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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단』, 『선가귀감』(보현사 수충사 소장) 禪家龜鑑 선가귀감 마음의 근원 27 모든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을 깊이 믿어서145) 굽히지도 않고 내세우지도 않기를 바라노라. 願諸道者深信自心, 不自屈不自高. [평1] 마음은 평등하여 본래 범부와 성인의 차별이 없지만 사람에 따라 미혹[迷]과 깨달음[悟] 또는 범부[凡]와 성인[聖]이라는 구별이 있다. 스승의 깨우침에 의해 참된 자아[眞我]와 부처가 다르지 않음을 홀연하게 깨닫는 것이 돈(頓)이다. 이것이 자기를 굽히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니 “본래 하나의 그 무엇도 없다”146)고 한 말과 같다. 깨달음에 의하여 습기를 끊고 범부가 바뀌어 성인이 되는 것이 점(漸)이다. 이것이 자기를 내세우지 않아야하는 이유이니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는다”147)라는 말과 같다. 굽히는 것은 교(敎)를 배우는 자의 병통이고 내세우는 것은 선(禪)을 배우는 자의 병통이다. 교를 배우는 자는 선가(禪家)에 깨달음의 비결이 있음을 믿지 못하고, 방편적 가르침에 깊이 빠져 진실과 망상이 다르다고 집착하며, 관행을 닦지 않으니 남의 진귀한 보배를 헤아리기만 하는 격147)148)이다. 그러므로 물러나 굽히는 마음을 일으킨다. 선을 배우는 자는 수행하여 번뇌를 끊는 바른 길이 교문(敎門)에 있음을 믿지 않고 번뇌에 물든 습관적 기운이 일어나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비록 깨우친 단계가 초심자 수준임에도 자신이 깨우친 법에 대하여 교만한 생각이 넘쳐 하는 말마다 지나치게 거만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마음을 닦으려는 뜻을 가진 자는 스스로를 굽히지도 말고 내세우지도 말아야 한다. 此心平等, 本無凡聖, 然約人有迷悟凡聖也. 因師激發, 忽悟眞我與佛無殊者, 頓也. 此所以不自屈, 如云“本來無一物”也. 此所以不自高, 如云“時時勤拂拭”也. 屈者, 敎學者病也. 高者, 禪學者病也. 敎學者, 不信禪門有悟入之秘訣, 深滯權敎, 別執眞妄, 不修觀行, 數他珍寶, 禪學者, 不信敎門有修斷之正路, 染習雖起, 不生慚愧, 果級雖初, 多有法慢, 故發言過高也. 是故, 得意修心者, 不自屈不自高也. [평2] 가까운 예로 초심자에 대하여 말하자면 인위(因位)에 바다와 같이 무수한 덕을 구현한 과위(果位)를 갖추고 있으니, 십신(十信)의 첫 번째 계위일지라도 그렇기 때문이다. 먼 예로는 보살에 대하여 말하자면 과위가 인위의 근원과 통하니, 55위의 보살 계위가 모두 그렇기 때문이다.149) 評曰 不自屈不自高者, 略擧初心, 因該果海, 則雖信之一位也. 145) 종밀(宗密)의 말. “비록 이 마음이 범부와 성인에게 평등하게 있더라도 과위는 드러나서 쉽게 믿을 수 있지만 인위는 감추어져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얕게 아는 이들은 인위를 가볍게 여기고 과위를 귀중하게 여기기 마련이다. 도위(道位)의 모든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을 깊이 믿기를 바란다.” (『圓覺經略疏』 권상 大39 p.535c10. 然雖此心凡聖等有, 但果顯易信, 因隱難明. 故淺識之流, 輕因重果. 願諸道者深信自心.) 147) 신수(神秀)의 게송.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이니, 늘 털고 닦기에 힘써, 먼지와 티끌이 끼지 않게 하라.” (宗寶本 『壇經』 大48 p.348b24.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 (60권본 『華嚴經』 권5 大9 p.429a3. 譬如貧窮人, 日夜數他寶, 自無半錢分,多聞亦如是.); “남의 보배를 헤아린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證道歌』 大48p.396c7. 數他珍寶有何益?) 149) “만약 ‘인위가 바다와 같이 무수한 덕을 구현한 과위를 갖추고 있고 과위가 인위의 근원과 통하여 있다’라고 한다면 이 두 가지가 상호 침투하여 깊은 도리가 드러나게 된다. 처음 마음을 일으킬 때에 곧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는 것은 인위가 과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며, 비록 불도를 터득하더라도 인위의 방법을 버리지 않는 것은 과위가 인위와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華嚴經隨疏演義鈔』 권1 大36 p.3b15. 若云, ‘因該果海, 果徹因源’, 二互交徹, 則顯深也. 初發心時, 便成正覺, 因該果也. 雖得佛道, 不捨因門, 果徹因也.) 28 마음을 모르고 도를 닦으면 무명만 늘어나게 할 뿐이다.150) 迷心修道, 但助無明. [평] 깨달음151)이 철저하지 못하다면 수행이 어찌 진실과 부합하겠는가! 깨달음과 수행의 관계는 마치 등잔의 기름과 등불이 서로 의지하고 눈과 다리가 서로 돕는 것과 같다.151)152) 悟若未徹, 修豈稱眞哉! 悟修之義, 如膏明相賴, 目足相資. 150) 종밀(宗密)의 다음 말을 축약한 구절. “미혹된 마음으로 도를 닦으면 설령 갖가지 수행의 방편에 의지하여 부지런히 애쓰더라도 무명만 늘어나게 할 뿐이니 어떻게 불과(佛果)를 이루겠는가?” (『圓覺經略疏』 권하1 大39 p.564b23. 迷心修道, 縱令勤苦種種行門, 但助無明, 何成佛果?) 151) ‘궁극적 깨달음’이 아니라 자신의 근원으로서의 마음을 ‘바르게 아는 것’을 말한다. “법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여 수행해야 비로소 진실한 수행이 되니, 등잔의 기름과 등불이 서로 의지하고 눈 (『圓覺經略疏』 권하1 大39 p.557c23. 依解而修, 方爲妙行, 膏明相賴, 目足更資.) 29 수행의 요체는 다만 범부의 망상을 없애는 것일 뿐, 별도로 성인의 경지에 대하여 이해할 일은 없다.153) 修行之要, 但盡凡情, 別無聖解. [평] 병이 사라지고 약도 제거되면 다시 본래의 그 사람이다.154) 病盡藥除, 還是本人. 153) 범부와 성인을 갈라놓는 이분(二分)에서 일어나는 집착을 경계하고 있다. 『楞嚴經』 권9 大19 p.147c9에서 “만약 성인의 경지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면 온갖 삿된 견해에 물들 것이다(若作聖解卽受群邪)”라고 한 취지와 같다. “편지를 받은 다음 더욱 존경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인연에 따라 마음을 드넓게 하여도 생각대로 자유자재하신지요? 사위의 속에서 번뇌망상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는지요? 깨어 있거나 잠드는 두 경계에서 한결같이 화두가 들리는지요? 이전부터 잘해왔던 공부 방식을 마음 밖의 대상에서 찾는 일은 없으신지요? 생사심 속에서도 화두가 이어지는지요? 다만 범부의 분별을 없애면 될 뿐, 별도로 성인의 경지에 대하여 이해할 일은 없습니다.” (『書狀』 「答李參政」 第二書 大47 p.920b24. 信後, 益增瞻仰. 不識, 日來隨緣放曠, 如意自在否? 四威儀中, 不爲塵勞所勝否? 寤寐二邊, 得一如否? 於仍舊處, 無走作否? 於生死心, 不相續否? 但盡凡情, 別無聖解.) 154) 범부의 망상이 병이고 성인의 경지는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처방한 약과 같아서 망상이 사라지면 별도로 추구할 성인이라는 경지도 없다는 뜻. “부처는 중생의 약이지만, 중생의 병이 제거되면 약 또한 쓸모가 없다. 만일 병이 제거되고도 약을 남겨둔다면 부처의 경지에는 들어갈 수 있지만 마구니의 경계로 들어갈 수 없으니, 그 병은 중생의 제거되지 않은 병과 같은 것이다. 병이 나으면 약도 버려서 부처와 마구니를 모두 쓸어 없애야 비로소 일대사 인연과 조금 상응하는 점이 있을 것이다.” (『大慧語錄』 권19 大47 p.891a3. 佛是衆生藥, 衆生病除, 藥亦無用. 或病去藥存, 入佛境界, 而不能入魔境界, 其病與衆生未除之病等. 『景德傳燈錄』 권28 「越州大珠慧海和尚語」 大 51 p.443a13 참조. 대주혜해는 이 말에 이어 60권본 『華嚴經』 권10 大9 p.465c29에 나오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라는 구절을 전거로 들고 있다. 30 중생의 마음을 버릴 필요 없이 다만 자신의 본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도록 하라.155) 정법(正法)을 구하려는 마음이 바로 삿된 것이다. 不用捨衆生心, 但莫染汚自性. 求正法是邪. [평] 155) 대주혜해(大珠慧海)의 말이다. 『景德傳燈錄』 권28 「越州大珠慧海和尚語」 大51 p.443a13 참조. 대주혜해는 이 말에 이어 60권본 『華嚴經』 권10 大9 p.465c29에 나오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라는 구절을 전거로 들고 있다. 31 번뇌를 끊는 것은 이승이라 하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아야 대열반이라 한다.156) 斷煩惱, 名二乘;煩惱不生, 名大涅槃. [평] 斷者, 能所也;不生者, 無能所也. 156) 전거는 다음과 같다. “번뇌를 끊는 것은 열반이라 하지 않으며,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야 열반이라 한다.”(『大般涅槃經』 권25 大12 p.514c24. 斷煩惱者, 不名涅槃;不生煩惱, 乃名涅槃.)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大乘起信論』 大32 p.578c8. 斷煩惱入涅槃者, 卽無有是處.); “진실로 통하는 자라면 벽도 그를 가로막을 수 없다. 이러면 다시 번뇌를 불사(佛事)로 삼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들어간다’라고 하는 것이다.” (『維摩經略疏』 권4 大38 p.612b26. 如得通者, 壁不能礙. 是則還用煩惱以爲佛事, 是名不斷煩惱而入涅槃.) 32 모름지기 텅 빈 마음으로 스스로 비추어 보고, 한 찰나의 연기도 발생함이 없다158)고 알라.159) 須虛懷自照, 信一念緣起無生. [평] 此單明性起. 158) 두 번째 구절은 이통현(李通玄)의 말이며, 임제(臨濟) 등의 선사들이 즐겨 활용했다. “공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공이라야 그 공이 헛되게 버려지지 않으며, 공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공은 그 공이 모두 무상하다. 수많은 겁의 세월 동안 수행을 쌓아도 끝내 사라지고 말 것이니, 한 찰나의 연기도 발생함이 없어서 저 삼승 권학(權學) 보살들의 견해를 넘어서는 것만 못하다.” (『新華嚴經論』 권1 大36 p.724a22. 無功之功, 功不虛棄;有功之功, 功皆無常. 多劫積修, 終歸敗壞, 不如一念緣起無生, 超彼三乘權學等見.) 『臨濟語錄』 大47 p.502c21 참조. “비록 말세의 중생이라도 마음의 크기가 드넓은 자라면 텅 빈 마음으로 스스로 비추어 보아 한 찰나의 연기도 발생함이 없다고 알 것이다. 비록 아직은 몸소 증득하지 못했더라도 이것은 도를 깨달을 바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法集別行錄節要』 普照全書 p.152. 雖是末世衆生, 若心量宏闊者, 亦可虛懷自照, 信一念緣起無生矣. 雖未親證, 亦爲入道之基本也.) “연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오염된 연기이고 다른 하나는 청정한 연기이다. 청정이란 여래의 완전한 자비와 보살의 만행 등을 말하고, 오염이란 중생이 일으키는 미혹된 업과 같은 것들이다. 만약 오염으로 청정을 부정하면 중생에 속하므로 오로지 연기일 뿐이다. 여기서는 청정으로 오염을 부정하니 오로지 부처님들의 연기에 속하기만 하므로 성기라 한다.” (『華嚴經隨疏演義鈔』 권79 大36 p.615a24. 緣起有二, 一染二淨. 淨謂如來大悲, 菩薩萬行等;染者, 謂衆生惑業等. 若以染奪淨, 則屬衆生, 故唯緣起. 今以淨奪染, 唯屬諸佛, 故名性起.) 33 살생·도둑질·사음·망어161)가 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관찰하라.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가 고요하다면 어찌 다시 끊을 필요가 있겠는가!162) 諦觀殺盜淫妄, 從一心上起. 當處便寂, 何須更斷! [평] 또한 “생각이 일어나면 곧바로 (일어났다고) 알아차려라!”164)고 하였다. 此雙明性相. 經云,“ 不起一念, 名爲永斷無明.” 又云,“ 念起卽覺.” 161) 네 종류의 근본 중죄(重罪)이므로 사중금(四重禁)이라 한다. (『圓覺經略疏』 권상1 大39 p.533a8. 永斷無明:本覺旣顯, 無明本無, 畢竟不生, 名爲永斷.) “모든 차별상이 공(空)이라고 알아차리면 마음에서 상념(想念)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상념이 일어나면 일어난 그대로 알아차려라. 알아차리는 순간 상념은 사라질 것이다. 수행의 미묘한 방법은 오직 여기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비록 온갖 수행을 갖추어 닦지만 오로지 무념(無念)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다.” (『都序』 권상2 大48 p.403a4. 覺諸相空, 心自無念. 念起卽覺. 覺之卽無. 修行妙門, 唯在此也. 故雖備修萬行, 唯以無念爲宗.) 『修心訣』 大48 p.1007c22에도 인용되어 있다. 34 모든 것이 마술과 같은 현상[幻]인 줄 아는 순간 그것에서 벗어나게 되어 어떤 방편도 지어낼 필요가 없고, 마술과 같은 현상을 벗어나는 순간 깨닫게 되니 점차로 밟아갈 방편도 필요 없다.165) 知幻卽離, 不作方便, 離幻卽覺, 亦無漸次. [평] 마음을 일으키고 상념을 움직이며 거짓을 말하거나 진실을 말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마술 아닌 현상은 없다.167) 또한 시작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이어져 온 마술과 같은 무명도 모두 깨달은 마음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니, 마술의 현상 하나하나가 허공에 핀 꽃과 같지만 그 현상이 소멸하면 동요하지 않게 되기에 부동(不動)이라 한다. 그러므로 꿈에 상처가 나서 의사를 찾던 사람이 깨어나면 어떤 방편도 필요 없어지는 것과 같으니, 모든 것이 마술과 같은 현상인 줄 아는 사람도 이와 같다. 心爲幻師也, 身爲幻城也, 世界幻衣也, 名相幻食也. 至於起心動念, 言妄言眞, 無非幻也. 又無始幻無明, 皆從覺心生, 幻幻如空花, 幻滅名不動. 故夢瘡求醫者, 寤來無方便, 知幻者, 亦如是. 165) 『圓覺經』 大17 p.914a20에서 마술과 같이 헛되게 나타나는 모든 현상의 공성(空性)을 깨닫고 그것에 대한 속박을 벗어나는 수행의 기초로 제시된 구절이다. “‘무엇을 위대한 마술사라 합니까?’ ‘마음을 위대한 마술사라 하고, 몸은 그 마술의 성이며, 이름과 형상은 그 마술의 옷과 음식이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에 이 마술을 벗어나는 현상은 없다. 범부는 그것이 마술의 현상인 줄 모르고 곳곳에서 마술의 작용에 미혹되고, 성문은 마술의 경계를 두려워하여 마음을 어둡게 닫고 고요한 경계로 들어가며, 보살은 마술과 같은 법을 알고 그 본질이 마술임을 통달하여 모든 이름과 형상에 속박되지 않는다. 부처님은 위대한 마술사로서 그 마술과 같은 법의 수레바퀴를 굴려 마술의 열반을 완성하고 마술의 생성과 소멸을 바꾸어 생성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경지를 성취한다.’” (『景德傳燈錄』 권28「越州大珠慧海和尚語」 大51 p.443b25. 問, ‘何名大幻師?’ 師曰, ‘心名大幻師, 身爲大幻城, 名相爲大幻衣食, 河沙世界, 無有幻外事. 凡夫不識幻, 處處迷幻業; 聲聞, 怕幻境, 昧心而入寂; 菩薩, 識幻法達體幻, 不拘一切名相; 佛, 是大幻師, 轉大幻法輪, 成大幻涅槃, 轉幻生滅, 得不生不滅.’) 167) ‘마음을 일으키고’라는 구절부터 여기까지는 『圓覺經』 大39 p.538b10의 인용이다. 35 중생은 생멸이 없는 경계에서 망령되게 생사와 열반의 차별이 있다고 보니, 마치 허공에서 꽃이 피었다 지는 환영을 보는 것과 같다. 衆生於無生中, 妄見生死涅槃, 如見空花起滅. [평] 생사가 있다고 보는 자는 허공에서 꽃이 피는 환영을 보는 것과 같고, 열반이 있다고 보는 자는 허공에서 꽃이 지는 환영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일어나도 본래 일어남이 없고 사라져도 본래 사라짐이 없으니, 이 두 가지 견해는 깊이 궁구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사익경』에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목적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사와 열반이라는 두 가지 견해를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169)라고 한 것이다. 性本無生, 故無生涅也;空本無花, 故無起滅也. 見生死者, 如見空花起也;見涅槃者, 如見空花滅也. 然起本無起, 滅本無滅, 於此二見, 不用窮詰. 是故, 思益經云, “諸佛出世, 非爲度衆生, 只爲度生死涅槃二見耳.” 168) 『圓覺經』 大17 p.915c12의 다음 내용과 같다.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으니, (허공에는)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생사와 열반은 일어 났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현상과 같다.” (空本無花, 非起滅故, 生死涅槃, 同於起滅.) “마땅히 알라! 부처님은 중생을 생사로부터 벗어나 열반에 들어가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망상에 따라 생사와 열반을 두 가지 차별상으로 분별하는 자들을 제도해 주실 뿐이다. 여기에는 진실로 생사를 건너 열반에 이른 자는 없다. 왜 그런가? 모든 법은 평등하여 오고 가는 움직임이 없으며 생사로부터 벗어남도 없고 열반으로 들어감도 없기 때문이다.” (當知! 佛不令衆生出生死入涅槃, 但爲度妄想分別生死涅槃二相者耳. 此中實無度生死至涅槃者. 所以者何. 諸法平等, 無有往來, 無出生死, 無入涅槃.) 36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여 멸도170)에 들게 하지만, 또한 진실로 멸도를 얻는 중생은 없다.171) 菩薩度衆生入滅度, 又實無衆生得滅度. [평] 상념의 본체가 공이라는 이치를 깨닫는 것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며, 상념이 텅 비고 고요하면 진실로 멸도를 얻는 중생도 없다. 菩薩, 只以念念爲衆生也. 了念體空者, 度衆生也;念旣空寂者, 實無衆生得滅度也. 170) 滅度. 열반( nirvān3 a, nibbāna)의 한역어. 적멸(寂滅)·무생(無生) 등이라고도 한다. 실천의 조목 37 이치로는 비록 단번에 깨달을 수 있지만, 구체적인 실행으로는 번뇌망상이 단번에 제거되지 않는다.173) 理雖頓悟, 事非頓除. [평] 이해는 번갯불과 같이 빠르지만 실행은 궁자175)와 같이 느리다. 文殊達天眞, 普賢明緣起. 解似電光, 行同窮子. 173) “이치로는 단번에 깨달아 그 깨달음과 동시에 번뇌망상도 아울러 녹아 없어지지만, 구체적인 실행으로는 단번에 제거되지 않으니 수행의 순서와 단계에 따라 사라진다.” (『楞嚴經』 권10 大19 p.155a12. 理則頓悟, 乘悟倂銷. 事非頓除, 因次第盡.); “비록 법신과 진심을 단번에 깨달아 부처님들의 경지와 완전히 같더라도, 오랜 겁의 세월 동안 사대(四大)의 육신을 자아로 망령되게 집착함으로써 그러한 습기가 본성이 되어버렸기에 한순간에 단번에 제거될 수 없다. 그러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점차로 닦으며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덜어낼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성불이라 한다.”(『法集別行錄節要』 普照全書 p.117. 雖頓悟法身眞心, 全同諸佛, 而多劫妄執四大爲我, 習與成性, 卒難頓除. 故須依悟漸修, 損之又損, 乃至無損, 卽名成佛.) (『圓覺疏鈔隨文要解』 卍15p.653a13. 文殊一章, 爲頓悟, 卽是信解;普賢下十章, 爲漸修, 謂依解修行.) 175) 窮子. 빈궁한 자식. 『法華經』 권2 「信解品」 大9 p.16b25에 나온다. 거부인 장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가출하여 가난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돌아와 부친인 장자 밑에서 처음에는 빈천한 일을 하다가 서서히 재물을 물려받고 자신의 본래 자리를 찾게 되었다. 궁자는 이승(二乘), 재물은 대승의 교설, 장자는 부처님을 비유한다. 38 176) 음행하면서 선(禪)을 닦으면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살생하면서 선을 닦으면 자신의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며 남들이 듣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고, 도둑질하면서 선을 닦으면 새는 그릇이 차기를 바라는 것과 같고, 거짓말하면서 선을 닦으면 똥을 전단향( 檀香) 모양으로 새겨서 향기가 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니, 설령 지혜가 많더라도 모두 마도(魔道)가 될 뿐이다. 帶婬修禪, 如蒸沙作飯; 帶殺修禪, 如塞耳呌聲; 帶偸修禪, 如漏巵求滿; 帶妄修禪, 如刻糞爲香, 縱有多智, 皆成魔道. [평1] ‘소승은 법을 받는 것으로 계를 삼아 지말만 대충 다스리는 반면, 대승은17) 섭심178)을 계로 삼아 뿌리까지 세밀하게 끊는다. 그러므로 소승의 법계(法戒)는 몸으로 범하는 잘못만 없고, 대승의 심계(心戒)는 생각으로도 범하는 잘못까 음행은 청정을 끊어버리고, 살생은 자비를 끊어버리며, 도둑질은 복덕을 끊어버리고, 거짓말은 진실을 끊어버린다. 지혜를 완성하여 6신통을 얻더라도 살생·도둑질·음행·거짓말을 끊지 못한다면 반드시 마도(魔道)에 떨어져 보리(菩提)의 바른 길을 영원히 잃을 것이다. 무억(無憶)은 계이고, 무념(無念)은 정이며, 막망(莫妄)은 혜이다.180) 또한 ‘계는 도둑을 잡는 것과 같고, 정은 도둑을 묶는 것과 같으며, 혜는 도둑을 죽이는 것과 같다.’181) 또한 계라는 그릇이 견고하고 정이라는 물이 맑으면, 혜라는 달이 비로소 나타난다. 이 삼학은 진실로 만법의 근원이므로 특별히 밝혀서 온갖 번뇌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 此明修行軌則, 三無漏學也. 小乘, 稟法爲戒, 粗治其末;大乘, 攝心爲戒, 細絶其本. 然則法戒無身犯, 心戒無思犯也. 婬者, 斷淸淨;殺者, 斷慈悲;盜者, 斷福德;妄者, 斷眞實也. 能成智慧, 縱得六神通, 如不斷殺盜婬妄, 則必落魔道, 永失菩提正路矣. 此四戒, 百戒之根, 故別明之, 使無思犯也. 無憶曰戒, 無念曰定, 莫妄曰慧. 又戒爲捉賊, 定爲縛賊, 慧爲殺賊. 又戒器完固, 定水澄淸, 慧月方現. 此三學者, 實爲萬法之源, 故特明之, 使無諸漏也. [평2] 영산회상(靈山會上)에 어찌 선행을 하지 않는 부처가 있겠으며, 소림문하(少林門下)에 어찌 거짓말하는 조사가 있겠는가?182) 靈山會上, 豈有無行佛? 少林門下, 豈有妄語祖? 176) 『楞嚴經』 권6 大19 pp.131c13~132c25에 나오는 내용을 축약했다. 177) 三無漏學. 계(戒)·정(定)·혜(慧)를 말한다. 삼학(三學)이라고도 한다. “섭심(攝心)을 계로 삼고, 계로 인하여 정을 일으키며, 정으로 인하여 혜를 일으킨다. 이것을 가리켜 세 가지 무루학이라 한다.” (『楞嚴經』 권6 大19 p.131c14. 所謂攝心爲戒, 因戒生定, 因定發慧. 是則名爲三無漏學.) 182) 교종(영산회상)이나 선종(소림문하)이나 계를 근본으로 한다는 뜻. 39 덕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의 계에 의지하지 않고 삼업(三業)183)을 지키지 않아서 방탕하고 태만하게 지내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시비를 견주어 헤아리는 것만을 일로 삼는다.184) 無德之人, 不依佛戒, 不護三業, 放逸懈怠, 輕慢他人, 較量是非, 而爲根本. [게송] 一破心戒, 百過俱生. [평] 評曰 如此魔徒, 末法熾盛, 惱亂正法, 學者詳之. 183)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 입으로 짓는 구업(口業), 생각으로 짓는 의업(意業)을 말한다. 185) 계를 마음의 측면과 결합시킨 말. 『毘尼母經』에서는 심계라는 말을 선정(禪定)과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다. “심계라는 것은 선계(禪戒)이니, 마음을 지키고 산란하지 않게 하면 정(定)과 합치된다. 그러므로 심계를 얻었다라고 한다.” (『毘尼母經』 권6 大24 p.835a6. 心戒者, 禪戒是也, 持心不散, 得與定合. 故名得心戒也.) 40 만약 계를 지키지 않으면 비루병에 걸린 여우186)의 몸조차도 받지 못하거늘, 하물며 청정한 보리과187)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若不持戒, 尙不得疥癩野干之身, 況淸淨菩提果, 可冀乎? [평] 重戒如佛, 佛常在焉, 須草繫鵝珠, 以爲先導. 186) 개나야간(疥癩野干). 『法華經』 등에 경전적 근거가 있다. “(『법화경』을 비방한 죄로) 여우가 되어서 마을에 들어가면 몸은 비루병에 걸리고 한쪽 눈도 없어 아이들에게 맞고 차이며 온갖 고통을 받는다.”(『法華經』 권2 大9 p.15c9. 有作野干, 來入聚落, 身體疥癩, 又無一目, 爲諸童子之所打擲, 受諸苦痛.) “모든 죄를 제거하면, 청정한 보리과를 성취한다.” (40권본 『華嚴經』 권24 大10 p.772a15. 滅除一切衆罪垢, 成就淸淨菩提果.) 188) 『佛遺敎經註』 卍59 p.12b2에 나오는 동일한 문장을 인용했다. 행각하고 있는 비구들이 있었는데, 도적을 만나 옷을 빼앗기고 나체인 채로 풀에 묶이게 되었다. 그러나 비구가 보석 세공가의 집에 탁발을 갔는데, 때마침 세공가가 공양할 음식을 가지러 간 사이에 옆에 있던 거위가 세공하던 보석을 삼켜버렸다. 음식을 가지고 온 세공가는 없어진 보석을 비구가 훔쳤다고 의심해 추궁했다. 비구는 거위가 삼켰노라고 말하면 거위의 배를 가를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불살생계를 지키기 위해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그 비구는 매질을 당하게 되었지만, 며칠 후에 세공가는 거위의 배설물에서 보석을 찾을 수 있었다. 41 생사의 윤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먼저 탐욕191)과 모든 갈애192)를 끊어야 한다.193) 欲脫生死, 先斷貪欲及諸194)愛渴. [평] 부처님께서 “음란한 마음을 제거하지 못하면,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195)라 하셨고, 또 “은애(恩愛)에 한번 속박되면, 속박된 그 사람을 끌어 죄의 문으로 들어가게 한다”196)라고 말씀하셨다. 갈(渴)이란 정애(情愛)가 간절하다는 뜻이다. 愛爲輪廻之本, 欲爲受生之緣. 佛云,“ 婬心不除, 塵不可出.” 渴者, 情愛之至切也. 191) 탐(貪 rāga). 삼독(三毒) 또는 근본번뇌(根本煩惱)의 하나. 생사윤회가 일어나는 가장 핵심이 되는 원인이다. 193) 『圓覺經』 大17 p.916b14(是故, 衆生欲脫生死, 免諸輪迴, 先斷貪欲, 及除愛渴.)의 인용. 42 장애 없는 청정한 지혜는 모두 선정(禪定)에 의해서 생겨난다.197) 無礙淸淨慧, 皆因禪定生. [평] 그러므로 “성인의 도(道)를 구하고자 한다면 이 방법을 떠나 다른 길은 없다”198)라고 말한다. 超凡入聖, 坐脫立亡者, 皆禪定之力也. 故云,“ 欲求聖道, 離此無路.” 197) 『圓覺經』 大17 p.919a21. 198) 『都序』 권상 大48 p.399b9(故三乘學人, 欲求聖道, 必須修禪, 離此無門, 離此無路)의 단락을 활용한 문장이다. 43 마음이 선정(禪定)에 들면 세간의 생멸하는 모든 차별상[相]을 알 수 있다.199) 心在定, 則能知世間生滅諸相. [평] 虛隙日光, 纖埃擾擾;淸潭水底, 影像昭昭. 198) 『都序』 권상 大48 p.399b9(故三乘學人, 欲求聖道, 必須修禪, 離此無門, 離此無路)의 단락을 활용한 문장이다. “만약 마음의 작용을 모두 거두어들이면 마음이 선정에 들고, 마음이 선정에 들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생멸하는 법의 차별상을 알 수 있다.” (『遺敎經』 大12 p.1111c26. 若攝心者, 心則在定. 心在定故, 能知世間生滅法相.) 차이는 ‘生滅法相’의 법(法)자를 제(諸)자로 바꾼 점이다. “마침내 대중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서 정을 닦고 혜를 고루 갖추어 전후로 분별사려를 쉰 지 10년이 되었다. 그럼에도 미세한 습관적 의식들이 고요한 혜(慧)에 생겼다 사라지고 차별된 뜻들이 빈 마음에 전개되어 나타나는 것이 빈틈으로 햇살이 비쳐 가는 먼지 날리고, 맑은 연못 바닥에 달그림자가 또렷한 것과 같았다. 어찌 텅 빈 마음으로 침묵을 지키기만 하는 치선과 단지 문자만을 파고드는 광혜에 비교할 것인가?” 遂捨衆入山, 習定均慧, 前後息慮, 相計十年. 微細習情起滅, 彰於靜慧, 差別法義羅列, 見於空心, 虛隙日光, 纖埃擾擾, 淸潭水底, 影像昭昭. 豈比夫空守默之癡禪, 但尋文之狂慧者?) 44 대상을 보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불생(不生)이라 하고, 불생을 무념(無念)201)이라고 하며, 무념을 해탈이라고 한다.202) 見境心不起, 名不生; 不生, 名無念;無念, 名解脫. [평] 그중에 하나만 들어도 세 가지가 모두 갖추어지니, 각자 홀로 있는 상[單相]이 아니다.203) 戒也, 定也, 慧也. 擧一具三, 不是單相. 201)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 이 문장은 보당무주(保唐無住)의 말이기 때문에 남종선(南宗禪)의 종지인 무념과 그 개념이 다르다. 남종선에서는 대상 경계에서 활발하게 작용을 일으키면서도 망념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무념이라는 말을 쓴다. “무념이란 상념 속에 있으면서 그 상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敦煌本 『壇經』 大48 p.338c5. 無念者, 於念而不念 ); “어떤 것을 무념이라 하는가? 무념법이란 모든 법을 보면서도 어떠한 법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 있으면서도 그 어느 곳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항상 자신의 성품을 청정하게 하여 육적(六賊)으로 하여금 육문(六門:眼·耳·鼻·舌·身·意)을 벗어나게 하여 육진(六塵:色·聲·香·味·觸·法) 가운데 있더라도 그 경계를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으면서 오고 가는 데 자유로우니, 이것이 곧 반야삼매(般若三昧)요 자재한 해탈이다. 이것을 무념행이라 한다.” (같은 책 大48 p.340c19. 何名無念? 無念法者, 見一切法, 不著一切法, 遍一切處, 不著一切處. 常淨自性, 使六賊從六門走出, 於六塵中, 不離不染, 去來自由, 卽是般若三昧, 自在解脫. 名無念行.); “어떤 학인이 와륜선사의 게송을 읊었다. ‘와륜은 기량이 있어 모든 생각을 다 끊었다네. 경계를 대하고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 깨달음만 나날이 자라네.’ 혜능대사가 이것을 듣고 ‘이 게송은 심지를 밝히지 못했으니, 그것대로 따라 행하면 속박이 가중된다’고 말하고 스스로 게송 하나를 보여주었다. ‘혜능은 기량이 없어 생각을 하나도 끊지 못했다네. 경계를 대하면 마음이 자주 일어나거늘 깨달음인들 어찌 (宗寶本 『壇經』 大48 p.358a26. 有僧, 擧臥輪禪師偈曰, ‘臥輪有伎倆, 能斷百思想, 對境心不起, 菩堤日日長.’ 師聞之曰, ‘此偈未明心地, 若依而行之, 是加繫縛.’ 因示一偈曰, ‘慧能沒伎倆, 不斷百思想, 對境心數起, 菩提作麽長!’) 202) 보당무주(保唐無住 714~774)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당나라 상국 두홍점(杜鴻漸)이 다시 물었다. ‘무엇이 불생이며, 무엇이 불멸입니까? 어떻게 해탈할 수 있 무주선사가 말했다. ‘대상을 보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불생이라하니 불생이면 곧 불멸입니다. 생도 멸도 없으면 눈앞의 대상에 속박되지 않으니 그 자리에서 해탈을 얻습니다. 불생을 무념이라고 하니 무념이면 멸함도 없고 무념이면 속박도 없으며 무념이면 벗어날 것도 없습니다.’” (『景德傳燈錄』 권4「無住禪師傳」 大51 p.234c23. 公又問, ‘云何不生? 云何不滅? 如何得解脫?’ 師曰, ‘見境心不起名不生, 不生卽不滅. 旣無生滅, 卽不被前塵所縛, 當處解脫. 不生名無念, 無念卽無滅, 無念卽無縛, 無念卽無脫.’) (『景德傳燈錄』 권4 「無住傳」 大51 p.234b24. 一心不生, 具戒定慧, 非一非三也.) 45 도를 닦아서 멸(滅)을 증득하는 것은 또한 진실한 멸이 아니고, 마음과 법이 본래부터 적멸(寂滅)한 이것이 곧 진실한 멸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본래부터 언제나 그대로 적멸한 상이다”204)라고 한다. 修道證滅, 是亦非眞也;心法本寂, 乃眞滅也. 故曰,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평] 그러므로 문수보살은 생각으로 헤아렸지만, 유마거사는 침묵했던 것이다.206) 眼不自見, 見眼者, 妄也. 故妙首思量, 淨名杜默. 204) 『法華經』 권1 「方便品」에 나오는 게송 중 한 구절. 문수보살이 불이법(不二法)에 대해서 유마에게 묻자 유마거사가 침묵으로 응답한 것을 말한다. “이에 문수사리가 유마거사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각자 불이법문에 대해서 설하였습니다. 이제 당신께서 보살이 들어가는 불이법문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설하셔야 합니다.’ 그때 유마거사는 묵묵히 말이 없었다. 문수사리가 찬탄하며 말했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이처럼 문자와 언어가 있지 않는 경계에 도달해야 진실하게 불이법문에 들어간 것이로구나!’” (『維摩經』 권중 大14 p.551c20. 於是, 文殊師利問維摩詰, ‘我等各自說已, 仁者, 當說何等, 是菩薩入不二法門.’ 時維摩詰, 默然無言. 文殊師利歎曰, 46 가난한 사람이 구걸하러 오면 자신의 분수에 따라 베풀어주고, 그가 나와 한 몸인 것처럼 아픔을 느껴야207) 진실한 보시208)이다. 貧人來乞, 隨分施與, 同體大悲, 是眞布施. [평]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210)이 우리네 살림살이이다. 自他爲一曰同體. 空手來, 空手去, 吾家活計. 207) 동체대비(同體大悲). 고통을 받고 있는 모든 중생이 자신과 동일한 몸이라고 관찰하며 함께 아파하는 마음. 종밀(宗密)에 따르면, 동체대비는 본연의 성품에서 나오는 것으로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동체대비는 본성에 그대로 부합하는 근본적인 원[大願]이다. 이는 성(性)에 본래 지니고 있는 것으로 달리 (『圓覺經略疏』 권하 大39 p.553b14. 同體大悲, 稱性大願, 性本有之, 非別新得.) (『虛堂語錄』 권4 大47 p.1012b2. 古德道, ‘達磨大師, 空手來, 空手去.’) 47 어떤 사람이 와서 해치려 해도 스스로 마음을 굳게 지켜서[攝心] 성내며 원망하지 마라! 한 찰나라도 성내는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장애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다.211) 有人來害, 當自攝心, 勿生嗔恨! 一念嗔心起, 百萬障門開. [평] 『열반경』에서는 향을 발라주거나 몸을 베거나 모두 무심하라212)고 했다. 성냄은 차가운 구름 가운데 천둥 번개가 쳐서 불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213) 煩惱雖無量, 嗔慢爲甚. 涅槃云, 塗割兩無心. 嗔如冷雲中, 霹靂起火來. 211) 80권본 『華嚴經』 권49 大10 「普賢行品」 p.257c17에 나오는 “만약 모든 보살이 다른 보살에게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온갖 장애의 문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如來於怨親中, 其心平等. 如以刀割, 及香塗身, 於此二人, 不生增益損減之心. 唯能處中, 故名如來.) (『大智度論』 권14 大25 p.167c1. 云何瞋諍? 世人忿諍, 是猶可恕, 出家之人, 何可諍鬪! 出家心中, 懷毒自害, 如冷雲中, 火出燒身.) 48 만약 인욕행(忍辱行)이 없으면, 온갖 수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214) 若無忍行, 萬行不成. [평] 참고 있는 마음은 실체 없는 꿈처럼 사라질 것이고, 모욕을 당하고 있는 상태는 거북이의 털215)과 같이 본래부터 없는 것이다.216) 行門雖無量, 慈忍爲根源. 忍心如幻夢, 辱境若龜毛. 214) 『新華嚴經論』 권11 大36 p.791c4(若無忍者, 萬行不成.)를 인용하였다. 49 본래의 진심을 지키는 것217)이 가장 근본적인 정진(精進)이다. 守本眞心, 第一精進. [평] 그러므로 “망상 피우지 마라! 망상 피우지 마라!”219)라고 말한다. 若起精進心, 是妄, 非精進. 故云,“ 莫妄想! 莫妄想!” 懈怠者, 常常望後, 是自棄人也. 217) 수심(守心) 또는 수본진심(守本眞心)은 5조 홍인(弘忍)이 강조하는 선법이다. (『最上乘論』 大 48 p.377c11. 守心第一, 此守心者, 乃是涅槃之根本, 入道之要門, 十二部經之宗, 三世諸佛之祖.); “수많은 경론이 본래의 진심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지 않으니 이것이 핵심이다.” (『最上乘論』 大48 p.378a19. 千經萬論, 莫過守本眞心, 是要也.) 218) 『華嚴經隨疏演義鈔』 권39 大36 p.301b13. “학인들이 무슨 질문이건 해 오면, 무업은 대부분 ‘망상 피우지 마라!’고 대답해 주었다.” (『景德傳燈錄』 권8 「汾州無業傳」大51 p.257a25. 凡學者致問, 師多答之云, ‘莫妄想!’);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여러 화상들이여, 망상 피우지 마라! 하늘은 하늘이요 땅은 땅이며, 산은 산이요 (『雲門廣錄』 권상 大47 p.547c11. 上堂云, ‘諸和尙子! 莫妄想! 天是天, 地是地;山是山, 水是水;僧是僧, 俗是俗.’) (『修心訣』 大48 p.1009a19. 我今若自生退屈, 或生懈怠, 而恒常望後, 須臾失命, 退墮惡趣.) 50 주문을 외우는 까닭은 현세의 업은 제어하기 쉬워 자신의 힘으로 실행하여 피할 수 있으나, 과거세의 업은 제거하기 어려워 반드시 신주(神呪)의 힘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持呪者, 現業易制, 自行可違, 宿業難除, 必借神力. [평] 그러므로 신주를 지송하지 않고 마사(魔事)로부터 멀리 벗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摩登得果, 信不誣矣. 故不持神呪, 遠離魔事者, 無有是處. 221) 마등(摩登). SP :mātanga. 마등기(摩登祇) 또는 마등가녀(摩登伽女)라고도 한다. 51 예배란 공경이요 굴복의 뜻이니, 진실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다.224) 禮拜者, 敬也, 伏也, 恭敬眞性, 屈伏無明. [평] 身口意淸淨, 則佛出世. 224) “예라는 것은 공경이고 배라는 것은 굴복의 뜻이다. 진실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을 가리켜 예배라고 한다.” (『破相論』 大48 p.369a6. 夫禮者, 敬也;拜者, 伏也. 所謂恭敬眞性, 屈伏無明, 名爲禮拜) 225) “신·구·의 삼업이 청정해지는 것을 두고 부처님이 세상에 나왔다고 하며, 신·구·의 삼업이 청정하지 않은 것을 두고 부처님이 멸도했다고 한다” (『黃龍語錄』 大47 p.637b13. 身口意淸淨, 是名佛出世;身口意不淨, 是名佛滅度.)
因悟斷習, 轉凡成聖者, 漸也.
故自生退屈也.
스스로 굽히지도 않고 내세우지도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廣擧菩薩, 果徹因源, 則五十五位也.
146) 주석1) 참조.
148) “비유하자면 가난한 사람이 밤낮으로 다른 사람의 보배를 헤아려도 자신에게는 반 푼어치도 없는 것과 같으니, 교설에 대해서 많이 듣기만 하는 것 역시 이와 같다.”
152) 지의(智顗)의 『摩訶止觀』 권5상 大46 p.48c29, 징관(澄觀)의 『華嚴經疏』 권21 大 35 p.654b13 등에 나오는 비유이며, 종밀도 이 비유를 쓰고 있다. 다리와 등잔의 기름은 수행, 눈과 등불은 깨달음을 각각 비유한다.
과 다리가 서로 돕는 것과 같다.”
病瘥藥除, 佛魔俱掃, 始於此段大事因緣, 有少分相應耳.)
155) 대주혜해(大珠慧海)의 말이다.
버리려는 것과 구하려는 것은 모두 번뇌에 물든 것이다.
끊는다는 말은 끊는 주체[能]와 끊을 대상[所]이 나누어져 있다는 뜻이며, 일으키지 않는다는 말은 주체와 대상의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157)
157) 번뇌와 열반이 두 가지 차별된 경계가 아니라는 도리에 기초한다.
이는 오로지 성기(性起)160)의 측면만 밝힌 것이다.
159) 보조지눌(普照知訥)의 저술에 두 구절 온전히 드러나 있다.
160) 성기란 궁극적 경지인 불과(佛果)의 경계 곧 과위(果位)에서 온갖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오로지 청정할 뿐 오염은 없다. 그러므로 ‘한 찰나의 연기도 발생함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반면 연기는 오염되거나 청정하거나 두 가지 차별된 인연에 따라 온갖 현상을 일으키는 작용으로 인위(因位)의 경계에서
현상의 발생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 구절은 성(性)과 상(相)을 함께 밝혔다. 경에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아야 무명을 영원히 끊었다고 한다”163)고 하였고,
162) 『宗鏡錄』 권18 大48 p.511c14에 나오는 말. 보조지눌(普照知訥)의 『修心訣』 大48 p.1007c20에도 인용되어 있다.
163) 두 구절 모두 일치하는 경전은 없지만, 두 번째 구절은 『圓覺經』 大17 p.913b22의 인용으로 보인다. “영원히 무명을 끊었다:본각(本覺)이 일단 나타나면 본래 없었던 무명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을 가리켜 ‘영원히 끊어졌다’라고 한다.”
164) 종밀(宗密)의 말이다.
마음은 마술사[幻師]이고 몸은 마술로 나타난 성(城)이며 세계는 마술의 옷이고 이름과 모양은 마술로 나타난 음식이다.166)
『圜悟語錄』 권6 大47 p.740c22를 비롯하여 여러 선문헌에 인용 빈도가 높다.
166) 대주혜해(大珠慧海)의 말에 따른다. 본래 없는 것을 있는 듯이 펼치는 ‘마술’은 언어의 방편을 비유하며, ‘마술사’는 중생의 조건과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그 방편을 펼치는 불조(佛祖)를 나타낸다. 80권본 『華嚴經』 권52 大10 p.276c12 등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혜의 방편’을 마술[幻術]에 비유하고 그것을 펼치는 위대한 마술사[大幻師]를 부처님에 비유한 것이 대표적이다.
본성에는 원래 생멸이 없으므로 생사와 열반의 차별도 없고,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으므로 피었다가 지는 일도 없다.168)
169) 『思益經』 권1 大15 p.36c12의 다음 단락을 요약한 내용이다.
보살은 다만 낱낱의 상념을 중생으로 삼을 뿐이다.
이상 신해(信解)172)에 대하여 언급했다.
此上論信解.
171) 『金剛經』 大8 p.749a9.
172) 근본적인 이치를 확고히 믿고 이해하는 것.
문수는 천진한 이치에 통달했고, 보현은 연기에 밝았다.174)
이하에서는 수행과 증득[修證]에 대하여 말하겠다.
此下論修證.
174) 문수보살을 돈오에, 보현보살을 점수에 배대한 방식은 주로 『원각경』 주석서에 보이는 해석 방식이다. 한편 이러한 방식은 종밀이 제시한 돈오점수의 돈점관에 근거하고 있다. “『원각경』 「문수보살장」은 돈오를 밝힌 것이니 믿고 이해하는 도리를 드러내는 장이고, 「보현보살장」 아래 10개의 장은 점수를 밝힌 것이니 곧 믿고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수행하는 방법을 드러낸 장이다.”
이것은 수행의 법도인 세 가지 무루학177)을 밝힌 것이다.
지 없는 것이다.’179)
이 네 가지 계는 다른 모든 계의 근본이므로 별도로 밝혀서 생각으로 범하는 잘못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178) 攝心. 마음을 오로지 하나의 경계에 안주하도록 하여 산란(散亂)과 혼침(昏沈)이라는 두 가지 병통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
179) 『楞嚴經要解』 권12 卍17 p.806b15.
180) 무억 등 삼구는 정중무상(淨衆無相) 곧 김화상(金和尙 684~762)의 선법이었는데, 이를 수용하여 삼학에 적용한 것은 무주(無住)이다. 『景德傳燈錄』 권4 「無住傳」 大51 p.234b23.
181) 『四分律行事鈔』 권중 大40 p.50b6, 『首楞嚴經集解熏聞記』 권4 卍17 p.640b4 등에 나오는 말이지만, ‘爲’자가 모두 ‘如’자로 되어 있다.
한번 심계(心戒)185)를 깨뜨리기만 해도 온갖 허물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이와 같은 마군이 말법시대에 불처럼 번지듯 일어나 정법(正法)을 어지럽히니 공부하는 자들은 상세히 살피라.
184) 『法集別行錄節要』 韓4 p.758b3.
계를 소중히 여기기를 부처님처럼 하면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계시니, 188)
반드시 초계비구189)와 아주비구190)로써 본보기를 삼아야 한다.
187) 菩提果. bauddhī. 모든 수행[因行]의 가장 궁극적인 결과인 보리를 나타내는말.
189) 草繫比丘. 청정하게 계를 지킨 수행자를 대표한다. 『大莊嚴論經』 권3 大4 p.268c4·『福蓋正行所集經』 권12 大32 p.744b13 등에 일화가 보인다.
풀을 뜯어 버리고서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가 없어 비구들은 뜨거운 햇살에 화상을 입으면서까지 참고 버티었다. 마침 사냥을 나온 왕이 이 광경을 보고 비구들을 풀어주었으며, 왕은 비구들의 지계(持戒)에 탄복하여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190) 鵝珠比丘. 초계비구와 함께 청정하게 계를 지킨 수행자를 대표한다. 『大莊嚴論經』 권11 大4 p.319a20 등에 일화가 보인다.
애(愛)는 윤회의 근본이 되고 욕(欲)은 생을 받는 인연이 된다.
又云,“ 恩愛一縛着, 牽人入罪門.”
192) 渴愛. S:trsnā, pipāsa, P :tanhā, pipāsā, T: sred-pa. 목마른 사람이 아지랑이를 물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강렬한 애착을 갖는 것.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마음의 강렬함을 목마른 사람이 물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의 간절함에 비유한 말이다.
194) 『圓覺經』 본문에는 ‘諸’자가 ‘除’자로 되어 있는데, 서산이 바꿔 쓴 것으로 보인다. 위의 주석 참조.
195) 『楞嚴經』 권6 大19 p.131c17.
196) 『優填王經』 大12 p.72a6.
범인의 경계를 넘어 성인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과 앉아서 해탈하거나 서서 입적하는 것은 모두 선정의 힘 때문이다.
빈틈으로 햇살이 비치니 가는 먼지 날리고, 맑은 연못 바닥에 달그림자가 또렷하다.200)
199) 『遺敎經』을 인용한 문장이다.
200) 바른 선정(禪定)의 경계에서 차별상에 대한 올바른 분별이 구현된다는 점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정(定)에만 치우친 치선(癡禪)과 혜(慧)에만 기운 광혜(狂慧)를 모두 비판한 『都序』의 다음 단락을 인용했다.
(『都序』 권상 大48 p.399c12.
계이기도 하고, 정이기도 하고, 혜이기도 하다.
자라랴!’”
습니까?’
203) 이 또한 계·정·혜가 모두 동일하지도 않고 서로 다른 세 가지도 아니라는 보당무주의 말을 기초로 한다. “일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계·정·혜를 갖추게 되니 하나도 아니고 셋도 아니다.”
눈은 스스로를 보지 못하니,205) 눈이 눈을 본다고 하면 거짓이다.
이하에서는 세부적인 행법(行法)을 두서없이 제시하겠다.
此下散擧細行.
205) 『大般涅槃經』 권29 大12 p.536a19, 『大毘婆沙論』 권20 大27 p.104b11, 『中論』 권1大30 p.6a10, 『大慧語錄』 권1 大47 p.812c9, 『修心訣』 大48 p.1007a15 등 여러 문헌에 나오는 말이다.
206) 두묵(杜默). 입을 닫고 침묵하는 것.
‘善哉! 善哉! 乃至無有文字語言, 是眞入不二法門!’)
자신과 타자가 하나가 되는 것을 동체라고 한다.209)
새롭게 얻는 것이 아니다.
208) 布施. S:dāna. 6바라밀의 하나. 보시란 물질 또는 정신적 측면에서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베풀어주는 것인데, 6바라밀 체계에서는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다 내어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하면서도 주는 자와 받는 자 그리고 주는 보시물에 대한 상(相)을 전혀 지니지 않아야 진실한 보시라 한다.
209) “인식 기관과 그 대상이 다 소멸했다면, 자신과 타자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마음속에서 동체대비를 일으킬 수 있다.”(『圓覺經略疏』 권하 大39 p.558b27. 根塵旣消, 自他無二. 故能內發同體大悲.)
210) 이 말은 전래의 속담과 같이 일반적으로 쓰였던 말로 보인다. 여기서는 아낌없이 베푸는 보시의 덕을 고양하는 말로 쓰였다. “고덕이 말했다. ‘달마대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갔다.’”
번뇌가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성냄과 교만이 가장 크다.
(若諸菩薩於餘菩薩, 起瞋恚心, 卽成就百萬障門故.)라는 말에 근거한다. 문장 자체는 『華嚴經隨疏演義鈔』 권3 大36 p.21c23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212) “여래는 원한이 있는 사람이든 친한 사람이든 그 마음이 평등하다. 예컨대 칼로 몸을 베려는 자이거나 향을 몸에 발라주는 자이거나 이 두 사람 모두에게 보태거나 더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오직 이런 가운데에 처하므로 여래라 한다.”
(『大般涅槃經』 권7 大12 p.403c16.
213) “무엇이 성내며 다투는 것인가? 세인들이 분쟁하는 것은 그래도 용서할 수 있으나, 출가한 사람이 어찌 다투어서야 되겠는가? 출가한 사람이 마음속으로 독을 품고 스스로 해치는 것은 차가운 구름 속에서 불(번개)이 나와서 몸을 태우는 것과 같다.”
수행문이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욕하는 것이 근원이 된다.
215) 본래 실재하지 않는 것. 거북이가 헤엄을 치다가 수초(水草)가 몸에 묻을 경우 마치 등껍질에 털이 나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 털은 아니다. 이처럼 사량 분별로 만들어 낸 허구의 관념을 비유하는 말로서 토끼뿔[兎角], 석녀의 아이[石女子] 등이 있다.
216) 『傅大士頌金剛經』 大85 p.2a13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만약 정진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면, 이것은 망상일 뿐 정진이 아니다.218)
게으른 자는 언제나 훗날만을 기약하니, 이런 자는 자기 자신을 버리는 사람이다.220)
“수심이 근본이니 이 수심은 곧 열반의 근본이며, 도에 들어가는 긴요한 문이며, 12부경의 근본이며, 과거·현재·미래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다.”
219) 막망상(莫妄想). 분주무업(汾州無業 760~821)의 화두로 유명하지만, 그 뒤로 여러 선사들이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했다.
물은 물이며, 승은 승이요 속은 속일 뿐이다.’”
220) “내가 지금 만약 스스로 물러나 굴복하려는 마음을 일으켜서 게으름을 피우고 항상 훗날을 기약한다면 잠깐 사이에 목숨을 잃고 악취에 떨어질 것이다.”
마등가녀221)가 아나함과222)를 얻은 것은 진실로 거짓이 아니다.223)
마등가는 종족 이름으로서 인도 신분 계급 중 최하층인 전다라(旃陀羅 S:cāndāla)의 일종에 속한다. 이 마등가 종족의 한 여자가 아난(阿難)에게 물을 건네준 이후로 아난을 연모하게 되었다. 그래서 부인이 되려고 자기 어머니의 주문을 빌려 아난을 방에 갇히게 했는데, 이때 부처님이 문수보살로 하여금 신주(神呪)로써 아난을 풀려나게 했다. 이후에도 아난을 쫓아다니자 부처님은 비구의 처가 되려면 비구니가 되어야 한다고 하고 출가시켜서 불퇴전위(아나함과)를 얻게 했다. 『摩登伽經』 권상 「度性女品」 大21 p.399c26 참조.
222) 阿那含果. anāgāmin. 소승 4과(四果) 중 세 번째. 불환과(不還果)라고도 한다.이 과를 성취하면 다시는 욕계(欲界)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이 부른다.
223) 『摩登伽經』 이외에 『楞嚴經』 권1 大19 p.106c9 등에도 일화가 전한다.
신·구·의 삼업이 청정해지면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신다.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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