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달마구사론

[스크랩] 아비달마구사론 제 23 권

수선님 2018. 12. 23.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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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 23 권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6. 분별현성품 ②
  
  이와 같이 '수(修)'에 들어가는 두 가지 문(부정관과 지식념)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문에 의해 마음은 곧바로 선정[定]을 획득하게 되는데, 마음이 선정을 획득하고 나면 다시 무엇을 닦아야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미 지(止)를 닦아 성취하였으므로
  관(觀)을 성취하기 위해 '염주'를 닦아야 할 것이니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으로써
  몸과 수(受)와 마음과 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依已修成止 爲觀修念住
  以自相共相 觀身受心法
  
  그것의 자성은 문(聞) 등의 혜이며
  그 밖의 근거는 상잡(相雜)과 소연인데
  설한 순서는 '생'에 따른 것으로서
  전도를 대치하기 때문에 오로지 네 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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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自性聞等慧 餘相雜所緣
  說次第隨生 治倒故唯四
  
  논하여 말하겠다. 이미 닦아 성취한 뛰어난 사마타(奢摩他, 즉 止)를 소의로 삼아 비발사나(毘鉢舍那, 즉 觀)를 성취하기 위해 4념주(念住)를 닦아야 한다.1)
  4념주는 어떻게 수습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으로써 몸[身]과 수(受)와 마음[心]과 법(法)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몸과 수와 마음과 법의 각기 차별되는 자성을 일컬어 '자상'이라고 하며, 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비상(非常)의 성질이고, 일체의 유루법은 모두 괴로움[苦]의 성질이며, 아울러 일체의 법은 공(空)과 비아(非我)의 성질이라는 것을 일컬어 '공상'이라고 한다.2) 그리고 몸의 자성은 대종과 조색이며, 수와 마음의 자성은 자신의 명칭에 의해 드러나는 바와 같으며,3) 법의 자성은 이 세 가지를 제외한 그 밖의 법을 말한다.
  그런데 전(傳)하여 설(說)하기를, "선정에 머물면서 극미와 찰나로써 각기 개별적으로 몸을 관찰하는 것을 일컬어 신념주가 원만히 성취되었다고 하며, 그 밖의 세 염주의 원만한 상도 상응하는 바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4)
  
  
1) 부정관과 지식념에 의해 욕탐의 마음과 산란된 마음이 억지[止, 혹은 奢摩他, samatha]되었으므로,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몸[身]과 감각[受]과 마음[心]과 그 밖의 제법[法]에 대한 보편적인 상[共相]과 개별적인 상[自相]을 관찰[觀, 혹은 毘鉢舍那, vipasyana]해야 하는데, 이 같은 마음의 억지와 관찰은 해탈의 자량이 되기 때문에 '순해탈분'이라고 한다.
2) 자상(svalaksana)이란 독자상 혹은 개별상으로, 일체 현상의 조건이 되는 신(身)·수(受)·심(心)·법(法)의 자성을 순서대로 염(染)·고(苦)·무상(無常)·비아(非我)로 관하는 것을 '자상으로써 관하는 것'이라고 하며, 공상(samanya laksana)이란 보편상으로, 현상의 모든 존재를 비상·고·공·무아로 관하는 것을 '공상으로써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3) '수'의 자성은 촉에 따라 영납(領納)하는 6수신(受身)이며, 마음의 자성은 6식신(識身), 법의 자성은 앞의 3법을 제외한 그 밖의 제법으로, 이를테면 색·수·식온을 제외한 상온과 행온 그리고 3무위법을 말한다.
4) 이를테면 몸의 자성인 대종과 5근·5경을 공간적으로 1극미에 이를 때까지 분석하고, 시간적으로는 1찰나에 근거하여 그것의 자상과 공상을 관하는 것을 신념주라고 하며, 그 밖의 법은 공간적 점유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1찰나에 근거하여 그것의 자상과 공상을 관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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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4념주의 본질[體]은 무엇인가?
  이러한 4념주의 본질에는 각기 세 가지가 있으니, 자성(自性)과 상잡(相雜)과 소연(所緣)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즉 자성염주(즉 염주 그 자체)는 혜를 본질로 하는데, 이러한 혜에도 역시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문(聞) 등에 의해 성취되는 혜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역시 3종 염주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잡염주는 이러한 혜와 그 밖의 구유하는 법을 본질로 하며, 소연염주는 이러한 세 가지 혜의 소연이 되는 제법을 본질로 한다.5)
  자성염주의 본질은 바로 혜로서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안 것인가?
  경에서 설하기를, "몸에 대해 순신관(循身觀, kayanupa in : 몸을 쫓아 관하는 것)으로 머무는 것을 신념주라고 이름하며, 그 밖의 세 가지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다.6) 즉 '쫓아서 관하는 것[循觀, anupasin]'이라고 이름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혜 자체에 근거한 것이니, 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몸을] 쫓아서 관하는 관법의 작용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혜에 대해 염주라고 이름한 것인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러한 품류는 기억[念]이 증대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기억의 힘이 혜를 유지시켜 일어날 수 있게 한다는 뜻으로, 마치 도끼가 쐐기의 힘에 의해 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다."7)
  
  
5) 자성염주의 본질은 문·사·수소성의 세 가지 혜로서, 4념주는 각기 이러한 혜를 본질로 하여 성립하기 때문에 역시 세 가지 종류로 분류된다. 상잡염주란 혜와 상응·구유하는 심·심소법과 득(得)과 4상을 말하며, 소연염주란 혜에 의해 관찰되는 몸·수·마음·법 등을 말한다. 즉 염주는 그것을 소연으로 하여 성립하였기 때문이다.
6) 『잡아함경』 권제24(대정장2, p.171상, p.상), "이른바 4념처가 있으니,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한 것인가? 몸을 몸이라고 관하는 염처이며, 지각을 지각으로, 마음을 마음으로, 법을 법으로 관하는 염처가 바로 그것이다." 『중아함경』 권제24 「염처품」(대정장1, p.528) 참조.
7) 염주의 본질이 혜라면 왜 '혜주(慧住)'라고 이름하지 않고 '염주(念住)'라고 이름한 것인가 하면, '염'이 증대하여 그 힘에 의해 혜가 소연에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주 세친은 이와 반대로 염은 혜에 의해 관찰된 것만을 능히 명기(明記)하는 것으로, 혜의 힘이 '염'을 소연의 경계에 머물게 하기 때문에 '염주'라고 이름한 것이라고 하였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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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혜가 염으로 하여금 [소연에] 머물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혜에 대해 '염주'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이라고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니, 혜에 의해 관찰된 바에 따라 능히 명기(明記)하기 때문이다. 곧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무멸(無滅)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능히 몸에 대해 순신관(循身觀)으로 머물 때라면, 몸을 소연으로 하는 '염'이 머물 수 있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8) 세존께서도 역시 설하시기를, "만약 어떤 이가 몸에 대해 순신관으로 머물 때라면, '염'은 바로 틀림없이 머물게 된다"고 하셨던 것이다.9)
  그런데 어떤 경에서는 "이러한 4념처는 무엇에 의해 집기(集起)하며, 무엇에 의해 산멸(散滅)하는 것인가? 먹거리[食]와 촉(觸)과 명색(名色)과 작의(作意)가 집기하기 때문에 순서대로 신·수·심·법이 집기하게 되는 것이며, 먹거리와 촉과 명색과 작의가 산멸하기 때문에 순서대로 신·수·심·법이 산멸하게 되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10) 이는 즉 소연염주를 설하고 있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염'이 그것(그같이 집기하고 산멸하는
  
  
8) 『잡아함경』 권제19 제535경(대정장2, p.139중). 여기서 무멸은 존자 아나율(阿那律, Aniruddha). "무엇을 일러 4념처를 즐기는 것이라고 하는가? 존자 대목건련이시여! 만약 어떤 비구가 몸을 몸으로 관하는 염처[身身觀念處]에서 마음이 몸을 소연으로 삼아 정념(正念)으로 머물어 조복받고 지식(止息) 적정(寂靜)하여 한 마음이 증진(增進)하면, 이와 마찬가지로 수·심·법념처에서 정념으로 머물어 조복받고 지식 적정하여 한 마음이 증진하면 이를 4념처를 즐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본론의 뜻은 혜의 심소가 순신관에 의해 몸을 관찰할 때 동시에 염의 심소가 혜의 심소가 관찰한 바를 기억하여 그 소연(즉 몸)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9) 『잡아함경』 권제11 제281경(대정장2, p.77하), "어떻게 4념처를 닦아 7각분의 원만함을 획득하는 것인가? 목건련 비구는 이와 같이 몸에 따라 신관(身觀)에 머무니, 그는 몸에 따라 신관에 머물 때 기억[念]을 모아 안주하여 결코 잊지 않았다.(云何修四念處得七覺分滿足? 目?連比丘如是順身身觀住, 彼順身身觀住時 攝念安住不忘.)"
10) 『잡아함경』 권제24 제609경(대정장2, p.171상). 즉 음식에 의해 몸이 생겨나고, 촉에 의해 수가, 명색에 의해 마음이, 작의에 의해 법이 생겨난다. 따라서 음식이 멸하면 몸이 멸하고, 내지 작의가 멸하면 법이 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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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수·심·법)에서 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염주의 개별적인 명칭은 소연에 따른 것으로, 여기에는 자신과 다른 이와 양자 모두의 상속을 소연으로 삼는 등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각각의 염주에는 각기 세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이다.11)
  이러한 4념주를 설한 순서는 그러한 관법이 생겨나는 순서에 따른 것이다.
  다시 어떠한 연유에서 이와 같은 순서로 생겨나게 된 것인가?
  대상이 거친 것부터 마땅히 먼저 관해야 하기 때문에, 혹은 온갖 욕탐은 신처(身處)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4념주는 몸을 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몸을 탐하는 것은 '수'에 대해 흔락(欣樂)하였기 때문이며, '수'에 대해 흔락하는 것은 마음이 조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마음이 조화되지 못한 것은 번뇌[惑]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니, 그래서 '수' 등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순서로 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4념주는 순서대로 그것이 청정[淨]하며, 즐거우며[樂], 항상[常]하며, 자아[我]라고 하는 네 가지 종류의 전도를 대치하기 때문에 오로지 네 가지만이 존재하여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것이다.12)
  나아가 이러한 4념주 중에서 앞의 세 가지 종류는 오로지 소연이 섞여 있지 않은 부잡연(不雜緣)만을 대상으로 하지만, 네 번째 염주만은 잡연(雜緣)과 부잡연 두 가지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즉 만약 오로지 법만을 관찰하는 경우라면 그것을 부잡연이라고 하며, 신(身) 등에 대해 두 가지나 세 가지, 혹은 네 가지를 모두 관찰하는 경우라면 이를 일컬어 잡연이라고 한다.13)
  
  
11) 4념주 각각의 명칭은 소연에 따른 것으로, 이를테면 몸을 소연으로 하는 염주를 신념주라고 하며, 여기에는 다시 자신의 몸을 소연으로 하는 자신염주(自身念住)와 다른 이의 몸을 소연으로 하는 타신염주(他身念住)와 양자 모두를 소연으로 하는 공신염주(共身念住)가 있는 것이다.
12) 신념주는 몸을 부정한 것으로 관찰하여 그것이 청정[淨]하다는 전도를 대치하며, 수념주는 감각을 괴로운 것으로 관찰하여 그것이 즐겁다[樂]는 전도를 대치하며, 심념주는 마음을 무상한 것으로 관찰하여 그것이 영원하다[常]는 전도를 대치하며, 법념주는 제법을 무아라고 관찰하여 그것이 자아[我]라는 전도를 대치한다.
13) 여기서 잡연이란 신·수·심·법의 네 가지를 관찰함에 있어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네 가지를 함께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하며, 부잡연이란 오로지 한 가지만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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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신(身) 등의 소연이 섞여 있는 법념주를 완전히 닦고 나서 다시 어떠한 무엇을 닦아야 하는 것인가?14)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는 법념주에 머물면서
  네 가지 소연을 모두 관찰하니
  비상(非常)과 고(苦)와 공(空)과
  비아(非我)의 행상을 닦는 것이다.
  彼居法念住 總觀四所緣
  修非常及苦 空非我行相
  
  논하여 말하겠다. 그 같은 관행자(觀行者)는 소연이 모두 섞여 있는 잡연(雜緣)의 법념주에 머물면서 신(身) 등의 네 가지 소연의 경계를 네 가지 행상(行相)으로 함께 관찰하는 관법을 닦아야 하니, 이른바 비상(非常)·고(苦)·공(空)·비아(非我)가 바로 그것이다.15)
  
  
14) 즉 부정관과 지식념의 두 가지 가행을 완전히 닦고 나서 소연이 섞여 있지 않은[不雜] 신·수·심·법의 염주를 각기 차례로 일으키며, 다시 소연이 섞여 있지 않은 법념주와 무간에 소연이 섞여 있는 잡연의 법념주를 닦은 다음에는 그 모두를 소연으로 하는, 다시 말해 총연(總緣)을 대상으로 하는 공상(共相)의 법념주를 닦아야 하는데, 이를 총상염주(總相念住)라고 한다.
15) 이상의 부정관과 지식념, 4념주, 그리고 총상염주를 3현위(賢位, 현자의 세단계), 또는 외범위(外凡位, 깨달음 밖의 단계), 또는 순해탈분(順解脫分, 해탈에 수순하는 단계)이라고 하는데, 이 같은 과정을 『대비바사론』 권제188(한글대장경125, p.290-291)에 의거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부정관·지식념(염주의 가행)……자상(또는 別相, 즉 不雜緣)염주 중의 신·수·심·법념주……잡연(雜緣)의 법념주……3의관(義觀)·7처선(處善)……총상염주의 가행(즉 고·집·도제의 4상을 소연으로 하는 문소성의 신념주……이와 무간에 3제의 각 4상을 소연으로 하는 문소성의 수·심념주……이와 무간에 4제의 4상을 소연으로 하는 문소성의 법념주……이와 무간의 문소성과 동일한 형식의 사소성의 신·수·심·법념주)……고제의 4상을 소연으로 하는 수소성의 법념주(總緣 共相의 법념주). 이 같은 법념주의 최후 상상품에서 마침내 순결택분(順決擇分)으로 일컬어지는 4선근(善根)의 첫 번째 단계인 난위(煖位)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3의관은 온·처·계의 뜻을 관찰하는 것. 7처선이란 색 등의 온은 고(苦)이고, 집·멸·도·애미(愛味)·과환(過患)·출리(出離)라고 관찰하는 것. 여기서 앞의 네 가지는 4제를 관찰하는 것이며, 뒤의 세 가지는 색의 집·고·멸제를 거듭하여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같은 3의관과 7처선은 4념주를 관찰하고 나서 총상염주의 가행으로서 닦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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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관법을 닦고 나면 어떠한 선근(善根)을 낳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로부터 난법(煖法)이 낳아져
  4성제를 모두 다 관찰하고
  열여섯 가지의 행상(行相)을 닦으니
  다음에 생겨나는 정법(頂法)도 역시 그러하다.
  從此生煖法 具觀四聖諦
  修十六行相 次生頂亦然
  
  이와 같은 두 가지 선근은 모두
  처음에는 법념주이고 이후는 4념주이나
  다음의 인법(忍法)은 오로지 법념주로서
  하품·중품은 정법과 동일하며
  如是二善根 皆初法後四
  次忍唯法念 下中品同頂
  
  상품은 오로지 욕계 고제의
  1행상을 1찰나에 관찰한다.
  세제일법의 경우도 역시 그러한데,
  이 모두는 혜이며, 득(得)을 제외한 5온이다.
  上唯觀欲苦 一行一刹那
  世第一亦然 皆慧五除得
  
  논하여 말하겠다. 공상(共相)을 모두 소연으로 하는 법념주[總緣共相法念住, 즉 고제 4상을 소연으로 하는 수소성의 법념주]를 수습하여 점차 성숙하여 마침내 상상품에 이르게 되면 이러한 염주로부터 순결택분(順決擇分)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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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선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일컬어 난법(煖法)이라고 한다.16) 이러한 법은 따뜻함과 같기 때문에 '난법'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 즉 이것은 바로 번뇌라는 땔감을 능히 태우는 성도(聖道)의 불길이 생겨나기 전의 모습으로, 마치 불이 생겨나기 전의 모습과 같기 때문에 '난'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난선근은 그것이 일어나는 상태가 오래 지속하기 때문에 능히 4성제의 경계를 모두 관찰하며, 아울러 16행상도 능히 함께 수습하게 된다. 즉 고성제를 관찰하여 네 가지의 행상을 닦으니, 첫째는 비상(非常)이며, 둘째는 고(苦)이며, 셋째는 공(空)이며, 넷째는 비아(非我)이다.17) 집성제를 관찰하여 네 가지의 행상을 닦으니, 첫째는 인(因)이며, 둘째는 집(集)이며, 셋째는 생(生)이며, 넷째는 연(緣)이다.18) 멸성제를 관찰하여 네 가지의 행상을 닦으니, 첫째는 멸(滅)이며, 둘째는 정(靜)이며, 셋째는 묘(妙)이며, 넷째는 리(離)이다.19) 그리고 도성제를 관찰하여 네 가지의 행상을 닦으니, 첫째는 도(道)이며, 둘째는 여(如)이며, 셋째는 행(行)이며, 넷째는 출(出)이다.20)
  
  
16) 모든 대상의 공상(共相, 즉 비상·고·공·비아)을 소연으로 하는 법념주를 수습함에 있어 처음의 하하품으로부터 점차 상상품으로 승진하여 관지(觀智)가 차례로 성숙하면, 그러한 상상품 염주의 다음 찰나에 순결택분의 첫 번째 단계인 '난법(usmagata)'이라는 선근이 생겨난다. 이는 마치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킬 때 먼저 따뜻함이 생겨나듯이 성도의 불길이 일어나기 전의 따뜻한 상태이기 때문에 '난법'이라고 이름한 것이다.(후술)
17) 5취온 등의 현행의 결과[苦果, 즉 고제]는 인연생기하였으므로 영속적인 것이 아니며[非常, anitya], 본질상 변괴 핍박하는 것이므로 괴로운 것[苦, duhkha]이며, 실체성이 없는 것이므로 공(sunyata)이며, 나 혹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아(anatmaka)이다.
18) 5취온 등의 현행의 원인[苦因, 즉 집제]은 언젠가는 발아할 씨앗처럼 당래 고과(苦果)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인(hetu, cause)'이며, 번뇌와 업이 동등하게 결합하여 생기하는 것이므로 '집(samudaya, arising)'이며, 씨앗에서 싹·줄기 등이 연속하여 생겨나듯이 끊임없이 3유의 과보를 상속하여 낳기 때문에 '생(prabhava, successive appearance)'이며, 진흙·물·막대·물레 등의 조건이 화합하여 항아리가 생기하듯이 고과의 두드러진 조건이 되기 때문에 '연(pratyaya, efficient condition)'이다.
19) 5취온 등의 소멸(즉 멸제)은 일체의 온갖 유루온의 상속이 다한 것이므로 '멸(nirodha, extinction)'이며, 탐·진·치의 3재(災)가 종식된 것이으므로 '정(santa, calm)'이며, 어떠한 괴로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묘(pran ta, excellanT>'이며, 모든 괴로움의 원인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리(nihsarana, salvation)'이다.
20) 5취온 등의 소멸을 획득하는 번뇌대치의 성도(즉 고멸도제)는 열반으로 가는 길이므로 '도(marga, path)'이며, 정리(正理)에 계합하는 것이므로 '여(nyaya, truth)'이며, 올바른 열반의 획득으로 나아가는 것이므로 '행(pratipatti, obtaining)'이며, 현행의 고과를 영원히 초출(超出)하는 결정적인 방법이므로 '출(nairyanika, difinitive releas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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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한 각각의 상에 대해서는 마땅히 뒤(본론 권제26)에서 분별하는 바와 같다.
  이러한 난선근이 하·중·상품으로 점차 증장하여 마침내 그 성취가 원만하게 이루어졌을 때 [또 다른] 선근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일컬어 정법(頂法)이라고 한다.21) 즉 이것은 일어나는 상태가 수승하기 때문에 난법과는 다른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동선근(動善根) 중에서 이 법이 가장 뛰어나 마치 사람의 정수리와 같기 때문에 '정법'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22) 혹은 이것은 [더 높은 산으로] 나아가거나 [하위로] 물러나는 것이 산의 정상과 같기 때문에 이를 설하여 '정'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역시 난법과 마찬가지로 4제를 함께 관찰하며, 아울러 16행상도 능히 함께 수습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난'과 '정' 두 가지 종류의 선근에 처음으로 안족(安足)할 때만 오로지 법념주일 뿐이다.
  어떠한 뜻으로 '처음으로 안족하는 것'이라고 일컬은 것인가?
  이를테면 어떠한 선근도 최초에는 16행상으로써 4성제의 자취를 거닐기에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증진(增進)하는 단계(하·중·상품을 차례로 자주 익히는 단계)에 이르면 4념주를 모두 갖추게 된다. 그렇지만 앞에서 획득된 온갖 염주는 뒤의 단계에서는 더 이상 현전하지 않으니, 거기서는 그것을 공경하거나 존중하는 마음[欽重心]을 낳지 않기 때문이다.
  
  
  
21) 정법(murdhan) 또한 수소성의 순결택분으로서, 공상(共相)을 모두 소연으로 하는[總緣共相] 법념주의 또 다른 상태이다.
22) 정법은 동선근(動善根 즉 물러남이 있는 선근으로, 난·정의 두 선근을 말한다. 이에 반해 不動善根은 다음에 설할 忍法과 世第一法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있어도 뒤로 물러남이 없는 법이다) 중의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정법'이라 이름한 것으로, 세간에서 최고에 이르렀을 때 '정상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정법은 난법과 마찬가지로 4제를 관찰하여 16행상을 닦는 것이지만, 난법보다 더욱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정법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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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이러한 정선근이 하·중·상품으로 점차 증장하여 그 성취가 원만하게 이루어졌을 때, 또 다른 선근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일컬어 인법(忍法)이라고 한다. 즉 4제의 이치를 능히 인가(忍可)하는 것 중에서 이것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23) 또한 이러한 단계에서는 인가하고 나서 더 이상 물러나는 일[退墮]이 없기 때문에 '인법'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선근은 그것에 처음으로 안족할 때든, 그 후 증진할 때든 모두 법념주라고 하는 점에서 앞의 정법과 다른 것이다.24)
  그런데 이러한 인법에는 하·중·상품이 있으며, 그 중 하·중의 두 품은 정법과 동일하다. 즉 그것들은 다 같이 4성제의 경계를 관찰하고, 아울러 능히 16행상을 함께 수습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품의 경우에는 차이가 있어 오로지 욕계의 고제만을 관찰하니, 이는 세제일법(世第一法)과 서로 인접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볼 때 '난' 등의 선근도 모두 능히 3계의 고제 등을 다 같이 소연으로 한다는 사실이 이미 이루어진 셈으로, 이것과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25)
  즉 유가사(瑜伽師)는 [인위에서] 색계·무색계의 대치도 따위가 되는 각각의 성제(聖諦)의 행상과 소연을 점차로 감소하고 점차로 생략하여 마침내 단지 두 찰나의 작의(作意)만으로 욕계의 고성제를 사유하는 일이 있는데, 이 이전을 중인(中忍, 중품의 인)의 단계라고 이름한다.26) 그리고 이러한 단
  
  
23) 인가(ksanti)란 사제의 이치를 인가 자증하는 것으로, 이는 난법에 비해 그 강도가 강할 뿐더러, 세제일법 역시 뛰어난 인가이지만 그것이 고제에 국한되는 것임에 반해 이것은 4제 전체에 미치는 것이기 때문에, 4제이치의 인가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인가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인가(忍可)이다. 따라서 이 또한 수소성의 순결택분으로서, 공상(共相)을 모두 소연으로 하는[總緣共相] 법념주의 또 다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24) 이 같은 인법은 무루의 견도와 유사하기 때문으로, 견도위는 오로지 법념주일 뿐이다. 이에 반해 난·정법은 처음에는 법념주에서 출발하지만 증진위에 이르러 4념주를 갖추게 된다.
25) 앞에서 설한 난·정법 역시 두말할 것도 없이 욕·상계의 16행상, 즉 4제의 32행상을 소연으로 한다는 뜻.
26) 이는 문장상으로는 간단하지만, 그 뜻은 매우 복잡하여 고래로 감연감행(減緣減行)의 금두(金兜)라고 하여 『구사론』상의 가장 난해한 문제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여기서 '소연'이란 욕계와 상 2계의 4제소단법 여덟 가지를 말하고, 행상이란 그러한 여덟 가지 소연 각각의 4행상 즉 32행상을 말하는데, 이러한 32행상으로써 상·하 8제를 관찰함에 있어 점차 줄여 관찰하는 단계를 '감연감행'의 중인(中忍)의 수행이라고 한다. 먼저 욕계 고제의 4상을 관찰하고, 상 2계 고제의 4상을 관찰하며, 나아가 욕계 도제의 4상을 관찰하고, 상 2계의 도제에 있어 마지막 '출'행상을 줄여 관찰하는 것을 제1회[周]의 감행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제4회의 감행(상계의 도제 4상을 줄여서 관찰하는 것)에 이르게 되면 1소연을 줄여(즉 '감연') 관찰한다. 이리하여 욕계 도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3회 감행하고 제4회째 감연하며, 계속하여 마침내 31회에 이르러 남은 욕계 고제의 '비상'의 행상을 심려(審慮)와 결정(決定)의 두 마음(고법지인과 고법지의 상태와 같은 경우임)으로 관찰할 때를 중인이 원만하게 성취된 상태라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 『현종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의 하·중·상품은 어떻게 분별되는가? 바야흐로 하품의 인은 여덟 종류의 마음을 갖추고 있다. 이를테면 유가사는 네 가지 행상으로써 욕계의 고제를 관찰하는데, 이것을 일컬어 한 종류의 마음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관찰한 다음에 색·무색계의 고제를 관찰하고, 집·멸·도제에 대해서도 역시 이와 같이 관찰하여 여덟 종류의 마음을 성취하게 되니, 이것을 일컬어 하품의 인이 라고 한다. 그리고 중품의 인의 경우에는 행상과 소연을 감소시켜 나가니, 이를테면 유가사는 네 가지 행상으로써 욕계의 고제를 관찰하고, 나아가 네 가지 행상으로써 욕계의 도제를 관찰하고, 상계의 경우에는 하나의 행상을 감소시키는데(세 가지 행상으로써 상계의 도제를 관찰함), 이 때를 일컬어 중품의 인이 시작하는 때라고 한다. 이와 같은 순서로 행상과 소연을 점차 감소시켜, 마침내 최소한으로 오로지 두 찰나의 마음으로써 욕계의 고제를 관찰하게 되는데, 이를테면 고법지인과 고법지의 상태와 같은 이러한 단계를 일컬어 중품의 인이 원만하게 된 때라고 한다."(한글대장경201, p.31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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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로부터 무간에 뛰어난 선근을 일으켜 [욕계의 고제를 관찰하여] 하나의 행상을 오로지 1찰나에 닦게 되는 것을 상품의 '인'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선근은 일어나면 더 이상 상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품의 '인'과 무간에 세제일법(世第一法)을 낳게 되니,27) 여기서는 상품의 인과 마찬가지로 욕계의 고제를 소연으로 삼아 하나의 행상을 오로지 1찰나에 닦는다. 즉 이것은 유루이기 때문에 '세간'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제일'이라고 이름한 것으로, 이러한 유루의 법은 세간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그래서 '세제일법'이라 한 것으로, 사용(士用)의 힘으로써 동류인(同類因)을 떠나 성도를 인기하여 낳기 때문에 '가장 뛰어난 법'이라고 이름한 것이다.28)
  
  
27) 세제일법(laukikagradharma)은 공상을 모두 소연으로 하는 법념주의 또 다른 형태로서, 성도의 문을 최초로 열며, 세간의 공덕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선근이자 순결택분에 포섭되는 최상의 선근이다. 그래서 세제일법(世第一法)이다.
28) 세제일법은 무간에 견도의 무루지를 인기하는 유루지로서, 그 같은 무루지의 동류인이 아니기 때문에 '동류인을 떠난 것'이라고 하였으며, 그럼에도 무루지는 세제일법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에 '사용의 힘으로써'라고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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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난(煖) 등의 네 종류의 선근은 염주(念住)의 성질이기 때문에 모두 혜를 본질로 한다. 그러나 만약 그것에 보조적으로 수반하는 법[助伴]과 더불어 말한다면 그 모두는 5온을 본질로 한다.29) 그렇지만 거기에 '득'은 제외되니, 모든 성자는 난 등의 선근을 거듭하여 현전시키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4선근 중에서 난법에 처음으로 안족할 때에는 3제(고제·집제·도제)를 소연으로 삼아 법념주를 현재에 닦으면 미래에는 4념주를 닦게 되고, 그 중의 한 행상을 현재에 닦으면 미래에는 네 가지 행상을 닦게 된다.30) 또한 멸제를 소연으로 하는 법념주를 현재에 닦으면 미래에는 한 가지 염주를 닦게 되고, 그 중의 한 행상을 현재에 닦으면 미래에는 네 가지 행상을 닦게 되니, 이러한 종성(種姓)은 일찍이 아직 획득된 일이 없었으므로 요컨대 동분(同分)이 되는 것만을 비로소 능히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에 증진(增進)하는 단계에서는 3제 중의 어떤 제를 소연으로 하여 그 중의 한 염주를 현재에 닦으면 미래에는 4념주를 닦게 되고, 그 중의 한 행상을 현재에 닦으면 미래에는 16행상을 닦게 된다. 또한 멸제를 소연으로 하는 법념주를 현재에 닦으면 미래에는 4념주를 닦게 되고, 그 중의 한 행상을 현재에 닦으면 미래에는 16행상을 닦게 되니, 이러한 종성은 앞서 일찍이 획득한 일이 있었으므로 동분이 되지 않는 것도 역시 능히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31)
  
  
29) 즉 4선근은 모두 반드시 수전색(隨轉色)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30) 이는 본송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4선근의 행수(行修)와 득수(得修)를 밝힌 것으로, 여기서 '행수'란 현재 실제로 수행하는 것이며, '득수'란 그러한 현재의 수행력에 의해 획득하게 되는 미래의 수행을 말한다. 먼저 3제를 소연으로 하여 현재 닦는 법념주의 수행력은 미래 4념주를 인발하는 힘으로 장양되기 때문에 미래의 득수는 4념주 전체에 미치게 된다. 또한 현재 닦는 한 행상에 의해 미래 4행상만을 득수할 뿐 16행상 전체에 미치지 않는 까닭은, 이 단계에서 처음으로 4제를 관찰하였으므로 관지(觀智)가 아직 약해 동분(自界 自諦의 행상) 이상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31) 난법에 처음으로 안족할 때 오로지 동분만을 닦는 것은 일찍이 이와 같은 종성을 아직 획득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모든 제(諦)로 수행이 확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진위(增進位)에서는 이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그것이 동분이든, 동분과는 다른 것이든 모두 닦게 되는 것이다.(『현종론』, 앞의 책,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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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법에 처음으로 안족할 때에는 4제 [중의 어떤 제]를 소연으로 하여 법념주를 현재에 닦으면 미래에는 4념주를 닦게 되고, 그 중의 한 행상을 현재에 닦으면 미래에는 16행상을 닦게 된다. 후에 증진하는 단계에서 3제 [중의 어떤 한 제]를 연으로 하여 그 중의 한 염주를 현재에 닦으면 미래에는 4념주를 닦게 되고, 그 중의 한 행상을 현재에 닦으면 미래에는 16행상을 닦게 된다. 또한 멸제를 소연으로 하는 법념주를 현재에 닦으면 미래에는 4념주를 닦게 되고, 그 중의 한 행상을 현재에 닦으면 미래에는 16행상을 닦게 된다.
  인법에 처음으로 안족할 때와 그 후 증진하는 단계에서는 4제 [중의 어떤 제]를 소연으로 하여 법념주를 현재에 닦으면 미래에는 4념주를 닦게 되고, 그 중의 한 행상을 현재에 닦으면 미래에는 16행상을 닦게 된다. 그렇지만 증진하는 단계에서 소연을 줄여 나갈 때에는 그 같은 소연을 줄여 나감에 따라 그것의 행상도 닦지 않게 되는 것이다.32)
  세제일법에서는 욕계의 고제만을 소연으로 삼는데, 법념주를 현재에 닦으면 미래에는 4념주를 닦게 되고, 그 중의 한 행상을 현재에 닦으면 미래에는 네 가지 행상을 닦게 되니, 그 밖의 다른 단계[異分]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 행상이] 견도와 유사하기 때문이다.33)
  생겨난 선근의 상과 본질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그것의 차별되는 뜻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32) 즉 인법의 총상(總相)에 의거하여 설하는 경우라면, 앞의 논설과 같아야 하겠지만, 만약 각각의 단계로 차별하여 설할 것 같으면, 소연을 줄여 나갈 때에는 그것의 소연이 감소됨에 따라 그 행상을 닦지 않게 된다. 이를테면 4제를 소연으로 할 경우에는 16행상을 모두 닦으며, 만약 세 가지·두 가지·한 가지의 제를 소연으로 할 경우에는 각기 열두 가지·여덟 가지·네 가지의 행상을 닦게 된다.
33) 즉 세제일법에서는 고제 이외 다른 제를 소연으로 삼는 일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고제를 소연으로 하는 4행상만을 닦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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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순결택분의
  네 가지는 모두 수소성으로
  6지(地)에, 두 가지는 혹은 7지에 존재하며
  욕계의 아홉 곳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此順決擇分 四皆修所成
  六地二或七 依欲界身九
  
  세 선근의 경우, 남녀가 두 가지의 그것을 획득하지만
  네 번째 선근의 경우는 여성만이 역시 그러하며
  성자는 지를 상실함으로 버리게 되고
  이생은 목숨을 마침으로써 버리게 된다.
  三女男得二 第四女亦爾
  聖由失地捨 異生由命終
  
  처음의 두 가지 또한 물러남으로써 버리게 되며
  근본지에 의지하였으면 반드시 성제를 관찰하게 되며
  버리고 나서 획득한 것은 앞의 것이 아니며
  두 가지 버림(失·退)의 자성은 비득(非得)이다.
  初二亦退捨 依本必見諦
  捨已得非先 二捨性非得
  
  논하여 말하겠다. 이러한 난·정·인·세제일법의 네 가지 수승한 선근을 순결택분(順決擇分)이라고 이름한다.
  어떠한 뜻에 의거하여 '순결택분'이라는 명칭으로 건립하게 된 것인가?
  여기서 '결'이란 결단(決斷)을 말하고, '택'이란 간택(簡擇)을 말한다. 곧 결단과 간택은 이를테면 모든 성도(즉 견도·수도·무학도)를 말하니, 모든 성도는 능히 의심을 끊는 것이기 때문이며, 아울러 능히 4제의 상을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이란 분단(分段)을 말한다. 곧 이 말의 뜻은, [이러한 선근이] 수순하는 것은 [수도나 무학도가 아니고] 오로지 견도 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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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부분일 뿐임을 나타내니, 결택의 부분이기 때문에 '결택분'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즉 이러한 네 가지 선근은 결택분(즉 성도의 일부분인 견도)을 인기하는 인연이 되고, 그것을 쫓아 이익되게[順益] 하기 때문에 그것을 '쫓는 것[順]'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이를 '순결택분'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네 종류의 선근은 모두 수소성혜로서 문·사소성혜가 아니니, 오로지 등인지(等引地, 선정의 단계)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즉 네 가지 선근 중 앞의 두 가지는 바로 [수소성혜의] 하품에 포섭되니, 다 같이 동요[動]하는 것으로 가히 물러날[退]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34) 인선근은 중품에 포섭되니, 앞의 두 가지 선근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며, 세제일법이 그것의 위의 단계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제일법만이 오로지 상품에 포섭된다.
  이러한 4선근은 모두 6지(地)에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네 정려와 미지정과 중간정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욕계 중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등인(等引, 즉 定)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상지(즉 무색계)에도 역시 존재하지 않으니, 이는 견도의 권속이기 때문이며, 또한 무색계의 마음은 욕계를 소연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욕계법은 이전에 마땅히 변지(遍知)하여 끊었기 때문이다.35)
  이러한 4선근은 색계의 5온의 이숙을 능히 초래하는 데에는 [부대적인] 원만한 원인이 되지만, 능히 견인(牽引)하지는 않으니, 존재[有]를 싫어하여 등진 것이기 때문이다.36)
  그리고 본송에서 '혹은'이라고 말한 것은, 이를테면 난·정의 두 가지 선근
  
  
  
34) 난법과 정법은 동(動)선근으로 하위로 물러나는 경우가 있는 선근이기 때문에 하품에 포섭된다.
35) 견도는 무색정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견도의 권속인 4선근 역시 그것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즉 무색계의 정심(定心)은 일찍이 욕계의 고제를 변지하였고 집제를 끊었기 때문에 욕계법을 소연으로 하지 않으며, 따라서 무색계에는 견도가 없고, 견도가 없기 때문에 4선근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36) 즉 4선근은 온갖 존재(욕·색·무색유)를 매우 싫어하고 원적(圓寂, 열반)을 좋아하기 때문에 색계의 5온의 이숙을 초래하는 데 보조적인 원인은 될지라도 그것의 중동분(衆同分)을 능히 견인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을 초래하게 하는 실제적인 원인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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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경우에 이설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서, 존자 묘음(妙音)은 "앞에서 언급한 여섯 지에 욕계를 합한 일곱 지에 의지하여 존재한다"고 설하였다.37)
  이러한 4선근은 욕계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북구로주를 제외한 인·천의 아홉 곳(6욕천과 3주)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앞의 세 선근은 세 주(洲)에서만 최초로 일어날 수 있으며,38) 그 후 천처(天處, 6욕천)에서 태어날지라도 역시 그것이 상속하여 현전한다. 그러나 네 번째 선근은 천처에서도 역시 최초로 일어날 수 있으니, 이것은 처음과 후가 없는 1찰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4선근은 오로지 남근·여근에 의지하여 획득되는 것으로, 앞의 세 가지 선근의 경우에는 남·여가 다 같이 두 가지(남성의 선근과 여성의 선근) 모두를 획득하지만, 네 번째 선근의 경우에는 여성의 몸만이 역시 두 가지를 획득하며, 남성의 몸에 의지해서는 오로지 남성의 선근만을 획득할 뿐이니, 이미 여성 몸의 비택멸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39)
  성자가 이러한 지(地)에 의지하여 이러한 선근을 획득하였을 경우, 이러한 지를 상실할 때 바야흐로 선근도 버리게 된다. 여기서 '지를 상실하였다'고 하는 말은 상지로 옮겨가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생은 지를 상실
  
  
  
37) 그러나 대법(對法)의 모든 논사들은 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것은 문소성과 사소성의 순결택분이 아니기 때문이다.(『현종론』 권제30, 앞의 책, p.317)
38) 왜냐 하면 이 세 가지는 뛰어난 소의신과 뛰어난 염잡작의(厭雜作意)가 존재하는 곳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서, 악취에는 전자를, 천취에는 후자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대비바사론』 권제7, 한글대장경118, p.156)
39) 4선근을 획득할 수 있는 자는 남·여의 근을 갖춘 자로서, 선체나 무형자(無形者)는 획득하지 못한다. 그리고 난·정·인선근의 경우, 남성·여성일 때뿐만 아니라 전근(轉根) 변성하여 여성·남성이 되었을 때에도 역시 그것에 의지하는 선근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남성·여성은 자신의 성에 의지하는 선근과 바뀐 성에 의지하는 선근을 모두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세제일법의 단계가 되면 여성은 남성으로 전근하는 경우가 있어 남성의 몸에 의지하는 그것도 획득할 수 있지만, 남성은 더 이상 여성으로 변성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남성에 의지하는 그것만을 획득할 뿐 여성에 의지하는 그것을 획득하는 일은 없다. 다시 말해 난·정·인의 단계에서는 남녀 공히 변성이 인정되지만, 세제일법의 단계에 이르면 남성은 이미 여성의 비택멸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변성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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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든 상실하지 않든 다만 중동분을 상실할 때(즉 명종할 때) 필시 이러한 선근을 버리게 된다.
  처음 두 가지 선근은 역시 또한 물러남으로 말미암아 버리게 된다. 즉 죽음과 물러남으로 말미암아 선근을 버리게 되는 것은 오로지 이생으로, 성자는 그렇지 않으며, 지(地)를 상실함으로 말미암아 선근을 버리게 되는 것은 오로지 성자로서, 이생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인(忍)과 세제일법의 경우에는 이생이라 하더라도 역시 물러나는 일이 없다.
  근본지(根本地, 즉 4정려)에 의지하여 '난' 등의 선근을 일으킨 자라면, 그는 이 생에서 결정코 반드시 견제(見諦)를 획득하니, 생사를 싫어하는 마음이 지극히 맹리(猛利)하기 때문이다.40)
  그리고 만약 앞서 버리고 나서 후에 다시 획득하였을 때에 획득된 선근은 필시 앞에서 버린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앞서 버리고 나서 후에 다시 별해탈계를 획득하는 경우와 같은 것으로, 일찍이 완전하게 닦지 않았기에 [다시 획득할 때에도 역시] 크게 힘들여 수고하여야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41) 그러나 만약 '난' 등의 선근을 앞서 이미 획득하였지만 경생(經生)으로 말미암아 버리게 된 경우에는 그러한 사정을 아는 훌륭한 설법사(說法師)를 만나게 되면 바로 '정' 등의 선근을 낳을 수 있지만, 만약 만나지 못한다면 다시 처음부터 닦아야 한다.42)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상실함과 물러남의 두 가지 버림(즉 失地捨와 退捨)은 비득(非得)을 자성으로 삼는다. 그러나 물러남은 반드시 허물을 일으
  
  
  
40) 4근본정에서는 지(止)·관(觀)이 균등하여 어떠한 노력 없이도 저절로 일어날 뿐더러(그래서 이를 樂通行이라 함) 생사를 싫어하는 마음이 치성하여 필시 이 생에서 견도에 들 수 있지만, 미지정과 중간정에서는 관만이 증성하여 그것을 낳는 데 노고가 따라야 하며(그래서 이를 苦通行이라고 함), 생사를 싫어하는 마음도 역하기 때문에 이 생에서는 견도에 들 수 없는 것이다. 낙통행·고통행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5(p.1150)의 '4통행(通行)'을 참조할 것.
41) 혹은 앞서 버린 것에 대해서는 공경하지 않기 때문이다.(『현종론』 권제30, p.319)
42) 전생에 '난' 등의 선근을 획득하였으나 명종함으로써 그것을 버리게 된 경생(經生)의 성자는, 숙주지(宿住智)로써 그 같은 수행 정도를 아는 설법자가 설한 '정' 등의 법을 듣고서 금생에 '정' 등의 선근을 바로 획득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다시 난법부터 닦아야 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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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킬지라도 상실함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43)
  이러한 선근을 획득할 때 어떤 뛰어난 이익[勝利]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난법은 필시 열반에 이르게 하고
  정법은 끝내 선근을 끊지 않게 하며
  인법은 악취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세제일법은 이생위(離生位)에 들게 한다.
  煖必至涅槃 頂終不斷善
  忍不墮惡趣 第一入離生
  
  논하여 말하겠다. 네 가지 선근 가운데 만약 난법을 획득하였을 때에는 비록 거기서 물러서고, 선근을 끊고, 무간업을 지어 악취에 떨어지는 등의 일이 있을지라도 오래 유전하는 일 없이 반드시 열반에 이를 것이기 때문에 [본송에서 '난법은 필시 열반에 이르게 한다'고 말한 것이다].4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순해탈분(順解脫分, 즉 3현위)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만약 특별한 장애(악취에 떨어지는 등의 장애)가 없는 한 이것은 견제(見諦)에 가까이 다가간 것이니, 이것과 견도는 그 행상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만약 정법을 획득하였다면, 비록 물러나는 등의 일이 있을지라도 필경 선근을 끊지 않고 증장하게 된다.45)
  
  
43) 즉 물러남은 반드시 허물을 일으킴으로써 획득되지만, 상실함은 공덕의 증진으로 말미암아 획득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견(물러남)에 의해 선근을 버리고, 득과(得果, 하지를 상실함)에 의해 하지의 선근을 버리게 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44) 난법에는 여섯 가지 과실과 한 가지 공덕이 있다. 곧 난법을 획득하였더라도 은복해 있던 견혹을 일으켜 거기서 물러나는 일이 있으며, 인과부정의 사견을 일으켜 생득선을 끊고, 무간업을 짓고, 3악취에 떨어지고, 명종(命終) 시에 난선근을 버리고, 항상 이생에 포섭되지만, 이 같은 과실에도 불구하고 오래 유전하는 일 없이 열반에 들게 된다.
45) 정법에는 다섯 가지 과실과 두 가지 공덕이 있다. 곧 정법을 획득하였더라도 거기서 물러나는 일이 있으며, 무간업을 지으며, 악취에 떨어지며, 명종 시에 정선근을 버리고, 항상 이생에 포섭되지만, 이 같은 과실에도 불구하고 오래 유전하는 일 없이 열반에 들고, 필경 선근을 끊는 일이 없다. 즉 정법위에서는 삼보의 수승한 공덕을 관찰하고, 그것을 인연으로 삼아 청정한 믿음의 마음[淨信心]을 인기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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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인법을 획득하였을 때에는 그것이 비록 목숨을 마칠 때 버려지고 이생위에 머무는 것일지라도 물러나는 일이 없고, 무간업을 짓지 않으며, 악취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46) 그런데 본송에서는 다만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말만을 설하였지만 그 같은 뜻에 준하여 '무간업을 짓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미 알았을 것이니, 무간업을 짓는 자는 반드시 악취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의 단계에서는 물러나는 일이 없다'고 함은 앞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으며, 이러한 단계에서는 '온갖 악취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고 함은 이미 그것으로 나아가게 하는 업과 번뇌를 멀리하였기 때문이다. 즉 만약 인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어떠한 취(趣)나 생(生)이나 처소[處]나 몸[身]이나 존재[有]나 번뇌[惑]에 대해서도 그것의 불생법(즉 비택멸)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취'란 온갖 악취를 말하며, '생'이란 난생(卵生)과 습생(濕生)을 말하며, '처소'란 무상천과 북구로주와 대범처를 말하며, 몸이란 선체(扇)와 반택가(半擇迦)와 이형(二形)의 몸을 말하며, 존재란 제8(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 등의 존재를 말하며, 번뇌란 견소단의 번뇌를 말한다.47) 즉 이러한 불생법은 [인의] 하품과 상품의 단계에서 상응하는 바에 따라 획득되니, 이를테면 하품의 인에서는 악취의 불생을 획득하며, 그 밖의 불생은 상품의 인에 이르러 비로소 획득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제일법을 획득하였다면 비록 이생위에 머물고 있다 할지라도 능
  
  
  
46) 인법에는 두 가지 과실과 다섯 가지 공덕이 있다. 곧 정법은 목숨을 마치면 버리게 되고 이생에 포섭되는 것이지만, 정법을 획득하게 되면 오래지 않아 열반에 들게 되고, 필경 선근을 끊지 않으며, 물러남으로써 그것을 버리는 일이 없으며, 무간업을 짓지 않고,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다.
47) 난생과 습생은 많은 우매함에 의해 태어나기 때문에, 무상천과 대범천은 편벽된 견해[僻見]의 처소이기 때문에(본론 권제24, p.1086 참조), 북구로주에는 4제의 현관(現觀)이 없기 때문에, 선체(扇) 등은 번뇌가 많기 때문에, 욕계에서 여러 생을 거친 성자[經生聖者]는 반드시 제7의 존재, 즉 무소유처에서 열반에 들기 때문에, 견소단의 번뇌는 필시 다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인위(忍位)에서는 그것의 무생법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현종론』 권제30, 앞의 책,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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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게 된다.48) 본송에서 비록 '목숨을 마침으로써 버리는 것[命終捨]에서 떠났다'고 말하지 않았을지라도 이미 무간에 정성이생에 들어간다고 하였으므로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볼 때 '목숨을 마침으로써 버리는 일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이루어진 셈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오로지 이것만이 능히 정성이생에 들 수 있는 것인가?
  이미 이생(異生)의 비택멸을 획득하였기 때문으로, 무간도[가 번뇌를 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능히 이생성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네 가지 선근에는 각기 세 품류가 있으니, 성문(聲聞) 등의 종성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의 어떤 한 종성에게 선근이 이미 생겨났다면, 그것은 다른 승(乘)으로 전향할 수 있는 것인가, 전향할 수 없는 것인가?49)
  게송으로 말하겠다.
  
  성문의 종성이 전향할 경우
  두 가지는 부처를, 세 가지는 다른 것을 성취하지만
  인각유독각과 부처는 전향하는 일이 없으니
  한자리에서 깨달음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轉聲聞種性 二成佛三餘
  麟角佛無轉 一坐成覺故
  
  논하여 말하겠다. 성문의 종성에게 난·정의 선근이 이미 생겨났다면 전향하여 무상정각(無上正覺)의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50) 그러나 만약 그가 인
  
  
48) 세제일법에는 한 가지 과실과 한 가지 공덕이 있다. 즉 이생에 포섭되고, 능히 견도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49) 4선근에는 각기 하·중·상의 세 품류가 있어 상품의 그것은 불승(佛乘)의 가행이 되고, 중품은 독각승의 가행, 하품은 성문의 가행이 된다. 그럴 때 각 승의 선근가행은 다른 승의 가행으로 바뀔 수 있는가? 이를테면 성문승의 가행이 독각승이나 불승의 그것으로 바뀔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본 단의 문제이다.
50) 성문이 난선근과 정선근을 일으켰을 경우 무상정각(즉 佛乘)의 난·정을 낳을 수 있지만, 이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렇지만 인선근을 일으켰을 경우, 그는 더 이상 악취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행을 닦을 수 없으며, 따라서 빠른 시간 안에 불승의 그것으로 전향할 수 없다.(후술) 즉 인위(忍位)는 성문승의 가행 중에서 가장 오래 걸리는 것이기 때문에 필시 60겁을 지나야 자신의 과보가 성취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이후라야 비로소 전향이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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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근을 획득하였다면 불승(佛乘)의 그것을 성취할 리가 없으니, 말하자면 악취에서 이미 초월하였기 때문이다. 즉 보리살타(菩提薩陀, bodhisattva)는 유정의 이익[利物]을 본회(本懷)로 삼았기에 유정을 교화하기 위하여 반드시 악취로 가야 하지만, 그같이 인(忍)을 획득한 종성은 그곳(악취)으로 전향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결정코 불승의 그것을 획득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문의 종성에게 난·정·인의 세 선근이 생겨났을 경우에는 모두 전향하여 독각의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51) 그리고 이것(독각)은 불승 이외의 것이기 때문에 [본송에서] '다른 것'이라고 설하였다.
  [본송에서의] '인각유독각과 부처'라고 하는 말은 인각유와 무상각(無上覺, 즉 부처)의 '난' 등의 선근을 의미하는데,52) 이러한 두 가지 종성은 다 같이 다른 승의 그것으로 전향하는 일이 없으니, 모두 제4정려를 의지처로 삼아 한자리에서 바로 자신의 승(乘)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다.53) 즉 제4정려는 경동(傾動)하지 않을 뿐더러 가장 밝고 예리한 삼마지이기 때문에 인각유와 무상각의 소의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또한 '깨달음'이라는 말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를 의미하는 것으로서―이에 대해서는 뒤(권제26)에서 마땅히 분별하게 될 것이다.―이는 바로 보리(菩提)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자리에서'라고 하는 말은 난선근으로부터 마침
  
  
51) 즉 성문의 종성에게 이미 인법이 생겨났을지라도 그것이 독각의 보리(菩提)를 능히 장애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역시 독각의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52) 독각승에는 인각유(麟角喩)와 부행(部行) 두 가지가 있는데, 인각유독각이란, 기린의 한 뿔은 다른 한 뿔과 결코 만나지 않듯이 무불(無佛) 시대에 태어나 홀로 수행하여 부처가 된 이를 말하며, 부행독각이란 다른 이와 함께 수행하여 홀로 깨달은 이로서 앞서 언급한 성문을 말한다.
53) 제4정려에 의거하여 신념주로부터 진지와 무생지(금강유정)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한 자리에서 보리를 성취하였음을 말한다.(『현종론』, 앞의 책,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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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보리를 획득하기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한 자리에서'라고 하는 말은] 부정관으로부터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마침내 보리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 밖의 독각(즉 성문으로서의 독각인 부행독각)은 인각유와는 다르니, 그 같은 종성이 처음 두 가지 선근을 일으키고 나서 다른 승(乘)의 그것으로 전향하는 것은 이치상으로 아무런 걸림이 없는 것이다.
  
  이 생에서 처음으로 가행(즉 순해탈분)을 닦은 자가 이 생에서 바로 순결택분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 것인가?
  일으킬 수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전생에 심은 순해탈분은
  빠르면 세 번째 생에서 해탈하는데
  그것은 문·사소성이자 세 업으로서,
  인취의 세 주에서만 심을 수 있다.
  前順解脫分 速三生解脫
  聞思成三業 殖在人三洲
  
  논하여 말하겠다. 순결택분을 금생에 일으키는 자는 필시 전생에 순해탈분을 일으켰던 자이다. 즉 온갖 유정 중의 어떤 이가 순해탈분을 처음으로 심었다면 가장 빠르게는 세 번째 생에 이르러 비로소 해탈을 획득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첫 번째 생에서 순해탈분을 심고, 두 번째 생에서 순결택분을 일으키며, 세 번째 생에서 성도(聖道)에 들어 마침내 해탈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씨앗을 뿌리고 싹이 성숙하고 열매를 맺게 되는 세 단계가 동일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몸이 법성(法性)에 드는 것과 성숙하는 것과 해탈하는 세 단계도 역시 그러하니, 전(傳)하여 설(說)하는 바는 이와 같다.54)
  
  
54) 세친은 이처럼 초생에서 순해탈분을 일으키고, 제2생에서 순결택분을 획득하며, 제3생에서 열반에 드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씨앗을 뿌리면, 싹으로 성숙하고,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되듯이, 초생에서 순해탈분을 심고, 제2생에서 그것을 성숙시키며, 제3생에서 순결택분을 일으켜 성도(聖道)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 같은 비유를 '전설(傳說)'로 언급한 것이다. 이에 대해 중현은 "세친의 설에 따를 경우, '근본지(根本地)에 의해 난(煖) 등의 법을 일으킨 자라면, 그는 반드시 이 생에서 견제(見諦)에 들 수 있다'고 한 앞의 설과 서로 모순되며,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는 마땅히 가장 빠르게는 두 번째 생에 해탈한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두 번째 생에서 근본지에 의해 난법 등을 일으킨 자라면, 그는 필시 그 생에서 성도에 들어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비판하고 있다.(『현종론』 권제30, 한글대장경201, p.324) 참고로 여기서의 '전설'은 보광에 의하면 앞의 비유에 대한 전설이지만, 법보에 의하면 다음에 논설할 순해탈분의 체(體)에 대한 전설이라고 평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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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해탈분은 오로지 문·사소성일 뿐이며, 세 업 모두를 본질로 한다. 비록 그 중에서도 오로지 의업이 가장 뛰어난 것이라 할지라도,55) 이러한 의업의 사원력(思願力)에 포섭되어 일어나는 신·어업도 역시 순해탈분이라 이름할 수 있으니, 한 덩이의 밥을 베풀고 한 가지 계율을 지키는 등의 업도 해탈을 깊이 추구[樂, 즉 意樂]하려는 사원력에 의한 것이라면 순해탈분을 뿌리고 심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해탈분을 심는 곳은 오로지 인취(人趣)의 세 주(洲)뿐으로, 그 밖의 처소에서는 염리(厭離)와 반야(般若)에 상응하는 일이 없으니,56) 부처의 출세(出世)와 조우하여야 이러한 선근을 심을 수 있는 것이다.57)
  그런데 유여사는 말하기를, "역시 또한 독각(獨覺)을 만나는 경우에도 그럴 수 있다"고 하였다.
  
  편의에 따라 순해탈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바야흐로 현관(現觀)에 드는 순서가 바로 지금 논의해야 할 문제이
  
  
  
55) 즉 의업은 바로 직접적으로 문·사소성혜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56) 세 악취에서는 고(苦)를 염리하는 의업은 강하지만 반야 즉 지혜가 저열하며, 천취에서는 반야의 지혜는 수승하지만 괴로움이 적어 염리심이 부족하다. 그리고 북구로주에서는 염리심도 부족하고 지혜도 저열하다. 따라서 순해탈분의 종자를 뿌릴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인취의 세 주뿐이다.
57) 이에 대해 중현은 부처가 세간에 출현하였거나 혹은 부처가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다 같이 순해탈분을 능히 뿌리고 심을 수 있다고 하였다.(『현종론』, 앞의 책,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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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온갖 가행도 중에서 세제일법이 그것의 가장 마지막 도임을 밝혔으므로, 이제 마땅히 이것으로부터 다시 어떠한 도가 생겨나게 되는지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제일법과 무간에
  욕계 고제를 소연으로 하여
  무루의 법인(法忍)을 낳으며
  법인 다음에 법지(法智)를 낳는다.
  世第一無間 卽緣欲界苦
  生無漏法忍 忍次生法智
  
  다음으로 다른 계의 고제를 소연으로 하여
  유인(類忍)과 유지(類智)를 낳으며
  다시 집·멸·도제를 소연으로 하여
  각기 네 가지를 낳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次緣餘界苦 生類忍類智
  緣集滅道諦 各生四亦然
  
  이와 같은 16찰나의 마음을
  성제현관(聖諦現觀)이라 이름하는데
  여기에는 모두 세 종류가 있으니
  견(見)·연(緣)·사(事)의 차별이 그것이다.
  如是十六心 名聖諦現觀
  此總有三種 謂見緣事別
  
  논하여 말하겠다. 세제일법의 선근으로부터 무간에 욕계의 고성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아 무루에 포섭되는 법지인(法智忍)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러한 '인'을 일컬어 고법지인(苦法智忍)이라고 한다.58) 곧 이러한 '인'은 바
  
  
58) 여기서 '무루'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세제일법과 구별하기 위해서로서, 세간의 인(즉 순결택분의 인법)에 따라 이것도 무루의 인이라고 하였으며, 욕계의 고법(苦法, 즉 현행의 苦果)을 소연으로 삼았기 때문에 '고법인'이라고 이름하였다. 다시 말해 무시 이래 유신견으로써 아(我)·아소(我所)라고 미혹 집착하였던 고성제의 법에 대해 처음으로 그것을 오로지 고법(苦法)의 성질(즉 비상·고·공·비아)로 관찰하여 인가(忍可)·현전한 것이므로 '고법인'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능히 후에 고법지의 생(生)을 인기하며, 바로 그러한 지가 생겨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을 대치하기 때문에 다시 '고법지인'이라고 이름한 것이다.(앞의 책,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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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무루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본송에서] '이것은 능히 법지(法智)를 낳는다'고 하여 후찰나의 등류(等流, 즉 고법지)를 들어 [순결택분의 '인'과] 구별한 것으로, 바로 법지의 원인이기에 '고법지'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니, 마치 [화과(花果)를 낳는 나무를] 화과수(花果樹)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것을 입정성결정(入正性決定)이라 이름하며, 또한 역시 입정성이생(入正性離生)이라고 이름하니, 이것은 바로 처음으로 정성이생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또한 역시 처음으로 정성결정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설하기를, " '정성(正性)'이란 이른바 열반이다"고 하였다. 혹은 '정성'이란 말은 온갖 성도를 가리킨다. 또한 '생'이란 번뇌, 혹은 근기가 아직 성숙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즉 성도는 능히 이를 초월하기 때문에 '이생(離生)'이라 이름한 것이며, 능히 결정코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혹은 진리[諦]의 상을 결정코 요별하는 것이기 때문에 온갖 성도는 '결정(決定)'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도의] 단계에 이르는 것을 설하여 '들어간다[入]'고 일컬은 것이다.
  이러한 '인'이 이미 생겨났을 때 성자(聖者)라는 명칭을 획득한다. 즉 이것이 미래 [생상위(生相位)]에 있을 때 이생성(異生性)을 버리게 된다. 말하자면 이러한 '인'이 미래의 생상을 획득할 때만 이러한 작용을 갖을 뿐 그 밖의 다른 법은 이러한 작용을 갖지 않는다고 인정하니, 마치 등불과 생상의 관계와 같다.59)
  
  
59) 즉 유부에서는 미래의 등불이 생상을 획득하여 현전할 때 비로소 어둠을 지멸하는 작용을 갖게 되듯이 이러한 고법지인도 세제일법의 단계로부터 생상위에 이를 때 이생성을 버리는 작용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이생성을 버리는 작용은 오로지 고법지인만이 갖는다. 그러나 논주 세친은 이 같은 생(生) 등의 유위4상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다만 '인정[許]한다'고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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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세제일법에 의해서도 이생성을 버리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뜻은 옳지 않으니, 그것(이생성)도 이것(세제일법)도 다 같이 세간법으로 일컬어지기 때문이다.60)
  [세제일법과 이생성은] 성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에도 역시 어떠한 허물도 없으니, 마치 가장 강력한 원수[上怨]가 다른 원수의 목숨을 해치는 것과 같다.(앞의 유여사의 通釋)
  또 다른 유여사는 설하기를, "이 두 가지(세제일법과 고법지인)가 함께 이생성을 버리게 되니, 무간도와 해탈도의 경우와 같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인(忍)과 무간에 바로 욕계의 고성제를 소연으로 하는 법지가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고법지(苦法智)라고 이름한다.61) 그리고 이러한 지도 역시 무루에 포섭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앞에서 언급한 '무루'라고 하는 말은 뒤(제16 도류지)에 이르기까지 두루 적용되기 때문이다.
  욕계 고성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아 고법인과 고법지가 생겨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다시 고법지와 무간에 그 밖의 다른 온갖 계(즉 색계와 무색계)의 고성제를 함께 소연의 경계로 삼아 유지인(類智忍)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고류지인(苦類智忍)이라 이름한다.
  또한 이러한 '인'과 무간에 이러한 경계(상 2계의 고성제)를 소연으로 하는 유지(類智)가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고류지(苦類智)라고 이름한다. 즉 최초로 제법의 참된 이치를 깨달아 알았기 때문에 '법지'라고 이름한 것이며,62) 이것 다음의 경계(상 2계의 고제)의 지(智)는 앞의 지와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유지'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으로, 뒤의 지는 앞의 지에 따라 그
  
  
60) 세제일법도 이생성도 다 같이 세간법 즉 유루법이기 때문에 유루의 세간법으로써 세간법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뜻.
61) 고법지인이 욕계 고법(苦法)에 대한 인가(認可)의 혜를 획득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고법인에 의해 관찰된 욕계의 고제에 대한 결단(決斷) 간택(簡擇)의 혜를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법지'이다.
62) 여기서 제법의 참된 이치란 고제를 비상(非常)·고(苦)·공(空)·비아(非我)라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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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를 깨달아 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욕계와 그 밖의 다른 계의 고성제를 소연으로 하여 법지인과 유지인, 법지와 유지의 네 가지가 생겨나듯이, 그 밖의 다른 세 가지 제(諦)를 소연으로 하여 각기 네 가지가 생겨나게 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이를테면 앞의 고류지가 생겨난 후 그 다음으로 욕계의 집성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아 법지인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집법지인(集法智忍)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이러한 '인'과 무간에 욕계 집성제를 소연으로 하는 법지가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집법지(集法智)라고 이름한다.
  다음으로 그 밖의 다른 계의 집성제를 소연의 경계로 하는 유지인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집류지인(集類智忍)이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인'과 무간에 이러한 경계를 소연으로 하는 유지가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집류지(集類智)라고 이름한다.
  그 다음으로 욕계의 멸성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아 법지인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멸법지인(滅法智忍)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이러한 '인'과 무간에 욕계 멸성제를 소연으로 하는 법지가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멸법지(滅法智)라고 이름한다.
  다음으로 그 밖의 다른 계의 멸성제를 소연의 경계로 하는 유지인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멸류지인(滅類智忍)이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인'과 무간에 이러한 경계를 소연으로 하는 유지가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멸류지(滅類智)라고 이름한다.
  그 다음으로 욕계의 도성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아 법지인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도법지인(道法智忍)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이러한 '인'과 무간에 욕계 도성제를 소연으로 하는 법지가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도법지(道法智)라고 이름한다.
  다음으로 그 밖의 다른 계의 도성제를 소연의 경계로 하는 유지인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도류지인(集類智忍)이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인'과 무간에 이러한 경계를 소연으로 하는 유지가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도류지(道類智)라고 이름한다.
  [세제일법 이후] 이와 같은 순서로 16찰나의 마음이 일어나니, 이를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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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하여 성제현관(聖諦現觀)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부파에서는 "모든 제(諦)에 대해 오로지 단박[頓]에 현관한다"고 말하고 있다.63)
  그렇지만 그들이 말한 뜻을 마땅히 다시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니, 그들이 말한 현관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64) 즉 온갖 현관을 살펴보면 모두 세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견(見)·연(緣)·사(事)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곧 오로지 무루의 혜로써 온갖 진리[諦]의 경계를 현견하여 분명히 하는 것을 '견현관'이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무루의 혜와 아울러 그 밖의 다른 상응법이 [온갖 진리의 경계를] 동일한 소연으로 삼는 것을 '연현관'이라고 이름하며, 이 같은 온갖 능연(能緣, 무루혜와 그 상응법)과 더불어 그 밖에 구유(俱有)하는 계(戒)와 생상(生相) 등의 불상응법이 [온갖 진리의 경계에 대해] 동일하게 사업(事業)을 행하는 것을 '사현관'이라고 이름한다.65)
  이를테면 고제를 관찰할 때 고성제에 대해서는 세 가지 현관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그 밖의 3제에 대해서는 오로지 사현관할 뿐이니, 이를테면 끊고[斷] 작증하고[證] 닦는 것[修]이 바로 그것이다.66) 따라서 만약 견현관에 근
  
  
63) 이는 칭우에 의하면 법밀부(法密部), 보광에 의하면 대중부의 설로서, 그들은 1찰나의 마음에 의해 4성제를 현관한다는 돈현관(頓現觀)을 주장한다.(『이부종륜론』; 『대비바사론』 권제51, 한글대장경120, p.15 참조)
64) 후술하듯이 현관에는 견현관(見現觀)·연현관(緣現觀)·사현관(事現觀) 세 가지 종류의 차별이 있는데, 그 부파에서는 어떠한 현관에 근거하여 그 같은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다시 논구해 보아야 한다는 뜻. 여기서 견현관(darsanabhisamaya)이란 오로지 무루혜만으로써 성제를 관찰하는 것이고, 연현관(alamvanabhisamaya)은 무루혜와 그 상응법인 심·심소가 동일한 성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아 관찰하는 것이며, 사현관(karyabhisamaya)은 무루혜를 중심으로 하여 심·심소와 도공계(道共戒)와 4상(相) 등이 동일한 성제를 대상으로 하여 그 작용[事業]을 행하는 것으로, 그러한 작용에는 고의 변지(遍知)와 집의 영단(永斷)과 멸의 작증(作證)과 도의 수습(修習)이 있다.
65) 즉 계와 생상 등도 바로 현관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현관 중에 그것들의 개별적인 작용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서도 역시 '현관'이라는 명칭을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66) 이를테면 고제를 관찰할 때, 무루혜가 고제를 추구(推求)하는 것은 견현관이고, 혜와 더불어 심·심소가 고제를 동일한 소연으로 삼는 것은 연현관, 혜와 상응 구기법이 동일하게 작용하여 두루 아는 것[遍知]은 사현관이다. 그리고 고제에 대한 무루혜가 현전함으로써 집을 끊고[斷集], 멸을 작증하며[證滅] 도를 닦기[修道] 때문에 나머지 세 가지 제(諦)도 사현관된다. 따라서 사현관에 근거하여 '단박에 현관한다'고 말하였다면, 그것은 마땅히 선설(善說)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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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하여 '온갖 진리를 단박에 현관한다'고 설하였다면, 이치상 필시 그렇지 않으니, 온갖 진리 중에는 행상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67) 만약 '무아'의 한 행상으로써 온갖 진리를 모두 관찰한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고' 등의 행상으로써 고제 등을 관찰한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럴 경우 계경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모든 성(聖) 제자들은 고(苦)의 행상으로써 고제를 사유하고, 집(集)의 행상으로써 집제를 사유하며, 멸(滅)의 행상으로써 멸제를 사유하고, 도(道)의 행상으로써 도제를 사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사유'는] 무루의 작의와 상응하는 택법을 말한다. 또한 만약 이 경은 수도위(修道位)에 대해 설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 역시 옳지 않으니, 견도와 마찬가지로 수도도 그러하기 때문이다.68) 또한 만약 그(頓現觀者)가 다시 "한 가지 제(諦)를 관찰할 때 그 밖의 다른 제에 대해서도 자재(自在)를 획득하기 때문에 '단박에 현관한다'고 설하였다"고 한다면, 이치상으로는 역시 어떠한 허물도 없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현관하는 중간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고,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으므로 마땅히 개별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69) 또한 만약 그가 다시 "고제를 관찰할 때 능히 집(集)을 끊고 멸(滅)을 작증하고 도(道)를 닦는 것을 '단박에 현관한다'고 설하였다"고 한다면, 이치상으로는 역시 또한 어떠한 허물도 없으니, 고성제를 관찰할 때 그 밖의 3제에 대해서는 사현관할 따름이라고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기 때문이다.
  곧 견현관에 근거하는 경우, 계경 중에 진실된 말씀이 있기에 '점진적[漸]
  
  
  
67) 견현관은 점진적인 것으로, 온갖 진리의 행상에는 열여섯 가지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이치상 1찰나에 다수의 행상을 관찰하는 것은 '이심불구기(二心不俱起)'의 원칙에 따라 있을 수 없다.
68) 수도(bhavana-marga)란 견도를 반복하여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견도가 차제(次第) 현관이라면 수도 역시 그렇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69) 제 부파에 따라 현관하는 도중에 출관(出觀)하는 경우가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 하기 때문에 각각에 대해 별도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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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로 현관한다'고 설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부처님께서 장자(長者)에게 고하기를 4성제는 단박에 현관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점진적으로 현관해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70) 나아가 이와 같은 등의 세 경이 있어 각각의 경에서 별도의 비유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71)
  그런데 만약 "어떤 경에서는 '다만 고제에 대해 의혹이 없으면 부처님에 대해서도 역시 의혹이 없을 것이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단박에 현관한다"고 말한다면,72) 이것도 역시 올바른 경증이 아니니, 이는 결정코 현행하지 않거나 혹은 반드시 끊어야 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밀의(密意)로서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73)
  현관에 16찰나의 마음[十六心]이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16찰나의 마음은 어떠한 지(地)에 의지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것들은 모두 세제일법과
  
  
  
70) 『잡아함경』 권제14 제435경(대정장2, p.112하), "世尊! 此四聖諦爲漸次無間等, 爲一頓無間等? 佛告長者 此四聖諦漸次無間, 非頓無間等."
71) 위의 경 제435-437경. 가는 나뭇잎을 모아서 만든 그릇에 물을 담아갈 수 없듯이 고제를 무간에 알지 못하고 집·멸·도성제를 알지 못하며……, 연꽃잎을 합하여 만든 그릇에 물을 담아 갈 수 있듯이 고제를 무간에 알고 나서 집제 등을 안다.(제435경) 전당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첫 번째 계단을 오른 뒤에 순서대로 올라가야 한다.(제436경) 전당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계단씩 올라야 한다.(제437경)
72) 같은 경 제420경(대정장2, p.111상), "만약 고제에 대해 의혹이 있는 자는 부처에 대해서도 의혹이 있을 것이고, 법(法)과 승(僧)에 대해서도 의혹이 있을 것이며……고제에 대해 의혹이 없는 자는 부처에 대해서도 의혹이 없을 것이고, 법(法)과 승(僧)에 대해서도 의혹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부처는 무루법으로 도제에 포섭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제에 의혹이 없으며 도제에 대해서도 의혹이 없는 것이므로, 이는 바로 돈현관의 경증으로 인용한 경문이다.
73) 고제에 대한 의혹을 끊을 때에는 도제에 대한 의혹이 현행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함께 끊는 것은 아니다. 즉 그것은 현행하지 않는 것이면서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은밀하게 그같이 설하였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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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일한 지에 의지하고 있다.
  皆與世第一 同依於一地
  
  논하여 말하겠다. 세제일법이 의지하는 온갖 지가 바로 이러한 16찰나의 마음이 의지하는 곳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그 같은 세제일법이 의지하는 6지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한 바와 같다.74)
  이와 같은 인(忍)과 지(智)는 어떠한 연유에서 반드시 전후의 순서로 서로 뒤섞여 일어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인'과 '지'는 순서대로
  무간과 해탈의 도이다.
  忍智如次第 無間解脫道
  
  논하여 말하겠다. 16찰나의 마음 중에서 인(忍, 즉 4법지인과 4유지인)은 바로 무간도(無間道)이니, 번뇌의 득(得)을 끊는데 어떠한 간격과 장애[隔礙]가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지(智, 4법지와 4유지)는 바로 해탈도(解脫道)이니, 이미 번뇌의 득에서 해탈하여 이계(離繫)의 득과 구시(俱時)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두 가지의 순서는 이치상 결정코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세간에서 도적을 몰아내고 문을 닫는 것과 같다.75)
  
  
74) 즉 4정려와 미지정과 중간정이 바로 그것이다. 본권 p.1046을 참조하라.
75) 3계의 제 번뇌는 고법지(苦法智) 내지 도류지(道類智)가 지식으로서 인가되는 순간, 말하자면 고법지인 내지 도류지인의 순간 끊어지며[斷, 여기서 '끊어진다'고 함은 번뇌의 제 심소가 심상속과의 구생의 관계를 떠난다는 말이다], 고법지 내지 도류지는 그 같은 번뇌의 단절을 확증하여[證] 이계를 얻게 한다. 따라서 8인에 의한 번뇌의 단절은, 이를테면 도둑을 잡아 문 밖으로 쫓아내는 것에 비유되고, 8지에 의한 단절의 확증은 문을 닫아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에 비유된다. 본론 권제21(p.970)에서는 무간도를 단대치(斷對治)로, 해탈도를 지대치(持對治)로 논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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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만약 두 번째 도(해탈도)도 오로지 무간도로서 이계득과 구시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76) 이러한 단계에서 그러그러한 경계에 대해 '이미 의혹(즉 번뇌)을 끊었다'고 아는 지(智)는 결정코 마땅히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77)
  만약 견도위에서는 오로지 '인'만이 번뇌를 끊는 것이라고 한다면 본론(本論)에서 설한 9결취(結聚)와 서로 어긋나게 될 것이다.78)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모든 '인'은 다 '지'의 권속이기 때문으로, 마치 왕의 권속이 지은 사업을 왕이 지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16찰나의 마음은 모두 4제의 이치를 관찰하는 것으로, 그러한 일체는 모두 견도(見道)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앞의 15찰나의 마음만이 견도이니
  일찍이 관찰한 적이 없었던 것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前十五見道 見未曾見故
  
  논하여 말하겠다. 고법지인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도류지인에 이르기
  
  
  
76) 해탈도도 이계득과 구생하는 것이면서 역시 또한 번뇌를 끊는데 능히 간격과 장애가 없기 때문에 무간도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힐난.
77) 만약 무간도만이 존재하고 해탈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제2찰나는 고법지가 아니라 고류지인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욕계의 고제에 대한 의혹을 끊었다고 확증짓는 지(智)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왜냐 하면 고법지인의 찰나는 의혹과 함께하는 찰나이며, 고류지인의 찰나는 욕계의 그것을 소연의 대상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78) 여기서 본론은 『발지론』 권제5(한글대장경176, p.107), "아홉 종류의 결(結)이 있으니, 이를테면 고법지소단(苦法智所斷) 내지는 수소단(修所斷)이 바로 그것이다." 즉 여기서 9결취란 4법지소단과 4유지소단, 그리고 수소단의 결을 말한다. 따라서 8인만이 번뇌를 끊는다고 하는 것은 근본 아비달마에 어긋난다는 힐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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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지 모두 15찰나의 마음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견도(見道)에 포섭되니, 일찍이 관찰한 적이 없었던 진리를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16 찰나의 도류지에 이르게 되면 일찍이 관찰하지 못하였던 것을 지금 관찰하는 일은 없으며, 일찍이 관찰한 것을 수습(修習)하기 때문에 그것은 수도(修道)에 포섭되는 것이다.79)
  그 때 도류지인을 관찰하는 것은 견도제(見道諦)의 이치상 아직 관찰하지 않은 것을 지금 관찰하는 것인데, 어찌 그렇다고 하지 않는 것인가?
  여기서는 찰나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제(諦)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으로, 일찍이 관찰하지 않은 1찰나를 지금 관찰할지라도 일찍이 관찰하지 않은 4제의 이치를 지금 관찰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이는 마치 밭의 나락을 베면서 오로지 한 이랑이 남았다 해서 '이 밭은 아직 나락을 베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또한 도류지는 결과에 포섭되기 때문에, 8지(智)의 16행상을 단박에 수습하기 때문에,80) 선행된 도(즉 앞의 15찰나의 向道)를 버리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수도와 마찬가지로 상속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견도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81)
  그렇지만 도류지에서는 필시 물러나는 일이 없으니, 견도소단의 끊어짐(즉 택멸)을 임지(任持)하기 때문이다.82) 바로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마땅히
  
  
79) 즉 제16 도류지에 이르렀을 때, 비록 일찍이 알지 못하였던 제(諦)는 남아 있을지라도 일찍이 관찰한 적이 없었던 제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으니, 일체의 인(忍)은 모두 '견(見)'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4제의 관찰은 제15 찰나의 마음에서 마치게 되고, 상 2계의 도제를 관찰하는 제16 찰나에서는 제15 찰나의 마음을 거듭 관찰하여 아는 것이기 때문에 '견도'라고 하지 않고 '수도', 즉 반복된 관찰[重見]이라고 하는 것이다.
80) 견도위에서는 예컨대 고법지가 현재전할 때 미래 생상위의 고법지와 고제하의 4행상만을 득수(得修)할 뿐 그 밖의 7지와 12행상은 득수하지 않으며, 도류지인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도류지의 경우 미래 생상위의 도류지나 도제 4행상뿐만 아니라 8지 16행상을 모두 득수하기 때문에 수도에 포섭된다.
81) 견도 15찰나의 인(忍)·지(智)는 모두 오로지 1찰나이지만, 제16 도류지는 수도와 마찬가지로 다찰나에 걸쳐 상속하며 일어난다.
82) 유부 법상에 의하면 견도는 물러남이 없지만 수도는 물러남이 있는데, 도류지의 경우는 비록 수도이지만 견도소단의 택멸에 의해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물러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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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도에 포섭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커다란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83)
  그렇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7지(智)는 또한 견도에 포섭되는 것인가?84)
  온갖 진리[諦]의 이치를 관찰하는 것이 아직 구경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온갖 진리를 두루 관찰하지 않았으며, 중간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또한 견도에 포섭시키게 된 것이다.
  
  견(見)·수(修)의 두 가지 도가 생겨나는 차이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이러한 도의 분위차별에 의거하여 여러 형태의 거룩한 보특가라(즉 성자)에 대해 건립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견도의 15찰나의 마음에 의해 건립되는 온갖 성자들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수신행과 수법행이라 이름하는 성자는
  근기의 둔함과 예리함의 차별에 의한 것으로
  名隨信法行 由根鈍利別
  
  수혹을 갖춘 자로서 1품에서부터
  5품을 끊은 자는 초과(初果)로 향하는 자이며
  다음의 3품을 끊은 자는 두 번째 과로 향하는 자이며
  8지(地)를 떠난 자는 세 번째 과로 향하는 자이다.
  具修惑斷一 至五向初果
  
  
  
83) 만약 도류지가 견도소단의 택멸을 지니기 때문에 견도라고 한다면, 일래과 등의 성자도 역시 그것을 지니기 때문에 견도위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
84) 만약 일찍이 관찰한 적이 없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견도라고 한다면, 혹은 일찍이 관찰한 성제를 다시 관찰하는 것을 수도라고 한다면, 고법지 내지 도법지의 7지(智) 역시 전찰나의 인(忍)이 관찰한 제(諦)를 거듭 관찰하는 것이므로 수도에 포섭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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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斷次三向二 離八地向三
  
  논하여 말하겠다. 견도위 중의 성자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수신행(隨信行)이며, 둘째는 수법행(隨法行)으로, 근기에 둔하고 예리한 차별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 명칭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즉 온갖 둔근을 수신행의 성자라고 이름하고, 온갖 이근을 수법행의 성자라고 이름한다.85)
  다시 말해 믿음에 의해 따라 행한 이를 수신행이라 이름한 것으로, 그는 믿음에 따른 행을 지녔기 때문에 수신행의 성자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이 같은 믿음에 따른 행을 자주 익힘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본성으로 삼았기 때문에 수신행의 성자라고 이름한 것으로, 그는 먼저 다른 이를 믿고 그 뜻에 따라 행하였기 때문이다. 수법행의 성자도 마땅히 이에 준하여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일찍이 스스로 계경 등의 법을 펼쳐 열람하고서 그 뜻에 따라 행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이러한 두 성자는 수혹(修惑)을 갖추었거나 끊은 등의 차별에 의해 세 가지의 향(向)으로 설정되기도 한다.86) 즉 그러한 두 성자로서 만약 일찍이 [이생위에서] 세간의 도[世道, 즉 유루도]로써 수소단의 혹을 아직 끊지 못하였거나 ― 이를 구박(具縛)의 성자라고 한다 ―, 혹은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의 1품 내지 5품의 수혹을 이미 끊고서 이러한 견도위에 이른 자를 초과향(初果向)이라 이름하니, 첫 번째 과위(果位)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첫 번째 과위'란 말하자면 예류과(預流果)로서, 이것은 일체의 사
  
  
85) 견도위에 든 자로서 일찍이 이생위에서 믿음과 공경[信敬]의 힘에 의해 가행을 수습한 둔근의 성자를 수신행(隨信行, sraddhanusarin)이라고 하며, 일찍이 계경 등의 법을 열람하며 가행을 수습한 이근의 성자를 수법행(隨法行, dharmanusarin)이라고 한다. 즉 이 같은 종성의 차별은 법이(法爾)로서 타고 난 것이다.
86) 성과(聖果)의 증득에는 차제증(次第證)과 초월증(超越證) 두 가지가 있다. 즉 견도에 들어 견혹을 끊고 나서 수도에 들어 수혹을 끊어 성과(聖果)에 이르는 4향(向) 4과(果)를 차제증이라고 하며, 일찍이 이생위에서 유루의 세속도로써 욕계 수혹의 일부 내지 전부를 끊고 난 다음 견도와 수도에 들어 견혹과 나머지 수혹을 끊는 이를 초월증이라고 하는데(이러한 이는 견도 16심에 이르러 견혹을 끊을 때 예류과를 초월하여 바로 일래과 또는 불환과를 증득한다), 이하의 논설은 후자에 대한 것이다. 즉 일찍이 이생위에서 유루도로써 욕계 수혹을 끊은 상태에 따라 수신·수법의 두 성자는 예류과향 등의 세 가지 향(向)으로 설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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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 과보 중에서 필시 처음으로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87)
  만약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 6품, 혹은 7·8품의 수혹을 이미 끊고서 이러한 견도위에 이른 자를 제2과향(第二果向)이라고 이름하니, 두 번째 과위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번째 과위'란 말하자면 일래과(一來果)로서, 이것은 두루 획득되는 사문의 과보 중의 두 번째의 것이기 때문이다.88)
  만약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의 9품의 수혹을 이미 떠났거나, 일찍이 초정려의 1품의 수혹을 끊고, 내지는 무소유처의 그것을 모두 떠나고서 이러한 견도위에 이른 자를 제3과향(第三果向)이라고 이름하니,89) 세 번째 과위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 번째 과위'란 말하자면 불환과(不還果)로서, 그 수(세 번째라고 하는 수)에 대해서는 앞의 설명에 준하여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90)
  다음으로 수도위인 도류지의 찰나에 의거하여 건립되는 온갖 성자들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제16 찰나의 마음에 이르러
  세 가지 향(向)이 과위(果位)에 머물게 되면
  이를 신해(信解)와 견지(見至)라고 이름하니
  역시 둔근과 이근의 차별 때문이다.
  至第十六心 隨三向住果
  
  
  
87) 예류과(혹은 須陀洹, srotapanna)에 대해서는 본권 말미(p.1072)에서 상론된다.
88) 일래과(sakrdagamin, 혹은 斯陀含)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4(p.1078)의 초반에서 상론된다.
89) 여기에는 욕계 수혹의 9품을 끊은 자와, 4정려와 공무변처·식무변처·무소유처 각각의 1품 내지 9품의 수혹을 끊은 자 등 도합 64가지 유정이 있다.
90) 불환과(anagamin, 또는 阿那含)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4(p.1081 이하) 참조. 참고로 유루도는 유정(有頂)의 혹을 끊을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아라한과는 제16심에서 획득될 수 없기 때문에 초월증에는 아라한향·과가 없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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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名信解見至 亦由鈍利別
  
  논하여 말하겠다. 즉 앞에서 언급한 수신과 수법의 행자가 제16 도류지 찰나의 마음에 이르게 되면, 이를 일컬어 '과위에 머무는 자[住果]'라고 하지, 더 이상 '향하는 자[向]'라고는 하지 않는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향은 여기서 세 가지 과위에 머무는 자가 되니,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예류향은 여기서 예류과에 머물게 되고, 앞에서 언급한 일래향은 여기서 일래과에 머물게 되며, 앞에서 언급한 불환향은 여기서 불환과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라한과(阿羅漢果)는 필시 처음으로 바로 획득하는 일이 없으니, 견도로써는 수혹을 끊을 수 없기 때문이며, 세간도로써는 유정지(有頂地)를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91)
  그리고 과위에 머무는 단계에 이르면 두 가지의 명칭을 버리고 획득하게 된다. 즉 그 때는 더 이상 수신행·수법행이라고 이름하지 않으며, 신해(信解)와 견지(見至)라고 하는 두 가지 명칭을 획득하게 되는데, 이것 역시 근기가 둔하고 예리한 차별에 따른 것이다. 이를테면 온갖 둔근자를 앞에서는 수신행이라고 이름하였지만 지금 여기서는 '신해'라고 이름하며, 온갖 이근자를 앞에서는 수법행이라고 이름하였지만 지금 여기서는 '견지'라고 이름하니, 이러한 두 성자는 신(信)과 혜(慧)가 서로 증장하였기 때문에 신해와 견지라는 명칭으로 그 차별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92)
  일찍이 욕계 수소단의 1품 내지 5품의 혹 등을 끊고서 제16 찰나인 도류지의 마음에 이르게 되었는데, 어떠한 연유에서 이를 다만 예류과 등이라고만
  
  
  
91) 아라한과는 초월증(超越證)에 의해 직접적으로 바로 획득되는 일이 없으며, 반드시 불환과를 획득한 후 유정처(有頂處, 비상비비상처정)의 수혹을 끊고 나서야 비로소 획득될 수 있다.
92) 둔근자의 과위를 '신해(sradhadhimukta)'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증상력으로 말미암아 승해(勝解)가 나타났기 때문이며, 이근자의 과위를 '견지(drsty-apti)'라고 하는 것은 혜의 증상력으로 말미암아 정견(正見)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즉 수신행 위(位)의 믿음이 이 단계에 이르러 더욱 증장하여 무루의 승해를 처음으로 일으켰기 때문에 신해라고 한 것이며, 수법행위의 혜가 더욱 증장하여 정견의 혜로 현현하였기 때문에 견지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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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할 뿐 후찰나 과위[後果, 즉 일래과 등]의 '향'이라고는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93)
  게송으로 말하겠다.
  
  온갖 과위를 획득하는 단계에서는
  아직 승과도(勝果道)를 획득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아직 승과도를 일으키지 않았을 때에는
  주과(住果)라고 하지 '향'이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諸得果位中 未得勝果道
  故未起勝道 名住果非向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성자의] 과위를 획득할 때에는 필시 아직 승과도(勝果道)를 획득하지 않았기 때문으로,94) 과위에 머물 때나 아직 승과도를 일으키지 않았을 때에는 다만 과위에 머무는 자[住果]라고 이름하지 후찰나의 과위로 향하는 자[向]라고는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의 수혹 1품 내지 5품 등을 끊고서 과위를 획득한 모든 이는 그 때 반드시 이 생에서 승과도를 일으키니, 그렇기 때문에 일찍이 세 정려의 염오를 떠난 자로서 그 후 하지(下地)에 의거하여 견도에 든 자는 그 같은 과위를 획득하고 나서 현생 중에서 필시 능히 다음의 승과도를 인생(引生)하게 되는 것이다.95)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성자
  
  
93) 즉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 1품 내지 5품(혹은 7·8품, 혹은 초정려의 1품 내지 무소유처의 9품)의 수혹을 끊고서 견도에 들어 제16 찰나인 도류지의 마음에 이르게 되면 예류과(혹은 일래과·불환과)인 동시에 일래과(혹은 불환과·아라한과)의 '향'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난문. 즉 본단에서는 주과(住果)가 향이 아닌 까닭에 대해 밝히고 있다.
94) 승과도란 향도(向道)를 말하는 것으로, 선행한 과도(果道)보다 뛰어난 도라는 뜻이다. 혹은 후에 초래되는 과보를 '뛰어난 것[勝]'이라 이름하며, 그것으로 나아가는 도라는 의미에서 승과도라고 이름한 것이다. 따라서 초과(初果, 즉 예류과) 등을 일으키는 단계에서는 오로지 그러한 과보만을 획득할 뿐, 아직 그러한 과보로부터 뛰어난 도(즉 일래향)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과위에 머무는 자[住果]'라고 이름할 뿐 '향하는 자[向]'라고는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95) 이는 초월증으로서 과위를 획득한 성자는 현생에서 다음 과위의 향도(向道, 즉 승과도)를 일으키게 된다는 사실의 예시이면서, 『발지론』 권제6(한글대장경176, p.131)의 "변정천(제3정려 제3천) 이하와, 성자로서 그 이상(즉 제4정려)에 태어나는 자는 무루의 낙근을 성취한다"는 사실을 해명하는 근거로서 논설한 것이다. 즉 일찍이 이생위에서 아래 세 정려의 염오를 떠난 이는 유루의 낙근도 끊었는데, 만약 이러한 이가 그 후 제2정려나 초정려 혹은 미지정 등의 하지에 의거하여 견도 제16 찰나의 마음을 획득(즉 불환과)하고서 향도를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죽어 제4정려에 태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무루의 낙근을 성취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왜냐 하면 이미 유루의 낙근은 끊어졌고, 사지(捨地)인 제4정려 이상에는 낙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곧 『발지론』에서 그같이 말한 것은 결정코 현생에서 승과도를 일으켜 무루의 낙근을 성취할 것을 예상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자세한 내용은 『대비바사론』 권제90, 한글대장경121, p.327-32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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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서 상지(즉 제4정려)에 태어나는 자는 결정코 낙근을 성취한다'고 마땅히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구(先具)와 배리욕(倍離欲), 그리고 전리욕(全離欲)으로서 견제(見諦)에 든 여러 성자들의 차별을 16찰나의 마음에 의거하여 이미 건립하여 보았다.96)
  이제 마땅히 수혹에 근거하여 점차로 낳아지는 '능히 대치하는 도'(즉 修道)의 분위차별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각 지마다 아홉 가지 실(失)과 덕(德)이 있으니
  하품·중품·상품의 각기 세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地地失德九 下中上各三
  
  논하여 말하겠다. 여기서 '실'이란 과실로서 대치되어야 할 장애[所治障]를 말하며, '덕'이란 공덕으로서 그것을 능히 대치하는 도[能治道]를 말한다. 즉 앞에서 이미 욕계 수소단의 혹에 9품의 차별이 있다고 분별한 것처럼, 이와
  
  
  
96) '선구'란 구박의 성자를 말하는 것으로, 특히 견도에 들기 전에 욕계 수혹 중 1품도 끊지 못한 자, 다시 말해 욕계의 수혹을 모두 갖춘 자를 말하며, '배리욕'이란 욕계 9품의 수혹 중 일부분(6·7·8품)을 끊은 자를, '전리욕'이란 9품 전체를 끊은 자를 말한다. 이들은 모두 초월증의 성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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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찬가지로 상지(초정려) 내지 유정처(有頂處)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97) 그리고 대치되어야 할 장애가 각각의 지마다 각기 9품이 있듯이 그것을 능히 대치하는 온갖 도―무간도와 해탈도―에 9품이 있는 것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과실과 공덕은 어떻게 각기 9품으로 나뉘는 것인가?
  이를테면 근본품으로 하·중·상이 있으며, 이 세 가지 품류는 다시 각기 하품·중품·상품의 차별로 나뉜다. 이에 따라 과실과 공덕은 각기 9품으로 나뉘는 것이니, 이를테면 하의 하품과 하의 중품과 하의 상품과, 중의 하품과 중의 중품과 중의 상품과, 상의 하품과 상의 중품과 상의 상품이 바로 그것이다.98)
  여기서 하하품의 도의 세력은 능히 상상품의 장애(즉 번뇌)를 끊으며, 나아가 상상품의 도의 세력은 능히 하하품의 장애를 끊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능히 대치하는 상상품 등의 온갖 공덕은, 처음에는 [다시 말해 수혹을 처음으로 끊을 때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러한 공덕이 존재할 때에는 상상품 등의 과실이 이미 없어졌기 때문이다. 마치 옷을 세탁할 때 거친 때가 먼저 제거되고, 그 후에 점차로 미세한 때가 제거되는 것처럼, 또한 완전히 캄캄한 어둠[麤闇]은 적은 빛으로도 능히 멸할 수 있지만 미세한 어두움은 요컨대 큰 빛에 의해 비로소 소멸되는 것처럼, 과실과 공덕이 서로 대응하는 이치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곧 백법(白法, 즉 대치도)의 힘은 강력하고 흑법(黑法, 즉 번뇌)의 힘은 저열하기 때문에 찰나에 저열한 도(하하품의 도)가 현행하여 무시(無始) 이래 전전(展轉) 증익하여 온 상품의 온갖 혹을 능히 단박에 끊어지게 하니, 마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쌓이고
  
  
  
97) 수신행과 수법행의 세 가지 과향(果向)을 논설하면서 욕계 9품의 수혹을 분별하였다. 따라서 3계 9지(욕계와 4정려·4무색정)에는 모두 81품의 수혹이 있으며, 그 대치도인 수도(修道)에도 81품이 있다.
98) 3계 9지에 각기 9품의 수혹이 있기 때문에 모두 81품의 번뇌가 되며(즉 견혹은 돌이 깨어지듯이 단박에 끊어지기 때문에 그 수를 번뇌 자체에 근거하여 헤아리지만, 수혹은 연근의 심줄이 끊어지듯이 점진적으로 끊어지기 때문에 품류에 근거하여 헤아린 것이다), 그것을 끊고 임지하는 것은 무간도와 해탈도이기 때문에 대치도는 모두 162찰나의 마음이다. 곧 최후의 1찰나의 마음은 무학도이지만, 견도 제16심이 수도이기 때문에 수혹의 대치도는 162찰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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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쌓인 많은 병도 조그마한 양약을 복용함으로써 능히 단박에 낫게 되는 것과 같고, 또한 장시간에 걸친 큰 어둠도 1찰나의 작은 등불로 능히 소멸할 수 있는 것과 같다.
  
  [3계 9지의] 과실과 공덕의 차별을 9품으로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그것에 근거하여 성자의 차별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온갖 유학(有學)으로서 수도위 중에 있는 성자를 역시 또한 신해(信解)와 견지(見至)로 총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시 그 단계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의 차별이 있으니, 아직 아무것도 끊지 못한 자에 대해 마땅히 먼저 건립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아직 수소단의 과실을 끊지 못하고
  과위에 머무는 자를 '극칠반생'이라 한다.
  未斷修斷失 住果極七返
  
  논하여 말하겠다. 과위(果位)에 머무는 자로서 일체의 지(地)에 존재하는 수소단의 과실을 아직 아무것도 끊지 못하였을 때를 일컬어 '예류과(預流果)'라고 하는데, 그의 태어남은 극칠반(極七返)이다. 여기서 '칠반'이라고 하는 말은 일곱 번 생을 왕복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바로 인·천(물론 욕계천임) 중에 각기 일곱 번 태어난다는 뜻이다.99) 또한 '극'이라고 말한 것은 가장 많이 생을 받는 경우를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모든 예류가 다 일곱 번 반복하여 생을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경에서 설한 '극칠반
  
  
99) 견도 제16 찰나 도류지에 이르러 일체의 견소단의 번뇌를 끊고 수도위에 든 자를 예류과(預流果)라고 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불법의 흐름에 이른 자'로서 더 이상 악취에 떨어지는 일이 없으며, 최대한 인·천을 일곱 번 왕래한 후 반열반을 성취한다. 그것은 아직 끊어지지 않은 욕계 9품의 수혹 중 상상품의 혹이 2생을 초래하고, 상중·상하·중상의 3품이 각기 1생을 초래하며, 중중·중하품이 1생을, 그 밖의 하 3품이 1생을 초래하기 때문이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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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이란 바로 그 중에서 가장 많을 경우가 일곱 번 반복하여 태어난다는 뜻이다.100)
  그리고 온갖 무루의 도를 모두 일컬어 '흐름[流, srota]'이라고 한 것으로, 이것을 근거로 하여 열반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또한 '예(預, apanna)'라고 함은 최초로 이르러 획득[至得]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한 말로서, 그는 [무루도의] 흐름에 이르렀기 때문에 '예류'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예류라고 하는 명칭은 어떠한 뜻에 근거한 것인가? 만약 처음으로 무루도를 획득하였을 때를 일컬어 '예류'라고 한다면 예류라고 하는 명칭은 마땅히 여덟 번째(즉 예류향)가 되어야 할 것이며, 만약 처음으로 과위(果位)를 획득하였을 때를 일컬어 '예류'라고 한다면 배리욕(倍離欲)과 전리욕(全離欲)의 행자가 도류지에 이르렀을 때에도 마땅히 예류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다.101)
  이러한 예류라고 하는 명칭은 처음으로 과위를 획득하였을 때에 근거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명칭은 일체의 과위를 두루 획득하는 자가 처음으로 과위를 획득한 것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으로, 일래과와 불환과는 결정코 처음으로 획득된 과위가 아니지만 이것은 결정코 처음으로 획득된 과위이기 때문에 '예류'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102)
  그렇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이러한 명칭은 여덟 번째 성자(예류향)에 근거
  
  
  
100) 『중아함경』 권제1 「수유경(水喩經)」(대정장1, p.424하), " 極受七有, 天上人間七往來已便得苦際."
101) 만약 처음으로 무루도를 획득하였을 때를 '예류'라고 한다면, 견도의 첫 찰나의 마음에 의해 처음으로 무루성도를 획득하기 때문에 이것을 예류향이라고 이름해야 한다. 즉 예류향은 견도 첫 찰나에서 제15찰나에 걸쳐 있는 초과(初果)의 성자로서, 4향 4과를 아라한과로부터 헤아려 나아갈 때 여덟 번째 성자라고도 한다.(『대비바사론』 권제46, 한글대장경119, p.495) 또한 만약 처음으로 과위를 획득하였을 때를 '예류'라고 한다면, 유루 세간도로써 욕계 6품의 수혹을 끊은 자가 도류지의 단계에서 일래과를 획득하였을 때(배리욕)에도, 또한 9품의 수혹을 모두 끊은 자가 도류지의 단계에서 불환과를 획득하였을 때(전리욕)에도 역시 처음으로 과위를 획득한 것이기 때문에 예류과라고 이름해야 한다는 힐난.
102) 즉 배리욕과 전리욕의 행자가 도류지에 이르렀을 때에는 처음으로 획득된 과위가 아니라 일찍이 이생위에서 수소단의 혹이 끊어진 것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일래과와 불환과라고 하지 '예류과'라고는 이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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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 않은 것인가?
  요컨대 도류지에 이르러 그것을 획득할 때 비로소 향(向)과 과(果)의 무루도를 함께 획득하기 때문이며, 견(見)과 수(修)의 무루도를 다 같이 획득하기 때문이며, 현관(現觀)의 흐름[流]에 두루 이르러 획득하기 때문에 '예류'라고 이름한 것이지만, 여덟 번째 성자는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예류'라는 명칭은 여덟 번째 성자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다.103)
  그리고 그러한 예류과의 성자는 이후 인취 중에서 최고로 많을 경우 일곱 번의 중유(中有)와 생유(生有)로 결생(結生)하고, 천취 중에서도 역시 그러하여 도합 스물여덟 번 결생하게 되지만, 그 모두는 '칠'이라는 수로 동일하기 때문에 '극칠반생'이라 설한 것이니, 마치 칠엽수(七葉樹)라고 하고, 7처선(處善)이라고 하는 경우와 같다.104) 비바사사(毘婆沙師)가 설하는 바는 이와 같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계경 중에서 "견도가 원만한 자가 다시 여덟 번째의 존재[有]를 받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105)
  이 계경의 뜻은 하나의 취(趣)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 만약 [계경의] 말 그대로 집착할 경우 중유도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
  
  
  
103) 즉 도류지의 단계(제16심)를 예류과라고 하는 것은 그 때 향·과의 무루도를 획득하고, 견·수도를 획득하며, 4제현관의 16심(8忍·8智)을 획득하기 때문이지만, 제8 예류향의 단계(제1 고법지인에서 제15 도류지인)에서는 아직 이 세 가지 인연을 충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류과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104) 5온의 각각을 고·집·멸·도·애미(愛味)·과환(過患)·출리(出離)라는 일곱 가지 관점에서 관찰하는 것을 '35처선'이라 하지 않고 7처선이라고 하는 것은 '칠'이라는 수가 공통되기 때문이다. 또한 칠엽수의 잎은 대단히 많지만 한 가지에 일곱 잎만이 달리기 때문에 칠엽수라고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류과를 획득한 이는 이후 최대한 인·천에서 각기 일곱 번의 생유와 중유를 향수하지만(28有) '칠'이라는 수가 공통되기 때문에 '극칠반생'이라고 한 것이다.
105) 『중아함경』 권제48 「다계경(多界經)」(대정장1, p.724상), " 若見諦人受八有者 終無是處. 若凡夫人受八有者 必有是處." 보광은 이를 미사새부(彌沙塞部, Mahasasaka) 즉 화지부(化地部)의 물음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이 부파에서는 극칠반생의 7생을 인·천을 합한 7생(인4 천3, 혹은 인3 천4)으로 이해하였다고 하였다. 참고로 화지부에서는 중유(中有)의 실재성을 부정하는데, 이에 대한 유부의 답변에서 유추하여 그같이 해석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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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106)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상류(上流)로서 가장 높게는 유정처(有頂處)에서 [반열반에 드는] 자도 역시 마땅히 하나의 취에 근거하여 여덟 번째의 생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107)
  이는 욕계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에 그 같은 허물이 없다.108)
  이러한 설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교법에 근거한 것인가, 이치에 근거한 것인가? 어떠한 근거에서 그 같은 예류과는 인·천 중에서 각기 일곱 번의 생을 받는 것이지, 합하여 일곱 번의 생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계경에서 "천취 중에 일곱 번 태어나며, 아울러 인취 [중에서도 그러하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음광부(飮光部)에서 전승한 경에서도 "인·천처에서 각기 일곱 번의 생을 받는다"고 분명히 별도로 설하고 있으니,109)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해 마땅히 고집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즉 만약 인취 중에서 예류과를 획득한다면 그는 다시 인취에 환생하여 반열반을 획득하게 되며, 천취 중에서 획득한 자라면 다시 천취에 환생하여 반열반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110)
  그렇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그러한 예류과의 성자는 여덟 번째의 존재를 받
  
  
  
106) 즉 계경에서는 인취 혹은 천취 중 어느 하나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 표면으로 드러난 경문의 언사에만 집착할 경우, 부처는 중유의 존재도 부정하고 오로지 생유의 7생만을 인정하였다고 말해야 한다는 힐난.
107) 견도가 원만하게 성취된 이는 하나의 취(趣)에 근거하여 여덟 번째의 생은 더 이상 받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경의 뜻이라면, 무잡수(無雜修) 정려를 닦아 욕계에서 몰한 후 5정거천을 제외한 색계천에 두루 태어나며, 명종하고 나서 3무색정에 순서대로 태어난 후 마침내 유정천에서 반열반에 드는 상류반(上流般) 불환의 경우, 그 역시 견도가 원만한 자임에도 여덟 번, 열번 이상의 생을 받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하는 난문. 상류반 불환과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4(p.1083) 참조.
108) 즉 욕계의 한 취(趣)에 국한하여 여덟 번째 생을 받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라는 뜻.
109) 『별역잡아함경』 권제8(대정장2, p.434중), "如來記, 彼得須陀洹, 於人天中七生七死, 得盡苦際." 그러나 이 『별역잡아함경』이 음광부 소전(所傳)인지 아닌지는 알려지고 있지 않다.
110) 이는 여덟 번째 생을 받지 않는 이유를 밝힌 것으로, 만약 여덟 번째 생을 받을 경우 인취에서 예류과를 획득하고서 천취에서 반열반하게 되는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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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일이 없는 것인가?
  상속신이 거기(즉 일곱 번째 생)에 이르러 반드시 성숙하기 때문으로, 성도의 종류가 법이(法爾)로서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니, 마치 칠보(七步)의 뱀과 제4일의 학질이 그러한 것과 같다.111) 또는 그에게 또 다른 7결(結)이 존재하기 때문에 [7생을 받게 되는 것이니], 이를테면 두 가지 하분결(下分結)과 5상분결이 바로 그것이다.112) 따라서 중간에 비록 성도가 현전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 밖의 다른 업력이 남아 있기 때문에 원적(圓寂)을 증득하지 못하며, [일곱 번째 생에 이르러 비로소 증득하게 된다].
  그런데 일곱 번째 존재에 이르렀을 때가 불법(佛法)이 존재하지 않는 시절이라면 그는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아라한과를 획득한다.113) 그러나 과위를 획득하고 나서는 필시 집에 머물러 있지 않으니, 그 때는 법이(法爾)로서 저절로 필추(苾芻)의 형상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 때 그는 [불법 이외의] 다른 도(즉 외도)로 가 출가한다"고 하였다.
  어떻게 하여 그 같은 예류과를 [3악취로] 물러나 떨어짐이 없는 법[無退墮法]이라고 하는 것인가?
  물러나 떨어지는 업을 생장시키지 않기 때문이며, 그가 생장시켰던 업은 결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며, 강성한 선근이 그의 몸을 진호(鎭護)하기 때문이며, 가행(신업·어업)과 의요(의업)가 다 같이 청정하기 때문이니, 온갖 유정으로 하여금 결정코 악취에 떨어지게 하는 업은 인위(忍位)에서도 일어나지 않거늘 하물며 예류과를 획득한 성자에게 일어날 것인가? 그래서 어
  
  
111) 어떤 뱀에 물리면 반드시 일곱 걸음 안에 죽는 것처럼, 어떤 학질에 걸리면 반드시 4일째 되는 날 발작하는 것처럼 예류과의 소의신은 제7 생에 이르면 반드시 성도를 성취하여 법이로서 능히 온갖 번뇌를 다하기 때문에 여덟 번째 생은 더 이상 상속하지 않는 것이다. 그 같은 법이에 대해서는 주99)를 보라.
112) 5하분결 중의 유신견·계금취·의(疑)의 3결은 견도로써 끊어지지만 그 밖의 수혹인 탐(貪)·진(瞋)의 2결과 상계에 수순하는 색·무색계의 2탐과 도거·만·무명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13) 불법이 유통되지 않는 시기에는 출가의식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오로지 부처가 세상에 출현한 때만 별해탈률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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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이는 지은 죄가 적을지라도 역시 악취에 떨어지고
  지혜로운 이는 지은 죄가 클지라도 역시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마치 쇠뭉치는 작을지라도 역시 물에 가라앉고
  쇠그릇은 클지라도 역시 능히 물에 뜨는 것과 같다.
  
  경에서는 "예류는 괴로움의 끝자리[邊際]를 짓게 된다"고 설하고 있는데,114)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괴로움의 끝자리라고 일컬은 것인가?
  이 생을 거친 이후에는 더 이상 괴로움이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이는 바로 후생(後生)에는 괴로움이 더 이상 상속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혹은 괴로움의 끝자리란 이른바 열반을 말한다.
  그렇다면 열반이 어떻게 지어진 것[所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같은 열반의 획득을 장애하는 것(즉 번뇌)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짓게 된다'고 설한 것이니, 이를테면 집[觀臺]을 부순다는 말을 '허공을 짓는다(만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115)
  또한 그 밖의 단계에서도 역시 최대한 일곱 번 생을 반복하여 태어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결정적인 사실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본송에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116)
114) 『잡아함경』 권제43 제947경(대정장2, p.242중), " 斷此三結(身見·戒禁取·疑)得須陀洹, 不墮惡趣法決定正向三菩提, 七有天忍往生, 究竟苦邊."
115) 그러나 허공은 열반(즉 택멸)과 마찬가지로 무위로서 결코 지어지는 것[所作]이 아니다.
116) 즉 성자가 아닌 범부도 역시 최대한 일곱 번 생을 반복하여 상속이 성숙해짐에 따라 반열반을 획득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결정적 사실이 아니다.(『현종론』 권제31, 앞의 책, p.342)
 
출처 : 通達無我法者
글쓴이 : CD굽던노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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