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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염처경(念處經)

수선님 2018. 12. 23. 12:31
 

염처경(念處經)

‘알아차림’의 길은 이해가 아니라 실천


“여기에 하나의 길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이것은 우울과 한탄을 이겨내고, 깊은 슬픔과 불편한 느낌을 소멸시킨다. 이것은 진리의 길을 걷게 하고, 궁극의 해탈을 실현하게 한다. 이것은 바로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위의 경전은 『대염처경』에서 인용한 것이다. 부처님이 ‘비구들이여’ 라고 부르자, 대중은 ‘세존이시여’ 라고 큰소리로 응답을 한다. 그러자 부처님은 ‘여기에 하나의 길이 있다’ 고 선언한다. 성경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의 길이,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어두운 숲길에서 햇살을 발견하는 것처럼, 길은 늘 지금 여기에 있다. 이 현재의 ‘길’은 무엇 보다도 걸어야 한다. 그것은 실천되어야 한다. 손가락에 의해서 창공의 달은 가리킬 수는 있지 만,내 앞에 놓여진 길은 걸음으로써 완성이 된다.


하나의 길(ekayana)은 하나(eka)와 길(ayana)이 결합된 낱말로 한역으론 ‘一道’나 ‘一乘’이 된다. 길이란 비유로서 이쪽 장소에서 저쪽 장소에 이르게 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킨다. 이쪽은 우울과 한탄이며, 슬픔과 불편함이며, 저쪽은 진리이고 궁극의 해탈이다. 이쪽 언덕 에서 저쪽 언덕으로 이끄는 수레가 바로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알아차림의 확립을 통해서, 우리의 고통은 정화가 된다.


그런데 왜 ‘하나’의 길(Ekayana)이라 하는가?

남방 상좌부의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알아차림의 확립은 두 갈래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며, 혼자서 걸어야할 길이기 때문이요, 하나의 열반에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요, 한 사람, 부처님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유일한 길(the only path)’이라고도 번역하기도 한다. 이는 교설의 독자성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배타성이 내포된 해석이다.


북방의 대승불교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해석할까?

이것은 대승불교에서 쟁점이 된, 삼승(三乘)과 일승(一乘)의 논쟁을 생각나게 한다. 삼승이란, 말씀을 듣고 걷는 성문의 길, 연기법을 관찰하는 연각의 길, 사회적인 실천을 중시하는 보살의 길, 근기에 따른 고유한 가르침의 세 가지이다. 반면에 일승은 이 모두가 귀결되는, 혹은 별도 의 궁극적인 ‘하나’를 의미한다.


초창기 화엄은 삼승과 일승의 동질성을 강조할 때는 ‘동교(同敎)’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신라의 의상과 동문인 법장 이후에는 자신의 교설의 독자성을 강조할 목적으로 삼승을 벗어난 일승이란 의미로 ‘별교(別敎)’라는 용어를 더 자주 사용하였다. 이런 표현은 역시 다른 방식의 가르침, 길에 대해서 자신들의 교설이 가지는 우월성을 강조하는 배타적 성격을 반영 한다. 


유일한 길, 별도의 가르침, 그렇다면 선종은 어떨까?

그들도 마찬가지로 전해오는 가르침 이외에 별도의 길(敎外別傳)을 강조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이 궁극의 하나는 어디로 귀결되는가? 그것은 뜰 앞의 잣나무다. 내 발밑에 분명하게 가로 놓인 가로수 길이며,우울과 한탄을 잘라내는, 지금여기다. 하지만 그것은 길이 없는 길이기에, 정해진 하나의 길도 없는 까닭에, 모든 길로 통한다.


『무문관(無門關)』은 이렇게 말한다.


큰 길은 문이 없으니,

어떤 길도 모두 통한다.

이 관문을 뚫는다면,

하늘과 땅 사이를 활보하리라.

(大道無門 千差有路

透得此關 乾坤獨步)


 ‘알아차림(sati)’ 있어야 번뇌 끊는다


무엇이 네 가지 알아차림인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문다. 열렬하고, 분명하게 이해한 알아 차림으로써, 비구는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벗어난다. 느낌에 대해서 느낌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문다. 열렬하고, 분명하게 이해한 알아차림으로써, 비구는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벗어난다.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문다. 열렬하고, 분명하게 이해한 알아차림으로써 비구는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벗어난다. 법에 대해서 법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문다.


열렬하고, 분명하게 이해한 알아차림으로써 비구는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벗어난다. 『염처경(念處經)』의 중심된 과제는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여기에는 몸(身), 느낌(受), 마음(心), 법(法) 네 가지가 있다. 여기서 염처는 ‘알아차림의 확립’으로 번역되는데,


 ‘sati’는 ‘알아차림’으로 ‘patthana’는 ‘확립’에 해당된다. 확립으로 번역되는 ‘patthana’는 ‘다가가다’는 의미의 ‘pa’와 장소를 의미하는 ‘sthana’가 결합된 말이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의 확립(念處)이란 몸과 같은 대상의 장소에 다가가서 머물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아비담마론서에서는 염처를 염주(念住)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곳에 다가가서 어떻게 머물 것인가? 그것은 ‘열렬함’, ‘분명한 이해’, ‘알아차림’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그럼 으로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벗어난다. 열렬함이란 정진에 대한 열정, 부지런함을 말한다. 분명한 이해는 무상, 고, 무아라는 대상의 특성에 대한 철저한 통찰로서 집착을 방지한다. 알아차림은 현재의 순간에 깨어있음을 뜻한다.


현재에 직면하여, 과거의 흔적이나 미래의 바램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한다. 일반적으로 분명한 이해(知)가 바른 견해에 해당된다면, 알아차림(念)은 마음의 평정과 관련된다. 이들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가진다.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이 없다면, 대상에 대한 이해는 공허한 개념이 된다. 개념은 안개처럼, 흐릿하고 애매하여, 살아있는 지혜가 아니다. 알아차림은 언제 나 현재의 시점이며, 직접적인 경험을 의미한다.


하지만 반대로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결여된 알아차림은 집착을 증대시키는 경향도 있다. 이런 경우 결국은 대상의 폭류 속으로 휩쓸려 표류하게 되고, 마음의 평정은 무너진다. 최근에 알아차림(念)에 대한 번역의 문제가 논쟁이 되고 있다. 한역에서는 ‘마음에 두다’는 의미에서 ‘염(念)’이라고 번역을 했다. 사띠의 본래적인 의미가 ‘잊지 않고 기억하다’는 범어 ‘smrti’와 동의어이기 때문에, 念이란 번역은 좋은 번역어라고 평가된다. 하지만 염이란 낱말은 ‘생각’이라는 분별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이 많아, 사띠의 본래적인 의미를 온전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국내에서는 사띠를 ‘알아차림’을 비롯하여, ‘마음챙김’, ‘주의집중’, ‘마음지킴’ 등 다양하게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영어번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주목(attention), 알아차림(awareness), 주의깊음(mindfuiness)으로 번역되고 있다. 어떻게 번역하여 사용되든지, 사띠의 확립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별 문제는 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지금 어깨의 느낌을 관찰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첫째 먼저 의식을 어깨로 옮기고,

둘째 주목하여 그 장소에 머무른 다음,

셋째 그곳의 느낌을 지각하는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만약 해석자가 의식을 돌려서 어떤 특정한 장소로 다가가는 첫 번째 의미를 귀중하게 여긴 다면, 그는 사띠를 ‘주의집중’으로 번역하여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장소로 곧장 의식을  옮기지 않고, 어깨에 머무는 두 번째의 의미를 강조한다면, ‘주의 깊음’이나 ‘마음지킴’으로 '번역할 것이다. 하지만 장소에서 느끼는 느낌 그 자체에 대한 자각을 강조한다면, ‘알아차림’ 이나 ‘마음챙김’으로 번역한다.


여기서 알아차림(念)과 바른 이해(知)를 정확하게 구별하는 일은 필요하다. 이들은 쌍둥이처럼 함께 자주 설하여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깨라는 장소에로 다가가서 그 특정한 느낌을 ‘포착’하는 일은 알아차림의 역할이다. 하지만 어깨에서 발생되는 느낌을 마음의 작용과 구별 되는 성격과 무상성에 대한 ‘통찰’은 사띠의 영역이 아니라 올바른 이해(知)의 영역이다.


집중이 잘되는 부분부터 관찰하라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무는가?

비구는 숲으로 가고, 또는 나무 아래로 가고, 또는 텅 빈 장소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똑바로 세워 앉아서, 면전에 알아차림을 확립한다. 그는 집중된 알아차림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집중된 알아차림으로 숨을 내쉰다. 길게 숨을 마실 때는 ‘길게 숨을 들이 마신다’고 분명하게 알며, 길게 숨을 내쉴 때는 ‘길게 내신다’고 분명하게 안다. 짧게 숨을 마실 때는 '‘짧게 숨을 들이 마신다’고 분명하게 알며, 짧게 숨을 내쉴 때는 ‘짧게 내신다’고 분명하게 안다.


�염처경�에서는 몸에 대한 관찰을 호흡, 자세, 기능, 부위, 요소, 시체 등 여섯 가지로 예시 하고 있다. 서구 심리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몸을 욕망의 상징이나 본능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염처경�은 몸과 욕망을 분명하게 구별한다. 욕망은 마음의 현상으로 분류 하고, 몸에 대한 관찰은 오히려 해부학적 접근방식을 택한다. 


몸은 독립된 알아차림의 대상이고, 장소이다. 몸은 모든 현상을 포괄하는 유기체로 관찰될 수도 있지만, �염처경�은 느낌, 마음 등과 구별되는 몸의 현상만을 대상으로 한다. 이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이다. 예를 들면 가슴에서 느끼는 통증은 분명하게 몸의 증상이지만, 그것 을 몸의 관찰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느낌이나 마음의 관찰대상으로 분류한다.


몸과 함께 이루어지는 관찰의 대상으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방법은 호흡이다. 물론 호흡이나 자세의 관찰은 알아차림의 확립이 그 목표이다. 호흡이나 자세를 일정한 형태로 통제하는 연습은 결코 아니다. 불교에서 호흡의 관찰은 자연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요가와 같은 다른 종교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방식과 구별된다.


자연스런 호흡의 조건에 수순하면서, 그것이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관찰한다. 하지만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기준이 되는 신체의 부위는 지도자에 따라서 달라질 수가 있다. �염처경�에서는 다만 ‘면전’이라고 했지만, 코끝인지 혹은 단전인지, 아니면 접촉된 신체의 다른 부분인지는 해석자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다. 집중이 잘 되고, 본인이 편한 부분을 결정하여, 그곳에서 지속적으로 수행하면 된다고 본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안으로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여 머물고, 밖으로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 하여 머물고,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여 머문다.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 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이때 또한 비구는 ‘이것은 몸이다’고 하는 알아차림의 확립이 있다. 


이러는 한에서 오직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지혜가 있다. 그럼으로써, 비구는 의지함이 없이 머물고, 어떤 세상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여 머문다. 여기서 몸을 호흡과 관련시켜 관찰할 때, 논란이 되는 부분은 ‘안팎으로 관찰하라’는 것이다. 소마 테라에 의하면 ‘밖으로’ 관찰하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호흡을 관찰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고엔카 는 텅 빈 장소나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할 때를 전제한다면 다른

사람의 호흡을 관찰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별로 중요한 의미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몸을 밖으로 관찰한다는 의미를 신체의 표면으로 해석한다. 이점은 결과적으로 그가 신체의 표면을 순서대로 관찰하는 수행방식을 채택한 근거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이때 도 경전의 문맥에서 볼 때, 느낌보다는 호흡과 관련하여 해석함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점 은 다음 구절인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라’는 표현과도 관련된다. 현상(法)이란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지지만, 여기서는 호흡을 가리킨다고 본다.


때문에 �염처경�에서는 호흡의 ‘길고 짧음’, ‘안과 밖’,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는 일은 바로 몸을 존재하는 그대로 자각하는 일이다. 이때의 몸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놓인, ‘일어남’이고 ‘사라짐’이다. 이와 같이 알아차림이 확립되는 한에서 우리는 몸에 대한 집착으로 부터 해탈되고, 그러는 한에서 우리는 지혜를 증득한 것이다.


알아차려야 ‘현재’를 살 수 있다


비구들이여, 다시 비구는 걸어가면서 ‘나는 걷는다’고 분명하게 안다. 서 있을 때는 ‘나는 서 있다’고 분명하게 안다. 앉아 있을 때는 ‘나는 앉아 있다’고 분명하게 안다. 또 누워 있을 때는 ‘나는 누워있다’고 분명하게 안다. 이와 같이 그는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지 그는 분명 하게 안다.


『염처경』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는 알아차림(sati)이란 용어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렇 다. 알아차림은 언제나 현재와 관련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오직 현재일 수밖에 없다. 과거란 이미 지나간 현재의 흔적이고, 미래란 아직 오지 않는 현재의 기획들이다. 나의 경험은 결국 현재에 한정된다.


현재란 결국은 호흡이든지 몸의 움직임이나 느낌이나 마음이든지 감각기관에 부딪치는 감각 대상을 의미한다. 그래서 붓다는 일체란 눈, 코 등의 감각기관과 그것에 상응된 감각대상, 색깔이나 냄새 따위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만 지금 여기만을 살 수가 있다.


알아차림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지점은 바로 현재라는 것 이다. 지나간 과거를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사건을 회상하고, 못 잊어하는 경향이 있고, 나아가서는 과거로 인하여 현재를 희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또한 우리 는 오지 않는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하지만 깨달음은 언제나 현재이다. 이 영원한 현재는 과거형도미래형도 아니다. 그것은 지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순간들이다. 행동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현재에서 가능 하다는 말이다.알아차림이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알아차림이 자기를 실현하는 통로가 된다는 점이다. ‘자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자각하는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인데, 그것 은 바로 자신의 몸, 호흡, 느낌, 생각, 마음 등을 분명하게 자각하여 아는 일이다.


이를테면 고소나물의 경우를 들어보자. 봄철이면 들판에 많은 나물들이 자란다. 고소는 자신의 향기를 속이지 못하고 자신의 향기를 힘껏 발산한다. 장미꽃은 장미꽃으로, 철쭉은 철쭉꽃으로 자신의 본성을 마음 껏 드러낸다. 자기실현은 자신을 알아차림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어떤 사람이 자기를 실현한 사람일까? 이점은 초기경전 뿐 아니라, 대승불교의 핵심 과제 였다. 우리는 얼마나 자기를 실현하면서 살고 있을까? 아마도 대답하기가 매우 곤란할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말이 있다. 성품을 보아서 부처를 이룬다. 성품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자기의 본성이다. 부처란 완전한 사람, 자기실현을 상징한다. 자기의 본성 을 보면,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신의 본래적인 작용을 자각하면 부처와 같은 완전한 실현을

이룬다는 모토이다.


무엇이 자신의 성품은 무엇일까?

그동안 우리는 이 용어에 대해서, 너무 철학자와 같은 태도를 취하거나, 형이상학적인 입장을 취했다. 설명하고 이해하려 했다. 도란 지극히 쉽다. 다만 보고 보기만 할 뿐, 귀로 들을 때 듣기만 할 뿐, 이것이 우리의 성품이다. 부처는 부처이고, 나는 나이다. 다만 현재에서 작용 하는 것이 성품이고, 우리의 본질이다.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은 그곳엔 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부처란 무엇인가? 밥 먹고, 발우를 씻는 행위, 그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밥을 먹을 때 밥 먹는 일에 접촉하지 못하고, 다른 기억과 계획들로 현재를 망각하고, 은폐한다. 이때 우리 는 귀 먹고 눈 봉사가 된다. 늘 도(道), 현재(現在)는 우리와 함께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복잡 하게 멀리 와서는, 여기에 인위적으로 집중하지 않으면, 망각의 강으로 흘러들어가 폭류에 휩쓸린다. 


알아차림이란 지금 여기, 현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재를 살 수가 있는가? 그것은 실로 단순하다. 그것은 몸, 감각에 집중하는 일이다. 이런 것과 어울리는 삶의 방식은 노동이다. 하지만 현대 산업사회는 노동을 상품화했고, 명상과 인간의 본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몸으로 행동하는 일을 우리는 싫어한다. 현대 자본사회의 불행은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이 자동 화되고, 우리의 삶은 점점 기호화된다. 몸은 욕망이 되었고, 반대로 상징이 우리 몸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현재에 감각에 집중하는 명상은 더욱 전망이 밝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신뢰할 만 하기 때문이다.


즐거움-고통 관찰하되 가치판단 버려라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면서, ‘즐거운 느낌을 경험한다’고 분명하게 안다. 불편한 느낌을 경험 하면서, ‘불편한 느낌을 경험한다’고 분명하게 안다. 즐거움도 불편함도 아닌 느낌을 경험 할 때도, ‘즐거움도 불편함도 아닌 느낌을 경험한다’고 분명하게 안다.


느낌에 해당되는 팔리어는 웨다나(Vedana)이다. 한역에서는 수(受)로 번역하였다. 수(受)는 고통 따위를 ‘입다’거나 혹은 ‘받다’고 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마치 밖으로 부터 감각 기관에 주어지는 경험으로 인식된다. 영어에서는 감각(sensation)이나 느낌(feeling)으로 번역 하여 사용한다. 웨다나는 육체와 정신을 매개하는 징검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화가 났을 때 신체의 변화를 관찰하여 보면, 호흡과 맥박이 빨라졌고, 안면근육은 긴장되어 있다. 성냄의 현상은 분명하게 마음의 작용인데, 육체적인 현상을 동반하며 동시에 불편한 느낌으로 환원될 수가 있다.


느낌은 눈이나 귀와 같은 신체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의식이 대상에 접촉하였을 때 발생된다 고 경전에서는 설명한다. 접촉(phassa, 觸)을 구성하는 요소는 ‘감각(根), 대상(境), 의식(識)’ 이다. 이것을 한역에서는 삼사화합촉(三事和合觸)으로 번역하였다. 일상에서 느낌이 발생되는 상황이란 감각, 대상, 의식 세 가지가 화합하여 발생되는 현상이다.


느낌은 크게 세 종류로 구별할 수가 있다. 하나는 즐거운 느낌이고, 다른 하나는 불편한 느낌 이며, 마지막으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무덤덤한 중립적인 느낌이다. 즐거운 느낌에 대해 서는 애착과 집착을 일으키고, 불쾌한 느낌에 대해서는 혐오감과 더불어서 회피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무덤덤한 느낌에 대해서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는 안절부절함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안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 관찰하여 머물고, 밖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 관찰하여 머물고, 안팎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 관찰하여 머문다. 이와 같이 비구는 느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느낌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느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이때 또한 ‘이것은 느낌이다’고 하는 알아차림의 확립이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동일한 상황 에서 어떤 사람은 즐거움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불편을 느끼는 것일까?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올까? 이런 현상을 초기불교보다는 대승의 유식불교에서 더욱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염처경』에서는 다만 어떻게 느낌에 대해서 알아차림을 확립할 것인가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느낌이든지, 느낌 자체에 온전하게 하나가 되는 경험이다. 이것은 ‘다만 몸이 있다’고 알아차림을 확립할 때와 마찬가지로, 느낌과 온전하게하나가 되어서, 충분하게 그 느낌을 경험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때 주의할 몇 가지 점이 있다.

첫째는 다만 느낌만이 존재할 뿐, 느끼는 자는 없다. 느낌을 거부하거나 반대로 휩쓸리지 않으면서, 느낌을 그 자체로 수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느낌은 매우 섬세한 감각작용이기에 잘못하면, 오히려 더욱 강렬한 애착을 야기 시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느낌을 신체적인 감각과 함께 안팎으로 관찰하는 일이다. 이때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체의 특정한 부위를 집중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신체의 전체적인 느낌을 그 흐름에 따라서 관찰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역시 관찰자와 관찰대상을 구별하지 말고, 강물의 흐름에 맡겨진 조각배처럼, 느낌의 인연을 따라서 관찰한다. 그럼으로써 자아가 부재한 고요함과 느낌의 역동성을 체득하게 된다.


세 번째는 느낌의 발생과 소멸을 주목하여 본다는 점이다. 이점은 무상을 체득하는데 유용한 방법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관점은 특히 느낌의 관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느낌이 발생 한 장소에서 머물러보라. 그 느낌은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사라진다. 하지만 곧 신체의 다른 부위에서 새로운 느낌이 발생함을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이 느낌도 곧 사라짐을 분명 하게 알게 될 것이다.


탐진치 알아차려야 번뇌 끊는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탐욕의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다’고 분명하게 안다.

탐욕을 떠난 마음을 ‘탐욕으로부터 벗어난 마음이다’고 분명하게 안다.

비구는 성남의 마음을 ‘성남이 있는 마음이다’고 분명하게 안다.

성남을 떠난 마음을 ‘성남으로부터 벗어난 마음이다’고 분명하게 안다.

비구는 어리석음의 마음을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이다’고 분명하게 안다.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을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난 마음이다’고 분명하게 안다.”


마음에 대한 이해는 불교의 핵심 문제이다. 마음과 관련하여 불교에서는 치따(citta), 마나스(manas), 윈나나(vinnana)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한역경전에서는 치타는 마음(心), 마나스는 의(意)로, 윈나나는 식(識)으로 번역하였다. 초기불교에서는 이 세 가지를 엄격하게  구별하여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들에 대한 엄격한 구별은 구사론과 유식불교에서 비로소 이루어졌다. 


마음을 관찰하는데 『염처경』에서 크게 두 가지의 방식을 제시한다. 하나는 탐욕, 성남, 어리석음에 물들어진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로부터 벗어난 마음에 대한 관찰이다. 전자가 물들어진 생멸의 마음이라면 후자는 청정한 진여의 마음이다. 비유하자면 더러운 물도 물이고, 깨끗한 물도 물이듯이, 대상에 물든 마음이나 그런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마음이나 모두 마음 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삼독이나 진여 마음 관해야


이때 관찰되는 마음의 영역은 탐욕, 성남과 같은 욕계(欲界)에서부터 고귀함, 삼매, 해탈과 같은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의 마음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폭넓은 스펙트럼을 이룬다. 이들은 일정한 계위를 따라서 관찰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염처경』에서는 그들 개별적인 양상을 그 자체만으로 포착하여 존재하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와 같이 비구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마음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이때 또한 비구는 ‘이것은 마음이다’라고 하는 알아차림의 확립이 있다. 이러는 한에서 오직 분명하게 알아차리 는 지혜가 있다. 그럼으로써, 비구는 의지함이 없이 머물고, 어떤 세상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는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 관찰하여 머문다.”



대승 유식이나 화엄불교처럼 『염처경』은 마음이 발생하는 원인과 조건을 결코 탐색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성남이 일어난 경우 그것이 어떤 원인으로 발생하며 어떤 과정을 거쳐서 발생되는지 하는 패턴을 말하지는 않는다.


『염처경』의 명상은 다만 대상에 대해서 일으켜진 탐욕이나 성남을 그 자체로 알아채는 일만 을 강조한다. 성남은 애착으로 말미암아 일어났고, 애착은 즐거운 느낌에 의해서 발생하였으며, 즐거운 느낌은 대상에 대한 접촉으로 일어난다고 하는 연기법을 관찰하지는 않는다. 성남이 발생하면 곧 그것을 알아채고, 성남이 사라지면 성남이 사라졌다고 그 자체로 알아차릴 뿐, 그것을 느낌이나 몸의 감각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원인보다 현상 관찰 중시


여기서 주목할 점은 어떤 종류의 마음이든지, 그 자체로 알아차림(sati)으로써, 마음이 집착 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탐욕이나 어리석음에 휩싸이는 경우에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수행자는 알아차림을 분명하게 확립할 필요성이 있는데, 이것을 위해서 탐욕이나 열정이 일어나면 곧 알아차리고, 그곳에다 ‘탐욕!’ ‘탐욕!’이라고 이름 을 붙이면서 연습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알아차리는 마음은 물들거나 청정한 마음과 구별되는, 또 다른 종류(別境)의 마음이다. 이것을 유식불교에서는 영적인 성장,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마음작용(別境心所)으로 이해한다.


자극적인 음식 절제하면 탐욕도 줄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법에서 법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다섯 가지의 장애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다섯 가지 장애의 법에서 법을 관찰하여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감각적인 즐거움에 대한 욕망이 있을 때, ‘내게 감각적인 즐거움에 대한 욕망이 있다’고 분명하게 안다. 


다시 감각적인 욕망이 없을 때도 ‘내게 감각적인 욕망이 없다’고 분명하게 안다. 또한 비구는 전에 느끼지 못한 감각적인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을 알고, 일어난 감각적인 욕망이 어떻게 사라지는 것을 알며, 사라진 감각적인 욕망이 어떻게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분명하게 안다.”


마음과 함께 법은 불교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핵심 된 술어이다.

법은 불교의 용어 가운데 가장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가장 널리 알려진 번역어는 진리,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마음의 ‘인식대상’을 가리킨다.

색깔이 눈의 대상이 듯이, 법은 마음의 대상이 된다.

또한 법이란 심리적이고 윤리적인 ‘현상’을 가리킨다.


심리적인 현상이란 마음에 담겨진 물건과 같다. 이 물건들은 매우 다양하고,

때가 되면 왔다가는 사라지기도 한다. 봄이 오면 여름이 멀지 않고, 우리의 몸은 세월과 함께 무너지듯이, 마음은 끊임없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이들 현상은 각자 독특한 자신의 성품과 특성을 가지며, 또한 동시에 선악과 같은 윤리적인 어떤 질서를 내포한다.


육식-오신채는 금물


때문에 『염처경』에서 법을 관찰한다는 것은 인식하는 대상의 본성을 포함하여, 그것의 발생 과 사라지는 전체 과정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일까지 포함된다. 보통 이런 변화의 과정을 아비담마 논서에서는 생주이멸(生住異滅)로 정리하여 설명하였다.



법에 대한 관찰로서, 『염처경』에서는 다섯 가지의 장애(五蓋), 다섯 가지의 요소(五蘊),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六處), 일곱 가지의 깨달음의 요소(七覺支),

네 가지의 진리(四聖諦)와 여덟 가지의 수행의 길(八正道)을 포함하여,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먼저 다섯 가지의 장애란 마음을 가려서 어둡게 만드는 현상을 말한다. 여기에는 감각적인 탐욕, 미움, 무기력, 들뜸, 의심과 같은 현상이 포함된다. 이것들을 한역에서는 마음의 하늘을 덮는 덮개(蓋)로 번역하였다. 이들을 유식불교에서는 근본번뇌(根本煩惱)라고 하여 매우 중요시하였다. 


이들이 구름처럼, 문득 발생하여 마음의 하늘에 머물고 있는 한에서 마음은 밝지 못하고 무거워져서, 고통을 받는다. 하지만 이들은 주인이 아니라 손님에 불과하다. 때문에 주인은 이들이 언제 어떻게 방문하여, 어떤 방식으로 마물며, 언제 떠날지를 알고 있다면, 큰 고통을 벗어날 수가 있다.


다섯 가지의 장애 가운데 첫 번째는 감각적 탐욕인데, 하지만 이때의 탐욕은 탐욕을 일으키는 마음의 측면이 아니라, 탐욕의 마음과 함께 발생되는 집착과 그 대상을 가리킨다. 『염처경』 에서 몸과 느낌을 구별하고,


마음과 법을 구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이들은 혼돈되기 쉽고, 또한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쉽게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 훌륭한 스승 찾아가 자주 물어야 탐욕의 대상을 『성유식론』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이 세상에서의 계속적인 생존에 대한 바람이다. 이것은 곧 ‘나’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마음작용과 행위에 대한 집착이다. 이것은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이것들이 함께 어울러져서 고통을 만들어낸다고 본다. 한편 남방의 소마테라는 감각적인 탐욕 을 버리기 위한 매우 유용한 수행 방편을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탐욕을 일으키는 대상에 대한 싫어함을 명상하고, 탐욕의 대상에 대한 마음의 평정을 개발하며, 탐욕 의 대상에 대한 접촉에서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탐욕을 일으키는 음식을 절제하며, 훌륭한 스승을 가까이 하여, 명상상담을 통해서 탐욕의 대상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성취하는 것이다.


용서하고 이해할 때 내 業도 맑아진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미워함이 있을 때, ‘내게 미워함이 있다’고 분명하게 안다.

다시 미워함이 사라지면 ‘내게 미워함이 없다’고 분명하게 안다.


또한 비구는 전에 느끼지 못한 미워함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을 알고, 생겨난 미워함 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알며, 사라진 미워함이 어떻게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분명하게안다.


미워함은 우리의 정신을 가리는 다섯 가지의 덮개 가운데 두 번째에 속한다. 탐욕이 즐거운 느낌에 기초하여 발생한다면, 미워함은 불쾌한 느낌에 근거한다. 미워함은 좋아하지 않는 대상 에 대한감정적인 반응으로 보통은 성남이나 분노와 같은 격정으로 표현된다. 탐욕이 삶에 대한 애착이라면, 성남은 공격성을 나타낸다.


우리가 성을 내는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다.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고 손해를 보게 될 경우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받지 못하고 배척받거나 거절당할 때, 우리 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상대방에게 화를 낸다.


이 경우는 좌절된 욕구와 관련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념이나 신념체계와 다른 견해 를 가진 사람과의 대립에서 발생한다. 이 경우는 두려움에 기초한 자아의 방어체계와 관련된 다. 어느 경우든지 분노는 사람을 때리고 싶은 충동을 동반하며, 이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원망으로 발전되어 한을 품게 된다.


원망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난폭하게 상대방을 공격하며 폭언을 쉽게 한다. 처음에는 상대방을 괴롭히지만, 나중에는 자신을 학대하게 된다.


미움의 불행의 근원


이런 마음상태를 극복하는 방법은 네 가지이다.

첫째는 자비관(慈悲觀)을 닦는 것이다. 자비관이란 상대방을 용서하고 관용을 베푸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자신의 허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 수용하는 것이다. 조용히 좌선자세로 앉아 미워하는 사람을 떠올려보라. 미워하는 사람이 편안하고, 행복하고, 안락하기를 진정으로 기원 해 보라. 무엇보다도 내 자신을 용서하고, 존재하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이것이 자비관이다.


다른 하나는 유식불교에서 강조하는 인연관(因緣觀)을 닦는 방법이다. 인연관이란 말 그대로 분노가 발생되는 원인과 조건을 탐색하여 통찰하는 작업을 말한다.여기서 원인은 좌절된 욕구 와 왜곡된 신념체계를 말하고, 조건이란 잠재된 씨앗이 어떤 조건과 환경 속에서 어떤 방식 으로 활성화되고 표출되는지를 조사하는 일이다. 


하지만 인연관은 혼자서 수행하면 위험하다. 교활한 자아는 자신을 변명하고 합리화 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가능하다면 훌륭한 도반과의 효과적인 대화, 명상상담이 필요하다. 그럼 으로써 모든 인연은 바로 자신의 업의 결과이며, 상속자라는 통찰을 얻게 될 것이다. 이때야 비로소 타인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은 사라질 것이다.


미울수록 행복 기원하라


세 번째는 『염처경』에서 제시한 알아차림의 공부법이다. 다만 그 현상을 관찰하는 일이다. 모든 현상은 일어났다가, 일정한 시간을 머물고, 때가 되면 마침내 스스로 사라진다. 성남이 일어나면 그것을 판단하지 않고 그 자체만으로 알아차리며, 성남과 온전하게 하나가 되어 함께 그 변화를 느끼며, 사라지면 다시 사라짐을 온전하게 알아차린다. 현상은 다만 현상 그 자체로서 경험될 뿐이다. 그 어떤 신념이나 가치로서 해석하는 일을 거부한다. ‘지금 여기’ 의 시점에서 일어나는 현상, 그 자체가 귀중할 뿐이다. 이것이 염처관(念處觀)이다.


마지막으로는 간화선(看話禪)의 방법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고통을 받고 있는가? 과연 고통을 받고 있다는 나는 무엇인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간화선은 대답해보라고 요구한다. 문제의 본질로 직접 뛰어들 것을 다그친다.


졸리면 걷고 들뜰 때는 토론하라 


“비구들이여, 비구는 졸음이나 들뜸이 있을 때, ‘내게 졸음과 들뜸이 있다’고 분명 하게 안다. 다시 졸음과 들뜸이 사라지면 ‘내게 졸음과 들뜸이 없다’고 분명하게 안다.


또한 비구는 전에 느끼지 못한 졸음과 들뜸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을 알고, 생겨난 졸음과 들뜸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알며, 사라진 졸음과 들뜸이 어떻게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분명하게 안다.”


졸음은 다섯 가지의 덮개, 정신의 장애 가운데 세 번째에 속한다. 탐욕이 즐거운 느낌에, 미워 함은 불쾌한 느낌에 근거한다면, 혼침과 졸음은 즐겁지도 불쾌하지도 않는 느낌에 기반을 둔다. 


대개는 혼침과 졸음은 무기력과 나른한 감각으로 인하여 발생된다. 혼침과 졸음에 반대되는 경험은 마음의 산란과 같은 들뜸이다. 들뜸은 우리의 공부를 방해하는 네 번째의 마음으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움직이는 원숭이나 고삐 풀린 망아지 처럼, 마음이 안정을 찾지 못하고 안절부절 요동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잠시만 앉아서 명상을 해보면 이들을 금방 쉽게 경험할 수 있다. 대부분 앉아서 공부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망상을 피우거나 그렇지 않으면 졸음으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이것을 잘 알고 대처하지 않으면, 공부에 진전을 이룰 수가 없다. 이들은 』 염처경』에서는 마음에 속하는 심염처(心念處)에 분류하지 않고, 현상으로서의 법염처(法念處) 에 소속시킨다.


마찬가지로 유식불교에서도 마음의 현상 곧 마음작용(心所法)으로 분류하지만, 고통을 만들어 내는 근본번뇌를 뒤따라 발생하는 수번뇌(隨煩惱)에 소속시킨다. 졸음과 들뜸은 모두 자아에 대한 근원적인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마음현상이다.


졸음-들뜸은 근본 번뇌


혼침과 졸음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아 어두움에 갇혀서 마침내 정신을 잃게 만든다. 대부분 고요한 마음을 개발하는 가운데 깨어있는 마음의 결여로 발생된다. 다시 말하면 마음에 적적 만 있고, 성성함이 없는 상태에서 발생하기 쉽다. 마음의 고요함은 존재하지만, 대상에 대한 분명한 자각으로서 지혜가 없다.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매우 다양한 방법들이 개발되어 있다.

 

북전 대승경전에 기초한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명백하게 결택하여 참구하기를 요구하고, 무엇 보다도 정진에 대한 분심을 일으키라고 권장한다. 


초기경전에 근거한 남방불교에서는 지속적인 정진과 함께 광명상(光明想)을 명상 할 것을 제시한다. 어둠은 밝은 광명을 눈앞에 현전시킴으로써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북전이 동시에 강조한 점은 음식을 조절하고, 졸음이 오면 걷는 수행을 깰 때까지 계속하며, 혹은 선지식과 법에 관한 문답을 함으로써, 지혜를 개발하는 것이다.


마음의 들뜸은 졸음의 반대 현상이다. 들뜸이 있으면 그곳에는 졸음이 없다. 한역에서는 마음의 산만을 도거(掉擧)라고 했다. 도거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탐욕이나 성남과 같은 마음의 감정에서 비롯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이나 환상과 같은 사유방식에서 비롯된 경우이다. 심할 경우 양자는 모두 불면증을 발생시킨다. 전자의 불면증은 마음에 불안과 초조로 가득 채우고, 후자는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이나 특정한 생각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법에 대한 토론 큰 효과


이것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전을 읽고 함께 법에 대해서 토론하는 방법이다. 단순하게 경전을 주입식으로 배워서는 안 된다. 경전의 주된 내용을 함께 토론하는 방식인데, 앉아서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 행동으로 대론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확실하게 효과가 있는 전통적인 양식이다. 이 방식은 티베트에서 가장 잘 전승되고 있으며, 동북아의 선종에서도 선문답이란 방식으로 잘 활용된 부분이다.


마음의 산만과 들뜸을 가장 잘 대치하는 방법은 수행의 대상을 명료하게 경험하는, 마음의 집중을 개발하거나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좌선에서 일어나서 들뜬 마음을 선지식과의 상담이 나 문답을 통해서 그것이 발생하는 심층적인 종자를 찾아서 뽑아내는 방법이다. 수행은 혼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함께 해야 힘이 생겨난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도반과 선지식을 찾는 것이다.


확고한 믿음 있어야 깨닫음도 있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의심이 있을 때, ‘내게 의심이 있다’고 분명하게 안다. 다시 의심이 없으면 ‘내게 의심이 없다’고 분명하게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의심이 어떻게 일어나고, 생겨난 의심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알며, 사라진 의심이 어떻게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분명하게 안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만나는 다섯 번째의 장애는 의심이다. 의심은 믿음이 결여된 상태이거나, 아니면 사물의 이치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머뭇거림을 의미한다. 결과적 으로 의심은 계속적인 정진을 방해하며 올바른 견해를 가질 수 없게 한다.



의심을 극복하는 방법은 당연한 말이지만, 믿음을 증장시키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도 ‘믿음은 모든 공덕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성유식론』에서는 믿음 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이치를 믿고, 고통을 소멸하여 끝내는 열반을 성취할 수 있음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약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인과의 이치를 믿는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마치 수레가 지나가고 남겨진 발자국처럼, 반드시 그 결과가 나타남을 굳게 믿는다.


다음은 현재 내 앞에 실존하는 불법승(佛法僧) 삼보에 대한 믿음이다.

수행의 길을 가서 효과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소멸한 부처님, 존경받을 만한 분들의 가르침, 수행의 실제적인 결과로서 존재하는 훌륭한 선지식과 도반들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마지막 으로는 자신의 내적인 힘에 대한 믿음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성장시키고 깨달음에로 이끌 수 있는 자신의 내적인 자질을 믿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의심은 자연스럽게 소멸된다.


믿음은 모든 공덕의 어머니


의심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믿음을 개발하여 증장시키는 일인데, 보다 근본적인 방식 은 올바른 견해를 확립하는 것이다. 사물의 이치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스스로 경험하는 일은 의심을 소멸시키는 직접적인 길이 된다. 이것은 오온의 관찰을 통해서 성취된다.


오온은 나를 구성하는 몸, 느낌, 생각, 욕구, 의식 등 다섯 가지의 무더기, 쌓임, 요소이다. 우리는 이들과 동일시를 통해서 ‘나’와 ‘나의 것’에 집착한다. 나란 언어이고 개념이다. 실제로 경험할 수가 없다. 무엇이 나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우리는 당황한다. 실제로 ‘나’란 경계 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느낌을 보다 생생하게 우리는 경험하고, 그 현상을 구체적으로 기술할 수가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몸을 나라고 동일시하며, 느낌을 나라고 동일시하며, 생각을 나라고 동일시 하며, 욕구를 나라고 동일시하며, 의식을 나라고 동일시한다.

이들의 손상은 바로 나의 손상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이들 오온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지 못한 다. 만약 오온의 현상을 존재하는 그대로 동일시하지 않고, 그 자체로 바라볼 수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정견 확립하면 의심 소멸


실제로 간단하게 연습해보라. 슬픔이나 불안이 존재한다면, 그것에 휩쓸리지 말고, 그렇다고 그것을 회피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수용하여 명상하여 보라. ‘이것은 느낌이다. 이것은 느낌 의 발생이다. 이것은 느낌의 사라짐이다.’ 슬픔을 거부하지 말고, 그 자체로 자각하여 ‘이것은 슬픔이다’고 알아차리고 집중하여 음미해 보라.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가는 길을 멈추고, 온몸으로 느끼면서, 그 자리에 서 있어 보라. 온몸의 세포와 근육을 통해 서, 말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의 에너지가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끝까지 그 전 과정을 지켜보라. 마침내 그것은 사라진다. ‘이것은 슬픔의 사라짐이다’는 통찰이 선명 하게 경험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무엇을 나라고 할 것인가? 동일시하는 대상이 사라진  다음엔 무엇이 남을까? 대답하여 보라. 옛 어른들이 말씀하지 않았던가? ‘햇살은 골짜기로 내려가고, 바람은 짙푸른 나뭇잎에서 날아오른다’고.


고통스런 삶이 해탈의 열쇠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는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핵심을 차지하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대념처경』에서는 법염처을 가장 마지막에 설정하고 분량도 가장 많이 할애하고 있다. 하지만 실천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이 발생하는 원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분명하게 관찰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먼저 무엇이 괴로움이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더구나 그것의 사라짐의 원리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고집멸도의 실천은 이론적인 이해와 더불어서 선지식의 안내가 필수적 요인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갈망


『대념처경』에서는 여덟 가지의 고통으로 알려진 생로병사(生老病死) 네 가지와 싫은 사람과 만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바라는 바를 얻지 못한 것, 슬픔과 비탄 등의 육체나 정신적인 고통을 열거한다. 이때 우리는 ‘이것은 고이다’고 알아차림을 코끝에 확립한다. 하지만 아비담마 논서들은 고통을 고고(苦苦),괴고(壞苦), 행고(行苦) 세 종류로 분류한다.


고고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쉽게 고통으로서 경험되는 위에서 언급한 8가지의 고통을 말한다. 육체적인 고통이나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통 등을 총칭한다. 두 번째의 괴고(壞苦)는 변화에 서 비롯된 고통이다. 고고(苦苦)가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고통이라면, 괴고는 형이상학적인 자기 정체성의 붕괴를 의미한다. 우리는 변화되지 않는 무엇을 상정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런 습관은 곧 배반의 고통을 경험하게 한다.


모든 사물의 본질은 변화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행고(行苦)는 쉽게 이해하기가 힘들다. 여기서 행(行)이란 상카라(Samkhara)의 번역어로 조건된 현상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몸, 느낌, 생각, 욕구, 의식이라는 다섯 가지의 조건화된 쌓임(五蘊)을 의미한다. 이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화된 성격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우리 는 집착하여 ‘나’라고 동일시한다. 이렇게 자기라고 동일시하는 한에서 우리는 그 자체를 고통 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자신의 생각이 틀리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견해와 맞지 않는 경우, 대부분 우리는 상대방의 견해를 바꾸려하고, 그것이 관철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고통을 경험하지, 자신의 생각 그 자체가 그대로가 고통이라고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스승과의 문답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명상하고 자각함으로써 비로소 그것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느끼고 생각하는 삶, 그 존재 자체가 고통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행고(行苦)를 염두에 둔 말씀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교가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진실을 존재하는 그대로 직시하는 자세의 귀중함을 강조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대념처경』에서는 이런 다양한 괴로움이 발생하는 원인을 우리들의 갈망이라고 간단하게 요약한다. 실제로 우리의 일상에서 갈망이 있으면 갈등과 긴장이 있고, 자연히 그곳에서 우리 는 고통을 경험하곤 한다. 


하지만 이점을 꼭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고통이 존재하기 때문에 결과 적으로 인내심을 개발하고,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기쁨을 얻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 강조한 점은 건강한 범위에서 출세간의 도를 얻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보다 큰 해탈의 바다로 뛰어들고자 한다면, 마땅히 세간적인 갈망을 근본적으로 극복해야한다는 점이다.


갈망 제거하면 곧 해탈


『대념처경』에서는 갈망의 종류를 감각적인 갈망, 존재에 대한 갈망,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망 등으로 나눈다. 감각적인 갈망은 성적인 열망이고, 존재에 대한 갈망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으로,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열망은 죽음과 같은 안식을 의미한다고 해석된다. 이점 은 현대 심리학적인 해석과 상통하여 주목된다.


하지만 주석서에서는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존재에 대한 갈망을 상견(常見)으로, 존재하지 않음 에 대한 갈망을 단견(斷見)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이점은 괴로움의 원인을 갈망과 같은 욕구의 측면보다는 견해나 생각 등에서 원인을 찾고 있는 다른 초기경전의 입장을 반영한 해석이다.


자아란 억지로 만들어진 허공의 꽃


고통의 소멸을 ‘열반’이라 한다. 고통의 원인인 갈애가 소멸되었기에, 고통이 소멸되었다고 한다.  초기경전인 니카야에서는 열반을 ‘탐욕의 소멸, 성남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라고 말한다. 『염처경』에서는 ‘놓아버림’, ‘집착 없음’이라고 말한다. 


진리는 부정의 방식에 의해서 표현된다. 만약 진리를 무엇이라고 언설로서 표현을 하면, 그것은 어긋난다. 진리는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내 안에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애착으로 부터 해탈은 결코 쉽지가 않다.


진리는 이미 내 안에 존재


여기 잠깐 앉아서 명상을 해보라. 의식의 표면에 수많은 영상이 떠오르고 사라져 간다.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점점 홍수처럼 불어나서 마침내 폭풍처럼 내적 평화와 지혜를 휩쓸고 간다. 어떻게 이 폭류를 건널 것인가?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태하게 휩쓸리지도 않고,

애써 저항하지도 않는 채,

나는 폭류를 건넜다네.”


일반적으로 우리는 폭류를 따라가거나 저항한다. 그러면서도 허약한 자아 혹은 문화적인 억압에 익숙한 자아는 폭류에 휩쓸릴 위험에 두려움을 느낀다. 방치는 곧 그대로 홍수로 돌변할 것만 같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폭류를 억압하여 무의식 안에 가두어둔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심각한 수압의 긴장을 견딜 수가 없다. 얼마가지 않아 세워둔 정신의 댐은 무너지고, 결국 휩쓸린 자아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그러나 자아는 상처에 대한 반동으로 가짜의 자신을 만들어 세워놓는다. 우리는 이렇게 반응 하는 사회적인 습성을 성격, 혹은 학습에 의해서 정도가 완화되는 상태를 발달 혹은 적응이라 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인 적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적인 슬픔과 불안을 안고 있다는 사실 이다.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실존의 고통과 외로움이 있다. 우리는 자신에 관하여 다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일시적인 성취가 아니라 궁극적인 의미에서, 폭풍에 휩쓸 리지도 않고, 억압하지도 않는 채, 어떻게 폭류를 건널 수가 있는가?


“볼 때는 단지 보기만 하라”


여기에 폭류를 건너는 좋은 실례가 있다. 그는 승려였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그 노승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는 실질적으로 내적인 평화를 원했다. 그래서 붓다를 만나 자신의 문제를 상담하기로 하였다.


그의 문제는 결코 적응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본질에 관한 문제였다. 붓다는 탁발에서 돌아오 는 길에서 이 노승을 만났다. 죽음이 멀지 않음을 느낀, 노승은 당장에 법을 설해주기를 청하 였다.

 

붓다는 이점을 곧 공감하고, 길 위에서 노승에게 말하였다.


“다만 눈으로 볼 때, 보기만 하십시오.

귀로 들을 때는 다만 귀로 듣기만 하십시오.

냄새를 맡을 때는 다만 냄새를 맡기만 하십시오.”


그 순간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와 세계는 그 자체로 부족함이 전혀 없다. 다만 심리적인 장애물을 세워두고, 저항하여 지킨다거나 휩싸인다는 두려움에 물들지 않으면 된다. 그래서 조사선을 대표하는 마조는 “도(道)는 닦음에 속하지 않는다”고 했고,임제는 “허공에 말뚝을 세우지 말라”고 했다.



닦음은 폭류를 없애려는 심리적인 조작행위이거나, 새로운 형이상학적인 가공물을 건설하려는 집단무의식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허공에는 말뚝이 본래 없다. 허공이 걷고, 보고, 말한다. 그래서 그곳엔 어떤 장애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자아란 억지로 만들어진 허공의 꽃이다.


출처 : 명상스쿨
글쓴이 : 선 암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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