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스님 그는 누구인가?
분황사 보광전에 모셔진 |
원효(617~686)는 진평왕 39년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의 불지촌에서 태어났다. 원효의 부친 설담날은 당시 신라 육두품으로서 관리의 열일곱 계급 중 열한번째인 내마(奈麻)의
지위에 있었다. 그리고 조부는 잉피공(仍皮公)이라 하여 널리 공경을 받은 사람이었다. 청년 원효는 화랑이 되어 출중한 문무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젊은 시절의 신라는 너무나 힘든 처지였다. 북에서는 고구려가, 서쪽에서는 백제가 쉴 사이없이 침공해 왔던
것이다.
전장을 누비던 원효는 전투에서 절친한 벗이
죽자 복수를 결심하며 통곡하던 중 지금까지 자신이 적군을 죽여 승리에 들떠 있을 때 상대편에서도 똑같이 복수의 칼을 갈며 애통해 했음을
깨달았다. 여기에다 어머니의 죽음, 방울스님의 가르침을 겪고 배우면서 진정한 삶의 진리를 구해보자는 생각도 하게 된다. 결국 그는 이차돈,
원광과 자장의 뒤를 이어 부처의 나라 신라를 더욱 평화스럽게 만들기 위한 길을 찾고자 결심하게 된다. 마침내 원효는 29살의 나이로 황룡사에서
머리를 깎고 부처의 길에 나섰다.
출가 직후 그는 자신의 집을 절로 만들어 '초개사'라 부르고 도를 닦는 한편 설법도 부지런히 했다.
그러던 중 34살이 된 원효는 진덕여왕 4년 650년에 이르러 외국은 어떠한지를 살펴보고 보다 더 깊이 불교공부를 하기 위해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당나라로 가려다가 국경선에서 고구려의 보초병에게 붙잡혀 간첩으로 오인되어 감금당했다가 한 달 가량 지난
후 겨우 풀려났다. 옥고를 겪은 이들은 그 길로 곧장 되돌아 왔다.
이후 그는 국내에서 공부도 하고 수도도 했다. 더러는 강단에
올라 설법도 했다. 그는 원래 워낙 설법을 잘했기 때문에 그 인기가 그야말로 높았다. 얼굴도 잘 생기고 화랑출신이라 기골은 장대했던 데다
목소리에 힘이 넘치고 그 내용이 알아듣기 쉬우면서도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가 설법을 할 때에는 임금을 비롯한
문무백관들에서부터 무수한 신라인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설법을 경청했다. 또한 그는 <발심장(發心章)>이란 글을 지어 모두들 빨리 불도를
닦도록 권하기도 했다.
백제가 망한 이듬해인 661년 문무왕 원년에 45살이 된 원효는 의상과 더불어 다시금 당나라에 가고자 서해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수원 근처에서 며칠 동안 묵으면서 배를 기다리던 어느 날 밤 해골바가지에 괸 썩은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어 다음과 같은 게송을 노래하였다.
心生卽種種法生(심생즉종종법생)
마음이 생하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心滅卽龕墳不二(심멸즉감분불이)
마음이 멸하면 龕과 墳이 다르지
않네
三界唯心 萬法唯識(삼계유심 만법유식)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현상이 또한
識에 기초한다.
心外無法 胡用別求(심외무법 호용별구)
마음밖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즉 '모든 근본원리가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또렷또렷하다.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달려 있다. 내 마음 외에 그 무엇이 있겠는가. 모든 일은 나로부터 출발시켜야 한다.' 고 깨달았다.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당나라로 가던 길을 멈추고 미련 없이 홀로 서라벌로 되돌아 왔고 자기 스스로의 길로 나섰다. 그후 686년 신문왕 6년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5년 동안 인간 구도의 길로 가는 처절하고도 험한 길을 걸었다. 형식과 규율을 싫어했던 원효는 요석공주와 파계하여 설총을 얻은 후 승복을 벗어버리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낮추며 전쟁에 찌든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당시의 승려들은 주로 수도 경주의 대사원에서 호화생활을 누렸으나 원효는 전국을 돌며 전쟁으로 인한 참화로 갈가리 찟긴 민중의 마음을 어루어만지며 갈등과 증오를 차단하여 원융회통의 하나 되는 경지로 이끌었다.
원효는 모두 90여 종 15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 중 대부분은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지고 부분적으로라도 전해지는 것은 20여 종에 불과하지만 저술 목록을 보면 그가 당시 중국 불교계에서 논의되던 거의 모든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효의 저술은 당시 불교문명권에 두루 알려져 주목을 받았다. 그의 주저 중 하나인 ‘대승기신론소’를 읽은 중국 화엄종의 3대 종조 법장은 큰 감동을 받았고 이후 불교 경전에서 의문나는 점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편지로 물어보았다고 한다. 원효의 손자인 설중업은 8세기 말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금강삼매경론’에 흠뻑 빠져 있던 한 일본 고관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또 원효가 당시 불교문명권의 중요한 논쟁들에 대해 종합적 입장을 제시한 ‘십문화쟁론’은 인도에까지 전해져 산스크리트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그러나 원효의 진정한 위대함은 이런 교학 연구보다는 ‘대중교화’를 향한 그의 열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원효는 대승불교의 최고 경전으로 꼽히는 ‘화엄경’에 대한 해설서를 쓰다가 제4권 ‘십회향품’에 이르러 붓을 꺾고 말았다고 한다. 십회향품은 보살이 그 동안 닦은 여러 가지 공덕을 모두 중생에게 돌려주고 이를 바탕으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불경 연구의 절정에서 원효는 그 한계를 보았던 것일까? 이후 원효는 광대가 춤출 때 쓰는 커다란 박을하나 얻어 쓰고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춤추고 노래하면서 일반 대중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다. 삼국유사는 그가 화엄경의 “일체의 걸림 없는 사람은 한길로 생사를 벗어난다”'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는 구절을 좋아하여 스스로 ‘무애’라 이름했으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모두 부처님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된 것은 원효의 공이 크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효는 자신의 사상을 “한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 중생을 이롭게 한다”'귀일심원 요익중생'고 표현했다. (2001. 4 / 문촌)
원효를 찾아서 http://www.korearoot.net/sasang/me2/0.htm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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