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Anapana sati)
*안반수의 창안 동기
부처님께서는 월지국의 사기유국에 머무셨다. 일명 차닉가라국 이라고도 한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90일 동안 앉아서 안반수의를 행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90일을 홀로 앉아 생각을 가다듬어, 온 세상의 모든 인간과 날아다니는 새와 꿈틀대는 동물들까지 구제하고자 하셨다.
월지국은 인도 동북부인 실크로드의 서쪽에 있던 큰 나라이다. 차닉가라국이 라고도 불렸 던 사기유국은 월지국에 속해 있던 작은 나라로, 여기에서 붓다가 좌정 하고 앉아 90일 동안 안반수의를 행했던 것이다.
안(安)은 범어의 '아나ana', 반(般)은 '아파나apana'라는 말을 발음 그대로 옮긴 것으로 서, 안반의 원어는 '아나파나anapana'이다. '아나'는 들숨〔入息〕, '아파나'는 날숨 〔出息〕이다. 그러므로 안반은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을 말한다. 수의(守意)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한다는 범어 '사티sati'를 옮긴 말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집중하여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붓다는 다시 90일을 앉아서 온 세상의 모든 인간들과 날고 꿈틀대는 새와 동물들까지도 모두 구제하고자 하였다. 원문의 도탈(度脫)은 깨닫게 하여 구제한다는 뜻이다. 요컨대 붓다는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는 안반수의를 닦고서 이를 전하여 모든 인간들과 동물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붓다가 6년 고생 끝에 고행을 포기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행의 괴로움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고행이 깨달음을 얻는 데에는 전혀 이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 차렸기 때문이다.
붓다는 고행을 하면서 단식, 숨을 참는 호흡 훈련 등 몸을 괴롭히는 온갖 수행을 참고 견뎌냈다. 그러나 그 고행이 특수한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가치가 있으나, 모든 일반 생활 인이나 나아가서는 새나 동물들과 같은 일체 중생까지도 행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올바른 수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붓다는 먼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 인 호흡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당시의 고행자들은 숨을 오래 참는 호흡법을 닦았다. 이 호흡법은 우주의 생명력인 '프라나prana' 라는 기운을 될 수 있는 한 체내에 많이 흡수하여 저장해 두는 것이 주목적 으로, 불로장생하려거나 특수한 능력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수련이다. 붓다의 목적은 이런 능력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다. 붓다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인생고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고행을 버리고 삶 속에서 호흡으로 인간적인 고뇌를 해결하는 길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또한 생리적인 욕구를 거역하는 극기나 고행이 아닌 즐거운 수행 을 창안하였다. 삶 속에서 삶과 죽음의 모순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보인 것이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동식물들도 호흡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렇듯 가장 자연스럽고 합리적으로 호흡하는 것은 육체나 정신을 위해서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고 붓다의 호흡법이 생리현상으로 서의 들숨, 날숨을 그대로 자연에 맡겨 두고 방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 호흡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여기에 안반수의법의 특징이 있으며, 그것을 통해 고행을 떠나서 즐겁게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90일 동안인가? 90일은 석 달로 붓다는 여름에 비가 계속 오는 기간인 하안거(夏安居)엔 마을로 나가지 않고 한 곳에 앉아 수행과 설법을 하였다.
이때 안반수의 법을 행한 것이다. 안반수의법을 흔히 수식법(數息法)이라고 하나, 수식 법 은 안반수의의 본래 뜻을 다 포함하고 있는 용어는 아니다. 따라서 예부터 수식법이라고 부르던 방법과 내용상 다를 바는 없을 지라도 안반수의법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된다. 안반수의법은 수를 세면서 호흡을 고르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욱 상세히 설명 할 것이다.
*자재와 자비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안반수의를 90일 행하였으니 안반수의로 자재와 자비의 마음 을 얻었다. (그 뒤에) 안반수의를 행하면서 다시 그 마음을 거두어 (이렇게) 생각을 행한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드디어 자재를 얻을 수 있음을 보이고, 다시 스스로 자비심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자재(自在)란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어 서로 대립하지 않으므로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로움이다.
주관이 객관에 끌리면 객관적인 어떤 대상의 노예가 되어 자재를 잃게 된다.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면 대립이 없어지므로 객관이 주관의 세계로 들어와 나의 것이 된다. 이러한 세계 가 자재의 세계이다. 주와 객이 없는 이 세계에서는 너와 내가 대립하지 않기 때문에 자비 심이 솟아난다.
심리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에 이르면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없어지고 자비심 이 솟아난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무의식의 세계가 심화된 심층의식의 상태에서는 생명 의 절대적 가치와 만족, 환희를 느끼며, 일체의 존재에 대한 관념이 바뀌고 따라서 애정을 갖게 되어 세계가 광명으로 바뀐다고 한다.
여기서의 자비심이란 일체 중생이 나와 한 몸인 그런 사랑이며, 우주 생명에 대한 공감이다. 이렇게 되면 그 환희 속에 잠겨 삶의 존엄성을 공감하면서 숨이 들어오고 나감에 따라 삶의 가치가 새롭게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일상적 가치의 세계인 현실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 가치가 현실과 함께 공존하는 세계이다.
또한 대립을 떠난 궁극의 세계이기도 하다. 주와 객의 대립이 끊어진 이러한 자재의 세계에 서는 우리의 깊은 마음속에 일체감이 생겨나므로 자비심이 솟게 된다는 것이다. 안반수의는 이처럼 주객통일을 이루게 하여 해탈로 나아가게 하는 방편도(方便道)이다. 안반수의를 통해 얻은 자비심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근본 마음이며, 나 이외의 모든 것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이타심(利他心)이다. 붓다는 이와 같은 궁극의 세계가 호흡이라는 현상 속에 있음을 가르쳐 준다.
인간은 항상 대상에 이끌려 거기에 매여 살기 때문에 자재를 잃는다. 우리의 삶은 감각기관 에 의한 속박만이 아니라 관념의 노예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생명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욕구 또한 존재한다. 어디에도 속박 되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자유로운 생명 현상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충족되었을 때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욕구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스럽게 호흡하면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된다. 붓다의 가르침은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진리 그대로의 모습, 곧 자연 그대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바로 참된 진리이다.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살아 있는 생명이 지니고 있는 자연 그대로의 법이 나타나는 것이다.
붓다의 명상은 호흡과 하나가 되게 한다. 인간이 있어야 할 자연 그대로의 상태란 자재의 세계이다. 붓다가 90일 동안 이러한 호흡법을 행해 처음으로 자연그대로의 상태로 돌아갔을 때의 걸림 없는 자재, 즉 생로병사의 인간적인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다음에 맛본 것이 자비심이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간 붓다의 마음에 비춰진 일체의 존재는 모두 자기 자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숲속에서 뛰노는 동물, 꽃을 찾아 날아드는 나비와 벌, 하늘을 나는 새의 무리들이 모두 자신과 다름없었다. 붓다에게는 암수 짝을 지어무리 짓고 새끼를 거느린 채 만족스럽게 잠든 동물들과, 나비나 벌에게 꿀을 베푸는 곱게 핀 꽃, 생물들을 키우는 따사로운 태양빛, 어둠으로부터 악한 것을 멀리 쫓아 생명을 지켜주는 달빛 등 모든 자연의 섭리가 마치 어머니가 사랑스러운 자식을 안아주듯이 느껴졌다.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자비심을 주고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붓다는 법 그대로인 일체 중생의 참모습을 본 것이다. 한마디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단순 한 사실' 속에서 우주의 참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숨이 들어올 때 산소를 흡사하여 세포 속 에 산소를 공급하는 것은, 생명을 창조하는 자재의 현상이며 자비 그 자체이다. 우리의 생명 은 숨을 들이마심으로써 우주의 생명력을 활기차게 발동시키고, 숨을 내뿜어서 세포의 생명 력을 유지한다. 이는 생과 사의 되풀이인 동시에 생사를 떠나며, 생명을 키우는 자비이다.
*자연의 도리로서의 들숨과 날숨
안(安)은 몸이 되고 반(般)은 휴식이 되며 수의(守意)는 도가 된다. (왜냐면) 수의는 계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금(禁)은 또한 보호하는 것이다. 보호한다는 것은 일체의 것이 잘못되지 않도록 두루 지키는 것이다. 마음이란 의식이 쉬고 있는 것이니, 또한 도가 된다.
숨을 들이마시면 배가 불러오고 산소가 들어와서 세포를 활기차게 해준다. 그러므로 숨이 들어오는 것을 생명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숨을 내보내는 것은 그러한 작용을 일단 쉬는, 새로움을 위한 휴식이다. 들숨이 생生이라면 날숨은 멸(滅)이다. 멸이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위해서 쉬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과 멸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멸을 통해 생이 있고, 생은 멸에 의해서 다시 나타난다. 생과 멸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진 하나이다. 그러므로 둘이 아니다.
호흡을 살펴보더라도 숨이 들어와서 극치에 이르면 자연히 나가게 마련이다.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즉 입출일여(入出一如)이다. 그런데 숨이 들어오고 나가 는 것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들숨과 날숨에 혼란이 오기 쉽다. 무의식 상태에서 호흡을 하게 되면 들어오도록 되어 있는 숨이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어떤 일 때문에 놀랐을 때에는 숨이 들어오지 못하고 나가는 숨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크게 놀랐을 때는 신경이 마비되어 얼굴이 창백해지거나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들숨과 날숨에 정신을 집중하면 호흡은 있는 그대로, 정상적 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정상적인 호흡은 자연의 도리요,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의식이 한 곳에 집중되어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면 우리는 의식의 심층에 자리 잡고 있는 본래의 마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된다. 심층의식이 우리의 본래 마음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이끌려 구속받을 때는 의식이 집중되지 못하고 밖으로 달리며 쉴 줄을 모른다. 의식 이 밖으로 달려 나가지 않고 자신의 심층 속에서 쉬고 있을 때에 비로소 본래 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처럼 정신집중을 통해 의식이 자기 자신 그대로 안정되어 쉬고 있는 상태에서는 주관은 주관대로, 객관은 객관대로 제 모습을 갖추게 되고, 또한 제각각 움직이지 않게 된다. 들어 오고 나가는 숨에 정신을 집중하면 그 숨은 길고 충분하게 들어오고 또한 길고 충분하게 나간다. 생명의 창조와 휴식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자연의 도리를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들숨과 날숨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 곧 안반수의는 우주의 진리 자체이며 살아 있는 모습이다.
*생(生)과 멸(滅)의 깨달음
안安은 생生이고 반般은 멸(滅)이며, 마음은 인연이 수守는 도가 된다.
들숨은 산소를 공급하여 세포에 활기를 줌으로써 정신을 맑게 한다. 밖으로 부터 생명력을 가져와 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한다. 날숨은 들어오던 숨이 그치고 나가는 것이므로 생의 극치에 이르러 멸하는 현상이다. 생명은 생과 멸의 되풀이다. 생만이 영원히 계속 될 수는 없다. 생의 극치에서 멸이 있고, 멸의 극치에서 생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생과 멸은 상호 부정이 아닌 상호 의존 관계에 있다.
들숨과 날숨은 무의식 속에서 행해지며, 그 무의식은 우리의 깊은 마음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숨의 들어오고 나감도 있을 수 없다. 숨을 쉬는 것은 끊임없이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곧 마음이 인연이 되어 들숨과 날숨이 있게 된다. 이러한 마음을 잘 지키는 것이 곧 자연의 도리이다. 자연의 도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코앞에서 이루어지는 호흡에 있다. 깨달음이란 들숨과 날숨 이 생명의 탄생과 소멸이라는 엄숙한 사실과 나의 본성이 생과 사 속에 있고, 호흡에 있다 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의 참모습은 나의 참된 삶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고, 나의 참된 삶은 올바른 호흡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호흡은 육체적인 생리현상인 동시에 정신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올바른 호흡은 올바른 생리현상과 정신 상태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호흡도 바르게 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 숨의 들어오고 나감이 하나가 되면 무의식중에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게 된다. 이런 호흡이 가장 바람직 하다. 들숨과 날숨에 정신을 집중하여 그것이 한 결 같이 지속되면 드디어 호흡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 나아가서는 무의식중에도 올바른 호흡이 이루어진다.
붓다는 호흡을 통해 우주의 진리를 알았고, 우주의 뜻이 바로 나의 뜻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의 삶은 일체 중생의 삶 그대로이다. 하늘을 나는 새, 물속에서 노니 는 고기,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미물에 이르기까지 숨을 쉬지 않는 것은 없다.
모든 생명은 호흡을 통해서 탄생하고 소멸한다. 정신과 육체가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생명 이 탄생하고 유지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정신과 육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삶은 육체적 인 들숨과 날숨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반드시 정신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정신이 근본이 되어 육체적인 생리현상인 들숨과 날숨이 있게 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존재가 인연에 의해 생기고 사라진다는 진리를 깨달은 붓다는, 우리의 마음이 인연이 되어 삶의 생과 멸인 들숨과 날숨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나가 면 반드시 들어온다. 만나면 헤어지고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지극히 평범한 이 사실 속에 진리가 있다. 이는 우주의 뜻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며, 그 뜻을 지키는 것이 곧 밤이 되고 낮이 되는 것이요, 가면 오게 하고 만나면 헤어지게 하는 것이다.
들숨과 날숨은 나의 마음 이 인연이 되어 그 도리를 지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올바른 호흡이야말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인 동시에 곧 도道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바로 내 속 에 있다. 내 마음속에 있으며 들어오고 나가는 숨 속에 있다.《잡아함경 (雜阿含經)》 제29 권 10에서 붓다는 이렇게 설법하고 있다."제자들이여, 들숨과 날숨을 생각하는 것을 잘 익혀야 한다. 그러면 몸이 피로하지 않게 되고, 눈이 아프지 않으며, 법을 관(觀)하여 즐거움에 머물 수 있고, 애착에 물들지 않게 되리다. 이와 같이 들숨과 날숨을 닦으면 좋은 결실과 큰 복리를 얻으리 라. 그리하여 깊은 선정(禪定)에 들면 드디어 자비심을 얻고 미혹을 떠나 깨달음에 들어갈 것이다."
*수식과 정신집중
안(安)은 수를 헤아리고, 반(般)은 서로 따르며, 수의는 그침이 된다.
세상 만 물이 지닌 존재의 비밀은 아직 신비에 싸여 있다. 보잘것없는 미물에서 부터 인류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과학, 철학, 종교는 그 신비로운 비밀을 풀기 위해 애써 왔으나 아직까지는 완전히 밝혀내지 못했다. 인간을 비롯한 여러 생명체를 형성하고 있는 세포나, 일반적으로 말하는 물질의 최소 단위인 분자의 비밀도 완벽하게는 알지 못한다. 인간의 정신작용이 가진 비밀은 더욱 신비에 싸여있다. 단지인간의 생명이 물질과 정신의 조화로 인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불교에서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사람이 다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색은 물질적 요소이고, 수, 상, 행, 식은 정신적인 요소이다. 인간 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다섯 가지가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하며, 그 상태가 곧 공空의 세계이다. 우리의 삶은 호흡이라는 물질적인 육체의 움직임과 정신적인 의식의 조화 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불안하거나 공포에 싸여 있을 때는 육체의 작용이 원만하게 이루어 지지 않으므로 호흡이 거칠어지고 행동이 자재(自在)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정신이 안정되고 평온한 상태에 있으면 호흡이 고르게 되고 행동도 뜻대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들숨에 의해 활력을 얻고 날숨에 의한 신진대사로 노폐물이 몸 밖으로 배출된다. 숨이 들어오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요, 숨이 나가는 것은 삶의 극치에서 다른 차원인 죽음 으로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과 멸의 연속이 우주의 모습이고 우리의 삶이며, 곧 공(空)이다. 공이란 생하고 멸하면서 생이나 멸에 떨어지지 않는 세계 이므로 생도 아니 고 멸도 아닌 생과 멸 그 자체이다. 숨이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지 않거나, 나가지 않고 들어 오기만 한다면 생명은 유지될 수 없다. 생명이 잘 유지되지 못하면 공을 떠나 있는 것이요, 진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공의 진리를 잘 실천하려면 숨을 올바르게 들어오게 하고 나가게 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붓다는 그 도리대로 호흡을 행하였으므로 호흡이 바로 삶 자체이고 공의 실천인 상태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숨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수를 세는 것은 정신을 숨에 집중하여 조화를 이루기 위한 방편이다. 숨이 들어올 때 그 숨의 수를 세면서 정신을 집중하고, 나갈 때 나가는 숨의 수를 세면서 정신을 집중하여 서로 따르게 하면 숨은 올바르게 이루어진다. 이렇게 되면 숨의 들어오고 나감이 그친듯한 상태가 되어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자연스럽게 숨이 들어왔다 나가는 경지에 도달한다.
*합리적인 호흡
안(安)은 도를 생각하고, 반(般)은 맺힘을 풀며, 수의는 죄에 떨어지지 않는다. 안(安)은 죄를 피하고, 반(般)은 죄에 들어가지 않으며, 수의는 도가 된다.
인간과 동·식물을 막론하여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숨을 쉬지 않으면 살수가 없다. 따라서 올바른 호흡을 익히는 행위는 올바른 삶과 직결된다. 그러나 요가를 수행하는 고행자들은 호흡을 닫고 숨이 들어오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들어온 숨까지 나가지 못하게 하여 오래 도록 참는 수행을 한다. 붓다 역시 이러한 고행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중요한 뜻을 깨달았기 때문에 호흡을 닫고 자연의 도리에 역행하는 지식법(止息法)인 쿰바카Kumbbaka를 포기하고 자연스럽고 올바른 호흡법을 권장 하게 되었다. 숨이 들어오는 안安을 모든 생물이 생명을 주지하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자연의 도리로 본 것이다. 숨을 오래 참고 있으면 체내의 독소가 밖으로 나가지 못해 죽게 된다. 그러므로 들어온 숨이 극치에 달하면 체내의 독소를 내보내기 위해 숨을 길게 내뿜어 주어야 한다. 맺힌 것을 푼다는 말은 이처럼 몸 안의 나쁜 것을 풀어서 없앤다는 뜻이다.
요가 수행자들이 우주의 생명력인 프라나를 많이 들어오게 하여 그것을 될 수 있는 한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 데에 반해, 붓다는 될 수 있는 한 숨을 길게 내보내는 것 이 좋다고 보았다. 또한 숨을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하고 길게 내뿜을 때에도 마음을 집중 하지 않으면 호흡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덧붙여 강조했다.
수의, 곧 정신집중은 호흡이 잘못되지 않게 하는 고삐인 셈이다. 실제로 의식을 집중했을 때의 호흡과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호흡의 효과는 큰 차이가 있다. 붓다가 창안한 호흡법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정신이 집중된 호흡이므로 이런 호흡법을 익히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무의식 상태에서도 호흡이 길고 깊으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 같은 호흡법은 인간이 생명의 도리를 올바르게 깨닫고 생명을 잘 유지하기 위해 진리를 실천하는 길이다. 이를 거스르고 숨이 제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거나 나가는 숨을 제대로 못 나가게 하면 몸에 질병이 생기고 정신 착란이 발생하게 된다. 붓다는 이런 점을 통찰 했기 때문에 마음의 불안이나 어떤 걸림을 풀기 위해서 숨을 길게 내뿜는 호흡을 하라고 권한 것이다. 마음에 맺힌 응어리는 마음으로 풀 수 있다. 붓다는 마음이 몸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특히 호흡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실제로 이런 일은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흔한 일이다. 화가 났을 때 후우! 하고 숨을 길게 내뿜으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초조할 때도 숨을 길게 내뿜으면 괜찮아진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화가 나거나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곤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므로 평소에 숨을 길게 내뿜는 호흡 법을 익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하면 언제 어디서나 고요한 마음가짐과 올바른 몸가짐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붓다가 창안한 안반수의 법은 생리학적 측면에서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심리학적인 면에서 볼 때에도, 인간을 최고의 정신 상태로 인도하는 호흡법이다.《잡아함경》 제26권 <오법경 五法經>에서 붓다는 안반념법(安般念法)을 통해 죄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설법하고 있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머무셨다. 이때 부처님이 여러 비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 법이 있어 이로움이 많으리니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안반수의)으로 닦으라. 다섯 가지 법은 무엇인가. 깨끗한 계(戒)인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Pratimoksa의 율의(律儀)에 머물러서 잘 갖추어 행하고, 작은 죄 라도 능히 두려워하여 계행을 잘 간직한다. 이것이 첫 번째 법이다.
이로움이 많으리니 안나반나념으로써 수습하라. 또한 다음으로 비구가 행해야 할 도는 욕심과 일을 적게 하고 애쓰는 것이 적절하다. 이를 두 번째 법이라 한다.
이로움이 많으리니 안나반나념으로써 수습하라. 또한 다음으로 비구는 먹고 마심에 있어서 양을 알고, 많고 적음의 중간을 취하나니 먹고 마시는 데 있어서 욕심을 일으키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마음을 한결같이 가진다. 이를 세 번째 법이라고 한다.
이로움이 많으리니 안나반나념으로써 수습하라. 또한 다음에 비구는 초저녁이나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사유를 골똘히 하나니 이를 네 번째 법이라 한다.
이로움이 많으리니 안나반나념으로써 닦으라. 또한 다음에 비구는 한가하고 안온한 숲 속 에서 모든 시끄러움과 어지러움을 떠난다. 이를 다섯째 법이라 한다.
이로움이 많으리니 안나반나념으로써 수습하라.'이렇게 설법하시니 모든 비구가 부처님의 말씀을 기쁘게 여겨 받들어 행하였다."이처럼 붓다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호흡에 정신 을 집중하여 계를 지키라고 가르치고 있다.
도덕적인 계율을 지키고, 욕심을 적게 가지고, 음식에 지나침과 부족함이 없게 하고, 잠자는 것을 탐내지 말며, 한가한 곳에서 숨의 들어오고 나감을 생각하여 한 결 같이 수행하는 다섯 가지 법은 비구와 같은 수행자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일반인에게도 이로운 가르침이다. 특히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지나친 욕심 때문인데, 호흡과 정신통일로 지나친 욕심까지도 조절할 수 있다고 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호흡
안安은 (마음이) 정定이 되고, 반般은 동요하지 않으며, 마음이 흩어 지지 않는 것이다.
호흡에 있어서 들숨과 날숨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들숨이 길든 짧든, 그 숨에 정신을 집중하면 마음과 몸이 안정된다. 몸이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가만히 있지 못하거 나, 마음이 적정 순일하지 않고 불안하고 초조하거나 또는 혼탁하여 동요하는 것은 호흡에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정신을 들숨에 집중하여 생각이 한 결 같이 따르면 마음은 고요한 적정의 세계에 안주한다.
정定이란 마음이 고요하여 더없이 순일한 경지에 이른 상태이다. 이러한 경지를 삼매 (三昧)samadbi나 등지(等至)라고 하며 정(定)이라고도 한다. 정에 들면 어떤 사물을 대하 더라도 그 사물의 진상을 뚜렷하게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대상으로부터 받아들여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진실 그대로 분명하게 인식되어 적정함과 순일함을 잃지 않게 된다.
이러한 경지는 들숨에서 비롯된다. 만일 숨이 들어오지 못한다면 마음이 착란을 일으켜 사물의 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광란을 일으켜 고통을 가져 온다. 숨을 내보낼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앞에서도 말했듯이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서 는 숨을 길게 내보내거나 짧게 내보내면서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고행자들의 호흡 수련이 건강이나 불사를 성취하기 위한 특수한 방법으로써 개척된 반면에, 붓다의 호흡법은 자연 그대로의 호흡을 명상함으로써 해탈에 이른다. 주어진 모든 법을 버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잡아함경》 제26권 <안나반나념경>에서 붓다는 이렇게 설법하고 있다. "마땅히 안나반나(안반)의 염(念)(수의)를 닦으라. 비구가 안나반나의 염을 많이 닦으면 몸과 마음이 평안해진다. 그리하여 깨달음에 있어서나 보고 느낌에 있어서 고요하고 순일한 가운데 분명한 생각 이 일어나 닦고 익힘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호흡이 고르면 몸과 마음이 안정된다. 호흡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는 호흡과 생각을 같이 맞추어야 한다. 우리는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여 의식적으로 그것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 을 알아야 한다. 의식을 통해서 잘못된 호흡을 올바르게 바꾸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 의 몸과 마음은 대게 따로 떨어져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호흡하는 동안 마음이 제멋대로 달려 나가기도 하고, 다른 생각에 잠기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호흡이 올바르게 이루어 지기는 어렵다. 예컨대 마음이 어떤 일에 집착하여 골몰해 있을 때에는 들숨이 주가 된다. 따라서 나가는 숨이 줄어들게 되어 체내의 나쁜 독소가 그만큼 덜 배출된다.
탐욕에 끌려 있다든지, 마음속에 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든지, 슬픔이나 후회, 의심, 자포자기 등에 빠져 있으면 호흡도 고르지 않게 된다. 나가는 숨을 의식적으로 길게 내뿜는 것을 되풀이하는 동안에 호흡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고, 이에 따라 마음도 순일한 적멸 (寂滅) 상태로 가게 된다.
이처럼 의식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중에 올바른 호흡이 이루어지면 마음은 절대 안정의 상태 에 머물게 된다. 이제까지의 산란한 마음은 진정되고 고요한 마음이 찾아온다. 현대인들은 복잡한 사회생활 때문에 정신적인 안정을 찾기가 어렵고 불안이나 근심속에서 살아가기 쉽다. 이런 생활을 바로잡기는 쉽지 않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해 진정제나 수면제에 의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몸이 좀 불편 하면 우리는 흔히 약에 의존하려고 하나 이는 매우 잘못된 습관이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질병에 대한 저항력도 가지고 있으며 생명을 재생시키는 힘도 갖추고 있다. 이런 힘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력하므로 잘 활용해야 한다.
혼탁하거나 산란한 마음, 불안과 초조, 비통함이나 분노 등은 모두 우리의 마음속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마음도 좌우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내 마음 은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누구나 이 평범한 사실을 깨달을 수는 있지만 실상은 마음 대로 되지 않는다는 데에 인간의 한계가 있다. 붓다는 평범하지만 깨닫기 어려운 것을 만인 이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친다.
*무위의 도에 이르는 길
안반수의란 마음을 제어하여 무위의 경지를 얻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호흡을 조절하여 그릇된 호흡 습관을 고치면 드디어 의식을 집중하지 않아도 무의식 속에서 올바른 호흡이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자신의 뜻대로 제어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습관들이기 나름이다. 습관을 제2의 천성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 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계戒는 도덕적인 규범을 뜻하기도 하지만 좋은 습관을 익힌다는 의미도 된다. 누구나 어떤 것이 좋고 나쁜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쁜 것을 멀리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에 따르는 보이지 않는 힘이 소멸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힘을 업력(業力)이라고 하는데, 즉 쌓이고 쌓인 훈습력(薰習力)을 말한다. 무서운 이 훈습 력은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만 떼어버릴 수 가 있다. 마음으로 지은 업력뿐만 아니라 몸에 배인 습성도 끊임없는 의식적 노력을 통해 바로잡을 수 있다. 예컨대 보통 여자는 흉 식 호흡을, 남자는 복식호흡을 한다.
그러나 남자가 복식호흡을 잘 익히지도 않고 그냥 하게 되면 복식도 흉 식도 아닌 무질서한 호흡이 되어 여러 질병에 걸리기 쉽다. 여자가 복식호흡을 익히면 여러 가지 이득을 볼 수 있다. 흔히 복식호흡을 행하는 남자도 훈련을 통해 제대로 익히지 않으면 안되며, 여자 역시 여러 질병을 이기는 데에 유익한 복식호흡을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흔히 복식호흡으로 위장병 등이 치유되는 경우를 볼 수 있듯이, 사람은 의식적으로 노력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신체조직은 바꿀 수 없으나 그 기능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붓다가 가르친 안반수의 법 역시 습관이 된 나쁜 호흡을 의식적으로 바로잡으려는 훈련 이다. 숨이 나갈 때 충분히 나가고 들어올 때 충분히 들어오면 그 호흡은 완전하다. 그러나 습관을 잘못 들이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잘못된 호흡을 바로 잡기 위한 호흡 훈련이 필요하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뿜는 것은 자율신경의 작용으로, 자율신경은 정신 의 지배를 받으므로 정신집중을 통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되어 호흡도 자연히 조절된다. 마음을 제어한다는 말은 우리의 마음이 제멋대로 달리지 않게 하고 한 곳으로 몰아간다는 의미이다.
마치 말을 타는 이가 고삐를 늦추거나 조이면서 말을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과 같다. 마음의 제어야말로 마음 수행의 요체이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은 심조복(心調伏)이다. 마음 을 잘 다스려서 내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도록 하는 수행이라는 뜻이다. 불교는 마음공부 에서 그친다. 자신의 마음을 임의로 조절할 수만 있다면 생사의 초월이 바로 거기에 있음을, 또한 열반의 세계도 거기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空과 定
안(安)은 있음이요 반(般)은 없음이다. 마음이 있는 것만은 생각하면 도를 얻지 못하고, 마음이 없는 것만을 생각해도 도를 얻지 못한다. 있는 것만을 생각하지도 않고, 없는 것만을 생각하지도 않으면 이것이야 말로 공과 정의 마음이므로 도를 따르는 것이다. 있다는 것은 만물을 일컫고, 없다는 것은 의혹을 일컬으니 역시 공이 된다.
우리는 흔히 숨을 들이마시면 공기 중에 있는 산소가 코를 통해 폐 속으로 들어와 폐에 있는 피를 깨끗이 만들어 온몸으로 돌게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숨을 내뿜을 때에는 폐로 돌아온 핏속의 노폐물을 밖으로 내보내 우리 몸속을 깨끗이 정화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들숨은 몸에 유익한 기운을 공급하고, 날숨은 체내의 나쁜 기운을 배출한다고 생각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어떤 실재하는 존재나 무, 즉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고정관념 속에서 호흡을 행하게 된다. '있다'거나 '없다'는 생각이 고정관념으로 굳어지면, 그 관념에 집착하게 되어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이 순리를 잃게 된다. 있는 것만을 생각하여 숨을 들이마시거나 없는 것만을 생각하여 숨을 내보내면 호흡의 조화가 깨지기 때문이다.
호흡은 들어오고 나가는 데 그 화가 있다. 들어오기만 하거나 나가기만 해서는 안 된다. 들어오면 나가고, 나가면 들어와야 호흡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건강이 유지되고 마음의 안정 도 얻을 수 있다. 인간은 항상 '있다'거나 '없다'는 상대적 가치관에 끌려 어느 한쪽에 치우 쳐 집착하기 쉽다. 그러나 어느 한 극단에 끌리면 도리에 어긋나며 진리에 역행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어느 한쪽 극단에 끌리지 않는 삶의 길인 중도(中道)를 가르친다. 이것이 공(空) 이요 정(定)이다. 일상적인 호흡에서 들숨을 통해 산소를 들이마신다고 생각하면 '있다'는 고정관념에 끌리고, 날숨을 통해 탄산가스 등의 나쁜 요소를 배출한다고 생각하면 '없다'는 고정관념에 끌리게 되므로, 그것은 중도나 공이 아니다. 올바른 호흡을 하기 위해서는 공이 나 정에서 떠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산소를 흡입한다거나 탄산가스를 뱉는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무심 (無心) 속에서 오직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만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한다는 개념이지만 사실상 이 세상에 실체로서 존재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실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집착일 뿐이다. 이 집착 때문에 대상이 없어졌을 때 고민이 생기는 것이다. '있다'는 것도 없고 '없다'는 것도 없다. 따라서 만물도 만물이 아니므로 없어졌다고 해서 의혹에 빠질 필요도 없다. 만물이 있다는 고정 관념이나 없어진 데 대한 의혹의 고정관념은 수의, 즉 정신집중을 통해서 없앨 수 있다 정신집중은 긍정인 유(有)나 부정인 무(無)에 대한 고정관념과, 들어 오고 나가는 것에 대한 집착을 없애 준다.
만물에 대한 긍정은 집착을 일으키며 부정은 자포자기와 허무에 빠지게 한다. '있다'는 데에도, '없다'는 데어도 치우치지 않고 공과 정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다. 호흡 역시 삶이라는 생명 현상의 하나이니, 올바르게 이루어지려면 공과 정의 상태에 있어야 함이 당연하다.
*인연법으로서의 호흡
안(安)은 인연의 근본이며, 반(般)은 있을 바가 없는 것이다. 도인은 좇아오는 바가 없는 근본을 알고, 또한 있을 바가 없는 멸을 안다. 이것이 수의이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인연법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 이 세상 에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원인과 결과는 이것과 저것의 관계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인해 저것이 있다는 붓다의 단언은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엄연한 사실이고 엄숙한 진리이다. 호흡도 마찬가지로 이런 연기(緣起)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들숨은 공기가 저절로 들어오는 것도, 어떤 절대자의 의도에 의해 피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폐 속으로 공기가 들어오도록 신체구조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의 늑골을 치켜 올리고 횡경 막이 수축하여 아래로 처지면 가슴이 넓게 펴져 숨이 들어 온다. 그러나 이런 신체구조를 갖추었더라도 공기가 없으면 호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기 와 폐, 횡경 막, 늑골 등이 서로 어울려 자율신경의 반사작용에 의해 숨이 폐 속으로 들어온 다. 자율신경의 작용은 호르몬 분비에 의해 이루어지고, 호르몬 분비는 숨을 들어오게 하겠다는 의식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의식이 근본적인 인(因)이라면 다른 것은 연(緣)이 되어, 두 가지가 화합함으로써 비로소 숨이 폐로 들어오게 된다. 공기와 폐가 있기 때문에 정신이 있다고 한다면 유물론이요, 정신 이 있기 때문에 공기와 폐, 횡경 막이 있다고 한다면 유심론이다. 어느 쪽이 더 근본적이라 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종교는 정신이 더 근본적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인과 연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이며, 어느 것이 더 근본적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인과 연이 어울려서 호흡이 이루어지는지가 더 중요하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현상을 볼 때, 들어오는 숨이 근본이 되어 나가는 숨이 있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 들어오는 것이 없으면 나가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가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호흡도 예외는 아니어서 들어온 공기는 내보내야 한다.
그래서 붓다는 들숨이 근본 인연이요, 날숨은 있을 바가 없다고 했다. 즉 들어오는 숨은 근본 인연이므로 들어오게 해야 하고 머물 곳이 없는 숨은 나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살아가려면 공기가 충분히 들어오게 했다가 다시 나가도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들어온 숨을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주의 이치에 맞지 않는다.
진리를 아는 도인은 모든 것이 본래 어디에서 오며 또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 공기가 충분히 들어와 생명에 활력을 주고 또 충분히 나가서 더러움을 없애 생명의 발전을 기한다. 이렇게 생과 멸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생과 멸이 지속되면 생과 멸을 초월하게 된다. 우리의 인생은 생과 멸 속에 있으면서도 그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포는 찰나에 생하고 찰나에 멸한다.어디까지가 생이고 어디까지가 멸인지를 알 수 가없다. 우리의 생명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호흡도 어디까지가 들어오는 숨이고 어디까지가 나가는 숨인지 알 수 없게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공의 도리요 연기의 도리이다.
찰나의생, 찰나의 멸이 무한히 되풀이되는 삶이 정신을 위주로 하여 영위된다고 한다면, 그 삶은 정신이 집중되어 그것과 하나가 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수의로 호흡이 올바르게 행해질 수 있다고 한 말의 뜻이다.
《잡아함경》 제26권의<단각상경(斷覺想經)>은 붓다의 가르침을 이렇게 전한다. "마땅히 안나반나의 염(念)을 닦으라. 안나반나의 염을 닦아서 많이 수습하면 여러느낌이나 생각들을 끊게 된다. 안나반나의 염으로 많이 수습하여 여러 가지 느낌이나 생각을 끊는다 함은, 비구가 마을이나 도성에 머물러 있을 때라도 위에서 설법한 바와 같이 나가는 숨이 끊어지는 것을 잘 배운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가는 숨이 끊어지는 것을 잘 배운다,'는 숨을 충분히 길게 내뿜어서 멸의 극치에 이르러 자연히 들어오게 하라는 의미이다. 멸의 극치에 생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으로서의 호흡
안(安)은 맑음이고, 반(般)은 깨끗함이 된다. 수(守)는 없음이 되며 의(意)는 하고자 함이다. 이것은 청정무위이다. 없다는 것은 살리는 것이다. 하고자 함은 생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는 고통을 얻지 않기 때문에 살게 된다.
숨을 참았다가 쉬면 얼마나 상쾌한가. 닫았던 숨통을 열어 숨이 들어오면 정신이 맑게 소생 하고, 다시 그 숨을 내쉬면 몸에서 나가지 못하고 막혀 있던 답답함이 후련 하게 가셔져 깨끗한 기분이 솟아난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쉽게 경험할 수 있다.
이 사실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숨을 들이쉬거나 내쉴 때 뇌의 정맥혈에 있는 울혈이 해소되어 머리가 상쾌해지고 마음이 안정된다. 따라서 호흡을 길게 하면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다. 마음이 안정되면 지혜가 열리고, 지혜가 열리면 선과 악, 탐욕이나 노여움에 끌리 지 않게 되며,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잠자는 자연의 순리 그대로 살되 걸림이 없는 무위 (無爲)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올바른 호흡은 폐의 피를 뇌로 돌리고 다시 심장으로 돌려보낸다. 탐욕이나 분노가 일어날 때 숨을 길게 내보내면 마음이 가라앉으므로 열 번 이상 되풀이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 감정 에서 벗어나게 된다. 화가 났을 때는 얼굴에 핏대가 올랐다가 마음이 진정되면 괜찮아진다. 그 핏대가 바로 뇌로 통하는 정맥의 울혈이다. 뇌나 심장의 울혈이 사라지면 산소를 많이 내포한 동맥혈이 뇌를 향하여 순조롭게 흘러 들어간다.
따라서 뇌세포가 활기를 띠고 정신활동이 건전해져 생명에 활기를 주게 된다. '수(守) 는 없음'이라고 한 것은 정신집중이 잘 되어 호흡에 의식이 함께 따르면 주객 대립이나 객관에 대한 집착이 없어져서 걸림 없이 텅 빈 상태에 있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의 마음을 의식적으로 호흡에 집중시키려면 올바른 호흡을 닦겠다는 마음이 앞서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이 완전하게 살아난다. 이를 '의(意)는 하고자 함이 다.' 라고 했다. 그러므로 안반수의의 내용을 '청정무위(淸淨無爲)'라고 할 수 있다.
청정무위란 몸과 마음이 걸림 없이 건강하고 평온한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무위' 라는 말은 노자(老子)나 장자(莊子)가 즐겨 쓴 말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 외에 '자연 그대로의 움직임'이라는 뜻도 있다.
무위란 곧 올바른 삶이다. 올바른 삶에는 괴로움 없는 즐거운 삶을 누리려면 먼저 정신을 집중하고 올바른 호흡을 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가르쳤다. 병중인 사람의 호흡은 고르지가 않다. 즉, 호흡이 얕고 짧으며 들어오고 나감이 리듬 없이 무질서하다. 체내에 흐르고 있는 혈액, 호르몬, 임파액 등이 정체된 곳에서 암세포가 발생한다고 한다.
혈액순환이 잘되고 임파선이나 호르몬선 등이 건강하여 그로부터 유출되는 것들이 잘 통하 게 하려면 횡경 막의 상하운동이나 흉곽의 확장·축소 운동이 잘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른 호흡 상태를 유지해야만 한다. 현대인들은 부자연스러운 생활양식으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입고 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가장 손쉬운 호흡 훈련부터 시작해야 한다.
호흡을 중시하는 것은 명상의 산실인 인도의 뿌리 깊은 전통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기식 (氣息)인 프라나prana를 생명의 기운, 생명 그 자체, 우주의 근본원리라고 보았다. 인류 최고의 종교 성가집인《리그베다 Rig-veda》의 '푸루샤 수크타purusa sukuta라는 찬가에 는, 우주의 시원인 '푸루샤'라는 원인(原人)에게 공희를 바치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푸루샤의 숨으로부터 바람이 생겼다고 한다. 또한 인도 최대의 철학서인 《우파니샤드 Upanisad》(Kausitaki-Upanisad, Tait-tiriya-Upanisad)에서는 숨을 우주의 원리인 브라만Brabman과 아트만Atman이라고 했다. 숨은 우주의 근본원리이다. 숨은 개인 의 본체이면서 창조신과 같은 능력이 있다. 숨은 모든 생명체의 본체라는 생각은 기원전 10세기경부터 있다가 기원전 6세기 경 우파니샤드 시대에 이르러 들숨과 날숨에 각각 뜻이 부여되어 생리현상이나 장수 법, 그리고 윤회설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즉 들숨과 날숨으로만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음식을 삼킬 때 아래로 내려가는 숨을 프라나prana, 위쪽으로 올라와서 언어활동을 지배하는 숨을 우다나udana, 음식을 소화시키 는데 관여하는 숨을 사마나samana, 배설이나 출산에 관련하여 아래로 내려보내는 숨을 아파나apana, 전신을 돌아다니며 몸의 운동을 관장하는 숨을 비야나 viyana라 하여 자세히 구별하게 되었다.
숨을 장수, 질병의 치유, 풍요나 출산과 관련 시킨 노래도 있다.
숨은 번개로써 풀과 나무에게 소리쳐 그들이 번식력을 갖게 하고 때 많은 것을 출산한다. 숨이 넓은 땅에 비를 내릴 때 모든 식물이 태어난다.
이러한 생각들이 발전되어 숨을 쉴 때 들어오는 공기가 곧 우리의 생명력이라고 믿게 되었다. 또한 고행자들은 죽지 않기 위해 숨을 한껏 들이쉰 후 그 숨이 나가지 못하게 하는 호흡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의식의 집중과 무의식의 호흡
안(安)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고, 반(般)은 일어난 것이다. (일어나지) 않은 것이 이미 일어 났으면 곧 수의가 된다. 만약 이미 뜻을 일으키면 곧 수의가 된다. 만약 이미 뜻을 일으키고 곧 달려 가서 지키지 않으면 당연히 돌아온다. 그렇게 때문에 부처님이 안반수의를 설법하신 것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며 끝은 또한 새로운 시작이므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호흡도 들숨에서 시작하여 다시 시작으로 이어진다. 나가는 숨도 들어온 숨이 극치에 이르 면 나가게 된다. 모든 존재의 처음을 들숨에 비유한다면, 들숨은 아직 존재하기 이전의 것이 므로 존재의 연원이다. 생명 활동은 들숨에서 비롯되지만, 들숨의 단계는 시작에 불과할 뿐 날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취된다. 들숨을 통해 산소가 들어와서 혈관의 피로 흡수 되고, 폐를 통해 가스교환이 이루어져 모든 세포에 공급되는 과정을 거친 후에 생명이 활력을 얻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의식 없는 호흡이 있을 수 없으며, 육체적인 운동인 호흡과 호흡하고자 하는 의식이 하나로 융합되고 있다고 본다. 이때 들숨과 날숨이 완전히 행해지려면 정신을 집중 해야 한다. 만일 정신을 집중하지 않고 예사롭게 호흡하면 길고 짧은 호흡의 리듬에 혼란이 와서 생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래서 '만약 이미 뜻을 일으키면 곧 수의가 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호흡 운동을 조절할 경우 일시적인 조화를 가져올 수는 있으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지 에는 도달하지 못하여 완전한 호흡이 되지는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 방심하면 다시 예사 스러운 호흡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호흡을 올바른 호흡으로 바꾸어 그것을 굳히려면, 의식적으로 조절하는 단계를 지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실제 사람에게 복식호흡을 익히게 하려면,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복식호흡을 하게끔 수련시켜 습관이 되게 해야 한다. 자율신경을 조절하는 힘이 생기면 무의식적으로 복식 호흡을 할 수 있게 된다. 언제 어디서나 올바른 호흡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의식이 무의식의 차원에서 집중되어 있으므로 정신과 육체가 안정되며, 따라서 올바른 몸가짐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유지 할 수 있게 된다. *호흡과 色·受·想·行·識
안(安)은 오음(오온)을 받고, 반(般)은 오음을 제거한다. 수의는 깨달음의 인연이 되며 몸과 말과 뜻에 따르지 않는다. 수의란 집착하는 바가 없는 것으로 집착하는 바가 있으면 수의가 되지 않는다. 마음이 일어나면 다시 멸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면 도가 되고 이것이 수의가 된다. 수의는 마음이 생(生)하지 않게 한다. 생하면 그것으로 인해 죽게 되므로 수의가 아니다. 마음 이 죽지 않게 하라, 죽으며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생하나니, 죽지 않는 것, 이것이 도가 된다.
우리의 몸은 물질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곧 물질적인 색(色)과 네 가지 정신적인 명(名)이다. 네 가지 정신적인 명이란 물질과 외부 세계를 감시하는 정신작용의 힘인 수(受), 그것을 다시 생각하여 기억 하는 힘인 상(想),그 생각을 일으키는 힘인 행(行), 외계의 사물을 인식하는 작용의 식(識) 이다.
물질과 네 가지 정신작용이 어울려서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그 몸 안에 우리의 생명 이 담겨 있다. 따라서 숨을 들이마시는 것은 이들 다섯 가지 요소를 받아서 지니기 위함 이다. 그런데 이들은 번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번뇌는 이 다섯 가지 구성요소에 대한 견해가 그릇되어 있을 때 나타난다. 즉 이 요소들이 본래 실체가 없이 단지 인연에 의해 모인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다.
이런 잘못된 생각에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나 날숨으로 이 고통을 없앨 수 있다. 번뇌를 불러일으키는 다섯 가지 구성 요소인 색, 수, 상, 행, 식이 우리를 괴롭히지만, 이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놓으면 번뇌는 사라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들숨이 오음(五陰)(오온五蘊)을 받는다면, 날숨은 들숨으로 인해 생긴 번뇌를 없앤다. 호흡은 오음을 받고 다시 이를 제거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오면 가고 가면 오며, 생하면 멸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것이 곧 인연이다. 즉 숨이 들어오면 나가게 되어 있다. 인간은 번뇌를 갖고 사는 동시에 그 번뇌를 없애면서 살기도 한다.
이 역시 인연법에 의한다. 생명을 받아서 잘 유지하는 것이 인간의 소망인 동시에 생명이 소멸할 때가 되면 그에 순응하는 것 역시 인간의 소망이다. 다시 말해서 삶이 인간의 소망 인 동시에 죽을 때 잘 죽는 것도 인간의 소망이다. 우리는 이 모든 현상이 인연법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인연법을 아는 힘은 바로 호흡에 대한 정신집중에서 비롯된다.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을 의식하여 그 실상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 되기 때문이다. 오고 가는 것, 받고 제거하는 것, 죽고 사는 것 등을 통해서 그 실상을 파악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오온을 떠나서는 공(空)의 깨달음이 있을 수 없다. 오온 자체를 통해서 오온이 공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번뇌를 통해서만 번뇌를 떠날 수 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삶과 죽음을 통해서 그것을 초월한 세계로 갈 수 있다. 정신을 숨에 집중하여 인연법에 따라 들숨과 날숨을 올바르게 행하면 몸과 말과 마음이 도 이에 따르게 된다. 호흡이 바르지 않으면 몸과 말과 마음이 제멋대로 움직여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곧 인연을 깨닫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지킨다는 것은 어떤 사물에 집착하는 바가 없이 공의도리, 즉 인연의 도리에서 떠나지 않음이다. 사물에 집착하게 되면 정신집중이 잘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마음이 어떤 사물에 집착하는 까닭은 그것을 실체로서 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마음도 실체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집착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은 일어나면 곧 멸하므로 생과 멸은 마음속에서 찰나 동안에 반복된다. 그러므로 마음이 올바른 상태에 있으려면 그것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생과 멸도 있을 수 없다. 생과 멸이 있으면서도 없는 세계를 도(道)라고 한다. 도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생과 멸의 되풀이 속에서 그것을 떠난다는 뜻이다.
수의는 호흡에 정신이 집중되어 호흡과 하나가 된 상태에서, 들어오는 숨이면서도 들어온다 는 생각이 없고 나가는 숨이면서도 나간다는 생각이 없다. 정신을 호흡에 집중 할 때, 처음 에는 숨이 들어오고 나가고 있다고 느낀다. 이때에는 생과 사가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신 을 집중하면 드디어는 숨이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느끼지 않게 된다. 이때에는 생과 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안반수의의 열 가지 내용
안반수의에는 열 가지 지혜가 있다. 숨을 세는 수식(數息), 숨과 마음이 서로 따르는 상수 (相隨), 마음이 숨에 머무는 지(止), 자재로운 상태인 관(觀), 자신에게 돌아오는 환(還), 깨끗한 상태인 정(淨), 그리고 네 가지 진리인 사제이다. 이 열 가지 지혜가 이루어지면 이른바 삼십칠도품 경에 합치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안반수의, 즉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에 정신을 집중하는 데에는 열 가지 지혜가 있다. 첫째는 수를 세는 것으로 가장 손쉬운 것부터 시작한다. 둘째는 상수로서 호흡과 마음을 서로 따르 게 한다. 마음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호흡에 따라 하나가 되게 한다. 수를 세면 마음이 그 수에 쏠려 호흡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수를 셈으로써 수와 호흡을 각각 존재하 게 하긴 하나 마음이 수를 헤아리고 있기 때문에 멀리 달려 나가지 않는다. 이에 익숙해져 마음이 어떤 한 가지에 머물게 되면 그 다음에 호흡 자체에 마음을 쏠리게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이루어지면 마음과 호흡이 서로 따르게 된다.
셋째 지로서, 마음을 그친다. 마음을 그친다는 것은 호흡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한 곳에 머물러 있는 상태이다. 넷째는 관으로, 마음이 호흡에서 떠나 외계의 사물을 대할 때 잡된 생각 없이 관조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는 환이니 마음이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돌아와서 밖으로 달려 나가거나 흩어지는 일 없이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정이니,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청정본심(淸淨本心) 이다.
다음은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네 가지 진리다. 청정한 본심에 이르게 되면 비로소 일체가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괴로움의 원인과 그것을 없애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며, 드디어 올바른 길도 알게 된다. 이처럼 열 가지가 모두 이루어지면 안반수의가 완성된 다. 이것은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으로 설법하고 있는 내용과 합일된다,
'삽십칠품경(三十七道品)'이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서른일곱 가지 수행 방법이니 앞에서 말한 삼십칠도품이라고도 한다. 도품은 깨달음의 종류라는 뜻으로, 도는 지혜, 곧 깨달음이 며 품은 종류이다. 먼저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이를 사념처 (四念處)라고 한다.
부모에게서 받은 육신이 부정한다고 관(觀)하는 신념처(身念處), 우리의 마음이 받아들이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 참된 것이 아니라고 관하는 수념처(受念處), 우리의 마음이 항상 변하 고 있다는 무상(無常)을 관하는 심념처(心念處),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고 관하는 법념처 (法念處)이다. 붓다는 이 네 가지를 순차적으로 총괄하여 관하라고 설법한다.
다음은 네 가지 올바른 노력을 뜻하는 사정근(四正勤)이 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나쁜 습성이나 마음을 끊기 위해 애쓰는 율의단(律儀斷), 이미 나타난 악행이나 마음을 끊으려고 노력하는 단단(斷斷)아직 나타나지 않은 선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수호단(隨護斷), 이미 나타난 선함을 더욱 증대하기 위해 힘쓰는 수단(수斷)이다. 이 네 가지 노력들은 마음 의 태만을 끊음으로써 행할 수 있다.
이런 수행이 이루어져서 보다 높은 단계에 이르면 또 네 가지가 더 있다. 바라는 바가 뜻 대로 되는 욕여의족(欲如意足), 노력한 것이 뜻대로 되는 정진여의족(精進如意足), 마음가짐 이 뜻대로 되는 심여의족(心如意足), 지혜가 뜻대로 나타나는 혜여의족 (慧如意足)이다.
다음으로는 오근(五根)이라는 다섯 가지 훌륭한 힘이 나타난다. 뛰어난 믿음이 생기는 힘 〔信根〕,부지런히 노력하는 힘〔精進根〕,올바른 것을 생각하는 힘〔念根〕, 한 결 같이 마음을 고요히 하는 선정의 힘〔定根〕, 지혜로 세상을 바라보는 힘〔慧根〕등 이다. 또 다른 힘으로는 믿는 힘〔信力〕,부지런히 노력하는 힘〔勤力〕,올바른 것을 생각하는 힘〔念力〕,선정의 힘〔定力〕,지혜의 힘〔慧力〕을 얻게 된다.
다음으로 깨달음의 지혜를 도와주는 일곱가지를 닦게 되는데, 모든 법을 가려서 선악을 선택하는 택법각지(擇法覺支), 수행의 바른 길로 정진하는 정진각지(精進覺支), 마음에 선함 을 얻어서 기뻐하는 희각지(喜覺支), 그릇된 번뇌를 제거하고 능히 선한 것으로 나아가는 제각지(際覺支), 밖의 세계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 사각지(捨覺支), 명상에 들어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정각지(定覺支), 생각을 잘 가다듬어 지혜로 가는 생각만을 하는 염각지 (念覺支) 등이다. 이를 칠각지(七覺支)라고 한다.
이것이 모두 이루어지면 드디어 팔정도를 닦아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팔정도는 불교적인 수행이 모두 이루어져서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가장 올바르고 거룩한 상태에 도달한 경지 이며, 곧 깨달은 자의 삶이다.
팔정도는 인생이나 세계에 대한 견해가 공 그대로 받아들여져 지혜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정견(正見), 어떤 행위를 하기 전에 올바른 생각을 지니고 결의하는 정사유(正思惟), 올바른 생각에 의해서 남을 이롭게 하는 말을 하는 정어(正語), 일상 속에서 스스로 그릇된 행위를 하지 않고 진리만을 행하는 정업(正業), 일상생활에서 정당하고 남에게 해가 없는 생계수단으로 살아가는 정명(正命), 극단에 떨어지지 않는 중도로써 올바르게 부지런히 애쓰는 정정진(正精進), 항상 무상과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과 실체가 없음을 생각 하는 정념(正念), 고요하고 또렷한 마음가짐인 정정(正定)의 여덟이다.
이상을 합하면 37가지의 수행이 된다. 삼십칠도품경의 이 수행들은 안반수의경의 십 힐 (十 )에 해당한다. 그 상응 관계는 다음과 같다.
수식(數息)- 사념처(四念處), 상수(相隨)- 사정근(四正勤), 지(止) ---- 사여의족(四如意足) 관(觀) ---- 오근(五根), 환(還) ---- 오력(五力), 정(淨) ---- 칠각지(七覺支)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
*인연을 살리는 수의
수의는 비유하면 등불과 같아서 두 가지 인연이 있다. 하나는 어두움이요, 두 번째는 밝음이다. 수의는 첫째로 꺼졌을 때의 어리석음이요, 둘째로는 비춰 볼 때의 지혜이다. 수의는 인연에 따라서 생하는 마음이니 마땅히 인연을 인연으로 하여 집착하지 말라. 이를 수의라고 한다.
호흡에 마음을 두는 이유가 있다. 호흡과 마음이 합일되었을 때와 그렇지 않고 마음이 제멋 대로 움직일 때와는 호흡작용이나 정신작용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 호흡에 정신을 집중 하면 분명히 호흡을 의식하게 된다. 마치 등불이 밝게 비추는 것과 같다. 등불이 사물을 밝 게 비추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사물을 밝게 비추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사물을 밝게 알 아차린다. 만일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산란한 상태에 있다거나 어두운 상태에 있으 면 사물을 알아차릴 수 있는 힘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를 등불에 비유한 것이다. 등불은 본래 밝게 하는 힘이 있으나 어두움이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또한 밝게 나타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등불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본래의 성질이 파괴되어 어리석은 번뇌와 망상에 빠지는 면이 있고, 그와 반대로 자리를 알아차려 진실을 보는 본성을 보이는 면이 있다.
그러므로 정신집중을 통해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사물의 실상을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인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본성은 밝고 깨끗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둡고 더러운 면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어두움과 더러움을 인연에 의해서 밝고 깨끗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수의는 밝고 깨끗한 면이 드러나게 하는 길이다. 따라서 이러한 본성을 나타내는 수의에 있어서 밝음이나 어두움, 깨끗함과 더러움의 어느 것에도 집착해서 는 안 된다. 한쪽에 집착하면 그와 다른 면이 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의 적정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어두움과 밝음이 없다. 또한 어리석음과 현명함도 없다. 악이나 선 중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밝음에 대한 집착은 어두움을 전제로 해서 성립하며 깨끗함에 대한 집착은 더러움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더러움 혹은 깨끗함이라는 극단에 떨어져 있는 것이다. 선과 악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청정본심은 더러움이나 깨끗함, 어두움이나 밝음, 악이나 선을 떠나 있지만, 또한 더러움, 깨끗함, 어두움과 밝음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의 청정본심도 서로 상대되는 가치를 인연으로 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의는 상대되는 두 가치를 인연으로 해서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를 가는 길이다.
마음의 중도란 선과 악, 더러움과 깨끗함, 어두움과 밝음 중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멀리 하면서 깨끗함과 밝음으로 가는 길이다. '순신(順信)이 인(因)이요, 의방(疑謗)이 연(椽)이 된다.'는 말이 있다. 나에게 잘 따르는 것도 인연이요, 나를 의심하거나 비방하는 것도 인연 이다. 현명한 사람은 어떤 것이든 인연을 살린다.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도 나의 벗이요, 나를 의심하고 비방하는 사람도 나의 벗이라고 생각한다. 수의를 통해 이러한 세계가 이루어진다.
*세 가지 정신집중
수의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켜서 생(生)하지 않게 하고, 둘째는 이미 생한 것이 당연히 못쓰 게 되어 멸한다. 셋째는 이미 일이 이루어지면 당연히 이에 따라 억 만 겁을 헤아리더라고 후회하여 다시 짓지 않는 것이다. 지키는 것과 마음은 각각 다르다. 시방 (十方)의 일체를 깨달아 알되(그것을) 범하지 않고 보호함이 지키는 것이고, 그 무위를 깨닫는 것이 마음이다. 수의이다.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 곳에 머물러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다시는 흔들리지 않고, 잡된 생각도 일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이 미 고요한 마음이 이루어졌으나 다시 그 마음이 흔들려 없어지는 상태이다. 셋째는 이미 일 이 이루어졌으므로 그 마음을 잘 간직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언제까지나 잘못되지 않도록 하 여 다시는 마음이 흔들리거나 잡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이들 세 가지 마음가 짐 중에서 첫째가 가장 바람직하고 둘째가 가장 나쁘며 셋째는 중간에 속한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객관 세계를 대하면서 그에 이끌려 고요한 상태 를 간직하지 못한다. 그러나 수행을 하여 마음을 조복(調伏)하는 힘을 얻으면, 마음이 고요 한 상태에 머물러 다시는 흔들리지 않고 항상 어디서나 나 자신과 함께 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기까지는 지켜진 마음이 사라지기도 하고 달려서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밖으로 달려 나가는 마음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은 마음이 아직 고요한 곳에 머물지 못해 수양의 단계가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사라진 것을 되찾거나 달려 나간 마음을 잡기 위해서도 지속적인 수행이 필요하다.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어 떠나지 않음을 수의(守意) 라고 했는데, 여기서 수(守)(지킴)와 의(意)(마음)는 서로 다른 점이 있다. 한 곳에 머물러 떠나지 않음은 마음이 객관 세계의 모든 것을 대해서 깨달아 그로부터 떠나지 않음이다.
만일 그로부터 떠난다면 깨달음이 지켜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꽃 한 송이가 있다고 하자. 마음을 고요히 하여 꽃을 대하면 그 꽃의 빛깔이나 향기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리하며 마음과 꽃이 하나가 되면 꽃의 진실과 내가 깊은 곳에서 만나고, 그로 인해 서로 주고받음이 생겨 꽃에 대한 사랑이 솟아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꽃을 본마음이 꽃으로부터 떠나면 그 꽃의 진실을 감득할 수도 없고 나의 진실 또한 꽃을 향해 다가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꽃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그 꽃을 꺾어 버릴지도 모른다. 이런 관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일체의 객관적인 대상을 대할 때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깨달아 그 깨달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잘 유지해야 한다. 깨달음이 한결같이 지켜지면서 마음이 동요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무위(無爲)이다. 마음이 대상을 만나 잘못되지 않아야 한다는 말엔 이런 뜻이 있고 그것은 곧 수의를 뜻한다. 호흡에 의식을 집중하여 그 마음이 떠나지 않으면 일체의 그릇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불교 명상은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여 한 결 같이 머물러 있도록 하는 관법(觀法)이다. 관은 대상에 마음을 집중시켜 그 실상을 깨닫는 것, 곧 수의와 일맥상통한다.
*네 가지 즐거움 수의에는 네 가지 즐거움이 있다. 첫째는 원하는 것을 아는 즐거움이요, 둘째는 법을 아는 즐거움이 요, 셋째는 그침을 아는 즐거움이요, 넷째는 가능한 것을 아는 즐거움이다. 이것이 네 가지 즐거움 이다.
올바른 호흡으로 마음과 몸이 안정되면 몸과 마음에는 여러 가지 징표가 나타난다. 그 중에 서 즐거운 일이 생길 것이다. 그 거움은 마음의 조화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써 누구에게나 있 을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다면 아직도 마음과 몸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첫째는 하고자 하는 바를 아는 즐거움이 나타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 욕망에 따라서 모든 삶이 영위된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하루를 무의식 속에서, 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목적이 없는 사물은 없다. 모든 존재에게는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목적 없는 인간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일시적인 충동 에 의한 맹목적인 생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모르고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방도를 취한다. 올바른 호흡이나 마음을 가졌을 때에는 몸과 마음이 즐겁기 마련이다. 이 즐거움은 내가 살아 있다는 만족감 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 만족이란 바로 삶의 목적이 달성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하면 스스로 만족하고 즐겁게 된다. 이는 자연스러운 생명의 표현이다. 스스로 만족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행위야말로 나의 할 일이자 목표이다. 올바르게 호흡하면 서 그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면 내 생명이 바라는 바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 올바른 호흡을 통해서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때 생기는 즐거움은 내 생명의 근본 욕구가 채워지고 있다는 데에서 나오는 즐거움이다. 만일 호흡을 중단하여 들숨과 날숨을 들어오고 나가지 못하게 막는다면 괴로움 이 따르게 된다. 생명의 근본 욕구를 거역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법을 하는 즐거움이다. 법을 안다는 것은 모든 존재의 진실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알려져 거기에 머물게 되었을 때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다. 모든 존재가 있는 그대로 나타나면 그곳에 안주하여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하면 즐거움이 저절로 따른다. 이는 누가 주어 서 얻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난 것이다. 올바른 호흡과 정신집중으로 몸과 마음이 안온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서 진실이 환하게 드러나니 이때 의 즐거움은 더없이 크다. 진실이 서로 통하고, 질서가 서고,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 몸에 느껴지는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상태에 있게 되면 즐거움이 있다. 봄이 되면 꽃이 펴야 하고 아름다운 꽃은 우리를 즐겁게 한다. 마찬가지로 겨울에는 추워야 한다.
좋은 것을 즐겁게 느끼고 나쁜 것을 괴롭게 느끼는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에 의해 좌우된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때, 즐거움이 오면 즐겁고 괴로움이 오면 괴롭다. 그러나 마음이 격랑 속에 휩쓸려 있을 때는 즐거움도 즐거움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을 맑은 거울이 나 고요한 물처럼 유지하고 있어야 모든 사물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따라서 즐거움도 솟아나는 것이다. 이 즐거움은 절대적이다. 그렇게 머물고 있는 것이 불변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그침을 아는 즐거움이다.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그친 상태에서 느끼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그친 상태에서 느끼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이 세상 만물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서 그것들의 가치가 새롭게 발견되었을 때에 느끼는 즐거움이 법을 아는 즐거움〔法樂〕이지만, 마음에 동요가 생기면 그 즐거움이 사라질 수 도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신집중이 지속되면 사물을 대하는 심안(心眼)의 관찰력이 더욱 심화되어 사물의 진실을 파악하게 된다. 이때 다시 새롭고 깊은 것을 알게 되니, 그것은 그 사물에만 있는 진실이 아닌, 일체의 사물과 통하고 우주의 생명과 하나가 되는 보편성에 대한 발견이 다. 이 경지에서 마음은, 한 가지 사물을 대할 때마다 그 사물만이 가진 특수성과 아울러 우주적인 보편성도 통찰하게 되는 즐거움을 맛본다.
붓다의 6년 고행은 실로 괴로움을 참는 수행이었으나 보리수 밑에서의 명상 끝에 그것을 버리고 모든 사물에 마음을 집중하여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고행시의 생로병사가 는 모두 서로 모순된 것으로서, 해결되지 않는 갈등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보리 수 밑에서의 생로병사는 모순된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값지게 하는 새로운 가치로 각성되었기 때문이다. 생로병사가 없는 인생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존재 가치도 없는 인생이다. 생이 있기에 늙음과 병과 죽음이 있다. 찰나에 생하고 찰나에 멸하는 생명이 생로병사 속에서도 그것을 극복해 낸다는 데에 즐거움이 있는 것 이다. 붓다는 생로병사 속에서 절대 생명을 획득하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붓다의 깨달음은 실로 일체 만상에 대한 관심이 새로운 가치의 발견으로 승화된 것이다. 이처럼 안반수의는 호흡에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즐거움의 길이기도 하다. 넷째는 즐길 만한 것을 아는 즐거움이다.
즐거운 상태에 머무르면서 가히 즐길 만한 것을 충분히 맛보는 즐거움이다. 들숨의 상쾌함 이 극치에 이르렀을 때의 즐거움도 즐길 만하다. 그러나 날숨 또한 즐거움은 준다. 들숨과 날숨을 통해 그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이 가히 즐길만한 것임을 알면 자재(自在)에 머물게 된다.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나가면 나가는 대로 즐거움에 따를 뿐, 지나친 욕심을 부리 지 않는 절도가 필요한데, 이러한 절도 있는 즐거움이 가히 즐길 만한 즐거움이다.
정신집중은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가치의 한계 내에서 충분히 즐기고 즐거움을 얻는 방편이다. 붓다는 인생을 고(古)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인생이 고라는 사살을 모르는 사람은 인생이 즐겁다는 사실도 알 수가 없다. 고를 통해 즐거움을 얻었을 때 즐거움이 더욱 커지 면 그것을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가 있다. 붓다는 인생의 괴로움을 통해서 더 없는 절대적 즐거움에 머물렀고, 인생의 무상함을 실감했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한 절대가치의 삶을 살았다. 불교는 고를 깨달아서 낙(樂)으로 가는 가르침이며 무상을 통해서 영원한 삶을 사는 가르침이다.
*실천을 통해서 얻어지는 진리
법은 행이 된다. 얻음은 도가 된다. 수의에는 안과 밖에 여섯 가지 일이 있다. 수를 세 는 것〔數〕 서로 따르는 것〔隨〕, 그치는 것(止)이 밖이며, 관하는 것(觀), 돌아오는 것〔還〕, 청정하게 되는 것〔淨〕은 안이다. (안과 밖이 서로) 따르는 것이 도이다. 생각과 숨이 서로 따르며, 그치고 관하 고 돌아오고 청정하게 됨을 익히고자 하면 마음 이 도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떠나면 곧 여섯 가지가 바로 세간에 따른다.
법은 알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식을 얻으려는 것은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진리도 아니다. 흔히 이론과 실천을 논할 때, 이론은 좋으나 실천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많이 하곤 한다. 모든 문제 는 이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론이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실천방법에도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어떤 원칙에서 도출된 방법은 그 방법에 따라서 실천했을 때 예측했던 결과가 나타 나게 된다.
법은 근본원리에 의해 도출된 방법이다. 이런 방법은 실천을 통해 구현되고 그 실천이 바로 진리와 부합되므로 '법(방법)은 행(行)(실천)이 되고, 그 행으로부터 얻어지는 득(得) (결과)은 도(道)(진리)가 된다.'고 했다. 따라서 숨의 들어오고 나감에 정신을 집중하는 안반수의는 진리의 실천인 동시에 진리를 터득하고 진리 그것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앞에서 안반수의에는 여섯 단계가 있다고 했다. 이 여섯 단계를 다시 우리의 마음이 밖을 향해 나가는 것을 조절하는 것과, 안을 향해 들어오는 것을 조절하는 것으로 나누어 생각 할 수 있다. 수를 세는 것, 숨과 생각이 같이 따르면서 떠나지 않게 하는 수(隨), 그것이 한 곳에 머물러 떠나지 않게 하는 지(止)의 세 가지는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다스린다.
이와는 달리 마음이 어떤 사물을 대할 때 생각이 그리로 달려가서 그것과 결합되지 않고 나에게 다시 돌아오게 하는 관(觀), 나에게 돌아와 한 결 같이 머물러 있는 환(還), 머물러 있는 마음이 안과 밖 어디에도 집착 없이 깨끗하게 집중되고 있는 상태인 정(淨)의 세 가지 는 내 속을 향해 움직이는 마음을 다스린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 한 것은 호흡과 마음을 합일 시켜서 마음이 호흡을 따르게 하는 일이다. 숨이 나갈 때는 마음도 따라서 나가고 들어올 때는 마음도 따라서 들어오게 해야 한다. 숨과 마음이 합해져 서 나가는 숨과 마음이 함께 움직이지 않게되고〔止), 마음과 숨이 하나가 되어 있으면서도 마음이 숨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가 되고〔觀〕,
다시 여기에서 마음은 마음대로 어떤 사물에도 한결같이 집중 할 수 있는 상태가 되고 〔還〕, 나아가 그 집중이 한 곳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걸림 없이 집중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淨〕, 이런 상태를 잘 익히게 되면 마음은 진리, 곧 마음의 본래 상태에 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여섯 가지를 훈련해야 한다. 그리하여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청정한 상태에 있게 되면,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거기에 현혹되지 않으면서 세상사와 더불어 그것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수련은 이 세상에서 멀리 떨어지고자 하는 수행 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을 대하면서도 거기에 미혹됨이 없이 본래의 마음 상태를 한 결 같이 지니고 즐거운 삶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마음을 억제하는 여섯 가지 방법
숨을 세는 것은 마음을(대상과)차단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마음을 거두며, 그치는 것은 마음을 정(定) 하게 한다. 관(觀)은 마음을 떠나고, 환(還)은 한결같은 마음이, 정(淨)은 수의가 된다.(마음이) 사람을 쓰면 능히 마음을 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여섯 가지가 행해질 뿐이다. 어찌하여 숨을 세는가. 흩어진 마음을 쓰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청정한 마음을) 얻을 수 없는가. (마음을) 쓰면 서도 (본래의 마음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숨을 쉬면서 수를 세는 것이 수식(數息)이며 범어로는 아나anana 라고 한다. 이렇게 수식은 귀에 들리는 소리나 눈에 보이는 외계의 사물에 마음을 빼앗겨 혼란스럽게 되지 않도록 마음을 차단하는 방편이다.
상수(相隨)는 범어로 아누가마anugama라고 하며 서로 따르는 것이다. 곧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따라서 생각을 함께 따르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마음을 그치는 지(止)는 범어로 스타나stbana라고 하며 마음이 한 곳에 머문다는 뜻이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움직이고 있으나, 이를 한 곳에 매어두는 수행을 통해서 마음이 고요 히 자리 잡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밖으로 나간 마음이 나에게로 돌아올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춰볼 수 있게 된다.
즉 뜻을 정하여 절대 안정의 세계로 가게된다. 범어로 우팔라크샤나upalaksana라고 하는 관(觀)은 옳고 그름을 아는 단계이다. 곧 사물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아는 관찰이다. 이렇게 되려면 마음이 대상에 끌려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대상과 마음이 서로 떠나 있어야 한다. 이 상태에서 숨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그대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숨과 더불어 객관적인 대상인 색(色), 그 색이 인식되어 받아들여지는 수(受), 그 수에 따라 생각이 일어 나는 상(想), 그 생각에 따라서 생각을 일으키는 움직임인 행(行), 생각을 통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식(識) 등의 오음(五陰)을 나의 뜻에 의해 관찰하게 된다. 이는 곧 내외의 모든 것을 관찰하는 경지이다.
다음 단계인 환(還)은 범어로 비바르타나vivartana라고 한다. 지나 관의 상태에서의 관 찰이 바뀌어 내 몸과 마음이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임을 관찰하게 된다. 모든 대상에 대한 관찰이면서 그 실상에 대한 올바른 관찰이기도 하다. 이것을 알고 느낀 것에 의해 실천이 따르게 된다.
정(淨)은 범어로는 파리슛디parisuddbi이며, 곧 깨끗함이다. 모든 번뇌를 없애고 지혜를 닦아, 심지어 온갖 선행(善行)에도 걸리지 않는 무간도(無間道)에 들어감으로써 진리를 깨달아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 여섯 가지 단계를 차례로 밟아야 하는가? 우리의 마음은 다스리지 않 으면 제멋대로 움직이므로 억제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수식을 통해 다스려진 마음은 점차 내 뜻에 따라 부릴 수 있게 되어, 드디어 스스로 번뇌를 끊고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무애(無涯)의 도를 얻어 깨달음에 이른다.
*농사와 같은 호흡
수식은 땅, 상수는 쟁기, 지는 멍에가 되고, 관은 씨앗, 환은 비, 정은 행이 된다. 이 여섯 가지가 곧 도에 따르는 것이다.
여기서는 호흡을 농사에 비유하고 있다 농사꾼의 목적은 농사를 잘 지어 많은 수확을 얻는 것이다. 수행자의 목적은 생명을 유지 할 뿐만 아니라 도를 깨닫는 것이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하다. 또한 쟁기나 소에게 거는 멍에도 있어야 한다. 때가 되면 땅을 갈아 씨앗도 뿌려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수확을 얻을 수 없다. 비도 알맞게 내려야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조건이 조성되어야만 수확을 얻을 수 있다.
숨을 세는 것을 땅과 같다고 했다. 수식을 농사를 짓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땅에 비유한 것이다. 생명의 근본이 되는 호흡의 요체인 정신을 집중하는 수식이 장차 깨달음이 라는 수확을 얻기 위한 기본 토양이 된다는 뜻이다.
상수는 쟁기에 비유한다. 땅의 굳고 무름에 따라 쟁기로 얕거나 깊게 갈아야 한다. 쟁기로 땅을 갈지 않으면 씨를 뿌릴 수 없듯이 호흡과 마음이 조화되지 않으면 호흡 운동은 생명을 유지하고 발전하게 할 수 없다.
호흡과 마음을 잘 조화시키는 것은 씨를 뿌리기 위해 땅을 쟁기로 고루 갈아 다스리는 것과 같다. 마음을 호흡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지(止)는 마치 소의 목에 거는 멍에와 같다. 멍에 가 없으면 소는 쟁기를 끌지 못하니 땅을 갈 수 없다. 숨에 정신을 집중하여 호흡하는 관은 모든 현상에 대한 관찰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정신적인 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일체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은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첫 단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씨앗과 같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모습을 관찰하여 그것을 안다 는 것처럼 보이고, 또한 즐거워 보이고, 마치 어떤 실체가 있어서 만상(萬像)이 존재하는 듯 하다. 모든 것이 깨끗하고 바람직하며 소망하던 것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런 모든 것들은 무상하고, 고통이 따르며,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연에 따라서 이루어졌다는 것과, 절대적으로 청정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가치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물의 내면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 하다. 이 지혜를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삶이고 행복이다.
|
'수행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염처경(念處經) (0) | 2018.12.23 |
---|---|
[스크랩]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0) | 2018.12.16 |
[스크랩] 위빠사나 수행에 있어 사띠는 무엇인가* (0) | 2018.12.16 |
[스크랩] 법념처(法念處)의 정의. (0) | 2018.12.09 |
[스크랩] -상좌불교 전통에서의 사마타(止) 위빠사나(觀) 수행- (0) | 2018.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