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宗鏡錄)

[스크랩] 종경록 제1권

수선님 2019. 1. 13. 12:29
종경록 제1권
  
  
  연수(延壽) 지음
  송성수 번역
  
  
  
1. 표종장(標宗章)
  
  자세히 살피건대 조사(祖師)께서는 선리(禪理)를 드러내어 묵묵히 계합하는 바른 종[正宗]을 전하였고 부처님께서는 교문(敎門)을 펴시어 언어표현[詮下]에 담긴 큰 뜻[大旨]을 세우셨으니, 곧 예전의 어진 이들이 받은 바요 뒤의 학자들이 돌아갈 바이다.
  그러므로 먼저 표종장(標宗章)을 세웠으니 의심이 있기 때문에 묻고 그 의심을 해결하기 위하여 답한 것이다. 질문으로 인하여 의심을 말하게 되고 대답으로 인하여 묘한 이해가 은밀히 생기는 것이니, 이는 원종(圓宗)은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바로 첫째가는 말씀으로서 최상의 근기[機]를 갖춘 것이다. 만약 언어[言詮]를 빌려 세우지 않는다면, 그 뜻[情]의 집착을 쓸어 없애지 못한다. 손가락으로 인하여 달[月]을 얻는 것이므로 방편의 문이 없는 것이 아니요, 토끼를 잡고 그물을 잊으면 스스로 천진의 도[天眞之道]에 계합된다.
  다음에는 문답장(問答章)을 세운다. 다만 때가 말세(末世)인지라 대근기를 만나기 드물어서 관(觀)이 얕고 마음에 들뜨며 근기가 미약하고 지혜가 하열할 뿐이다. 따라서 비록 종지(宗旨)가 확실히 있어서 돌아갈 곳을 알았다 하더라도 문답으로 의심을 해결하면 점차로 미혹과 장애가 소멸된다.
  믿음의 힘을 견고하게 하려면 반드시 증명을 빌려서 널리 조사와 부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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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스런 말씀을 인용하여 은밀히 뚜렷하고 떳떳한 큰 도(道)에 계합하고 두루 경전과 논(論)의 요긴한 뜻을 모아서 결정(決定)의 참 마음을 완전하게 이루어야 하므로 마지막에는 인증장(引證章)을 진술한다.
  이 3장(章) 전체를 꿰뚫어 하나의 관[一觀]을 삼아서 거두어들이고 모두 묶어서 여기에 모두 갖추어 놓았다.
  [문] 선덕(先德)께서 이르기를 “만약 우리로 하여금 종(宗)을 세우고 뜻[旨]을 정하게 한다면, 마치 거북 위에서 털을 찾고 토끼 곁에서 뿔을 구하는 것 같다”고 하였고, 『능가경(楞伽經)』의 게송에서는 “온갖 법은 나지 않는 것이므로 이 종(宗)을 세워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이런 장(章)의 이름을 나타내는가?
  [답] 이는 집착을 버리라는 말이다. 만약 종(宗)이 없는 종이면, 그 종지[宗]와 언설[說]을 아울러 펴는 것이다. 옛 부처님께서 모두 방편의 문을 드리웠고 선종(禪宗)에서 또한 한 줄의 길을 열었으니, 절대로 방편에 집착하여 큰 뜻[大旨]을 미혹하지 않아야 할뿐더러 방편을 폐지하여 뒤의 줄[陳]을 끊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기(機)의 앞에는 가르침[敎]이 없고 가르침의 뒤에는 참[實]이 없다. 설령 하나를 이해하고 하나를 깨침이 있다 하여도 모두가 이는 뒤떨어진 일이요, 둘째 번[第二頭]에 속한다.
  그러므로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르기를 “부처님의 눈[佛眼]으로써 온갖 시방 국토 안의 모든 물건을 살펴볼 적에 오히려 없는 것[無]도 보지 아니하거늘, 하물며 있는 법[有法]이겠느냐? 필경공법(畢竟空法)으로 뒤바뀜을 능히 깨뜨려 보살로 하여금 부처가 되게 하는 이 일조차도 오히려 할 수 없거늘 하물며 범부가 있는 법[有法]에 전도된 것을 어찌 하겠는가?”라고 했다.
  이제 조사와 부처님의 언교(言敎)에 의지하여 지금의 배우는 사람에 맞추어서 심성(心性)을 깨닫고 명백히 하는 곳에 따라 마음을 세워 종을 삼는다.
  이 때문에 서천(西天)의 석가문불(釋迦文佛)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은 마음으로 종을 삼고 [문]없음[無門]으로 법의 문[法門]을 삼는다”고 하셨으며 이 나라의 초조(初祖) 달마대사(達磨大師)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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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로써 마음에 전하며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以心傳心 不立文字]”고 했으니, 곧 부처와 부처가 손수 이 뜻을 주고 받으셨으며 조사와 조사가 서로 이 마음을 전하고 전하였다.
  이상이 대략 조사와 부처님께서 세운 바의 종지(宗旨)이다.
  또 여러 성현들이 종체(宗體)를 세운 것은 두순화상(杜順和尙)이 『화엄경(華嚴經)』에서 의하여 자성이 청정한 원명의 체[自成淸淨圓明體]를 세운 것으로서 이는 바로 여래장(如來藏) 안의 법성(法性)의 체이다.
  본래부터 성(性)은 스스로 만족하여 더러운 데에 있되 때가 끼지 아니하고 닦고 다스리되 깨끗해지지 않으므로 자성이 청정하다고 하며, 성의 바탕이 두루 비추어서 어두운 데마다 보지 않음이 없으므로 원명(圓明)이라 한다.
  또 흐름을 따라 더러움[染]을 더하되 때가 끼지 아니하고 흐름을 거슬러 더러움을 없애되 깨끗해지지 아니하며, 또한 성인의 몸에 있다 해도 불어나지 아니하고 범부의 몸에 있다 해도 줄어들지 아니한다.
  비록 숨음[隱]과 드러냄[顯]의 다름이 있으나 차별의 다름은 없는 것이니, 번뇌로 덮으면 숨고 지혜로 깨달으면 드러난다. 생인(生因)으로 발생하게 한 것이 아니요 오직 요인(了因)으로 깨달을 뿐이다. 이는 곧 일체 중생의 제 마음의 바탕이라, 신령하게 알고 어둡지 아니하며 고요히 비추면서 버림이 없다. 화엄의 종(宗)뿐만 아니라 또한 온갖 교(敎)의 바탕이기도 하다.
  『불지론(佛地論)』에서는 하나의 청정한 법계의 체[淸淨法界體]를 세웠다. 논(論)에 이르기를 “청정한 법계란 온갖 여래(如來)의 진실한 자체(自體)이다. 끝없는 때로부터 자성(自性)은 청정하여 가지가지 허물과 시방세계의 극미진수(極微塵數)의 성상(性相)의 공덕을 두루 갖추었지만, 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음은 마치 허공과 같다. 두루 온갖 유정(有情)들이 평등하게 함께 소유하되 온갖 법과 더불어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온갖 모양[相]을 떠나서 온갖 분별(分別)과 온갖 명언(名言)이 모두 있을 수 없다. 이는 오직 청정한 성지(聖智)로써 증득할 바요 이공(二空)의 무아(無我)로써 나타날 바다.
  진여(眞如)가 그 자성(自性)이니, 모든 성현은 분증(分證)하고 모든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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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님은 원증(圓證)한다. 이는 청정한 법계로서 곧 진여의 미묘한 마음이며, 모든 부처의 과해(果海)의 근원이 되고 중생들의 실제(實際)의 땅이 된다”라고 했다. 이는 모두가 종(宗)을 세우는 다른 이름이며, 따로 바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혹은 종(宗)을 높음[尊]이라고 말하기도 함은 마음으로써 종을 삼기 때문이니, 이르기를 “천상과 천하에 나만이 홀로 높다”라고 하였다. 혹은 체(體)를 성품[性]이라고 말하기도 함은 마음으로써 체를 삼기 때문이니, 이르기를 “온갖 법은 곧 마음의 자성임을 알라”고 하였다. 혹은 지혜[智]라고 말함은 마음으로써 지혜를 삼는 것이니 곧 이는 본래 성품이 고요하게 비추는 작용[用]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자각성지(自覺聖智)와 보광명지(普光明智)등이다”라고 하였다.
  만약 의미와 작용에 맞도록 나눈다면 체(體)는 종(宗)이요 용(用)은 별(別)이며, 만약 모여 돌아와서[會歸] 평등하면 하나의 길도 어긋남이 없다. 그러므로 『화엄기(華嚴記)』에서는 “등각(等覺)과 묘각(妙覺)의 두 지위가 여래의 보광명지와 온전히 같다”고 한 것은 보광명지에 듦을 말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모임[會]에서 등각ㆍ묘각의 두 지위를 설명하였으니, 두 깨달음[二覺]이 보광명지와 온전히 같으므로 이는 곧 모여 돌아온다 함의 뜻이다.
  [문] 등각이 묘각과 같다는 것은 이치로서 그러할 수 있으나, 묘각 밖에 무슨 여래의 보광명지가 있어서 같은 것이라 하는가?
  [답] 등각을 말하고 묘각을 말하는 것은 곧 지위에 맞추는 것이다. 보광명지는 인과(因果)에 속하지 않고 인과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 왜냐 하면 자각성지로 말미암아 인과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가경(楞伽經)』에서 “묘각의 지위 밖에 다시 자각성지의 지위를 세웠으니, 역시 불성(佛性)에 인(因)이 있고 과(果)가 있고 인인(因因)이 있고 과과(果果)가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인으로써 그를 취하면 이는 인불성(因佛性)이요, 과로써 그를 취하면 이는 과불성(果佛性)이다. 그러나 불성은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니, 보광명지 역시 그러하여 그 자체는 인과를 뛰어 넘었지만 인과의 의지[依]가 되는 과(果)라야 비로소 구경(究竟)인 것이다. 그러므로 ‘보광명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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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은 근본[本]이 된다고 일컫기도 함은 마음으로써 근본을 삼기 때문이니, 『열반소(涅槃疏)』에서 이르기를 “열반의 종본(宗本)이라 함은, 모든 행이 모두 큰 열반의 마음으로써 근본을 삼는다”고 하였다. 근본이 서면 도(道)가 생기는 것이, 마치 벼리[網目]가 없으면 그물코가 서지 아니하고 가죽이 없으면 털이 붙지 않는 것과 같다. 마음은 근본이 되기 때문에 그 종(宗)을 세울 수 있다.
  [문] 만약 종(宗)을 밝히고자 하면 순전히 조사의 뜻[祖意]만을 잡는 것이 합당하거늘, 무엇 때문에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언교(言敎)를 아울러 인용하여 지남(指南)으로 삼는가? 이 때문에 종문(宗門)에서 이르기를 “새우[蝦]를 빌려 눈을 삼는 것은 자기 몫이 없음이다. 이는 단지 문자의 성인[文字聖人]만 이루고 조사의 지위에는 들지 못하리라”고 했다.
  [답] 옛날부터 한결같이 교(敎)를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두려워한 것은 부처님 말씀을 살피지 않고 글을 따라 알음알이[解]를 내어 부처님의 뜻을 잃고 처음 낸 뜻[初心]을 저버릴까 해서였다. 어떤 이가 만약 언어로 인하여 뜻을 얻고 마음의 대경[境]을 짓지 않으면서 다스려 곧장 부처 마음을 깨닫는다면 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예를 들어 저 약산(藥山) 화상이 일생 동안 『대열반경(大涅槃經)』을 보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것과 같다.
  그때 어떤 학인(學人)이 묻기를 “화상께서는 평소에 학인들에게 경을 보지 못하게 하시면서 화상은 무엇하러 보십니까?”라고 하자, 스님이 이르기를 “다만 눈만을 가리기 위해서니라”라고 하셨고, 묻기를 “학인이 보아도 됩니까?”라고 하자, 스님이 이르기를 “네가 본다면 소 가죽[牛皮]도 뚫어지리라”라고 하였으니, 이는 또 서천(西天)의 제1 조사와 같다.
  이는 본사(本師) 석가모니불께서 처음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전하였으므로 초조(初祖)가 되었고, 차례로 서로가 전하여 이 땅의 6조(祖)까지 이르렀다. 이는 모두가 부처님의 제자이다. 이제 본사의 말씀을 인용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쳐 보이고 말로 인하여 도(道)를 천거하여 법(法)을 보고 종(宗)을 알게 하면 바깥으로 내달아 구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 뜻을 친히 밝혀 뜻을 얻고 이내 조사의 지위에 들면 누가 돈점(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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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漸)의 문을 논하겠으며, 본성을 깨달아 현재 원통(圓通)을 증득하면 어찌 전후(前後)의 지위를 드러낼 것이며, 만약 이와 같다면 무슨 어긋남이 있겠는가?
  이는 또 서천의 상대(上代) 28조(祖)와 이 땅의 6조(祖)와 같으며, 내지 홍주 마조(洪州馬祖) 대사ㆍ남양 충(南陽忠) 국사ㆍ아호 대의(鵝湖大義) 선사ㆍ사공산본정(思空山本淨) 선사 등과 같다. 이들은 모두 경론을 널리 통달하여 자심(自心)을 뚜렷이 깨치고서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보이되 다 진실한 증거를 인용하였으며, 끝내 자기의 소견을 내어서 망령되이 지시하거나 진술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세월이 면면히 이어지면서도 참된 종풍은 떨어지지 않았다. 거룩한 말씀으로써 일정한 분량[定量]을 삼았기 때문에 삿됨과 거짓이 변화시키지 못하였고, 지극한 가르침으로써 지남을 삼았기 때문에 의지함에 근거가 있었다.
  때문에 규봉(圭峯) 화상이 이르기를 “모든 종(宗)의 시조는 바로 석가이시다. 경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선은 부처님의 뜻이다. 모든 부처님의 마음과 입은 반드시 서로가 어긋나지 않았고 모든 조사는 서로가 근본을 이어 받았으니, 이는 부처님께서 친히 부촉하신 것이다.
  보살이 논(論)을 지은 시말(始末)은 오직 부처님의 경을 넓힌 것이다. 하물며 가섭(迦葉)으로부터 국다(毬多)에 이르기까지 널리 전한 것이 모두가 삼장(三藏)을 겸한 것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리고 마명(馬鳴)과 용수(龍樹)가 모두 조사였지만 논을 짓고 경을 풀이한 것이 수십만 게송이니, 풍속을 관찰하여 물(物)을 교화함에는 정해진 일과 거동이 없다”고 하였다.
  그 까닭에 선지식이라고 일컫는 이는 본래 부처님 말씀을 밝혀서 자기 마음을 인가(印可)하여야 된다. 만약 요의(了義)의 일승원교(一乘圓敎)와 상응(相應)하지 아니하면, 설령 성인의 과위를 증득했다 하여도 역시 구경(究竟)이 아니다.
  이제 또한 두 가지를 기록하여 이 글을 증명하겠다.
  홍주 마조(洪州馬祖) 대사가 이르기를 “달마(達馬) 대사가 남천축국(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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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竺國)으로부터 온 것은 대승(大乘)의 한 마음의 법을 전한 것뿐이었으나, 『능가경(楞伽經)』으로써 중생의 마음을 밝힌 것은 이 한 마음의 법을 믿지 않을까 해서였다”라고 했다.
  『능가경』에서 이르기를 “부처님께서는 마음으로 종(宗)을 삼고 문(門) 없음으로 법의 문을 삼는다”고 하였거늘,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마음으로 종을 삼는가? 부처님께서 마음이라 함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이요, 지금 말하는 이것이 바로 마음의 말[心語]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마음으로 종을 삼는다”고 하였다.
  [문]없음으로 법의 문을 삼는다 함은 본성(本性)이 공함을 통달하면 다시는 하나의 법도 없어서 성(性) 스스로가 바로 문(門)이다. 성에는 상(相)도 없고 문(門)도 없다. 그러므로 “[문]없음으로 법의 문을 삼는다”고 하였다.
  또한 공문(空門)이라고도 하고, 색문(色門)이라고도 한다. 왜냐 하면 공은 바로 법성(法性)의 공이요 색은 바로 법성의 색이기 때문이다. 형상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하고, 지견(知見)이 그지없기 때문에 색이라 한다. 그러므로 “여래의 색(色)은 그지없고 지혜 역시 그렇다”라고 하였다.
  모든 법이 나는 곳에 다시 한량없는 삼매문(三昧門)이 있다. 안팎의 지견(知見)과 망정의 고집[情執]을 멀리 여읜 것을 역시 총지문(總持門)이라 고도 하고 시문(施門)이라고도 한다. 안팎의 선악의 모든 법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이 모두를 여러 바라밀문(波羅蜜門)이라 한다.
  색신불(色身佛)은 바로 실상불(實相佛)의 가용(家用)이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32상(相)과 80종호(種好)는 모두가 마음의 생각으로부터 생긴다”라고 하였다.
  또한 ‘법성가의 불꽃[法性家焰]’이라고도 하고, ‘법성의 공훈[法性功勳]’이라고도 한다. 보살이 반야(般若)를 행할 때, 불로 3계(界)의 안팎의 모든 물건을 다 태워 없애면서도 그 중에서 한 개의 풀잎도 다치지 않는 것은 모든 법이 상 그대로[如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몸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하나의 모양[相]을 따른다”고 하였다.
  이제 자성(自性)이 부처이며 가고ㆍ머물고ㆍ앉고ㆍ눕는 모든 때에 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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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 얻을 것이 없음을 알았으며, 진여는 일체의 이름에 속하지 않고 이름이 없는 것도 아님을 알았다.
  때문에 경에서 이르기를 “지혜[智]는 있음과 없음과 안과 밖으로 얻지 못하므로 구할 것이 없다”고 하셨다. 그 본래 성품에 맡기는 것이며, 또한 성품에 맡긴다는 마음조차도 없다.
  경에서 이르기를 “나는 갖가지 의생신(意生身)을 마음의 헤아림이라고 말하나 그것은 마음이 없는 마음[無心之心]이요, 헤아림 없는 헤아림[無量之量]이다”고 하셨다. 이름 없는 것이 참 이름이 되고 구함이 없는 것이 바로 참된 구함이니라.
  경에서 이르기를 “법을 구하는 이는 마땅히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고 하셨다.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따로 마음이 없나니, 선(善)도 취하지 아니하고 악(惡)도 짓지 아니한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양 쪽이 다 함께 법에 의하지 아니하고 제 성품이 없으며 3계는 오직 마음뿐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삼라만상(森羅萬像)은 한 법의 나타남[所印]이다”고 하셨다. 보는 색(色)은 그 모두가 곧 보는 마음이다. 마음은 자체의 마음이 아닌 것이다. 색으로 인(因)하는 까닭에 마음이며, 색은 자체의 색이 아니라 마음으로 인하는 까닭에 색인 것이다.
  때문에 경에서 이르기를 “색을 보는 것은 곧 마음을 보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남양 충 국사(南陽忠國師)가 이르기를 “선종의 법이란 마땅히 부처님의 말씀인 일승요의(一乘了義)에 의거하여야 본원의 마음자리에 계합하고 서로 전하고 받아 부처님의 도와 같아지는 것이다. 망령된 생각과 불요의교(不了義敎)에 의지하여야 하며 멋대로 견해(見解)를 내어서는 안 된다. 뒤의 학인을 그르치어 모두가 다 이익이 없을까 해서이다. 비록 스승에게 의지하여 종지(宗旨)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만약 요의교(了義敎)와 상응하면 곧 행(行)에 의지하여도 되나 만약 불요의교라면 서로가 허락되지 아니한다. 마치 사자 몸속의 벌레가 사자 몸속의 살을 뜯어먹는 것과 같으며 하늘 악마와 외도만이 불법을 파멸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그때 어떤 선객(禪客)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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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것이 곧 부처의 마음[佛心]입니까?”
  그러자 스님이 말했다.
  “담ㆍ벽ㆍ기화 조약돌 등 무정의 물건[無情之物]도 다 부처의 마음이니라.”
  선객이 말했다.
  “경과는 크게 어긋납니다. 경에서 이르기를 ‘담ㆍ벽ㆍ기와ㆍ조약돌 등 무정의 물건을 여읜 것을 불성(佛性)이라 하느니라’고 하셨거늘 이제 온갖 무정의 물건도 모두 부처의 마음이라 하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과 성(性)은 별개입니까, 별개가 아닙니까?”
  스님이 말했다.
  “미혹한 사람에겐 별개이겠지만 깨친 사람에겐 별개가 아니니라.”
  선객이 말하였다.
  “경과는 또 어긋납니다. 경에서 이르기를 ‘선남자야, 마음은 불성이 아니니라. 불성은 바로 항상[常]한 것이지만, 마음은 바로 무상(無常)한 것이니라’고 하셨거늘, 이제 별개가 아니라 하시니 잘 모르겠습니다. 이 뜻은 어떤 것입니까?”
  스님이 말했다.
  “그대 스스로가 말에만 의지할 뿐 뜻에 의지하지 않은 것이다. 비유하면 추운 계절에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었다가 따스한 때가 되면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것과 같다. 중생으로서 미혹해 있을 적에는 성(性)이 엉겨서 마음[心]을 이루지만, 깨쳤을 때에는 마음이 풀려서 성을 이룬다. 그대가 결정코 무정의 물건이 마음이 아니라고 집착한다면 경에서 ‘3계가 오직 마음일 뿐이다[三界唯心]’라고 말씀하지 않았어야 한다. 때문에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마땅히 법계(法界)의 성품을 살펴야 한다. 온갖 것은 오직 마음으로 지은 것일 뿐이니라’고 하였다. 이제 또 그대에게 묻겠다. 무정의 물건이 3계 안에 있는 것인가, 3계 밖에 있는 것인가? 또 이것이 마음인가, 이것이 마음이 아닌가? 만약 마음이 아니라면 경에서 ‘3계는 오직 마음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어야 하며 만약 이것이 마음이라면 또 성이 없다[無性]고 말씀하지 않았어야 한다. 그대 자신이 경과 어긋났을지언정 나는 어긋나지 않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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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
  아호 대의(鵝湖大義) 선사가 조칙을 받아 궐내로 들어왔는데, 서울의 여러 대사들에게 물었다.
  “대덕(大德)이여, 그대들은 무엇으로써 도(道)를 삼습니까?”
  어떤 이가 대답하였다.
  “지견(知見)으로써 도를 삼습니다.”
  스님이 말했다.
  “『유마경(維摩經)』에서는 ‘법은 보고[見] 듣고[聞] 지각하고[覺] 아는 것[知]을 여의었다’고 하셨거늘, 어떻게 지견으로써 도를 삼습니까?”
  또 어떤 이가 말했다.
  “분별(分別)없는 것으로써 도를 삼습니다.”
  스님이 말했다.
  “경에서 말씀하기를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 제일의(第一義)에서 동요되지 아니하다’고 하셨거늘, 어떻게 분별없는 것으로써 도를 삼습니까?”
  황제(皇帝)가 물었다.
  “어떤 것이 곧 불성입니까?”
  스님이 대답하였다.
  “폐하(陛下)께서 하문하신 데에서 떠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혹은 마음 밝힐 것을 바로 지시하기도 하여 혹은 집착을 깨뜨리고 도에 들게 하기도 하면서 견줄 데 없는 변재로써 꼭 정해졌다는 집착을 떨어버리고 얻음이 없음을 꺾은 것이다.
  사공산 본정(思空山本淨) 선사가 서울의 여러 대덕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마음에 집착하지 말라. 이 마음은 모두가 앞의 티끌로 인하여 존재하는 것이니, 마치 거울 속의 형상이 없으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실유(實有)를 집착한다면, 곧 본래의 근원을 잃는 것이니, 언제나 제 성품이 없는 것이다.
  『원각경(圓覺經)』에서는 “허망하게 4대(大)를 잘못 알아 제 몸의 모양으로 삼고 6진(塵)의 인연 그림자를 제 마음의 모양으로 삼는다”라고 하셨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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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 『능가경』에서는 “마음과 인연을 환히 알지 못하면 두 가지 망상(妄想)이 생기고 마음과 경계(境界)를 환히 알면 망상이 생기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유마경』에서는 “법은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였고, 다시 세 가지 경을 인용하여 이것이 진실임을 증명했다.
  오조(五祖) 문하의 장엄(莊嚴) 대사는 일생 동안 제자들에게 오직 『유마경』에서 보적 장자(寶積長者)가 부처님을 찬탄한 게송의 끝 네 구절인 “세간에 집착 않음이 마치 연꽃과 같고/언제나 공적(空寂)한 행에 잘 들며/모든 법상(法相)을 통달하여 걸림 없어/공과 같아 의지할 바 없는 이에게 머리 조아립니다”라고 하는 것만 들어 보였다.
  그러자 학인이 물었다.
  “이것은 바로 부처님의 말씀이십니다. 화상 자신의 말씀을 얻고자 합니다.”
  스님이 말하였다.
  “부처님 말씀이 곧 나의 말이요, 나의 말이 곧 부처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초조(初祖)가 서천에서 와서 처음 선도(禪道)를 행하면서 심인(心印)을 전하려 하였으나 불경을 빌려야 했으므로 『능가경』으로써 증명을 삼아 교문(敎門)의 유래한 바를 알리어, 마침내 바깥 사람은 비방을 쉬고 내학(內學)은 받아 이어져서 후대 자손[祖胤]이 크게 흥성하고 불교의 가르침[玄風]이 널리 미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마음을 내어 배움을 시작하는 이로서 아직 스스로 깨닫기 이전에 만약 거룩한 가르침의 바른 종(宗)이 아니라면 무엇을 의지하여 수행하며 도에 나아가겠는가? 설령 스스로가 망령된 소견을 내지 않는다 하여도 역시 모두 삿된 스승을 만나리라.
  이 때문에 이르기를 “나의 눈은 본래 바른 것이었는데 스승 때문에 삿되게 되었다”고 하나니, 서천의 96종(種)의 소견에 집착된 무리가 모두 이런 무리들이다. 그러므로 알라. 나무는 먹줄이 아니면 곧게 되지 아니하고 진리는 가르침이 아니면 원만해지지 않는다.
  위에서와 같이 대략 두세 가지를 인용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곧 큰 선지식(善知識)이요, 만물을 벗어난[物外] 종사(宗師)이며, 참선하는 동산의 기린과 용이요, 조사 문중의 귀감(龜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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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가르침을 보이매 바람이 일고 번개가 걷히며 한 말씀을 드리우매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마른다. 제왕(帝王)이 스승으로 섬기고 조야(朝野)가 귀명(歸命)하며 총림(叢林)이 법칙으로 취하고 뒤의 학인이 이어받는 것이니, 끝내 자신의 소견을 따르면서 부처님 말씀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의심을 풀고 거짓이 떠나면 성(性)이 나타나고 종(宗)이 밝아진다. 하나하나가 경전의 글을 널리 인용하여 부처님 뜻을 골고루 나타내지 않음이 없다. 그 까닭에 영원히 후사(後嗣)에게 전해지고 가풍(家風)을 떨어뜨리지 아니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또 어찌 이제까지 이어지면서 창성할 수 있었겠는가? 법의 힘은 이와 같아서 증험은 헛된 것이 아니다.
  또 만약 불승(佛乘)을 연구하고 보장(寶藏)을 헤쳐 찾으려면, 낱낱이 모름지기 사라져 자기에게로 돌아가게 하고 말마다 참 마음에 명합되게 해야 한다. 다만 뜻 위의 글에 집착하여 말만을 따라 소견을 내지 말고 곧장 설명 끝의 뜻을 더듬어서 본래 근원에 계합하여야 된다. 그러면 스승이 없는 지혜[無師智]가 앞에 나타나고 천진(天眞)의 도가 어두워지지 아니하리니,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모든 법이 곧 마음이 자성(自性)임을 알면 지혜 몸을 성취하되 다른 이로 말미암아 깨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그러므로 언교[敎]는 도를 돕는 힘이 있음을 알라. 처음 마음 낸 이가 어찌 잠깐인들 잊을 수 있겠는가? 자세하게 살피면 법의 이익이 그지없다. 그래서 찾아 책으로 엮어 모았다.
  또 종지(宗旨)를 논한 것이 모두 돈기(頓機)에 머무를 뿐이니, 마치 해가 뜨면 높은 산을 비추고 빠른 말이 채찍의 그림자를 보고 달리는 것과 같다. 그 까닭에 단하(丹霞) 화상이 이르기를 “서로 만나면 집어 내지 아니하여도 뜻을 들면 문득 안다”라고 했으나, 지금 이 종경(宗鏡)에서는 오히려 뜻을 드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문득 스스로 알 것이다.
  그러므로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는 “뚜렷이 밝고 환히 아는 것은 마음의 생각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눈썹을 치키고 눈을 굴리면 이는 벌써 어긋난 것이니, 선덕(先德)의 게송에 “이는 곧 오히려 글귀를 더함이요/눈을 굴리면 곧 어긋난다./만약 조계(曹谿)의 뜻[旨]을 물으면/다시는 눈썹 치킴을 기다리지 아니한다”라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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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과 같다.
  이제 불승(佛乘)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실로 아직 알지 못하는 이를 위하여 임시 종경(宗鏡)으로써 참 마음을 돕고 드러낸다. 비록 글과 말을 걸어 놓았으나 묘한 뜻이 여기에 있으므로 아래로 중근기와 하근기를 거두어서 뭇 근기에게 다 미치도록 하여 다만 그 사람 각자에게 자기 이익을 돕도록 맡길 뿐이다.
  백 개의 하천이 비록 넘친다 하나 어찌 큰 바다가 널리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겠는가. 다섯의 큰 산이 스스로 높지마는 태양이 널리 비추는 것을 장애하지 아니한다.
  근기(根機)도 같지 않고 즐기는 것과 하려는 것도 같지 않으며 네 문[四門]에 들어가는 곳도 비록 다르기는 하나, 하나의 참된 소견을 보는 것에는 구별이 없다. 마치 새를 잡는 이가 한 코에 걸려들게 하되 한 코로써 그물이 될 수 없고 나라를 다스리는 이의 공(功)이 한 사람에게 있되 한 사람으로써 나라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저 『내덕론(內德論)』에서 이르기를 “한 방울의 물로는 국을 끓이지 못하고, 한 개의 나무로는 방을 만들지 못하며, 한 벌의 옷으로는 뭇 사람 몸에 맞추지 못하고, 한 개의 약으로는 서로 다른 병을 고치지 못하며, 하나의 채색으로는 무늬 놓은 수가 될 수 없고, 한 소리로는 거문고와 비파를 고르지 못하며, 한마디 말로는 뭇 선행을 권하지 못하고, 한 가지 계율로는 많은 과실을 막지 못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어찌 점돈(漸頓)의 다름을 괴상히 여기어 법의 문을 전일(專一)하게 하려고 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이르기를 “한 사람을 위하는 것처럼 많은 이들에게도 그러하고 많은 이들을 위하는 것처럼 한 사람에게도 그러하거늘, 어찌 하열한 이해[劣解]를 가진 어리석은 사람이 내는 국집된 소견과 같겠는가? 나의 이 걸림이 없는 넓고 큰 법의 문은, 마치 허공이 모양은 아니면서 모든 모양이 떨쳐 드러남을 거역하지 않는 것 같고 법성(法性)이 몸은 없으면서 모든 몸이 단박에 나타남을 장애하지 않는 것과 같다. 모름지기 6상의 이치[六相義]로써 모두 포섭하여야 단상(斷常)의 소견이 비로소 녹고, 10현의 문[十玄門]으로써 막힘없이 통하여야 거취(去取)의 망정(妄情)이 비로소 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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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만약 실로 하나를 들어도 천을 깨치는 큰 총지(總持)를 얻게 된다면, 일부러 언어[言詮]를 빌어서 수고로이 해석함이 없으리라. 배와 뗏목은 미혹한 이 나루를 건네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요, 길잡이는 길 잃는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모든 언어를 꿰뚫고 원종(圓宗)에서 보이고자 하는 것은, 그 모두가 문자(文字)의 성품을 떠나는 것이 곧 해탈임을 모르고, 일체제법(一切諸法)의 진실한 성품을 마음 밖에서 얻고자 문자를 세우는 사람에게, 도저히 문자로서 대치(對治)하여 그 진실을 보이는 것이다.
  만약 모든 법의 근원을 깨치면 곧 문자나 실 털끝만큼의 나타남도 보지 않으며, 온갖 모든 법이 바로 마음 자성임을 비로소 알면 대경[境]과 지혜가 막힘없이 통하고 색(色)과 공이 함께 없어진다. 이 뚜렷이 밝은 끝을 친히 증득하게 되어야 이 한 법의 평등한 때[時]에 든다.
  또 무슨 교(敎)이기 때문에 떠나야 하고 무슨 조도(祖道)이기 때문에 중히 여겨야 하며, 무슨 법이 돈(頓)이어서 취하여야 하고, 무슨 법이 점(漸)이어서 버려야 되는가? 이는 모두가 식심(識心)으로 멋대로 분별을 내는 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 까닭에 조사와 부처님이 선교방편(善巧方便)으로 은밀하게 권도의 문[權門]을 펴시고 널리 교승(敎乘)의 방편을 갖추어 회득(會得)하게 하나니, 갓 견성(見性)한 그 자리에서 무심(無心)해지면 이에 약과 병이 함께 소멸되고 교와 관[敎觀]이 같이 쉬게 된다.
  『능가경(楞伽經)』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모든 천승(天乘) 및 범승(梵乘)과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이/모든 부처의 여래승(如來乘)이니,/나는 이 모든 승(乘)과/유심(有心)을 굴리는 것까지 설명했지만/모든 승(乘)이란 구경(究竟)이 아니니라./만약 그의 마음 소멸하고 다하여/탈 것과 그리고 태울 이가 없으면/승(乘)을 세울 것이 없어지므로/나는 일승(一乘)이라 설명하겠지만/중생들을 이끌어 안내하려고/분별하여 모든 승(乘)을 말하느니라”고 하셨다.
  때문에 선덕이 이르기를 “하나의 흐림[瞖]이 눈에 있으면 천 송이 꽃이 허공을 어지럽히고, 하나의 망령이 마음에 있으면 항하의 모래[恒沙]만큼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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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나고 죽느니라”고 했다.
  흐림이 없어지면 꽃이 다하고 망령이 사라지면 참됨[眞]을 증득하며, 병이 나으면 약이 없어지고 얼음이 녹으면 물이 남는다. 신단(神丹)은 아홉 번을 굽고 무쇠를 별러 황금이 되듯 지극한 진리의 한 마디 말씀은 범인(凡人)을 바꾸어 성인을 이룬다. 미친 마음이 쉬지 않다가 쉬어버리면 그대로 보리(菩提)이며 거울이 깨끗하고 마음이 밝아지면 본래 이것이 부처니라.
  [문] 위에서 드러낸 것으로 이미 대의(大意)를 알았거늘, 무엇 때문에 아래에서 다시 널리 열며 풀이하는가?
  [답] 상근(上根)과 영리한 지혜는 전생에 익혔는지라 태어나면서부터 알아서 겨우 제목의 종(宗)이라는 한 글자만 보아도 벌써 부처의 지혜 바다 안에 온전히 들면서 섬세한 의심까지 영원히 끊고 단박에 큰 뜻을 밝히므로 곧 한 마디 말이 거의 다하지 아니함이 없고 그를 포섭하여 남는 것이 없다.
  만약 바로 1백 권의 끝까지 보고 항하 모래만큼 많은 뜻에 이르면 용궁(龍宮)의 보장(寶藏)과 축령(鷲嶺)의 금문(金文)도 설명은 다르나 다른 길이 아니다.
  그를 펴면 법계(法界)에 두루 하며 앞은 생략되고 뒤는 자세하나 이는 오직 한 마음일 뿐이다. 근본은 말고[本卷] 끝을 펴도[末舒] 모두가 동일한 경지요, 끝내 다른 뜻이 없고 막힘이 있어도 앞의 종(宗)이다.
  도무지 뜻이 미혹해서 망령되이 취사(取捨)를 일으켜 종이와 먹과 문자를 보고 책이 많은 것만을 싫어하며 고요하고 묵묵히 말 없는 것에 집착하여 요약된 것만을 기뻐한다면, 이는 모두가 마음이 미혹해서 대경을 따르며 깨달음을 저버리고 티끌에 합하는 것이다.
  움직임과 고요함[動靜]의 근원을 궁구하지 않고 하나와 많음[一多]이 일어나는 곳을 통달하지 못하여 치우치게 국집된 소견을 내면서 다문(多門)만을 두려워하는 것은, 마치 소승(小乘)이 법공(法空)을 두려워하는 것 같고 파순(波旬)이 뭇 선행을 조심하는 것과 같다.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을 통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모든 모양을 따라 굴리면서 있음과 없음[有無]에 떨어지는 것이니,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대열반의 한 글자와 한 글귀를 설명하는 것을 듣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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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 글자라는 모양을 짓지 않고 글귀라는 모양을 짓지 않고 듣는다는 모양을 짓지 않고 부처라는 모양을 짓지 않고 설명한다는 모양을 짓지 않으면, 이와 같이 되는 이치를 모양 없음의 모양[無相相]이라고 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해석하건대 만약 문자에 나아가서[卽]모양 없음[無相]이라 하면 이는 상견(常見)이요, 만약 문자를 여의고[離] 모양 없음이라 하면 이는 단견(斷見)이다. 또 만약 모양 있음의 모양[有相相]에 집착하면 이것도 상견이요, 만약 모양 없음의 모양에 집착하면 이것도 단견이다. 다만, 즉(卽)ㆍ이(離)ㆍ단(斷)ㆍ상(常)의 사구백비(四句百非)의 온갖 소견들이 없어져야만 그 뜻이 저절로 나타난다.
  종종경(宗鏡)에 드는 때가 친히 나타나게 되면, 무슨 문언(文言)과 식지(識智)로 설명하고 기술할 수가 있겠는가? 그 까닭에 선덕이 이르기를 “만약 경을 찾아 성품을 안다면 진여(眞如)를 들을 필요 없거니와/만약 법을 계족산(鷄足山)에서 찾는다면 산간의 가섭(迦葉)에게 물으라. 대사(大士)는 옷을 가지고 이 산에 있거니와/무정(無情)은 첫째 되기를 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하다면 이는 곧 어찌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마음을 운용하여 문자와 글귀 뜻의 이해를 짓겠는가?
  만약 종(宗)에 밝고 성(性)에 통달된 이면 비록 널리 헤치고 찾는다손 치더라도 오히려 한 글자의 모양도 보지 않을 것이며, 마침내 언어의 이해를 짓지 않으리라. 마음이 미혹해서 사물[物]을 세우는 이만이 종이와 먹이라는 소견을 낼 것이다.
  때문에 『신심명(信心銘)』에서는 “6진(塵)은 나쁘지 않아 도리어 정각(正覺)과 같나니, 지혜로운 이는 함이 없거늘[無爲]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가 속박한다”고 했다.
  이와 같이 통달하면 6진이 모두가 이는 참 종[眞宗]이요, 만 가지 법이 묘한 진리[妙理] 아님이 없다. 어찌하여 관견(管見)에게 국집하여 큰 뜻에 미혹할 것이며, 어찌 모든 부처님의 광대한 경계와 보살의 작용(作用)의 문을 알겠는가?
  그 까닭에 큰 바다의 용왕이 십천(十千) 가지의 질문[問]을 두었고, 석가문불이 8만 가지의 고달픈 인생의 문을 열었으며, 보혜 보살(普慧菩薩)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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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가지의 의심[疑]을 말하였고, 보현 대사(普賢大士)가 2천 가지의 요설변(樂設辯)으로 대답했다.
  『화엄경』의 보안법문(普眼法門)에서 “가령 어떤 사람이 큰 바다 만큼의 먹과 수미산 더미의 붓으로써 이 보안 법문의 1품(品) 중에서 1문(門)을, 1[문]중에서 1법(法)을, 1법 중에서 1의(義)를, 1의 중에서 1구(句)를 베껴 쓰려 하여도 그 조그마한 부분조차 할 수 없거늘 하물며 다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과 같다.
  또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깨달아 아는 바의 온갖 법은 마치 대지(大地)로 인하여 초목들을 나게 하는 것과 같고,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펴 말한 바의 것은 마치 손 안의 풀 잎사귀와 같다’고 하셨다”라고 한 것과 같다.
  다만 이미 말한 법의 가르침은 용궁에 가득 차 있을 뿐이다.
  용수(龍樹) 보살이 인간 세상에 나와 있는 1백 낙차의 분량을 잠깐 보았는데 서천(西天)에 있는 것은 그것의 백 분의 1도 못되고 동쪽 땅에서 번역된 것은 실로 말할 거리조차 못되거늘, 하물며 아직 말씀하지 못한 바의 법이겠는가?
  이야말로 그지없는 미묘한 뜻이라 얕은 지혜로써는 알 바가 아니다. 성기(性起) 법문을 어떻게 이해가 하열한 이로서 볼 수 있겠는가? 제비와 참새가 어찌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헤아리며 우물 안 개구리가 어찌 넓고 푸른 바다의 깊음을 알겠는가? 마치 사자의 큰 울음을 너구리로서는 낼 수 없는 것과 같고, 향상(香象)이 졌던 짐을 나귀로서는 이겨낼 수 없는 것과 같으며, 비사문(毘沙門)의 보물이 가난한 이와는 같을 수 없는 것과 같고, 금시조(金翅鳥)가 나는 것을 까마귀로서는 미칠 수 없는 것과 같다. 오직 망정에만 의지해서 소견을 일으키며 사물을 쫓으면서 뜻이 옮겨질 뿐이다.
  혹은 존재[有]를 말하면서 공(空)을 관계하지도 아니하고, 혹은 공을 말하면서 존재를 겸하지도 아니한다. 혹은 간략함[略]을 말하면서 많음 밖의 하나가 되기도 하고, 혹은 자세함[廣]을 세우면서 하나 밖의 많은 것이 되기도 한다. 혹은 침묵을 여의면서 말에 집착하기도 하고, 혹은 말을 여의면서 침묵을 구하기도 한다. 혹은 사(事) 밖의 이(理)에 의거하기도 하고 혹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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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밖의 사에 집착하기도 한다.
  자못 자재한 이 원종(圓宗)을 깨치지 못하면, 자세함은 펴도 많은 것이 아니어서 이는 바로 하나 안의 많은 것이요, 간략함을 드러내도 하나가 아니어서 이는 바로 많은 것 안의 하나이다. 공을 말하되 아주 없지[斷] 않아서 이는 곧 존재의 공이요, 존재를 논하되 항상하지[常] 않아서 이는 곧 공의 존재이다.
  혹은 설명이 있되 역시 이는 침묵 속의 설명이 되기도 하고, 혹은 설명이 없되 역시 이는 설명 속의 침묵이 되기도 한다. 혹은 이사(理事)는 상즉(相卽)하기도 한다.
  또한 이(理)는 바로 사(事)를 이루는 이(理)요, 이 사(事)는 바로 이(理)를 드러내는 사(事)가 되기도 한다. 혹은 이(理)와 왜냐 하면 일여(一如)로써 이여(二如)가 없는 참된 성품이 언제나 어울리게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혹은 사(事)와 사(事)가 상주했다는 것도 옳다. 왜냐 하면 이는 온전한 이(理)의 사(事)로서 하나하나가 걸림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혹은 이사(理事)가 다 아닌 것은, 곧 또한 온전한 사(事)의 이(理)로되 사(事)의 소의(所依)가 아니고 능의(能依)가 아니어서 진제(眞諦)가 숨지 않았기 때문이요, 온전한 이(理)의 사(事)로되 이(理)의 능의가 아니고 소의가 아니어서 속제(俗諦)를 깨뜨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하다면 존재하고 없어짐이 하나의 즈음[際]이요, 숨음과 드러남이 같은 때이다. 마치 보안(普眼)의 법문을 밝히는 것과 같아서 모두 이는 진리 안의 이치요, 대천(大千)의 경권(經卷)과 같아서 마음 밖의 글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때문에 경에 말씀하기를 “하나의 법이 능히 한량없는 이치를 낸다”고 하셨다. 이는 성문과 연각으로서 알 바가 아니요, 단공(但空)의 조화를 저버리는 설명과 편고(偏枯)의 결정된 소견과는 같지 아니하다.
  이제 이 그지없는 미묘한 뜻으로 하나의 법을 드러내서 권속들이 따라 생기고 원만한 성종(性宗)으로 하나의 문을 들어서 모든 문(門)이 널리 모인다. 순일하지도 않고 잡다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많은 것은 아니다. 마치 다섯 가지 맛으로 그 국을 조화시키고 여러 가지 채색으로 그 수(繡)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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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루며 뭇 보물로 그 광을 이루고 백 가지 약으로 그 환(丸)을 만드는 것과 같다.
  가와 겉이 막힘없이 통하고 뜻과 맛이 두루 갖추며, 은밀함을 찾고 미묘함을 들춰내어 종경(宗鐘) 안의 것을 다하며,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뒤섞여 녹고 원인과 결과가 걸림이 없으며, 인아(人我)와 법아(法我)가 둘이 없고 처음과 뒤가 같은 때이다.
  한 문을 들면 모두가 그지없는 법계(法界)를 뚜렷이 껴잡아서 안도 아니요 바깥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고 많은 것도 아니다. 그를 펴면 거쳐 들어감이 겹겹이요, 그를 말면 참 문이 고요하고 고요하다.
  『화엄경』에서는“사자좌(師子座)의 장엄구(莊嚴具) 안에서 각각 한 부처님 세계의 티끌 수 같은 보살의 몸이 구름같이 나온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의보ㆍ정보ㆍ인아ㆍ법아가 걸림이 없는 것이다. 또 “부처님의 눈썹 사이에서는 승음등불(勝音等佛) 세계의 티끌 수 같은 보살이 나온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원인ㆍ결과ㆍ처음ㆍ뒤가 걸림이 없는 것이다. 내지 세계 국토의 작은 티끌에도 각각 그지없는 지혜와 덕이 갖추어져 있고, 털구멍의 몸 부분에도 낱낱이 광대한 법문을 껴잡아 들인다.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기이하고 생각하기 어려운가? 이것은 한 마음이 융합하면 곧 본래 그런 것이다. 요점을 들어 말하면 온갖 그지없는 차별된 부처 일이 모두가 모양 없음의 참 마음을 여의지 않으면서 존재할 뿐이다.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말씀하기를 “부처는 매우 깊은 참 법성(法性)에 머무르고/적멸(寂滅)하고 모양 없어 허공과 같되/제일의 진실 이치 안에서/갖가지 행할 바의 일을 나투어 보인다./하는 일은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일이니/다 법성에 의지하여 존재하게 된다./모양과 모양 없음이 차별 없나니/구경(究竟)에 들어야 모두 모양이 없다”고 하셨다.
  또 『섭대승론(攝大乘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곧 모든 삼마지(三摩地)는/대사(大師)께서 말씀하되 마음이라 하셨다./마음의 채색으로 그리기 때문이니/마치 짓는 바의 일들과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범인과 성인이 지은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는 인연으로 생긴 것이다.
  이 한 생각의 마음이 찰나(刹那) 동안 일어나는 때에 곧 3성(性)과 3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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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無性)의 여섯 가지 이치[六義]가 갖추어진다. 한 생각의 마음은 바로 연기(緣起)의 법이요 바로 의타기(依他起)이며, 뜻에 실체가 있다고 헤아리면 곧 이는 변계소집(遍計所執)의 바탕이며, 본래 공하고 고요하면 곧 원성(圓成)이다. 곧 3성에 의하여 3무성을 설명하기 때문에 여섯 가지 이치가 갖추어진다.
  만약 한 생각의 마음이 일어나면 이 여섯 가지 이치가 갖추어지며 곧 온갖 법이 갖추어진다. 온갖 진제ㆍ속제며 만 가지 법은 3성과 3무성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법성론(法性論)』에서 이르기를 “일어나고 사라짐이 있는 것은 모두가 성(性)이 아니다. 일어남에도 일어남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비록 일어난다 하더라도 항상 하지는[常] 아니하다. 사라짐에도 사라짐의 성품이 없으므로 비록 사라진다 하더라도 아주 없지는[斷] 아니하다. 만약 성품이 있다고 한다면 네 가지 소견[四見]의 그물에 빠지게 된다”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상(相)을 찾으면서 성(性)을 추구하면 모든 법의 무성(無性)을 보며, 성을 찾으면서 상을 추구하면 모든 법의 무상(無相)을 본다. 그러므로 성과 상을 서로 추구하면 모두가 다 성품이 없거니와, 만약 성품이 있다고 고집하면 네 가지 소견의 사면 숲에 떨어진다. 만약 성품이 공한 것을 환히 알면 한 마음의 바른 길에 돌아간다”고 했다.
  때문에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스스로가 깊이 자성(自性)이 없는 진실한 법에 들어가며, 또한 다른 이로 하여금 자성이 없는 진실한 법에 들게 하면 마음이 안온하게 된다”고 하셨다. 이로써 미묘하게 통달하여야 비로소 이 종(宗)에 들며, 곧 물건마다[物物] 진리에 명합하고 말마다[言言] 뜻에 계합한다.
  만약 아직 친히 살피지 못하고 뚜렷한 기연(機緣)이 발생되지 않았다면 말하게 되어도 잃게 된다. 어찌 4구(句)로써 취하여 6정(情)으로 알 바이겠는가? 다만 조사의 가르침과 아울러 정혜(定慧)의 쌍조(雙照)를 베풀며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면 허물이 없을 뿐이다.
  자기의 앎을 굳게 고집하여 믿지 않음이 있으면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장애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다른 이가 배우는 길을 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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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열 가지의 물음으로 기강(紀綱)을 정하겠다.
  환히 성(性)을 깨달아 봄이 마치 낮에 빛깔을 본 것 같고 문수(文殊) 등과 같을 수 있는가?
  인연을 만나 경계를 대하면서 빛을 보고 소리를 듣고 발을 들고 발을 내리고 눈을 뜨고 눈을 감되 모두가 종(宗)을 밝히고 도(道)와 상응할 수 있는가?
  일대시교(一代時敎)와 위로부터의 조사의 말과 글귀를 열람하되, 깊은 것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모두가 진실로 알고 의심이 없을 수 있는가?
  차별된 어려운 물음과 갖가지 힐난으로 인하여 네 가지 변재[四辯]를 갖추어서 모두 다른 이의 의심을 결단할 수 있는가?
  언제 어디서나 지혜로 비추어서 걸림이 없고 생각생각마다 원만하게 통하여, 하나의 법도 장애함을 보지 않고 아직 한 찰나 동안의 잠깐도 사이가 끊어진 일이 없게 할 수 있는가?
  온갖 거역함과 따라줌[逆順]ㆍ좋음과 미움[好惡]의 경계가 앞에 나타날 적에 간단없이 모두 알아서 깨뜨릴 수 있는가?
  백 가지 법의 밝은 문과 마음 경계 안에서, 낱낱이 미세한 체성(體性)과 근원의 일어나는 곳을 보고 생사와 근진(根塵)에게 어지럽힘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가?
  네 가지 거동 안의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데서 흠앙하여 받들고 공경히 대하며, 옷 입고 밥 먹고 잡고 짓고 실지로 베풀어 행하는 때에 낱낱이 가려서 진실할 수 있는가?
  부처님이 계시고 부처님이 안 계시고 중생이 있고 중생이 없고 혹은 칭찬하기도 하고 헐뜯기도 하고 옳다고 하고 그르다고 하는 설명을 듣고 한 마음도 동요하지 않을 수 있는가?
  차별된 지혜를 듣고서 모두 성상(性相)을 밝게 통달하고 이사(理事)를 함께 회통하여 걸림이 없으면서 하나의 법도 그 근원을 비추어 보지 아니함이 없을 수 있으며, 그리고 천 성인[千聖]이 세간에 출현할 것까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실로 이러할 공(功)을 얻지 못했다면, 잘못된 머리와 속임수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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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일으켜 스스로가 만족한 줄 아는 뜻을 내어서는 안 된다.
  바로 모름지기 지교(至敎)를 널리 헤치고 선지(先知)에게 널리 물어서 조사와 부처의 자성(自性)의 근원에 사무쳐서 배움이 끊어지고 의심이 없는 자리에 도달하여야 한다.
  이 때라야 비로소 배움을 쉬고 유심(遊心)이 쉬게 되며, 혹은 스스로가 판단하여도 선관(禪觀)이 상응하기도 하고 혹은 다른 이를 위한다면 방편으로 열어 보이게 되리라.
  설령 두루 법계(法界)에 참여하거나 널리 여러 경전을 궁구할 수 없다 하여도 종경(宗鏡) 안의 것을 자세히 보기만 하면 저절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야말로 모든 법의 요점[要]이요, 도에 나아가는 문이다.
  마치 수절하는 어머니로써 그의 아들을 알고, 얻어진 근본으로써 그의 끝을 알며, 그물을 잡아당겨 그물의 코와 코를 모두 바르게 하고 옷깃을 끌어당기면 올과 올이 함께 따라 오는 것과 같다.
  또 사자의 힘줄로 거문고 줄을 만들어 한 번 타면 온갖 다른 줄까지 모두 다 끊어지고 부서지는 것처럼 이 종경(宗鏡)의 힘 역시 그러하여 그를 들면 모든 무리가 빛을 잃고 그를 나타내면 모든 문이 자취를 감춘다. 이 하나의 법칙으로써 천 갈래 길을 부순다면 어찌 고달프게 관문과 나루를 건너며 따로 지름길을 내야 하겠는가?
  그 까닭에 지공(志公)이 노래하기를 “6적(賊)으로 빛이 숨고 티끌에 섞인지라[和光同塵]/힘 없으면 크게 핑계하기 어렵네/안에서 알음[解] 내도 공이요 무상(無相)이라/대승(大乘)의 힘이라야 물리칠 수 있으리”라고 했다.
  오직 자세히 열람하다가 뜻을 얻는 때만이 이 글이 구경(究竟)이요 진실임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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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通達無我法者
글쓴이 : CD굽던노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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