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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단』, 『선가귀감』(보현사 수충사 소장)
禪家龜鑑 선가귀감
병통과 화두의 본질
75
선(禪)을 공부하는 자가 본지풍광349)을 아직 밝히지 못했다면, 우뚝 치솟은 현묘한 관문을 무엇에 의지하여 뚫으려 하는가?
왕왕 현상이 완전히 소멸되고 드러난 공(空)350)을 선(禪)으로 여기고, 무기공351)을 도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이 무라는 생각을 고상한 견해라 여기기도 한다.
이는 아무것도 없는 공352)과 하나가 되어 깊은 병에 걸린 상태이다.
오늘날 세상에서 선(禪)을 말하는 자들은 보통 이 병에 주저앉아 있다.
禪學者, 本地風光, 若未發明, 則孤峭玄關, 擬從何透?
往往斷滅空, 以爲禪, 無記空, 以爲道,
一切俱無, 以爲高見.
此冥然頑空, 受病幽矣.
今天下之言禪者, 多坐在此病.
[평]
향상하는 유일한 관문에는 발을 들여놓을 문이 없다. 운문이 말하기를
“자기 본래의 광명을 뚫고 벗어나지 못하면 두 종류 병이 있고, 법신을 뚫어도 두 종류의 병이 있다”353)라고 하였으니, 반드시 그 하나하나를 모두 뚫어야 한다.
向上一關, 措足無門. 雲門云,
“ 光不透脫, 有兩種病;透過法身, 亦有兩種病.” 須一一透得, 始得.
[게송]
방초 우거진 길을 지나지 않으면, 무수히 꽃 떨어진 마을에 이르지 못하리라.
不行芳草路, 難至落花村.
349) 本地風光. 자기 자신의 본래 심성(본지)이 고스란히 드러난 세계(풍광)를 가리킨다. 어떤 오염도 없는 경계로서 주관의 깨달은 심경을 지시할 경우에도 눈앞의 세계를 소재로 하여 본지풍광이라 한다.
“당장에 분별[情]에 얽매인 의식을 털고 벗어서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면 본지풍광을 증득하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볼 것이다.”
(『圜悟語錄』 권9 大47 p.751c16. 直下擺脫情識, 一念不生, 證本地風光, 見本來面目.)
350) 단멸공(斷滅空). 현상으로서의 색(色)과 단절되거나 그것을 소멸한 다음에 드러나는 공. 색 그대로 공이라는 이치 곧 즉색공(卽色空)과 대칭된다. 이것은 공에 대한 집착으로서 진실한 공[眞空]이 아니라 악취공(惡取空)이라 한다.
“색을 벗어난 공[離色空]이란 공이 색 밖에 있다는 뜻이다.
마치 담장 안은 비어 있지 않았지만 담장 밖은 빈 것과 같다.
단멸공이란 색을 소멸시켜 공을 밝히는 것이다.
마치 우물을 팔 때 흙을 제거하면 빈 공간이 드러나는 것과 같이 반드시 색을 소멸시키고자 한다.”
(『註華嚴法界觀門』 大45 p.685a16.
離色空者, 空在色外.
如牆處不空, 牆外是空.
斷滅空者, 滅色明空.
如穿井除土出空, 要須滅色也.)
351) 無記空. 선도 악도 모두 없다고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
352) 완공(頑空). 색과 어울리지 못하고 공 자체에 치우친 공이기 때문에 편공(偏空)이라고도 한다.
“주장자를 집어 들고 말했다. ‘범부는 주장자를 보고 주장자라 부르고, 성문인은 주장자를 보고 아무것도 없는 공이라 오인하여 주장자의 존재를 부정한다.
보살인이라면 주장자를 보고 어찌 조금이라도 입에 담아 두겠는가?
그들은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며, 추워지면 불을 쪼이러 가고, 더우면 서늘한 기운을 즐길 뿐이다.’”
(『翠巖可眞禪師語』 續古尊宿語要1 卍118 p.854a3.
拈起拄杖云, ‘凡夫, 見拄杖, 喚作拄杖;聲聞人, 見拄杖, 認得頑空, 撥無拄杖;
菩薩人, 見拄杖, 幾曾掛著牙齒?
飢來喫飯, 困來打睡, 寒來向火, 熱則乘涼.’)
353) 『雲門廣錄』 권중 大47 p.558a20에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자기 본래의 광명을 뚫지 못하면 두 가지 병이 생긴다.
모든 곳에서 면전에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밝게 보지 못하는 것이 그 하나이다.
또한 모든 법이 공이라는 도리를 뚫어 보았어도 은은하게 어떤 것이라도 남아 있는 듯하면 이 역시 광명을 뚫지 못한 것이다.
또한 법신에도 두 가지 병이 있다.
법신에 도달하고도 법에 대한 집착을 잊지 못하는 탓에 자기 자신의 견해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법신의 주변에 눌러앉는 것이 그 하나이다.
설령 법신을 뚫었더라도 그 상태 그대로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자세히 점검해 보아서 약간의 기미라도 남아 있다면 이 또한 병인 것이다.”
(光不透脫, 有兩般病.
一切處, 不明面前有物, 是一.
又透得一切法空, 隱隱地似有箇物相似, 亦是光不透脫.
又法身, 亦有兩般病.
得到法身 爲法執不忘, 己見猶存, 坐在法身邊, 是一.
直饒透得法身去, 放過卽不可, 子細點檢來, 有什麽氣息, 亦是病.)
76 354)
종사에게도 여러 가지 병통이 있다.
병통이 귀와 눈에 있는 자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 눈을 부릅뜨며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선
(禪)이라 여긴다.
병통이 입과 혀에 있는 자는 전도된 말과 제멋대로 내지르는 할(喝)을 선이라 여긴다.
병통이 손과 발에 있는 자는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서며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구분 짓는 것을 선이라
여긴다.
병통이 심장과 배에 있는 자는 깊고 미묘한 이치를 궁구하고 분별을 넘어서고 견해를 떠나는 것을 선이라 여긴다.
진실에 근거하여 따진다면 병통이 아닌 것이 없다.
宗師亦有多病.
病在耳目者, 以瞠眉努目, 側耳點頭爲禪;
病在口舌者, 以顚言倒語, 胡喝亂喝爲禪;
病在手足者, 以進前退後, 指東畵西爲禪;
病在心腹者, 以窮玄究妙, 超情離見爲禪.
據實而論, 無非是病.
[평]
부모를 죽인 자는 부처님 앞에 참회라도 하지만,
반야를 비방한 자는 참회할 길이 없다.355)
殺父母者, 佛前懺悔;
謗般若者, 懺悔無路.
[게송]
허공에서 그림자를 잡아도 묘하지 않거늘,
만물 밖에서 자취를 좇는 것이 어찌 뛰어난 기틀이겠는가!
空中撮影非爲妙,
物外追蹤豈俊機!
354) 심문담분(心聞曇賁)의 설이다. 『禪林寶訓』 권4 大48 p.1036a21.
355) 운문문언(雲門文偃)의 문답을 응용한 것이다.
“‘부모를 죽이면 부처님 앞에서 참회라도 하지만 부처와 조사를 죽일 경우 누구에게 참회합니까?’
‘모조리 드러내어라!’”
(『雲門廣錄』 권상 大47 p.547b28.
問, ‘殺父殺母, 佛前懺悔, 殺佛殺祖, 向什麽處懺悔?’
師云, ‘露!’)
모조리 드러내고 참회하라는 발로참회(發露懺悔)의 뜻이지만,부모도 죽이고 부처와 조사도 죽여야 진실한 참회라는 선지(禪旨)를 나타낸다.
또한 ‘로(露)’라는 한 글자 자체가 하나의 화두[一字關]가 되면 위와 같은 뜻도 무의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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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분을 깨우친 종사가 남김없이 제기하는 이 구절356)은
마치 장승이 노래하며 박수치거나 붉게 타는 화로에 떨어진 한 점의 눈송이357)와 같으며 또한 부싯돌의 불꽃이나 번갯불358)과 같아서 학인이 참으로 이러니저러니 분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스승의 은혜를 알고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선사(先師)의 도덕을 소중히 여기는것이 아니라
단지 선사가 나에게 불법에 대하여 말해 주지 않은 것을 소중히 여길 뿐이다.”359)
本分宗師, 全提此句,
如木人唱拍, 紅爐點雪, 亦如石火電光, 學者實不可擬議也.
故古人知師恩曰,
“ 不重先師道德,
只重先師不爲我說破.”
[평]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문자에 매달릴까 염려스럽다.360)
不道, 不道! 恐上紙墨.
[게송]
화살이 강에 비친 달그림자를 뚫으니,
틀림없이 날아가는 수리도 쏘아 맞히는 사람의 솜씨이리라.
箭穿江月影, 須是射鵰人.
356) 차구(此句). 본분을 드러내는 구절. 어떤 분별의 여지도 없는 화두를 말한다. 본분사(本分事)를 ‘이 일’ 곧 차사(此事)라고 하듯이 가장 긴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이므로 곧바로 가리킬 수 있는 ‘이 구절’이라 한 것이다.
357) 눈송이가 화로에 떨어지는 순간 곧바로 녹아버리듯이 화두라는 화로에서 모든 분별과 번뇌망상뿐만 아니라 조사의 갖가지 수단도 들어설 틈이 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비유한다.
“이 경계에 이르러 방(棒)과 할(喝)이 용납되겠는가?
깊고 미묘한 이치의 본질이 들어설 수 있겠는가?
피아와 시비를 가르는 분별이 용납되겠는가?
당장에 붉게 타는 화로에 떨어진 한 점의 눈송이와 같이 그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圜悟語錄』 권8 大47 p.749a8.
到箇裏, 還容棒喝麽?
還容玄妙理性麽?
還容彼我是非麽?
直下如紅爐上一點雪相似.);
“옛날의 악습이 불현듯 일어나면 이 또한 억지로 마음을 써서 누르지 말고 다만 일어나려는 순간에 ‘개도 불성이 있는가?’ ‘없다’라고 한 화두를 살피십시오.
바로 이러할 때 일어나는 생각들은 붉게 타는 화로에 떨어지는 한 점의 눈송이와 같이 붙는 순간 사라질 것입니다.”
(『書狀』 「答劉通判」 大47 p.926a26.
忽爾舊習瞥起, 亦不着用心按捺, 只就瞥起處, 看箇話頭, 狗子還有佛性也無, 無.
正恁麽時, 如紅爐上一點雪相似.)
358) 잠시도 분별할 틈이 허용되지 않는 화두의 속성을 비유한다.
359) 운암담성(雲巖曇晟)이 불법에 대하여 어떤 지시도 해주지 않은 것을 소중히 여긴다고 한 동산양개(洞山良价)의 말을 가리킨다.
“운암의 기일을 맞이하여 동산이 제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어떤 학인이 물었다. ‘화상께서는 운암 문하에서 어떤 가르침을 받았습니까?’
‘비록 그 문하에 있었지만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다.’
‘가르침을 받지도 않았으면서 제사를 베푸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어찌 그분의 뜻을 어기고 등 돌릴 수 있겠는가?’
‘화상께서는 남전(南泉)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어째서 운암에게 제사를 베푸십니까?’
‘나는 선사(운암)의 도덕과 불법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분이 나에게 불법을 말해 주지 않은
것을 소중히 여길 뿐이니라.’
‘스님께서 선사에게 제사를 베푸는 것은 선사께서 말씀하지 않았던 뜻을 수긍하는 것인가요?’
‘반은 수긍하고 반은 수긍하지 않는다.’ ‘어째서 전적으로 수긍하지 않으십니까?’
‘만일 전적으로 수긍한다면 선사의 은혜를 등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洞山語錄』 大47 p.509b17.
雲巖諱日, 師營齋, 僧問, ‘和尙於雲巖處, 得何指示?’
師曰, ‘雖在彼中, 不蒙指示.’
云, ‘旣不蒙指示, 又用設齋, 作甚麽?’
師曰, ‘爭敢違背他!’
云, ‘和尙發跡南泉, 爲甚麽却與雲巖設齋?’
師曰, ‘我不重先師道德佛法, 祇重他不爲我說破.’
僧云, ‘和尙爲先師設齋, 還肯先師也無?’
師曰, ‘半肯半不肯.’ 云, ‘爲甚麽不全肯?’
師曰, ‘若全肯, 卽孤負先師也.’)
360) 대양경현(大陽警玄:大陽警延)의 말.
“경현이 처음에 정주 양산의 관선사(觀禪師)를 친견하고 ‘상(相)이 없는 도량이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묻자, 관선사가 벽에 걸린 관세음보살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은 바로 오처사(吳處事:吳道才)가 그린 것이다.’
경현이 말을 꺼내려고 하자 관선사가 급하게 보살상을 가리며 ‘이것도 상이 있는 것이다. 상이 없는 것은 어떤 것일까?’라고 물었다.
이 순간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뜻을 깨닫고 절을 올린 후 경현이 일어나 옆에 서자 관선사가 말했다.
‘한 구절을 말해 보지 그러는가?’
‘말을 사양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에 매달릴까 염려스러울 뿐입니다.’
관선사가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바로 이 말이 비(碑)에 새겨질 것이니라.’”
(『禪林僧寶傳』 권13 「大陽警玄傳」 卍137 p.495b4.
初謁鼎州梁山觀禪師, 問, ‘如何是無相道場?’ 觀指壁間觀音像曰,
‘此是吳處士畫.’
延擬進語, 觀急索曰, ‘遮箇是有相. 如何是無相底?’
於是, 延悟旨於言下, 拜起而侍. 觀曰,
‘何不道取一句子?’
延曰, ‘道卽不辭, 恐上紙墨.’
觀笑曰, ‘他日此語, 上碑去在.’)
각 종파의 법계와 법문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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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자라면 무엇보다 종지에 이르는 길을 상세히 분별해야 한다.
옛날에 마조가 내지른 한 번의 할(喝)에 백장은 귀가 멀었고 황벽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밀었다.361)
이 한 번의 할이 바로 염화(拈花)의 소식이고 또한 달마가 처음으로 중국에 와서 전했던 면목이기도 하다. 아! 이것이 임제종의 연원인 것이다.
大抵學者, 先須詳辨宗途.
昔馬祖一喝也, 百丈耳朧, 黃蘗吐舌.
這一喝, 便是拈花消息, 亦是達摩初來底面目.
旴! 此臨濟宗之淵源.
[평]
법을 분별하는 자들은 두려워하니, 말이 나오자마자 곧바로 때리는구나.362)
識法者懼, 和聲便打.
[게송]
마디 없는 주장자 한 자루를 은근히 밤길 가는 사람에게 전해 주노라.363)
杖子一枝無節目, 慇懃分付夜行人.
[평]
옛날에 마조가 내지른 한 번의 할로 백장은 대기(大機)를 얻었고 황벽은 대용(大用)을 얻었다.364)
대기란 원만하게 응한다는 뜻이고, 대용이란 곧바로 근원에 이른다는 뜻이다.
자세한 사정은 『전등록』에 나온다.
昔馬祖一喝也, 百丈得大機, 黃蘖得大用.
大機者, 圓應爲義;大用者, 直截爲義.
事見傳燈錄.
361) 『선교결』 주석19) 참조.
362) 『碧巖錄』 37則 「著語」 大48 p.175a14에 동일한 구절이 보인다.
363) 법천(法泉)의 『證道歌頌』 卍114 p.883a3에 나오는 구절. ‘마디 없는 주장자’는 분별할 조목이 없는 속성의 법을 나타내며, 대대로 조사들이 전한 법을 상징한다.
364) 위산(潙山)과 앙산(仰山)의 문답에 나오는 말이다.
“위산이 앙산에게 물었다.
‘백장이 마조를 다시 찾아갔을 때 서로 간에 불자(拂子)를 꼿꼿이 세운 인연이 있다. 이 두 존숙의 뜻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대기와 대용을 드러냅니다.’
‘마조 문하에서 48인의 선지식이 배출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대기를 얻었고, 어떤 사람이 대용을 얻었는가?’ ‘백장이 대기를 얻었고, 황벽이 대용을 얻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도(道)를 말로 전하는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그렇다, 그래.’”
(『百丈語錄』 古尊宿語錄1 卍118 p.163a15.
潙山問仰山,
‘百丈再參馬祖, 豎拂因緣. 此二尊宿, 意旨如何?’
仰山云, ‘此是顯大機大用.’
潙山云, ‘馬祖出八十四人善知識, 幾人 得大機, 幾人得大用?’
仰山云, ‘百丈得大機, 黃檗得大用. 餘者, 盡是唱道之師.’
潙山云, ‘如是, 如是.’)
임제종臨濟宗
본사365)이신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33세366)인 6조 혜능대사가 곧장 전하여(直傳)36)
남악회양,367) 마조도일,368) 백장회해,369) 황벽희운,370) 임제의현,371) 흥화존장,372) 남원도옹,373)
풍혈연소,374) 수산성념,375) 분양선소,376) 자명초원,375)376)377) 양기방회,378) 백운수단,379)
오조법연,380) 원오극근,381) 경산종고382) 등의 선사(禪師)로 이어졌다.
本師釋迦佛, 至三十三世, 六祖慧能大師下直傳,
曰南嶽懷讓, 曰馬祖道一, 曰百丈懷海, 曰黃蘗希運, 曰臨濟義玄, 曰興化存奬, 曰南院道顒,
曰風穴延沼, 曰首山省念, 曰汾陽善昭, 曰慈明椘圓, 曰楊歧方會, 曰白雲守端,
曰五祖法演, 曰圓悟克勤,曰徑山宗杲禪師等.
365) 本師. 본보기가 되는 스승. 근본으로 이끄는 교사(敎師). 본연도사(本緣導師)·본종사(本從師)·본사화상(本師和尙) 등과 같은 말이다. 특히 석가모니불을 가리키며, 교주(敎主)·본주(本主)·본불(本佛) 등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366) 가섭을 초조로 하는 선종의 법계상, 중국의 초조인 달마대사는 28조이며 중국 선종 6조인 혜능은 33조에 해당한다. 가섭을 초조(初祖)로 교외별전의 선법(禪法)이 보리달마에 이르기까지 28대에 걸쳐 이어졌다는 조통설(祖統說)은 801년(정원17) 성립된 선종 최초의 전등록인 『寶林傳』에서 완성되었고, 그 뒤의 전등록에서도 대체로 이 설을 따르고 있다.
367) 南嶽懷讓(677~744). 금주안강(金州安康:山東省) 출신으로 속성은 두(杜)씨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처음에는 율장(律藏)을 익혔다. 후에 숭산(嵩山)으로 가 혜안(慧安)을 친견하고 그의 추천으로 6조 혜능(638~713)을 참례하고 수제자가 되어 15년간 시봉하였다. 713년(선천2) 6조가 입적하자 호남의 남악 반야사(般若寺) 관음당(觀音堂)의 주지가 되어 혜능의 도를 선양하였다.
368) 馬祖道一(709~788). 조사선의 비조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한주(漢州:四川廣漢)출신으로 속성이 마(馬)씨여서 마대사(馬大師)라고도 한다.
즉심시불(卽心是佛)·비심비불(非心非佛)·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등의 화두로 선풍을 크게 떨쳤다.
369) 百丈懷海(720~814). 복주(福州) 장락(長樂) 출신으로 속성은 왕(王)씨이다. 황(黃)씨라는 설도 있다. 백장산에서 선원(禪院)을 세우고 청규를 제정하여 대중을 이끌고 농사와 선수행을 병행하며 대중을 이끌었다.
370) 黃蘗希運(?~850). 복건성 복주(福州) 민현(閩縣) 출신이다. 문인인 상국(相國)배휴(裵休)가 집록한 『傳心法要』가 유명하다.
371) 臨濟義玄(?~867). 임제종의 개조. 하남성 조주 남화(南華) 출신으로 속성은 형(邢)씨이다. 할(喝)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사빈주(四賓主)·사할(四喝)·삼현삼요(三玄三要) 등의 선법을 펼쳤다.
372) 興化存獎(830~888). 임제의현의 제자. 산동성 출신으로 속성은 공(孔)씨이다. 임제가 입적한 후에는 삼성혜연(三聖慧然) 회하에서 수좌로 있었다. 위부(魏府)의 흥화사(興化寺)에서 임제종풍을 크게 선양했다.
373) 南院道顒(860~930). 하남성 여주(汝州) 출신이다. 혜옹(慧顒) 또는 보응(寶應)이라고도 불린다.
374) 風穴延沼(896~973). 항주(杭州) 출신으로 속성은 유(劉)씨이다. 출가 초기에는 천태종을 수학하다가 남원도옹에게서 참학한 뒤 여주 풍혈사(風穴寺)를 창건하고 임제종풍을 선양했다.
375) 首山省念(926~993). 내주(萊州) 출신으로 속성은 적(狄)씨이다. 죽비자(竹篦子) 화두가 알려져 있다.
376) 汾陽善昭(947~1024). 산서성 태원(太原) 출신으로 속성은 유(兪)씨이다. 부모가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14세 때 출가하였으며 71명의 선지식을 역참하고 최후에 수산성념 문하에서 참학하고 법을 이었다.
377) 慈明椘圓(986~1040). 자명은 시호. 석상초원(石霜楚圓)이라고도 한다. 전주(全州) 출신으로 속성은 이(李)씨이다. 초원의 문하에서 양기방회(楊岐方會)와 황룡혜남(黃龍慧南)이 나와 각각 임제종 양기파와 황룡파로 분파되어 임제종의 전등을 이었다.
378) 楊岐方會(996~1049). 산서성 원주(袁州) 출신으로 속성은 냉(冷)씨이다.
379) 白雲守端(1025~1072). 호남성 형양(衡陽) 출신으로 속성은 갈(葛)씨이다.
380) 五祖法演(1024~1104). 사천성 면주(綿州) 출신으로 속성은 등(鄧)씨이다. 35세에 출가하였다. 조주(趙州)의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에 대한 참구법을 간화선(看話禪)의 방법으로 제시한 최초의 선사이다.
381) 圜悟克懃(1063~1135). 사천성 팽주(彭州) 출신으로 속성은 낙(氏)씨이다. 저술에 『碧巖錄』이 있다.
382) 徑山宗杲(1089~1163). 안휘성 선주(宣州) 영국(寧國) 출신으로 속성은 해(奚)씨이다. 대혜종고(大慧宗杲)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간화선의 대성자이다.
조동종曹洞宗
육조혜능이 방계(傍系)로 전하여 청원행사,383) 석두희천,384) 약산유엄,385) 운암담성384),385)386)
동산양개,387) 조산탐장,388) 운거도응389) 등의 선사로 이어졌다.
六祖下傍傳, 曰靑原行思, 曰石頭希遷, 曰藥山惟儼, 曰雲巖曇晟,
曰洞山良价, 曰曹山耽章, 曰雲居道膺禪師等.
383) 靑原行思(?~740). 강서성(江西省) 길주(吉州) 안성(安城) 출신으로 속성은 유(劉)씨이다. 문하에서 조동종·법안종·운문종이 갈라져 나왔다.
384) 石頭希遷(700~790). 광동성 단주(端州) 출신으로 속성은 진(陳)씨이다. 처음에 6조 혜능에게 득도했으나 혜능이 얼마 되지 않아 입적하자 청원행사에게서 참학하고 인가를 받았다. 당시 ‘강서마조(江西馬祖) 호남석두(湖南石頭)’라고 불리며 마조도일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385) 藥山惟儼(745~828). 산서성 강주(絳州) 출신으로 속성은 한(韓)씨이다.
386) 雲巖曇晟(782~841). 강서성 종릉(鍾陵) 출신으로 속성은 왕(王)씨이다. 16세에 출가하여 수년 동안 백장회해의 문하에 있다가 백장이 입적하자 약산유엄에게 참학하고 법을 이었다.
387) 洞山良价(807~869). 조동종의 시조이다. 절강성 월주(越州) 회계(會稽) 출신으로 속성은 유(兪)씨이다. 제방을 참방하던 중 운암담성에게 가서 무정설법(無情說法)의 뜻을 묻고 돌아오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조동오위(曹洞五位)의 실마리가 된 「五位頌」을 지었다.
388) 曹山耽章(839~901). 복건성 고전현(古田縣) 출신으로 속성은 황(黃)씨이다. 보통 본적(本寂)이라는 법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동산양개가 제시한 오위(五位)의 법문을 정리하여 선풍을 진작시켰는데, 이로써 조동종이 종파로서 성립하기에 이르렀다.
389) 雲居道膺(?~902). 하북성 옥전현(玉田縣) 출신으로 속성은 왕(王)씨이다.
운문종雲門宗
마조도일이 방계로 전하여 천왕도오,390) 용담숭신,391) 덕산선감,392) 설봉의존,391)392)393)
운문문언,394) 설두중현,395) 천의의회396) 등의 선사로 이어졌다.
馬祖傍傳, 曰天王道悟, 曰龍潭崇信, 曰德山宣鑑, 曰雪峯義存,
曰雲門文偃, 曰雪竇重顯, 曰天衣義懷禪師等.
390) 天王道悟(738~819). 호북성 강릉(江陵) 저궁(渚宮) 출신으로 속성은 최(崔)씨이다. 제방을 두루 역참하다가 마조도일의 법문을 듣고 단박에 깨쳤다. 저궁으로 돌아가 전법했다. 동시대의 천황도오(天皇道悟 748~807)와 구별하기 위하여 후세에 천왕도오(天王道悟)로 불렀다.
법통은 용담(龍潭)·덕산(德山)·설봉(雪峰)등으로 이어지며 덕산 문하에서 운문종(雲門宗)과 법안종(法眼宗)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천황도오와 천왕도오의 법통에 대한 여러 선문헌의 기록이 상이하여 아직까지 정론이 없다. 이는 운문종과 임제종이 서로 혜능의 법맥을 잇는 적통이라 주장하여 무리하게 법맥을 정리한 것에 기인한다.
391) 龍潭崇信(782?~865?). 저궁(渚宮) 출신. 천황사(天皇寺) 인근에서 떡 장사를 했는데, 떡을 공양한 것을 인연으로 출가하여 법을 이어받았다.
392) 德山宣鑑(780~865). 사천성 검남(劍南) 출신으로. 속성은 주(周)씨이다. 어릴 때 출가하였으며 대·소승 경전에 모두 통달하였다. 특히 항상 『金剛般若經』을 강의하였으므로 당시에 주금강(周金剛)이라 일컬어졌다. 남방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선법이 풍미한다는 소문을 듣고 분개하여 이들을 논파하려고 『金剛經疏鈔』를 지니고 용담숭신을 찾아가 문답하던 중 깨닫고서는 바로 『金剛經疏鈔』를 태워버리고 선종에 귀의하였다. 항상 주장자[棒]로 학인을 때리는 엄정한 가풍을 떨쳐서 덕산방(德山棒)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393) 雪峯義存(822~908). 복건성 남안현(南安縣) 출신으로 속성은 증(曾)씨이다. 동산양개 문하에 있으며 참학했으나 소식이 없자 동산양개의 권유로 덕산선감(德山宣鑑)을 찾아가 참학하고 법을 이었다.
394) 雲門文偃(864~949). 운문종의 개조. 절강성 가흥(嘉興) 출신으로 속성은 장(張)씨이다. 출가하여 여러 경론을 섭렵하였는데, 특히 『四分律』을 깊이 연구했다.
설봉의존을 친견하여 3년 동안 공부하고 그의 종지를 전수받았다. 그 후 제방의 선지식을 참방하였으며 923년에는 운문산에서 광태선원(光泰禪院)을 창건하고 선풍을 드날렸다.
395) 雪竇重顯(980~1052). 사천성 수령현(遂寧縣) 출신으로 속성은 이(李)씨이다. 『碧巖錄』의 모태가 된 『雪竇頌古』를 짓는 등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396) 天衣義懷(989~1060). 절강성 낙청현(樂淸縣) 출신으로 속성은 진(陳)씨이다.
위앙종 潙仰宗
백장회해가 방계로 전하여 위산영우,397) 앙산혜적,398) 향엄지한,399) 남탑광용398),39)400) 파초혜청,401) 곽산경통,402) 무착문희403) 등의 선사로 이어졌다.
百丈傍傳, 曰潙山靈祐, 曰仰山慧寂, 曰香嚴智閑, 曰南塔光涌, 曰芭蕉慧淸,
曰霍山景通, 曰無著文喜禪師等.
397) 潙山靈祐(771~853). 위앙종의 개조. 복건성 장경(長慶) 출신으로 속성은 조(趙)씨이다. 호남성 담주 대위산(大潙山)에서 종풍을 선양했다.
398) 仰山慧寂(803~887). 광동성 회화현(懷化縣) 출신으로 속성은 섭(葉)씨이다. 부모가 출가를 반대하자 손가락 두 개를 자르고 서원을 세워 17세에 출가했다. 강서성 원주(袁州) 앙산(仰山)에서 선풍을 진작시켰다. 스승인 위산영우와 함께 위앙종의 개조로 일컬어진다.
399) 香嚴智閑(?~898). 청주(靑州) 출신으로 속성은 유(劉)씨이다. 위산영우와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화두로 문답했으나 꿰뚫지 못했다. 그 후 무당산(武當山)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수행하다가 돌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대오(大悟)했다는 기연이 유명하다.
400) 南塔光涌(850~938). 강서성 예장풍성(豫章豊城) 출신으로 속성은 장(章)씨이다. 앙산혜적을 친견하고 심인(心印)을 얻었다.
401) 芭蕉慧淸(?~?). 신라 출신. 남탑광용의 법을 이었다. 영주(郢州) 파초산에 주석했다. 파초주장(芭蕉拄杖) 공안이 전한다.
402) 霍山景通(?~?). 출신행적 미상. 앙상혜적의 제자로 귀종지상(歸宗智常)의 제자인 지통(智通)과 함께 2대선불(大禪佛)로 일컬어졌다.
403) 無著文喜(811~900). 절강성 가화(嘉禾) 출신으로. 속성은 주(朱)씨이다. 앙산혜적의 가르침을 받고 깨쳤다고 전한다.
법안종法眼宗
설봉의존이 방계로 전하여 현사사비,404) 지장계침,405) 법안문익,406) 천태덕소,407) 영명연수,408)
용제소수,409) 남대수안410) 등의 선사로 이어졌다.
雪峯傍傳, 曰玄沙師備, 曰地藏桂琛, 曰法眼文益, 曰天台德韶, 曰永明延壽,
曰龍濟紹修, 曰南臺守安禪師等.
404) 玄沙師備(835~908). 복건성 민현(閩縣) 출신으로 속성은 사(謝)씨이다. 사씨 집안의 셋째 아들이라는 뜻에서 사삼랑(謝三郞)이라고도 불린다. 30세에 출가했는데, 출가하기 전 직업은 어부였다.
405) 地藏桂琛(867~928). 절강성 상산(常山) 출신으로 속성은 이(李)씨이다. 나한계침(羅漢桂琛)이라고도 불린다. 현사사비의 법을 이었다.
406) 法眼文益(885~958). 법안종의 개조. 절강성 여항(餘杭) 출신으로 속성은 노(魯)씨이다. 7세 때 출가하였고, 지장계침의 법을 이었다. 선교 융합에 힘썼다.
407) 天台德韶(891~972). 처주(處州) 용천(龍泉) 출신으로 속성은 진(陳)씨이다. 법안종(法眼宗)의 제2조로 법안문익의 법을 이었다. 천태산에 들어가 지의(智顗)의 유적을 탐방했다. 당시 천태산의 나계의적(螺溪義寂)이 천태종 서적이 소실되었음을 한탄하자 고려에 서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오월왕 전홍숙에게 요청하여
관련 서적을 들여왔으며 수십 곳에 도량을 세웠다.
408) 永明延壽(904~975). 절강성 여항(餘杭) 출신으로 속성은 왕(王)씨이다. 어렸을 때에 출가에 뜻을 두고 『法華經』을 탐독했다. 관리에 등용된 후에 세금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28세 때 출가하여 천태덕소의 법을 이었다. 선과 염불을 겸수했는데, 정토종의 조사로 추앙받기도 했으며 자씨보살로 여겨지기까
지 했다.
고려에서 영명연수의 학덕을 존숭하여 36명의 스님을 유학시켰는데, 이로써 송나라 이후 쇠퇴하던 법안종이 고려에 성행하게 되었다. 『宗鏡錄』 100권을 편집하였으며, 『萬善同歸集』 등의 저술을 남겼다.
409) 龍濟紹修(?~?). 출신행적 미상. 법안문익과 지장계침에게 참학했다.
410) 南臺守安(?~?). 출신행적 미상. 지장계침의 법을 이었다.
임제가풍臨濟家風
맨손에 칼 한 자루 들고서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인다.411)
삼현(三玄)·삼요(三要)412)로써 고금의 진실을 판별하고 사빈주(四賓主)로써 용과 뱀413)을 가려낸다.
금강보검을 쥐고서 나무에 붙어사는 귀신[竹木精靈]을 쓸어 없애고, 사자의 온전한 위세를 떨치며 여우의 간담을 찢는다.
임제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마른하늘에 벼락치고 펀펀한 땅에 물결을 일으킨다.414)
赤手單刀, 殺佛殺祖.
辨古今於玄要, 驗龍蛇於主賓.
操金剛寶劒, 掃除竹木精靈, 奮獅子全威, 震裂狐狸心膽.
要識臨濟宗麽?
靑天轟霹靂, 平地起波濤.
411) “그대들이 법과 어긋나지 않는 견해를 얻고자 한다면, 다만 남들에게 미혹당하지만 말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무엇이건 만나기만 하면 곧바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며, 친속을 만나면 친속을 죽여야
비로소 해탈을 얻어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모든 것을 뚫고 벗어나 자재하게 될 것이다.”
(『臨濟語錄』 大47 p.500b21.
爾欲得如法見解, 但莫受人惑.
向裏向外, 逢著便殺.
逢佛殺佛, 逢祖殺祖, 逢羅漢殺羅漢, 逢父母殺父母, 逢親眷殺親眷,
始得解脫, 不與物拘, 透脫自在.)
412) 임제의현(臨濟義玄)이 학인을 지도하기 위한 방법으로 설한 것.
삼현은 체중현(體中玄:조금의 꾸밈도 없이 본체 그대로의 깊은 도리를 나타내는 구절)·
구중현(句中玄:언어에 구속되지 않으면서 그 속에 담긴 현묘(玄妙)한 뜻을 나타내는 구절)·
현중현(玄中玄:모든 상대적 논리와 어구에서 벗어난 구절)을 말한다.
분양선소(汾陽善昭 947~1024)에 의하면 삼요 가운데 제1요는 분별하거나 조작하지 않은 언어, 제2요는 있는 그대로 현요(玄要)에 들어가는 것, 제3요는 언어문자를 떠난 것을 말한다. “임제에게는 4빈주·4료간·4할·3현·3요 등의 선법이 있다.”
(『五家語錄』 「序」 卍119 p.1007a18. 臨濟, 有四賓主, 四料揀, 四喝, 三玄, 三要.)
413) 탁월한 자와 평범한 자.
414) 『人天眼目』 권2 「臨濟門庭」 大48 p.311b8~c3 및 「要訣」 p.311c5~c18 참조.
조동가풍曹洞家風
방편으로 오위설(五位說)415)을 열어 상·중·하 세 근기에 적절하게 응대하며,
보검을 마음대로 빼어들고 무수한 무명의 견해416)들을 베어버리고,
본분에 잘 맞추어 널리 통하게 하며 갖가지 실마리를 가지고 파고드는 온갖 분별[穿鑿]을 끊어버린다.417) 위음왕불도 출현하기 이전에 눈앞 가득히 펼쳐진 가물가물한 광경이며, 공겁 이전의 호리병 속 풍경이로다. 조동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부처와 조사가 태어나기 이전의 공겁까지 벗어난 소식이니, 정위나 편위 중 어디에도 떨어지지 않고 유와 무를 자유롭게 오가는 기틀이다.418)
權開五位, 善接三根,
橫抽寶劒, 斬諸見稠林,
妙恊弘通, 截萬機穿鑿.
威音那畔, 滿目烟光, 空劫已前, 一壺風月.
要識曹洞宗麽?
佛祖未生空劫外, 正偏不落有無機.
415)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가 학인을 가르치기 위해 제창한 설.
조산본적(曹山本寂 840~901)이 동산의 이 오위설을 이어받아 새로운 비유로써 다시 밝힘으로써 조동종의 표준이 되었다.
오위에는 정편오위(正偏五位)와 공훈오위(功勳五位)가 있는데,
정편오위는 정중편(正中偏)·편중정(偏中正)·정중래(正中來)·편중지(偏中至)·겸중도(兼中到) 등의 다섯 가지이다.
정(正)은 음(陰)으로서 진여의 본체 또는 무차별·평등·정(靜)·공(空)·이(理) 등을 가리키며, 편(偏)은 양(陽)으로서 차별·동(動)·용(用)·색(色)·사(事)·생멸의 현상 등을 나타낸다.이 두 가지가 서로 의지하며 지위를 바꾸어 다섯 가지의 조합을 만들어낸다.
공훈오위란 향(向)·봉(奉)·공(功)·공공(共功)·공공(功功) 등인데, 중생에게 본래부터 불성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고서 그 불성을 사무쳐 통달하고자 하며[向], 그 불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하며[奉], 불성을 깨닫고[功], 불성이라는 무차별의 평등과 함께 차별의 세계를 인정하며[共功], 다시 그것까지 넘어서 차별된 색 그대로 모든 것에 자재한 평등의 경지[功功]를 말한다.
416) 조림(稠林).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우거진 숲이란 뜻으로 사견(邪見)·번뇌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417) “방편으로 오위설을 열어 상·중·하 세 가지 근기에 적절하게 응대하고, 하나의 소리를 크게 떨쳐 널리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이끌었다. 보검을 마음대로 뽑아들고 모든 무명의 견해들을 베어버리고, 본분에 잘 맞추어 널리 통하게 하며 갖가지 실마리를 가지고 파고드는 온갖 분별[穿鑿]을 끊어버렸다.
또한 조산본적을 제자로 얻으니 그가 종지를 깊이 밝혀 아름다운 불도를 묘하게 드러내었다.
그 도는 군신(君臣)의 관계와 일치하였고, 편과 정이 서로 지위를 바꾸며 의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동산의 현묘한 선풍이 세상에 퍼지게 되었으므로 제방의 종장들이 모두 함께 그들을 추존하여 조동종이라 하였다.”
(『禪宗正脉』 권7「洞山良价章」 卍146 p.215b17.
權開五位, 善接三根, 大闡一音, 廣弘萬品. 橫抽寶劒, 剪諸見之稠林, 妙叶玄通, 截萬端之穿鑿.
又得曹山, 深明的旨, 妙唱嘉猷.
道合君臣, 偏正回互. 由是, 洞上玄風, 播於天下, 故諸方宗匠, 咸共推尊之, 曰曹洞宗.)
418) 『洞山良价語錄』 大47 p.520b7~b12, 『人天眼目』 권3 「曹洞宗」 大48 p.313c8~c15『五家宗旨纂要』 권중 卍114 p.529b7~b12, 『禪宗正脉』 권7 「洞山良介章」 卍146 p.215b17 이하 참조.
운문가풍雲門家風
칼끝에 오히려 살아날 길이 있고 철벽에는 파고들어갈 문이 없다.419)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말들을 뒤집어 엎어 드러내고 고착된 범상한 견해들을 여지없이 잘라내 버린다.420) 번개같이 빨라서 사량 분별로는 미칠 수 없고, 불길처럼 거세게 타오르니 어찌 한곳에 안주하는 것을 용납하겠는가!
운문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주장자는 하늘 높이 뛰어오르고 잔 속에서는 여러 부처가 설법한다.421)
劒鋒有路, 鐵壁無門.
掀翻露布葛藤, 剪却常情見解.
迅電不及思量, 烈焰寧容湊泊!
要識雲門宗麽?
柱杖子跳上天, 盞子裏諸佛說法.
419) 『人天眼目』 권2 大48 p.313b11. 판본에 따라서는 ‘劒’자가 화살 ‘전(箭)’자로 된곳도 있다.
420) “비은통용(費隱通容)이 말했다.
‘목주가 은산철벽의 경계에서 운문을 쥐어틀어 뚫고 들어가도록 했기 때문에 운문은 기상을 얻었는데 왕과 같이 자유자재하여 비교할 상대가 없었으며, 몸은 북두(北斗)에 숨기고 홀로 동산을 거니는 듯한 경지였다. 또한 사람들을 대하여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말들을 뒤집어엎어 드러내고 고착된 범상한 견해들을 여지없이 잘라내 버렸다.
격외의 경지에서 풀어줬다 사로잡았다 하고 말을 내뱉기도 전에 바로 빼앗으니 상근기의 날카로운 그릇이 아니면 누구도 그와 비슷한 경계조차 엿볼 수가 없었다.
진실로 목주의 독기를 깊이 받았기 때문에 남들을 가르치는 수단도 대단히 매서웠다.’”
(『祖庭鉗鎚錄』 卍114 p.760b11.
通容曰, ‘睦州向銀山鐵壁, 令雲門拶入, 故雲門得, 氣宇如王, 自在無比, 藏身北斗, 獨步東山.
乃至爲人, 打翻露布葛藤, 剪却常情見解.
格外縱擒, 言前定奪, 非上根利器, 莫能窺其彷彿.
眞爲受睦州毒氣深, 而爲人手段辣也.’)
421) 『人天眼目』 권2 「雲門門庭」 大48 p.313b3.
위앙가풍 潙仰家風
스승이 부르고 제자가 화답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일가를 이룬 격이다.422)
옆구리에는 글자를 새기고423) 머리에는 뿔이 높이 솟아났으며,424) 방안42)423)424)425)에서 학인을 점검하면426) 사자의 허리마저도 끊어진다.427)
사구(四句)도 여의고 백비(百非)428)의 방법도 버리고 한 방으로 모두 부숴버리며, 두개의 입에 혀 하나도 없이429) 굽이굽이 구슬을 잘도 꿴다.
위앙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조각 난 비석은 옛길에 나뒹굴고, 무쇠소는 소실에서 잠을 잔다.430)
師資唱和, 父子一家.
脇下書字, 頭角崢嶸, 室中驗人, 獅子腰折.
離四句絶百非, 一搥粉碎, 有兩口無一舌, 九曲珠通.
要識潙仰宗麽?
斷碑橫古路, 鐵牛眠少室.
422) 위앙부자(潙仰父子). 위산(潙山)과 앙산(仰山)은 부자와 같이 친밀한 사제의 관계로 가르침을 주고받았기에 이렇게 부른다.
“스승이 부르고 제자가 화답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일가를 이룬 격이다. 밝음과 어둠 그 어디로나 걸림 없이 통하지만 말로도 침묵으로도 드러내지 않는다〈위앙의 가풍〉.”
(『人天眼目』 권6 大48 p.331a21. 師資唱和, 父子一家. 明暗交馳, 語默不露 〈潙仰〉.);
“위앙종풍은 아버지와 아들이 일가를 이루듯이 스승이 부르고 제자가 화답하였다. 말로도 침묵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밝음과 어둠 어디로나 자재하게 통하고, 체와 용을 모두 드러낸다. 혀 없는 사람이 종지를 드러내려 하니 원상을 그려 밝히는구나.”
(『五家宗旨纂要』 권하 卍114 p.549a14. 潙仰宗風, 父子一家, 師資唱和. 語默不露 , 明暗交馳, 體用雙彰. 無舌人爲宗, 圓相明之.)
423) 위산영우(潙山靈祐)가 입적한 뒤 ‘위산승모갑(潙山僧某甲)’이라는 다섯 글자를 새기고 물소로 태어나 이류중행(異類中行)을 실천할 것이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위산이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노승은 백 년 뒤에 산 아래에서 한 마리 물소로 태어날 것이다. 왼쪽 옆구리에는 「위산승모갑(潙山僧某甲)」이라는 다섯자가 씌어 있을 것이다.
그때에 「위산스님!」 하고 부르면 「물소요」라고 답할 것이요,
「물소야!」 하고 부르면 「위산 스님 아무개」라 답할 것이다.
말해 보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겠는가?’ 앙산이 나와서 절을 올리고 나갔다.”
(『潙山靈祐語錄』 大47 p.581c25.
師上堂云, ‘老僧百年後, 向山下, 作一頭水牯牛. 左脇下書五字云, 潙山僧某甲.
當恁麽時, 喚作潙山僧, 又是水牯牛,
喚作水牯牛, 又是潙山僧. 畢竟喚作
甚麽卽得?’ 仰山出禮拜而退.)
424) 두각쟁영(頭角崢嶸). 뿔이 두드러지게 높이 솟아났다는 말. 뛰어난 인물 또는 영웅호걸을 비유하기도 한다.
425) 실중(室中). 선문(禪門)에서 법을 전하고 받을 때 스승의 방에서 스승과 제자가 직접 마주하고 불법의 비결(秘訣)을 은밀히 전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426) 실중험인(室中驗人).
“‘위앙의 종지는 어떤 것입니까?’
‘위앙의 가풍은 기용(機用)이 원융하고 스승의 방 안에서 스승이 제자를 직접 마주하고 점검하여 비결을 전하니 그 비결의 구절은 호랑이를 함정에 빠뜨릴 만하다.’”
(『萬法歸心錄』 권하卍114 p.832a16.
問, ‘如何是潙仰宗?’
答曰, ‘潙仰家風, 機用圓融, 室中驗人, 句能陷虎.)
427) 사자요절(獅子腰折). 위산과 앙산의 다음 문답에 근거한 말이다.
“앙산이 위산문하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척천태상좌가 물었다.
‘터럭 한 끝에 사자가 나타난다는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다. 백억 개의 터럭 끝에 백억의 사자가 나타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앙산이 곧바로 소를 타고 돌아가 버렸다. 위산을 모시고 있던 차에 전날의 이 이야기를 여쭙기를 막 마치자 태상좌가 오는 것이 보였다.
앙산이 말했다. ‘바로 저 상좌입니다.’
위산이 마침내 물었다. ‘백억 개의 터럭 끝에서 백억의 사자가 나타난다는 말뜻을 물은 사람이 상좌가 아닌가?’
‘맞습니다.’
‘바로 이렇게 나타났을 때는 터럭 전에 나타난 것인가, 터럭 후에 나타난 것인가?’
‘나타났을 때는 전과 후를 갈라서 말할 수 없습니다.’
위산이 크게 웃었다.
앙산이 ‘사자의 허리가 끊어졌구나’라 하고 곧장 내려와 떠났다.”
(『仰山慧寂語錄』 大47 p.582c9.
師在潙山, 牧牛時. 踢天泰上座問云,
‘一毛頭師子現卽不問. 百億毛頭, 百億師子現, 又作麽生?’
師便騎牛歸. 侍立潙山次, 擧前話方了, 却見泰來.
師云, ‘便是這箇上座.’
潙山遂問, ‘百億毛頭, 百億師子現, 豈不是上座道?’
泰云, ‘是.’
師云, ‘正當現時, 毛前現毛後現?’
泰云, ‘現時不說前後.’
潙山大笑.
師云, ‘師子腰折也.’ 便下去.)
428) 모든 부정적 형식의 언어 또는 사유분별을 가리킨다. 또는 무한부정(無限否定)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구백비(四句百非) 또는 이사구절백비(離四句絶百非) 등과 같이 사구와 짝이 되어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비에 대하여 이렇게 일(一)·이(異)·유(有)·무(無) 등의 네 글자를 소재로 밝히면 다음과 같다.
일(一)·비일(非一)·역일역비일(亦一亦非一)·비일비비일(非一非非一) 등이 첫 번째 사구이며, 이(異) 등 나머지 세 글자도 이 예를 따르면 모두 16구절이 된다.
여기에 다시 과거·현재·미래가 각각 16구절이 되므로 모두 48구절을 이룬다.
또한 이미 일어난 것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 각각 48구절이 되어 모두 96구절을 이룬다.
아울러 근본의 사구를 합하면 모두 백비를 이룬다.
그러나 지나치면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총괄해서 말하면 일·이·유·무 등 사구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간략하게 이것으로써 백비를 밝힌 것이다.”
(『起信論疏筆削記』 권4 大44 p.318b6.
百非者, 此於一異有無等, 四字上明之.
謂一非一, 亦一亦非一, 非一非非一, 爲一四句, 異等, 例此共成十六.
又過現未來, 各有十六, 成四十八.
又已起未起, 各四十八, 共成九十六.
幷根本之四, 都成百非.
然, 過雖無量, 總而言之, 不出一異等四.
是故, 約此以明百非.)
429) 양구무일설(兩口無一舌). 양구일무설(兩口一無舌)이라고도 한다.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입 어느 쪽에도 혀가 없다는 뜻으로서 서로의 뜻을 주고받는 데 말이 어떤 도움도 되지 않으며, 또한 두 사람의 물음과 대답이 말을 넘어서서 하나가 되어 있음을 뜻한다.
양구일설(兩口一舌)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두 사람이 하고 있는 말은 달라도 그 뜻은 같다는 뜻이다.
“앙산은 사람과 상황에 적절하게 대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을 종문의 표준으로 삼았다. 다시 동평산(東平山)으로 거처를 옮겨 입적하려 할 즈음에 몇몇 학인이 곁에서 시봉하고 있었다.
그때 앙산이 게송으로 읊었다.
‘여러 제자들이여,
똑바로 보고 다시 우러러 살펴라.
입은 둘이나 혀는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종지이다.’”
(『仰山慧寂語錄』大47 p.588a11.
師, 接機利物, 爲宗門標準. 再遷東平, 將順寂, 數僧侍立.
師以偈示之云,
‘一二二三子,
平目復仰視.
兩口一無舌,
卽是吾宗旨.’)
430) 위앙종에 대한 오조법연(五祖法演)과 설당도행(雪堂道行)의 평가를 취한 말.
“위앙종:오조는 ‘조각 난 비석이 옛길에 나뒹군다’고 하였고,
수산(首山)은 ‘서로의 기틀이 암암리에 원만하게 합하였다’고 하였고,
정당(正堂)은 ‘눈앞에 다른 길은 없다’라 하였고,
호국(護國)은 ‘앞으로 밀지도 않지만 뒤로 물러나지도 않는다’고 하였고,
설당은 ‘뿔 없는 무쇠소가 소실에서 잠을 잔다’고 하였다.”
(『人天眼目』 권6 「五宗問答」 大48 p.330c14.
潙仰宗:祖云, ‘斷碑橫古路.’
山云, ‘暗機圓合.’
堂云, ‘目前無異路.’
國云, ‘推不向前, 約不退後.’
雪云, ‘無角鐵牛眠少室.’)
법안가풍法眼家風
말 속에 여운이 남아 있고, 구절 속에 칼날이 감추어져 있다.431)
청정한 의식[髑髏]432)으로써 항상 세계와 접하고, 코로 가풍을 모색한다.433)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달빛 드리운 물결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가 진심(眞心)을 드러내고, 푸른 대나무와 노란 꽃도 미묘한 진리를 분명하게 나타낸다.
법안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바람은 조각구름을 불어 산 너머로 돌려보내고, 달은 흐르는 물에 섞여 다리 아래를 지나네.
言中有響, 句裏藏鋒.
髑髏常干世界, 鼻孔磨觸家風.
風柯月渚, 顯露眞心, 翠竹黃花, 宣明妙法.
要識法眼宗麽?
風送斷雲歸嶺去, 月和流水過橋來.433)
431)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고 색을 보고 마음을 밝힌다. 구절 속에 칼날이 감추어져 있고 말 속에 여운이 남아 있다.〈법안의 가풍〉”
(『人天眼目』 권6 「圓悟五家宗要」 大48 p.331a23.
聞聲悟道, 見色明心. 句裏藏鋒, 言中有響.〈法眼〉)
432) 촉루(髑髏)는 해골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현상과 접하면서도 번뇌의 물이 바싹 메마르고[乾] 망상의 때가 깨끗이 씻겨나간 청정한 법신(法身)을 뜻한다. 해골의 눈·귀·손발에 대한 세 가지 문답으로 조동종의 종지를 드러낸 ‘동종삼문답’에 촉루의 뜻이 잘 드러나 있다.
“동종삼문답:
‘해골의 눈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눈을 깜박여 보지 않아도 사방의 세계가 온통 밝게 빛난다.’
‘해골의 귀란 무엇을 말합니까?’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원만한 음성이 또렷하다.’
‘해골의 수족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팔을 흔들지 않아도 허공을 흔들어 부수고, 다리를 움직이지 않아도 사해(四海)·오악(五嶽)을 차서 뒤집는다.’
해골이란 메마르고 청정한 몸이니 법신의 일을 밝히는 것이다.
대답한 뜻은 어떤 것인가?
비록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타파한다는 뜻이다.”
(『五家宗旨纂要』 권중 卍114 p.543a8.
洞宗三問答:
‘如何是髑髏眼?’
答云, ‘目不瞬四維洞照.’
‘如何是髑髏耳?’
答云, ‘耳不側圓音歷歷.’
‘如何是髑髏手足?’
答云, ‘臂不掉摵碎虛空, 脚不動踏翻海嶽.’
髑髏者, 乾淨之體, 明法身邊事也.
答意如何?
謂雖不著一切, 而能破一切也.)
433) 콧구멍(본분)으로 호흡을 하며 냄새를 맡듯이 가풍을 모색한다는 말. 『景德傳燈錄』 권21 「白龍道希傳」 大51 p.373b10, 『雪竇語錄』 권4 大47 p.693c3 등에 나오는 말.
별명임제종지(別明臨濟宗旨)
대체로 한 구절 중에 삼현을 갖추고 하나의 현 중에 삼요를 갖추고 있으니,
한 구절은 무늬가 없는 도장434)이요 삼현과 삼요는 무늬가 있는 도장이다.
방편[權]과 실상[實]은 현(玄)이요, 비춤과 작용은 요(要)이다.
大凡, 一句中具三玄, 一玄中具三要,
一句, 無文綵印, 三玄三要, 有文綵印.
權實玄照用要.
434) 무문채인(無文綵印). 무문인(無文印)·무자인(無字印)·불조심인(佛祖心印)이라고도 한다. 문양이 없는 도장을 말한다. 곧 언어문자의 형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심인(心印)을 가리킨다.
삼구三句 435)
제1구는 몸을 상하게 하고 목숨을 잃는435) 구절436)이며,
제2구는 입을 열기도 전에 잘못되는 구절436)437)이고,
제3구는 오물을 까부르는 키요 쓸어 없애는 빗자루와 같은 구절이다.
第一句, 喪身失命;
第二句, 未開口錯;
第三句, 糞箕掃箒.
435) 임제삼구(臨濟三句).
“법좌에 오르자 학인이 물었다. ‘제1구는 어떤 것입니까?’
‘3요의 도장을 찍고 떼니 붉은 무늬점이 분명하고, 말도 꺼내기 전에 주객이 나뉜다.’
‘제2구는 어떤 것입니까?’
‘문수보살이 어찌 무착선사의 물음을 용납하겠냐마는, 방편을 펼치는 것이 어찌 망상을 끊어버린 상근기와 모순되겠는가!’
‘제3구는 어떤 것입니까?’
‘무대에서 꼭두각시를 희롱하는 것을 보라. 밀고 당기는 것이 모두 그 배후에서 조작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임제선사는 또 말했다.
‘1구의 말에는 모름지기 3현문을 갖추어야 하고, 1현문에는 3요를 갖추어야 한다. 여기에 방편도 있고 작용도 있으니 그대들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臨濟錄』 大47 p.497a15.
上堂, 僧問, ‘如何是第一句?’
師云, ‘三要印開朱點側, 未容擬議主賓分.’
問, ‘如何是第二句?’
師云, ‘妙解豈容無著問, 漚和爭負截流機!’
問, ‘如何是第三句?’
師云, ‘看取棚頭弄傀儡. 抽牽都來裏有人.’
師, 又云, ‘一句語須具三玄門, 一玄門須具三要. 有權有用, 汝等諸人, 作麽生會?’)
436) 상신실명(喪身失命). 몸과 마음이 모두 탈락하여 어떤 기능도 발휘할 수 없는 경계를 묘사한다.
437) 미개구착(未開口錯). 어떤 말이나 분별도 통하지 않는 경지를 나타낸다.
삼요三要 438)
첫 번째 요(要)는 비춤[照]이 곧 대기(大機)이고,
두 번째 요는 비춤이 곧 대용(大用)이며,
세 번째 요는 비춤과 작용[用]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一要, 照卽大機;
二要, 照卽大用;
三要, 照用同時.
438) “제1. 비춤을 먼저하고 작용을 뒤에 하는 것○:
예컨대 학인이 찾아 왔을 때 선주(禪主)가 먼저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거나 혹은 ‘그대의 스승은 어떤 언구로 가르치는가?’라고 묻고, 학인이 그에 대한 여러 답변을 하면, 선주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반문하는 것 등을 말한다. 이러한 격식을 가리켜 옛사람이 마지못해 이름을 붙여 조요(照要)라고 한 것이다.
제2. 작용을 먼저하고 비춤을 뒤에 하는 것:
예컨대 학인이 찾아와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나 불법의 대의를 묻거나 ‘학인의 본래면목은 어떤 것입니까?’ 혹은 ‘구경(究竟)의 진리를 담고 있는 본분사[極則事]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선주가 불자를 들어 보이거나 혹은 주장자로 바로 때리거나 혹은 선상을 뒤집거나 혹은 원상을 그려 보이거나 혹은 기틀의 핵심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은 식으로 기틀에 따라 학인을 제접하는 방식을 가리켜 옛사람이 마지못해 이름을 붙여 용요(用要)라고 한 것이다.
제3.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는 것◑:
예컨대 학인이 찾아와 어떤 단서가 되는 물음을 제기하면 선주가 불자를 꼿꼿이 세우고서 ‘다른 곳에도 이것이 있는가?’라고 묻거나 혹은 허공을 가리키며 ‘알겠는가?’라고 묻는 방식, 또는 학인이 꼿꼿이 세워 보인 불자를 보고 곧바로 절을 올리면 선주가 ‘이 둔한 놈아!’라고 하는 방식, 또는 학인이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면 선주가 노주를 가리키며 ‘이것은 알겠는가?’라고 묻는 방식, 또는 학인이 좌구를 펼치거나 주먹이나 손바닥을 보이면 선주가 ‘쓸데없이 헛짓하는 놈이로다’라고 하는 방식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은 식으로 기틀에 따라 학인을 제접하는 방식을 가리켜 옛사람이 마지못해 이름을 붙여 조용동시요(照用同時要)라 한 것이다.”
(『宗門玄鑑圖』 卍112 p.932a8.
第一. 先照後用者○:
如學人來時, 禪主先問, ‘從甚麽處來?’ 或云, ‘彼師有何言句指示?’ 學人種種言句, 禪主反問云, ‘作麽生會?’ 據斯體例, 古人亦強名照要也.
第二. 先用後照者:如學人來問祖師西來意, 或問佛法大意, 或問, ‘如何是學人本來面目?’ 或問, ‘如何是極則事?’ 禪主擧起拂子, 或以拄杖便打, 或下禪床立, 或畫圓相, 或呈機要. 據斯接機, 古人亦強名用要也.
第三. 照用同時者◑:如學人來發問端, 禪主或竪起拂子云, ‘諸方還有這箇麽?’ 或指空云, ‘會麽?’ 或學人見竪起拂子便禮拜, 禪主云, ‘這鈍漢.’ 或云, ‘學人不會.’ 禪主指露柱云, ‘這箇却會麽?’ 學人, 或展坐具, 或竪起拳掌, 主云, ‘這弄精魂漢!’ 據斯接機, 古人亦強名照用同時要也.)
삼현三玄
체중현은 삼세가 곧 일념439)이라는 것 등이고,
구중현은 경절언구440) 등이고,
현중현은 양구(良久)나 방(棒)·할(喝) 등과 같은 것이다.
體中玄, 三世一念等;
句中玄, 徑截言句等;
玄中玄, 良久棒喝等.
439) 삼세일념(三世一念).
“초발심인 10주(住)의 첫머리에서부터 삼매의 힘으로 단번에 삼계 전체를 도장 찍듯이 마음에 새기니 삼세가 하나의 경계이며 모든 법이 한맛[一味]이며, 해탈과 열반이 항상 적멸한 맛이다.
또한 처음과 끝이 없고, 인과가 하나의 경계이며, 모든 성품이 하나의 성품이고, 모든 지혜가 하나의 지혜이며, 모든 상이 하나의 상이고, 모든 행이 하나의 행이며, 삼세가 일념이고, 일념이 삼세요 십세이니, 이와 같은 모든 법이 자재하고 걸림이 없는 것이다.
이 경의 법문이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이 같은 속성을 가리켜 항상 법의 바퀴를 굴린다는 뜻에서 상전법륜(常轉法輪)이라 한다.”
(『新華嚴經論』 권3 大36 p.737a14.
從初發心十住之首, 以三昧力, 頓印三界, 三世一際, 諸法一味, 解脫涅槃, 常寂滅味.
更無始終, 因果一際, 諸性一性, 諸智一智, 諸相一相, 諸行一行, 三世一念, 一念三世, 乃至十世, 如是等法, 自在無礙.
此經法門, 無始無終, 名爲常轉法輪.)
440) 徑截言句. 말이나 구절 등의 무수한 우회의 방편을 다 끊어버리고 근원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간명하며 적절한 방법이라는 뜻. ‘경절’은 직절(直截)·첩경(捷徑:지름길) 등과 같은 뜻이다.
사료간四料揀 441)
사람을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 것은 하근기를 대하는 방법이고,
경계를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는 것은 중근기를 대하는 방법이며,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는 것은 상근기를 대하는 방법이고,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 것은 격(格)을 벗어난 이를 대하는 방법이다.
奪人不奪境, 待下根;
奪境不奪人, 待中根;
人境兩俱奪, 待上根;
人境俱不奪, 待出格人.
441) 임제사료간(臨濟四料揀).
임제의현이 주관인 사람[人]과 대상 경계[境]에 대하여 빼앗지 않는 긍정[不奪]과 빼앗는 부정[奪]의 방식에 따라 네 가지 핵심이 되는 형식을 간략하게 추출해 낸 것.
종사는 상대의 조건과 상황에 따라 유효적절하게 네 가지 중 하나를 구사하며 지도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요간’이란 잘 헤아려 중요한 요점을 분간해 내는 것 또는 시비와 선악 등을 가려낸다는 뜻이다.
“그때 학인이 물었다. ‘사람을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봄날 만물이 움트니 비단을 땅에 펼친 듯하고 어린아이가 머리칼을 드리우니 명주실같이 빛이 번득인다.’ ‘경계를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왕의 명령이 이미 시행되어 천하에 골고루 펼쳐지고, 장군은 국경에서 전란에 휘말릴 일이 전혀 없다.’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병주와 분주는 서로 소식을 끊고 각각 한 지방을 차지하였다.’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왕은 보배궁전에 오르고, 촌노인은 태평가를 부른다.’”
(『臨濟語錄』 大47 p.497a23.
時有僧問,‘如何是奪人不奪境?’
師云, ‘煦日發生鋪地錦, 嬰孩垂髮白如絲.’
僧云, ‘如何是奪境不奪人?’
師云, ‘王令已行天下遍, 將軍塞外絕烟塵.’
僧云, ‘如何是人境兩俱奪?’
師云, ‘并汾絕信, 獨處一方.’
僧云, ‘如何是人境俱不奪?’
師云, ‘王登寶殿, 野老謳歌.’)
사빈주四賓主 442)
손님 중의 손님이란 학인이 본분을 깨닫지 못하여 진실이 없는 질문과 대답만 있다는 뜻이다.
손님 중의 주인이란 학인이 본분을 깨달아서 주인도 있고 법도 있다는 뜻이다.
주인 중의 손님이란 종사가 본분을 깨닫지 못하여 학인의 질문만 있을 뿐 올바른 대답이 없다는 뜻이다.
주인 중의 주인이란 종사가 본분을 깨달아서 어떤 점에서나 매우 기특하다443)는 뜻이다.
賓中賓, 學人無鼻孔, 有問有答;
賓中主, 學人有鼻孔, 有主有法;
主中賓, 師家無鼻孔, 有問在;
主中主, 師家有鼻孔, 不妨奇特.
442) 임제사빈주(臨濟四賓主).
객간주(客看主):손님이 주인을 간파한다는 뜻.
학인이 스승의 마음을 간파한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서 빈중주(賓中主)와 상통한다.
객간객(客看客):손님이 손님을 간파한다는 뜻.
학인이나 스승 모두 견성(見性)하지 못한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서 빈중빈(賓中賓)과 상통한다.
주간객(主看客):주인이 손님을 간파한다는 뜻. 주중빈(主中賓)과 상통한다.
주간주(主看主):주인과 손님이 모두 대등한 선기(禪機)나 선안(禪眼)을 갖추고 있다는 뜻.주중주(主中主)와 상통한다.
“도를 깨친 진정한 학인이 할을 내지르면서 끈적한 아교단지 같은 말을 한마디 하면 선지식은 이것이 경계인 줄 모르고 그 경계 위에서 갖가지 분별의 틀을 조작한다.
학인이 할을 내지르면 앞의 선지식은 이 경계를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고질병으로 의사도 고치지 못한다. 이것을 손님이 주인을 간파한다고 한다.
혹은 선지식이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다가 학인이 질문하려고 한 것을 곧장 빼앗아버리면, 학인은 빼앗기고는 필사적으로 놓으려 하지 않는다. 이것을 주인이 손님을 간파한다고 한다.
혹은 학인이 청정한 경계를 한 가지 가지고 선지식 앞에 나타나면, 선지식은 그 경계를 분별해내고는 그를 잡아 구덩이로 던져버린다.
그러면 그 학인은 ‘대단하신 선지식입니다’라 하고, 선지식은 곧바로 ‘아, 좋은 것과 나쁜 것도 구별할 줄 모르는 놈이로다’라고 하며 학인은 곧장 절을 올린다. 이것을 주인이 주인을 간파한다고 한다.
어떤 학인이 얽매이고 집착된 상태로 선지식 앞에 나타나면 선지식은 거기다 족쇄(그릇된 지식)를 한 겹 덧붙이는데 학인은 기뻐한다.
학인과 스승이 피차 분별하지 못하므로 이것을 일러 손님이 손님을 간파한다고 한다.”
(『臨濟語錄』 大47 p.501a5.
如有眞正學人, 便喝先, 拈出一箇膠盆子, 善知識, 不辨是境, 便上他境上, 作模作樣.
學人便喝, 前人不肯放. 此是膏肓之病, 不堪醫. 喚作客看主.
或是善知識, 不拈出物, 隨學人問處卽奪. 學人被奪抵死不放. 此是主看客.
或有學人, 應一箇淸淨境, 出善知識前, 善知識辨得是境, 把得拋向坑裏.
學人言, ‘大好善知識.’ 卽云, ‘咄哉, 不識好惡.’ 學人便禮拜. 此喚作主看主.
或有學人, 披枷帶鎖, 出善知識前, 善知識, 更與安一重枷鎖, 學人歡喜.
彼此不辨, 呼爲客看客.)
443) 불방기특(不妨奇特). ‘매우 기특하다’ 또는 ‘참으로 기특하다’라는 말이다.
불방은 매우 ~하다, 틀림없이 ~하다,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괜찮다 등의 뜻이다.
사조용四照用 444)
비춤을 먼저하고 작용을 나중에 하는 것은 사람이 있는 것이고,
작용을 먼저하고 비춤을 나중에 하는 것은 법이 있는 것이고,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는 것은 밭가는 농부의 소를 몰아가고 배고픈 사람의 밥을 빼앗는 방식이고,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지 않는 것은 물음도 두고 대답도 두는 방식이다.
先照後用, 有人在;
先用後照, 有法在;
照用同時, 驅耕奪食;
照用不同時, 有問有答.
444) 임제사조용(臨濟四照用).
“임제선사가 하루는 대중들에게 말했다.
‘나는 어떤 때는 비춤[照]을 먼저하고 작용[用]을 나중에 하며, 어떤 때는 작용을 먼저하고 비춤을 나중에 하며, 어떤 때는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며, 어떤 때는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지 않는다.
비춤을 먼저하고 작용을 나중에 하는 것은 사람이 있는 것이고, 작용을 먼저하고 비춤을 나중에 하는 것은 법이 있는 것이고,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는 것은 밭가는 농부의 소를 몰아가고 배고픈 사람의 밥을 빼앗는 방식이며
뼈를 두드려 골수를 취하고 바늘과 송곳으로 아프게 찌르는 것과 같고,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지 않는 것은 물음도 두고 대답도 두며
주인도 세우고 손님도 세우며 물과 진흙을 뒤섞은 듯하며 기틀에 따라 사물을 응대하는 방식이다.
헤아림을 넘어선 사람이라면 미처 들어 보이기도 전에 일어나 곧바로 갈 것이니, 그래도 조금 낫다.’”
(『人天眼目』 권1 「四照用」 大48 p.304a11.
師,一日, 示衆云,
‘我有時先照後用, 有時先用後照, 有時照用同時, 有時照用不同時.
先照後用有人在, 先用後照有法在, 照用同時, 驅耕夫之牛, 奪饑人之食,
敲骨取髓, 痛下針錐,
照用不同時, 有問有答,
立主立賓, 合水和泥, 應機接物.
若是過量人, 向未擧時, 撩起便行, 猶較些子.)
사대식四大式 445)
바른 이익을 얻은 본보기는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하였던 것,446)
평상의 도리를 지켰던 본보기는 화산(禾山)이 ‘북을 칠 줄 안다’447)고 한 것,
본분을 지켰던 본보기는 6조 혜능이 ‘산승은 불법을 모른다’448)고 한 것,
진실과 방편을 나누어 펼친 본보기는 달마가 ‘알지 못한다’449)고한 것 등과 같은 네 가지를 말한다.
正利, 少林面壁類;
平常, 禾山打鼓類;
本分, 山僧不會類;
貢450)假, 達摩不識類.
445) 수행의 본보기가 되는 조사들의 기연을 네 가지로 분류한 것.
정리(正利)대식· 평등(平等)대식·진가(眞假)대식·본분(本分)대식 등 네 가지를 말한다.
식(式)은 법식(法式)·표준·모범의 뜻이다. 『宗門玄鑑圖』에는 다음과 같이 조금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삼현삼요 외에 저희들에게 말씀해주실 다른 법이 또 있습니까?’
‘사대식이 있다.
첫째 정리대식이니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면벽했던 것이 그 부류이다.
둘째 평등대식이니 화산이 「북을 칠 줄 안다」라고 한 말과 같은 부류이다.
셋째 진가대식이니 앞의 두 가지 대식을 아울러 포함하는 것이 그 부류이다.
넷째 본분대식이니 달마대사가 양무제를 보았을 때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한 말과 같은 부류가 그것이다.’”
(『宗門玄鑑圖』 「四大式論」 卍112 p.932b6.
問曰, ‘三玄三要之外, 更有何法示徒?’
答曰, ‘有四大式.
第一, 正利大式, 如初祖在少林等, 是也.
第二, 平等大式, 如禾山打鼓, 是也.
第三, 眞假大式, 通取前二式, 是也.
第四, 本分大式, 如初祖, 見梁武帝時云, 不識, 是也.’)
446) 달마면벽(達磨面壁). 2조 혜가(慧可)가 법을 물었을 때 달마대사가 시종 침묵하며 면벽하고 있었던 고사를 가리킨다.
“달마대사가 9년 동안 면벽한 것은 정체가 탄로나 훔친 물건과 함께 붙잡힌 격이며, 6조 혜능이 글자를 몰랐다는 것은 몸을 숨기려 했지만 꼬리가 드러난 것과 같다.”
(『松源崇岳禪師語』 續古尊宿語要4 卍119 p.41a1. 達磨九年面壁, 和贓捉敗;盧行者不識字, 露出巴.);
“법좌에 오르자 어떤 학인이 물었다. ‘달마가 면벽하고 있었던 뜻은 어떤 것입니까?’ ‘분별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五祖法演語錄』 고존숙어록21 卍118 p.427a1. 上堂, 僧問, ‘達磨面壁時, 如何?’ 師云, ‘計較未成.’);
“그대가 약간의 도리를 알아차렸다고 해도 마음에 속하는 법[心所法]을 얻은 것에 불과하며, 선도(禪道)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런 까닭에 달마는 면벽을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는 단서가 전혀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작용을 잊는 것이 불도(佛道)요, 분별은 마구니의 경계이다’라고 한다.”
(『宛陵錄』 大48 p.386c29. 任汝會得少許道理, 秖得箇心所法, 禪道總沒交涉. 所以達磨面壁, 都不令人有見處. 故云, ‘忘機是佛道, 分別是魔境.’)
447) 화산타고(禾山打鼓).
‘대오대철(大悟大徹)한 사람은 어떠합니까?’,
‘진제(眞諦)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에 대해서는 여쭙지 않겠습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향상인이 찾아오면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라는 네차례의 물음에 대해 화산이 한결같이 ‘북을 두드릴 줄 안다’(解打鼓)고 답한 일화에서 나온 말.
원오극근은 이 문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물음도 맛이 없고 답도 맛이 없다. 이 공안을 밝히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향상한 사람이라야 이 말이 이치와도 아무 관계가 없고 의론할 여지도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곧바로 알아차려서 마치 밑이 빠진 통과 같이 되는 바로 이때라야 납승이 편안히 거처할 경계요,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에 딱 들어맞게 될 것이다.”
(『碧巖錄』 44則 大48 「評唱」 p.181a9.
所謂言無味語無味. 欲明這箇公案, 須是向上人, 方能見此語, 不涉理性, 亦無議論處.
直下便會, 如桶底脫相似, 方是衲僧安穩處, 始契得祖師西來意.)
또 운문(雲門)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설봉이 공을 굴린 일[輥毬], 화산이 북을 두드릴 줄 안다고 한 말[打鼔], 남양혜충(南陽慧忠)국사의 물그릇[水碗], 조주가 차나 마시라고 한 말[喫茶]은 모두 향상의 본분을 들어 보인 것이다.”
(같은 책 44則 「評唱」 大48 p.181a13. 雪峯輥毬, 禾山打鼓, 國師水碗, 趙州喫茶, 盡是向上拈提.)
448) 불회(不會). 조계불회(曹溪不會)라고도 한다.
“어떤 학인이 혜능에게 물었다. ‘5조 홍인의 종지는 누가 얻었습니까?’
‘불법을 아는 사람이 얻었다.’ ‘스님께서는 얻었습니까?’
‘나는 불법을 모른다.’”
(宗寶本 『壇經』 大48 p.358a10.
一僧問師云, ‘黃梅意旨, 甚麽人得?’
師云, ‘會佛法人得.’ 僧云, ‘和尙還得否?’
師云, ‘我不會佛法.’);
“5조 홍인 회하의 499명의 학인들이 모두 불법을 이해했지만 오직 노행자 한 사람만은 불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도를 알았을 뿐 별다른 일을 이해한 것이 아니었다.”
(『南泉普願語要』 古尊宿語錄12 卍118 p.297a2.
只如五祖會下, 四百九十九人, 盡會佛法, 惟有盧行者一人, 不會佛法. 只會道, 不會別事.)
449) 달마불식(達磨不識). 달마와 양무제(梁武帝)가 나눈 세 가지 문답 중 하나.
불식이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뜻도 아니고 망상분별이 없다는 뜻도 아니며, 어떤 인식의 틀로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화두로 간주된다.
“양무제가 ‘짐의 앞에서 말하고 있는 이는 누구입니까?’〈얼굴 전체에 부끄럽고 당황한 빛이 도는데 억지로 멀쩡한 척하는구나. 결국은 찾지 못했다.〉
‘모르겠소.’〈돌! 다시 찾아온들 반푼의 가치도 없겠군.〉”
(『碧巖錄』 1則 「本則」 大48 p.140a19.
帝曰, ‘對朕者誰?’〈滿面慚惶, 强惺惺. 果然摸索不著.〉
磨云, ‘不識.’〈咄! 再來不直半文錢.〉)
450) 공(貢)은 진(眞)의 오식(誤植).
사할四喝 451)
‘금강왕의 보검과 같은 할’은 일체의 정해(情解)를 단칼에 끊어버리는 것이고,
‘땅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금털 사자와 같은 할’은 말을 꺼내거나 숨소리만 토해내도 모든 마군의 뇌가 찢어지는 것이며,
‘물고기를 유인하는 미끼와 같은 할’은 스승이 이어받은 본분을 제대로 지니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며,
‘할로서의 작용을 억지로 하지 않는 할’은 앞에서 말한 삼현(三玄)과 사빈주(四賓主) 같은 것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다.
金剛王寶劒, 一刀揮斷, 一切情解;
踞地獅子, 發言吐氣, 衆魔腦裂;
探竿影草, 探其有無, 師承鼻孔;
一喝不作一喝用, 具上三玄四賓主等.
451) 임제종에서 말하는 네 종류의 할. 종사가 학인을 교화하기 위해 행하는 것으로서 분별하기 이전의 경지에 근거하여 때와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 방편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임제가 어떤 학인에게 물었다. ‘어떤 때의 할은 금강왕의 보검과 같고, 어떤 때의 할은 바닥에 웅크린 금털 사자와 같으며, 어떤때의 할은 물고기를 유인하는 수단과 같고, 어떤 때의 할은 할로서의 작용을 억지로 하지 않는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학인이 머뭇거리자 임제가 바로 할을 내질렀다.”
(『臨濟語錄』 「勘辨」 大47 p.504a26.
師問僧, ‘有時一喝, 如金剛
王寶劍;有時一喝, 如踞地金毛獅子;有時一喝, 如探竿影草;有時一喝, 不作一喝用. 汝作麽生會?’
僧擬議, 師便喝.)
팔방八棒 452)
종사가 내린 법령을 접하고 그것을 깊은 뜻으로 잘못 되돌리므로 내리는 방452)453)·
바른 이치를 기준으로 하여 잘못된 견해를 쓸어버리는 방454)·
깊은 뜻에 의지하다가 정도를 망치는 것을 질타하는453) 방454)455)·
어리석음을 꾸짖는 방456) 등은 ‘벌방(罰棒)’이고,
종지에 순응하므로 내리는 방457)은 ‘상방(賞棒)’이며,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어 점검하는 방457)458)은 ‘변방(辨棒)’이며,
별다른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휘두르는 방459)·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분별을 모두 쓸어버리는 방460)은 ‘정방(正棒)’이다.
觸令返玄·
接掃從正·
靠玄傷正·苦責, 罰棒;
順宗旨, 賞棒;
有虛實, 辨棒;
盲枷瞎棒·
掃除凡聖, 正棒.
이와 같은 법은 비단 임제의 종지일 뿐만 아니라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중생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본분에 갖추고 있는 것이니,
이것을 벗어나 법을 설하면 모두 망령된 말일 뿐이다.
此等法, 非特臨濟宗風,
上自諸佛, 下至衆生, 皆分上事,
若離此說法, 皆是妄語.
452) 팔방에 대한 내용은 임제의 어록에 보이지 않는다. 후인들이 임제종의 종지에 입각하여 방을 해석하면서 부가한 말이다.
『五家宗旨纂要』 권상 「濟宗八棒」 卍114 p.517b6에는 촉령지현방(觸令支玄棒), 접기종정방(接機從正棒), 고현상정방(靠玄傷正棒), 인순종지방(印順宗旨棒), 취험허실방(取驗虛實棒), 맹가할방(盲枷瞎棒), 고책우치방(苦責愚癡棒), 소제범성방(埽除凡聖棒) 등,
『宗門玄鑑圖』 「八棒論」 卍112 p.932b12에서는 촉령지현방(觸令支玄棒), 접기종정방(接機從正棒), 변기제정방(辯機提正棒), 고현상정방(靠玄傷正棒), 인순종승방(印順宗乘棒), 맹가할련방(盲枷瞎煉棒), 고험허실방(考驗虛實棒), 소제범성방(掃除凡聖棒) 등,
『萬法歸心錄』 권하 卍114 p.828a13에서는 상방(賞棒), 벌방(罰棒), 종방(縱棒), 탈방(奪棒), 우치방(愚癡棒), 항마방(降魔棒), 소적방(掃跡棒), 무정방(無情棒) 등으로 분류하여 제시되어 있다.
아래 주석에서는 『五家宗旨纂要』의 팔방과 위 본문에서 서산이 제시한 팔방을 대대하여 비교한다.
서산은 팔방을 벌방(罰棒)·상방(賞棒)·변방(辨棒)·정방(正棒)의 네 범주로 묶어서 요약했다.
453) 촉령반현(觸令返玄). 촉령지현방(觸令支玄棒)과 같다.
“첫째, 촉령지현방. 삼산등래(三山燈來 1614~1685)가 말하였다.
‘가령 종사가 내린 하나의 법령에 대해 학인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회피하여 눈앞에 드러난 소식과 멀어진 채로 지루하게 깊은 뜻을 늘어놓을 때 종사가 바로 때리는 방이다. 이것은 벌방이다.’”
(一,觸令支玄棒. 三山來云,
‘如宗師置下一令, 學人不知迴避, 觸犯當頭, 支離玄旨, 宗師便打. 此是罰棒.’)
454) 접소종정(接掃從正). 접기종정방(接機從正棒)과 같다.
“둘째, 접기종정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종사가 학인을 응대하여 그 학인의 근기에 따라 때릴 만하면 때리는 방을 말하니, 이것을 가리켜 바른 이치에 따른다고 한다. 이것은 상벌의 분류에 속하지 않는다.’”
(二, 接機從正棒. 三山來云,
‘如宗師應接學人, 順其來機, 當打而打, 謂之從正. 此不在賞罰之類.’)
455) 고현상정(靠玄傷正).
“셋째, 고현상정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학인이 찾아와 참문하면 종사는 오로지 도리를 기특하게 조작하는 데 힘쓴다.
이때 학인이 깊고 미묘한 뜻에 의지하여 (조작한 도리를) 헤아리다가 도리어 바른 이치를 망치는 경우가 있는데 종사는 곧장 때려서 학인을 그대로 놓아주지 않는다. 이것은 벌방이다.’”
(三, 靠玄傷正棒. 三山來云,
‘如學人來見, 宗師專務, 奇特造作.
倚靠玄妙, 反傷正理, 宗師直下便打, 不肯放過. 此亦是罰棒.’)
456) 고책(苦責).
“일곱째, 고책우치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학인이 이 본분사에 대해 조금도 이해하는 것이 없다면 그 자질과 견지가 아주 어리석어 진전하기 힘드니, 종사가 있는 힘껏 때려준다.
이것을 고책우치방이라고 하는데 상벌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七, 苦責愚癡棒. 三山來云,
‘如學人於此事, 不曾分曉, 其資質見地, 十分癡愚, 不堪策進, 宗師勉強打他.
是謂苦責愚癡, 亦不在賞罰之類.’)
457) 순종지(順宗旨).
“넷째, 인순종지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학인과 만나 종사가 종지를 들어 보였을 때 학인이 종지를 알아차리고 대답도 상응하므로 종사가 바로 때리는 방이다.
이는 학인의 기틀을 인정한 것이니 상방이라 한다.’”
(四, 印順宗旨棒. 三山來云,
‘如學人相見, 宗師拈示宗旨, 彼能領會, 答得相應, 宗師便打.
此是印證來機, 名爲賞棒.’)
458) 유허실(有虛實).
“다섯째, 취험허실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학인이 방문하자마자 종사가 곧바로 때리는 경우와 혹은 학인이 다가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종사가 또한 때리는 경우 등을 말한다.
이것은 학인의 허와 실을 분별하여 점검하기 위한 방법이니, 그에게 바른 견해가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는 방으로서 칭찬하거나 벌을 주기 위한 종류는 아니다.’”
(五, 取驗虛實棒. 三山來云.
‘如學人纔到, 宗師便打, 或進有語句, 宗師亦打.
此是辨驗學人虛實, 看他有見無見, 亦不在賞罰之類.’)
459) 맹가할방(盲枷瞎棒). 굴방(屈棒)이라고도 한다.
“여섯째, 맹가할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종사가 학인을 접하면서 학인의 근기는 분별하지도 못하고서 일방적으로 마구 맹목적으로 때리지만 눈 속에는 진주(참된 안목)가 없으므로 맹할(盲瞎)이라 한다.
이것은 가르치는 스승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며 학인의 일과는 상관없다.’”
(六, 盲枷瞎棒. 三山來云,
‘如宗師接待學人, 不辨學人來機, 一味亂打, 眼裏無珠, 謂之盲瞎.
此師家之過, 不干學人事.’)
460) 소제범성(掃除凡聖).
“여덟째, 소제범성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종사가 학인을 접하면서 미세한 망념에도 떨어지지 않고 조금의 머뭇거림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분별을 일시에 쓸어버리며
말을 제대로 해도 때리고 말을 하지 못해도 때리며 말을 제대로 하거나 하지 못하거나 간에 때리며
학인으로 하여금 명근도 끊어버리며 지엽에조차도 머물지 않게 하는 방이다.
이는 최상으로 제기하는 방편으로서 팔방 가운데 가장 묘하게 발휘하는 방이니 정방이라고 한다.’”
(八, 埽除凡聖棒. 三山來云,
‘如宗師家, 接待往來, 不落廉纖, 不容擬議,
將彼凡情聖解一竝埽除,
道得也打, 道不得也打, 道得道不得也打,
直令學人, 斷却命根, 不存枝葉.
乃上上提持, 八棒中之用得最妙者, 此則名爲正棒.’)
방(棒)과 할(喝)의 본질
79
임제의 할(喝)과 덕산의 방(棒)은 모두 무생(無生)의 이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증명해 보인 것으로 ‘근본적인 기틀을 남김없이 활용할 뿐’[大機大用] 정해진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발휘
된다.
온몸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본분사를 궁구하다가461) 물러나서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과 같은 대인(大人)의 경계를 지킨다.
그러나 진실에 따라 말하자면, 임제와 덕산 이 두 선사도 도적질하는 마음을 가진 귀신462)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463)
臨濟喝, 德山棒, 皆徹證無生, 透頂透底, 大機大用, 自在無方.
全身出沒, 全身擔荷, 退守文殊普賢大人境界.
然據實而論, 此二師, 亦不免偸心鬼子.
[평]
시퍼렇게 날선 취모검이로다. 그 칼날 범하지 마라.464)
凜凜吹毛. 不犯鋒鋩.
[게송]
반짝반짝 맑게 빛나는 구슬 물속에서 아른거리고, 드넓은 허공 흩어진 구름 사이로 달이 떠가네.
爍爍寒光珠媚水, 寥寥雲散月行天.
461) 담하(擔荷). ‘짐을 지다’ 또는 ‘본분사를 공부하다’는 뜻.
“이 일(본분사)을 짊어지려면 다만 확고한 뜻을 갖추어 몽둥이로 때려도 고개조차 돌려보지 말고 한결같이 매진하는 자라야 한다.”
(『大慧語錄』 권20 「示空慧道人」 大47 p.895c15.
擔荷此事, 直是具決定志, 一棒打不回頭底.)
462) 투심귀자(偸心鬼子). 도적질하는 마음을 가진 귀신이라는 말로서 학인의 숨은 마음을 잘 밝혀내는 뛰어난 안목을 지닌 스승을 일컫기도 한다.
“어떤 학인이 물었다. ‘제가 오늘밤 대중들의 위세를 대신하여 질문 하나를 특별히 내놓아도 되겠습니까?’ ‘도적질하는 마음을 가진 귀신은 남들의 미움을 산다.’
그 학인이 할을 하자 허당이 ‘예상했던 대로군’이라 대답했고, 그 학인은 절을 올렸다.”
(『虛堂語錄』 권3 大47 p.1011a14.
僧云, ‘學人今夜, 借大衆威光, 別置一問, 得麽?’
答云, ‘偸心鬼子, 得人憎.’
僧便喝, 答云, ‘果然.’ 僧禮拜.)
463) 방과 할 자체도 그때마다 상대의 마음을 잘 읽어내어 발휘되는 작용이었다는 뜻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464) 칼을 써도 칼날은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대상에 응하여 활발하게 작용을 펼치면서도 그것에 얽매이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고 자유자재한 것을 가리킨다.
맺음
80
대장부는 부처나 조사 보기를 마치 원수를 보듯이 한다.465)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면 부처에 얽매이고 조사에 집착하여 구하면 조사에 얽매이게 될 것이니,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괴로움이 되고 말기에 아무 일 없는 것만 못하다.466)
大丈夫, 見佛見祖如寃家.
若著佛求, 被佛縛;若著祖求, 被祖縛,
有求皆苦, 不如無事.
[평]
부처나 조사 보기를 마치 원수를 보듯이 하라는 구절은 앞에서 ‘바람도 없는데 물결을 일으킨 격[無風起浪]’이라고 한 말을 맺은 것이다.
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괴로움이 된다는 구절은 앞에서 ‘있는 그대로 옳다[當體便是]’라고 한 말을 맺은 것이다.
아무 일 없는 것만 못하다고 한 구절은 앞에서 ‘생각을 일으켜 분별하는 즉시 어긋나버린다[動念卽乖]’고 한 말을 맺은 말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세상 모든 사람의 혓바닥을 깔고 앉을 수 있고, 생과 사의 빠른 수레바퀴를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위기를 떠받쳐 살리고 혼란을 평정한 예로서,
단하가 목불을 불태워버린 일,467) 운문이 개의 먹이로 주겠다고 한 말,468) 한 노파가 부처님을 보지 않겠다고 한 말469) 등을 들 수 있으니,
이 모두가 삿된 주장을 꺾어버리고 바른 도리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그렇다면 그 궁극적인 뜻은 무엇일까?
佛祖如寃者, 結上無風起浪也.
有求皆苦者, 結上當體便是也.
不如無事者, 結上動念卽乖也.
到此, 坐斷天下人舌頭, 生死迅輪,
庶幾停息也. 扶危定亂,
如丹霞燒木佛, 雲門喫狗子, 老母不見佛,
皆是摧邪顯正底手段. 然畢竟如何?
[게송]
항상 강남의 3월 풍경을 기억하노라면, 자고새 우는 곳에 온갖 꽃이 향기롭더라.470)
常憶江南三月裏, 鷓鴣啼處百花香.
465) 원오극근(圜悟克勤)은 이 구절을 동산(洞山)의 말로 인용한다. 『圜悟語錄』 권13 大47 p.773c10.
466) 임제의 말에 근거한 구절.
“그대가 만일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라는 마구니에 사로잡힐 것이고, 만일 조사를 구한다면 조사라는 마구니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대가 구하는 일이 있기만 하면 무엇이나 괴로움이 되고 말기에 아무 일도 없는 것만 못하다.”(『臨濟語錄』 大47 p.499c21.
爾若求佛, 卽被佛魔攝;爾若求祖, 卽被祖魔縛. 爾若有求皆苦, 不如無事.)
467) 단하천연(丹霞天然 739~824)이 목불(木佛)을 땔감으로 쓴 인연에서 비롯한 공안. 『五燈會元』 권5 「丹霞天然章」 卍138 pp.166c18~167a3, 『禪門拈頌說話』 321 則 韓5 pp.276b21~278b13 등 참조.
468) 부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일곱 걸음 걷고서 사방을 둘러본 후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할 뿐이다”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 운문문언(雲門文偃)이 “내가 당시에 그 광경을 보았다면, 한 방에 때려죽이고 개에게 먹이로 주어서 천하의 태평
을 도모했을 것이다.”(我當時若見, 一棒打殺, 與狗子喫却, 媿圖天下大平.)라고 한말을 가리키다. 『禪門拈頌說話』 2則 韓5 p.7c12~c15 참조.
469) 부처님과 같은 시기에 태어난 한 늙은 여인이 있었는데 부처님을 보지 않으려고 자리를 피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기까지 하였으나 가린 손에 부처님이 나타나셨다고 한다.
『五燈會元』 권1 「釋迦牟尼佛」 卍138 p.6b10~b12, 『祖庭指南』 권상 卍148 p.391a2~a4 등 참조.
470) 자고새의 울음에 꽃이 향기로 화답하고 꽃의 향기에 응하여 자고새가 우는 모습으로써 모든 존재가 차별 그대로 존재하면서도 서로 어울려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말이다.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풍혈(風穴)이 말한다. ‘항상 강남의 3월 풍경을 기억하노라면, 자고새 우는 곳에 온갖 꽃이 향기롭더라.’”
(『人天眼目』 권1 大48 p.301a22.
如何是人境俱不奪?
穴云, ‘帝憶江南三月裏, 鷓鴣啼處百花香.’)
81
신령한 광명이 어둡지 않으니 이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름다운 도(道)이다. 이 선문(禪門)에 들어온 이상 지해(知解)를 두지 마라.471)
神光不昧, 萬古徽猷. 入此門來, 莫存知解.
[평]
신령한 광명이 어둡지 않다는 말은 앞에서 ‘밝디밝으며 신령스럽고 신령스럽다[昭昭靈靈]’고 한 말을 결론지은 것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름다운 도라고 한 말은 앞에서 ‘본래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本不生滅]’고 한 말을 결론지은 것이다.
지해를 두지 말라고 한 것은 앞에서 ‘그 이름을 고수하며 지해를 일으키지 말라[不可守名生解]’고 한 말을 결론지은 것이다.
문이란 범부나 성인이나 모두 드나든다는 뜻이 있으니, 예컨대 하택신회가 “지(知)라는 한 글자는 모든 현묘한 이치가 나오는 문”472)이라고 한 것과 같다.
아!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형상을 그릴 수도 없다는 것에서 뜻을 일으켜 지해를 두지 마라는 말로써 결론을 지었으니, 이 한 책의 언어문자를 한마디 말로 모두 부수었도다.
그러나 하나의 이해로 시종일관하면서 중간 중간 만행(萬行)을 들어 보였으니, 세전(世典)의 삼의(三義)와 같다.473)
지(知)와 해(解)라는 두 글자는 불법에 큰 해가 되기 때문에 특별히 들어서 마무리한 것이니, 하택신회선사가 조계의 적자가 되지 못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뜻에서 게송으로 읊는다.
“이와 같이 종지를 제기하여 밝혔다면, 서쪽에서 온 벽안의 스님에게 크게 비웃음을 샀으리라.”474)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어떠한 뜻일까?
神光不昧者, 結上昭昭靈靈也. 萬古徽猷者, 結上本不生滅也.
莫存知解者, 結上不可守名生解也.
門者, 有凡聖出入義, 如荷澤, 所謂知之一字, 衆妙之門也.
吁! 起於名狀不得, 結於莫存知解, 一篇葛藤, 一句都破也.
然始終一解, 中擧萬行, 如世典之三義也.
知解二字, 佛法之大害故, 特擧而終之, 荷澤神會禪師, 不得爲曹溪嫡子者,
以此也. 因而頌曰,
“如斯擧唱明宗旨, 笑殺西來碧眼僧.”
然畢竟如何?
[게송]
밝은 달이 홀로 비추니 강산은 고요한데, 자신도 모르게 웃는 한 소리에 천지가 놀라네.475)
孤輪獨照江山靜, 自笑一聲天地驚.
471) 평전보안(平田普岸)의 말. ‘휘유(徽猷)’는 아름다운 도 또는 근본적인 진리,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도(道)를 뜻한다. 『景德傳燈錄』 권9 「平田普岸傳」 大51 p.267a20 참조.
472) 『金剛經纂要刊定記』 권1 大33 p.171c19, 『都序』 권상 大48 p.405b12~b16 등 참조.
473) 세전이란, 세간에 전해지는 경전 등 각종 전적(典籍)을 가리키기도 하고, 불가에서 특별히 불교경전 외의 서적을 뜻하기도 한다. 삼의는 경서(經書)의 내용이 시(始)·중(中)·말(末)로 전개됨을 말한다.
『中庸』 「序」에서 정자(程子)가 다음과 같이 한 말에서 비롯된다.
“그 책은 처음 하나의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중간에 수많은 사항으로 나누어 설명하다가 끝에는 다시 하나의 이치로 합해진다.”(其書始言一理, 中散爲萬事, 末復合爲一理.)
474) 『證道歌頌』 卍114 p.888a4.
475) 『臨濟錄』 大47 p.506b16.
발跋 1_사명유정 지음
이 글은 조계의 노화상 퇴은(退隱) 큰스님1)께서 지으셨다.
아! 이백여년 전부터 사법(師法)의 도가 더욱 상실되어 선(禪)과 교(敎)의 무리들이 제각각 다른 견해를 내게 되었다.
교(敎)를 종지로 하는 이들은 술지게미 같은 교리에 취해 모래알을 세듯 헛된 수고만 할 뿐 오교(五敎)2) 자체에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스스로 깨달아 들어가게 하는 문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선(禪)을 종지로 하는 이들은 천진(天眞)하게 타고난 성품만 믿을 뿐 수행하여 증득하는 도리는 완전히 부정한다.
그들은 돈오(頓悟)한 후에 바로 발심하여 만행(萬行)을 닦고 익혀야 한다는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과 교가 마구 뒤섞여 끝내 모래와 금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원각경』에서 “본래 그대로가 성불한 상태”3)라고 한 말을 듣고서 본래부터 미혹과 깨달음의 차별이 없다는 뜻으로 오해하여 인과의 도리를 부정한다면 그릇된 견해가 되고, 또한 “무명을 닦아 익힌다”는 말을 듣고서 진여가 망념을 일으키는 것이라 생각하여 진실하고 변함없는 본성을 잃어버린다면 이 또한 그릇된 견해가 된다는 말이 바로 그 뜻이다.
右編, 乃曹溪老和尙, 退隱師翁所著也.
噫! 二百年來, 師法益喪, 禪敎之徒, 各生異見.
宗敎者, 唯耽糟粕, 徒自算沙, 不知五敎上, 有直指人心, 使自悟入之門;宗禪者, 自恃天眞, 撥無修證.
不知頓悟後, 始卽發心, 修習萬行之意. 禪敎混濫, 沙金罔分,
圓覺所謂, 聞說本來成佛, 謂本無迷悟, 撥置因果, 則便成邪見, 又聞修習無明, 謂眞能生妄, 失眞常性, 則亦成邪見者, 是也.
아아, 위태롭도다! 이 도가 전해지지 못한 것이 어찌 이토록 심한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명주실처럼 가늘디가늘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는 것이 마치 한 올의 머리카락으로 천 균(鈞)의 무거운 무게를 지탱하는 것과 같으니, 거의 땅에 떨어져 자취조차 사라질 지경이로다.
다행스런 일은 우리 큰스님께서 묘향산(妙香山)에 머무셨던 10여 년 동안, 수행하시는 틈틈이 50권의 경론과 어록들을 보시고 일상생활 하는 중에 간간이 요긴한 구절들을 참구하고 결단하시어 그때마다 기록해 두셨던 것이다.
이것을 그때마다 문하의 제자들에게 거듭하여 자세히 가르쳐 주셨으니, 마치 양을 기르는 방법과 같이 지나치는 자는 억눌러 주고 뒤처진 자는 채찍질하여 크게 깨치는 문으로 몰아넣으셨으니, 남김없이 다하는 노파심이 이처럼 간절하셨다.
그러나 근기가 둔한 이들은 도리어 법문이 너무 높고 어려운 것이 흠이라고 여겼다. 스님께서는 어리석음에 덮여 있는 그들을 연민하여 각각의 구절마다 주석을 달아 풀이하시고 차례대로 엮어 뜻이 통하게 하셨다.
그 결과로 쇄골이 상속하여 고리처럼 이어지고 혈맥이 상통하여 팔만대장경의 요체와 다섯 종파4)의 본원이 여기에 온전히 갖추어져 말씀마다 불법의 요체가 드러나고 구절마다 종지(宗旨)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전에 치우쳤던 사람은 원만하게 되고 막혔던 사람은 통하게 될 것이니 선(禪)과 교(敎)의 귀감이요 이해와 실천을 돕는 뛰어난 약이라 할 만하다.
嗚呼殆哉! 斯道之不傳, 何若是其甚也.
綿綿涓涓, 如一髮引千鈞, 幾乎落地無從矣. 賴我師翁, 住西山一十年, 鞭牛有暇, 覽五十本經論語錄, 間有日用中, 參決要切之語句, 則輒錄之.
時與室中二三子, 詢詢然誨之, 一如牧羊之法, 過者抑之, 後者鞭之, 驅入於大覺之門, 老婆心得徹困,
若是其切也. 奈二三子鈍根也, 返以法門之高峻爲病焉. 師翁愍其迷蒙, 各就語句下, 入註而解之, 編次而繹之. 鉤鎖連環, 血脈相通, 萬藏之要, 五宗之源, 極備於此, 言言見諦, 句句朝宗.
向之偏者圓之, 滯者通之, 可謂禪敎之龜鑑, 解行之良藥也.
그러나 큰스님께서는 항상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하여 비록 한 마디 말이나 반 구절을 말씀해 주실지라도 마치 칼날을 다루는 일과 같이 엄하게 여기시어 행여 종이에 먹칠이나 하는 꼴5)이 아닌지 걱정하셨으니, 어찌
이 책을 세상에 유통시켜 당신의 능력을 자랑하고자 하셨겠는가!
문인 백운선사(白雲禪師) 보원(普願)이 정사(淨寫)하고, 문인 벽천선덕(碧泉禪德) 의천(義天)이 교감하였다. 문인 대선사(大禪師) 정원(淨源)과 문인 대선사 태상(太常)과 문인 청하도인(靑霞道人) 법융(法融) 등은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하며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라 감탄한 끝에 마침내 뜻을 함께하는 예닐곱 사람들과 함께 바랑을 털어 가지고 있는 재물을 모아 판각하고 유통케 함으로써 큰스님께서 가르쳐주신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然, 師翁, 常與論這般事, 雖一言半句, 如弄金6)刃上事, 恐上紙墨, 豈欲以此流通方外, 誇衒己能也哉!
門人白雲禪師普願寫之, 門人碧泉禪德義天校之. 門人大禪師淨源, 門人大禪師太常, 門人靑霞道人法融等,
稽首再拜曰, “未曾有也.” 遂與同志六七人, 傾鉢囊中所儲, 入梓流通, 以報師翁訓蒙之恩也.
크나큰 기틀을 담고 있는 용궁의 장경(대장경)은 심연의 바다와 같이 끝없이 넓고 아득히 깊어 비록 (그것을 궁구하는 공부가) 용의 구슬을 찾고 산호를 캐는 일과 같다고 말은 하지만 무엇을 따라 구할 것인가!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육지 걷듯 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었다면 저 드넓은 바다 끝만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요체를 가려내신 공덕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은혜는 산과 같이 높고 바다와 같이 깊으니, 설령 만 명의 뼈를 부수고 천 명의 몸뚱이를 가루로 만든다고 한들 터럭만큼이라도 갚을 수 있겠는가!
천 리 밖에서 보거나 듣고서 이상타 여기지도 않고 의심하지도 않으며 공경하는 마음을 품고 읽으면서 보배로 삼는다면 진실로 ‘천 년이 지나 그 뜻을 알아주는 한 사람’7)이라 할 것이다.
大機龍藏, 汪洋渺若淵海, 雖言探龍珠采珊瑚者, 孰從而求之!
非入海如陸之手段, 頗不免望涯之歎.
然則撮要之功, 發蒙之惠, 如山之高, 若海之深, 說若碎萬骨粉千命, 如何報得一毫哉!
千里之外, 有見之聞之, 不驚不疑, 敬之讀之, 以爲寶玩, 則眞所謂千歲之下一子雲耳.7)
만력 기묘년(1579:선조12) 봄에 조계종 후손 사명종봉(四溟鍾峯) 유정이 선사의 구결(口訣)에 두 손 모아 예배하고8) 이어 삼가 발문을 쓰다.
時萬曆己卯春節, 曹溪宗遂, 四溟隱9)峰惟政, 拜手口訣, 因爲謹跋.
1) 사옹(師翁). 스승을 높여 부르는 말 중 하나. 사장(師匠)과 같은 뜻이다. 또는 스승의 스승으로 사조(師祖) 곧 법계상의 조부(祖父)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2) 부처님의 일대 교설을 다섯 가지로 분류한 것. 얕고 간단한 교설로부터 차례대로 깊은 교설로 분류하여 각 단계의 교의를 설명하는 교판(敎判) 중 하나이다.
그 분류는 시대에 따라, 이론가에 따라 여러 가지 차이가 있는데 당나라의 법장(法藏)이 설한 소승교(小乘敎)·대승시교(大乘始敎)·대승종교(大乘終敎)·돈교(頓敎)·원교(圓敎), 제(齊)나라 때 호신사(護身寺)의 자궤(自軌)가 설한 인연종(因緣宗)·가명종(假名宗)·부진종(不眞宗)·진종(眞宗)·법계종(法界宗), 융통염불종(融通念佛宗)에서 나눈 인천교(人天敎)·소승교·돈교·원교·점교(漸敎) 등의 5교가 있다.
3) “중생이 본래 그대로 성불한 상태요, 생사와 열반이 어느 것이나 꿈과 같다.”
(『圓覺經』 大17 p.915a20. 衆生本來成佛, 生死涅槃, 猶如昨夢.)
4) 『선가귀감』 말미에 임제종·조동종·운문종·위앙종·법안종 각각의 법맥과 가풍을 밝힌 것을 말한다.
5) 공상지묵(恐上紙墨). 보통 ‘道卽不辭’와 짝을 이루어 ‘말을 사양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에 먹칠을 할까 걱정스럽다’라는 말로 쓰인다. ‘공상지필(恐上紙筆)’이라고도 쓴다.
6) 金은 劍 또는 劒의 오식(誤植).
7) 전한 말의 학자 겸 문인인 자운(子雲 B.C.53~A.D.18:揚雄의 자)이 자신의 글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언젠가는 알아주는 이가 나타나리라고 생각한 일화에 따른다.
한유(韓愈)가 지은 「與馮宿」에 “양자운이 『태현경』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으나, 자운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이 상할 것이 없다. 후세에 다시 나 같은 사람이 나타나 반드시 좋아해 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자운이 죽고 근 천여 년이 지났으나 양자운과 같은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揚子雲, 著太玄, 人皆笑之, 子雲曰, ‘世不我知無害也. 後世復有揚子雲, 必好之矣.’ 子雲死, 近千載竟, 未有揚子雲, 可嘆也.)라는 글이 전한다.
8) 배수(拜手). 머리를 손이 있는 곳까지 숙이고 인사를 올리는 것. 공수배(空首拜)라고도 한다.
9) 隱은 鍾의 오식(誤植). 종봉(鍾峯)은 사명유정의 별호이다.
발跋 2_보원 지음
서산 큰스님께서는 문하의 제자들이 선과 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관행(觀行)을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부처님과 조사가 제시한 마음의 요체 중 날마다 활용하기에 적절한 수백 구절의 말씀을 손수 가려 뽑
았으니 이를 ‘선가귀감’이라 한다.
제자 이환(離幻) 사명당(四溟堂)이 그대로 이어받아 밝히고, 학사 이수륜(李秀倫)이 필사하고 책으로 엮어 세상에 드러냈으며, 시은(市隱) 김수향(金守香)은 목판에 새겨 보관했으니, 이들은 모두 한 분의 종사를 모시는 무리이다.
아, 이 한 권을 펴내어 배우는 이들이 애써 대장경을 찾아보지 않고도 조사의 심인(心印)을 곧바로 몸에 지닐 수 있게 된다면, 법유1)로 길러주신 넓고 깊은 은혜의 바다를 이렇게 유통한 공덕에 따라 갚고도 남았다고 할 만하도다!
西山大師翁, 愍室中二三子輩, 迷禪敎, 失觀行, 手抄佛祖心要, 切於日用者數百語, 名曰, 禪家龜鑑.
弟子離幻, 信之受而昭焉, 學士李秀倫, 筆之書而景焉, 市隱金守香, 鋟之木而甲焉, 所謂一宗之族也.
吁, 展此一卷, 學者不勞涉龍藏, 而直佩祖師之心印, 則其法乳恩海, 流通功德, 可勝報也哉!
만력 계미년(1583:선조16) 봄에 제자 보원이 두 손 모아 예배 올리고 삼가 발문을 짓다.
萬曆癸未春, 弟子普願, 拜手敬跋.
1) 法乳. 법이라는 젖. 아기에게 먹여 기르는 어머니의 젖을 비유로 삼아 중생을 무명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도록 가르쳐주시는 부처님의 법을 나타낸다. 『佛本行集經』 권1 大4 p.55a18, 80권본 『華嚴經』 권48 大10 p.253b17 등 참조.
발跋 3_충허성정 지음
귀감이라고 한 이유는 선과 교에서 날마다 활용하는 요체가 되는 문이기 때문이다.
부처마다 조사마다 모두 이로써 지극한 도리에 이르셨으니 수행할 때에 이것을 버리고서야 어떻게 통할 수 있겠는가!
새긴 지 오랜 세월이 흘러 판본이 마멸되어 만세의 귀감으로 전해지지 못할 듯하므로 자응신화1)가 힘들여 모화(募化)하여 다시 간행하기 위해 애를 썼으니 흑두타2)가 다시 태어났다고 할 만하다.
이에 이 일을 경축하며 문인 충허성정이 쓰다.
龜鑑者, 乃禪敎日用之要門也.
佛佛祖祖, 皆以此臻極, 而凡修行之隊,3) 捨此奚通!
盖鋟鏤累稔, 板本磨滅, 未爲萬世之龜鑑, 故慈應信和, 力募方板, 黽勵改刊, 可謂黑頭陀之重腹者也.
仍玆祝之, 門人冲虛性正書.
1) 자응신화(慈應信和 1658~1737). 10세에 출가하여 벽운(碧雲)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 뒤 불경을 깊이 공부하여 묘리(妙理)를 얻고 추붕(秋鵬)의 법맥(法脈)을 이어받았다.
2) 黑頭陀. 혜소(慧昭 774~850)의 별칭. 얼굴이 검어 흑두타로 불렸으며, 동방성인(東方聖人)이라고도 하였다. 31세 때 당나라 창주(滄州)에 가서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인 신감(神鑒)으로부터 심인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어산범패(魚山梵唄)를 도입하여 널리 보급한 것으로 전해진다. 시호는 진감(眞鑑)이고,
탑호는 대공영탑(大空靈塔)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쌍계사에 남아 있는 비는 최치원(崔致遠)이 지었으며, 비명은 「眞鑑國師碑」이다.
3) 隊는 際자의 오식(誤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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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전통사상총서・불교편 03
精選休靜정선휴정・譯註역주
Hyujeong: Selected Works
Collected Works of Korean Buddhism, vol. 3
總目次총목차
淸虛堂行狀 청허당행장
禪家龜鑑 선가귀감
心法要抄 심법요초
禪敎釋 선교석
禪敎訣 선교결
淸虛集 청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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