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즈냐나스리미뜨라의 가탁(假託)이론
가탁이론은 불교인식론에서 배제(排除)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사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언어는 실재하는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다른 것들의 배제(any�poha)를 언급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하는 불교인식론의 기본적인 언어철학 이론을 ‘배제에 대한 논의(Apohaprakarana)’에서 다룬다. 이 논의는 배제이론에 대해 예상되는 두 가지 반론을 상정하고 이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현상학적 반론이다. 언어나 추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직 다른 것들에 대한 배제일 뿐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부정의 형태는 직접적인 우리의 경험과 모순된다. 우리는 언어나 추론으로 긍정적인 통일성(vidhi)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이 긍정은 만약 의식의 행위가 단순히 부정할 뿐이라고 한다면 불가능하다고 반론한다.
두 번째 반론은 문헌 해석에 근거한 반론이다. 다르마끼르띠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일지라도 비존재(非存在)의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다르마끼르띠는 긍정적인 통일성의 구성할 수 있는 인과관계(因果關係)와 자성(自性)이라는 세 가지 범주에서 추론을 구분한다. 따라서 추론이 오직 부정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타당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모든 추론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두 종류의 반론을 제기하고 대론자는 “어떻게 당신이 언어와 추론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이 배제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11)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추론이나 언어 이론에서 배제는 단지 조건적으로 채택된 입장, 즉 가탁(假託)이다. 이 의미는 ‘배제가 일차적으로 언어의 대상 등이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무엇이 실재하는가라고 반문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우선 외계의 대상은 일차적으로 언어로 표현된다. 이러한 존재에서는 배제는 외계 대상을 한정하는 것으로 제한한다. 외계 대상 중에서, 하나는 결지로 인해서 대상이 조건적으로 채택되고, 다른 하나는 표현되는 형상으로 인해서 대상이 조건적으로 채택된다. 그러나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그 어느 경우에도 없다.”
이것이 이 논서의 핵심이다.12)
이와 같이 즈냐나스리미뜨라의 대답은 그것들을 실질적으로 진리라고 승인하기 곤란하다는 것처럼 보인다. 추론과 언어적 인식의 내용은 단순한 부정이라는 설명은 반대론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추론에 대한 세 가지 구분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대론자들이 반론하는 것은 불교도들이 실제로 채택하는 입장이 아니라 단순히 ‘가탁’에 대한 반론이라고 주장한다.
아주 쉽게 불교도들은 ‘배제이론’만이 추론이나 언어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간주될 수도 있으나, 이것은 불교도들이 진실로 취하는 입장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즈냐나스리미뜨라의 견해에 따르면, 진실한 불교도의 입장은 위의 게송의 의미처럼, 대상은 속제적 범주에서 오직 두 종류, 외계의 대상과 언어를 듣고 의식에 현현하는 형상만이 있다.
전자의 경우 결지의 과정에서 의미론적인 가치가 생겨나며 행위를 위한 대상이다. 비록 의식에 대상이 현현하지 않을지라도 의식이 대상으로 직접적으로 향하게끔 한다. 후자의 경우는 대상이 비록 행위를 유도하지는 않을지라도, 의식에 현현하는 한에서 의미론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어떤 일정한 환경에서 가탁은 이들 대상들에 대해서 전자나 후자를 취하는 언어 의미론이다. 그러나 진제적 입장에서는 이것들은 언어의 의미로 간주되지 않는다. 따라서 진실한 불교도의 입장은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최종적으로 진제적 진리를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세속의 관점에서 성공적인 언어적 행위가 가능한지, 심지의 비존재의 경우에도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가탁’이라는 이론을 제시한다. 속제적 입장에서 언어적 인식의 내용은 반드시 긍정과 부정의 요소 모두로 구성된 복잡한 형태의 대상이 있다고 주장한다. 일상의 언어적 경험에서 우리가 취하는 어떤 긍정적인 대상은 반드시 언어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부차적인 부정적 의미의 배제는 긍정적인 요소들을 제한하는 한정자로서 표현된다. 우리는 긍정적인 정체성을 가진 대상에 대해서 행위할 수 있다. 반면, 오직 부적절한 것으로부터 적절한 것을 구분하는 행위, 적절한 대상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배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배제이론을 통합적이고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배제이론에 대한 보다 정교하고 세부적인 반론은 계속된다.
언어 의미론의 경우 긍정적인 전체성, 통사적으로 언어를 표현하는 것은 어떠한가? 혹은 그렇지 않다면, 지각을 언급할 때 그 대상으로서 다른 것에 대한 배제를 취한다는 의도하지 않은 오류적 결론에 도달하도록 여지를 남겨두는 것은 어떤가?13)
반론자는 다시 지각과 추론의 구분을 문제시 한다. 다르마끼르띠의 주장에 따르면, 지각의 대상은 무분별 의식이 대상이며 배제와 함께 분별적 의식으로 다음 찰나에 발생한다. 그리고 즈냐나스리미뜨라에게 있어서 최소한 이 다음 찰나의 의식은 지각의 필수적인 요소이며, 결지된 대상으로서 지각의 두 대상 중의 하나이다. 지각에 근거한 행위는 분별되어가는 다른 대상들과 차별화되는 긍정적인 형태이다. 따라서 반대론자들은 즈냐나스리미뜨라의 배제이론이 추론과 지각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처럼 간주될 수 있다고 문제시 한다.
각각의 경우 모두 긍정적으로 의식의 대상은 필수적으로 배제와 상응하게 된다. 따라서 반대론자는 지각과 추론의 대상을 지각은 긍정적인 형태를, 추론은 오직 배제의 형태로 대상을 취한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고 반박한다. 만약 긍정적인 형태로 실재하는 대상을 지각할 수 있다면, 동일한 형태로 추론도 실재하는 긍정적인 대상으로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만일 언어나 추론은 타의 배제(他의 排除)로써만 대상에 관여하고, 추론의 대상은 오직 배제뿐이라고 한다면, 동일한 논리로 지각의 대상도 배제라고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진리에 의존하여, 가탁은 구체적인 목적을 위한 어떠한 행위에서 실질적인 상태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자아’나 ‘사물의 생성’이라는 개념들의 예시와 동일하게 ‘구성된 것’이다. ‘생성’이라는 개념은 오직 이전의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한정된 범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대상의 속성이다. 방편적 진리에 의존하여, 원인에 선행하는 결과〔因中有果〕라는 논리를 반박하기 위하여, ‘비존재(非存在)로부터의 생성’이라는 가탁(假託)에 의지한 설명이 있다. 또는 상속이라는 개념적 구성에 의존하여 멸(滅)과 생성이 가능하다는 잘못된 논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개인이 행위의 결과를 경험할 수 있음을 속제적 입장에서 설명한다.14)
즈냐나스리미뜨라는 가탁(假託)이론을 일종의 ‘하얀 거짓말’이라고 발전시켜서 논리를 전개한다. 곧 가탁이론은 엄밀하게 말하면 진리가 아니라, 타당한 목적을 위한 최소한 진리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두 가지 예시로써 그 의미를 분명하게 밝힌다. ‘비존재에서 대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진리는 아니지만, ‘원인에 결과가 존재한다’는 상키야학파의 잘못된 이론을 논파하기 위하여 그 주장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생성은 오직 존재의 속성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사물은 이전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범위에서만 한정된다. 우리가 ‘항아리가 생겨났다’라고 언급하면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항아리가 지금 현재에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항아리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대상이 생겨남이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만 부분적으로 진리이다. 이러한 논리는 업(業)이론에서도, 미래에 우리는 현재의 행위 결과를 경험할 수 있다는 주장이 타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과 동일하다.
실제로 업이론에서 어느 누구도 영원히 지속하는 시간 속에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진리는 아니다. 그러나 부분적인 진리에 근거하여, 불교는 자아의 존재는 ‘심(心)의 상속(相續)’이라고 개념적으로 정의한다. ‘하얀 거짓말’이란 현재의 행위가 업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논리에서 오류를 드러내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번 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 반드시 이전 행위의 모든 결과는 아니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가탁이론을 ‘현재의 경우’에 적용한다.
언어적 표현이 대상으로서 긍정적인 형태의 단일성을 취한다는 것은 가탁과 동일한 의미이다. 비록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의식이 있을지라도, 배제에 있어서 언어적 표현이 오직 긍정적인 실제로서 표현되어야만 한다는 반대론자들의 의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분별의 의식이 세속적으로 가탁된다. 그러므로 언어 표현은 반드시 긍정적인 실체로서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배제만이 언어 표현의 일차적 의미라는 견해에서, ‘우선 외계의 대상은 언어로 일차적으로 표현된다’는 주장처럼 보다 긍정적인 실체를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지각의 경우는 이와 같은 일치가 불가능하므로 가탁이론을 적용할 수 없다.15)
불교인식론에서 “배제는 언어와 추론으로 표현된다.”는 견해는 진실한 불교도의 입장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또 다른 ‘하얀 거짓말’이다. 부분적인 진리로서, 언어와 추론은 우리로 하여금 배제에 의존하지 않고는 행위를 위한 적절한 대상에게로 효과적이고도 직접적으로 향하게 할 수 없다. 그리고 긍정적인 실체만이 표현되고 추론될 수 있다는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기 위한 목적은 그 거짓말 자체를 하얀 거짓말로 만든다.
그러나 만약 오류적으로 이런 가탁의 이론을 개별적으로 채택하면, 배제에 한정되어 긍정적인 실체들 또한 표현되고 추론될 수 있다는 새로운 가탁이론을 제기할 가능성도 있다. 즈냐나스리미뜨라가 지각을 추론과는 별개인 것으로 구분하는 기준은 추론의 대상은 배제이고, 지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배제만이 지각의 대상이라는 가탁이론을 고수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이러한 주장은 타당하다. 지각과 추론은 긍정과 부정적인 측면 모두를 취할 수 있다. 둘의 차이점은 그와 같은 측면의 차이가 아니라, 수사학적인 문맥에서 기인한다.
불교인식론에서 기본 개념들을 구분하기 위한 설명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경향은, 그것들이 지시하는 사물의 의미가 실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사용되고 논의되는 상황의 문맥적 차이에서 기인한다. 즈냐나스리미뜨라의 분별과 결지의 구분도 이와 동일한 선상에 있다. 다르마끼르띠가 대상을 설명할 때, 그 용어들을 대조의 관점에서 사용한 반면 즈냐나스리미뜨라는 그것들 사이의 차이점을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진실로 ‘분별(分別)’ ‘결지(決智)’는 동일한 의미이다. 분별은 언어나 그와 유사한 것들과 결합이며, 결지는 파악되지 않은 대상에 대한 행위의 적절성과 관련된다.16)
즈냐나스리미뜨라에 따르면, ‘분별’이란 일반적으로 대상에 대한 심리적인 형상이 언어와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을 경우를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소’라는 대상을 사유하면, ‘소’라는 단어에 대한 기억과 유사한 경우이다. 그러나 ‘결지’는 마치 행위를 위한 대상인 것처럼 심리적 형상을 처리하는 경우에 적용된다. 그러나 즈냐나스리미뜨라가 설명하고 있듯이, 사유는 행위의 일종이기 때문에 ‘분별’은 일반적으로 ‘결지’의 다름이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설명한다.
분별로 이해되는 대상에 대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과 같이, 이 경우 〔사유〕는 언어와 결합하여 이해된다. 이것은 외계 대상에 대한 부분적 형상과 같이 단어의 형상도 의식에 현현한다. 그러므로 ‘결지’로부터 분별이 가탁되어진 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실질적인 의미에 차이가 아니라, “대상의 이해라는 범위 내에서, 그것에 대한 명칭의 차이로 이해된다.”라는 조건적인 결지를 확정하기 위해서이다.17)
즈냐나스리미뜨라에게서, 분별과 결지라는 용어의 구분은 그것들을 언급하는 인식의 과정에서의 실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목적에 부합하기 위하여 문맥적 상황에서 부여된 기능상의 차이이다. 언어를 습득할 때, 개념적으로 이해되는 대상은 언어와 결합하여 지칭되며, 우리는 대상에 대한 분별적 이해와 그것에 따른 이름과의 결합은 하나로서 동일하다고 믿게 되는 오류를 범한다. 이러한 오류적인 믿음은 다르마끼르띠를 비롯한 불교인식론자들에게 대상에 대한 분별과 결지는 구분되는 과정인 것처럼 설명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동일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즈냐나스리미뜨라는 이제 지각과 추론의 구분에 이 가탁이론을 적용시킨다.
동일한 이유로, 실질적으로 행위하는 사람의 마음은 분별에 대한 집착으로, 무분별이라는 한정자는 지각으로 〔다르마끼르띠와 디그나가에 의해서〕 정의되며, 그들의 논서에서 결지에 의한 분별적 의식에 근거하여, ‘분별’과 ‘결지’의 구분이 있다.18)
이와 같은 즈냐나스리미뜨라의 주장은 매우 파격적이다. ‘지각은 무분별’이라는 불교인식론의 근본 주장은 그 자체가 ‘하얀 거짓말’일 뿐이라는 의미이다. 즈냐나스리미뜨라에게는 지각과 추론은 모두 무분별과 분별적 대상을 취할 수 있으므로, 지각의 과정이 무분별에 한정되지만은 않는다. 그러나 이 놀라운 주장, 엄밀하게 말하면 거짓인 이 주장은 부분적으로 진리이며, 이름하여 지각이 그와 같다는 의미는 지각의 첫 번째 찰나에 파악된 무분별적 대상이 무분별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즈냐나스리미뜨라에게 디그나가와 다르마끼르띠가 주장한 ‘지각은 무분별’이라는 의미는 어디까지나 부분적으로 진리이다.
다시 말하면, 인식 가능한 네 가지 대상의 범주, 지각과 추론이 각각 파악되어지는 것과 결지되는 것들 중에서, 지각에서 파악되어진 대상만이 무분별만이, 언어적 표현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면서 다른 세 종류와는 구분되는 특징을 나타낸다. 또한 지각의 결지의 대상은 분별이지만, 반드시 언어적 표현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언어적 표현으로 파악된 대상은 무분별일지라도 최소한 형식적으로 언어와 결합하며, 반면 언어적 추론의 결지의 대상은 반드시 분별적이며 언어와 결합한다. 그러나 어느 하나의 사물에 대해서 분별적 언어 표현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들 세 가지 대상들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다.
따라서 ‘부분적인 진리’의 이해는 실용적인 경향을 취하는 사람들의 철학적인 이해를 위해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즈냐나스리미뜨라의 가탁이론은 철학적 견지에서는 논리적 사유를 위해서, 그리고 불교 지성사에서 논서들에 대한 문헌 해석을 위한 근본적인 믿음을 위해서 요구되는 주석적 전통이라는 두 가지 목적 모두를 충족시켜 주는 매우 유용한 이론이며 수단이다. 이 이론은 즈냐나스리미뜨라가 디그나가와 다르마끼르띠의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동시에, 독특하면서도 불교 지성사에서 두드러진 자신의 철학적인 견해를 표현할 수 있게 한다.
논의의 결론에서, 즈냐나스리미뜨라는 보다 구체적으로 가탁이 불교 인식론의 전통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배제이론과 연관되어 지각과 추론을 전통적인 해석과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언어의 대상으로서 가탁이론을 요약한다.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결지(決智)의 과정에서 외계의 대상이 되며, 현현(顯現)에 의해서 심리적 형상이 된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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