좌우된다. 한 조건(一)이 힘을 가지면 다른 것들(多)은 힘을 잃고 그것에 포용되어 들어가(入) 그 조건에 따라 작용성이 결정된다. 거꾸로 다른 조건들이 힘을 가지면 일(一)은 힘을 잃고 다(多)에 녹아 들어간다. 자연수의 경우 1을 중심으로 보면 다른 수들은 모두 1에 포용되며, 거꾸로 2, 3 등의 수를 중심으로 보면 1은 이들에 포용된다.
한편 상즉과 상입, 체와 용의 관계를 보면, 상즉이 존재론적 구조의 측면이라 한다면, 상입은 존재의 현상적 전개·작용의 측면과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체와 용 양자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원래 하나이다. 따라서 (용은 체의 용이라고 보아) 체를 중심으로 하면 상즉만 있고, (체는 용의 체라고 보아) 용을 중심으로 하면 상입만이 있게 된다.
④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로서의 법계
사물들이 막힘 없이 서로 교차하며 존재한다는 상즉상입의 논리는 일(一)과 다(多)의 관계로 비유되며, 그 상호관계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로 정형화된다. 있음을 지시한다. 십현문(十玄門)으로 말하면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이 상즉에,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이 상입에 해당한다.
보편과 특수의 관계에서 양자는 상호의존적이면서 동시적인 존재성과 작용성을 갖지만, 둘 사이에는 드러나는 것(主)과 숨는 것(客)의 관계가 성립한다. 다시 말해 다의 관점에서 보면 일은 자신의 존재성과 작용성을 상실하고 다에 일체화(卽)한다. 이것이 일즉다이다. 거꾸로 일을 문제 삼으면 다는 자신의 존재성과 작용성을 상실하고 일에 일체화(卽)한다. 이것이 다즉일이다.
바다는 오징어, 꼴뚜기, 조개, 모래, 소금 등 다양한 생물·무생물로 구성되어 있다. 오징어 꼴뚜기 등(多)에 주목할 경우 바닷물(一)은 스스로를 숨기고 다른 존재자들에 일체화(卽)된다. 거꾸로 바닷물에 주목할 경우 바다의 모든 존재들은 스스로를 감추고 바닷물에 일체화(卽)된다. 인드라의 그물망에서 어떤 하나의 보석(一)에 주목하면 모두(多)가 거기에 들어와 있다. 동시에 다른 것들(多)에 주목하면 처음의 보석(一)은 모두에 들어가 있다.
⑤ 주반구족(主伴具足)으로서의 법계
보편과 특수의 상호관계는 주반구족의 논리로 설명되기도 한다.8) 주반구족이란 하나의 사물·사태에는 주와 반, 즉 주개념과 종개념, 중심성과 변방성이 동시에 갖추어져 있음을 말한다. 모든 것은 주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반이 될 수 있다. 주와 반의 위치는 언제나 유동적이며 상대적이다.
2) 사이버 세계
‘사이버(cyber)’라는 말은 ‘컴퓨터로 자동제어되는’ ‘인공두뇌화된’ ‘컴퓨터와 관련된’이라고 풀이된다.9) 이 말은 인공두뇌 연구 또는 자동제어 체계의 과학을 의미하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에서 따온 것으로 컴퓨터를 활용한 제어체계 일반을 지칭하는 용어로 널리 쓰이고 있다.
한편 ‘사이버 세계(cyber world)’ ‘가상세계(virtual world)’라는 개념은 엄밀하게는 공간으로서의 의미와 그 공간에서 전개되는 대상 및 사건을 동시에 지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공간으로서의 의미란 통신기술, 전자공학 등 현대과학의 복합적인 기술에 의해 확보된 네트워크상의 특수한 장소를 말한다. 대상 및 사건으로서의 의미란 정보의 전자화 기술과 전자정보를 처리하기 위한 소프트웨어 기술을 바탕으로 전자공간 안에서 창조된 유의미한 상황을 말한다.
사이버 공간에 정보원소 비트(bit)가 머물며, 정보원소는 이 공간에서 상호작용에 의해 어떤 이미지와 소리, 언어 등을 만들어낸다. 컴퓨터 네트워크라는 광범위한 전자망의 사이버 공간에서 디지털 신호를 조작하여 유사현실 또는 가상현실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를 통한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사이버 세계라는 개념을 가상공간 자체와 그 안에서 전개되어 의미를 갖는 대상 및 사건들 전체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사이버 세계는 그 성립과 현실적 의의에 있어 다음의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① 가상성
사이버 공간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사물들은 관념화된 세계에 시각적 요소만을 가미해 눈으로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관념을 디지털화하여 영상화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물들은 사이버 공간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실재성 여부와는 관계없다. 또 반드시 현실적으로 존재해야 할 필요성도 없다. 이러한 점에서 사이버 세계는 가상현실 또는 유사현실이라고도 불린다.이 세계의 정체에 대해 하임은 철학적 관점에서 사이버 공간을 현대화된 플라톤주의로 이해한다.
사이버 공간을 차지하는 대상들은 플라톤적인 상상의 구성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 사이버 공간 속의 정보(inFORMation: 형상화하기)가 플라톤이 말한 형상(FORM)들의 아름다움을 계승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는 가상현실이란 “형상적으로 인지되거나 허용되지는 않지만 본질적으로 효력을 미치는 실제적인 사건이나 일의 상태를 의미한다.라고 정의한다.
사이버 공간에서 전개되는 대상과 사건의 실체는 0과 1이라는 이진수로 구성되는 디지털 신호이다. 우리가 사이버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시각과 청각을 중심으로 한 디지털 감각의 세계로 들어가 디지털 신호로 조작된 이미지와 소리의 세계에 참여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이버 세계는 참이 아닌 가상인 것이다.
② 시공간적 무제약성
사이버 네트워크상에서 구현된 세계에서는 빛의 속도로 이동하거나, 늙은이가 젊어지고 죽은 자가 살아나기도 한다. 유사현실 속의 움직임은 참 현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유사현실 안에서는 지구상의 물질적인 제약, 즉 중력과 같은 제약이 없으므로 마음대로 날아가거나 벽을 통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가능한 것은 디지털 정보의 특성이 시간과 공간의 구체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유클리드의 기하학적 공간 개념이 아니며, 따라서 전통적 의미의 공간 개념은 여기서는 무너진다. 현실세계에서 시간이 갖는 과거, 현재, 미래, 느림과 빠름 등의 고유한 성격은 의미를 잃는다. 이 공간에서 구성·전개되는 대상과 상황은 현실세계에 바탕하여 그것을 모방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정보원소들의 성격과 상호관계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③ 자아 정체성의 변화
전통적으로 인간의 개체성과 정체성은 3차원적 절대시간과 절대공간 안에서 인식된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이 무너지고 또 인간은 새로운 차원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존재하고 활동하게 됨으로써 개체성과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구되기에 이르렀다.
주체와 사이버 공간에서의 대행자 사이에서 정체성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된다. 아바타(avatar)는 원래 화신을 의미하는 힌두어로, 최근 사이버 공간상에서 컴퓨터 사용자의 역할을 대신한다. 거꾸로 아바타에게 일어나는 일이 사용자의 감각기관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하이퍼텍스트의 양방향성 때문에 감각정보의 흐름이 양방향으로 흘러, 주체는 아바타를 감각의 근원으로까지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을 나타내는 전자영상을 자신의 일부로 여기며, 그 영상에 무슨 일이 발생하면 똑같이 반응한다고 한다. 여기서 자연과 인공, 현실과 가상, 주체와 객체라는 전통적 구분은 설득력을 잃는다. 관념과 실체간의 구분이 모호해져 두 세계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두 세계의 경계가 무너진다. 나아가 인간과 기계의 유기적 관계는 더욱 긴밀해져 인간의 기계화와 기계의 인간화가 급속도로 진전된다. 인간은 자신을 기계와 동일시함으로서 정체성의 혼돈을 겪게 되는 것이다.
④ 평등과 자유
사이버 세계에서는 기본적으로 성별, 나이, 빈부, 인종, 국적 등 현실세계의 조건들이 모두 불문에 붙여져 대등한 관계로 참여하며, 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간섭도 배제하고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다. 사이버 시대에는 정보의 독점 내지 편중에 의해 새로운 불평등이 심화되기도 하나, 사이버 공간에서는 과거사회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평등과 자유의 영역이 확대되었다. 사이버 세계에의 접근성의 용이성 역시 평등의 조건으로 작용한다.
⑤ 상호관계성
사이버 공간은 관계의 망이다. 사이버 세계에서의 정보는 서로의 관계맺음에 의해 발생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바꾼다. 이런 의미에서 사이버 세계는 참여자들의 상호관계에 의해 형성된다. 이때 세계에서의 서로의 관계맺음은 쌍방향성과 중층성을 특징으로 한다. 네트워크 사회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의 정보지식사회에 있어 지식의 성격에 대해 박승원은 “진정한 의미의 지식은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인식과 이해를 망라하여 연결한 체계를 중요시한 개념, 다시 말해서 인간 상호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총체적인 가치를 의미한다.”14)라고 한다.
정보지식사회에서 지식의 형성과 존재가치에 있어 상호관계성은 더욱더 강조되고 있는 것이며, 지식은 “무궁한 수의 ‘파트너링과 네트워킹’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화엄의 세계관과 사이버 세계를 중심으로 한 현대사회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길희성은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놀랍게도 화엄의 세계관은 지구촌화되어 가는 현대세계의 인류 공동체에서도 특이한 방식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정보산업에서 일고 있는 엄청난 과학기술의 혁신은 개인이나 집단들로 하여금 공간의 제약과 사회, 문화적 장벽을 넘어서서 상호 막힘 없는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인터넷 시스템을 통해 세계의 모든 네티즌들에게 열린 정보 공간은 화엄적 세계가 인간 사회에서도 그대로 현실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 정보 공간에 들어가는 사람은 모두 서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누구에게나 열린 존재가 된다. 마치 저 유명한 인다라망의 구슬들이 중중무진 서로를 반영하고 있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분명 흥미 있는 지적이다. 다만 현재 사이버 세계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상들은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화엄의 세계관과 일치하기도 하며, 또 다르기도 하다.
① 절대적 시공 관념의 초월
절대적 시공 관념의 초월은 실체론적 세계관을 전제로 하고서는 불가능하다. 사이버 공간에서 구성·전개되는 대상과 상황들은 고정적 성질을 갖지 않으며, 존재론적으로 형이상학적 실체의 범주를 이미 벗어나 있다. 사이버 세계는 물리적 법칙에 지배되는 실재세계의 일부이며 일시적·인공적으로 조작된 세계, 모방의 세계이기는 하지만, 절대적 시공 관념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화엄의 법계와 유사하다. 시공간적 제약을 벗어난 순간이동이나 역이동은 화엄의 상즉상입·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의 세계관과 다르지 않다. 화엄의 세계관이 공·무자성의 이념에 근거한 것이라 할 때 사이버 세계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이념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이버 세계는 실체성의 탈피를 시도한다. 본래 아무런 고정적 실체가 허용되지 않는 세계로서의 화엄법계의 한 존재이면서도 모든 것을 끝내 실체적으로 인식하고야마는 우리에게 사이버 세계에의 몰입은 세계의 실체적 인식을 벗어나 법계의 참모습을 체험하려는 우리의 가련한 시도인가?
② 상호관계성과 실체부정
사이버 세계는 각자(覺者)가 본 세계를 부분적으로나마 시각, 청각 등의 감각기관을 통해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할 수 있다. 사이버 세계는 실체성이 전제되지 않는 세계라는 점에서는 화엄의 세계 인식과 유사하며 각자의 세계 인식에 근접하고 있다. 사이버 세계가 항상 실체 관념에 얽매여 있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사유방식에서 탈피했다는 점에서 그 세계는 일종의 무자성(無自性)의 연기적 세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사이버 세계에 참여하는 사람은 불교적 의미에서 무자성성을 인식하거나 체현하고 있다기보다는 일시적으로 실체성을 무시하고 있을 뿐이다. 실체론적 세계관의 기반을 이루는 법칙과 무관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가 무자성의 세계를 주체적으로 성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화엄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그의 세계 인식과 삶은 전도된 채로 남아 있다.
이러한 세계 인식은 일상적 삶 속에서도 가능하다. 우리는 연기적 세계 인식이 아니라도 종종 꿈이나 공상 속에서 이러한 세계를 구현해왔다. 사이버 세계는 단지 그것을 과학기술에 의해 시각적, 청각적으로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사이버 세계 참여자들은 약간 다른 방식으로 꿈을 꾸고 공상을 체험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반면 화엄의 세계관은 철저한 무자성의 인식과 체현 및 스스로의 전인격적 전환을 전제한다. 이러한 인격적 전환이야말로 현실세계뿐 아니라 사이버 세계에서도 요구된다는 것이 화엄불교의 주장이다.
③ 자아 정체성
사이버라는 새로운 세계의 등장으로 우리는 지식을 흡수하고 표출하는 방식이 달라졌고 우리 자신은 물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큰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관념과 실체, 주체와 객체,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야기된 것도 주된 특징이다. 사이버 공간의 대상과 사건들은 기본적으로 그 구성요소인 정보원소들의 성격과 그것들의 상호관계성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 대상과 사건들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화엄불교의 세계관에서 보면 한 개체의 정체성은 상호관계성 속에서 발생하고 그 속에서만 고유한 의미를 갖는다. 인드라의 그물망에서 하나의 보석은 결코 그물망을 이룰 수 없다. 하나의 보석은 자신이 투사한 영상을 스스로 확인할 수 없다. 다른 보석의 존재를 통해 비로소 망을 이룰 수 있으며, 자신의 존재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사이버 세계의 등장에 의해 제기된 상호관계성을 내용으로 하는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은 화엄의 세계관에서는 너무도 친숙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④ 쌍방향성과 반복성
사이버 세계에서의 정체성이 고립적이 아닌 상호관계에서 형성된 것이라 할 때, 그 상호관계성은 쌍방향성과 반복성을 내용으로 한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정보전달은 쌍방향의 소통을 특징으로 하며, 무한히 반복적인 구성, 복제, 전달, 경험 등이 가능하다. 이러한 사이버 세계의 성격은 화엄의 세계관과 근접한다.
화엄불교에서 인드라의 그물망은 모든 개체가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 의존하며 존재함을 비유한다. 그물망의 보석들은 서로에게 영상을 투사하여 비춘다. 이때 반영(反映)의 관계는 쌍방향적이며 무한히 반복되어 끝이 없다. 이러한 점에서 사이버 세계야말로 이러한 상호의존적 세계의 존재 방식에 기초하는 것이다.
⑤ 평등과 자유
사이버 세계는 닫힌 공간이 아니다. 사이버 세계에서 개인과 전체의 관계를 박승원은 “한 개인은 네트워크의 어느 곳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이를 통해 모든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또한 전부이다.”라고 한다. 사이버 공간은 일종의 열린 구조인 것이다.
한편 화엄불교에서는 사물들간의 현상적 차별성을 넘어선 궁극적 차별성이나 절대적 배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공(空)의 원리이며 중중무진의 연기적 세계관이다. 따라서 세계는 대립적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며 조화적이다. 모든 것은 각각의 존재의미와 권리를 갖는다. 화엄불교의 주반(主伴)의 논리는 이를 잘 말해준다. 모든 것은 주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반이 될 수 있다. 주와 반의 위치는 언제나 유동적이며,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이 동등한 의미와 권리를 갖는다. 인드라의 그물망 역시 ‘열림’을 본성으로 하는 평등과 자유의 세계이다. 누군가 자신의 존재성과 권리의 절대성을 주장할 때 그 조화는 깨지고 대립과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⑥ 가상과 실재의 역설
우리에게 실재란 무엇이고 가상이란 무엇일까. 문제는 그리 간단치가 않은 듯하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별다른 전제 없이 삶의 현실세계가 실재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다. 이 경우 사이버 세계는 가상이 되며, 화엄의 법계도 가상이 된다.
한편 화엄법계의 세계관에서 보았을 때 범부중생에게 인식된 세계의 모습은 전도된 것이다. 즉 우리가 별다른 전제 없이 실재세계로 동의했던 삶의 현실세계조차 가상이 되는 것이며, 그러한 전도된 세계 인식에 근거하여 인위적으로 구성된 사이버 세계 역시 가상이다. 오직 화엄의 법계만이 진실이다. 그렇다면 진정 우리에게 가상과 실재는 무엇일까?
사이버 세계는 인위적으로 조작된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의 사사무애(事事無碍)는 일시적으로 그렇게 보이도록 조작된 것에 불과하며, 조건과 환경의 조작 및 감각기관의 ‘착각’에 바탕한 것이다. 이 세계는 현실세계에서의 존재 여부와 전혀 무관한 것이다. 사이버 공간을 채우는 내용들의 실체는 0과 1로 기호화된 정보원소의 나열에 불과하며, 영화 〈매트릭스〉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그 세계에서 빠져 나와서 보면 그것들은 단지 디지털 코드로 이루어진 프로그램과 그 흐름으로 인식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이버 세계는 가상이며, 허상이다.
법계는 비록 중생에게는 신비한 환상적 세계로 보일지 모르나, 이것이야말로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實相)이다. 법계는 우리의 세계 인식과 삶의 전도된 모습을 지적한다. 법계는 ‘착각’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며, 깨달은 자의 눈에 비친 세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엄의 법계는 실재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화엄의 법계보다 사이버 세계가 훨씬 더 실재적인 세계로 경험되기 때문이다. 사이버 세계는 단순한 가상이 아니다. 우리는 물리적 신체를 벗어나 사이버 신체가 되어 이 공간에 들어가 그 세계의 구성요인으로 참여하거나 그곳의 대상과 상황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때 사이버 공간 및 그 공간에서 성립하는 대상이나 상황은 단순한 가상이 아니다. 사이버 사물의 현상적 실재성·현실성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실제적 경험을 제공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이버 세계는 전적으로 순수한 가상의 세계일 수는 없는 것이다.
화엄의 세계는 그것이 세계의 참 모습일지라도, 그리고 각자(覺者)에게는 그것이 진실의 세계일지라도, 적어도 무명의 범부에게는 가상의 세계이다.범부는 결코 그 세계를 실제적으로 체험할 수 없으며 가상의 영역으로 남는다.
“물론 범부에 있어서도 화엄의 세계가 현실에서 전혀 확인 불가능한 관념의 유희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니다. 예로 화엄법계의 설명에 동원되는 자연수의 비유를 구체적 상황에 적용해보자. 실재하는 하나의 사과를 쪼개 그 속에서 2, 3……개의 사과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실재하는 하나의 사과를 통해, 이 사과의 존재에 필수적인 수많은 다른 사과를 추론하는 것은 가능하다. 즉 이 사과가 열렸던 사과나무는 다른 사과의 씨에서 싹터 자란 것이며, 이 사과도 역시 또 다른 사과의 씨를 필요로 한다. 동시에 이 사과가 장래 무수한 사과의 존재 근거가 됨을 추론하는 것도 가능하다. 나아가 이 사과를 통해, 이 사과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해, 달, 바람, 물 등의 무수한 조건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사과를 먹어보는 것에 의해 직접적으로 나와 사과의 관계성에 대해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확인이 분명 관념의 영역에서의 논리적 방식에 근거한 추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것은 사실이나, 이러한 설명이 경험적 현실에 있어 완전히 무의미한 관념의 유희만은 아니다. 20) 마이클 하임은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단어를 만든 윌리엄 깁슨에 있어 사이버 사물들은 에로스의 조짐 속에서 나타난다고 보며,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에로스와 컴퓨터화된 사물들간의 연결성을 명료하게 보여준다고 말한다” (마이클 하임, 여명숙 역, 《가상현실의 철학적 의미》, 책세상, 1997, 145∼147쪽).
이것은 왜일까. 그것은 화엄의 법계보다 사이버 세계가 우리에게 훨씬 경험이 용이하고 또 직접적인 경험내용을 준다는 점에 있는 듯하다. 이런 이유로 가상의 세계인 사이버 세계가 실재의 세계인 화엄의 법계보다 더욱 참인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화엄의 법계는 실재세계의 가상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사이버 세계는 가상세계의 실재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범부로서 머물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현실과 사이버 세계를 참으로 받아들이고 여기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화엄의 세계관에서 보면 우리의 범부성은 극복의 대상이다. 우리는 사이버 세계의 가상성을 뚫고 실재세계로 나와야 된다. 궁극적으로는 화엄의 법계를 실재세계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이버 세계와 화엄의 세계는 같은가 다른가? 진정 우리가 발 딛어야 될 세계와 추구해야 될 세계는 어떤 것인가?
사이버 세계의 의미는 경전들에서 아날로그 차원으로 묘사되던 장면을 우리에게 상당한 사실감으로 체험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불교적 세계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용이하게 할 수도 있으며, 이를 통해 행복의 실현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오히려 우리의 욕망은 더욱 증폭되고, 불교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의 세계와 자유에서 더욱 멀어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사이버 세계가 곧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는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사이버 세계는 기본적으로 욕망의 긍정에서 출발하여, 그것의 충족과 증장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법계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화엄의 법계야말로 진실의 세계를 의미하며, 따라서 범부중생의 삶은 전도된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의 현실이 부정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현실은 무엇인가? 깨달음의 세계는 아직 우리 범부에게 실현된 현실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무명에 바탕한 실존적 현실이 진실이며, 실존적 현실세계의 존재양식과 의미·가치체계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것이 많은 부분 무지·무명에 뿌리를 둔 허망한 것으로, 진실한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여기에서 출발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번뇌 즉 보리, 생사 즉 열반, 중생 즉 부처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깨달은 사람에게는 현실적 사실일지 모르나 범부에게는 당위적 사실에 불과하다. 이것은 실존적 현실에서 출발할 것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명의 실존으로서의 범부에게 깨달음의 세계는 당위적으로는 추구해야 할 진실의 세계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가상의 세계이다. 우리에게는 실존적 삶에서 현실의 극복, 개선을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선결과제다. 현실의 일방적 부정은 허무주의에로의 지름길이다. 삶의 기반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며, 이 기반을 부정하고 삶은 영위될 수 없다. 일방적 부정은 또 다른 세계의 우연적이고 순간적인 성취를 기대하게 된다.
깨달음의 세계의 무조건적 현재화 역시 위험하다. 사이버 세계가 세속적인 세계로부터의 도피처로 이용되듯 화엄의 세계 역시 도피처가 될 수 있다. 무명의 범부중생에게는 법계의 세계보다는 오히려 실존적 현실이 참된 세계이다. 우리의 삶은 이 세계에 발 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각자(覺者)의 세계 내지 세계 인식의 내용을 이미 우리 스스로도 체현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어불성설이며,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것은 사이버 세계 참여자가 스스로 만든 인공세계를 자신의 현실로 착각하는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각자의 세계 내지 세계 인식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관념의 세계에서의 추체험에 불과하며, 결코 우리의 현실은 아닌 것이다.
길희성은 “탐욕과 무지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한 법계연기를 말하는 화엄의 아름다운 비젼은 적어도 사회-역사적 세계에는 무비판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한다(〈화엄적 세계관과 사회갈등의 문제〉, 《21세기 문명과 불교》, 동국대학교, 1997, 313쪽).
화엄의 세계이건 사이버 세계이건 그 기반은 현실이다. 현실에 발 딛지 않은 화엄의 세계, 사이버 세계의 추구와 몰입이야말로 자기 기만적이고 도피적인 사이비(似而非) 삶이다. 화엄의 세계는 한순간에 실현 불가능하다. 처절한 수행의 노력 없이 깨달음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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