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체계적 이해
1. 교설의 특질
1. 진리성 주장의 문제
불교가 일어날 무렵(B.C. 5세기 경)의 인도 사회는 여러 가지 종교 사상이 발생하여 서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대립 상황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인간의 생사 괴로움에 대한 각파의 견해만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정통파 바라문교(Brahmanism)에서는 우주의 창조주이며 본질이기도 한 범(brahman)이라는 천신(天神)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과 공희(供犧)를 통해서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설하였다. 그러나 그 계통에서도 우파니샤드(upanisad) 철인들은 인간의 자아(atman)와 범(梵)은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알음(智)을 통해서만이 인간은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는 비의(秘義)를 전수하고 있었다. 인간의 죽음이 극복될 수 있다는 우파니샤드의 이러한 해탈 철학과는 정반대로 사문계(沙門系)의 순세파(順世派, lokayata)에서는 인간은 죽으면 그만이라는 단멸론(斷滅論, uccheda-vada)을 주장하였으며, 생활파(ajivaka, 邪命外道)에서는 생사라는 것도 일종의 불변적 요소로서 인간의 의지로는 어쩔 수가 없다는 무작용론(akrya-vada, 決定論)을 내서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계파(離繫派, nirgramtha, Jainism)에서는 정신(jiva)을 계박(繫縛)하고 있는 육체(pudgala)를 극렬한 고행을 통해 분리시킴으로써 인간은 생사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는 해탈 사상에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각 파는 자신의 주장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진리로서 그 밖의 것들은 모두가 오류라고 부정하여 심한 쟁론을 일으키고 있었다. 정통 바라문교에 의하면 베다(v-eda) 성전은 인간의 인식 범위를 초월한 '하늘의 계시'였다.
이런 권위주의를 사문들이 그대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순세파에서는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인식은 직접적인 감각에 한정된다고 주장하였으며, 산자야(Samjaya belatthiputta)와 같은 사람은 감각지(感覺知) 이상의 모든 종교적 교설을 회의하였다. 그러나 이계파의 인식론에는 추리지(推理知)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조건부적 개연설(syad-vada)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각 파의 엇갈리는 이러한 진리성 주장은 당시의 사람들을 심한 종교적 방황과 회의에 빠지게 하였음이 틀림없다. 누구의 말이 진실이며 누구의 말이 거짓일까? 각 파의 견해는 본질적으로 다르므로 그들 중의 어느 하나가 진리하면 다른 것들은 거짓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들의 견해가 모두 오류일지도 모르며, 맹인이 코끼리의 일부분을 만져보듯이 진리의 어느 일면만을 파악하고 그것을 전체에 적용시킨 오류를 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식별해야 할까?
2. 깨달음의 필요성
종교적 교설에 대한 이러한 회의가 발생하게 되면, 이제 덮어놓고 그것을 신앙할 수만은 없게 된다. 하늘의 계시라든가 오랜 전통을 가졌다던가 성인의 말이라든가 하는 이유만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각 파의 교설을 우선 충실히 수습(修習)하여 그 진의를 파악한 다음, 그 진위를 각자가 스스로 판단해 보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각 파의 주장이 모두 완전한 진리에 이르지 못한 것임이 발견될 때는 종교적 진리 탐구의 길은 다시 계속되어야만 할 것이다.
석가모니께서는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당시의 종교 사상에 대해서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계셨던 것으로 보인다. 출가 후 그는 곧 아라라 칼라마(Alara Kalama)와 웃다카 라마풋타(Udd-aka Ramaputta)와 같은 저명한 바라문의 스승을 찾아가 그들의 선정(dhyana)을 익혀 마침내 그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생사를 극복할 진정한 길이 아님을 발견하였을 때 그곳을 서슴없이 떠났던 것이다. 그 뒤 우루벨라(Uruvela)에 가서 사문계의 수행법인 고행(tapas)을 극한에 이르도록 닦아 보았는데, 그것 또한 생사를 극복할 진정한 길이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그리하여 가야(Gaya, 뒤에 Buddhagaya가 됨)의 조용한 숲을 찾아가 독자적인 명상에 잠겨 마침내 '모든 것을 연기한다'는 진리를 깨닫고 부처님(Buddha)이 되신 것이다.
'깨달음(bodhi)'이라는 말은 '계시(revelation)'라는 말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인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신이 특정한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이 계시라면, 깨달음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마침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모든 종교적 교설을 비판적 견지에서 몸소 닦아 보고 그들의 잘못을 파악한 뒤 새로운 진리 탐구를 행한 끝에 성취한 석가모니의 깨달음은 이런 의미에서 인류의 종교적 사유에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3. 석가모니의 설교 방법
불교는 바로 이러한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인데, 그 가르침을 베풂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가 있다. 진리 탐구자로서의 석가모니의 길과 설법자로서의 석가모니의 길은 반드시 일치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비판적 태도와 합리적인 탐구가 구도할 때의 일관된 입장이었다고 하더라도, 깨달은 뒤의 설법 때에는 바라문교와 같은 권위주위적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실제적 전도에 있어서는 이런 권위주의적 방법이 오히려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성도 후 석가모니께서는 한때 이 문제로 깊은 생각에 빠지셨다고 전해진다.
"신앙하고 두려워할 대상이 없으면 불안하고 무력해지고 말지 않겠는가."<잡이함 권 44>
그러나 석가모니께서는 끝내 그런 권위주의적 길을 택하지 아니하였다. 앞서 인용한 경문에는 곧 이어 "오직 정법이 있어 나로 하여금 자각케 하여 깨달은 자가 되게 하였으니 내 마땅히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리라."는 말이 따르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은 깨달음을 열게 하려는 굳은 결의의 표명이다. 이것은 당시의 종교적 혼란을 깊이 고민해 보았던 석가모니의 지극한 인간애의 발로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자신이 이룬 깨달음을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이루게 하고 싶었던 석가모니의 이러한 바램은 커다란 장벽에 부딪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이룬 깨달음은 너무나도 미묘하고 심오하여 탐욕에 가린 중생들에게는 도저히 실현될 수가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진리라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설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전도를 단념하고 싶을 정도로 석가모니의 괴로움은 컸다. 그가 세상에 나가 전도하게 된 것은 오로지 범천의 지극한 권청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장아함 권 1. 대본경> 이것은 당시의 종교계에서 인간주의적인 바른 종교의 출현이 얼마나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었던가를 극화(劇化)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석가모니께서 바라는 인간주의적 바른 종교가 세상에 행해지기 위해서는 이제 그 '깨닫기 어렵다'는 문제가 어떻게라도 해결되지 않으면 안된다. 석가모니께서는 이 문제에 골몰하여 마침내 하나의 묘안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중생들의 '깨닫는 능력(機)'을 점진적으로 성숙시켜 가서 마침내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한다는 방법이다. 이런 방법론을 불교에서는 방편시설(方便施設)이라고 부른다. 방편(upaya)은 '접근한다'는 말이고 시설(prajnapti)은 '알아내게 한다'는 뜻이다.
이런 입장에서 석가모니께서는 지극히 평범한 현실적인 사실을 깨우치는 일에서부터 설해 가기 시작하였다. 신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초월적인 진리에서부터 설해 가는 권위주의적 종교와는 정반대의 방향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현실적 사실과 합리적 사유의 중요성이 강조됨은 물론이다.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잡아함 권 2>는 말이 경전에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것 또한 인간의 합리적 사유를 비판하고 절대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권위주의적 종교와는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깨달음의 효과적 실현에 집중된 석가모니의 이러한 교설에 그런 목적에 필요치 않은 이론이나 실천이 설해질 까닭이 없다. 인간의 자각에 필요한 사항만이 베풀어져 있다는 말이다.
깨달음의 직접적인 내용에 관한 것도 경전에 자세하게 나타나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런 문제는 깨달음의 대상으로 남겨져야 하고 깨달음을 이루면 저절로 자명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께서는 한때 숲을 지나면서 나뭇잎 하나를 손에 따 들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일이 있다. "내가 깨달은 법에서 너희에게 설하는 것은 이 나뭇잎 하나 정도에 불과 한 것이다."<잡아함 권 16>
따라서 석가모니의 교설에서 신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문제의 해명을 구하고자 함은 잘못이다. 만동자(蔓童子, Malunkyaputta)라는 비구가 하루는 부처님을 찾아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던진 일이 있다. "이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끝이 있는가 없는가. 영혼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여래는 사후에 존속하는가 안하는가."<중아함 권 60. 전유경> 다른 종교에서는 명확한 답변을 해주고 있는데 석가모니의 교설에는 그러한 해명이 없으므로 몹시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는 만일 끝까지 부처님께서 답변을 거절한다면 부처님 곁을 떠나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독 화살에 맞은 사람의 비유를 든 다음, 그런 문제는 "깨달음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깨우치고 계신다.
점진적인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게 하려는 석가모니의 이러한 방법론은 많은 교법의 시설을 필요로 한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지적 능력이 성숙함에 따라 그에 알맞은 법이 계속해서 설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른 종교에서는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법이 불교 경전에 등장한다. 이런 교법(敎法)들을 법문(法門, dharma-paryaya)이라고 한다. 각기 독자성을 지니면서 궁극적인 진리에 취입(趣入)하는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렇게 진리에 이르는 교량적 구실을 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진리 그 자체라고 절대시할 필요는 없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구도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석가모니의 교설에 입각해서 '전정사유(專精思惟)'하여 깨달음을 열어야 하지만, 깨달음을 연 다음에는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나의 법(法)은 뗏목과 같은 것이니 건너간 다음에는 마땅히 버려야 한다."<중아함 권 54. 다제경>고 석가모니 스스로 경계하고 계시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교설은 단순히 수의설(隨宜說)에 불과하다고 보려는 학자들이 있다. 사람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그때그때 알맞게 설한 것이라는 말이다. 불교 경전에도 또한 잡박한 교리가 일정한 체계 없이 수록되어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가 얼마나 피상적인 관찰인가를 알 수가 있다. 법문과 법문 사이에는 미묘한 중층적 교리 조직이 짜여져 있음을 간과 해서는 안될 것이다. 석가모니께서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셨다는 견해도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불교에서 형이상학적인 문제의 해명을 찾을 수 없음은 사실이지만, 그런 문제의 해명을 깨닫게 하고자 한 교설에 그런 해명이 밖으로 언표(言表)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불교는 깨달은 사람에 의한, 깨닫게 하려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깊이 명심해 두어야 한다.
2. 현실의 관찰 (일체의 구조)
1. 일체의 구조
불교는 신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초월적인 진리에서부터 설해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인식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 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인 현실 세계란 과연 어떤 구조와 성질을 가진 것인가.
1) 십이처설
한때 생문이라는 바라문이 석가모니를 찾아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일이 있다. "일체라고 하는 그 일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잡아함 권 13> 당시의 인도에서 일체(sarvam)라는 말은 '모든 것(everything)'을 의미하는 말로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세계나 세간(loka)이라는 말과도 등치 시킬 수 있는 개념이다. 이런 일체에 대해서 각 종교는 여러 가지 해석을 내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이제 석가모니께서는 그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석가모니께서는 생문 바라문에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고 계신다. "바라문이여, 일체는 십이처에 포섭되는 것이니, 곧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의지와 법이다. 만일 이 십이처를 떠나 다른 일체를 시설코자 한다면 그것은 다만 언설일 뿐, 물어 봐야 모르고 의혹만 더할 것이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경계(境界)가 아니기 때문이다."<잡아함 권 13>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는 일월성신을 비롯해서 미물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열두 가지에 거뜬히 포섭된다는 것이요, 그 열두 가지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 열두 가지를, 모든 것이 그 속에 '들어간다'는 뜻을 취하여 처(處, ayatana)라고 부르고 이 교설을 십이처설이라고 한다.
십이처설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며 일체만유(一切萬有)에 대한 일종의 분류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종교적 세계관으로서는 너무나도 소박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입장이 선언되는 사상적 배경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첫째로, 우리는 십이처의 구성이 눈, 귀, 코, 혀, 몸, 의지라는 여섯 개의 인식 기관(六根)과 색, 소리, 냄새, 맛, 촉각, 법이라는 여섯 개의 인식 대상(六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모든 존재를 인간의 인식을 중심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 것은 일단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어선 초월적인 실재를 설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러한 초월적인 실재가 종교적인 수행을 통해서도 끝내 인간에게 자증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것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십이처설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석가모니께서는 당시의 바라문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계신다. "삼명(三明)을 갖춘 바라문으로서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범천을 본 자가 있는가? 만일 본 일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범천을 믿고 받든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한 여인을 사랑 한다고 하면서 그의 얼굴을 본 일도 없고 이름도 거처도 모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요."<장아함 권 16. 삼명경>
둘째로, 십이처설에서 우리는 불교가 인간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십이처설에서 인식 주체가 되고 있는 여섯 개의 감관 즉 육근은 그대로 인간 존재를 나타내고, 인식 객체가 되고 있는 여섯 개의 대상 즉 육경은 그러한 인간의 자연 환경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체적 인간의 특질을 '의지(manas)'로 파악하고 객체적 대상의 특질을 '법(dharma)'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크게 주목해야 한다.
의지라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와 능동적인 힘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법은 어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한 결과를 나타내는 '필연성을 지닌 것'을 가리킨다.
그러한 뜻의 의지와 법이라는 개념으로 인간과 자연의 특질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때 생문이라는 바라문이 석가모니를 찾아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일이 있다. "일체라고 하는 그 일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잡아함 권 13> 당시의 인도에서 일체(sarvam)라는 말은 '모든 것(everything)'을 의미하는 말로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세계나 세간(loka)이라는 말과도 등치 시킬 수 있는 개념이다. 이런 일체에 대해서 각 종교는 여러 가지 해석을 내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이제 석가모니께서는 그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석가모니께서는 생문 바라문에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고 계신다. "바라문이여, 일체는 십이처에 포섭되는 것이니, 곧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의지와 법이다. 만일 이 십이처를 떠나 다른 일체를 시설코자 한다면 그것은 다만 언설일 뿐, 물어 봐야 모르고 의혹만 더할 것이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경계(境界)가 아니기 때문이다."<잡아함 권 13>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는 일월성신을 비롯해서 미물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열두 가지에 거뜬히 포섭된다는 것이요, 그 열두 가지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 열두 가지를, 모든 것이 그 속에 '들어간다'는 뜻을 취하여 처(處, ayatana)라고 부르고 이 교설을 십이처설이라고 한다.
십이처설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며 일체만유(一切萬有)에 대한 일종의 분류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종교적 세계관으로서는 너무나도 소박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입장이 선언되는 사상적 배경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첫째로, 우리는 십이처의 구성이 눈, 귀, 코, 혀, 몸, 의지라는 여섯 개의 인식 기관(六根)과 색, 소리, 냄새, 맛, 촉각, 법이라는 여섯 개의 인식 대상(六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모든 존재를 인간의 인식을 중심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 것은 일단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어선 초월적인 실재를 설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러한 초월적인 실재가 종교적인 수행을 통해서도 끝내 인간에게 자증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것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십이처설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석가모니께서는 당시의 바라문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계신다. "삼명(三明)을 갖춘 바라문으로서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범천을 본 자가 있는가? 만일 본 일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범천을 믿고 받든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한 여인을 사랑 한다고 하면서 그의 얼굴을 본 일도 없고 이름도 거처도 모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요."<장아함 권 16. 삼명경>
둘째로, 십이처설에서 우리는 불교가 인간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십이처설에서 인식 주체가 되고 있는 여섯 개의 감관 즉 육근은 그대로 인간 존재를 나타내고, 인식 객체가 되고 있는 여섯 개의 대상 즉 육경은 그러한 인간의 자연 환경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체적 인간의 특질을 '의지(manas)'로 파악하고 객체적 대상의 특질을 '법(dharma)'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크게 주목해야 한다.
의지라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와 능동적인 힘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법은 어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한 결과를 나타내는 '필연성을 지닌 것'을 가리킨다.
그러한 뜻의 의지와 법이라는 개념으로 인간과 자연의 특질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라문교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은 창조주인 범(梵)이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그 종속적 피조물에 불과하다.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에게 길흉화복을 가져오는 것도 범의 의지에 의 한다. 사문측의 생활파에서도 인간은 생사의 코스를 바꿀 수 없다는 무작용론(決定論)을 펴고 있었다.
이들의 세계관을 염두에 두고 십이처설을 볼 때 우리는 일견 소박한 듯한 그 세계관이 불교의 기본적 입장을 천명한 것이며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음을 이해할 수가 있다.
이들의 세계관을 염두에 두고 십이처설을 볼 때 우리는 일견 소박한 듯한 그 세계관이 불교의 기본적 입장을 천명한 것이며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음을 이해할 수가 있다.
2) 사대요소
물체는 몇 가지 요소로 분석되고 또 그것들을 화합하면 물체가 형성된다. 인간 또한 죽으면 몇 가지 물질적 요소로 분산되고 만다. 그렇다면 일체 존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물질적 요소는 무엇일까? 궁극적인 물질적 요소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볼 수가 있어 흥미롭다. 고대 그리스, 인도, 중국 등의 자연철학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현대의 자연과학에서도 원소물질(元素物質)에 대한 탐구는 줄기차게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일어날 무렵의 인도에서는 자연과 인간을 구성하는 그러한 기본적인 물질적 요소로서 지(地, prthivi), 수(水, ap), 화(火, tejas), 풍(風, vayu)의 네 가지를 주로 인정하고 있었다. 우파니샤드 철학의 전변설(轉變說)에는 "태초에 유(有)가 있어 욕심을 일으켜 풍, 화, 수, 지를 발생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사문계의 적취설(積聚說)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서는 역시 그러한 사대(四大)를 인정하고 있었다.
석가모니 또한 당시 인도의 그러한 사대요소설(四大要素說)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십이처 중에서 눈, 귀, 코, 혀, 몸의 오근(五根)과 색, 소리, 냄새, 맛, 촉감의 오경(五境)은 각각 사대로 분석된다고 설하고, 그러한 사대가 화합한 것이 곧 '색(色, rupa. 물질적 형체)'이라는 것이다.<잡아함 권 13> 만일 오늘날 석가모니께서 탄생하셨다면 현대 자연 과학의 원소설을 채택하셨음에 틀림없다.
3) 오온설
십이처 가운데 다섯 개의 감각과 그 대상이 이렇게 사대요소로 분석되고 그것이 화합한 것이 색 즉 물질적인 형체라면, 인간과 자연은 그 존재의 근저에 이러한 색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 존재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이러한 물질적인 형체를 '색온(色蘊. rupaskandha)'이라고 부른다.
색(色)은 사대가 화합한 것이고, 온(蘊, skandha)은 흔히 '쌓임(聚, heap)'이라고 번역되지만 원말은 '근간적인 부분(bran- ching part of the stem, part)'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인 색온만이 인간 존재의 바탕을 이루는 전부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물질에는 스스로 사유하고 행동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 일이다. 인과율에 따라 필연적인 반응을 보일뿐이다. 그러한 색온을 가지고 인간 실존의 바탕을 이루는 전부라고 한다면 우리 인간이 개체를 유지하기 위해 사유와 행동을 줄기차게 전개시키고 있는 비물질적 기능의 존재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당시 인도 사상가들의 해명은 다양하였다.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는 사대요소가 화합한 복합물(devata)에 범(梵)이 명아(命我. jiva-atman)의 상태로 들어갔다고 하였으니, 모든 물질 속에는 생명이 들어 있다는 범신론(汎神論)이 된다. 인간의 생명은 사대의 분산과 함께 단절된다는 순세파의 주장은 생명도 일종의 물질적 화합 현상으로 보는 입장이고, 생활파에서는 생명을 아예 물질적 요소로 간주해 버렸다.
한편 이계파에서는 인간은 생명과 물질이 대립적으로 결합된 상태라고 설하였다.
인간의 생명이나 정신이라는 것이 물질의 화합에서 발생하는 물리 화학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냐, 그렇지 않고 정신의 독자적 존재성이 있는 것이냐의 문제는 오늘날 현대 생물학에서도 줄곧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자를 기계론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생기론(生氣論)이라고 부르는데, 현 학계는 기계론적으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자연과학 시대의 추세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계신가. 물질적인 색온 외에 다시 수(受, vedana), 상(想, sam-jna), 행(行, samskara), 식(識, vijnana)이라는 정신적인 사온(四蘊)을 추가한 오온설을 제시하고 계신다.<잡아함 권 3>
수, 상, 행, 식의 사온은 물질적인 색온을 바탕으로 개체를 지속적으로 존속시키려고 느끼고(受) 생각하고(想) 작용하고(行) 식별하는(識) 정신적인 기능을 각각 표현한 것이다. 인간 존재를 물질과 정신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경우, 그 정신적인 부분을 생명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세분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십이처가 일체 존재를 포괄하는 일종의 분류법이라면, 오온 또한 새로운 차원에서의 일체 존재에 대한 분류법이 될 수도 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근간적 구성 부분일 뿐만 아니라 외계 존재도 그러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십이처와 함께 오온 또한 일체 존재를 가리키는 술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오온이라는 술어를 갖고 인간 존재를 특히 한정적으로 지시하고자 할 때는 '오취온(五取蘊, upadana-skandha)'이라는 말을 별도로 사용한다. 오온이 하나의 개체로 '취착(取着)되고'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오온과 오취온은 똑같은 것이라고도 못하고 다른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오온에 욕탐이 있는 것이 곧 오취온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잡아함 권 2>
불교의 오취온설은 정신과 육체를 싸고도는 당시 사상계의 문제성을 잘 지양하고 있다. 우파니샤드의 범신론적 견해는 생물과 무생물이 우리 현실계에서 엄연한 속성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는 현상에 부합되지 않는다. 순세파의 유물론적 견해는 현대생물학의 기계론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지만, 이것 또한 위의 현상에 맞지 않는다. 영혼과 육체를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보는 생활파의 견해는 심신의 밀접한 상호 관련성을 설명할 수가 없으며, 영혼과 육체는 대립하다는 이계파의 이원론 또한 그 두 부분이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로 상관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불교의 오취온설은 물질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정신의 독자성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물질보다는 정신 쪽에 중점을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생명 활동의 측면에서 관찰하고 있어 현실 세계의 현상을 정확하게 포착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십이처 가운데 다섯 개의 감각과 그 대상이 이렇게 사대요소로 분석되고 그것이 화합한 것이 색 즉 물질적인 형체라면, 인간과 자연은 그 존재의 근저에 이러한 색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 존재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이러한 물질적인 형체를 '색온(色蘊. rupaskandha)'이라고 부른다.
색(色)은 사대가 화합한 것이고, 온(蘊, skandha)은 흔히 '쌓임(聚, heap)'이라고 번역되지만 원말은 '근간적인 부분(bran- ching part of the stem, part)'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인 색온만이 인간 존재의 바탕을 이루는 전부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물질에는 스스로 사유하고 행동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 일이다. 인과율에 따라 필연적인 반응을 보일뿐이다. 그러한 색온을 가지고 인간 실존의 바탕을 이루는 전부라고 한다면 우리 인간이 개체를 유지하기 위해 사유와 행동을 줄기차게 전개시키고 있는 비물질적 기능의 존재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당시 인도 사상가들의 해명은 다양하였다.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는 사대요소가 화합한 복합물(devata)에 범(梵)이 명아(命我. jiva-atman)의 상태로 들어갔다고 하였으니, 모든 물질 속에는 생명이 들어 있다는 범신론(汎神論)이 된다. 인간의 생명은 사대의 분산과 함께 단절된다는 순세파의 주장은 생명도 일종의 물질적 화합 현상으로 보는 입장이고, 생활파에서는 생명을 아예 물질적 요소로 간주해 버렸다.
한편 이계파에서는 인간은 생명과 물질이 대립적으로 결합된 상태라고 설하였다.
인간의 생명이나 정신이라는 것이 물질의 화합에서 발생하는 물리 화학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냐, 그렇지 않고 정신의 독자적 존재성이 있는 것이냐의 문제는 오늘날 현대 생물학에서도 줄곧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자를 기계론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생기론(生氣論)이라고 부르는데, 현 학계는 기계론적으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자연과학 시대의 추세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계신가. 물질적인 색온 외에 다시 수(受, vedana), 상(想, sam-jna), 행(行, samskara), 식(識, vijnana)이라는 정신적인 사온(四蘊)을 추가한 오온설을 제시하고 계신다.<잡아함 권 3>
수, 상, 행, 식의 사온은 물질적인 색온을 바탕으로 개체를 지속적으로 존속시키려고 느끼고(受) 생각하고(想) 작용하고(行) 식별하는(識) 정신적인 기능을 각각 표현한 것이다. 인간 존재를 물질과 정신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경우, 그 정신적인 부분을 생명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세분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십이처가 일체 존재를 포괄하는 일종의 분류법이라면, 오온 또한 새로운 차원에서의 일체 존재에 대한 분류법이 될 수도 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근간적 구성 부분일 뿐만 아니라 외계 존재도 그러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십이처와 함께 오온 또한 일체 존재를 가리키는 술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오온이라는 술어를 갖고 인간 존재를 특히 한정적으로 지시하고자 할 때는 '오취온(五取蘊, upadana-skandha)'이라는 말을 별도로 사용한다. 오온이 하나의 개체로 '취착(取着)되고'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오온과 오취온은 똑같은 것이라고도 못하고 다른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오온에 욕탐이 있는 것이 곧 오취온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잡아함 권 2>
불교의 오취온설은 정신과 육체를 싸고도는 당시 사상계의 문제성을 잘 지양하고 있다. 우파니샤드의 범신론적 견해는 생물과 무생물이 우리 현실계에서 엄연한 속성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는 현상에 부합되지 않는다. 순세파의 유물론적 견해는 현대생물학의 기계론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지만, 이것 또한 위의 현상에 맞지 않는다. 영혼과 육체를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보는 생활파의 견해는 심신의 밀접한 상호 관련성을 설명할 수가 없으며, 영혼과 육체는 대립하다는 이계파의 이원론 또한 그 두 부분이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로 상관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불교의 오취온설은 물질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정신의 독자성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물질보다는 정신 쪽에 중점을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생명 활동의 측면에서 관찰하고 있어 현실 세계의 현상을 정확하게 포착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3. 현실의 관찰 (삼법인설)
2. 삼법인설
이상 소개한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에 대한 중요한 교설들인데, 이제 이러한 십이처나 사대, 오온과 같은 것들이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가를 보자. 그러한 일체는 모두가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인 것이라고 석가모니께서는 단정하신다. "색은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고 괴로운 것은 무아(無我)이다. 수,상,행,식 또한 그와 같다."<잡아함 권 1>
일체의 속성에 대한 이 세 가지 명제를 불교에서는 삼법인(三法印)이라고 부른다. 법의 특성(dharma-laksana)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후대에는 불교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기에 이른다.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삼법인 중에서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항목을 빼고 '열반은 고요함(寂靜)'이라는 항목을 보태 삼법인으로 할 때가 있다. "모든 행은 무상하고(諸行無常), 모든 법은 무아요(諸法無我), 열반은 적정하다(涅槃寂靜)."는 설이 곧 그것이다.<잡아함 권 10> 또는 여기에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것을 다시 합하여 사법인(四法印)으로 할 때도 있다.<증일하함 권 18>
그러나 불교의 초기 경전에 줄기차게 설해지고 있는 것은 "일체는 무상하고 일체는 괴로움이고 일체는 무아"라는 맨 처음의 형태이다. 이제 이 삼법인의 각 항을 고찰해 보자.
일체의 속성에 대한 이 세 가지 명제를 불교에서는 삼법인(三法印)이라고 부른다. 법의 특성(dharma-laksana)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후대에는 불교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기에 이른다.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삼법인 중에서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항목을 빼고 '열반은 고요함(寂靜)'이라는 항목을 보태 삼법인으로 할 때가 있다. "모든 행은 무상하고(諸行無常), 모든 법은 무아요(諸法無我), 열반은 적정하다(涅槃寂靜)."는 설이 곧 그것이다.<잡아함 권 10> 또는 여기에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것을 다시 합하여 사법인(四法印)으로 할 때도 있다.<증일하함 권 18>
그러나 불교의 초기 경전에 줄기차게 설해지고 있는 것은 "일체는 무상하고 일체는 괴로움이고 일체는 무아"라는 맨 처음의 형태이다. 이제 이 삼법인의 각 항을 고찰해 보자.
(1) 일체무상
인생으로서 생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死) 과정(有爲四相)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한다고 하여도 인간의 불사영생을 실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물 또한 무상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거대한 천체로부터 티끌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 안의 모든 존재는 생하고(生) 머물고(住) 달라지고(變) 없어지고(滅) 마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지, 수, 화, 풍과 같은 물질적 요소는 어떨까? 순세파와 사명파에서는 이것을 불변적 요소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께서는 그것 또한 무상함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설 하신다. 현대 자연과학에서는 원소가 원자로 분석되고 원자 또한 파괴되며, 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도 불변의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실증하고 있다.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 있지만, 에너지가 물질로 변할 수 있고 물질이 에너지로 변할 수 있다면 이것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한 것의 범주에 속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jiva)이나 자아(atman)와 같은 것은 어떨까? 대개의 종교에서는 인간의 육신은 비록 사멸하여도 그 영혼은 죽지 않고 하늘나라에 가거나 또는 다른 몸을 만나 재생한다고 한다. 과연 그들은 그렇게 불변의 존재인가? 이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그러한 종교에서 말하는 영혼이나 자아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뚜렷이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앞서 불교의 오온설을 살피는 곳에서 우파니샤드 철학의 자아(atmn)나 생활파의 명(jiva), 이 계파의 영혼(jiva)등은 모두가 오취온설의 차원에서 이야기되고 있었던 것을 보았다. 그러기에 석가모니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불변적 아체(我體)가 있다고 헤아린다면 그들은 모두가 오취온에서 그렇게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잡아함 권 1>
그렇다면 바라문들이 말하는 자아나 사문들이 말하는 영혼도 마땅히 무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오취온에서 맨 처음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색온인데, 색온을 구성하고 있는 사대요소가 이미 무상한 것이니 오취온의 무상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색을 발생시키는 인과 연이 벌써 무상하니, 무상한 인과 무상한 연으로 발생한 색이 어찌 유상하겠는가. 수, 상, 행, 식 또한 그러하다."<잡아함 권 1>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십이처로부터 사대, 오온에 이르는 모든 것은 하나도 항구불변한 것은 없다. 그러기에 "일체는 무상하다(sarvamanityam)."고 석가모니께서는 단언하신다. 이 단언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성구로 우리에게 보다 잘 알려져 있다. 이 말 속의 '행(行, samskara)'은 오온 중의 행온을 가리키는데, 무상한 세계 속에서 개체를 유지하려는 행의 작용이야말로 무상함을 가장 실감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행은 이렇게 덧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 사실은 진정으로 의식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보고 우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친구들의 임종을 보며 생의 덧없음을 느끼고, 고대 문명의 유적을 보며 하염없는 탄식을 보낸다. 그러나 존재의 밑바탕에서부터 무상함을 느끼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바라문이나 사문들까지도 그렇지 못하였으니 일반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정도만큼 사람들은 유상하다고 본다. 백 년이나 천 년을 살 것 같이 생각하고, 자신의 재산과 권력과 명예는 영원히 갈 것으로 본다. 탐착과 인색과 교만은 이런 생각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일생 동안 남에게 선심 한 번 써 보지 못한 채 깊은 회한 속에서 생을 마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불교의 무상설은 중생들의 이러한 뒤바뀐(顚倒) 착각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다. 값싼 감상주의나 비관적인 현실관이 아니다. 올바른 인생관을 수립코자 하면 먼저 현실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일체무상은 이러한 목적을 가진 것이다.
인생으로서 생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死) 과정(有爲四相)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한다고 하여도 인간의 불사영생을 실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물 또한 무상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거대한 천체로부터 티끌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 안의 모든 존재는 생하고(生) 머물고(住) 달라지고(變) 없어지고(滅) 마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지, 수, 화, 풍과 같은 물질적 요소는 어떨까? 순세파와 사명파에서는 이것을 불변적 요소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께서는 그것 또한 무상함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설 하신다. 현대 자연과학에서는 원소가 원자로 분석되고 원자 또한 파괴되며, 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도 불변의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실증하고 있다.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 있지만, 에너지가 물질로 변할 수 있고 물질이 에너지로 변할 수 있다면 이것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한 것의 범주에 속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jiva)이나 자아(atman)와 같은 것은 어떨까? 대개의 종교에서는 인간의 육신은 비록 사멸하여도 그 영혼은 죽지 않고 하늘나라에 가거나 또는 다른 몸을 만나 재생한다고 한다. 과연 그들은 그렇게 불변의 존재인가? 이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그러한 종교에서 말하는 영혼이나 자아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뚜렷이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앞서 불교의 오온설을 살피는 곳에서 우파니샤드 철학의 자아(atmn)나 생활파의 명(jiva), 이 계파의 영혼(jiva)등은 모두가 오취온설의 차원에서 이야기되고 있었던 것을 보았다. 그러기에 석가모니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불변적 아체(我體)가 있다고 헤아린다면 그들은 모두가 오취온에서 그렇게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잡아함 권 1>
그렇다면 바라문들이 말하는 자아나 사문들이 말하는 영혼도 마땅히 무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오취온에서 맨 처음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색온인데, 색온을 구성하고 있는 사대요소가 이미 무상한 것이니 오취온의 무상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색을 발생시키는 인과 연이 벌써 무상하니, 무상한 인과 무상한 연으로 발생한 색이 어찌 유상하겠는가. 수, 상, 행, 식 또한 그러하다."<잡아함 권 1>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십이처로부터 사대, 오온에 이르는 모든 것은 하나도 항구불변한 것은 없다. 그러기에 "일체는 무상하다(sarvamanityam)."고 석가모니께서는 단언하신다. 이 단언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성구로 우리에게 보다 잘 알려져 있다. 이 말 속의 '행(行, samskara)'은 오온 중의 행온을 가리키는데, 무상한 세계 속에서 개체를 유지하려는 행의 작용이야말로 무상함을 가장 실감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행은 이렇게 덧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 사실은 진정으로 의식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보고 우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친구들의 임종을 보며 생의 덧없음을 느끼고, 고대 문명의 유적을 보며 하염없는 탄식을 보낸다. 그러나 존재의 밑바탕에서부터 무상함을 느끼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바라문이나 사문들까지도 그렇지 못하였으니 일반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정도만큼 사람들은 유상하다고 본다. 백 년이나 천 년을 살 것 같이 생각하고, 자신의 재산과 권력과 명예는 영원히 갈 것으로 본다. 탐착과 인색과 교만은 이런 생각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일생 동안 남에게 선심 한 번 써 보지 못한 채 깊은 회한 속에서 생을 마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불교의 무상설은 중생들의 이러한 뒤바뀐(顚倒) 착각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다. 값싼 감상주의나 비관적인 현실관이 아니다. 올바른 인생관을 수립코자 하면 먼저 현실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일체무상은 이러한 목적을 가진 것이다.
(2) 일체고
삼법인의 둘째 항목인 '일체는 괴로움(duhkha)'이라는 단안은 첫째 항목의 판단이 성립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러기 에 석가모니께서는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苦)'이라고 설 하신다.<잡아함 권 1>
삼법인의 둘째 항목인 '일체는 괴로움(duhkha)'이라는 단안은 첫째 항목의 판단이 성립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러기 에 석가모니께서는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苦)'이라고 설 하신다.<잡아함 권 1>
불교의 이런 단안에 대해서 세상에는 그렇게 괴로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도 있지 않느냐고 항변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세상에 태어나 젊고 건강하게 오래 산 다는 것이 어찌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거기에 금상첨화로 미워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고 구하는 바를 얻을 때 그 즐거움은 말로다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즐거움이 얼마나 오래 가느냐에 있다. 영원히 머물러 준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영원히 머물러 주지 않는 곳에, 다시 말하면 무상한 곳에 불안과 서글픔이 있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라.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저 불상한 사람들을 보라. 그러한 불행이 언제 우리에게 닥쳐올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괴로움뿐만 아니라 즐거움도 괴로운 것으로 봐야 한다. 인간의 느낌(受)에는 괴로움과 즐거움과 그 중간( 不苦不樂, 捨)의 세가지가 있다. 삼법인설에서의 괴로움은 이 중에서 괴로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중간의 느 낌까지도 괴로움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들은 무상하기 때문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즐거운 것도 괴로움으로 봐야 한다면, 이에 대해서 다시 다음과 같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뒷일을 미리부터 그렇게 걱정하며 괴로워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왕 죽을 목숨이라면 현재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김이 오히려 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뒤에 무상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현 재에 즐거움이 느껴지고 있다면 그것은 괴로움이 아니라 즐거움이라고. 우리 주변에는 이런 낙천주의적 인생관이 크게 유 행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현재의 즐거움을 그렇게 즐거움으로 볼 수가 있을까? 인간 실존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오취온을 살펴볼 때 우리는 다시금 그런 낙천주의적 인생관이 커다란 잘못이라는 것을 깨 닫게 된다. 오취온의 처음에 위치하고 있는 색온은 항구불변 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사대요소가 이미 무 상한 것이므로 그것 또한 끊임없이 변하고 분산하려는 무상성을 지니고 있다.
수,상,생,식의 사온은 이런 색온에 입각해서 개체를 지속하려는 비물질적(정신적)인 노력이며 그러한 노력의 중심은 행( 行, 결합작용)에 있다. 따라서 그것은 몹시 힘이 들 것이고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붕괴하고 말 것이다(死). 괴로움(duhkha)이라는 말은 원래 '힘이 든다'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현재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 실존을 그 밑바탕에서부터 관찰할 때는 괴로움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석가모니께서는 "일체는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고 단정하신다. 그리하여 괴로움의 구체적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세상에 생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괴로움이다. 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愛別離)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求不 得)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오취온은 괴로움이다."< 증일하함 권 17 四諦品> 이것을 불교에서는 여덟 가지 괴로움 (八苦)이라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고고(苦苦), 행고(行苦), 괴고(壞苦)의 세 가지 괴로움을 들 때가 있는데, '괴로움의 괴로움(苦苦)'은 인간의 감각적인 괴로움을 가리킨다. '행의 괴로움(行苦)'은 개체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온(결합작용) 의 괴로움을 뜻하고 '부서짐의 괴로움(壞苦)'은 그러한 노력에 도 불구하고 막상 부서지게 되는 죽음의 괴로움이다. 이 세 가지 괴로움은 오취온을 중심으로 해서 괴로움의 종류를 구별 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불교를 현실 부정적 염세종교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불교의 이러한 괴로움의 교설을 보고 그러한 자신들의 견해를 더욱 강화시킬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보는 것은 그들의 자유겠지만, 그러나 불교의 입장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먼저 이 해해야 할 것이다. 종교는 무엇보다도 먼저 진실해야 한다. 인간의 실존이 만일 괴로움이라면 그것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 여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그에 입각해서 생의 가치를 모색해야 한다. 진실을 외면하는 태도나 진실에 미치지 못한 얕은 소견을 석가모니께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3) 일체무아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세계를 본다는데, 그러한 인간을 주관적으로 말하면 '나'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나'라고 하는 그 '나'는 어떤 것을 가리킬까? 십이처설에서 말하는 여섯 개의 감관 즉 육근을 말한다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나를 탐구해 들어간다면 오취온에 이른다고 말할 수가 있다. "사문이나 바라문이 '나'의 실체를 헤아린다면 그것은 모두가 오취온에서 그런다."<잡아함권 3>는 것은 앞서 소개한 바가 있다. 그러나 육근이나 오취온이 그렇게 '나'라고 할 만한 것들일까.
먼저 인간의 '나'라는 것이 어떤 성질의 것이어야 하는가 에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나는 상일성(常一性)을 가져야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의 심신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나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육체적,정신적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체요 생명의 본질과 같은 것이다. 바라문의 사상가들은 일찍부터 나의 이런 불변성에 착안하여 그것을 우주의 본질적인 범(梵, Brahman)과 동일하다는 범아일여설까지 심화시켜 갔던 것은 누차 언급한 바와 같다. 이러한 '나'를 그들은 '아트만(atman, 自我)'이라고 불렀다.
내가 지녀야 할 또 하나의 성질은 주재성(主宰性)이다. '남'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내 자신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남의 소유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나의 소유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에게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주재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이 나라고 말하고 있는 여섯 개의 감관이나 오취온에 그러한 상일,주재성이 있을까. 그들이 모두 무상하고 괴로움이라는 것은 앞서 충분히 살펴보았다. 무상함은 상일성이 없기 때문이고, 괴로움은 주재성이 없기 때문이다.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세계를 본다는데, 그러한 인간을 주관적으로 말하면 '나'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나'라고 하는 그 '나'는 어떤 것을 가리킬까? 십이처설에서 말하는 여섯 개의 감관 즉 육근을 말한다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나를 탐구해 들어간다면 오취온에 이른다고 말할 수가 있다. "사문이나 바라문이 '나'의 실체를 헤아린다면 그것은 모두가 오취온에서 그런다."<잡아함권 3>는 것은 앞서 소개한 바가 있다. 그러나 육근이나 오취온이 그렇게 '나'라고 할 만한 것들일까.
먼저 인간의 '나'라는 것이 어떤 성질의 것이어야 하는가 에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나는 상일성(常一性)을 가져야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의 심신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나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육체적,정신적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체요 생명의 본질과 같은 것이다. 바라문의 사상가들은 일찍부터 나의 이런 불변성에 착안하여 그것을 우주의 본질적인 범(梵, Brahman)과 동일하다는 범아일여설까지 심화시켜 갔던 것은 누차 언급한 바와 같다. 이러한 '나'를 그들은 '아트만(atman, 自我)'이라고 불렀다.
내가 지녀야 할 또 하나의 성질은 주재성(主宰性)이다. '남'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내 자신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남의 소유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나의 소유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에게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주재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이 나라고 말하고 있는 여섯 개의 감관이나 오취온에 그러한 상일,주재성이 있을까. 그들이 모두 무상하고 괴로움이라는 것은 앞서 충분히 살펴보았다. 무상함은 상일성이 없기 때문이고, 괴로움은 주재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결코 '나의 실체(mama atman)'라고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눈이 만일 나라면 핍박의 괴로움을 받을 까닭이 없고, 이리저리 원하는대로 할 수가 있으리라. 그러나 눈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핍박의 괴로움을 받고, 이리저리 원하는대로 할 수가 없다. 귀, 코, 혀, 몸, 의지 또한 그와 같다."<잡아함 권 1> 다음과 같은 말도 경전에 자주 반복되고 있다. "색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나가 아니요(非我), 나의 것(我所)이 아니다."<잡아함 권 1>
석가모니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자주 교환하고 계신다. "색은 무상한가 아닌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아닌가?" "괴로움입니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요, 이것은 나요, 이것은 나의 실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없을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수,상,행,식 또한 그러하다."<잡아함 권 1>
우리들이 나라고 하는 것들(육근, 사대, 오취온)은 이렇게 나가 아니고(非我) 나의 것이 아니다(非我所). 그런 곳에 상일, 주재성을 띤 나의 실체는 없다(無我).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범부들은 그런 것들을 나의 실체로 집착하고, 그런 아집으로 말미암아 대립과 분열 등의 괴로운 문제를 발생시키고 덧없이 자기 파멸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참다운 자아를 탐구한다는 바라문이나 사문들도 아직 진정한
자아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른 경계는 오취온의 차원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께서는 범부들의 아집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바라문이나 사문들의 철저치 못한 자아관을 시정하기 위해서, 일체는 무상하고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관찰에 이어, '그러므로 일체는 무아'라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눈이 만일 나라면 핍박의 괴로움을 받을 까닭이 없고, 이리저리 원하는대로 할 수가 있으리라. 그러나 눈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핍박의 괴로움을 받고, 이리저리 원하는대로 할 수가 없다. 귀, 코, 혀, 몸, 의지 또한 그와 같다."<잡아함 권 1> 다음과 같은 말도 경전에 자주 반복되고 있다. "색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나가 아니요(非我), 나의 것(我所)이 아니다."<잡아함 권 1>
석가모니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자주 교환하고 계신다. "색은 무상한가 아닌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아닌가?" "괴로움입니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요, 이것은 나요, 이것은 나의 실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없을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수,상,행,식 또한 그러하다."<잡아함 권 1>
우리들이 나라고 하는 것들(육근, 사대, 오취온)은 이렇게 나가 아니고(非我) 나의 것이 아니다(非我所). 그런 곳에 상일, 주재성을 띤 나의 실체는 없다(無我).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범부들은 그런 것들을 나의 실체로 집착하고, 그런 아집으로 말미암아 대립과 분열 등의 괴로운 문제를 발생시키고 덧없이 자기 파멸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참다운 자아를 탐구한다는 바라문이나 사문들도 아직 진정한
자아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른 경계는 오취온의 차원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께서는 범부들의 아집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바라문이나 사문들의 철저치 못한 자아관을 시정하기 위해서, 일체는 무상하고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관찰에 이어, '그러므로 일체는 무아'라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고 계시는 것이다.
불교의 현실 판단은 이 무아설(an-atma-vada)에 이르러 일단락을 이루는데, 이것은 인도 정통파 철학 사상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아트만 사상(atma-vada)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무아설은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입장으로서 인도 철학사 가운데 이채를 띤 사상이라고 평가됨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이 무아설에 대해 나의 절대적인 부정이나 참다운 나의 탐구를 배격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자칫 잘못하면 그러한 오해가 발생할 수가 있으니, 석가모니의 재세시에 벌써 그런 예를 볼 수가 있다. "만일 일체법이 무아요 일체행이 공적(空寂)하다면 그 중에 어떤 나가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고 말하고 있는가?"<잡아함 권 1> 나가 없다는 것이 불가하다는 견해이다.
불교의 무아설은 나의 절대적인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나를 찾게 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다면, 참다운 나는 그러한 착각의 부정을 통해서만이 나타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석가모니께서는 "나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는 말씀을 거듭 강조하고 계시며, "나의 주인은 나이며, 나를 제어하는 것은 곧 나다."
<법구경>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석가모니의 뜻이 참다운 나를 찾는 데에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녹야원에서 초전법륜을 마친 석가모니께서는 우루벨라를 향해 가시는 도중 나무 그늘에서 잠시 선정에 잠기신 일이 있었다. 이때 마침 그 부근에 남녀 쌍쌍으로 행락을 나왔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유녀가 놀고 있는 틈을 타서 귀중한 재물들을 챙겨 달아난 일이 생겼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부근을 찾아 헤매다가 나무 그늘에 연좌한 석가모니를 보고 "혹시 그런 유녀를 보시지 않았는가?"고 물었다.
이때 석가모니께서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고 계신다. "젊은 이들이여, 잃어버린 자기 진심을 찾는 일과 도망친 유녀를 찾는 일 중에서 어떤 것을 더 시급하게 찾아야 한다고 보는가?"<사분율 권 32>
무아설의 목적이 이렇게 참다운 나를 찾기 위한 것이라면, 그 참다운 나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이 문제를 위해 우리는 불교에서 설하는 일체법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다음 장에서 다시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불교의 이 무아설에 대해 나의 절대적인 부정이나 참다운 나의 탐구를 배격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자칫 잘못하면 그러한 오해가 발생할 수가 있으니, 석가모니의 재세시에 벌써 그런 예를 볼 수가 있다. "만일 일체법이 무아요 일체행이 공적(空寂)하다면 그 중에 어떤 나가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고 말하고 있는가?"<잡아함 권 1> 나가 없다는 것이 불가하다는 견해이다.
불교의 무아설은 나의 절대적인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나를 찾게 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다면, 참다운 나는 그러한 착각의 부정을 통해서만이 나타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석가모니께서는 "나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는 말씀을 거듭 강조하고 계시며, "나의 주인은 나이며, 나를 제어하는 것은 곧 나다."
<법구경>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석가모니의 뜻이 참다운 나를 찾는 데에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녹야원에서 초전법륜을 마친 석가모니께서는 우루벨라를 향해 가시는 도중 나무 그늘에서 잠시 선정에 잠기신 일이 있었다. 이때 마침 그 부근에 남녀 쌍쌍으로 행락을 나왔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유녀가 놀고 있는 틈을 타서 귀중한 재물들을 챙겨 달아난 일이 생겼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부근을 찾아 헤매다가 나무 그늘에 연좌한 석가모니를 보고 "혹시 그런 유녀를 보시지 않았는가?"고 물었다.
이때 석가모니께서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고 계신다. "젊은 이들이여, 잃어버린 자기 진심을 찾는 일과 도망친 유녀를 찾는 일 중에서 어떤 것을 더 시급하게 찾아야 한다고 보는가?"<사분율 권 32>
무아설의 목적이 이렇게 참다운 나를 찾기 위한 것이라면, 그 참다운 나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이 문제를 위해 우리는 불교에서 설하는 일체법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다음 장에서 다시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4. 연기의 진리 (법칙성의 존재)
일체 존재는 생멸변화하고 이합집산하여 항구불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게 무상변이하고 있지만, 그런 현상이 아무렇게나 멋대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 속에는 일정한 법칙이 상주하여 그에 입각해서 그런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무상하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무상한 것 속에 상주하는 이 법칙의 존재야말로 더욱 중요한 사실이다. 따라서 불교의 현실 관찰은 삼법인설에 이어서 다시 이 법칙성의 관찰로 전개되고 있다.
(1) 인과율
먼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이처설에 입각해서 주체적 인간(六根)과 객체적 대상(六境) 사이에는 어떤 법칙이 있는가 부터 살펴보자.
십이처설에서 주체적 인간을 의지라는 말로 표현하고, 객체적 대상을 법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음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인간은 능동적 작용을 일으키는 힘을 갖고 있으며, 그런 작용이 가해지면 대상은 그에 상응한 필연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물 사이에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이런 관계가 성립함을 본다. 남이 내게 잘해 주면 나도 그에게 잘해 주지 않을 수가 없고, 남이 내게 나쁘게 대하면 나도 그에게 나쁘게 대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따라서 주체적 인간과 객체적 대상 사이에는 인과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의지적 작용이 원인(hetu)이 되어, 대상의 필연적 반응이 결과(phala)로서 따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그런 의지적 작용을 '업(業, karma)'이라고 부르고, 이에 대한 대상의 필연적 반응을 '보(報, vip-aka)'이라고 부른다. 인과업보(因果業報)라든지, 업인과보(業因果報)라는 성구는 이렇게 해서 성립하게 된다.
먼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이처설에 입각해서 주체적 인간(六根)과 객체적 대상(六境) 사이에는 어떤 법칙이 있는가 부터 살펴보자.
십이처설에서 주체적 인간을 의지라는 말로 표현하고, 객체적 대상을 법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음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인간은 능동적 작용을 일으키는 힘을 갖고 있으며, 그런 작용이 가해지면 대상은 그에 상응한 필연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물 사이에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이런 관계가 성립함을 본다. 남이 내게 잘해 주면 나도 그에게 잘해 주지 않을 수가 없고, 남이 내게 나쁘게 대하면 나도 그에게 나쁘게 대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따라서 주체적 인간과 객체적 대상 사이에는 인과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의지적 작용이 원인(hetu)이 되어, 대상의 필연적 반응이 결과(phala)로서 따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그런 의지적 작용을 '업(業, karma)'이라고 부르고, 이에 대한 대상의 필연적 반응을 '보(報, vip-aka)'이라고 부른다. 인과업보(因果業報)라든지, 업인과보(業因果報)라는 성구는 이렇게 해서 성립하게 된다.
(2) 인연화합
인간과 대상 사이의 역학적 인과관계는 이상과 같거니와, 다음은 생멸 변화하는 사물에 있어서 그 '변화(anyatha-bhava)'라는 현상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는가를 살펴보자.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관찰하기 위해 우리는 불교 경전에 자주 나타나는 우유의 변화를 예로 드는 것이 편리하다.
우유를 발효하면 낙(酪)이 되고 낙은 수가 되고 수는 제호가 된다. 요즘 말로하면, 우유가 치즈가 되고 버터가 되는 것과 같다.
이때 치즈나 버터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유에 발효 조건이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우유를 냉장고에 넣어 두면 치즈나 버터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유에 발효 조건을 갖추어 주는 일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인위적 작용이다. 따라서 그것은 앞서 살펴본 주체적 인간의 업인에 해당된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학적 원인만으로는 치즈나 버터가 발행할 충분한 조건이 되지 못한다. 발효 조건은 있지만 우유가 없을 경우를 생각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돌이나 물에 아무리 발효 조건을 갖추어 줘도 치즈나 버터는 발생하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치즈나 버터가 발생하는 데는 발효조건을 갖춰주는 동력인(動力因) 외에 다시 또 하나의 조건 즉 우유라는 질료인(質料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질료인을 불교에서는 '연(緣, pratyaya)'이라고 부른다. 우유에 '연'하여 치즈나 버터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사물의 변화에는 이렇게 원인과 연의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 두 조건이 갖추어짐을 불교에서는 인과 연의 화합(samgati)이라고 부른다. 이 중에서 원인은 직접적이고 연은 간접적이라는 입장에서 '친인소연(親因疏緣)'이라는 말이 있으며, 서구학자들은 원인을 '제1차적 원인(primary cause)' 연을 '제2차적 원인(secondary cause)'으로 번역하고 있다.
인간과 대상 사이의 역학적 인과관계는 이상과 같거니와, 다음은 생멸 변화하는 사물에 있어서 그 '변화(anyatha-bhava)'라는 현상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는가를 살펴보자.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관찰하기 위해 우리는 불교 경전에 자주 나타나는 우유의 변화를 예로 드는 것이 편리하다.
우유를 발효하면 낙(酪)이 되고 낙은 수가 되고 수는 제호가 된다. 요즘 말로하면, 우유가 치즈가 되고 버터가 되는 것과 같다.
이때 치즈나 버터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유에 발효 조건이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우유를 냉장고에 넣어 두면 치즈나 버터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유에 발효 조건을 갖추어 주는 일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인위적 작용이다. 따라서 그것은 앞서 살펴본 주체적 인간의 업인에 해당된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학적 원인만으로는 치즈나 버터가 발행할 충분한 조건이 되지 못한다. 발효 조건은 있지만 우유가 없을 경우를 생각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돌이나 물에 아무리 발효 조건을 갖추어 줘도 치즈나 버터는 발생하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치즈나 버터가 발생하는 데는 발효조건을 갖춰주는 동력인(動力因) 외에 다시 또 하나의 조건 즉 우유라는 질료인(質料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질료인을 불교에서는 '연(緣, pratyaya)'이라고 부른다. 우유에 '연'하여 치즈나 버터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사물의 변화에는 이렇게 원인과 연의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 두 조건이 갖추어짐을 불교에서는 인과 연의 화합(samgati)이라고 부른다. 이 중에서 원인은 직접적이고 연은 간접적이라는 입장에서 '친인소연(親因疏緣)'이라는 말이 있으며, 서구학자들은 원인을 '제1차적 원인(primary cause)' 연을 '제2차적 원인(secondary cause)'으로 번역하고 있다.
불교의 이런 인연화합설은 인간의 성패를 해명하는 원리로도 적용될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외연(外緣)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뜻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도 당사자의 자발적인 노력이 없을 때는 성공 또한 기대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3) 상의상관성
인간이 외계에 의지적 작용을 가하면 외계는 이상과 같이 물리적 또는 화학적 반응을 보인다. 이런 뜻에서 인간의 의지는 세계의 생멸변화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동시에 인간 의지의 절대성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관찰해 보면 이것이 지나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 그러냐면 세계 속에 던져진 인간은 세계에 영향을 끼치지만, 동시에 세계의 영향도 받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불교에서는 다시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살펴보게 된다. 그럴 경우 우리는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idam-pratyaya-ta)'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인연 화합에 의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게 되면 그 결과는 다시 그를 발생시킨 원인을 포함한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해서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단순히 결과로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원인이 되고 연이 되어 다른 존재에 관계하게 된다는 말이다. 상의상관성이란 말은 바로 이러한 관계를 나타내는 술어이다.
현대 불교학자들은 불교 경전에서 이런 상의상관성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교설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즐겨 인용한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써 저것이 생한다(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잡아함 권 15> 그리하여 이것을 '연기(pratitya-samutpada)' 또는 상의상관성의 기본 공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연기'라는 개념은 뒤에 십이연기설을 소개하는 곳에서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인류의 철학적 사유에는 제일 원인에 대한 탐구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세계현상은 무엇을 근본원인으로 해서 그렇게 나타나고 있느냐는 것이다. 당시에 바라문교에서는 그것을 범(梵)이라고 설 하였다. 범은 일체의 창조주이며, 부(父)이며, 자존자(自尊者)라는 것이다.<중아함 권 19 梵天請佛經>
그러나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바라문교의 그런 주장은 현실의 정확한 포착에 비치지 못한 것이다. 모든 존재는 결과임과 동시에 원인이기도 한 상의상관성의 측면을 간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을 떠나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자존자는 이 세상의 어디에도 있을 수가 없다. 거대한 천체로부터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면서 우주의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현상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외계에 의지적 작용을 가하면 외계는 이상과 같이 물리적 또는 화학적 반응을 보인다. 이런 뜻에서 인간의 의지는 세계의 생멸변화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동시에 인간 의지의 절대성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관찰해 보면 이것이 지나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 그러냐면 세계 속에 던져진 인간은 세계에 영향을 끼치지만, 동시에 세계의 영향도 받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불교에서는 다시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살펴보게 된다. 그럴 경우 우리는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idam-pratyaya-ta)'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인연 화합에 의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게 되면 그 결과는 다시 그를 발생시킨 원인을 포함한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해서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단순히 결과로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원인이 되고 연이 되어 다른 존재에 관계하게 된다는 말이다. 상의상관성이란 말은 바로 이러한 관계를 나타내는 술어이다.
현대 불교학자들은 불교 경전에서 이런 상의상관성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교설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즐겨 인용한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써 저것이 생한다(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잡아함 권 15> 그리하여 이것을 '연기(pratitya-samutpada)' 또는 상의상관성의 기본 공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연기'라는 개념은 뒤에 십이연기설을 소개하는 곳에서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인류의 철학적 사유에는 제일 원인에 대한 탐구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세계현상은 무엇을 근본원인으로 해서 그렇게 나타나고 있느냐는 것이다. 당시에 바라문교에서는 그것을 범(梵)이라고 설 하였다. 범은 일체의 창조주이며, 부(父)이며, 자존자(自尊者)라는 것이다.<중아함 권 19 梵天請佛經>
그러나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바라문교의 그런 주장은 현실의 정확한 포착에 비치지 못한 것이다. 모든 존재는 결과임과 동시에 원인이기도 한 상의상관성의 측면을 간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을 떠나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자존자는 이 세상의 어디에도 있을 수가 없다. 거대한 천체로부터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면서 우주의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현상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4) 법주법계
모든 것은 무상하지만 덮어놓고 무상한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이렇게 일정한 법칙이 있다. 인간과 세계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사물의 생멸변화에는 인연 화합의 조건이,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성이 있다.
무상한 것들 속에 이렇게 일정한 법칙이 상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언뜻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같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놀랍고 신비로운 일이다. 멸해 버린 것과 새로 발생한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들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한 것과 생한 것은 다같이 똑같은 법칙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문제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무상한 속에 일정한 법칙이 상주하고 있어 각 존재에는 그런 법칙이 머물고 있다고. 이것을 우리는 '법주(法住, dharma-sth-iti)'라는 말로 표현할 수가 있다.<잡아함 권 12> 또 모든 존재는 법칙을 요소(dhatu)로 해서 성립해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이 산소와 수소로 되어 있듯이 모든 존재는 법칙을 요소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경전에는 이 뜻이 '법계(法界dharma-dhatu)'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잡아함 권 12> '계'는 구성 요소나 층을 나타내는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모든 존재가 본래 법칙을 그의 성품으로 삼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모든 존재는 그런 법성을 지닌 '법(dharma)' 그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일체를 '제법(諸法, sarva-dh-arma)'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인 존재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상주의 법성(法性)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성에 어떤 구체적 형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생멸 변화하는 모든 형상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어떤 형상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일체 존재와 그 생멸변화에 일관하는 상주법성은 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또 그 법성을 일체 존재와 전혀 별개의 것으로 봐서도 안된다. 전혀 다른 것이라면 일체 존재의 생멸변화에 그런 법칙성은 나타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법성과 존재(法)는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는 불일불이의 미묘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앞서 삼법인의 무아설을 살핀 끝에, 불교의 무아설은 잘못된 아견(我見)을 시정하려는 것이지 참다운 나의 탐구를 부정하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지적한 일이 있다. 그렇다면 그 참다운 나의 실체 또는 본질이란 어떤 것일까? 상일, 주재의 성질을 가져야만 할 그 참다운 나란, 바로 무상한 존재속에 상주하는 이 법칙성이라고 볼 수가 있지 않을까?
이러한 법칙성의 '나'는 우파니샤드 철학의 아트만(atman)이나 이계파의 영혼(jiva)과는 다르다. 그들도 존재의 본질로서 그러한 실체를 내세웠겠지만 아직도 오취온의 경계에 머물고 있어 철저한 법성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무상하지만 덮어놓고 무상한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이렇게 일정한 법칙이 있다. 인간과 세계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사물의 생멸변화에는 인연 화합의 조건이,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성이 있다.
무상한 것들 속에 이렇게 일정한 법칙이 상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언뜻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같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놀랍고 신비로운 일이다. 멸해 버린 것과 새로 발생한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들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한 것과 생한 것은 다같이 똑같은 법칙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문제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무상한 속에 일정한 법칙이 상주하고 있어 각 존재에는 그런 법칙이 머물고 있다고. 이것을 우리는 '법주(法住, dharma-sth-iti)'라는 말로 표현할 수가 있다.<잡아함 권 12> 또 모든 존재는 법칙을 요소(dhatu)로 해서 성립해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이 산소와 수소로 되어 있듯이 모든 존재는 법칙을 요소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경전에는 이 뜻이 '법계(法界dharma-dhatu)'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잡아함 권 12> '계'는 구성 요소나 층을 나타내는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모든 존재가 본래 법칙을 그의 성품으로 삼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모든 존재는 그런 법성을 지닌 '법(dharma)' 그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일체를 '제법(諸法, sarva-dh-arma)'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인 존재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상주의 법성(法性)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성에 어떤 구체적 형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생멸 변화하는 모든 형상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어떤 형상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일체 존재와 그 생멸변화에 일관하는 상주법성은 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또 그 법성을 일체 존재와 전혀 별개의 것으로 봐서도 안된다. 전혀 다른 것이라면 일체 존재의 생멸변화에 그런 법칙성은 나타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법성과 존재(法)는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는 불일불이의 미묘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앞서 삼법인의 무아설을 살핀 끝에, 불교의 무아설은 잘못된 아견(我見)을 시정하려는 것이지 참다운 나의 탐구를 부정하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지적한 일이 있다. 그렇다면 그 참다운 나의 실체 또는 본질이란 어떤 것일까? 상일, 주재의 성질을 가져야만 할 그 참다운 나란, 바로 무상한 존재속에 상주하는 이 법칙성이라고 볼 수가 있지 않을까?
이러한 법칙성의 '나'는 우파니샤드 철학의 아트만(atman)이나 이계파의 영혼(jiva)과는 다르다. 그들도 존재의 본질로서 그러한 실체를 내세웠겠지만 아직도 오취온의 경계에 머물고 있어 철저한 법성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5. 연기의 진리 (십이 연기설)
(1) 십이연기설의 내용
제법의 실상에 대한 알음을 불교에서는 지혜(prajna, 般若)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살펴본 일체의 구조(십이처,사대,오온)와 속성(삼법인), 인과, 인연, 상의상관, 법칙성 등이 제법 실상의 내용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법칙성에 대한 알음을 불교에서는 '명(明,vidya)'이라는 말로 부른다. 'vid'는 실제로 존재한다. 또는 발견한다는 뜻을 가진 동사로서, 'vidya'는 실재하는 것, 발견된 것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그것을 '명' 즉 '밝힘'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명의 유무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무상한 존재 속에 상주하는 법칙성을 발견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존재 방식이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게 될까?
이 물음에 대한 불교의 해답을 우리는 십이연기설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다.
명과 모순되는 개념을 '무명(無明, avidya)'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무명이 사람에게 있게 되면 이것을 연(緣)하여 행(行)이 있게 되고, 행을 연하여 식(識)이 있게 되고, 식을 연하여 명색(名色)이 있게 되고, 명색을 연하여 육처(六處)가 있게 되고, 육처를 연하여 촉(觸)이 있게 되고, 촉을 연하여 수(受)가 있게 되고, 수를 연하여 애(愛)가 있게 되고, 애를 연하여 취(取)가 있게 되고, 취를 연하여 유(有)가 있게 되고, 유를 연하여 생(生)이 있게 되고, 생을 연하여 노(老),사(死),우(憂),비(悲),뇌(惱),고(苦)가 있게 된다. 그리하여 커다란 하나의 괴로운 온(蘊)의 집(集, 發生)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잡아함 권15>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명(明)이 없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괴로움이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죽음이 있게 되는 형성 과정을 열두 단계로 자세하게 분석해서 보여 주고 있다. 이제 그 형성 과정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제법의 실상에 대한 알음을 불교에서는 지혜(prajna, 般若)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살펴본 일체의 구조(십이처,사대,오온)와 속성(삼법인), 인과, 인연, 상의상관, 법칙성 등이 제법 실상의 내용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법칙성에 대한 알음을 불교에서는 '명(明,vidya)'이라는 말로 부른다. 'vid'는 실제로 존재한다. 또는 발견한다는 뜻을 가진 동사로서, 'vidya'는 실재하는 것, 발견된 것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그것을 '명' 즉 '밝힘'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명의 유무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무상한 존재 속에 상주하는 법칙성을 발견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존재 방식이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게 될까?
이 물음에 대한 불교의 해답을 우리는 십이연기설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다.
명과 모순되는 개념을 '무명(無明, avidya)'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무명이 사람에게 있게 되면 이것을 연(緣)하여 행(行)이 있게 되고, 행을 연하여 식(識)이 있게 되고, 식을 연하여 명색(名色)이 있게 되고, 명색을 연하여 육처(六處)가 있게 되고, 육처를 연하여 촉(觸)이 있게 되고, 촉을 연하여 수(受)가 있게 되고, 수를 연하여 애(愛)가 있게 되고, 애를 연하여 취(取)가 있게 되고, 취를 연하여 유(有)가 있게 되고, 유를 연하여 생(生)이 있게 되고, 생을 연하여 노(老),사(死),우(憂),비(悲),뇌(惱),고(苦)가 있게 된다. 그리하여 커다란 하나의 괴로운 온(蘊)의 집(集, 發生)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잡아함 권15>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명(明)이 없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괴로움이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죽음이 있게 되는 형성 과정을 열두 단계로 자세하게 분석해서 보여 주고 있다. 이제 그 형성 과정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1) '무명(a-vidya)'은 명이 아닌 것(非明) 또는 명이 없는 것(無明)의 두 가지로 해석되는데, 실재 아닌 것 또는 실재성이 없는 것을 자기의 실체로 착각한 망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주어진 존재의 일시적 형체를 나로 집착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또는 진리에 대한 무지라고 말할 수도 있다.
2) 이러한 무명이 있으면 그것을 연하여 '행(行, samskara)'이 있게 된다는 것인데, 행은 '결합하는(sam) 작용(kara)'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작용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현재 학자들 속에서 그 말을 형성 작용이라고 번역하는 이가 있으며, 서구에서는 'im-pulse'라고 번역함이 보통이다. 어떻든 인간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이고 힘든 자기 형성의 업이라고 볼 수 있다.
3) 행에 의해 개체가 형성되면, 그곳에 '식(識, vilnana)'이 발생한다고 한다. 식은 불교에 쓰이는 중요한 술어 중의 하나인데 식별한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개체가 형성되자 그곳에 분별하는 인식이 발생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4) 식을 연하여 '명색(明色, nama-rupa)'이 일어나는데, 색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키고 명은 비물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오온설로 설명하면 색온은 색에, 수,상,생,식온은 명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명색의 발생은 물질적인 것(形色)과 빗물질적인 것이 결합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가 있다.
5) 이렇게 명색이 있게 되면 그것을 연하여 '육처(六處, sa-d-ayatana)'가 일어난다. 육처는 십이처설의 여섯 개의 감관, 즉 눈,귀,코,혀,몸,의지의 육근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개념이다. 인간 실존(六根)의 근저를 이루는 것을 오취온으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명색(五蘊)의 다음에 육처의 발생을 설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라고 할 것이다.
6) 육처를 연하여 '촉(觸, samsparsa)'이 있게 되는데, 촉은 '접촉한다, 충동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경전의 설명에 의하면 육근과 육경과 육식(눈,귀,코,혀,몸,의지에 발생한 식)이 화합하는 것이다. 단순히 육처가 육경에 접촉하는 현상이 아닌 것이다.
7) 촉에 연하여 '수(受, vedana)'가 발생한다. 수는 감수작용이라고 볼 수 있는데, 경전에서는 그 내용으로서 괴로움(苦), 즐거움(樂), 그리고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不苦不樂) 중간 느낌(捨受)의 세 가지 종류를 들고 있다. 접촉에 따른 필연적인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8) 수를 연하여 '애(愛, trsna)'가 발생한다. 끝없는 갈애(渴愛, thirst)를 뜻한다. 세 가지 느낌 중에서 즐거움의 대상을 추구하는 맹목적인 욕심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애를 번뇌 중에서 가장 심한 것으로 보고, 수도에 있어서도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한다. 무명은 지혜를 가로막는 장애(所知障)요, 애는 마음을 염착(染着)시키는 번뇌장(煩惱障)의 대표적인 것이다.
9) 애를 연하여 일어나는 '취(取, upadana)'는 취득하여 병합하는 작용이다. 애에 의하여 추구된 대상을 완전히 자기 소유화하는 일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 취라는 술어는 오취온설에서 이미 등장했던 것인데, 거기에서도 오온을 하나의 개체로 취착하는 작용을 나타내는 말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0) 취를 연하여 '유(有, bhava)'가 발생한다. 유(bhava)라는 말은 'vhu'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형인데, '있다(be)','된다(bexcome)'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말이다. 생사(生死)하는 존재 그 자체가 형성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경전에서 유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욕계,색계,무색계(三界)의 세가지 유가 곧 그것이라고 설명한다. 삼계는 생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곳이다.
11) 유에 연하여 '생(生, jati)'이 발생하는데, 생은 말 그대로 '생한다'는 뜻이다. 유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앞에서 살폈는데, 유가 그렇게 생사(生死)하는 존재 자체의 형성을 뜻 한다면, 그것에 연하여 생이 있게 될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12) 생이 있으므로 노(老),사(死),우(憂),비(悲),뇌(惱),고(苦)가 있게 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눈앞에 보는 바로서 다시 더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단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이곳의 생과 사는 육체적 생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생사한다고 보게 된 꿈과 같은 환상과 거기에서 오는 정신적인 괴로움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노,사 다음에 우, 비, 뇌, 고가 따르고 있는 것이다.
2) 이러한 무명이 있으면 그것을 연하여 '행(行, samskara)'이 있게 된다는 것인데, 행은 '결합하는(sam) 작용(kara)'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작용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현재 학자들 속에서 그 말을 형성 작용이라고 번역하는 이가 있으며, 서구에서는 'im-pulse'라고 번역함이 보통이다. 어떻든 인간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이고 힘든 자기 형성의 업이라고 볼 수 있다.
3) 행에 의해 개체가 형성되면, 그곳에 '식(識, vilnana)'이 발생한다고 한다. 식은 불교에 쓰이는 중요한 술어 중의 하나인데 식별한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개체가 형성되자 그곳에 분별하는 인식이 발생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4) 식을 연하여 '명색(明色, nama-rupa)'이 일어나는데, 색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키고 명은 비물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오온설로 설명하면 색온은 색에, 수,상,생,식온은 명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명색의 발생은 물질적인 것(形色)과 빗물질적인 것이 결합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가 있다.
5) 이렇게 명색이 있게 되면 그것을 연하여 '육처(六處, sa-d-ayatana)'가 일어난다. 육처는 십이처설의 여섯 개의 감관, 즉 눈,귀,코,혀,몸,의지의 육근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개념이다. 인간 실존(六根)의 근저를 이루는 것을 오취온으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명색(五蘊)의 다음에 육처의 발생을 설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라고 할 것이다.
6) 육처를 연하여 '촉(觸, samsparsa)'이 있게 되는데, 촉은 '접촉한다, 충동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경전의 설명에 의하면 육근과 육경과 육식(눈,귀,코,혀,몸,의지에 발생한 식)이 화합하는 것이다. 단순히 육처가 육경에 접촉하는 현상이 아닌 것이다.
7) 촉에 연하여 '수(受, vedana)'가 발생한다. 수는 감수작용이라고 볼 수 있는데, 경전에서는 그 내용으로서 괴로움(苦), 즐거움(樂), 그리고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不苦不樂) 중간 느낌(捨受)의 세 가지 종류를 들고 있다. 접촉에 따른 필연적인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8) 수를 연하여 '애(愛, trsna)'가 발생한다. 끝없는 갈애(渴愛, thirst)를 뜻한다. 세 가지 느낌 중에서 즐거움의 대상을 추구하는 맹목적인 욕심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애를 번뇌 중에서 가장 심한 것으로 보고, 수도에 있어서도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한다. 무명은 지혜를 가로막는 장애(所知障)요, 애는 마음을 염착(染着)시키는 번뇌장(煩惱障)의 대표적인 것이다.
9) 애를 연하여 일어나는 '취(取, upadana)'는 취득하여 병합하는 작용이다. 애에 의하여 추구된 대상을 완전히 자기 소유화하는 일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 취라는 술어는 오취온설에서 이미 등장했던 것인데, 거기에서도 오온을 하나의 개체로 취착하는 작용을 나타내는 말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0) 취를 연하여 '유(有, bhava)'가 발생한다. 유(bhava)라는 말은 'vhu'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형인데, '있다(be)','된다(bexcome)'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말이다. 생사(生死)하는 존재 그 자체가 형성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경전에서 유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욕계,색계,무색계(三界)의 세가지 유가 곧 그것이라고 설명한다. 삼계는 생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곳이다.
11) 유에 연하여 '생(生, jati)'이 발생하는데, 생은 말 그대로 '생한다'는 뜻이다. 유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앞에서 살폈는데, 유가 그렇게 생사(生死)하는 존재 자체의 형성을 뜻 한다면, 그것에 연하여 생이 있게 될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12) 생이 있으므로 노(老),사(死),우(憂),비(悲),뇌(惱),고(苦)가 있게 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눈앞에 보는 바로서 다시 더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단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이곳의 생과 사는 육체적 생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생사한다고 보게 된 꿈과 같은 환상과 거기에서 오는 정신적인 괴로움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노,사 다음에 우, 비, 뇌, 고가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집(集)'이 있게 된다는 것인데, '온'이라는 술어는 오온설에 등장했던 말로서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근간적인 부분을 가리킨다. 그러한 온이 괴로움이라는 것은 삼법인의 괴로움을 소개하는 곳에서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고 본다. '집(集, samudaya)'이라는 말이 새로 나오고 있는데, 이 술어는 다음 장의 사제(四諦)를 소개하는 곳에서 자세한 설명이 따를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발생'을 뜻하는 불교 술어의 일종이라는 것만을 알면 된다. 요는 무명이 있으면 그로 말미암아 생사라는 중생의 괴로운 존재 방식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생사의 근본적인 극복은 무명의 멸진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경전에는 무명에서 생사의 발생 과정을 설한 다음에는 반드시 무명의 멸에서 생사의 멸을 설하고 있다.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이 있게 된다."<잡아함 권 12> 이상과 같은 내용의 교설을 십이지연기설(dva-dasa-anga-pratityasamutpada) 또는 줄여서 십이연기설이라고 부른다. 십이지는 무명에서 노사에 이르는 지분(anga)이 열둘이기 때문이다. 연기라는 말은 '연하여(pratitya) 결합해서(sam) 일어난다(utpada)'는 뜻인데, 각 지분은 자기 앞의 지분에 연하여 일어나, 하나의 커다란 온으로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명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연기하게 되는 과정을 유전문(流轉門)이라고 부르고, 무명의 멸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멸하게 되는 과정을 환멸문(還滅門)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생사의 근본적인 극복은 무명의 멸진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경전에는 무명에서 생사의 발생 과정을 설한 다음에는 반드시 무명의 멸에서 생사의 멸을 설하고 있다.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이 있게 된다."<잡아함 권 12> 이상과 같은 내용의 교설을 십이지연기설(dva-dasa-anga-pratityasamutpada) 또는 줄여서 십이연기설이라고 부른다. 십이지는 무명에서 노사에 이르는 지분(anga)이 열둘이기 때문이다. 연기라는 말은 '연하여(pratitya) 결합해서(sam) 일어난다(utpada)'는 뜻인데, 각 지분은 자기 앞의 지분에 연하여 일어나, 하나의 커다란 온으로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명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연기하게 되는 과정을 유전문(流轉門)이라고 부르고, 무명의 멸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멸하게 되는 과정을 환멸문(還滅門)이라고 부른다.
이 십이연기설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가장 핵심적인 뜻은 무엇일까? 모든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 다시 말하면 죽음의 문제, 삶의 가치 등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데에 목적이 있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십이연기설은 우리에게 인간의 죽음은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에서 연기한 것임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의 죽음이 신의 노여움에 의한 것이라든가 숙명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든가 또는 본래부터 그렇게 있도록 된 우연한 것이라면 인간의 실존은 얼마나 막막한 절망 속에 헤매게 될까?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그것을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의 구원을 청해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생사의 괴로움 속에서 죄악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떻게 신의 은총을 바랄 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더욱 신의 구원을 청해야 한다고 하겠지만, 구원의 확실성을 우리는 또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
그러나 석가모니께서는 오랜 각고의 구도 끝에 마침내 인간의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에서 연기한 것임을 발견한 것이다. 세계의 어떤 종교가 석가모니의 이러한 깨달음보다도 더 밝은 전망을 인류에게 비춰 주고 있을까. 연기의 깨달음이야말로 인류의 종교적 사색이 도달한 최고의 성과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초기 경전에는 이 십이연기설을 석가모니께서 이룬 깨달음(bodhi)의 내용으로 삼고 있을 정도이다. "연기의 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건 안 나오건 간에 이 법은 상주(常住)요, 법주(法住)요, 법계(法界)이니라. 여래는 다만 이 법을 자각하여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들에게 설하나니,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써 저것이 생한다. 즉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의 집(集)이 있게 된다.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 즉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의 멸이 있게 된다."<잡아함 권 12>
석가모니뿐만 아니라 비바시불(Vipasyin)을 비롯하여 과거에 출현하셨던 여러 부처님들도 모두가 보리수 아래서 십이연기를 역,순으로 관찰해서 깨달음을 이루셨다고 설해져 있다.<잡아함 권 15> 순관(順觀)은 무명에서 노사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이고, 역관(逆觀)은 노사에서 무명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역 두 관찰에서 부처님들이 깨달음을 이루는 데에는 먼저 역관에 의한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경전에도 그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있다.<잡아함 권 12> 불교의 종교적 사색은 현실(생사의 문제)의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심화되고 있어 신이나 우주의 원리로부터 설해 내려오는 권위주의적 종교와는 전혀 방향이 다르다. 역관은 불교의 이러한 추리적 사색의 방향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순관은 깨달음의 내용에 입각해서 생사의 발생 과정을 밝혀 주는 설명적 교설이라고 보아도 좋다.
십이연기설은 중층적으로 심화되는 불교의 교리 조직 중에서 초기 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부처님을 시봉하던 아난이 "제가 보기에 연기는 그렇게 심심(甚深)한 뜻이 없는 듯합니다."라고 말하였을 때, 부처님은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아난아,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십이연기는 매우 심심한 것이니 보통 사람이 능히 깨칠 수 있는 법이 아니다."<증일아함 권 46>
십이연기설은 초기 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일 뿐만 아니라, 그곳에 설해진 여러 가지 법문을 하나로 종합하고 체계화한 형태임을 보여준다. 우선 그 지분의 조직만 보더라도 오온, 십이처, 생사 등의 여러 가지 법이 그 속에 하나로 짜여져 있으며, 연기라는 발생법에는 인과, 인연, 상의상관 등의 모든 불교적 개념이 포섭되어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인간의 죽음이 신의 노여움에 의한 것이라든가 숙명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든가 또는 본래부터 그렇게 있도록 된 우연한 것이라면 인간의 실존은 얼마나 막막한 절망 속에 헤매게 될까?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그것을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의 구원을 청해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생사의 괴로움 속에서 죄악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떻게 신의 은총을 바랄 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더욱 신의 구원을 청해야 한다고 하겠지만, 구원의 확실성을 우리는 또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
그러나 석가모니께서는 오랜 각고의 구도 끝에 마침내 인간의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에서 연기한 것임을 발견한 것이다. 세계의 어떤 종교가 석가모니의 이러한 깨달음보다도 더 밝은 전망을 인류에게 비춰 주고 있을까. 연기의 깨달음이야말로 인류의 종교적 사색이 도달한 최고의 성과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초기 경전에는 이 십이연기설을 석가모니께서 이룬 깨달음(bodhi)의 내용으로 삼고 있을 정도이다. "연기의 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건 안 나오건 간에 이 법은 상주(常住)요, 법주(法住)요, 법계(法界)이니라. 여래는 다만 이 법을 자각하여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들에게 설하나니,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써 저것이 생한다. 즉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의 집(集)이 있게 된다.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 즉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의 멸이 있게 된다."<잡아함 권 12>
석가모니뿐만 아니라 비바시불(Vipasyin)을 비롯하여 과거에 출현하셨던 여러 부처님들도 모두가 보리수 아래서 십이연기를 역,순으로 관찰해서 깨달음을 이루셨다고 설해져 있다.<잡아함 권 15> 순관(順觀)은 무명에서 노사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이고, 역관(逆觀)은 노사에서 무명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역 두 관찰에서 부처님들이 깨달음을 이루는 데에는 먼저 역관에 의한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경전에도 그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있다.<잡아함 권 12> 불교의 종교적 사색은 현실(생사의 문제)의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심화되고 있어 신이나 우주의 원리로부터 설해 내려오는 권위주의적 종교와는 전혀 방향이 다르다. 역관은 불교의 이러한 추리적 사색의 방향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순관은 깨달음의 내용에 입각해서 생사의 발생 과정을 밝혀 주는 설명적 교설이라고 보아도 좋다.
십이연기설은 중층적으로 심화되는 불교의 교리 조직 중에서 초기 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부처님을 시봉하던 아난이 "제가 보기에 연기는 그렇게 심심(甚深)한 뜻이 없는 듯합니다."라고 말하였을 때, 부처님은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아난아,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십이연기는 매우 심심한 것이니 보통 사람이 능히 깨칠 수 있는 법이 아니다."<증일아함 권 46>
십이연기설은 초기 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일 뿐만 아니라, 그곳에 설해진 여러 가지 법문을 하나로 종합하고 체계화한 형태임을 보여준다. 우선 그 지분의 조직만 보더라도 오온, 십이처, 생사 등의 여러 가지 법이 그 속에 하나로 짜여져 있으며, 연기라는 발생법에는 인과, 인연, 상의상관 등의 모든 불교적 개념이 포섭되어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2) 중도설
불교는 다른 종교와 확연히 구별되는 독특한 종교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인도 정통파 사상의 아트만을 부정하는 무아설이라든가, 형이상학적 희론(戱論, prapanca)을 부정하는 무기설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초기 경전에 설해진 최상 법문으로서의 십이연기설은 이러한 불교의 종교적 입장에 대해서도 가장 체계적이고 심오한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
먼저 무아설에서부터 살펴보자. 일체가 무아라는 판단은 앞서 삼법인설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일체는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무아"라는 근거에 입각한 것이다. 따라서 무상하고 괴로움이라는 것이 그 이유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무아설은 완전하고 철저한 무아설에 이른 것은 아니다. 왜 그러냐면 앞서 삼법인의 무아설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일체법이 무아라면 이 중에 어떤 나가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고 말하고 있는가?"<잡아함 권 10> 무아라고 하지만 현재 나는 분명히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의혹을 일으켰던 찬타 비구에게 다음과 같은 해답이 베풀어지고 있다. "세간의 집(集, 발생)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세간이 없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고, 세간의 멸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다. 여래는 그 두 끝을 떠나 중도에서 설한다."<잡아함 권 10>고 한 다음, 곧 십이연기설이 설해지고 있다.
세간(loka)이라는 말은 세계가 일체라는 말과 동의어로서, 무아설의 '아'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런데 그러한 세간은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므로 없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연기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정적으로 있다고 말해서도 안된다. 왜 그러냐면 실재성이 없는 것을 실재한다고 착각한 망념에서 연기한 것에서 실체가 있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무명에서 연기한 것은 무명의 멸과 함께 없어지는 성질의 것이다. "세간의 멸을 여실히 바로 보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이 뜻을 가리키고 있다.
불교 무아설의 최승(最勝)한 뜻(parama-artha)은 바로 이런 곳에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나에게는 실재성이 없으므로 무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무아는 망념에 입각한 나까지도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찬타비구가 제기했던 '알고 보고 말하는 그 나'는 바로 이러한 나(妄我)라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불교의 무아설은 유와 무의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교설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곧 십이연기설에 입각한 것이다.
석가모니께서는 형이상학적인 희론(戱論)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계셨는데, 이것 또한 십이연기설에 최상의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불교 초기 경전에 나타나는 형이상학적 희론의 조직적인 제시는 십사무기설(十四無記說)이다. 이것은 앞서 제1장에서 만 동자의 질문을 통해 잠깐 언급한 일이 있지만, 다음과 같은 열네 가지 문제에 관한 것이다. 세계는 상(常)인가, 무상(無常) 인가,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가? 세계는 유한(有限)인가, 무한(無限)인가, 유한이며 무한인가, 유한도 아니고 무한도 아닌가? 정신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여래는 사후에 유인가, 무인가, 유이며 무인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가? 이런 문제에 대해 석가모니께서는 의례 답변을 않고 침묵을 지키셨다. '무기(無記, a-vyakarana)'는 해답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열네 가지 문제를 십사무기라고 하는데, 석가모니께서는 이렇게 답변을 삼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가 본래 현실 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시작하는 기본적인 입장 때문이라는 것을 그 이유의 하나로 들 수가 있다. 만동자에게는 "열반과 깨달음에 이르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수행상의 이유가 제시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에 대해 무지하므로"<잡아함 권 34> 그런 희론과 집착이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최승한 이유는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발견된다. 앞서 무아설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연기한 것은 유와 무의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입장이다. 그와 같이 단(斷)과 상(常)<잡아함 권 12>, 일(一)과 이(異)<잡아함 권 12>, 자작(自作)과 타작(他作)<잡아함 권 13> 등의 두 극단도 초월해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열네 가지 문제에 대해서 일방적인 단정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석가모니께서 침묵을 지키지 않을 수밖에 없었음은 이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문제에 올바른 답변을 한다면,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십이연기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확연히 구별되는 독특한 종교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인도 정통파 사상의 아트만을 부정하는 무아설이라든가, 형이상학적 희론(戱論, prapanca)을 부정하는 무기설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초기 경전에 설해진 최상 법문으로서의 십이연기설은 이러한 불교의 종교적 입장에 대해서도 가장 체계적이고 심오한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
먼저 무아설에서부터 살펴보자. 일체가 무아라는 판단은 앞서 삼법인설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일체는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무아"라는 근거에 입각한 것이다. 따라서 무상하고 괴로움이라는 것이 그 이유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무아설은 완전하고 철저한 무아설에 이른 것은 아니다. 왜 그러냐면 앞서 삼법인의 무아설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일체법이 무아라면 이 중에 어떤 나가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고 말하고 있는가?"<잡아함 권 10> 무아라고 하지만 현재 나는 분명히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의혹을 일으켰던 찬타 비구에게 다음과 같은 해답이 베풀어지고 있다. "세간의 집(集, 발생)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세간이 없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고, 세간의 멸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다. 여래는 그 두 끝을 떠나 중도에서 설한다."<잡아함 권 10>고 한 다음, 곧 십이연기설이 설해지고 있다.
세간(loka)이라는 말은 세계가 일체라는 말과 동의어로서, 무아설의 '아'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런데 그러한 세간은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므로 없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연기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정적으로 있다고 말해서도 안된다. 왜 그러냐면 실재성이 없는 것을 실재한다고 착각한 망념에서 연기한 것에서 실체가 있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무명에서 연기한 것은 무명의 멸과 함께 없어지는 성질의 것이다. "세간의 멸을 여실히 바로 보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이 뜻을 가리키고 있다.
불교 무아설의 최승(最勝)한 뜻(parama-artha)은 바로 이런 곳에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나에게는 실재성이 없으므로 무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무아는 망념에 입각한 나까지도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찬타비구가 제기했던 '알고 보고 말하는 그 나'는 바로 이러한 나(妄我)라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불교의 무아설은 유와 무의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교설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곧 십이연기설에 입각한 것이다.
석가모니께서는 형이상학적인 희론(戱論)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계셨는데, 이것 또한 십이연기설에 최상의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불교 초기 경전에 나타나는 형이상학적 희론의 조직적인 제시는 십사무기설(十四無記說)이다. 이것은 앞서 제1장에서 만 동자의 질문을 통해 잠깐 언급한 일이 있지만, 다음과 같은 열네 가지 문제에 관한 것이다. 세계는 상(常)인가, 무상(無常) 인가,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가? 세계는 유한(有限)인가, 무한(無限)인가, 유한이며 무한인가, 유한도 아니고 무한도 아닌가? 정신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여래는 사후에 유인가, 무인가, 유이며 무인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가? 이런 문제에 대해 석가모니께서는 의례 답변을 않고 침묵을 지키셨다. '무기(無記, a-vyakarana)'는 해답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열네 가지 문제를 십사무기라고 하는데, 석가모니께서는 이렇게 답변을 삼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가 본래 현실 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시작하는 기본적인 입장 때문이라는 것을 그 이유의 하나로 들 수가 있다. 만동자에게는 "열반과 깨달음에 이르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수행상의 이유가 제시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에 대해 무지하므로"<잡아함 권 34> 그런 희론과 집착이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최승한 이유는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발견된다. 앞서 무아설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연기한 것은 유와 무의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입장이다. 그와 같이 단(斷)과 상(常)<잡아함 권 12>, 일(一)과 이(異)<잡아함 권 12>, 자작(自作)과 타작(他作)<잡아함 권 13> 등의 두 극단도 초월해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열네 가지 문제에 대해서 일방적인 단정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석가모니께서 침묵을 지키지 않을 수밖에 없었음은 이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문제에 올바른 답변을 한다면,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십이연기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십이연기설의 음미
십이연기설은 이와 같이 초기 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이며, 깨달음의 내용이며, 여러 교리를 하나로 종합,체계화한 것이며, 독특한 불교적 입장에 대한 최승의 이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 그 진가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한 감이 있다.
부파불교시대(B.C. 3세기 - 1세기 경)에는 십이연기설이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로 해석되었다. 즉, 인간이 과거(무명,행),현재(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미래(생,노사)의 삼세에 걸쳐 윤회하는 인과를 밝힌 교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파불교의 이러한 삼세양중인과설에 대해 현대 불교 학자들은 그 잘못을 지적하고, 그런 해석은 본래의 뜻에서 멀어진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현대 불교학의 큰 성과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십이연기설을 단순히 논리적 또는 존재론적 연기관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학자는 십이연기설은 교리가 차츰 정비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소위 후대성립설을 주장하고도 있다. 이러한 해석들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앞에서 상당히 자세하게 십이연기설을 고찰하였는데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십이연기설을 도저히 그렇게 만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십이연기설은 이와 같이 초기 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이며, 깨달음의 내용이며, 여러 교리를 하나로 종합,체계화한 것이며, 독특한 불교적 입장에 대한 최승의 이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 그 진가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한 감이 있다.
부파불교시대(B.C. 3세기 - 1세기 경)에는 십이연기설이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로 해석되었다. 즉, 인간이 과거(무명,행),현재(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미래(생,노사)의 삼세에 걸쳐 윤회하는 인과를 밝힌 교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파불교의 이러한 삼세양중인과설에 대해 현대 불교 학자들은 그 잘못을 지적하고, 그런 해석은 본래의 뜻에서 멀어진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현대 불교학의 큰 성과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십이연기설을 단순히 논리적 또는 존재론적 연기관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학자는 십이연기설은 교리가 차츰 정비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소위 후대성립설을 주장하고도 있다. 이러한 해석들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앞에서 상당히 자세하게 십이연기설을 고찰하였는데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십이연기설을 도저히 그렇게 만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7. 수행과 열반 (사성제설)
(1) 사성제의 내용
십이연기설은 인간에게 왜 생사의 괴로움(苦蘊)이 발생(集)하며, 또 멸할 수 있는가를 밝혀 주는 가장 체계적이고 완비된 이론이라는 것은 앞 장에서 논한 바와 같다. 이러한 고온의 집과 멸에 입각해서 베풀어진 본격적인 실천적 교설을 학계에서는 사성제 또는 사제(四諦)의 교설이라고 보고 있다.
諦(satya)라는 말은 '제'로 읽는데, 사실(fact),진실,진리(truth) 등을 나타낸다. 그러한 제로서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 데에서 사성제(catur-arya-satya)라고 부르는 것이다.
"네 가지 성제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괴로움(苦), 괴로움의 집(苦集), 괴로움의 멸(苦滅),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도(苦滅道)의 네 가지 성제(四聖諦)가 곧 그것이다."<잡아함 권 15>
"뭇 교설은 사성제로 집약된다."<중아함 권 7. 象跡喩經>고 말해질 정도로 중요시되는 이 사제는 이제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인가 살펴보자.
첫째, 괴로움의 성제에 대해서 경전은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을 드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것이 고성제(苦聖諦)인가.
생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고(死) 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愛別離)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求不得) 것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롤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중아함 권 7 分別聖諦經>
이 여덟 가지 괴로움은 삼법인설에서 충분히 밝혔던 것이므로 여기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인간의 현실적 존재는 괴로움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명에서 시작한 연기는 생,노,사에 귀결되고 있으며, 그것을 '커다란 하나의 고온(純大苦蘊)'이라고 다시 요약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십이연기설은 인간에게 왜 생사의 괴로움(苦蘊)이 발생(集)하며, 또 멸할 수 있는가를 밝혀 주는 가장 체계적이고 완비된 이론이라는 것은 앞 장에서 논한 바와 같다. 이러한 고온의 집과 멸에 입각해서 베풀어진 본격적인 실천적 교설을 학계에서는 사성제 또는 사제(四諦)의 교설이라고 보고 있다.
諦(satya)라는 말은 '제'로 읽는데, 사실(fact),진실,진리(truth) 등을 나타낸다. 그러한 제로서 고(苦),집(集),멸(滅),도(道)의 네 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 데에서 사성제(catur-arya-satya)라고 부르는 것이다.
"네 가지 성제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괴로움(苦), 괴로움의 집(苦集), 괴로움의 멸(苦滅),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도(苦滅道)의 네 가지 성제(四聖諦)가 곧 그것이다."<잡아함 권 15>
"뭇 교설은 사성제로 집약된다."<중아함 권 7. 象跡喩經>고 말해질 정도로 중요시되는 이 사제는 이제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인가 살펴보자.
첫째, 괴로움의 성제에 대해서 경전은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을 드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것이 고성제(苦聖諦)인가.
생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고(死) 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愛別離)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求不得) 것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롤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중아함 권 7 分別聖諦經>
이 여덟 가지 괴로움은 삼법인설에서 충분히 밝혔던 것이므로 여기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인간의 현실적 존재는 괴로움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명에서 시작한 연기는 생,노,사에 귀결되고 있으며, 그것을 '커다란 하나의 고온(純大苦蘊)'이라고 다시 요약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성제는 바로 이 명백한 사실을 바로 가리키고 있다.
둘째, 괴로움의 집(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었는가의 이유를 밝혀 주고 있다. 경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베풀어져 있는데 주로 오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즉 오온에 대한 '애탐(愛貪, chanda-raga)'<잡아함 권 2>이라든가 또는 "재생(再生)을 초래하고(punar-bhavika) 희탐(喜貪, nandi-raga)을 수반하고 이곳 저곳에 낙착(樂着, abhinandin)하는 애(愛, trsna)"<잡아함 권 3>라고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 중의 색은 애희(愛喜)가 그 집(集)이고, 수,상,행은 촉이, 식은 명색(名色)이 그 집(集)이라고 따로따로 설해져 있는 경우도 있다.<잡아함 권 2> 괴로움의 집을 이렇게 오온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음은 앞서 고성제에서 여덟가지 괴로움을 오취온으로 요약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집이라는 개념의 최승(最勝)한 뜻은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찾아야 한다. 집(集, samudaya)이라는 술어는 원래는 '결합하여(sam-) 상승하다(udaya)'는 뜻으로서 '모으다(collect)'는 뜻이 아니다. '집기(集起)'라고 번역함이 좋은 말이다. 따라서 연기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기에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임을 설한 다음 "그렇게 해서 오온의 집이 있다."고 맺고 있는 것이다.
집이 이렇게 연기에 통하는 개념이라면, 괴로움의 집이라는 둘째번 성제는 괴로움은 연기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또 그것은 괴로움의 성제와 함께 십이연기설의 유전문(流轉門)에 입각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셋째,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입장이다. 경전에도 그런 각도에서 설명되고 있다. 오온의 집이 애탐(愛貪) 등으로 설명되면, 멸제는 그것을 멸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멸은 무명의 멸과 함께 사라진다고 설한 다음 "그렇게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滅)이 있다."고 맺어져 있다. '멸(滅, nirodha)'의 원어 또한 '멸하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 분명하다면, 무명의 멸진(滅盡)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넷째,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道)이라는 성제는 경전에 팔정도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의 여덟가지 실천 사항을 가리킨다. 먼저 이 팔정도의 각 항에 대한 경전의 설명을 살피면서 그들이 어떤 입장에서 종교적 생활을 조직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정견(正見, samyak-drsti)은 바르게 본다는 뜻으로서, 경전에는 사제(四諦)를 닦을 때 "법을 잘 결택(決擇)하여 관찰하는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중아함 권 7. 分別聖諦經>
정사유(正思惟, samyak-samkalpa)는 바르게 사유한다 또는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으로서, "생각할 바(可念)와 생각 안할바(不可念)를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어(正語, samyak-vac)와 정업(正業, samyak-karma-anta)은 각각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일하는 것인데, 전자는 '네 가지 선한 구업(口業)'이요, 후자는 '세 가지 선한 신업(身業)'이라고 설명되어 있다.<同上經> 정어(正語)와 정업(正業)이 이렇게 각각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에 해당된다면 위의 정사유(正思惟)는 의업(意業)에 통한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정명(正命, samyak-ajiva)은 바르게 생활하는 것으로서, 정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의식주를 구할 것이 권해지고 있다.
정정진(正精進, samyak-vyayama)은 바르게 노력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이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
정념(正念, samyak-smrti)은 바르게 기억하는 것인데,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이다.
끝으로 정정(正定, samyak-samadhi)은 바르게 집중한다는 말로서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것인데, 삼매(三昧)라는 음역어(音譯語)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다.
이상이 대개 경전에서 볼 수 있는 팔정도의 설명인데, 괴로움의 멸에 이르려면 이러한 팔정도가 행해져야만 할 이유는 무엇일까? 연기(緣起)한 것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은 앞 장 십이 연기설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생사의 괴로움도 연기한 것이므로 실체가 없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무명 망념에서 연기한 괴로움은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集諦). 괴로움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있으므로 그것을 멸하지 않으면 안된다(滅諦).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를 똑바로 응시하고(正見) 그에 입각해서 새로운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면서(正思惟 - 正念) 마음을 진리에 계합(契合)하게끔 집중하지(正定)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경전에도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다.
"해 뜨기 전에 밝음이 비치듯이 괴로움의 사라짐에는 먼저 정견이 나고, 이 정견이 정사유 내지 정정을 일으키며, 정정이 일어남으로써 마음의 해탈이 있게 된다."<잡아함 권 28>
따라서 팔정도에서 수행상으로 가장 중요한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은 정견과 정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 수행법의 주축이 되는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yana)의 병수(竝修)라든지 정(定, samadhi)과 혜(慧, prajna)의 쌍수(雙修)와 같은 것도 이 정견,정정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불교의 업설은 선악을 결택하여 현실의 괴로움을 타개하려는 강력한 실천윤리라는 것을 앞서 살펴보았는데, 그러나 이 업설은 아직도 생사윤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라도 즐거운 과보를 초래코자 하는 것으로서, 사후 하늘(天)에 생(生)하는 것이 목적이 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사제 팔정도는 선악의 근저에 있는 '정사(正邪)'를 문제로 대두시켜, 정사의 결택을 통해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해탈에의 길이다. 따라서 범속한 세간(世間, 生死)을 벗어나는 '신성한' 진리라고 해서 사제를 '사성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성제가 설해짐으로 해서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론과 실천의 완비를 보게 된다. 뿐만 이니라 종교는 '신성한 것과의 만남' 이라고 말해질 정도로 성스러운 것을 특질의 하나로 삼고 있는데,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제 이러한 신성성(神聖性)을 띠게 되었다. 석가모니께서 녹야원에서 사성제를 설하신 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함은 사성제가 이렇게 교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둘째, 괴로움의 집(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었는가의 이유를 밝혀 주고 있다. 경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베풀어져 있는데 주로 오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즉 오온에 대한 '애탐(愛貪, chanda-raga)'<잡아함 권 2>이라든가 또는 "재생(再生)을 초래하고(punar-bhavika) 희탐(喜貪, nandi-raga)을 수반하고 이곳 저곳에 낙착(樂着, abhinandin)하는 애(愛, trsna)"<잡아함 권 3>라고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 중의 색은 애희(愛喜)가 그 집(集)이고, 수,상,행은 촉이, 식은 명색(名色)이 그 집(集)이라고 따로따로 설해져 있는 경우도 있다.<잡아함 권 2> 괴로움의 집을 이렇게 오온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음은 앞서 고성제에서 여덟가지 괴로움을 오취온으로 요약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집이라는 개념의 최승(最勝)한 뜻은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찾아야 한다. 집(集, samudaya)이라는 술어는 원래는 '결합하여(sam-) 상승하다(udaya)'는 뜻으로서 '모으다(collect)'는 뜻이 아니다. '집기(集起)'라고 번역함이 좋은 말이다. 따라서 연기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기에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임을 설한 다음 "그렇게 해서 오온의 집이 있다."고 맺고 있는 것이다.
집이 이렇게 연기에 통하는 개념이라면, 괴로움의 집이라는 둘째번 성제는 괴로움은 연기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또 그것은 괴로움의 성제와 함께 십이연기설의 유전문(流轉門)에 입각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셋째,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입장이다. 경전에도 그런 각도에서 설명되고 있다. 오온의 집이 애탐(愛貪) 등으로 설명되면, 멸제는 그것을 멸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멸은 무명의 멸과 함께 사라진다고 설한 다음 "그렇게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滅)이 있다."고 맺어져 있다. '멸(滅, nirodha)'의 원어 또한 '멸하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 분명하다면, 무명의 멸진(滅盡)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넷째,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道)이라는 성제는 경전에 팔정도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의 여덟가지 실천 사항을 가리킨다. 먼저 이 팔정도의 각 항에 대한 경전의 설명을 살피면서 그들이 어떤 입장에서 종교적 생활을 조직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정견(正見, samyak-drsti)은 바르게 본다는 뜻으로서, 경전에는 사제(四諦)를 닦을 때 "법을 잘 결택(決擇)하여 관찰하는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중아함 권 7. 分別聖諦經>
정사유(正思惟, samyak-samkalpa)는 바르게 사유한다 또는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으로서, "생각할 바(可念)와 생각 안할바(不可念)를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어(正語, samyak-vac)와 정업(正業, samyak-karma-anta)은 각각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일하는 것인데, 전자는 '네 가지 선한 구업(口業)'이요, 후자는 '세 가지 선한 신업(身業)'이라고 설명되어 있다.<同上經> 정어(正語)와 정업(正業)이 이렇게 각각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에 해당된다면 위의 정사유(正思惟)는 의업(意業)에 통한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정명(正命, samyak-ajiva)은 바르게 생활하는 것으로서, 정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의식주를 구할 것이 권해지고 있다.
정정진(正精進, samyak-vyayama)은 바르게 노력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이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
정념(正念, samyak-smrti)은 바르게 기억하는 것인데,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이다.
끝으로 정정(正定, samyak-samadhi)은 바르게 집중한다는 말로서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것인데, 삼매(三昧)라는 음역어(音譯語)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다.
이상이 대개 경전에서 볼 수 있는 팔정도의 설명인데, 괴로움의 멸에 이르려면 이러한 팔정도가 행해져야만 할 이유는 무엇일까? 연기(緣起)한 것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은 앞 장 십이 연기설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생사의 괴로움도 연기한 것이므로 실체가 없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무명 망념에서 연기한 괴로움은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集諦). 괴로움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있으므로 그것을 멸하지 않으면 안된다(滅諦).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를 똑바로 응시하고(正見) 그에 입각해서 새로운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면서(正思惟 - 正念) 마음을 진리에 계합(契合)하게끔 집중하지(正定)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경전에도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다.
"해 뜨기 전에 밝음이 비치듯이 괴로움의 사라짐에는 먼저 정견이 나고, 이 정견이 정사유 내지 정정을 일으키며, 정정이 일어남으로써 마음의 해탈이 있게 된다."<잡아함 권 28>
따라서 팔정도에서 수행상으로 가장 중요한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은 정견과 정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 수행법의 주축이 되는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yana)의 병수(竝修)라든지 정(定, samadhi)과 혜(慧, prajna)의 쌍수(雙修)와 같은 것도 이 정견,정정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불교의 업설은 선악을 결택하여 현실의 괴로움을 타개하려는 강력한 실천윤리라는 것을 앞서 살펴보았는데, 그러나 이 업설은 아직도 생사윤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라도 즐거운 과보를 초래코자 하는 것으로서, 사후 하늘(天)에 생(生)하는 것이 목적이 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사제 팔정도는 선악의 근저에 있는 '정사(正邪)'를 문제로 대두시켜, 정사의 결택을 통해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해탈에의 길이다. 따라서 범속한 세간(世間, 生死)을 벗어나는 '신성한' 진리라고 해서 사제를 '사성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성제가 설해짐으로 해서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론과 실천의 완비를 보게 된다. 뿐만 이니라 종교는 '신성한 것과의 만남' 이라고 말해질 정도로 성스러운 것을 특질의 하나로 삼고 있는데,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제 이러한 신성성(神聖性)을 띠게 되었다. 석가모니께서 녹야원에서 사성제를 설하신 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함은 사성제가 이렇게 교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2) 사과
사제 팔정도는 행하는 사람의 인격 구조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가 없다. 세계관의 근본적 전환과 심성의 정화가 함께 행해지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사람이 얻게 되는 그러한 종교적 체험을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하여 행자의 수행을 돕고 있으니, 예류(預流),일래(一來),불환(不還),아라한(阿羅漢)의 사과설(四果說)이 곧 그것이다.
첫째의 예류(srota-apanna)는 세 가지 결박의 번뇌(身見,戒取,疑)를 끊고 범속한 생활에서 성스런 흐름에 들어간 사람을 가리킨다.<중아함 권 1. 水喩經>
둘째의 일래(一來, sakrd-agamin)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 가지 결박의 번뇌뿐만 아니라 탐,진,치(三毒心)의 셋도 약화시켜 이 세상에 한 번 돌아와 괴로움을 다하는 단계이다.
셋째의 불환(不還, an-agamin)은 다섯 가지 결박(五下分結)의 번뇌(身見,戒取,疑,貪,瞋)를 끊고 이 세상에 옴이 없이 천상에서 열반에 드는 것을 뜻한다.
끝으로 아라한(arhat)은 일체의 번뇌(身見,戒取,疑,貪,瞋,痴)를 끊고 현재의 법에서 그대로 해탈의 경계를 체득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제 팔정도는 행하는 사람의 인격 구조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가 없다. 세계관의 근본적 전환과 심성의 정화가 함께 행해지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사람이 얻게 되는 그러한 종교적 체험을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하여 행자의 수행을 돕고 있으니, 예류(預流),일래(一來),불환(不還),아라한(阿羅漢)의 사과설(四果說)이 곧 그것이다.
첫째의 예류(srota-apanna)는 세 가지 결박의 번뇌(身見,戒取,疑)를 끊고 범속한 생활에서 성스런 흐름에 들어간 사람을 가리킨다.<중아함 권 1. 水喩經>
둘째의 일래(一來, sakrd-agamin)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 가지 결박의 번뇌뿐만 아니라 탐,진,치(三毒心)의 셋도 약화시켜 이 세상에 한 번 돌아와 괴로움을 다하는 단계이다.
셋째의 불환(不還, an-agamin)은 다섯 가지 결박(五下分結)의 번뇌(身見,戒取,疑,貪,瞋)를 끊고 이 세상에 옴이 없이 천상에서 열반에 드는 것을 뜻한다.
끝으로 아라한(arhat)은 일체의 번뇌(身見,戒取,疑,貪,瞋,痴)를 끊고 현재의 법에서 그대로 해탈의 경계를 체득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8. 해탈과 열반 | |||||||||
(1) 열반의 의미
수행을 통해 도달한 궁극적 경지를 불교에서는 해탈이나 열반이라는 말로 부른다. 해탈(vimoksa, vimukti)은 결박이나 장애로부터 벗어난 해방,자유 등을 의미하고, 열반(nirvana)은 '불어 끈다(吹滅)'는 뜻으로서 번뇌의 뜨거운 불길이 꺼진 고요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 두 술어는 우파니샤드 철학이나 이 계파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것을 석가모니께서 불교 수행의 궁극적 경지를 표현하는 술어로 채택한 것이다. 이것은 그 경지가 그러한 개념에 통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불교의 여러 가지 수행법 가운데 십업설과 사제설을 살펴보았다. 먼저 십업설에서 수행이 궁극에 이른 경계라면 십악업이 단절된 상태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십악업에서 근본이 되는 것은 세 가지 의업(意業) 즉 탐욕(貪欲, 욕심),진에(성냄),치암(痴暗, 어리석음)의 소위 삼독심(三毒心)이다.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은 의업이 밖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십업설에서의 궁극의 경지는 탐, 진, 치가 사라진 상태라고 말해도 좋다. 사제설에서도 팔정도의 수행이 궁극에 이른 경지는 탐, 진, 치가 사라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사과설(四果說)의 각 단계에서 단절되는 결박의 번뇌를 보면, 예류에서는 삼결(三結. 有身,戒取,疑)이 끊어지고, 일래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탐,진,치가 박약해지며, 불환에서는 삼결과 탐,진(五下分結)이 끊어지고, 아라한에 이르러 탐,진은 물론 치까지도 끊어진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전에서 열반은 그러한 탐, 진, 치가 영원히 끊어진 상태라고 설명되어 있다. "열반이란 탐욕이 영진(永盡)하고 진에가 영진하고 치암(痴暗)이 영진한 것이니, 일체 번뇌가 영진한 것을 열반이라고 이름한다."<잡아함 권 18> 따라서 열반이란 개념은 십업설과 사제설에 두루 적용될 수 있는 궁극적 경지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 술어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두루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열반이란 개념이 갖는 본래의 뜻은 생사의 구속을 벗어난 해탈의 경계에 있다고 생각된다. 경전에 사용된 예를 보면 열반은 대부분이 사제설과 결합되어 있으며,<잡아함 권 2> 사제설이 지향하는 바는 무명의 망념을 멸하여 생사의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오온을 여실하게 아는 까닭에 오온에 불착(不着)한다. 오온에 불착하는 까닭에 해탈을 얻는다."<잡아함 권 15> 해탈에는 혜해탈(慧解脫)과 심해탈(心解脫)의 두 가지가 설해지고 있다. 혜해탈(prajna-vimukti)은 오온이나 십이연기에 실체가 본래 없는 것을 봄으로써 지적(知的)으로 해탈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연기한 것이 무아라는 것을 직관하는 것(정견)만으로 마음의 번뇌가 완전히 멸하는 것이 아니다. 정정(正定)을 통해 마음에서 그것을 멸해야만 한다. 이것이 심해탈(ceto-vimukti)이다. 열반은 이러한 두 가지 해탈이 갖추어질 때(俱分解脫)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열반은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난 세계이다. 그 곳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무상함은 없다. "유위(有爲)에는 생주이멸이 있지만 무위(無爲)에는 생주이멸이 없다. 이것을 모든 행(行)이 적멸(寂滅)한 열반이라고 한다."<잡아함 권 12>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도 이런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오든 행은 무상하니 그것은 생멸의 법이다. 생멸을 멸해 버리면 적멸은 즐거움이 된다."<잡아함 권 22> 불교에 있어서 열반은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삼법인설에도 이 뜻을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열반적정(涅槃寂靜)의 셋을 드는 경우가 그것이다. (2) 열반의 바른 이해
열반은 불교 수행의 최고 경지를 표현하는 말이지만, 그 언어적 인상은 적극적이라기 보다는 소극적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생의 맹목적 의지라고 할 수 있는 탐, 진, 치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불교에서는 열렬한 구도를 위해서 재가(在家)보다는 출가(出家)를 권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불교는 염세 종교라든가 허무적멸(虛無寂滅)의 도(道)라는 평을 종종 들어 왔다. 그러나 이런 비판이 과연 열반의 참다운 뜻을 이해한 것일까. 선과 악은 성질이 상반하므로 한 인간의 행위에 동시에 나타날 수는 없다. 악이 행해지고 있을 때는 선은 있을 수 없고, 선이 행해지고 있을 때는 악이 있을 수가 없다. 선과 악의 이러한 상반성은 악을 끊으면 곧 선이 되고 선을 끊으면 곧 악이 된다는 판단을 끌어낸다. 그런데 불교의 열반은 탐, 진, 치라는 세 가지 악한 의업이 멸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그 곳에는 무탐,무에,정견(無痴)의 세가지 선한 의업이 곧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열반의 언어적 표현은 비록 소극적이지만 사실은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열반의 적극적 의미에 관한 이러한 해명에 대해서 다시 다음과 같은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선과 악의 중간 상태 즉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無記)의 상태가 있을 수가 있으니, 열반은 바로 그러한 비활동적 중간 상태가 아니겠느냐고. 이런 견해도 불교의 십업설에서 말하는 선악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 그러냐면 십업설에서는 선악의 중간 상태를 시설함이 없이 선악을 완전히 상호 대립적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불교에서 십선업을 따로 시설함이 없이 십악업의 반대 개념을 갖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데에서 엿볼 수가 있다. 즉 십선업은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 불망어(不妄語), 불양설(不兩舌), 불악구(不惡口), 불기어(不綺語), 무탐(無貪), 무에, 정견(正見, 無痴)의 열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잡아함 권 15> 따라서 십악업의 멸(滅)은 곧 십선업의 발생을 의미한다. 열반의 이러한 적극적 의미를 우리는 사제 팔정도에서는 더욱 뚜렷이 할 수가 있다. 팔정도가 완성된 아라한의 경계에서는 탐,진,치의 일체 번뇌가 영진(永盡)한다고 한다. 이것 또한 무탐, 무에, 정견의 발생을 의미함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사제의 집제와 멸제는 십이연기의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에 각각 해당되는데 십이연기의 최초에 위치하고 있는 무명은 명과 정반대의 개념이다. 따라서 무명의 멸진은 곧 명(明)의 발생으로 전환하며, 우주적인 대아(大我)의 눈부신 활동이 거기에 전개될 것이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낭요(朗燿)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석가모니께서는 초전법륜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내가 사성제에서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을 함에, 눈이 생하고 지(智)가 생하고 명(明)이 생하고 각(覺)이 생하였다."<잡아함 권 15> 열반의 적극적 의미가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열반은 또 인간의 사후에야 실현되는 경계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경전에도 석가모니의 죽음을 반열반(般涅槃, parinirvana. 圓寂)이라고 한다. 반열반은 완전(pari-)한 열반이란 뜻이다. 사과(四果)를 얻은 사람의 죽음에도 그런 용어가 사용된 예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열반이라는 말이 이차적으로 전용된 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사후에 대해서 어떤 설명을 해주고 있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십업설에서 선업은 선취(善趣)에 악업은 악취(惡趣)에 수생(受生)한다고 설하고 있음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그러나 생사에 결박하는 근본 무명을 단절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그러한 사람에게 재생이 있다고는 못할 것이다. "내생은 다했고 범행(梵行)은 섰으며 할 바는 하였고 후유(後有)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자증(自證)의 선언(記別)이 경전에 수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반열반은 바로 이러한 도인의 죽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반열반이 죽음을 가리킬 경우는 이차적 전용에 의한 것이지 그 본래의 뜻은 아니다. 열반의 참다운 뜻은 현재의 상태에서 생사로 부터의 해탈을 그대로 체득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라한은 현법(現法)에서 해탈한다고 설해져 있으며, 석가모니께서는 또 다음과 같은 교설을 베풀고 계신다. "현재의 법에서 반열반함이란 어떤 것인가. 늙음,병듦,죽음을 염리(厭離)하고 욕심을 버리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잘 해탈하면 이것을 이르되 현재의 법에서 반열반을 얻었다고 한다."<잡아함 권 15> 모든 악이 멸하면 일체는 선이 되고 모든 사(邪)가 파(破)하면 일체는 정(正)이 된다.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였던 일체는 곧바로 상(常),락(樂),아(我)의 일체로 전환한다. 열반은 바로 이러한 세계관의 전개, 생명의 약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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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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