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공간

[스크랩] 숨은 도인『石灘寺』- 청소 스님[靑昭]

수선님 2018. 12. 16.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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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도인』- 청소 스님[靑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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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선원 『금강경』 공부반은 지난 6월5일 정읍시 칠보면 석탄사에 주석하는 ‘숨은 도인’ 청소[靑昭] 큰스님을 친견했다. 큰스님은 한평생 유명산천을 구름처럼 물처럼 떠돌며 오직 염불과 참선수행에만 전념함으로써 눈이 열린 선지식으로 알려진 분이다. 세수 85세임에도 이날 스님은 간절히 법을 묻는 20여 명의 불자들을 향해 마음을 다스리며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고구정녕 일러주셨다. /편집자

 

▷어떤 수행법으로 마음을 닦는 게 좋습니까?
“염불이 근기에 맞으면 염불을 하고 참선이 맞으면 참선을 하면 된다. 염불이든 참선이든 모든 것에 도가 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해서 일념이 되면 부처의 길이 열린다. 참선이든 염불이든 일념으로 가면 도를 이루는 길이라는 점에서 똑같다.

 

다만 부지런히 공부해야 하는 게 중요하다.
공부하지 않으면 백천억 겁을 살아도 괴로움에서 못 벗어난다.”

 

▷간화선看話禪에는 1700공안이 있는데 어떤 화두로 공부하는 게 바람직한가요?
“어떤 것이든 다 중요한 공안들이다. 다만 1700공안 중에서도 이치로 아는 선, 즉 의리선義理은 곤란하다. 따라서 마땅히 ‘이뭣고’ 공안이나 ‘판치생모板齒生毛’,‘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공안을 들어야 한다. 나머지 공안은 지식과 이치로써 풀어낼 수 있어 궁극의 경계에 도달하기 어렵다.”


▷화두를 잘 드는 방법이 있습니까?
“화두話頭를 제대로 참구해야 일념도 된다. 예컨대 처음에는 ‘조주 스님이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는데 어째서 없다고 했을까?’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질문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하다보면 점차 화두가 ‘왜 그랬을까?’ ‘왜?’로 짧아지게 되고 그렇게 지속되다 보면 의문만이 가득한 일념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일념 또한 번뇌망상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일념一念에는 착도 망상도 없다. 일념인데 거기에 어떤 것이 붙을 수 있겠는가.”

 

▷공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조주趙州 스님 이후 지금까지, 장구한 세월이 흘렀지만 조주 이전보다도 도인이 나오지 않은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믿음이 부족한 것이 그 원인이라고 믿는다. 공부를 하려면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한다.

 

초보불자의 경우 믿음을 단단히 하기 위해서는 『지장경地藏經』을 읽어야 한다. 지장경을 천독 이상 독송하게 되면 믿음이 견고해진다. 이 바탕 위에서 염불도하고, 참선도 해야 한다.『지장경』 독경讀經은 일종의 기초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지장경』에 대해서는 스님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은 것 같은데, 왜 하필 『지장경』입니까?
“그것은 믿음이 부족해서 나오는 소리다. 살생殺生하지 말라, 사음邪淫하지 말라 등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을 적어 놓은 경을 두고 비하의 소리가 나올 수 있는가. 아직 기초도 되지 않은 사람에게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의 사구게를 들려준 들 알아들을 리 있겠는가.

 

지장경은 세속의 학력으로 친다면 초등학교에 해당한다. 집을 지을 때 터전에 해당되는 경이다. 지장보살은 이 우주에 안 계신 곳이 없다. 우주에 곽 차 있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중생들의 눈을 뜨게 해주는 보살菩薩이고 기본이 되는 보살이므로 대원본존大願本尊 이라고 부른다. 일종의 담임선생님과 같은 역할을 하는 보살이다.”

 

▷이곳에 오다가 『금강경』의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을 놓고 토론을 벌였습니다. 덕산德山 스님이 어떻게 했어야 노파老婆에게 떡을 얻어먹을 수 있었을까요?

 

“거기에 이런저런 사변思辨을 붙이는 것은 망상이다. 마음자리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분별심이 자리할 곳이 도대체 어디 있는가? 사실 법이란 것이 물을 것도 답할 것도 없는 것이다. 묻고 답하는 사이에 이미 그르치기 때문이다.

 

아는 것은 지식이고 수행을 통해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과 지식知識은 서로 상관이 없다. 허깨비일 뿐이다. 불성佛性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도 허깨비 놀음이다. 오직 한 법으로 돌아가 일념이 되어야 한다. 일념一念이면 모든 것이 끊어진다.”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진리眞理는 아는 것이 아니다. 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금강경金鋼經』에서 당신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한 까닭은 가르침 자체가 방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착을 끊으려면 일념이 되어야 한다. 일념이 되면 망상이고 착이고 붙을 곳이 없다.

 

 과거 미래 현재 어디에건 마음엔 과거와 안팎이 없다.

 

내가 질문 하나 던지겠다. 여기에 컵이 있다.
이 컵이 네 마음 안에 있는가? 아니면 마음밖에 있는가?
아는 이 있거든 일러보라.…[침묵]… 마음엔 안과 밖이 없다.”

 

▷염불과 참선의 병행은 어떻습니까?
“염불로 신심을 다지고 화두로 마음을 깨닫는 것이니 공부에 진전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안 될 것은 없겠지만 결론적으로는 하나에 전념하는 것보단 못하다. 우물을 파더라도 한 우물을 파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수행을 하면서 경계할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공부가 좀 된 사람들은 자칫 교만심에 빠지거나 자기도 모르게 상에 빠져 있을 때가 많다.
도고마성道高魔盛이라고 도가 높아질수록 마장도 거세지는 법이다. 공부하는 이는 마땅히 이 점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에 매몰돼 헤매는 것이 무릇 거의 모든 수행자들의 공통된 병이다.

 

 요즘 보면 간화선만이 최상이고 묵조선은 하급으로 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념의 경계에 오르게 되면 화두건 상이건 착이건 아무것도 없는 의단疑團의 상태가 되어 말이 끊어진 상태에서 그저 묵묵히 지켜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묵조默照라 했는데 이를 두고 분별심을 갖는 일이 횡행하니 한심한 일이다.

 

처음부터 비쳐볼 수 있다면 화두가 무슨 소용인가? 날개도 나지 않은 새끼 새가 날겠다고 날치니,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떨어져 죽을 것이 확실해 대혜 스님께서 화두[公案]를 제시한 것인데, 이제와서 화두선이 최상이고 묵조선은 보잘 것 없다고 하니 개탄스런 일이다.

 

허깨비 놀음에 휘둘리지 마라

 

▷저희 불자佛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수행을 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모으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수행해서 마음공부를 한 결과라야 끝내는 보람이 있는 것이다. 공부를 하는 데에 허깨비 놀음에 휘둘려선 안 된다. 나라는 생각, 너라는 생각, 영원하다는 생각,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깨뜨리고 그 허깨비 망상妄相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그리하면 성낼 것도, 욕심을 부려야 할 것도 다 사라진다. 딱히 꼬집어 나랄 것이 없는데, 욕을 먹든 칭찬을 듣든 흔들릴 연유가 무엇인가. 어떤 상황에서든 평상심平常心을 잃지 않을 수 있다면 도를 이룬 것이다.”

 

 출처 : 나무아미타불 http://cafe.daum.net/amtb

 

 

 


의리선義理禪으로는 절대 부처될 수 없어. 선을 하되 일념으로 정진해야


“옛날 조주趙州가 아직은 으스스 추운 이른 봄날 남전南泉을 찾아갔어요. 남전은 마침 양지 바른 곳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다가 조주를 보고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지. 그러자, 조주가 ‘네,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고 했거든. 

 

이에 남전이 ‘그럼 서상[瑞像:부처]은 벌써 보았겠군.’하고 떠보는 거라.

조주가 답하기를

 ‘아뇨, 서상은 모릅니다만 와여래臥如來는 보았습니다.’라고 받아 쳤어.

 그러자 남전이 ‘허 이놈이 보통이 아니구나’라며 내심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아서는

 ‘네게 스승이 있느냐?’고 물었지.

 

그러자 조주가 대답하길

‘아직 추운 계절인데 스승께서 건안建安하시니 무엇보다도 다행입니다’라고 했다는 거라.

 

이렇게 남전과 조주의 만남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법의 경지란 지식이나 의리로 따져서 아는 게 아닙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통해야 되는 것이지. 1700가지 공안이 있다고들 하지만 대개가 의리에 떨어지는 것들이란 말이지.

 

공부하는 이는 마땅히 조주의 무[無]자 화두나, 판치생모[板齒生毛], 이뭐꼬[是甚麽]와 같은 공안을 참구해야 합니다. 이런 화두들은 의리義理에 떨어지는 게 아니라 경계를 그대로 치고 나가는 것들이거든.”


정법 쇠약해 지기는 한국이나 외국이나

얼마 전, 염불수행으로 유명한 한 중국스님이 한국에 와서 여기 저기 법회를 하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지. 그분이 대전에 왔다고 해서 내 달려가서 이것저것 물었어. 그렇게 이름이 난 사람인데도 영 아닌 것이라. 법이 쇠약해지기는 외국이나 한국이나 크게 다를 게 없는 모양이야.

 

참 걱정이 커요. 불교는 지식으로 하는 게 아닌데 말이지. 머리로 아는 것은 다 무너질 수밖에 없어. 도인으로 알려진 사람들도 잘 두고 보면 대개가 의리선義理禪에 빠진 경우가 허다해. 분명한 것은 의리선으론 절대로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 선을 하되 일념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

 

일념이 되어 정진을 계속하면 그 일념이 단단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보이는 것입니다.

은 보는 것이지 아는 게 아니란 말이지. 이렇게 일념이 되어 관[觀]하게 되면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어 있어요. 한 가지만 꿰뚫어 알면 다 알게 되어 있는 것이지.”


일반인은 참선보다 염불念佛

모든 게 다 부처되는 자리예요. 참선만 옳고 염불은 그르다는 그런 말이 어디에 있나. 난 오히려 일반인들에겐 염불을 권하고 싶어요. 왜냐. 염불念佛을 하면 나도 모르게 부처님과 가까워짐을 느끼게 된단 말이지. 정이 든다 이 말이요. 염불을 열심히 하다보면 삼매에 들고, 마침내 일념一念이 되어 거기서 공부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참선參禪 공부가 좋기야 좋지만 제대로 하기가 쉽지 않아요. 방법을 일러준다고 하는 사람조차 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 어떻게 참선을 통해 마음자리를 볼 수 있겠는가. 소위 선지식善知識이라는 분들의 행동을 보시오. 수좌首座들이 찾아가서 법을 물으면 대뜸 ‘너 오매일여하냐?’고 묻고는 ‘그렇다’고 하면, 벽력처럼 소리를 지르며 ‘저 놈 내쫓아라.’고 한단 말이지.

 

이런 현실에서 참선공부로 도인道人이 나오기는 쉽지 않습니다. 참선參禪, 간경看經, 염불念佛 중에 어떤 방법을 택하든 일념이 되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육조스님도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금강경 구절을 듣고 확철대오했다고 하지 않는가. 간경이든 염불이든 삼매三昧에 들어 일념이 되고, 거기서 보면 이뤄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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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까루나님 http://blog.naver.com/noenemy8

 ♧ 음악 : 꿈을 꾸는 집 http://blog.naver.com/monkey1178

 

 

 

출처 : 나 홀로 길을 걷네 ...
글쓴이 : 최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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