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가귀감

[스크랩] 禪家龜鑑 선가귀감 52 ~ 74

수선님 2018. 12. 23.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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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단』, 『선가귀감』(보현사 수충사 소장)

 

 

 

 

禪家龜鑑 선가귀감

 

 

 

염불(念佛)

 

52

 

염불을 할 때 입으로 내는 소리는 ‘송(誦)’이라 하고 마음속으로 외우는 것은 ‘염(念)’이라 한다.

단지 입으로 소리만 낼 뿐 마음속에서 놓쳐버리면226) 도를 이루는 데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다.

 

念佛者, 在口曰誦, 在心曰念.

徒誦失念, 於道無益.

 

 

[평1]
‘나무아미타불’ 6자 진언은 반드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의 경계를 대상으로 삼아 간직하고 잊지 않으며, 입으로는 부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분명하여 산란하지 않아야 한다.
이와 같이 마음과 입이 서로 딱 들어맞는 것227)을 염불이라고 한다.

 

阿彌陁佛六字法門, 定出輪廻之捷徑也.

心則緣佛境界, 憶持不忘, 口則稱佛名號, 分明不亂.

如是心口相應, 名曰念佛.

 

 

[평2]
5조 홍인(弘忍)은 “본래의 진심(眞心)을 지키는 것이 시방제불의 명호를 칭념하는 것보다 낫다”228)라 하였고, 6조 혜능은 “늘 타방의 부처만을 칭념할 뿐이라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229)

또 “자신의 본심을 지키는 것이 피안에 도달하는 길이다”230)라고 하였다.

또한 “부처는 자신의 본래 성품에서 이루는 것이니 자신 밖에서 구하지 마라”,231)

“어리석은 사람은 염불을 통해 서방정토에 태어나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232)

또는 “모름지기 중생이 자신의 마음을 깨달아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지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은 아니
다”233)라는 등의 말이 있다.

이상에서 든 여러 선덕들의 말씀은 곧바로 본래의 마음을 가리켜 보인 것일 뿐 별다른 방편을 쓴 것이 아니다.〈본심을 곧 바로 가리키는 하나의 법으로써 모든 근기에 맞아떨어지게 한다.〉

근본 이치는 참으로 이와 같으나 방편을 펼치는 적문(迹門)에는 진실로 극락세계가 있기에 아미타불은 48대원234)을 세우셨으니, 누구든지 아미타불을 열 번 칭념하기만 하면 아미타불의 원력을 받아 연태235)에 왕생하여 윤회의 굴레에서 곧바로 벗어날 것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한결같이 이처럼 말씀하셨고, 시방세계의 모든 보살들은 왕생을 함께 염원하였다. 또한 하물며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왕생한 사람들의 전기(傳記)에 분명히 나타남에랴!

바른 수행을 하고자 하는 이들은 삼가 잘못 이해하지 말고 수행에 힘쓰고 또 힘쓰라.

 

評曰 五祖云,“ 守本眞心, 勝念十方諸佛.” 六祖云,“ 常念他佛, 不免生死.”

“ 守我本心, 卽到彼岸.”

又云,“ 佛向性中作,莫向身外求.”

又云,“ 迷人念佛求生, 悟人自淨其心.”

又云,“大抵衆生, 悟心自度, 佛不能度衆生.”〈云云〉

如上諸德, 直指本心, 別無方便.〈方將一法, 便逗諸根.〉

理實如是, 然迹門, 實有極樂世界, 阿彌陀佛, 有四十八大願, 凡念十聲者, 承此願力, 往生蓮胎, 徑脫輪廻.

三世諸佛, 異口同音, 十方菩薩, 同願往生.

又況古今往生之人, 傳記昭昭!

願諸行者, 愼勿錯認, 勉之勉之.

 

 

범어 아미타는 무량수(無量壽) 또는 무량광(無量光)이라 한역되는데, 시방과 삼세를 통틀어 근본이 되는 부처님의 명호이다.

인위 때의 명칭은 법장비구236)라 하였는데, 세자재왕불237)에게 48가지 원을 일으켜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부처가 되었을 때 시방의 무앙수238)세계의 모든 천인(天人)으로부터 날아다니거나 기어 다니는 온갖 벌레들에 이르기까지 저의 이름을 열 번만 칭념하면239) 저의 불국토에 반드시 태어나게 해주시옵소서.

이 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끝내 성불하지 않겠습니다.”239)240)

 

梵語阿彌陀, 此云無量壽, 亦云無量光, 十方三世, 第一佛號也.

因名法藏比丘, 對世自在王佛, 發四十八願云,

“我作佛時, 十方無央數世界, 諸天人民, 以至蜎飛蝡動之流, 念我名十聲者, 必生我刹中.

不得是願, 終不成佛.”〈云云〉

 

 

226) 실념(失念). 염불을 할 때 간단없이 놓치지 않고 불명(佛名)을 외워야 하는 이 요령은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과도 통한다. 염(念)이 대상을 명백하게 기억하여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마음의 작용이라면, 실념은 대상으로 삼는 경계와 모든 선법(善法)에 대해 명백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교학적 측면에서는 유식백법(唯識百法) 중 이십수번뇌(二十隨煩惱)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227) 심구상응(心口相應). 마음과 입으로 하는 실천수행이 온전히 일치해야 함을 가리킨다. 염불은 단순히 입으로 소리 내어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부처님의 상호와 공덕을 떠올리고 마음을 모두 집중하여 관찰하고 새기는 데 주안점이 있다는 점에서 관심(觀心)과 통한다.

“마하반야바라밀은 범어로서 한역하면 큰 지혜로 피안에 도달한다는 뜻의 대지혜도피안(大智慧到彼岸)이다. 이것은 모름지기 마음으로 행할 것이며 입으로 외우는 데 달려 있지 않다.
입으로만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환영·허깨비·이슬·번개 등과 같이 허망하며, 입으로 외울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행하면 마음과 입이 딱 들어맞을 것이다.”

(宗寶本 『壇經』 大48 p.350a19.

摩訶般若波羅蜜, 是梵語, 此言大智慧到彼岸. 此須心行, 不在口念.

口念心不行, 如幻, 如化, 如露, 如電;口念心行, 則心口相應.)

228) 수심(守心)은 본래의 진심(眞心)을 지키는 선법이다. 이는 4조 도신(道信)의 수일(守一) 또는 수일불이(守一不移)의 선법을 계승한 것이며, 이후에는 북종 신수(神秀)의 심불기(心不起)라는 선법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계통의 선법은 모두 망념의 발생을 억제하면서 선정(禪定)에 드는 수정(修定) 내지 좌선에 초점을 둔다. 『최상승론』에 수심(守心)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글들이 실려있다.

“꼼짝 않고 집중하여 마음을 붙들고 있기만 한다면 망념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열반의 진리가 자연히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이 본래 청정한 줄 알아야 할 것이다.”

(『最上乘論』 大48 p.377b1. 但能凝然守心, 妄念不 生, 涅槃法, 自然顯現. 故知自心本來淸淨);

“‘자신의 마음이 피안의 부처를 염하는 것보다 수승하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자신의 마음이 아닌 피안의 부처를 염하는 것으로는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고 자신의 본심을 지키는 것이 피안에 도달하는 길이다. 『금강경』에 「만일 색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고자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부처를 볼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본래의 진심을 지키는 것이 타방의 부처를 염하는 것보다 낫다」고한다.’”

(같은 책 p.377b17.

問曰, ‘何名自心勝念彼佛?’ 答曰, ‘常念彼佛, 不免生死, 守我本心, 則到彼岸.

金剛經云,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故云,「守本眞心, 勝念他佛.」’);

“다만 가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누워 있는 일상의 생활 중에 항상 분명하게 본래의 참 마음을 지킨다면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다는것을 알라.”

(같은 책 p.378b8. 但於行住坐臥中, 常了然, 守本眞心, 會是妄念不 生.);
“수많은 경론의 내용이 모두 본래의 진심을 지키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이 것이 바로 수행의 요체이다.”(같은 책 p.378a19. 千經萬論, 莫過守本眞心, 是要也.)

229) 이와 동일한 문장은 보이지 않고 다만 돈황본(敦煌本) 『壇經』 大48 p.339c19에“경전에서는 단지 스스로 부처에 귀의하는 것이라고만 말하였지, 다른 부처에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았다.”(經中只卽言自歸依佛, 不言歸他佛.)라고 한 구절이 보인다. 종보본(宗寶本) 『壇經』 大48 p.354b10 참조.
230) 6조 혜능이 한 말로는 경전상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最上乘論』 大48 p.377b18 에 같은 말이 실려 있다.
231) 자신에게 있는 부처[自佛]가 참된 부처[眞佛]라는 『壇經』의 자성불(自性佛)사상이 드러난다.

“부처는 자신의 본래 성품에서 이루는 것이니 자신 밖에서 구하지마라. 자성이 미혹되면 중생이요, 자성을 깨달으면 부처이다.”

(宗寶本 『壇經』 大 48 p.352b9. 佛向性中作, 莫向身外求. 自性迷卽是衆生, 自性覺卽是佛.)
232) “어리석은 사람은 염불하여 서방정토에 태어나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그 마음의 청정함을 따르면 그것이 곧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 마음에서 청정하지 못한 생각을 일으키면서 염불을 통해 서방정토에 왕생하려 한다면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敦煌本 『壇經』 大48 p.341b11.

迷人念佛生彼, 悟者自淨其心. 所以, 言佛隨其心淨, 則佛土淨. …… 心起不淨之心, 念佛往生難到.)
233) “중생 스스로가 제도하는 것이지 부처가 제도할 수 없다.”(『頓悟入道要門論』 권상 卍110 p.850b3. 衆生自度, 佛不能度);

“경에 말하였다. ‘중생이 마음을 깨달아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지 부처가 중생을 제도해주는 것은 아니다.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라면 과거의 여러 부처님께서 항하의 모래알과 같이 무수하게 계셨는데도 무슨 까닭에 우리들은 성불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다만 정성스럽게 스스로 안에서 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해의 바다에 침몰한 것이다.’”

(『最上乘論』 大48 p.378c1.

經云, ‘衆生識心自度, 佛不能度衆生. 若佛能度衆生者, 過去諸佛恒沙無量, 何故我等不成佛也? 只是情誠不自內發, 是故沈沒苦海.);

“미혹할 때는 스승이 건네주지만 깨닫고 나면 스스로 건넌다. 건넌다는 말은 비록 같지만 그 작용하는 근거는 같지 않다.”(宗寶本 『壇經』 大48 p.349b9. 迷時師度, 悟了自度. 度名雖一, 用處不同.)

234) 아미타불의 본원(本願). 아미타불이 과거세에 성불하기 이전 법장비구였을 때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앞에서 48가지 서원을 세우고 이 서원이 실현되었을 때에 성불하겠다고 하였다. 그중 제18원이 대표적인데 다음과 같다.

“만약 내가 부처가 되어, 시방의 중생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즐거워하며 나의 국토에 왕생하고자 하여 십념(十念)을 행하고도 왕생하지 못한다면 정각을 얻지 않으리라. 다만 오역(五逆)을 지었거나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외한다.”(『無量壽經』 大12 p.268a26.

設我得佛, 十方衆生, 至心信樂, 欲生我國, 乃至十念, 若不生者, 不取正覺. 唯除五逆, 誹謗正法.)
235) 蓮胎. 이곳에 의탁하여 왕생하거나 부처의 지위에 오르기 때문에 마치 모태에서 태아가 성장하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부처님 명호[寶號]를 칭념하자마자 벌써 연태에 씨를 뿌린 것이며, 보리심을 한 번 일으키면 금지(金地)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것이다.”

(『蓮宗寶鑑』 권1 大47 p.306a20. 纔稱寶號, 已投種於蓮胎, 一發菩提, 卽標名於金地.)

236) 法藏比丘. Dharmākara. 아미타불이 인위 때 가졌던 명호. 법장보살이라고도 한다.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이 출현했을 때 교시가(憍尸迦)라는 국왕이 설법을 듣고 보리심을 일으켜 왕위를 버리고 스님이 되었는데, 그가 법장비구이다.
세자재왕불의 감화를 받아 이백십억의 불국토를 보고 그곳의 장점만 골라 이상적인 정토를 건설할 것을 결의하고 48대원을 세웠으며, 10겁 이전에 아미타불이 되어 지금도 서방정토에서 설법하고 있다고 전한다.
237) 世自在王佛. Lokeśvararāja, Lokeśvara. 세요왕불(世饒王佛)이라고도 하며, 범어음사어는 루이긍라(樓夷亘羅)이다. 과거세 아미타불이 법장비구였을 때 세상에 머물고 계셨던 부처님의 명호이다.
238) 무앙수(無央數)는 인도 52수 가운데 52번째 수로서 계산할 수 없는 무한 수를 가리키며 무진수(無盡數)와 같은 뜻이다. “무앙〈앙은 어와 양을 반절한 음이다. 범어는 아승기, 한역어는 무앙수이다. 앙은 진(盡)과 같은 뜻이다.〉”(『一切經音義』 권9 大54 p.359b21. 無央〈於良反. 梵言阿僧祇, 此言無央數也. 央盡也.〉)

239) 십성(十聲). 십념(十念)과 같은 말이다. 아미타불 또는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 염불하는 것을 말한다. 십념에 도달했다는 것[乃至十念]은 염불수행자가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지위에 이른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지극한 마음으로 끊어짐 없이 소리 내어 열 번을 다 채워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라. 마음으로 관
하는 것을 ‘염’이라 하고, 입으로 소리 내어 외는 것을 ‘칭’이라 하며, 십념은 열번 소리 내는 것이다.”

(『觀無量壽佛經義疏』 권하 大37 p.304b11.

如是至心, 令聲不絕, 具足十念, 稱南無阿彌陀佛. 心觀爲念, 口誦爲稱, 十念謂十聲也.);

“이제 『관무량수불경』에서 ‘열 번 소리 내어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에는 열 가지 원과 열 가지 행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는데, 온전히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나무란 귀명의 뜻이고, 또한 발원하고 회향한다는 뜻이다. 아미타불이란 곧 그 행이다. 이런 뜻 때문에 반드시 왕생하게 된다.”

(『觀無量壽佛經疏』 大37 p.250a27.

今此觀經中, ‘十聲稱佛, 卽有十願, 十行具足.’ 云何具足?

言南無者, 卽是歸命, 亦是發願, 廻向之義. 言阿彌陀佛者, 卽是其行. 以斯義故, 必得往生.);

“모든 중생들은 마땅히 모든 부처님께서 지켜주시는 이 경전을 믿어야 한다. 무엇을 지켜주신다고 하는가? 만약 중생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를 이레 혹은 하루 동안 하거나, 그 아래로 열 번 내지 한 번 외우거나 또는 한 번만 염하여도 반드시 왕생하게 될 것이다.”

(『往生禮讚偈』 大47 p.448a6.

汝等衆生, 皆應信是一切諸佛護念經. 云何名護念?

若有衆生, 稱念阿彌陀佛, 若七日及一日, 下至十聲, 乃至一聲, 一念等, 必得往生.)
240) 48대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후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제18원이다. 이 서원을 십념왕생원(十念往生願) 또는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이라고도 한다.

 

 

 

옛 성인이 말했다.

“부처님의 명호를 한 번 소리 내어 부르면241) 천마(天魔)의 간담을 상하게 하고,242) 귀신의 명부243)에서 이름이 지워져 백은(白銀)이 깔려 있는 연못244)에 연꽃으로 피어나리라.”

또 참법(懺法)에는 이렇게 전한다.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이 있으니, 한쪽은 더디고 한쪽은 빠르다. 바다를 건너고자 하는 자가 나무를 심어 자란 뒤에 배를 만든다면 더딜 것이니 이는 자력을 비유한 것이다. 배를 빌려 타고 바다를 건넌다면 빠를 것이니 이는 불력을 비유한 것이다.”

또 말하였다. “세간의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거나 불에 타는 등의 급박한 지경에 직면하여 큰소리로 울부짖으면 부모가 그 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와 구원해주는 것이 마치 사람이 임종에 이르러 큰 소리로 염불하면 부처님께서 신통력을 갖추시고 반드시 맞이하러 오시는 것245)과 같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자비심은 부모보다 더하고 중생의 생사윤회를 떠도는 고통은 물에 빠지고 불에 타는 고통보다 더 심하다.

 

先聖云, “唱佛一聲, 天魔喪膽, 名除鬼簿, 蓮出金池.”

又懺法云,“ 自力他力, 一遲一速. 欲越海者, 種樹作船, 遲也, 比自力也. 借船越海, 速也, 比佛力也.”

又曰, “世間稚兒, 迫於水火,
高聲大呌, 則父母聞之, 急走救援, 如人臨命終時, 高聲念佛, 則佛具神通, 決定來迎爾.”

是故, 大聖慈悲, 勝於父母也, 衆生生死, 甚於水火也.

 

 

241) “또한 예를 들어 소강법사의 영험에 따르면, 부처님의 명호를 한 번 소리 내어 부르면 중생은 부처님 한 분이 입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부처님의 명호를 열 번 소리 내어 부르면 열 분의 부처님이 입에서 나는 듯이 나왔다고 한다.”

(『淨土或問』 大47 p.302b20. 又如少康法師, 唱佛一聲, 衆見一佛, 從口飛出;唱佛十聲, 則有十佛, 從口飛出.)

242) 천마상담(天魔喪膽).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셨을 때 제6천의 마왕을 항복시킨 행적에서 유래한 말. 도를 깨달은 사람의 한 구절은 귀신의 간담도 서늘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뜻이다.

“대장부여, 지혜의 칼을 잡았구나. 반야의 칼날이여, 금강왕의 불꽃과 같이 거세구나. 외도의 마음을 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천마의 간담까지 떨어뜨렸도다.”

(『證道歌』 大48 p.396b3. 大丈夫, 秉慧劍. 般若鋒兮, 金剛焰. 非但空摧外道心, 早曾落却天魔膽.)
243) 귀부(鬼簿). 저승사자의 명부. 또는 절에서 죽은 신도들의 법명·속명 및 사망 연월일 등을 적어 놓은 장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244) 금지(金池). “황금 연못에는 그 바닥에 백은의 모래가 깔려 있고, …… 자금 연못에는 그 바닥에 백옥의 모래가 깔려 있다.”(『無量壽經』 권상 大12 p.271b1. 黃金池者, 底白銀沙, …… 紫金池者, 底白玉沙.)
245) 내영(來迎). pratyudyāna. 극락정토에 왕생할 때 아미타불과 성중(聖衆)이 오시어 맞이하는 것을 말한다. 영접(迎接)·내영영접(來迎迎接)·성중내영(聖衆來迎) 등이라고도 한다. 아미타불이 인위(因位)에서 일으킨 48대원 중 제19원 ‘내영인접원(來迎引接願)’이 이 맥락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정토이니 별도의 다른 정토에 태어날 수 없고, 자신의 성품이 아미타불246)이니 아미타불을 볼 수 없다”고 하는데, 이 말은 옳은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247)

저 부처는 탐냄과 진노함이 없는데 나 또한 탐냄과 진노함이 없는가!

저 부처는 지옥을 연화장세계로 변화시키는 것을 마치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게 하시는데 나는 업력으로 인해 늘 스스로 지옥에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으니 하물며 연화장 세계로 변화시키는 일에 있어서임에랴!

부처는 무진세계를 관하기를 마치 눈앞에 있는 것을 보시듯 하나 나는 단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 일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시방세계를 눈앞의 것을 대하듯이 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본성 자체는 비록 부처라고 하여도 드러난 행위에서는 중생일 뿐이니, 현실적인 상(相)과 용(用)으로 따지자면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有人云, “自心淨土, 淨土不可生, 自性彌陀, 彌陀不可見!” 此言, 似是而非也.

彼佛無貪無嗔, 我亦無貪嗔乎!

彼佛變地獄作蓮花, 易於反掌, 我則以業力, 常恐自墮於地獄, 況變作蓮花乎!

彼佛觀無盡世界, 如在目前, 我則隔壁事猶不知, 況見十方世界, 如目前乎!

是故, 人人性則雖佛, 而行則衆生, 論其相用, 天地懸隔.

 

 

246) 자성미타(自性彌陀). 아미타불과 극락정토는 항상 자기 마음속에 있으므로 자기 자신이 곧 아미타불이라는 말. 자력신심(自力信心)을 의미한다. 기심미타(己心彌陀)·기신미타(己身彌陀)·유심미타(唯心彌陀)·기심정토(己心淨土)·유심정토(唯心淨土) 등이라고도 한다.
247) 이와 같은 취지의 정토관이 『龍舒增廣淨土文』의 다음 글에 보인다.

“세간에 참선에만 몰두하는 사람들 사이에 ‘오직 마음만이 정토이거늘 어찌 다시 별도의 정토가 있겠는가! 자신의 성품이 아미타불이니 아미타불을 다시 만날 필요는 없다’라는 말이 전하는데 이는 옳은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서방정토에는 리(理)와 적(跡)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 리로 말하자면, 마음을 깨끗이 할 수 있으므로 일체가 모두 깨끗하여 진실로 유심정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적으로 말하자면, 실제로 극락세계가 있다고 부처님께서도 입이 닳도록 상세하게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망령된 말이겠는가!

사람마다 누구나 성불할 수 있으니 자신의 성품이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진실로 망령된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한순간에 성불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훌륭한 재목에 물상을 새겨 화려함을 극대화하려면 반드시 조각의 공력이 더해진 다음에야 이룰 수 있는 것과 같다. 훌륭한 재목을 지목하여 그것에 의지하는 것만으로 물상의 화려함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인 것이다.

이런 이치에서 오직 마음이 정토라 하는 것일 뿐이니, 다시 어디에 정토가 있으며 자신의 성품이 아미타불이니 아미타불을 다시 만날 필요는 없다고 한 말도 잘못인 것이다.

또한 정토가 있다는 것을 믿고서 ‘마음일 뿐이다’라는 주장에 빠져 서방정토에 태어날 필요가 없다거나 참선하여 자신의 본성을 깨우치고 부처나 조사를 넘어서면 아미타불을 만날 필요가 없다고 하는 말도 모두 잘못이다.

왜 그런가? 이러한 말들은 너무 고원(高遠)하여 쉽게 이르지 못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龍舒增廣淨土文』 권1 「淨土起信五」 大47 p.255c7.

世有專於參禪者云, ‘惟心淨土, 豈復更有淨土!

自性阿彌, 不必更見阿彌.’ 此言似是而非也. 何則? 西方淨土, 有理有跡.

論其理, 則能淨其心, 故一切皆淨, 誠爲唯心淨土矣,

論其跡, 則實有極樂世界, 佛丁寧詳復言之, 豈妄語哉!

人人可以成佛, 所謂自性阿彌者, 固不妄矣.

然猝未能至此, 譬如良材可以雕刻物像, 而極其華麗, 必加以雕刻之功, 然後能成. 不可據指良材, 而遂謂極物像之華麗也.

是所謂唯心淨土, 而無復更有淨土, 自性阿彌, 不必更見阿彌者, 非也.

又信有淨土, 而泥唯心之說, 乃謂西方不足生者, 謂參禪悟性超佛越祖, 阿彌不足見者, 皆失之矣.

何則? 此言甚高, 竊恐不易到.)

 

 

 

규봉종밀248)이 “설령 실제 돈오하였다 하더라도 종국에는 반드시 점차적으로 수행해야 한다”249)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대단히 진실하도다!

그러한즉 ‘자신의 본성이 곧 미타’라고 전하는 말이 어찌 나면서부터 석가라거나 자연히 이루어진 아미타불이라는 뜻이겠는가?250)

모름지기 스스로 헤아려본다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임종에 이르러 생과 사가 교차하는 고통스러운 순간에 확고하게 자유자재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러하지 못하다면 한순간 의기양양하여 뽐내다가 도리어 영겁토록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마명251)이나 용수252)와 같은 조사들이 모두 가르침의 말씀을 분명히 남겨 왕생에 대해 깊이 권장하셨는데,253)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왕생하고자 하는 원을 품지 않을 것인가!

 

圭峯云, “設實頓悟, 終須漸行.” 誠哉, 是言也!

然則寄語自性彌陀者, 豈有天生釋迦自然彌陀耶?

須自忖量, 人豈不自知!
臨命終時, 生死苦際, 定得自在否?

若不如是, 莫以一時貢高, 却致永劫沉墮.

又馬鳴龍樹, 悉是祖師, 皆明垂言敎, 深勸往生, 我何人哉, 不欲往生!

 

 

248) 圭峰宗密(780~841). 당나라 때 스님. 화엄종(華嚴宗) 제5조. 시호는 정혜(定慧).선맥(禪脈)으로는 하택선(荷澤禪)을 이어받았다. 『圓覺經科文』, 『圓覺經纂要』,『都序』, 『原人論』 등을 지었다.
249) 『都序』 권하 大48 p.411b7 참조.
250) “나면서부터 석가이거나 자연히 이루어진 미륵불이란 있지 않다. 그 누가 어머니 배 속에서 깨달았단 말인가?”(『圜悟心要』 권상 「示倫上人」 卍120 p.737b11. 未有天生釋迦自然彌勒. 阿那箇在娘肚裏便會?)
251) 馬鳴(100?~150?) Aśvaghos3 a. 중인도 사위성(舍衛城) 남쪽에 위치한 사기다성(娑枳多城) 출신. 부법장(付法藏) 제12조.
252) 龍樹. Nāgārjuna. 부법장(付法藏) 제14조. 용맹(龍猛)·용승(龍勝)으로도 불린다. 남인도 바라문 출신이며, 중관학파(中觀學派)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253) 마명의 『大乘起信論』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 이 취지와 통하며, 용수의 저술로 알려진 『大智度論』 권38~40의 「往生品」 등을 염두에 둔 말로 보인다.

“만약 중생이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만 오로지 염하고, 닦아서 쌓은 선근을 회향하여 그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염원하면 그곳에 태어나 항상 부처님을 친견할 것이며 끝내 이 경계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大乘起信論』 권1 大32 p.583a17.

若人專念, 西方極樂世界, 阿彌陀佛, 所修善根迴向, 願求生彼世界, 卽得往生, 常見佛故, 終無有退.)

 

 

 

또한 부처님께서 친히 “서방정토와의 거리가 십만〈10악〉팔천〈8사〉 리254)나 떨어져 있다”라고 하신 말씀은 근기가 둔한 중생에게 상(相)을 설정하여 설하신 것이다.

한편 “서방정토와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마음〈중생〉 그대로가 곧 부처〈아미타불〉이다”255)라고 하신 말씀은 근기가 영리한 중생에게 본성을 그대로 설하신 것이다.

교문에는 권교(權敎)와 실교(實敎)가 있고 말씀에는 드러나는 가르침[顯]과 비밀스러운 가르침[密]이 있다. 만약 이해와 행위가 상응한다면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 통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 문하에는 혜원256)의 경우처럼 아미타불을 칭념하던 이도 있고〈혜원〉, 서암257)의 경우처럼 주인공을 부르던 이도 있었던 것이다〈서암〉.

 

又佛自云, “西方去此遠矣, 十萬〈十惡〉八千〈八邪〉.” 此爲鈍根說相也.

又云,“ 西方去此不遠, 卽心〈衆生〉是佛〈彌陀〉.” 此爲利根說性也.

敎有權實, 語有顯密.

若解行相應者, 遠近俱通也.

故祖師門下, 亦有或喚阿彌佛者〈慧遠〉, 或喚主人公者〈瑞巖〉

 

 

254) 십악(十惡)과 팔사(八邪)를 비유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서방정토와의 거리가 십만팔천 리로 떨어져 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장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십만억 불국토를 지나면 극락이라는 세계가 있다. 그 불국토에는 아미타불이 계시는데 지금도 법을 설하고 계신다.’”

(『阿彌陀經』 大 12 p.346c10.

佛告長老舍利弗, ‘從是西方, 過十萬億佛土, 有世界名曰, 極樂. 其土有佛, 號阿彌陀, 今現在說法.’);

“서방과의 거리가 십만팔천 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서방은 서축을 잘못 쓴 것이다.

경에 ‘이곳에서 서쪽으로 십만억 불국토를 지나면 극락이라는 세계가 있다’고 하였으나 어찌 십만팔천 리에 그칠 뿐이겠는가! 간략하게 일단을 가리켜 말한 것일 뿐이다.”

(『觀無量壽佛經義疏』 권상 大37 p.284b29.

西方去此, 十萬八千里, 此亦誤以四竺爲西方也.

經云, ‘從此西方, 過十萬億佛土, 有世界名曰, 極樂.’ 豈止十萬八千乎! 略指一端.)

십악(十惡)은 살생(殺生)·투도(偸盜)·사음(邪淫)·망어(妄語)·기어(綺語)·악구(惡口)·양설(兩舌)·탐욕(貪慾)·진에(瞋恚)·우치(愚癡) 등이며, 팔사(八邪)는 사견(邪見)·사사유(邪思惟)·사어(邪語)·사업(邪業)·사명(邪命)·사방편(邪方便)·사념(邪念)·사정(邪定)등이다.
255) 종보본(宗寶本) 『壇經』 大48 p.341b14의 다음 말과 전후의 내용이 통한다.

“마음에 청정하지 않음이 없기만 하다면 서방정토는 이곳에서 멀지 않을 것이나, 마음에서 청정하지 못한 생각을 일으키면 염불하여 왕생하려 해도 도달하지 못한다. 10악을 제거하면 10만 리를 가고, 8사가 없으면 8천 리를 지나리라.”

(心但無不淨, 西方去此不遠;心起不淨之心, 念佛往生難到. 除惡卽行十萬, 無八邪卽過八千.)

256) 여산혜원(廬山慧遠 334?~416?). 동진(東晋) 때 동림사(東林寺)에 주석했던 스님.
정토왕생을 위한 염불수행(念佛修行)에 전념하기 위해 염불결사(念佛結社)인 백련결사(白蓮結社)를 맺고 정진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결사에서 주로 닦던 삼매는 반주삼매(般舟三昧)이다.
257) 서암사언(瑞巖師彦)이 스스로 ‘주인공!’ 하고 부른 다음 스스로 ‘예!’ 하고 대답했다는 일화를 말한다. 『無門關』 「巖喚主人」 大48 p.294b19 참조.

 

 

 

 

 

경전의 인연

 

53

 

경전 읽는 소리를 듣고258) 귀에 스치기만 해도 인연이 되고 다른 사람의 공덕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자신도 공덕을 쌓는 일이 되니,

덧없는 몸뚱이는 다하여 사라질 날이 있지만 진실한 수행은 사라지지 않는다.259)

 

聽經, 有經耳之緣, 隨喜之福,

幻軀有盡, 實行不亡.

 

 

[평]
이는 지혜로운 공부법에 대해 밝힌 것이니 마치 금강을 먹은 것260)과 같고 칠보를 보시하는 것보다 더 수승하다.

영명연수(永明延壽)261)선사가 말하였다.

“듣고서 믿지 않더라도 오히려 부처가 될 씨앗을 심은 인연을 맺은 것이요, 배웠으나 이루지 못했더라도 오히려 인천의 복을 모두 포괄할 만하다.”262)

 

此明智學, 如食金剛, 勝施七寶.

壽師云,

“ 聞而不信, 尙結佛種之因, 學而不成, 猶盖人天之福.”

 

 

258) 청경(聽經). “경에 대해 묻는 사람을 구분하면 두 부류가 있으니, 일심으로 경을 듣는 이들이 있고 일심으로 경을 듣지 않는 이들이 있다.

일심으로 경을 듣는 자는 수승하고 일심으로 경을 듣지 않는 자는 그보다 못하다.

일심으로 경을 듣는 부류도 다시 둘로 나뉘니, 듣고서 법을 수지하는 이들이 있고 듣고서도 법을 수지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듣고서 법을 수지하는 자는 수승하고 듣고서도 법을 수지하지 않는 자는 그보다 못하다.”

(『中阿含經』 권1 大1 p.421c14.

謂問經人, 復有二種, 有一心聽經, 有不一心聽經.

若一心聽經者勝, 不一心聽經者爲不如也.

謂一心聽經人, 復有二種, 有聞持法, 有聞不持法.

若聞持法者勝, 聞不持法者爲不如也.)
259) 『緇門警訓』 권7 「釋門登科記序」 大48 p.1079b14의 다음 내용에 근거한다.

“덧없는 몸뚱이는 다하여 사라질 날이 있지만 진실한 수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붉은 도랑물과 같이 선명한 말씀과 구슬알과 같이 온몸의 뼈를 부수어 가루로 만들 정도의 정진이 모두 책에 기록되어 전해지니 견식이 있는 이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하물며 『반야경』에는 귀로 스쳐 듣기만 해도 인연이 된다는 말씀이 있고, 『법화경』에는 다른 사람의 공덕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자신도 공덕을 쌓는 복을 가르치고 있음에랴!”

(幻軀有盡, 實行不亡.

故有舌相粲若紅渠, 身骨碎如珠顆, 具書傳錄, 識者備聞.

況般若有經耳之緣, 法華校隨喜之福!)

260) 식금강(食金剛). 금강은 먹어도 소화되지 않고 몸 밖으로 배출되는 것과 같이 경을 듣는 것만으로도 번뇌와 뒤섞이지 않게 됨을 비유한 『화엄경』의 말이다.

“비유하면 장부가 금강을 조금만 먹어도 끝내 소화시키지 못하고 그 몸을 통과하여 밖으로 배출되는 것과 같다. 왜 그러한가?

금강은 몸속의 더러운 것들에 뒤섞여 함께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여래께 적은 선근을 심는 것도 이와 같아서 일체 유위의 모든 행과 번뇌의 몸을 뚫고 지나 무위의 구경지(究竟智)에 이른다.

어째서인가? 이 적은 선근은 유위의 모든 행이나 번뇌와 함께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80권본 『華嚴經』 大10 p.277a23.

譬如, 丈夫食少金剛, 終竟不消, 要穿其身, 出在於外. 何以故?

金剛不與肉身雜穢而同止故. 於如來所種少善根, 亦復如是, 要穿一切有爲諸行 煩惱身過, 到於無爲究竟智處. 何以故? 此少善根, 不與有爲諸行煩惱而共住故.)
261) 904~975. 법안종(法眼宗) 3조. 임안부(臨安府) 여항(餘杭) 출신. 천태덕소(天台德韶)의 법을 이었다. 저서에 『宗鏡錄』·『萬善同歸集』·『唯心訣』 등이 있다.
262) 『唯心訣』 大48 p.996c21 참조. 『唯心訣』에는 ‘猶盖人天之福’의 ‘盖’자가 ‘益’자로 되어 있다.

 

 

 

54

 

경전을 읽을 때263)에 자기 본분상에서 공부하지 않는다면 비록 수많은 경전을 모두 읽었다고 해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

 

看經, 若不向自己上, 做工夫, 雖看盡萬藏, 猶無益也.

 

 

[평]
이는 어리석은 공부법에 대해 밝힌 것이니 마치 봄날에 새가 지저귀고 가을밤에 벌레가 우는 것과 같다.264) 규봉종밀선사가 말하였다.

“글자나 식별해가며 경전을 읽는 것으로는 원래 깨달을 수 없고,

문구나 새기고 뜻을 풀기만 해서는 다만 탐욕과 성냄과 삿된 견해만 치성해질 뿐이다.”265)

 

此明愚學, 如春禽晝啼, 秋蟲夜鳴.

密師云,“ 識字看經, 元不證悟,

銷文釋義, 唯熾貪嗔邪見.”

 

 

263) 간경(看經). 경전을 보고 읽는 것 또는 부처님 앞에서 경전을 독송하는 것. 풍경(諷經)·송경(誦經)과 같은 말이다. 눈으로 문자를 보고 마음으로는 진리를 관조하는 것을 뜻한다.

소리 내지 않고 읽는 것을 간경이라 하고,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독경(讀經)이라고 한다.

“간경하거나 법을 들을 때 하나하나를 자기의 본심으로 귀결시키지 않고, 단지 문자의 차별된 관념만 좇아 움직이면 곧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달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경전의 문자도 분별할 수 없다.”

(『宗鏡錄』 권92 大48 p.918c15.

或看經聽法之時, 不一一消歸自己, 但逐文句名身而轉, 卽是觀指, 以爲月體.
此人豈唯不見自性, 亦不辯於敎文.)

264) 마음으로 뜻을 궁구하지 않고 경전의 문구에만 매달리는 것이 무의미함을 비유한 말이다.

“그대들이 이곳에서 경전을 잔뜩 늘어놓고 외우며 성인의 뜻을 궁구하고 음미하여 점수의 공을 닦은 인연으로 돈오에 들어가고 돈오를 인연으로하여 원교의 진리에 들어간다면 삼장이 곧 그대 자신이고 그대 자신이 곧 삼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봄날에 새가 지저귀고 가을밤에 벌레가 울며 바람의 기운에 이끌리는 것과 같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緇門警訓』 권 3 「撫州永安禪院僧堂記」 大48 p.1054a18.

汝能於此, 橫經而誦, 研味聖意, 因漸入頓, 因頓入圓, 則三藏卽汝, 汝卽三藏.

若不然者, 春禽晝啼, 秋虫夜鳴, 風氣所使, 曾無意謂.)
265) 『都序』 권상 大48 p.400a14.

 

 

 

 

 

수행에 대한 경책과 바른 길

 

55

 

배움이 도에 이르지도 못했으면서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

한갓 교묘한 말재주로써 돋보이려고 하는 것은 측간에 울긋불긋 색을 칠하는 것과 같다.266)

 

學未至於道, 衒耀見聞,

徒以口舌辯利相勝者, 如厠屋塗丹雘.

 

 

[평]
말세의 어리석은 배움에 대해 특별히 밝힌 것이다.

공부란 본디 자기 본성을 닦는 것인데,267) 오로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에서 공부한다면268) 이는 참으로 어떤 마음이란 말인가!

 

別明末世愚學.

學本修性, 全習爲人, 是誠何心哉!

 

 

266) 단확(丹雘)은 고운 빛깔의 흙 또는 붉은색 안료를 말한다. 여기서는 겉만 화려하고 실속 없이 허황한 것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원공이 도오진에게 말하였다.

‘배움이 도에 이르지도 못했으면서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 기민한 이해력을 과시하며

한갓 교묘한 말재주로써 돋보이려고 하는 것은 측간에 울긋불긋 색을 칠하여 더럽히는 것과 같으니, 단지 그 악취만 더할 뿐이다.’〈「서호기문」〉”

(『禪林寶訓』 권1 大48 p.1018b20. 遠公, 謂道吾眞曰, ‘學未至於道, 衒耀見聞, 馳騁機解,

以口舌辯利相勝者, 猶如廁屋塗污丹雘, 秖增其臭耳.’〈西湖記聞〉);『禪林寶訓順硃』 권1 卍113

p.451a5~a14 참조.
267) “배움이라는 것은 본디 자기 본성을 닦는 데 있으니 어찌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성낼 것인가! 도(道)라는 것은 천성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을 귀하게 여길 뿐이니, 세상에 쓰이기를 바라지 마라.”

(『緇門警訓』 권7 大48 p.1078b7. 且夫學本修性, 豈慍人之不知! 道貴全生, 無蘄世之爲用.)

268) “공자가 말하였다. ‘옛사람들은 자신의 수양과 학문을 완성하기 위해 공부하였는데, 요즘 사람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공부하는구나.’”

(『論語』 「憲問」. 子曰,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56

 

출가한 자로서 외전269)을 익히는 것은 마치 칼로 진흙을 베는 것과 같으니

진흙은 베지도 못하면서 칼만 상하게 하는 꼴이다.270)

 

出家人, 習外典, 如以刀割泥,

泥無所用, 而刀自傷焉.

 

 

[평]
문 밖에 있던 장자의 아이들이 다시 불타는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격이다.271)

 

門外長者子, 還入火宅中.

 

 

269) 외전(外典). 외서(外書)라고도 한다. 불교 이외의 서적을 외전이라 하고, 이에 대하여 불교서적은 내전이라 한다. 유가(儒家) 등의 입장에서는 불교서적을 외전이라고 한다.

육신을 구제하는 교전은 외(外)라 하고, 정신을 구제하는 교전은 내(內)라고 한다.

『대지도론』에 내·외의 두 가지 경전이 모두 있고, 『인왕경』에 내·외의 두 가지 논을 모두 밝혔으며, 방등경에서는 내·외의 두 가지 율(律)을 모두 밝혔고, 『백론』에서는 내·외의 두 가지 도리를 모두 말했다.

내·외를 통틀어서 말하면 중국과 그 이외의 나라를 모두 포함하지만, 중국으로만 한정할 때는 유교와 불교를 들 수 있는데, 불교는 내이고 유교는 외이다.”

(『廣弘明集』 권 8 「二敎論」 大52 p.136c11.

救形之敎, 敎稱爲外, 濟神之典, 典號爲內.

是以, 智度有內外兩經, 仁王辯內外二論, 方等明內外兩律 , 百論言內外二道.

若通論內外, 則該彼華夷, 若局命此方, 則可云儒釋, 釋敎爲內, 儒敎爲外.)
270) “계를 수지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날카로운 지혜를 갖추고 있다 하여도 세간의 잡다한 일을 함으로써 때때로 생업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구하고자 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근기가 점차 둔해진다.

비유하면 예리한 칼로 진흙을 베면 마침내 칼만 무디게 만드는 것과 같다.”

(『大智度論』 권14 大25 p.163b19.

不持戒人, 雖有利智, 以營世務, 種種欲求生業之事, 慧根漸鈍. 譬如利刀以割泥土, 遂成鈍器.)

『緇門警訓』 권4 大48 p.1060c2에는 “智論云, ‘學習外典, 如以刀割泥. 泥無所成, 而刀自損.’”으로 ‘泥無所用’의 用자가 ‘成’자로 되어 있고,

『紫柏老人集』 卍126 p.647b17에는 “칼이 비록 예리해도 진흙을 베는 데 쓰면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지는 못하고 칼날은 날로 무뎌질 뿐이니 이것은 칼을 잘 사용하지 못한 것이다.”

(刀雖快利, 惟用割泥, 泥無所成器, 刀刃日損, 此不善用刀者也)라 하여 그릇을 이루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271) 화택(火宅)은 온갖 번뇌와 괴로움으로 가득 찬 삼계(三界)를 비유하는 말.

『法華經』 권2 「譬喩品」 大9 p.12b12에 실려 있는 화택유(火宅喩)의 비유를 끌어와 외전을 공부하는 것은 마치 불타는 집에 있던 아이들을 방편(삼승의 교설)으로 유인하여 집 밖으로 불러내었는데, 다시 불타는 집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57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 것이 어찌 작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는가?

편안하고 한가로움을 구하기 때문도 아니며, 따뜻하고 배부름을 구하기 때문도 아니며, 이익과 명예를 구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고, 번뇌를 끊기 위한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잇기 위한 것이며, 삼계에서 벗어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272)

 

出家爲僧, 豈細事乎?

非求安逸也, 非求溫飽也, 非求利名也.

爲生死也, 爲斷煩惱也,

爲續佛慧命也, 爲出三界度衆生也.

 

 

[평]

하늘을 찌르는 대장부의 기상이라 할 만하다.273)

 

可謂衝天大丈夫.

 

 

272)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 것이 어찌 작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는가?

편안하고 한가로움을 구하기 때문도 아니며, 따뜻하고 배부름을 구하기 때문도 아니며, 달팽이 뿔과 같은 감투를 쓰고 이익이나 명예를 구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생사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며, 번뇌를 끊기 위한 것이고, 삼계의 고해를 벗어나 부처님의 지혜를 잇기 위한 것이다.”

(『緇門警訓』 권2「釋難文」 大48 p.1049c12.

蓋出家爲僧, 豈細事乎?

非求安逸也, 非求溫飽也, 非求蝸角利名也. 爲生死也, 爲衆生也, 爲斷煩惱, 出三界海, 續佛慧命也.)

273) “법좌에 오르자 한 학인이 물었다. ‘최조공이 국일조사에게 「제가 출가하고자 하는데 괜찮겠습니까?」라고 묻자

「출가는 대장부의 일이니 장수나 재상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라고 답하였는데,  이는 어떤 의미입니까?’

 ‘배우러 찾아온 자의 근기를 깊이 판별한 것이다.’”

(『密菴語錄』 大47 p.962a21.

上堂, 僧問, ‘崔趙公, 問國一祖師云, 「弟子欲出家得否?」

國一云, 「出家乃大丈夫事, 非將相所能爲.」意旨如何?’

師云, ‘來機深辨.’)

 

 

 

58

 

부처님께서 “무상이라는 불이 온 세상을 불태운다”,274)

“중생을 태우는 고뇌의 불길이 천지 사방을 온통 불사른다”,275)

“번뇌라는 온갖 도적이 항상 사람을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276)라고 하셨으니,

도를 닦는 이들은 마땅히 스스로를 경계하여 일깨우기를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긴급한 일로 여겨야 할 것이다.277)

 

佛云,“ 無常之火, 燒諸世間.”

又云,“ 衆生苦火, 四面俱焚.”
又云,“ 諸煩惱賊, 常伺殺人.”

道人, 宜自警悟, 如救頭燃.

 

 

[평]
몸에는 생·로·병·사가 있고, 세계에는 성·주·괴·공이 있으며, 마음에는 생·주·이·멸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무상이라는 불과 고뇌의 불로서 사방을 온통 불사르는 바로 그것이다.

깊은 도를 참구하는 사람들에게 삼가 이르노니, 세월을 결코 헛되이 보내지 마시라.

 

身有生老病死, 界有成住壞空, 心有生住異滅,

此無常苦火, 四面俱焚者也.

謹白參玄人, 光陰莫虛度.

 

 

274) 무상지화(無常之火)란 영원불변한 것이 없고 모든 현상이 생성하면 반드시 덧없이 사라지는 삼라만상에 대하여 모든 것을 불태워 없애는 속성을 가진 불로써 비유한 말이다. 수행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경책의 뜻을 담고 있다.

“마땅히 무상이라는 불이 온 세상을 불태우고 있음을 마음속에서 잊지 말고 조속히 자신을 제도하고자 힘써야 할 것이니 수면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번뇌라는 온갖 도적이 항상 사람을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 원수보다 더 심하니, 어찌 수면에 빠져 스스로를 경계하며 일깨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佛垂般涅槃略說敎誡經』 大12 p.1111a29.

當念無常之火, 燒諸世間, 早求自度, 勿睡眠也.

諸煩惱賊, 常伺殺人, 甚於怨家, 安可睡眠, 不自警悟!)

275) “죄악은 처음에는 작은 잔을 넘치는 정도에서 시작되나 그 재앙은 끝내 정수리까지 차오를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중생을 태우는 고뇌의 불길이 사방을 온통 불사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태연히 앉아서 무의미한 잡담이나 하고 있을 것인가!”

(『緇門警訓』 권1 「自警文」 大48 p.1048a21.

罪始濫觴, 禍終滅頂.

何也? 衆生苦火, 四面俱焚. 豈可安然, 坐談無義!)
276) 도적이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것은 마치 번뇌가 법신과 혜명(慧命)을 손상시키는 것과 같기 때문에 도적에 비유하여 번뇌적(煩惱賊  S:kleśa-śatru, kleśāmitra)이라고 한다.

“도를 구하는 수행자가 대사(大事)를 판별하지 못하면 번뇌라는 온갖 도적이 항상 침입할 기회를 엿보게 된다.”(『大智度論』 권68 大25 p.538a28. 求道者, 大事未辦, 諸煩惱賊, 常伺其便.);

“‘무슨 까닭에 번뇌를 도적이라 하고, 무명을 잠이라고 하는가?’

‘번뇌는 일체중생을 결박하여 온갖 악업을 지어 삼악취에 떨어뜨리고 법신의 목숨을 해친다.

그러므로 도적이라 한다. 무명은 대상경계에 어두워 지각하지 못하게 하므로 잠이라 한다.’”

(『華嚴經三寶章圓通記』 권상 韓4 p.165a9.

問, ‘何故, 煩惱名賊, 無明名睡耶?’

答, ‘煩惱則, 縛諸衆生, 造諸惡業, 墮三惡趣, 害法身命,

故名爲賊. 無明則, 於境迷暗, 令不知覺, 故名爲睡也.)
277) 구두연(救頭燃). 두연이라고도 하며 구두학도(救頭學道)와 같은 뜻이다. 머리에 불이 붙으면 우물쭈물 망설이며 지체할 사이 없이 바로 불을 끄고자 하는 것처럼 도나 학문을 닦을 때에도 가장 다급한 일로 여기며 정진해야 한다는 뜻이다.
“면밀하게 열심히 닦고 익혀 잠시도 버린 적이 없는 것이 마치 머리 위에 놓인 돌을 제거하거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이 긴급하게 한다.”

(『大乘本生心地觀經』 권5 大3 p.313a22. 精勤修習, 未嘗暫捨, 如去頂石, 如救頭燃.);

“정진하며 눕지 않는 태도가 머리의 불을 끄는 것과 같다.”

(『法華經安樂行義』 大46 p.700b3. 精進不臥, 如救頭然.)

 

 

 

59

 

세간의 부질없는 명성을 탐하는 것은 헛된 공부로 몸만 수고롭게 하는 꼴이요,278)

세간의 이익을 애써 구하는 것은 업의 불길에 땔나무만 더하는 꼴이다.279)

 

貪世浮名, 枉功勞形,

營求世利, 業火加薪.

 

[평]

세간의 부질없는 명성을 탐한다는 말은 어떤 사람의 시에, “기러기 하늘 저 끝으로 날아갔어도 자취는 모래에 남고, 사람은 황천으로 떠나갔어도 그 이름은 집안에 남아 있네”280)라고 한 취지와 같다.

세간의 이익을 애써 구한다는 말은 어떤 사람의 시에, “온갖 꽃에서 채취하여 꿀을 만들고 났더니, 누구 입 달게 하려고 쓰라린 고생 무릅썼는지 알지 못하겠네”281)라한 뜻과 같다.

헛된 공부로 몸만 수고롭게 하는 꼴이라는 것은 얼음을 깎아 조각품을 만들려는 것처럼 불필요한 기교일 뿐이라는 뜻이다.282)

업의 불길에 땔나무만 더하는 꼴이라는 말은 거칠고 낡아빠진 색이나 향은 탐욕의 불길을 더욱 치성하게 돋우는 도구가 될 뿐이라는 뜻이다.283)

 

貪世浮名者, 有人詩云,“ 鴻飛天末迹留沙, 人去黃泉名在家.”
營求世利者, 有人詩云,“ 采得百花成蜜後, 不知辛苦爲誰甛.”
枉功勞形者, 鑿氷雕刻, 不用之巧也.

業火加薪者, 麤弊色香, 致火之具也.

 

 

278)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쫓아 이름만 화려한 명예를 구하는 것은 마치 향을 살라 사람들에게 그 향을 맡게 하기 위한 것과 같다.

그러나 향은 스스로를 불태워 향기를 내는 것이니, 어리석은 사람이 세속의 명예를 탐하느라 도의 진제(眞諦)를 지키지 못하는 꼴이다.

이름만 화려한 명예는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재앙이니 그 회한은 나중에 남게 된다.’”

(『四十二章經』 大17 p.723a22.

佛言, ‘人隨情欲求華名, 譬如燒香, 衆人聞其香.

然香以熏自燒, 愚者, 貪流俗之名譽, 不守道眞.

華名危己之禍, 其悔在後時.’);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쫓아 명성을 구하지만, 명성이 뚜렷이 드러나는 찰나에 몸은 이미 늙어버린다.

세간에 길이 남을 명성을 탐하면서 도를 배우지 않는 것은 헛된 공부로 몸만 수고롭게 하는 꼴이다.’”

(『四十二章經註』 卍59 p.73b7.

佛言, ‘人隨情欲, 求於聲名, 聲名顯著, 身已故矣.

貪世常名, 而不學道, 枉功勞形.’)
279) “청정한 계를 받아 지니는 자는 물건을 팔거나 교환하거나 논밭과 집 등을 소유하거나 집에서 부리는 사람이나 노비·축생 등을 길러서는 안 된다.

일체의 가산과 재보를 모두 마땅히 멀리하기를 마치 불구덩이를 피하듯이 해야 한다.”
(『佛垂般涅槃略說敎誡經』 大12 p.1110c22.

持淨戒者, 不得販賣貿易, 安置田宅, 畜養人民奴婢畜生.

一切種殖, 及諸財寶, 皆當遠離, 如避火坑.);

“세간의 이익을 애써 구하는 것은 업의 불길에 땔나무를 더하는 꼴이요, 뜻을 무위에 두고자 한다면 보
배와 같은 계율과 비교할 대상이 없다.”

(『佛遺敎經註』 卍59 p.12b5. 營求世利, 業火加薪, 志存無爲, 戒珠絕類.)

280) 누구의 시인지 미상이다.
281) 당나라 말기 때 시인 나은(羅隱 833~909)의 「咏蜂詩」에 나오는 구절.

여기에서는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를 꿀을 모아 허망하게 사람의 입만 달게 하는 벌에 비유했다.

“평지와 산 어느 것이 높은지 따지지 말지니,

한량없는 풍광이 세상을 온통 덮고 있느니라.

온갖 꽃에서 채취하여 꿀을 만들고 났더니,

누구 입달게 하려고 쓰라린 고생 무릅썼는지 알지 못하겠네.”

(不論平地與山尖,

無限風光盡被占.

采得百花成蜜後,

不知辛苦爲誰甜.)
282) 얼음 조각이 쉽게 녹아버리듯이 허망하다는 비유.
283) 『法華經』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를 요약하여 해설로 취한 것이다.

“그대들은 삼계의 불타는 집에 머물러 살기를 좋아하지 말지니, 거칠고 낡아빠진 색·성·향·미·촉을 탐내지 마라. 만약 탐착하여 애착을 일으키면 곧 그것에 불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속히 삼계로부터 벗어나면 성문이든 벽지불이든 불승이든 그 삼승 중 하나를 얻게 되리라.”

(『法華經』 권2 大9 p.13b10.

汝等, 莫得樂住, 三界火宅, 勿貪麤弊色聲香味觸也. 若貪著生愛, 則爲所燒.

汝速出三界, 當得三乘, 聲聞辟支佛佛乘.)

 

 

 

60

 

명예와 이익을 좇는 납자는 초야에 묻혀 사는 은둔자나 시골의 천한 사람만도 못하다.

 

名利衲子, 不如草衣野人.

 

 

[평1]

금륜성왕284)의 지위도 헌신짝처럼 버리고 설산으로 들어가는 것285)은

천분의 세존이 태어나도 변함이 없는 법도인데,

말세에 양의 몸에 범의 가죽을 뒤집어 쓴286) 듯한 무리들은

염치도 알지 못한 채 형세를 살피고 권세를 따르며 남몰래 아첨하여 총애를 받으려 하는구나.

아, 이러한 현상들이 그 증거가 아닌가!

 

唾金輪, 入雪山,

千世尊, 不易之軌則,

末世羊質虎皮之軰,

不識廉耻, 望風隨勢, 陰媚取寵.

噫, 其懲也夫!

 

 

[평2]
마음이 세간의 이익으로 물든 자들은 권문세가에 아부하고 세상에 떠도는 헛된 말287)만 쫓아다니다가 도리어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고 말 것이다.

이러한 납자들을 (범의 가죽을 뒤집어쓴) 양에 비유한 까닭은 이를 입증할 만한 여러 가지 행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징야부’288)라는 세 글자로써 결론을 맺은 것이다.

이 세 글자는 『장자』에 나온다.

 

心染世利者, 阿附權門, 趨走風塵, 返取笑於俗人.

此衲子以羊質, 證此多行.

以懲也夫, 三字結之.

此三字, 文出莊子.

 

 

284) 金輪聖王. S:Cakra-varti-rājan, P:rājā-cakkavattin, T:hkhor-los sgyur-bahi rgyal-po.
금륜을 가지고 세계(4대주)를 통치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서 금륜성제(金輪聖帝)·금륜적자(金輪嫡子)라고도 한다.
285) “우리 부처님이신 세존께서 금륜성왕의 지위를 버리시고 설산에서 6년 동안 고행하시다가 한밤에 샛별을 보고 도를 깨달으신 것 또한 이 일대사의 본원을 깨달은 것이다.”

(『禪要』 「除夜小參」 卍122 p.717b8. 吾佛世尊, 捨金輪王位, 雪山六年苦行, 夜半見明星悟道, 亦是悟者一大事之本源.);『虛堂語錄』 권2 大47 p.998c5 참조.

286) 양질호피(羊質虎皮). ‘외양은 화려하지만 내실은 빈약하다’ 또는 ‘본질이 바뀌지 않는 한 변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성(姓)을 공(孔)이라 하고 자를 중니라 하며, 공자 문하에 들어가 그 본채에 올라가서는 공자의 책상에 기대어 앉고 공자의 옷을 입는다면 그 사람을 공자라 할 수 있습니까?’

‘그 겉모습은 그럴 듯하지만 바탕은 아니다.’

‘바탕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양은 그 몸에 호랑이 가죽을 씌워 놓아도 풀을 보면 좋아하며 뜯어 먹고, 승냥이를 만나면 두려워 떨며 자신이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것과 같다.’”

(『法言』 「吾子」.

或曰, ‘有人焉, 自姓孔而字仲尼, 入其門, 升其堂, 伏其几, 襲其裳,則可謂仲尼乎?’

曰, ‘其文是也, 其質非也.’

敢問質.

曰, ‘羊質而虎皮, 見草而說, 見豺而戰, 忘其皮之虎也.’)
287) 풍진(風塵). 유언비어와 같다.
288) 懲也夫.

“어리석은 군주와 어지러운 신하들 사이에 있으면서 고달프지 않고자 하니 어찌 될 법한 일인가!

이는 비간(比干)이 상(商)의 주왕(紂王)에게 직간하다가 심장이 도려내진 일과 비교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莊子』 「山木」.

今處昏上亂相之間, 而欲無憊, 奚可得邪!

此比干之見剖心, 懲也夫.)

 

 

 

 

61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슨 까닭에 도적이 내 옷을 빌려 입고서 여래라는 이름을 팔며 가지가지 업을 짓는단 말인가!” 289)

 

佛云,“

云何賊人, 假我衣服, 裨販如來, 造種種業!”

 

 

[평1]
말법비구290)를 가리키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으니, 조서승,291) 아양승, 292) 독거사,293)

지옥의 찌꺼기,294) 가사 입은 도적295) 등이 그것이다.

아, 부처님이 294)그렇게295) 말씀하신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구나!

 

末法比丘, 有多般名字, 或鳥鼠僧, 或啞羊僧, 或禿居士,

或地獄滓, 或被袈裟賊.

噫, 其所以以此!

 

 

289) 『楞嚴經』 권6 大19 p.132b11.
290) 末法比丘. 말법시대에 태어난 비구로서 정법시대나 상법시대의 수행자에 비해 신행력이나 근기가 약한 비구를 가리키는 말.
291) 鳥鼠僧.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하는 ‘박쥐 같은 스님’이라는 말. 정체가 명확하지 않아 출가자라고 단정할 수 없는 자나 혹은 스님 자신이 스스로를 낮추어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비승비속(非僧非俗) 또는 반승반속(半僧半俗)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반승(半僧)이라고도 한다.

“슬프다! 6척의 몸은 있으되 지혜가 없으니 부처님께서 이를 두고 어리석은 중[癡僧]이라 하였으며,

세 치 혀는 있으되 설법하지 못하니 부처님께서 이를 두고 벙어리 양과 같은 중이라 하였으며,

중인가 하면 중도 아니요 속인인가 하면 속인도 아니니

부처님께서 이를 두고 박쥐 같은 중이라 하고 또 대머리거사라 하였다.”

(『緇門警訓』 권2 大48 p.1049c23.

悲夫! 有六尺之身, 而無智慧, 佛謂之癡僧,

有三寸舌, 而不能說法, 佛謂之啞羊僧,

似僧非僧, 似俗非俗,

佛謂之鳥鼠僧, 亦曰, 禿居士.)
292) 啞羊僧. 군양승(群羊僧)이라고도 한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무능한스님을 비난하여 부르는 말.

“무엇을 아양승이라 하는가? 비록 계는 범하지 않았으나 둔하여 지혜가 없고 좋고 나쁨을 가릴 줄 모르고 일의 경중도 알지 못하며 죄 있고 죄 없음도 알지 못하여

혹 승가에 일이 발생하여 두 사람이 다투면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하지 못하고 잠잠히 말이 없는 것이

마치 사람이 죽여도 아무 소리 내지 못하는 흰 양과 같은 이를 아양승이라 한다.”

(『大智度論』 권3 大25 p.80a15.

云何名啞羊僧? 雖不破戒, 鈍根無慧, 不別好醜, 不知輕重, 不知有罪無罪,

若有僧事, 二人共諍, 不能斷決, 默然無言,

譬如白羊, 乃至人殺, 不能作聲, 是名啞羊僧.)

293) 禿居士. 독인(禿人)·독노(禿奴)·독두거사(禿頭居士)·독두사문(禿頭沙門)이라고도 한다.

‘독’은 머리털이 빠진 것, 곧 머리카락이 없다는 말이다. 머리털을 깎아 겉모습은 스님처럼 보이지만 실제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속인과 다를 것이 없을 뿐 아니라, 계율 또한 지키지 않아서 반승반속(伴僧半俗) 혹은 비승비속(非僧非俗)인 파계승을 가리키는 말이다.

“계율을 무너뜨리고 법을 지키지 않는 이를 독거사라고 한다.”

(『大般涅槃經』 권3 大12 p.383c18. 破戒不護法者, 名禿居士.)
294) 지옥재(地獄滓). 지옥 끝에 떨어져서도 한낱 그곳의 쓰레기에 불과할 정도로 죄과가 무겁다는 말.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권세와 재물에 연연하는 추잡하기 짝이 없는 속물이라는 뜻이다.

막돼먹은 부류의 장로들은 서신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여기저기로 (절의 살림을 도맡아하는) 원주 자리를 분망히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원주 자리를 얻게 되자마자

곧바로 좋은 날을 가려 취임하고는 ‘나는 장로다’라 떠벌이며 방장에서 마음대로 쾌락을 누려대니,

이러한 부류의무리들을 지옥의 찌꺼기라 부른다.”

(『緇門警訓』 권6 「黃龍死心新禪師小參」 大48 p.1071b6.

有一般破落戶長老, 馳書達信, 遮邊討院住, 那邊討院住, 纔討得院住,

便揀箇好日入院. 又道, ‘我是長老.’ 方丈裏自在受快活.

遮般底, 喚作地獄滓.)
295) 피가사적(被袈裟賊). 가사를 입고 겉모습만 비구로 가장하여 탐욕을 누리고 악행을 일삼는 무리.

“만약 하고 싶은 대로 즐거움을 누리며 항상 음식에나 탐착한다면 가사 입은 도적에 불과하니, 이런 사람은 비구라 하지 않는다.”

(『正法念處經』 권49 大17 p.292c15. 若心憙樂欲, 常貪於飲食, 是著袈裟賊, 不名爲比丘.);

“그 마음이 항상 아첨과 속임수를 일삼고 언제나 맛난 음식을 탐하며 욕심나는 일에 즐겨 집착한다. 이렇게 나쁜 짓을 저지르는 비구를 가리켜 가사 입은 도둑이라 한다.”

(『諸法集要經』 권9 大17 p.507c12. 其心常諂詐, 常貪妙飲食, 樂著於欲事. 此惡行比丘, 名著袈裟賊.)

 

 

[평2]

여래의 이름을 파는 자는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고296) 죄나 복의 결과도 없다고 배척하며,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을 물이 끓어오르듯 맹렬하게 지어대고, 애증을 번갈아 일으키니, 참으로 애처롭게 여길 만한 일이로다.
스님의 본분도 빗겨가고 속인의 신분도 피해가니 박쥐[鳥鼠僧]라 하고,

혀는 있으되 법을 설하지 못하니 벙어리 양[啞羊僧]이라 하고,

겉모습은 스님이지만 마음속은 속인이니 까까머리거사[禿居士]라 하고,

죄가 무거워 돌이킬 수 없으니 지옥의 찌꺼기[地獄滓]라 하고,

부처님을 팔아서 생계를 도모하니 가사 입은 도적[被袈裟賊]이라 하는 것이다.

특히 가사 입은 도적이라는 말이 이 같은 여러 가지 명칭의 뜻을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이차(以此:이러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구나)’297)라는 두 글자로 결론을 지었는데, 이 두 글자는 『노자』에 나온다.

 

裨販如來者, 撥因果排罪福, 沸騰身口, 迭起愛憎, 可謂愍也.
避僧避俗, 曰鳥鼠;

舌不說法, 曰啞羊;

僧形俗心, 曰禿居士;
罪重不遷, 曰地獄滓;

賣佛營生, 曰被袈裟賊.

以被袈裟賊, 證此多名.

以此二字結之, 此二字, 文出老子.

 

 

296) 발인과(撥因果). phala-hetv-apavādin.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는 것. 연기(緣起)의 근거를 부정하는 삿된 견해이며, 모든 것은 단멸하여 상속되지 않는다고 집착하는 단견(斷見)이다. 발무인과(撥無因果)라고도 한다.

“만일 인과의 도리를 부정한다면 이것은 사견이며, 이것을 헤아려 도라 여긴다면 계취(戒取)이고, 이를 헤아려 열반이라 여긴다면 견취(見取)이다.”

(『摩訶止觀』 권5 大46 p.66a20. 若撥因果是邪見, 計此爲道是戒取, 計爲涅槃是見取.);

“아무것도 없는 공이라는 견해로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면 크게 휩쓸려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니 재앙을 불러
들일 뿐이다.”

(『證道歌』 大48 p.396a27. 豁達空撥因果, 莽莽蕩蕩招殃禍.)
297) 『老子』 21, 36, 54, 57장 등에 보인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곧 앞에서 서술한 말들을 근거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62

 

아! 부처님의 제자들의 한 벌 옷과 한 그릇 밥에도 농부의 피땀과 직녀의 노고가 깃들지 않음이 없거늘

도안(道眼)을 밝히지 못한다면 어떻게 마음껏 쓸 수 있겠는가!298)

 

於戱! 佛子, 一衣一食, 莫非農夫之血, 織女之苦,

道眼未明, 如何消得!

 

 

[평]
『경덕전등록』에 “어떤 도인이 도안을 밝히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신 몸을 버섯으로 바꾸어 보시 받은 은혜를 갚았다”299)고 한다.

 

傳燈,“ 一道人, 道眼未明故, 身爲木菌, 以還信施.”

 

 

298) 소득(消得)은 ‘구하다’ 또는 ‘향유하다’는 말로서 여기서는 ‘보시물을 어떻게 마음껏 쓸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에서 시주자의 은혜를 갚을 수 없다는 뜻으로 쓰였다. 得은 허사이다.

“편담산효료(匾檐山曉了)화상은 일생토록 상률(橡栗)을 주워 삶아 먹었고, 영가대사는 호미에 붙은 채소 부스러기조차 먹지 않았으며, 당나라 때 혜휴법사는 30년 동안 신 한 켤레를 수없이 기우고 꿰매 신었는데 부
드러운 땅을 밟을 때는 맨발로 다녔다.

다른 사람이 신심으로 보시한 것을 헛되이 손실할까 염려하여 그 시주물을 함부로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주자들이 모두 그들 처자의 입을 줄여 그대들에게 공양한 것이니 복을 받아들이고 죄를 참회해야 한다.

그대들이 하루 어느 시각에나 마음껏 쓰는 갖가지 상주물은 모두 다른 사람들의 노고에서 나온 것인데,

배고프지 않아도 먹고 춥지 않아도 입으며 더럽지 않아도 씻고 피곤하지 않아도 자니 도안을 밝히지도 못하여 번뇌를 씻지 못했는데 어떻게 시주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옛 성인이 ‘도업을 성취하라고 시주한 것인데 도업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시주의 은혜를 갚을 것인가!’(「慈恩法師出家箴」)라 한 것이다.”

(『緇門警訓』 권7 「慈受深禪師小參」 大48 p.1076b28.

匾檐山和尚, 一生拾橡子煮喫, 永嘉大師, 不喫钁頭下菜, 高僧 惠休, 三十年著一緉鞋, 百補千綴, 遇軟地行則赤脚. 恐損他信施, 信心物難消.

他總是妻子口中減削, 將來供養爾了, 便要邀福懺罪.

爾十二時中種種受用, 盡出他人之力,

未饑而食, 未寒而衣, 未垢而浴, 未困而眠, 道眼未明, 心漏未盡, 如何消得.

故古德云, ‘爲成道業施將來, 道業未成爭消得.’)

299) “존자가 법을 깨닫고 나서 후에 비라국에 이르고 보니 그곳에 범마정덕이라는 장자가 있었다.

어느 날 정원의 나무에서 큰 버섯이 났는데 맛이 매우 좋았다.
오직 장자와 그의 둘째 아들 라후라만이 여러 번 그것을 따서 먹었는데 따는 대로 다시 자라나고 그것이 다하면 또 다시 자라나왔으나, 다른 식구들은 아무도 그것을 볼 수조차 없었다.

존자가 이와 관련된 과거세의 인연을 알고 마침내 그 집에 이르니, 장자가 존자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당신 집에서 과거에 어떤 비구에게 공양했으나 이 비구가 도안을 밝히지 못하여 보시의 은덕만 헛되이 입
은 까닭에 버섯이 되어 보답했던 것입니다.

오로지 당신과 아들〈『전법정종기』에는 둘째 아들이라 되어 있다〉만이 정성으로 공양하였기에 그 버섯을 따서 맛볼 수 있고 다른 식구들은 그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존자가 장자에게 ‘장자의 나이는 몇입니까?’라고 묻자 ‘일흔 아홉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존자가 게송으로 읊었다.

‘도를 깨치려고 했으나 도를 통달하지 못하여, 다시 몸을 받아 보시를 갚았다네.

당신의 나이 여든 하나가 되면, 이 나무에는 버섯이 나지 않으리라.’”
(『景德傳燈錄』 권2 「迦那提婆傳」 大51 p.211b8.

尊者旣得法, 後至毘羅國, 彼有長者, 曰梵摩淨德.

一日, 園樹生大耳如菌, 味甚美.

唯長者與第二子羅睺羅, 多取而食之, 取已隨長, 盡而復生, 自餘親屬, 皆不能見.

時尊者知其宿因, 遂至其家, 長者問其故. 尊者曰,

‘汝家昔曾供養一比丘, 然此比丘道眼未明, 以虛霑信施故, 報爲木菌.

惟汝與子〈正宗云, 與次子.〉 精誠供養, 得以享之, 餘卽否矣.’

又問, ‘長者年多少?’ 答曰, ‘七十有九.’
尊者, 乃說偈曰,

‘入道不通理, 復身還信施.

汝年八十一, 此樹不生耳.’)

 

 

 

63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털가죽을 뒤집어쓰고 뿔을 이고300)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고자 하는가?

신도가 신심으로 시주한 것을 헛되이 받아서 쓰는 자들을 가리킨다.301)

어떤 자는 배고프지 않아도 먹고 춥지 않아도 입으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심보란 말인가!

이는 모두 눈앞의 즐거움이 바로 다음 생의 괴로움이 된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故曰,

“ 要識披毛戴角底麽?

卽今虛受信施者是.

有人未飢而食, 未寒而衣, 是誠何心哉!

都不思目前之樂, 便是身後之苦也.”

 

 

[평]
『대지도론』에 “어떤 도인이 다섯 알의 조 때문에 소의 몸을 받고 태어나서는 온몸을 바쳐 일해 갚고, 죽어서는 가죽과 살로써 갚았다”302)는 일화가 있다.

신심으로 보시한 시주물 헛되이 받아쓰면 그 인과의 보응은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리라.30

 

智論,“ 一道人, 五粒粟, 受牛身, 生償筋骨, 死還皮肉.”

虛受信施, 報應如響.

 

 

300) 피모대각(披毛戴角). 여기서는 죽은 다음 축생으로 윤회한다는 말로 쓰였다.

또는 윤회의 굴레에 떨어져 중생을 제도하거나 신도의 보시를 받아 수행한 은혜를 갚고자 밭을 가는 소가 된다는 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이와는 달리 보통은 선종 식의 보살행을 대표하는 용어로 쓰이며, ‘사람과 다른 류의 존재가 되어 살아간다’라는 뜻의 이류중행(異類中行)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다. 조산본적(曹山本寂)이 피모대각을 이류(異類)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했던 평가(『曹山語錄』 大47 p.543c12)가 그것이다. “그대가 만약 찰나마다 마음을 쉬지 못한다면 저 무명의 나무에 올라가거나 6도와 4생이라는 윤회의 굴레에 떨어져 털가죽을 뒤집어쓰고 뿔을 이고 살아갈 것이다.”

(『臨濟語錄』 大47 p.500c22. 爾若念念 , 心歇不得, 便上他無明樹, 便入六道四生, 披毛戴角.);

“그런 까닭에 고양이와 물소가 전혀 모르는 것만 못하다. 그들은 부처님도 모르고 조사도 모르며 보리나 열반, 선악이나 인과도 모른다.

그들은 다만 배가 고프면 풀을 뜯어먹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신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분별하지 못하더라도 걱정하지 않는다.

‘계교분별을 하지 않기 때문에 본분사를 안다’라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가?

털가죽을 뒤집어쓰고 뿔을 이고 쟁기를 끌면서도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어야 비로소 깨달음에 조금 근접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禪林僧寶傳』 「曹山本寂傳」 卍137 p.445a18.
所以, 不如黧奴白牯, 兀兀無知. 不知佛, 不知祖, 乃至菩提涅槃, 及以善惡因果.

但饑來喫草, 渴來飮水. 若能恁麽, 不愁不成辦. 不見道,

‘計較不成, 是以知有.’

乃能披毛戴角, 牽犁拽耒, 得此便宜, 始較些子.)

301) “털가죽을 뒤집어쓰고 뿔을 이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고자 하는가? 그대들 중에서 평상시에 함부로 주재하려고 드는 자가 바로 그이다.”

(『緇門警訓』 권7 「法昌運禪師小參」 大48 p.1077c23. 爾要識披毛戴角底麽? 便是爾尋常亂作主宰者是.)

302) “또한 『무량수경』에 따르면 이렇게 전한다.

‘교범발제가 과거세에 비구였을 때 남의 조밭 가에서 조 한 줄기를 따서 얼마나 익었는지 살펴보다가 낟알 몇 개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5백 번 태어날 때마다 소가 되어 밭을 갈면서 그 빚을 갚았다.’”

(『諸經要集』 권9 大54 p.83a12. 又依無量壽經云,

‘憍梵波提, 過去世, 曾作比丘, 於他粟田邊, 擿一莖粟, 觀其生熟, 數粒墮地, 五百世作牛償之.’);

“예를 들면 교범발제는 전생에 소로 태어났던 업의 습기 때문에 항상 먹은 것을 되새김질했다.”

(『大智度論』 권27 大25 p.260c22. 如憍梵鉢提, 牛業習故, 常吐食而呞.)

 

 

 

64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차라리 뜨겁게 달군 쇠로 몸을 휘감을지언정 신도들이 보시하는 옷을 받지 말며,

차라리 쇳물이 입에 퍼부어지는 고통을 받을지언정 신도들이 보시하는 음식을 받지 말며,

차라리 쇳물이 끓는 솥에 들어가 삶겨지는 고통을 받을지언정 신도들이 보시하는 거처에 살지 마라.”303)

 

故曰,

“ 寧以熱鐵纏身, 不受信心人衣;

寧以洋銅灌口, 不受信心人食;

寧以鐵鑊投身, 不受信心人房舍等.”

 

 

[평]
『범망경』에 “파계한 몸으로 신도들이 보시하는 갖가지 공양과 시주물을 받아서는 안 되니,

보살로서 이러한 서원을 세우지 않는다면 경구죄304)를 짓는 것이 된다”305)라고 하였다.

 

梵網經云, “不以破戒之身, 受信心人, 種種供養, 及種種施物,
菩薩若不發是願, 則得輕垢罪.”

 

 

303) 『涅槃經』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였다.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서원하여 ‘차라리 뜨겁게 달군 쇠로 이 몸을 휘감을지언정 파계한 몸으로는 정녕 신심으로 보시한 시주의 의복을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한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또 서원하여 ‘차라리 이 입으로 뜨겁게 달구어진 쇳덩어리를 삼킬지언정 파계한 입으로는 정녕 신심으로 보시한 시주의 음식을 먹지 않겠습니다’라고 한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다시금 서원하여 ‘차라리 이 몸을 뜨겁게 달군 쇠 위에 누일지언정 파계한 몸으로는 정녕 신심으로 보시한 시주의 침상과 와구를 받지않겠습니다’라고 한다.”

(『大般涅槃經』 권11 「聖行品」 大12 p.433a25.

復次, 善男子, 菩薩摩訶薩, 復作是願, ‘寧以熱鐵周匝纏身, 終不敢以破戒之身, 受於信心檀越衣服.’
復次, 善男子, 菩薩摩訶薩, 復作是願, ‘寧以此口吞熱鐵丸, 終不敢以毀戒之口, 食於信心檀越飲食.’

復次, 善男子, 菩薩摩訶薩, 復作是願, ‘寧臥此身大熱鐵上, 終不敢以破戒之身, 受於信心檀越床敷臥具.’);

中阿含1 『木積喻經』 大1 pp.425a16~427a8 참조.

304) 輕垢罪. S: dusk-ārta, dukkata, lahukapatti. 음사어는 돌길라(突吉羅). 청정행(淸淨行)을 더럽히는 허물로서 비교적 가벼운 죄에 해당하며, 무거운 죄에 속하는 바라이죄(波羅夷罪)와 구별된다.
305) 『梵網經』 권하 大24 p.1007c7~c15.

 

 

 

65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도를 닦는 사람은 음식 먹는 것을 마치 독약을 먹는 것처럼 하고

시주물 받는 것을 마치 화살에 맞는 것처럼여겨야 하니,

후한 공양과 듣기 좋은 말은 도를 닦는 사람이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306)

 

故曰,

“道人, 進食如進毒,

受施如受箭,

幣厚言甘, 道人所畏.”

 

 

[평]
음식 먹는 것을 마치 독약을 먹는 것처럼 하라는 것은 도안(道眼)을 상실하지 않을까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고,

시주물 받는 것을 마치 화살에 맞는 것처럼 여겨야 한다는 것은 도과(道果)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307)

 

進食如進毒者, 畏喪其道眼也;

受施如受箭者, 畏失其道果也.

 

 

306) 『緇門警訓』 권7 「慈受深禪師小參」 大48 p.1076c20 참조.

307) 도안은 불법의 진실을 보는 눈, 도과는 불도 수행의 결과로서 깨달음이나 열반 등을 말한다.

 

 

 

66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도를 닦는 사람은 마치 칼을 가는 한 덩어리 숫돌과도 같아서 장씨도 와서 갈고 이씨도 와서 갈며 계속해
서 칼을 갈아 대니 칼을 가는 사람의 칼은 갈수록 예리해지지만 자신의 돌은 점차로 닳아 없어지고 만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도리어 다른 사람이 자신의 숫돌에 갈러 오지 않는다고 싫어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
이로다.”308)

 

故曰,

“修道之人, 如一塊磨刀之石, 張三也來磨, 李四也來磨, 磨來磨去, 別人刀快, 而自家石漸消.

然有人更嫌他人 不來我石上磨, 實爲可惜.”

 

 

[평]
이 도인 같은 사람은 평생토록 바라는 것이 단지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는 데 있을 뿐이다.

 

如此道人, 平生所向, 只在溫飽.

 

 

308) 『緇門警訓』에는 위 『선가귀감』 66의 내용에 이어 65순으로 서술되어 있다.

『緇門警訓』 권7 「慈受深禪師小參」 大48 p.1076c16에

“在出家人, 如一塊磨刀石, 一切人要刀快便來, 爾石上磨, 張三也來磨, 李四也來磨, 磨來磨去, 別人刀快, 自家
石漸消薄. 有底更嫌他人不來我石上磨, 有甚便宜處.”라고 한 부분 참조.

 

 

 

67

 

그러므로 옛말에도 있듯이

“삼악도(三惡途)의 고통은 고통도 아니요
가사를 걸치고도 다음 생에 사람의 몸을 잃는 것이야말로 고통이다”309)라고 하는 것이다.

 

故, 古語亦有之曰,

“ 三途苦未是苦,

袈裟下失人身, 始是苦也.”

 

 

[평]
옛사람이 “금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시주가 베푼 한 방울의 물조차 받아먹어서는 안 된다”310)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가사를 걸치고도 다음 생에 사람의 몸을 잃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불자여! 불자여! 분발하고 마음을 떨쳐 일으켜라.

이 장(62~67)은 ‘아[於戱]’라고 한 말에서 뜻을 일으켜 ‘옛말[古語]’로 결론을 짓고, 중간 중간에 허다하게 ‘고왈(故曰)’이라는 글자로 근거가 되는 실마리를 끌어내었으니, 이 또한 일단의 문장을 구성하는 방법이다.

 

古人云,“ 今生未明心, 滴水也難消.” 此所以袈裟下失人身也.
佛子! 佛子! 憤之激之.
此章, 始起於一於戱, 終結於一古語, 中間紬繹許多故曰字, 亦一段文法也.

 

 

309) 『禪林寶訓』 권1 大48 p.1021b24(三途地獄受苦者, 未是苦也. 向袈裟下失却人身, 實爲苦也.) 참조.
310) “그대가 천 일 동안 지혜를 배우는 것이 단 하루 동안 도를 배우는 것만 못하니, 만약 도를 배우지 않는다면 한 방울의 물조차 받아먹어서는 안 될 것이다.”

(『傳心法要』 大48 p.384a10. 汝千日學慧, 不如一日學道, 若不學道, 滴水難消.)

 

 

 

 

68

 

아, 이 몸이여!

아홉 개의 구멍에서 항상 더러운 기운이 흐르고, 무수히 많은 부스럼을 한 조각 얇은 껍데기가 싸고 있구나.311)

또한 ‘가죽 주머니에 가득 찬 똥이요 고름과 피의 덩어리’312)라고 하였으니, 그 악취와 더러움은 전혀 가치가 없어 탐내거나 아까워할 것이 없다.

하물며 한평생 부양해 준 은혜를 한숨에 저버리는 것을 어찌하랴!313)

 

咄哉, 此身!

九孔常流, 百千癰疽, 一片薄皮.

又云,‘ 革囊盛糞, 膿血之聚.’ 臭穢可鄙, 無貪惜之.

何況百年將養, 一息背恩!

 

 

[평1]
이상에서 보인 모든 업은 하나같이 이 몸에서 따라 나온 것이니 소리 높여 들려준 꾸짖음에는 깊은 경계의 뜻이 들어 있다.

이 몸은 모든 애욕의 근본이니 그것이 허망하다고 깨우치면 모든 애욕은 저절로 제거되겠지만, 그것에 빠진다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허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특별히 밝힘으로써 도를 닦는 바른 눈을 뜨게 하려는 것이다.

 

上來諸業, 皆由此身, 發聲叱咄, 深有警也.

此身, 諸愛根本, 了之虛妄, 則諸愛自除;如其耽着, 則起無量過患.

故於此特明之, 以開修道之眼也.

 

 

[평2]
몸을 구성하는 사대(四大)에는 주인이 없으므로314) 한편으로는 네 가지 원수에 의지한다 하고,

사대는 길러준 은혜를 저버리므로315) 한편으로는 네 마리 뱀316)을 기르는 것이라 한다.

내가 허망함을 깨우치지 못했으므로 타인에게 성내고 오만하게 굴며,

타인 또한 허망함을 깨우치지 못했으므로 나에게 성내고 오만하게 구니, 두 귀신이 하나의 시체를 두고 다투는 꼴과 같다.

하나의 시체가 지니는 본질은 물거품 덩어리317)라고도 하고, 꿈덩어리라고도 하며, 고통 덩어리라고도 하고, 똥 덩어리라고도 하니, 빨리 썩을 뿐만 아니라 매우 더럽기도 하다.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항상 눈물과 침이 흐르고, 아래 두 구멍에서는 항상 똥과 오줌이 흐른다. 그러므로
하루 어느 시각에나 몸을 깨끗이 하고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

행동거지가 거칠고 깨끗하지 못한 자들은 선한 신들[善神]이 반드시 등을 돌릴 것이다.

『인과경』에는 “깨끗하지 못한 손으로 경전을 잡거나 부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침을 뱉는 자는 반드시 측간의 벌레로 태어나는 과보를 받게 된다”고 하였고,

『문수경』에는 “대소변을 볼 때는 목석과 같은 몸가짐을 하여 말하거나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라.

또한 벽에 낙서하지 말고, 변기에 가래침을 뱉지 마라”318)고 하였다.

또한 “측간에 들어갔다 나와서 씻지 않은 자는 선상(禪床)에 앉아서는 안 되고, 보전(寶殿:佛殿)에 올라가서도 안 된다”319)라고 하였다.

 

評曰 四大無主故, 一爲假四寃;

四大背恩故, 一爲養四蛇.

我不了虛妄故, 爲他人也嗔之慢之;

他人亦不了虛妄故, 爲我也 嗔之慢之, 若二鬼之爭一屍也.

一屍之爲體也, 一曰泡聚, 一曰夢聚, 一曰苦聚, 一曰糞聚, 非徒速朽, 亦甚鄙陋.

上七孔, 常流涕唾, 下二孔, 常流屎尿. 故須十二時中, 潔淨身器, 以參衆數.

凡行麤不淨者, 善神必背去.

因果經云, “將不淨手執經卷, 在佛前涕唾者, 必當獲厠蟲報.”

文殊經云,“ 大小便時, 狀如木石, 愼勿語言作聲.

又勿畵壁書字, 又勿吐痰入厠中.”

又云, “登厠不洗淨者, 不得坐禪床, 不得登寶殿.”

 

 

311) 이 문장은 전체적으로 『大般涅槃經』에서 대의를 취했다. 아홉 개의 구멍은 두눈·두 귀·두 콧구멍·입·항문·요도 등을 가리킨다. 항상 흐르는 더러운 기운[流]이 있기 때문에 구류(九流) 또는 구루(九漏)라고 하며, 그러한 아홉 기관을 구규(九竅)·구입(九入)·구창(九瘡) 등이라고도 한다.

“이 몸은 청정하지 못하여 아홉 개의 구멍에서 항상 더러운 것이 흐른다. 이 몸은 성(城)과 같아서 피와 살과 근육과 뼈는 껍데기(피부)로 싸여 있다.”

(『大般涅槃經』 권1 大12 p.367b1. 是身不淨, 九孔常流. 是身如城, 血肉筋骨, 皮裹其上.);

승량(僧亮)은 이 구절을 부정관(不淨觀)의 하나로 해설했다. 『大般涅槃經集解』 권2 大37 p.387c27 참조.
312) 『禪宗永嘉集』 「淨修三業」 大48 p.388c1. 전등(傳燈)의 『永嘉集註』 권상 卍111 p.419a2에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가죽 주머니에 가득 찬 똥은 장과 위에 있는 찌꺼기를 가리키고, 고름과 피의 덩어리란 가죽 주머니 속에 있는 것들을 가리킨다.”(革囊盛糞, 指腸胃中之所有也;膿血之聚, 指革囊中之所有也.);

“가죽 주머니에 가득 찬 똥은 청정한 것이 아니다.”

(『方廣大莊嚴經』 권9 大3 p.593a17. 革囊盛糞, 非淸淨物.)

313) 먹고 마시며 몸을 유지해온 것을 은혜에 비유하였고, 한순간에 맞이하는 죽음은 그 은혜에 대한 배반으로 보았다.
314) 사대로 구성된 몸을 무아(無我)로 보는 관점이다. 자아 자체도, 자아의 소유도 없으므로 ‘주인이 없다’라고 한다.

“사대가 화합하여 이루어졌으므로 임시로 몸이라 한다. 사대에는 주인이 없기에 몸에도 자아가 없다. 또한 이 병이 일어난 까닭은 모두 자아가 있다고 집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에 대하여 집착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維摩經』 권중 大14 p.544c29.

四大合故, 假名爲身. 四大無主, 身亦無我. 又此病起, 皆由著我. 是故, 於我不應生著.)

315) 사대가 흩어져 종국에는 죽음에 이른다는 말.
316) 네 마리 독사는 사대를 비유한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네 마리 독사와 같다고 관찰하라.”

(『大般涅槃經』 권1 大12 p.367a28. 自觀己身如四毒蛇.);

승량(僧亮)은 이 것을 고관(苦觀)의 하나로 보았다. 『大般涅槃經集解』 권2 大37 p.387c26 참조.
317) “이 육신[色]은 물거품 덩어리와 같아서 알차지 못하고 변함없이 머물지도 않는다.”

(『阿育王經』 권1 大50 p.134b3. 此色如泡聚, 不實不常住.)
318) 이상 경전의 전거는 미상이며, 『緇門警訓』 권9 「登廁規式」 大48 p.1092a14의 말을 근거로 한다. 다만 『文殊舍利問經』 권상 大14 p.492b29에 따르면, 예불(禮佛)할 때나 법문을 들을 때나 대중과 어울려 있을 때나 걸식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대소변을 볼 때 등 여섯 가지 모든 상황에서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하였다.

319) 『緇門警訓』 권9 「登廁規式」 大48 p.1092a1 등에 나오는 말.

 

 

율문(律文)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측간에 들어가는 순간 먼저 반드시 손가락을 세 번 퉁겨서, 오물을 먹고 사는 귀신들을 경각시키고,320) 말
없이 신주(神呪)를 각각 일곱 번 외운다.321)

처음에는 측간에 들어가면서 시행하는 주문[入厠呪]을 외운다. ‘옴 하로다야 사바하!’

다음으로 씻으면서 시행하는 주문[洗淨呪]를 외운다. ‘옴 하나마리제 사바하!’

오른손으로는 물병[淨甁]을 들고 왼손〈넷째 손가락[無名指]을 사용함〉으로 씻는데, 정병의 물[淨水]을 천천히 기울여 꼼꼼하게 씻어야 한다.

그 다음은 손을 씻으면서 시행하는 주문[洗手呪]을 외운다. ‘옴 주가라야 사바하!’

이어서 더러움을 제거하는 주문[去穢呪]322)을 외운다. ‘옴 시리예바혜 사바하!’

마지막으로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한 주문[淨身呪]을 외운다. ‘옴 바아라 놔가닥 사바하!’

이 다섯 가지 신주에는 큰 위덕이 있기 때문에 모든 악한 귀신들이 그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두 손이 묶인 듯 아무 짓도 할 수 없게 된다.

만약 법도에 맞게 그대로 외우고 지니지 않는다면, 설령 일곱 가지 갠지스강의 물로 씻어 금강제(金剛際)323)에 이르더라도 몸이 청정하게 되지 못한다.”

또한 이렇게 말한다. “씻을 때는 반드시 냉수를 사용하되, 손은 주엽나무로 씻어야 하며 톱밥이나 잿가루도 괜찮다.

만약 잿가루를 써서 닦아내지 않으면 촉수(觸水)324)가 손등에 흘러내려서 생긴 지저분한 기운이 그대로 남게 되고, 그 상태로 예불을 하거나 경전을 읽으면 반드시 죄를 받는다.”325)

이렇게 측간에 들어가 씻는 법 또한 도를 닦는 사람이 일상에서 지켜야 할 행실이므로 간략하게 경전의 말씀을 인용하여 여기에 함께 붙여둔 것이다.

 

律云,

“初入厠時, 先須彈指三下, 以警在穢之鬼, 黙誦神呪各七遍.

初誦入厠呪曰, ‘唵 狼嚕陀耶 莎訶 옴 로다아 바하.’
次誦洗淨呪曰,‘ 唵 賀囊密㗚帝 莎訶 옴하나 리뎨 바하.’
右手執甁, 左手〈用無名指〉洗之, 淨水旋旋傾之, 着實洗淨.

次誦洗手呪曰, ‘唵 主迦羅野 莎訶 옴주가라야 바하.’

次誦去穢呪曰, ‘唵 室利曳娑醯 娑縛賀 옴시리예바혜 바하.’

次誦淨身呪曰,‘ 唵 跋於囉 惱迦吒 娑縛賀 옴바 라놔가다 바하.’
此五神呪, 有大威德, 諸惡鬼神聞必拱手.

若不如法誦持, 則雖用七恒河水, 洗至金剛際, 亦不得身器淸淨.”

又云,“ 洗淨須用冷水, 洗手須用皂角, 又木屑灰泥, 亦通.

若不用灰泥, 則觸水淋其手背, 垢穢尙存, 禮佛誦經必得罪〈云云〉.”

此登厠洗淨之法, 亦是道人日用行實故, 略引經語, 幷附于此.

 

 

320) 『釋氏要覽』 권하 大54 p.300a28에서 『三千威儀經』의 설을 인용하여 측간에 들어갈 때에 지켜야 할 25가지 법 중 여섯 번째로 제시된 조목이다. “여섯째, 들어가고 나서는 바로 손가락을 퉁겨야 한다.〈이것은 똥을 먹고 사는 측간 귀신들을 경각하기 위함이다.〉”(六, 已登正彈指.〈此警噉糞諸鬼.〉)
321) 이하에서 측간에 들어가서 외우는 다섯 가지 신주 곧 입측오주(入厠五呪)가 제시된다. 이 입측오주 하나하나에 대하여 일곱 번씩 외운다는 뜻이다.

322) 탐(貪)·진(瞋)·치(癡) 등의 더러움을 제거하여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323) 금륜제(金輪際)·금강륜제(金剛輪際)라고도 한다. 대지(大地)에서 160만 유순(由旬) 아래에 있는 금륜의 바닥을 가리킨다. 또는 뜻이 확장되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마지막까지’, ‘어디까지든지’ 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제(際)는 다하다 또는 끝 등의 뜻이다.
324) ‘觸’은 탁(濁)과 같은 뜻. 뒷물을 할 때 쓰는 물. 그 다음에 쓰는 정수(淨水)와 엄격히 구별된다.

“그때 여러 비구들이 먼저 촉수를 데우고 그 다음에 정수를 데우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먼저 정수를 데우고 그 다음에 촉수를 데워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월법죄(越法罪)를 범하는 것이다.’”

(『有部律雜事』 권10 大24 p.250b4.

時, 諸苾芻, 先煖觸水, 後煖淨水, 佛言, ‘先煖淨水, 後煖觸水. 若不爾者, 得越法罪.’)
325) 『緇門警訓』 권9 大48 p.1092b1에는 『溪堂雜錄』을 인용하여 30년 동안 『華嚴經』을 외워왔던 지초법사(智超法師)에게 어떤 동자가 찾아와서 나눈 다음과 같은 문답이 전한다.

“지초가 동자에게 말했다. ‘어디서 왔느냐?’ ‘오대산에서 왔습니다.’

‘무슨 일로 멀리 이곳까지 왔느냐?’ ‘사소한 일을 전해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들어 보자.’ ‘스님께서 경전을 외우시는 일은 진실로 훌륭하십니다.
다만 측간에 들어가 씻을 때 촉수가 손등에 흘러내리지만 잿가루로 씻어내지 않는 것에 잘못이 있습니다.

사용하는 잿가루는 율에 일곱 번 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두세 차례만 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러운 기운이 계속 남아 있는 것이며, 그대로 예불을 하거나 경을 외우게 되면 모두 죄를 받게 됩니다.’

말을 마치자 동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지초는 부끄럽게 여기며 잘못을 고쳤다.

아는 자들 중에는 ‘이것은 틀림없이 오대산에 계시는 문수보살이 동자로 변하여 나타나 지초에게 경계의 말을 남긴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손을 씻을 때는 반드시 법도에 따라야 함을 알아야 한다. 『인과경』에는 ‘더러운 손을 하고 경을 보면 측간의 벌레로 태어나는 과보를 받게 된다’라고 하였다.”

(超曰, ‘何來?’ 曰, ‘五臺來.’

超曰, ‘何遠至此?’ 曰, ‘有少事欲相導故.’

超曰, ‘願聞.’ 曰, ‘吾師誦經, 固可嘉矣. 但失在登廁洗淨時, 觸水淋其手背, 而未嘗用灰泥洗之.

所用灰泥, 律制七度, 今但二三, 緣此觸尚存, 禮佛誦經, 悉皆得罪.’

言訖不見, 超慚而改過.

識者或曰, ‘此必文殊化現, 有警於超也.’

故知洗手必須依法. 因果經云, ‘觸手請經, 當獲廁中蟲報.’)

 

 

 

69

 

죄가 있을 경우 참회하고 화를 냈을 경우 부끄러워한다면 장부의 기상이 있는 것이다.

또한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새로워지면 죄는 그 마음을 따라 소멸할 것이다.

 

有罪卽懺悔, 發業卽慚愧, 有丈夫氣象.

又改過自新, 罪隨心滅.

 

 

[평]
참회란 이전에 저지른 허물을 뉘우치고[懺] 이다음에는 잘못이 없도록 반성한다[悔]는 뜻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말은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여기며[慚] 잘못을 책망하고, 밖으로는 뉘우치며[愧] 그 잘못을 남들에게 숨김없이 고백한다326)는 뜻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텅 비고 고요하여 죄업이 붙어살 터가 없다.

 

懺悔者, 懺其前愆, 悔其後過.

慚愧者, 慚責於內, 愧發於外.
然, 心本空寂, 罪業無寄.

 

 

326) ‘발(發)’이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참회하는 발로참회(發露懺悔)의 맥락이다.

“만약 부끄럽게 여기며 발로참회하는 자라면 어찌 저지른 죄를 소멸시키는 데 그치겠는가!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을 늘려서 여래의 열반이라는 뛰어난 결과까지 세우게 될 것이다.”

(『慈悲水懺法』 권상 大45 p.970c23.

若能慚愧, 發露懺悔者, 豈唯止是滅罪!

亦復增長無量功德, 竪立如來涅槃妙果.);

“마땅히 죄를 드러낼 일이며 덮어서 숨기지 마라.

드러내면 마음이 편안해지지만 드러내지 않고 숨기면 죄가 더욱 깊어진다.

이것을 가리켜 자신의 죄를 살펴 대중 앞에 고백하는 것이라 한다.”

(『集異門足論』 권24 大26 p.381a15.

應發露, 勿覆藏.

發露則安穩, 不發露罪益深.

是名覺察擧罪.)

 

 

 

70

 

도인이라면 마음을 단정히 하여 소박하고 곧은 태도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표주박 하나 들고 납의(衲衣) 한 벌 걸친 채327)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얽매임이 없으리라.

 

道人宜應端心, 以質直爲本.

一瓢一衲, 旅泊無累.

 

 

[평]
부처님께서는 “마음은 곧은 활시위와 같다”328)라 하시고, 또한 “곧은 마음이 도량이다”329)라고 하셨다.

이 몸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분명코 어디에 머무르더라도 아무런 얽매임이 없을 것이다.

 

佛云,“心如直絃.” 又云, “直心是道場.”

若不耽着此身, 則必旅泊無累.

 

 

327) 표주박과 납의는 오로지 도(道)를 생각하는 수행자의 소박하고 곧은 의식(衣食)을 나타낸다.

“‘옛 부처의 가풍은 어떤 것입니까?’ ‘표주박 하나와 납의 한 벌이다.’”

(『黔南會燈錄』 권6 「祖鼻最章」 卍145 p.790a16. 問, ‘如何是古佛家風?’ 師云, ‘一瓢一衲.’);

이처럼 소박하고 청빈한 삶에 만족하고 도를 즐기는 풍모를 나타내는 예로서 공자(孔子)가 그 제자인 안회(顔回)를 칭송한 말이 유명하다.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국으로 누추한 거리에 산다면 남들은 그것이 괴로워 견디지 못할 것인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다. 어질구나, 안회여!”

(『論語』 「雍也」. 一簞食, 一瓢飲,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

328) 『楞嚴經』 권6 大19 p.132c22에 나오는 말.

“만약 비구들의 마음이 곧은 활시위와 같이 모든 것에 진실하다면 삼매에 들어가도 영원히 마구니가 방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 보살로서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리라고 인가한다.”

(若諸比丘, 心如直絃, 一切眞實, 入三摩提, 永無魔事. 我印是人成就菩薩無上知覺.);

이 경문에 대한 주석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때에 전혀 거짓이 없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러한 사람이라면 진실로 도를 구하는 자일 것이니, 어찌 속히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겠는가!

만약 겉모습을 드러내어 꾸미면서 도를 얻었다고 속이거나 안으로는 거짓을 품고 있으면서 밖으로는 명성을 드러낸다면, 어찌 수행이라 하겠는가!”

(『首楞嚴義疏注經』 권6 大39 p.915a21.

一切時中, 悉無虛僞.

若斯人也眞求道歟, 豈不速至乎!

若示相標形, 詐稱得道, 內懷諂曲, 外現名聞, 豈曰修行!)
329) “곧은 마음이 도량이니,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維摩經』 권1 大14 p.542c15. 直心是道場, 無虛假故.);

『注維摩詰經』 권4 大38 p.363c26에서 승조(僧肇)는 이렇게 풀이한다.

“곧은 마음이란 안으로는 진실하고 곧으며, 밖으로는 거짓으로 꾸미는 모습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수행을 떠받치는 근본이요 도를 펼치는 터이다.”

(直心者, 謂內心眞直, 外無虛假. 斯乃基萬行之本, 坦進道之場也.)

 

 

 

 

71

 

범부는 마음 밖 경계에 집착하고 도인은 마음에 집착한다.

마음과 경계를 모두 잊어야만 진실한 법이다.330)

 

凡夫取境, 道人取心.

心境兩忘, 乃是眞法.

 

 

[평]
경계에 집착하는 것은 사슴이 허공 꽃331)을 쫓아가는 꼴과 같고,332)

마음에 집착하는 것은 원숭이가 물에 잠긴 달을 건지려는 꼴과32) 같다.333)

경계와 마음이 비록 다르지만 그것에 집착하는 병은 똑같다. 이것은 범부와 이승을 함께 거론한 내용이다.

 

取境者, 如鹿之趂空花也;

取心者, 如猿之捉水月也.

境心雖殊, 取病則一也. 此合論凡夫二乘.

 

 

[게송]
천지에는 진나라의 해와 달이 일찍이 없었고,

산하에는 한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보이지 않는다.334)

 

天地尙空秦日月,

山河不見漢君臣.

 

 

330) 『傳心法要』 大48 p.381a20.
331) 공화(空花).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하여 헛된 생각을 일으켜 있는 듯이 착각하는 분별을 비유하는 말. 눈병이 있는 사람이 허공에 꽃이 핀 것으로 오인하는 현상을 비유로 끌어들인 것이다.

“마치 세간 사람들이 허망하게 분별한 끝에 허공 꽃과 두 번째 달 등의 존재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과 같다. 반드시 먼저 세간의 자잘한 현상에 대한 경험을 거친 다음에 비로소 이와 같은 현상도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다.”(『大乘廣百論釋』 권2 大30 p.196c8.

如世間虛妄分別, 執有空華第二月等. 必由先見世間少事, 然後方執有如是事.)

332) “비유하자면 사슴 떼가 갈증에 시달리다가 봄날 아지랑이를 보고 물이라고 생각하여 미혹되고 어지러운 마음으로 쫓아가며 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범부는 시작도 알 수 없는 허위와 망상에 물들어 삼독[貪·瞋·癡]으로 마음을 애태우고 색의 경계를 즐긴다.”

(『楞伽經』 권2 大16 p.491a7.

譬如群鹿爲渴所逼, 見春時焰, 而作水想, 迷亂馳逐, 不知非水.

如是愚夫, 無始虛僞妄想所熏, 三毒燒心, 樂色境界.)
333) 『摩訶僧祇律』 권7 大22 p.284a7 등에 나오는 비유.

“나의 소유이거나 밖의 경계라고 망령되게 생각하여 탐욕과 애착을 일으킨다. 마치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
이를 쫓고 어리석은 원숭이가 물에 잠긴 달을 건지려는 것과 같아서 없는 것에서 제멋대로 있다고 분별하며 부질없이 고통의 수레바퀴로 빠져드는 것이다.”
(『宗鏡錄』 권6 大48 p.447c17. 妄謂我所及外境界, 而生貪愛. 如渴鹿馳焰, 癡猿捉月, 無而橫計, 枉入苦輪.)

334) 담영달관(曇穎達觀)이 임제(臨濟)의 사료간(四料揀) 중 인식 주관[人]과 인식 대상[境]을 모두 빼앗는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에 대한 질문을 받고 대답한 말이다. 『續傳燈錄』 권4 大51 p.489c3 참조.

진나라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해와 달(또는 황제와 그 황후)은 없고, 한나라의 임금과 신하도 불변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이는 인식 대상으로서의 경계와 인식 주관인 마음이 모두 없다는 뜻을 드러낸다.

 

 

 

72

 

성문은 숲에서 고요히 앉아 좌선하다가 마구니에게 붙들리지만,335)

보살은 세간에서 즐겁게 노닐어도 외도나 마구니가 찾지 못한다.

 

聲聞, 宴坐林中, 被魔王捉;

菩薩, 遊戱世間, 外魔不覓.

 

 

[평]
성문은 고요함을 수행이라 집착하므로336) 마음이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이면 귀신에게 발각된다.

 보살은 본성이 저절로 텅 비고 고요하므로 자취가 남지 않고, 자취가 남지 않으면 외도나 마구니가 찾지 못한다.

이것은 이승과 보살을 아울러 말한 것이다.

 

聲聞, 取靜爲行故, 心動, 心動則鬼見也.

菩薩, 性自空寂故, 無迹, 無迹則外魔不見.

此合論二乘菩薩.

 

 

[게송]
3월에 꽃 떨어지는 길에서 일없이 노니는데,

어느 집은 시름에 잠겨 꽃비 내리는 문을 닫는다.337)

 

三月懶遊花下路,

一家愁閉雨中門.

 

 

335) 고요히 앉아 좌선한다는 말은 연좌(宴坐)를 가리킨다. 『維摩經』에서 ‘번뇌와 세간사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불도를 실현하는 것’이라 정의한 연좌의 개념에 따른다. 『壇經』에서는 이 교설로써 좌선에 치우친 선법을 비판하고 활발한 선법으로 전환하는 근거로 삼았다.

“도법을 버리지 않고 범부의 일을 드러내는 것을 연좌라 한다.

……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연좌이다.”

(『維摩經』 「弟子品」 大14 p.539c22.

不捨道法, 而現凡夫事, 是謂宴坐.

…… 不斷煩惱, 而入涅槃, 是爲宴坐.);

“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옳다면 유마힐이 숲에서 고요히 좌선하는 사리불을 비판한 것은 합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지식이여, 또한 어떤 사람들은 남들에게 앉아서 마음을 살피거나 청정함을 살피면서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도록 가르치며 이것에서 공(功)을 남기려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깨우치지 못하고 그 말에 집착하여 전도되어 버린다.”

(敦煌本 『壇經』 大48 p.338b22.

若坐不動是, 維摩詰, 不合呵舍利佛宴坐林中.

善知識, 又見有人敎人坐, 看心看淨, 不動不起, 從此置功. 迷人不悟, 便執成顚.)
336) 이것은 『圓覺經』 大17 p.917c15에 나오는 말이지만, 경의 취지를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337) 앞 구절은 경계에서 걸림 없이 노니는 대승, 뒷구절은 경계를 차단하고 고요함을 지키는 이승을 말한다. 송나라 때 한표(韓淲)의 『澗泉集』에 「雨中」이라는 시에 이어 「又」라는 제하의 다음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아득하게 녹아내린 들물은 울타리 밑까지 이르고,

한없이 푸른 산은 멀리 산촌에 접해 있네.

3월에 꽃 떨어지는 길에서 일없이 노니는데,

어느 집은 시름에 잠겨 꽃비 내리는 문을 닫네.

茫茫野水浸籬根,

無數靑山接遠村.

三月懶遊花下路,

一家愁閉雨中門.”라는 시가 있다.
한편, 풍혈연소와 학인과의 문답 중에 이 시구가 나온다.

“‘유와 무가 모두 온데간데 없을 때는 어떻습니까?’

‘3월에 꽃 떨어지는 길에서 일없이 노니는데, 어느 집은 시름에 잠겨 꽃비 내리는 문을 닫는다.’”

(『景德傳燈錄』 권13 「風穴延沼傳」 大51 p.303b18.

問, ‘有無俱無去處時, 如何?’

師曰, ‘三月懶遊華下路, 一家愁閉雨中門’)

 

 

 

73 338)

 

누구라도 목숨을 마치는 순간을 맞이하면 다만 오온이 모두 공(空)이고339) 사대는 무아(無我)라고 관하라. 진심은 어떤 상(相)도 없어서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태어날 때도 본성은 생겨나지 않고 죽을 때도 본성은 떠나지 않으니, 맑은 물같이 원만하고 고요하여 마음과 경계가 하나로 같다.

다만 이와 같이 그 자리에서 단번에 깨우친다면 삼세(三世)에 속박당하지 않을 것이니 곧바로 세속을 벗어난 자유인이 될 것이다.

만일 부처를 보더라도 따라갈 마음이 없고 지옥을 보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며,

다만 어떤 마음도 없이[無心] 법계와 하나가 될 뿐이니, 이것이 바로 긴요한 핵심이다.340)

이처럼 평상의 생활이 원인이고 임종은 그 결과라는 것을 도 닦는 사람은 눈을 붙이고 자세히 살펴야한다.

 

凡人臨命終時, 但觀五蘊皆空, 四大無我.

眞心無相, 不去不來, 生時性亦不生, 死時性亦不去, 湛然圓寂, 心境一如.
但能如是, 直下頓了, 不爲三世所拘繫, 便是出世自由人也.
若見諸佛, 無心隨去;若見地獄, 無心怖畏,

但自無心, 同於法界, 此卽是要節也.

然則平常是因, 臨終是果, 道人須着眼看.

 

 

[평]
죽음이 두려운 노년에야 부처님을 가까이하려 하는구나.341)

 

怕死老年親釋迦.

 

 

[게송]
바로 지금 자기 자신의 본분을 밝힐 일이니,

죽음의 순간342)에 생각을 바꿀지라도 그르치리라.343)

 

好向此時明自己,

百年光影轉頭非.

 

 

338) 『傳心法要』 大48 p.381c5~c12.
339) 『般若心經』 大8 p.848c7에 나오는 구절.

340) 여기까지가 『傳心法要』의 인용이다.
341) 소옹(邵雍)의 「學佛吟」에 나오는 구절.

“죽음이 두려운 노년에야 부처님을 가까이하여,

망령되게 인연을 끊고자 하나 인연은 더욱 무거워지고,

병을 제거하려 하지만 병은 더욱 많아진다.”

(『佛祖綱目』 권37상 卍146 p.708b4.

怕死老年親釋迦,
妄欲斷緣緣愈重,

徼求去病病還多.)

342) 백년광영(百年光影). 백 년은 사람의 일생 또는 일생을 마치는 죽음. 광영은 시간을 나타낸다.
343) 법천(法泉)의 『證道歌頌』 卍114 p.884a5에 나오는 구절.

 

 

 

74

 

누구라도 목숨을 마치는 순간을 마주하여

한 터럭만큼이라도 범부와 성인을 차별하는 헤아림이 사라지지 않거나 사유분별을 잊지 않는다면,
나귀의 태나 말의 배 속에 태어나거나344)

지옥345)의 끓는 가마솥에 삶아지거나

전생과 마찬가지로 다시 땅강아지·개미·모기·등에가 될 것이다.

 

凡人臨命終時,

若一毫毛凡聖情量不盡, 思慮未忘,

向驢胎馬腹裏托質,

泥犁鑊湯中煮煠,

 乃至依前再爲螻蟻蚊虻.

 

 

[평]
백운수단(白雲守端)이 말했다.

“설령 범부와 성인을 차별하는 한 터럭만큼의 헤아림까지 깨끗이 사라졌을지라도 또한 나귀의 태나 말의 배 속에태어나지 않을 수 없다.”346)

두 가지로 갈라진 견해의 별똥이 날리면,347) 갖가지 윤회의 길로 흩어져 들어가리라.

 

白雲云,“

設使一毫毛, 凡聖情念淨盡, 亦未免入驢胎馬腹中.”
二見星飛, 散入諸趣.

 

 

[게송]
맹렬한 불길 아득히 퍼지고, 보검 들고 문 앞을 지키고 있네.348)

 

烈火茫茫, 寶劒當門.

 

[평]
이 두 절은 특별히 종사가 무심하게 도와 합하는 문을 열어 보이고, 경전에 제시된 염불하여 왕생하기를 구하는 문은 방편상 막아 놓았다.

그러나 근기가 같지 않고 뜻과 소원 또한 달라 각각 이와 같을 뿐이며 두 가지는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 도를 닦는 모든 자들은 평소에 자신의 분수에 따라 각자 노력하고 마지막 찰나에 의심과 후회를 일으키지 않기 바란다.

 

評曰 此二節, 特開宗師無心合道門, 權遮敎中念佛求生門.

然根器不同, 志願亦異, 各各如是, 兩不相妨.

願諸道者, 平常隨分, 各自勞力, 最後刹那, 莫生疑悔.

 

 

344) ‘한 터럭만큼이라도’라는 구절부터 여기까지는 무업국사(無業國師)의 말이다.『東林頌古』 卍118 p.814a12.
345) 니리(泥犁). S:niraya의 음사어 중 하나. 가염처(可厭處)·불행처(不幸處)·무복처(無福處)·명부(冥府) 등으로도 한역한다.

346) 차별심이 사라지지 않아도 윤회를 벗어날 수 없고 차별심이 사라지더라도 마찬가지라고 함으로써 윤회를 벗어날 조건을 모두 박탈했다.

백운의 말이 짝이 되어서 무업의 말은 비로소 하나의 관문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한 동림(竹庵士珪)의 송과 운문(大慧宗杲)의 송을 예로 든다.

“동림의 송:

하나의 길이 거문고 줄과 같이 곧게 뻗어 있으니,

마음에 가까이 와 닿고 손으로 만지기에도 가깝도다(무업).

화살이 붉은 태양의 그림자를 뚫어야,

비로소 수리를 쏘아 맞히는 사람이라 하리라(백운).

운문의 송:

몸은 옮기지만 발걸음은 옮기지 않고(무업),

발걸음은 옮기지만 몸은 옮기지 않는구나(백운).

금사자를 쫓아가다 놓치고, 도리어 옥기린을 잡았도다.”

(『東林頌古』 卍118 p.814a13.

東林頌:

一道如絃直,
心親手更親.

箭穿紅日影,

方是射鵰人.

雲門頌:

移身不移步,

移步不移身.

走卻金師子,
捉得玉麒麟.)
347) 무업과 백운의 말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것으로 분별하는 이견(二見)을 가리킨다.
다르다고 해도 윤회의 길로 들어서고, 다르지 않다고 해도 윤회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서산의 이 말을 듣고 두 선사의 말을 같은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348) 지옥의 불길과 지옥의 문을 지키고 있는 옥졸을 묘사한 장면이다.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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