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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병통에서 본 간화수행법
- 『대혜서』를 중심으로 -
혜달 / 동국대학교 선학과 강사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간화병통내용과 분류
1. 知解
2. 安住
3. 引證
4. 待悟
Ⅲ. 간화수행법
1. 參究話頭 斷絶思量分別
2. 提起疑情 大死一番
3. 打成一片 看破疑團
4. 了事漢
Ⅳ. 맺음말
국문 초록
본 논문은『대혜서』에 언급되어 있는 간화병통과 그 대치법을 통해서 간화수행법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대혜서』에 보이는 열 가지 간화병통은 그 내용에 따라 화두를 이해하려 하거나 알아맞히려 하는 알음알이인 ‘지해’, 아무 일 없이 고요한 것이 곧 깨달음인줄 알고 그 곳에 안주하는 ‘안주’, 경전이나 조사언구로 화두를 분석하고 인증하려는 ‘인증’,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화두를 참구하는 ‘대오’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해, 안주, 인증, 대오 등은 생사의 언덕에서 조금도 힘을 쓰지 못하는 촉루나 정식의 일로, 이 모두는 간절한 의심을 일으키지 않음으로 인해 나타난 병통이며, 화두공부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대혜는 대치법으로 병통이 일어난 곳을 향해 화두참구 할 것을 제시한다. 화두위에서 의심을 일으켜, 의정을 끊어지지 않고 순일하게 하여 순숙되면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는 타성일편 경지에 이르며 일 마친 대장부가 된다.
대혜 간화선수행은 화두참구에서 병통과 그 해결방법이 모두 이루어진다. 병통을 다스리는 약으로 화두는 물론이고 화두위에서 올바른 의정, 이 둘이 어긋나지 않고 순일했을 때 병통은 대치된다. 화두와 의정과 간절하고 지극한 마음은 간화선수행에 불가분리(不可分離)의 주요삼대요소이다. 이 중 하나만 어긋나도 이상적인 간화수행은 기대할 수 없다.
*주제어
간화선, 화두, 간화병통, 간화선수행법, 대혜종고
Ⅰ. 들어가는 말
송대 선종은 문자로서 선의(禪意)를 표현, 전달하는 문자선이 성행한다. 당시 선종은 묵조선자들이 수증불이의 수행이 아닌 고요한 곳에서 오직 자신의 안일함에 빠져있거나 은신처로 이용하는 등의 폐단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폐단들은 불립문자에 철저하고 시간과 장소 등 환경적 요인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오히려 일상생활 중 시끄럽고 고요함에 무관하게 한 결 같이 화두 참구할 것을 강조하는 간화선을 성행시키는데 적지 않은 도움으로 작용된다. 어떠한 연유를 말미암든 대혜의 묵조선비판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두 선법의 양립성장을 불허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대혜가 간화선만이 불조의 혜명을 잇는 선법임을 거듭 강조하지만 간화선수행자에게서도 잘못된 화두참구로 인한 선병이 일어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숙지하고 있는 ‘간화십종병통‘이다. 대혜는 이 대치법으로 화두위에서 올바른 의심 일으킬 것을 거듭 제시한다.
본 논문은『대혜서』1]를 중심으로 화두참구 중 일어나는 병통과 그 대치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는 먼저『대혜서』에서 볼 수 있는 간화병통을 지해, 안주, 인증, 대오 등 넷으로 분류한 후, 각각의 병통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경계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 병통에 대한 대혜대치법에서 간화수행법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1]『大慧普覺禪師語錄』 25권-30권에 수록. 石井修道의「大慧語錄の基礎的硏究」『駒澤大學佛敎學部硏究紀要』31-33호, (1973-1975년)논문에 의거하면,『대혜서』의 최초 판본은 孝宗乾道 2년(1166)에 俓山 妙喜菴에서 開版되었으며, 最古의 宋板은 현존하지 않는다. 日本 天理大學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覆宋板이 현존하는 最古의 판본이다.『大正藏』에 수록되어 있는 『대혜서』에는 42位 僧 俗에게 보낸 60封의 書信이 수록되어 있다. 본 논문은『大正藏』에 수록되어 있는『大慧書』를 저본으로 한다.
Ⅱ. 간화병통내용과 분류
『대혜서』에는 화두 참구시 일어난 병통과 그 대치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먼저 간화병통과 관련된 내용부터 살펴보자. 본 논문 2장 말미에『대혜서』에 언급 된 간화병통을 도표로 정리하였다. 이에 의거하면 “알음알이가 장애가 되어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는 富樞密의 서신에,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바로 도를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는 답을 한다. 아울러 대혜는 8종의 선병을 경계시킨다.2]
2]『大慧語錄』 卷26 (『大正藏』 47), p.921하.
"不得作有無會。不得作道理會。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不得向揚眉瞬目處?根。不得向語路上作活計。不得颺在無事甲裏。不語向擧起處承當。不得向文字中引證"
대혜가 富樞密에게 보낸 서신은 총 3통이다.『大慧書』중 십종병통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富樞密에게 보낸 서신에서 보인다. ‘참으로 없는 無가 있다고 헤아려서는 안 된다(不得眞無之無卜度)‘를 제외한 기타 9종의 간화병통이 언급된다.
대혜가 陳少卿에게 보낸 서신은 모두 2통이다. 무자화두를 참구하여 일체분별을 일도양단할 것과 화두참구시 일어나는 6종의 간화병통을 언급한다.
대혜가 呂舍人에게 보낸 3통의 서신중에는 4종의 간화병통이 언급된다. 또한 조주의 무자가 아닌 ‘乾屎橛話’참구를 제시한다. 「答呂郞中」에서도 ‘乾屎橛話’참구할 것과 함께 3종의 간화병통을 언급한다.
「答宗直閣」에서는 일체의 차별심과 분별심이 일어난 곳에 무자화두 참구할 것을 제시한다. 하지만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 갖는 것을 거듭 경계한다.
「答張舍人壯元」에서는 7종의 간화병통이 언급되고 있으며,「答湯丞相」에서는 등오를 경계한다.
간화병통에 관한 내용은『대혜서』전반에 걸쳐 중복되어 있으며 이를 종합하여 열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간화십종병통‘이라 일컫는다.
『대혜서』의 간화십종병통은 정식활동의 빈도와 병통내용에 따라 知解(理會), 安住, 引證, 待悟 등으로 분류된다. 필자는 먼저 ‘간화십종병통’을 네 항목으로 분류한 후 각 병통의 의미와 경계한 이유, 이에 대한 대혜의 대치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知解 (理會)
대부분의 간화병통은 화두를 이해하려하거나 알아맞히려하는 알음알이에 있다. 그렇다면 간화선은 알음알이 자체를 장애로 보는 것인가? 富樞密과 왕래한 서신을 보면 알음알이 자체가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받는다고 하는 마음이 장애가 된다. 陳少卿과의 서신에서도 진정화상의 말을 인용하여3] 마음으로 알음알이 일으키는 것을 경계한다. 또한 황벽선사의 말을 인용하여 공부를 함에 가장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이 알음알이를 짓지 않는 것이라 강조한다.4] 이처럼 화두참구에서 알음알이는 도에 미(迷)하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대혜는『대혜서』전반에 걸쳐 이를 거듭 주의시킨다.
3]“평상시 오직 자신의 마음 쓰기를, 자기 마음의 변화를 잡아서 바로 쓸지언정, 옳고 그름을 묻지 말라. 마음으로 헤아리고 사량하는 것은 이미 잘못된 것이다.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으면 낱낱이 천진이며, 낱낱이 묘명이며, 하나하나가 연꽃이 물에 젖지 않는 것과 같아서, 마음이 청정하여 저를 초월하였다.
(『大慧語錄』 卷26 (『大正藏』 47), p.923상중. ”眞淨曰。佛法至妙無二但未至於妙。……一一如蓮華不著水。心淸淨超於彼" )
4] "선종은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사람들에게 알음알이를 내라고 가르친 적이 없고, 오직 도를 배우라 가르쳤으며, 이것도 일찍이 사람을 접인 하는 말로, 도는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 첫째 알음알이를 짓지 말아야 한다. …이 도는 천진하여 본래 이름이 없으나, 다만 세인이 알지 못하고 미혹하여 정식 가운데 있기 때문에, 諸佛이 나오시어 이 일을 설파하셨으며, 너희들이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방편으로 도라 이르셨으니, 이름을 지켜서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하셨다.(『大慧語錄』 卷25 (『大正藏』 47), p.918중. “不見黃檗和尙云。……不可守名而生解也。”)
간화십종병통 중 지해(知解)에 해당되는 병통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경계한 이유를 살펴보자.
있다는 것이나 없다는 것으로 이해(하려)해서는 안 된다(不得作有無商量).
화두를 있다 혹은 없다로 헤아려서는 안 되며 평상시 늘 화두를 들되 항상 화두 안에 깨어있어야 한다. 이처럼 화두와 떨어지지 않고 공부를 지어가면 스스로 보게 된다. 이는 화두와 내가 일체가 되어 여일하게 공부할 것을 제시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네가 반연하는 마음으로 법을 듣기에, 이 법도 또한 반연한다." 한 것과 "至人은 꿈이 없다."라고 한 것은 있다 혹은 없다의 ‘없다’가 아니다. 이것은 꿈과 꿈 아님이 하나임을 말한 것이다.5] 그러므로 꿈과 꿈이 아니라는 상대적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알음알이를 짓지 말고 "온갖 있는 것을 비우려고 할지언정, 온갖 없는 바를 절대 채우려 하지 말라." 는 이 언구의 참 의미를 알아 일생 참학의 일을 마쳐야한다.6]
유와 무에 떨어지지 말고 유무일여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조주의 ‘구자무불성화‘를 있다 혹은 없다 등 상대적 개념으로 이해하려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만일 있다 혹은 없다로 헤아리면 화두위에서 더 이상 의심을 일으킬 수 없어 공부진전이 끊어지는 것을 주의시킨 것이다.
여기에서의 있다 혹은 없다는 무자화두참구시 일어나는 병통인가? 아니면 다른 화두참구시에도 나타나는 병통인가? 공교롭게도 ‘乾屎橛話’ 들것을 제시한 呂舍人과 呂郞中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이를 경계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5]『大慧語錄』 卷29 (『大正藏』 47), p.935하.
"黃面老子云。汝以緣心聽法。此法亦緣。謂至人無夢。非有無之無。謂夢與非夢一而已。"
6]『大慧語錄』 卷25 (『大正藏』 47), p.918하.
"老龐云。但願空諸所有。切勿實諸所無。只了得這兩句。一生參學事畢。"
참으로 없는 무가 있다고 헤아려서는 안 된다(不得作眞無之無卜度).
있다 혹은 없다로 헤아리는 것에서는 벗어났으나 참으로 없는 무가 있다고 여기는 병통이다. 이것은 참된 무가 실제로 존재함을 단정하고 유와 무를 떠난 진무(眞無)가 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실(實)의 진무를 참구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를 경계한 것이다.
도리(이치)로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不得作道理會).
富樞密과 張舍人에게 보낸 서신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도리로 알려 해서는 안 된다’와 ‘문자로 인증해서는 안 된다.’ 이 두 병통에 어떤 내용차이가 있는지 구분이 필요하다.7]
화두에 어떤 현묘한 도리가 있다고 생각하면 화두참구는 진전이 없고 알음알이만 더하므로 이를 경계한 것이다. 대혜는 이치의 길에서는 이 일을 이룰 수가 없으며 이치의 길이 없는 그곳이 바로 자신의 신명을 놓아 버릴 곳임을 강조한다.
7] 『간화선』에는 "이치로 이해하지 말라." "화두에 무슨 현묘한 도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화두를 들 때 특별한 이론적 토대에 근거해서 화두를 이러니저러니 해석하고 분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화두를 들 때는 이치로 모색하는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원융,『간화선』, (서울: 장경각, 1999), p.253).
『간화정로』에는 "도리로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말로 보일 수도 없고 분별로도 알 수 없는 묘한 도리, 즉 현묘한 도리로 도를 삼을까 싶어 도리로 앎을 짓지 말라고 하였다"(월암,『간화정로』, (부산: 현대북스, 2006), p.413).
"문자로 인증해서는 안 된다."에 대한『간화선』의 해석은 "문자를 끌어와 증거삼지 말라", "경전이나 어록들의 문자를 끌어들여 입증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경전이나 어록을 끌어들여 화두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고 해석하거나 자기주장을 펴는 것도 병이다." (원융, 앞의 책, p.255)고 설명하고 있는데『간화선』에서는 이 두 병통에 대한 설명을 유사하게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반면 『간화정로』는 "문자 가운데 증거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는 해석과 함께 "도안이 명백하여 가슴 가운데 솟아난 것이라도 정세히 하여 간택해야 하거늘, 고인의 책 가운데 있는 것으로 인증하려고 하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월암, 앞의 책, p.414)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비교적 두 병통이 구분이 되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분별의식으로 헤아려서는 안 된다(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
옛 조사들의 공안은 참구자를 바로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 준다. 화두를 사량으로 분별하는 것은 사구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망상만 더한다. 때문에 대혜는 분별의식단절을 거듭 강조한다. 화두위에서 의정이 순일한지 그 여부에 따라 사량분별 단절여부도 결정된다. 대혜는 여기에서 화두참구에는 어떠한 분별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눈썹을 움직이거나 눈을 깜빡 거리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된다(不得向揚眉瞬目處垜根).
이 병통에 대한 직접적인 경계는 富樞密, 陳少卿, 張舍人에게 보낸 서신에서 보인다.
양미(揚眉)는 ‘눈썹을 휘날리다.‘라는 글자 그대로의 해석보다 눈썹 혹은 눈 주위의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러므로 ‘눈썹을 움직이다.‘의 해석이 본의에 더욱 가깝다. 조사가 눈을 깜빡거리거나 눈썹을 치켜뜨는 등의 동작으로 드러낸 격외도리에 참구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 움직임에 머물러 분별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동작으로 보여주는 격외도리는 알음알이로는 알 수 없다. 이것은 스스로 공부해서 힘을 얻은 자들만이 주고받는 진리의 대화이며, 또한 진리표현방식이다. 여기에는 어떤 지견도 붙을 수 없다.
말에서 살 궁리를 찾아서는 안 된다(不得向語路上作活計).
富樞密 陳少卿에게 보낸 서신에서 보인다. 화두위에서 의심을 일으켜 공부를 지어가지 않고 화두언구에 집착하여 분별하는 것이다. 화두의 의미를 분석하고 조사의 말을 이리저리 연구하는 것을 경계 한 것이다.
화두 든 곳을 향해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不得向擧起處承當).
화두위에서 의심을 일으키지 않고 이를 사량하고 헤아리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이성(理性), 경교(經敎), 조사언구(祖師言句), 견문(見聞), 거동(擧動), 생각위에서는 이 일을 이룰 수 없으니 모두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알음알이가 곳곳에서 반연하지만 오직 반야위에서는 반연하지 못한다는 백장선사(749-814)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의 심식이 세간의 여러 가지 일에 반연하는 것을 되돌려서 반야위에 두면 금생에 깨닫지 못하더라도 임종 시 악업에 끌리지 않고 내생에는 금생원력에 따라 이를 수용한다고 한다. 화두위에서 일어난 알음알이는 불꽃위에 붙지 못하는 파리와 같아서 화두위에는 어떠한 알음알이도 붙지 못함을 강조한 것이다.8] 이것은 화두가 알음알이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대혜는 화두참구가 이를 다스리는 최고의 양약이라 한다.
알음알이는 병통이 되는가? 깨달음의 도량이 되는가? 대혜는 정명의 말을 인용하여 생사의 근본이 되는 알음알이를 대함에 마구니와 보살의 차이를 든다.9] 경계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차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경계에 마음이 없기 때문에 갖가지 차별경계에 움직임이 없다. 화두위에서 알음알이 의식 활동은 허락하지 않지만, 알음알이로 벗을 삼고 방편을 삼아 알음알이 그 자체를 해탈의 도량으로 하여 모든 불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이 대혜의 견해이다.
또한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헤아릴 바가 아니기 때문에 헤아리면 곧 화(禍)가 일어난다. 화두를 사량분별로 이해하는 것은 화두위에서 올바른 의심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알음알이 의식 활동만 계속될 뿐, 공부진전이 없는 것은 물론 화두참구가 중단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때문에 대혜는 이에 대한 경계의 끈을 놓지 않는다. 간화병통 대부분이 지해에 해당된 것은 알음알이가 화두참구 시 가장 큰 장애라는 것을 보여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8]大慧語錄』卷25 (『大正藏』47), p.919b. 8]?
"先聖明明有言。喩如太末蟲。處處皆泊。唯不能泊於火焰之上。衆生亦爾。處處能緣。唯不能緣於般若之上。"
9] "마구니는 생사를 좋아하고, 보살은 생사를 버리지 않으며, 외도는 모든 견해를 좋아하고, 보살은 모든 견해에 움직이지 않는다."(『大慧語錄』卷26 (『大正藏』47), p.921b. "又淨名云。衆魔者樂生死。……菩薩於諸見而不動。")
2. 安住
아무 일 없는 곳에 빠져있어서는 안 된다(不得坐在無事甲裡).
아무 일 없이 고요한 것이 곧 깨달음인줄 알고 그 곳에 안주 한 것을 경계한 것이다.
대혜는 용맹정진으로 공부가 순일무잡 한 富樞密을 칭찬한다. 그러나 공사를 보느라 바쁜 일상생활에 화두와 상응하지 못하거나 오매일여(寤寐一如)하지 못하더라도 절대 공적함에 깊이 빠져서는 안 된다고 경계한다.10] 富樞密에게 보낸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신과 陳少卿에게 보낸 답신에서는 도리어 시끄러운 곳에서 화두를 살피라 한다. 劉通判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시끄럽고 고요함에 한결같이 화두참구 할 것을 강조한다. 대혜가 시끄러운 곳을 제시한 것은 공적함에 빠져 있는 것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어 고요하고 시끄러움에 한결같기를 바란다면 조주의 무자를 뚫으면 이 둘이 서로 방해롭지 않음을 알게 된다고 한다.11] 이처럼 대혜간화선은 주변여건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수행을 강조한다. 당시 묵조선병폐인 무사선과도 관련 있다.
10]『大慧語錄』卷26 (『大正藏』47), p.921c.
“能二六時中熾然作爲之際。必得相應也未。寤寐二邊得一如也未。如未。切不可一向沈空趣寂。”
11]『大慧語錄』卷27 (『大正藏』 47), p.926하.
“却而今要得省力靜鬧一如。但只透取趙州無字。忽然透得。方知靜鬧兩不相妨。”
3. 引證
문자로 증거를 삼아서는 안 된다(不得向文字中引證).
徐顯謨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이 일은 언구와 알음알이가 붙을 수 없는 곳임을 분명히 한다.12] 문자를 찾아 인증하거나 화두를 주해해서 뜻이 딱 맞아 떨어지더라도 이 모두는 죽은 사람의 살림살이일 뿐이다. 이것은 경전이나 조사언구로 화두를 분석하고 인증하려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화두는 문자로 인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화두에서 대의심을 일으켜 심의식의 길머리를 단칼에 두 동강이 내라는 것이다. 이 병통에 대한 경계는 당시의 문자선 성행과 무관치 않다.
12] "이 사이엔 가는 실 터럭만큼도 용납하지 못한다. 부득이해서 곧 바로 끊는다고 하지만, 이미 굽어버린 것이며 알아차린다는 말도 이미 빗나가버린 것이다. … 고덕이 이르기를 다만 가는 털만큼이라도 있으면 곧 번뇌이다.(『大慧語錄』卷29 (『大正藏』 47), p.937하.“據實而論。……古德云。但有纖毫卽是塵”)
4. 待悟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不得將心等悟).
간화십종병통 중 서신에서 가장 많이 경계한 항목이 등오이다.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참구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깨달음에 들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자기 집안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사는 곳을 찾아 묻는 것과 같다. 오로지 생사 두 글자를 코끝에 붙여 잊어버리지 않고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참구할지언정 깨닫고 깨닫지 못함은 상관치 말라는 것이다. 소득심을 가지고 도를 배우면 망상이 없는 가운데 참으로 망상하는 것이 되며 깨닫고자 하는 생각이 장애가 되어 영원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주의시킨다.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도를 가로막는 알음알이이며 생사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화두참구를 제외한 기타는 상관치 말라는 것이다.
간화병통 중 대혜는 대오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묵조선에서 간화선을 대오선이라 비판한 것에 비추어 봐도 대오는 당시 적지 않은 간화선자가 가진 병폐였던 것 같다.
이상에서 간화십종병통을 지해, 안주, 인증, 대오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화두참구가 생명인 간화선은 화두위에서 의심 일으키는 것을 매우 중시한다. 지해, 안주, 인증, 대오 등은 생사언덕에서 조금도 힘을 쓰지 못하는 촉루나 정식의 일이며 이 모두는 화두위에서 간절한 의심을 일으키지 않음으로 인해 나타난 병통이다. 화두공부 진전에 큰 장애가 되기 때문에『대혜서』전반에 걸쳐 직, 간접으로 경계한다. 이에 대한 공통적인 대치법은 오로지 화두위에서 간절한 의심 일으키는 것이다.
아래의 도표는 10종 병통에 대해『대혜서』중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Ⅲ. 看話禪 修行法
선지식의 일구에 깨치지 못하여 화두참구수행을 한다. 그렇다면 화두참구에서 확철대오까지 소요시간과 무관하게 이를 과정으로 봐야한다.『대혜서』를 보면 깨닫기까지 소요시간은 과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분류하여 논해 보고자 한다.
1. 參究話頭 斷絶思量分別
대혜는 모든 생사심을 끊는 방편으로 화두참구를 제창한다. 특히 조주의 무자화두가 대표적인 방편이다.
송대 문자선 성행은 당대에 이미 형성 된 문인들의 참선풍토가 송대에 이르러서 더욱 성행한 것과 관련이 깊다. 대혜는 화두참구에서 공안이 가진 본래 의의를 찾으려 했으며 송대 선종의 병폐를 간화선수행으로 개선하고자 한다.
가장 먼저 대중에게 ‘구자무불성화’참구를 실행한 선사는 五祖法演(?-1104)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혜로 인해 ‘무자’는 간화수행의 대표적인 화두가 되며13] 무자화두참구는 대혜간화선수행의 특징이기도 한다.
13] 대혜에 이르러 조주의 무자공안는 간화선의 대표적인 화두가 된다. 그러나 中峯明本에 이르러서 자주 등장하는 화두는 麻三斤, 柏樹子, 須彌山, 平常心是道, 雲門顧, 無字話頭 등이며 元,明 間에는 ‘萬法歸一, 一歸何處‘ 화두를 明의 天琦本瑞禪師는 ‘誰‘자 參究를 제창하고 있다.
明末淸初에는 정토법문의 성행으로 선종공안을 참구하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있는데, 예를 들면 蓮池大師는‘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간하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行住坐臥에‘阿彌陀佛‘一句를 여의지 않고 함께하는 것이 淸代의 가장 보편적인 修行門이 되고 있다.
먼저 대혜가 간화선을 어떻게 전개하는지 살펴보자. 「答汪內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어떤 승이 조주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답하기를 "없다." 다만 부질없이 사량하는 마음을 잡아서 무자화두위로 되돌려 시험 삼아 사량해 보라. 홀연히 사량이 미치지 못한 곳을 향하여 이 한 생각을 타파하면 그곳이 바로 삼세를 요달 한 곳이 된다."14]
14]大慧語錄』卷27 (『大正藏』 47), p.928하.
"僧問趙州。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請只把閑思量底心。回在無字上。試思量看。忽然向思量不及處。得這一念破。便是了達三世處也。"
「答榮侍郞」에서는,
"어떤 것이 사량이 미치지 못하는 곳인가? 승이 조주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답하기를 "없다." 다만 이 한 자에 줄곧 네가 어떤 기량을 갖겠는가? 안배해 보고 계교해 보라.
어디에도 사량, 계교, 안배를 놓아버릴 곳이 없고 다만 배속(가슴)이 갑갑하고 마음이 번뇌로움을 느낄 때가 바로 좋은 시절이며 제 팔식의 상속하는 순차가 행하지 않는다.
이와 같음을 느낄 때 놓아버리지 말고 다만 무자위에서만 들되
들고 들기를 계속하면 설은 곳은 자연히 익게 되고 익은 곳은 자연히 설게 된다."15]
15]『大慧語錄』卷30 (『大正藏』 47), p.939중.
"那箇是思量不及處。僧問趙州。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只這一字。儘爾有甚麽伎倆。請安排看。請計較看。
思量計較安排。無處可以頓放。只覺得肚裏悶心頭煩惱時。正是好底時節。第八識相次不行矣。
覺得如此時。莫要放却。只就這無字上提撕。
提撕來提撕去。生處自熱。熱處自生矣。"
대혜는 ‘무자화두’ 참구로 생사심의 근원인 ‘일체사량분별’을 단절할 것을 제시한다. 그래서 대혜의 간화선을 생사의심을 끊는 칼이라 일컫는다.16]
16]승이 조주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답하기를 "없다." 이 한 글자는 생사의심을 타파하는 칼이다. 이 칼자루는 오직 본인의 손안에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손을 쓸래야 쓸 수 없고, 반드시 스스로가 손을 써야만 된다.”(『大慧語錄』 卷26 (『大正藏』 47), p.923상."願公只向疑情不破處參。……須是自家下手始得。")
「答富樞密」을 보면 조주의 무자화두는 사량분별과 호악지해(好惡知解)를 타파하는 무기이다. 이르기를,
"망상으로 전도된 마음과, 사량분별의 마음과 생을 좋아하고 사를 싫어하는 마음과,
지견으로 알려고 하는 마음과, 고요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하는 마음을 단 번에 놓아버리고
그 놓아버린 곳에 오직 화두만을 간하되 승이 조주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답하기를 "없다."
이 한 글자는 많은 나쁜 지각을 때려 부수는 무기다.
... 평상시에 여의지 말고 시험 삼아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가다 보면 언젠가 문득 스스로 보게 된다."17]
17]『大慧語錄』 卷26 (『大正藏』 47), p.921하.
"但將妄想顚倒底心。思量分別底心。好生惡死底心。
知見解會底心。欣靜厭鬧底心。一時按下。
只就按下處看箇話頭。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州云無。
此一字子。乃是摧許多惡知惡覺底器仗也。
… 不離日用。試如此做工夫看。月十日便自見得也。"
무자화두참구로 분별심과 차별심을 놓아버리라는 것이다. 무자화두는 ‘지견으로 알려고 하는 것’을 타파하는 무기이다. 분별심이 차별심이며 차별심이 곧 생사심이기에 분별하는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무자화두는 일체 차별심과 분별심을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본래심의 근저(根底)를 깨닫게 하며 불성을 보살피는 도구이다. 그래서 劉通判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옛 습관들을 억지로 누르려하지 말고 별안간 일어난 곳에 무자화두를 간하라하고18], 呂舍人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같은 주장을 한다19]. 대혜 간화선은 1700공안 가운데 조주의 구자무불성화로 수행의 주요방편을 삼는다.
18]『大慧語錄』 卷27 (『大正藏』 47), p.926상.
“忽爾舊習瞥起。亦不著用心按捺。只就瞥起處。看箇話頭。狗子還有佛性也無。無。正恁麽時。如紅鑪上一點雪。相似。”註17의‘按下’를 혹자는‘누르다’로 번역을 하는데, ‘按下’는‘누르다’‘내버려두다’‘놓아두다’‘눌러두다’등으로 번역 할 수 있다. 만약‘누르다’로 한다면, 화두로 잠시 눌러두는 것이 되어 화두라는 돌로 잡초를 잠시 억누르고 있는 것이 된다. 註18의 내용에 의거해 보더라도 이는 ‘놓아 버리다‘로 번역돼야 한다.
19]『大慧語錄』卷28 (『大正藏』 47), p.930상. "又方寸若鬧。但只擧狗子無佛性話。"
화두를 들 때 많은 기량을 짓지 말 것, 희노애락의 분별을 내지 말 것, 일상생활 중에서도 끊어짐이 없게 하여 이치의 길도 없고, 아무런 재미도 없고, 마음이 답답할 때가 본인의 신명을 놓아버릴 곳이다20].는 세 단계의 화두참구의 진행과정과 방법이 설해지고 있다. 오직 항상 물러남이 없는 마음으로 화두와 겨루어 가되, 마음 갈 곳 없음이 홀연히 자다가 꿈에서 깬 것과 같고, 구름을 헤치고 해를 본 것과 같음에 이르면 자연히 한 덩어리를 이룬다.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흔들리니 집착하지 말고 오직 무자화두만을 간하여 타파하면 삼세가 다 공적함을 요달한다. 이처럼 대혜의 간화선법은 무자화두참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간화선수행에서 알음알이는 많은 병통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어떻게 사량분별을 단절해야 하는가? 이 법은 비유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부처님말씀을 인용하여21] 먼저 사량분별이 반드시 도에 장애가 된다는 것을 믿고 알아야한다고 강조한다. 생사의 근원이 되는 사량분별이 도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이를 안식처로 삼는 것을 경계하고 이를 단절하라는 것이다.
20]『大慧語錄』卷28 (『大正藏』 47), p.933하.
"擧話時都不用作許多伎倆。但行住坐臥處勿令間斷。喜怒哀樂處莫生分別。擧來擧去。看來看去。覺得沒理路沒滋味 心頭熱悶時。便是當人放身命處也。"
21]여래가 일체의 비유로서 갖가지 일을 설명하나, 이 법은 비유로 설명할 수 없다. 무엇 때문인가? 마음과 지혜의 길이 끊어져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大慧語錄』卷27 (『大正藏』 47), p.927하. "佛言。如來以一切譬喩。……心智路絶不思議故")
대철대오경계에 이르는 과정에서 화두위에 집중 된 의정은 참구자를 혼침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논리적인방식으로 화두를 해석하는 악습관을 낳기도 한다. 만약 논리적인방식으로 화두를 해석하면 공부진전이 끊어져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간화선이 화두해석을 경계하는 것이며 특히 논리적인사고를 금기하는 것이다.
만약 잠시라도 화두 듦을 들으면 바로 금강왕보검으로 ‘사로갈등(四路葛藤)‘을 단칼에 끊고 각근하가 그대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22]
22]“고덕(우두법융)이 말씀하시기를 "…만약 공부를 한다하는 사람이라면 잠깐이라도 擧着(화두 듦)을 듣고는 바로 금강왕보검으로 단칼에 이 네 갈래 갈등을 끊어버리면, 生死의 길도 끊어지고, 凡聖의 길도 또한 끊어지며, 사량계교 또한 끊어지고, 得失是非도 또한 끊어진다. 본인의 脚根下에 어떠한 것도 붙지 않아 텅 비고 깨끗하여 적나나한 그대로 드러나 가히 붙잡을 수 없으니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大慧語錄』卷25 (『大正藏』 47), p.917하.)
「答張提刑」에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허망하게 들뜬 마음은 교묘한 견해가 많다." 하시니,
만약 있다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면 없다는 것에 집착하고, 만약 이 두 가지에 집착하지 않으면 있다 와 없다 사이에서 헤아린다.
설사 이 병을 알았다 할지라도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아니한 곳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先聖이 거듭 간곡하게 四句를 여의고 百非 끊기를 단칼에 두 동강이를 내어
다시는 앞과 뒤를 생각하지 말고 앉아서 千聖의 정수리를 끊으라 말씀하셨다.
사구란? 있다, 없다, 있지 않음과 없지 않음, 또한 있고 또한 없는, 이것이다."23]
23]『大慧語錄』卷27 (『大正藏』47), p.928상.
" 佛言。虛妄浮心多諸巧見。
若不著有便著無。若不著此二種。種於有無之間搏量卜度。
縱識得此病。定在非有非無處著到。
故先聖苦口叮嚀。令離四句絶百非。直下一刀兩段。
更不念後思前。坐斷千聖頂。
四句者。乃有無。非有非無。亦有亦無是也。"
사구사량분별(四句思量分別)의 마음을 단칼에 두 동강이 내고 사구백비(四句百非)를 꿰뚫어 마쳐 이에 집착하지 않는 이때에는 四句를 말해도 방해되지 않는다. ‘허망하게 들뜬 마음은 교묘한 견해가 많다’ 이를 단칼에 두 동강이 낸 것이 바로 그 본질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단칼에 두 동강이를 내되 머뭇거리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서 대혜의 돈오사상을 엿볼 수 있다.
화두참구는 일체사유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일종의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이치로는 논할 수 없다. 더욱이 상호 의논으로 해결이 불가능하므로 평생 공부한 책이 여기에는 한 자도 쓸모가 없다. 선법은 사량분별로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대혜는 명확히 한다.『大慧法說』, 「示呂機宜」에는 다음 구절이 있다.
"승이 조주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답하기를 "없다." 이 화두를 간할 때 사량분별하지 않고, 평상시에 항상(늘) 화두를 놓아버리지 않고 들면, 돌연히 재채기 한 번에 부모에게서 태어날 때 코가 본인 얼굴에 본래부터 붙어 있었음을 알게 된다."24]
24]『大慧語錄』 卷21 (『大正藏』 47), p.900중.
"行住坐臥但時時提撕。驀然噴地一發。方知父母所生鼻孔只在面上。"
본래면목은 밖을 향해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코가 얼굴 위에 붙어 있는 것과 같다’고 비유 한 것은 매우 평범한 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우리의 불성은 부처님의 교설 한 자도 붙을 수 없는 곳(필요 없는 곳) 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한 富樞密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보았듯이 망상미혹의 마음을 버린 그곳에 무자화두를 들어 분별과 작위의 마음을 단절해야만 무분별심을 얻을 수 있다. 사로갈등과 사구사량분별은 단계적인 과정을 거쳐 끊는 것이 아니라 금강왕보검으로 단번에 내리쳐서 단절해야 한다. 사량분별은 화두참구 특히 조주무자화두로 대치해야 한다. 이처럼 화두는 간화선수행의 기본요소이며 생명과도 같고, 화두참구는 간화병통을 다스리는 시작이며 끝이다.
그러나 대혜는 사량을 무조건 경계하지는 않는다. 그가 경계한 것은 사량분별이다. 그렇다면 어느 곳에서의 사량은 가능한가? 대혜는 세간의 잡다한 일들 사량하는 마음을 乾屎橛위에 되돌려 놓아, 사량하고 사량하기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곳까지 하여, 홀연히 기량이 다하면, 문득 스스로 깨닫게 된다25].라고 하였다.
25] 『大慧語錄』卷28 (『大正藏』 47), p.931하.
"但將思量世間塵勞底心回在乾屎橛上。思量來思量去。無處柰何。伎倆忽然盡。便自悟也。"
일체 세간의 잡다한 일 생각하는 마음을 乾屎橛話위에 두고 乾屎橛화위에서 의정을 타파하면 천 가지 만 가지 의심도 일시에 타파된다. 화두 들 때에는 어떠한 것도 사고하지 말아야 하며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도 배제되어야 하지만 의식만은 살아 있어야 한다. 이때 사량으로 미치지 못하는 곳에 나아가 사량하기를 마음 갈 곳이 없어진 곳까지 밀어붙이면 쥐가 소뿔에 들어가나 문득 길 끊어짐과 같음을 보게 된다. 어떠한 것에도 의탁할 곳이 없고, 전후 어느 곳에도 조그마한 틈도 없으며, 어떠한 사유 활동도 없는 때가 바로 공부하기 좋은 시기이며 이때 화두를 간하여 홀연히 기량이 다하면 본지풍광 본래면목을 훤히 보게 된다. 화두위에서의 무분별사량은 긍정한다.
대혜는 일체사량분별을 치료하는 약은 오직 화두를 간하는 약밖에 없다고 한다. 사량분별뿐만 아니라 간화선수행시 일어난 일체병통도 올바른 화두참구로 대치되며 반드시 완쾌된다. 그러므로 올바른 화두참구는 일체병통의 유일무이한 양약이다. 화두위에서 올바른 의심을 일으키지 않음으로 인해 간화병통은 나타난다. 대혜는 이 병통을 다스리는 약으로 화두위에서 의정을 끊임없이 순일하게 할 것을 처방한다. 간화선수행 중 화두위에서 일어난 병통은 올바른 화두참구로 반드시 대치된다. 병의 근원이 곧 병을 다스리는 약이다. 이외에도 화두를 들 때 이 화두를 들 수 있는 자를 능히 돌이켜 생각해 봐야하며 어디에서 차별경계가 왔는지를 각근하로 돌이켜 생각해 봐야한다.
화두참구 중 일어난 사량분별은 화두위에서 일으킨 대의단으로 단절할 것을 요구한다. 화두위에서 의심을 크게 일으키면 사량분별은 단절되며, 사량분별이 단절된 곳에서 깨달음을 증득한다는 것이 대혜가 의도하는 바 사량분별 단절방법과 그에 따른 수행결과이다.
2. 提起疑情 大死一番
깨달음이 배제된 선수행은 수행의 필요성은 물론 선종의 생명력도 잃어버린 것이다. 간화선은 화두에서 일으킨 의심을 끊임없이 순일하게 하여 자연스럽게 의정이 계속되어야 한다. 대혜간화선은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닫는 ‘大疑則大悟‘를 강조한다.
「答呂舍人」에 이르기를,
"만약 화두를 버리고, 도리어 문자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여래의 경교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고인의 공안위에서 의심을 일으킨다면, 이 모두는 邪魔의 권속이다."26]
26]大慧語錄』卷28 (『大正藏』 47), p.930상.
"若棄了話頭。却去別文字上起疑。經敎上起疑。古人公案上起疑。日用塵勞中起疑。皆是邪魔眷屬。"
오직 화두위에서만 의심 일으킬 것을 강조한다. 뜻을 내어 더 생각할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가 사량하면 마음 둘 곳 없음이 마치 쥐가 소뿔에 들어가 문득 (길)끊어짐과 같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은 어떻고 조사의 말씀은 어떻고 제방노숙의 말씀은 어떻고 한다면 영원토록 깨닫지 못한다. 화두를 제외한 기타 모든 것은 방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착의해서 사량치 못하는 곳에 나아가 사량할 것을, 마음이 시끄러워도 오직 화두만 참구할 것을 강조한다.
간화선은 왜 ‘疑‘를 중시하는가? 四卷本 『大慧普說』 권四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직 의심하기를 타파하지 못한 곳에 나아가 참구해야만 하며, 참구할 때 절대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며, 만약 깨달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으면 교섭함도 없게 된다.
생사심을 타파하지 못한즉 전체가 한 덩어리 의정이니, 오직 의정 속에서 화두만을 들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답하기를 "없다."
행주좌와에 끊어짐이 있게 해서는 안 되며, 망념이 일어날 때에도 또한 억누르는 마음을 가져서도 안 되며, 오직 이 화두만을 들라.
만일 고요히 앉아 혼침을 알아차렸을 때 정신을 가다듬어 이 화두를 들되,
별안간 눈먼 노인이 불을 끄다 눈썹과 눈이 다 타버린 것과 같이 해야 한다."27]
27]"但只就疑不破處參, 參時切忌將心等悟, 若將心等悟則沒交涉矣.
生死心未破則全體是一團疑情, 只就疑情窟裡擧個話頭,
僧問趙州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
行住坐臥不得間斷, 妄念起時亦不得將心遏捺, 但只擧此話頭.
要靜坐, 纔覺昏沈, 便料精神擧此話,
忽地如瞎老婆吹火, 和眉毛眼睷, 一時燒了"(『禪學典籍叢刊』 4권, pp.317-318.)
‘생사심을 타파하지 아니한 즉 전체가 한 무더기 의정이다.’ 다만 이 의정 속에서 조주의 구자무불성화를 참구하되 일상생활에서도 끊임없이 이 화두를 들어야 한다. 이와 같이하여 화두가 타파되면 생사심도 타파되며, 생사심을 타파하면 도에 들어가게 되고, 도에 들어간즉 윤회하지 않으며, 이 일련의 생사심도 화두 드는 것으로 일시에 다 타 버린다.
대혜의 간화선을 계승한 한국선종의 다독서인『선가귀감』에서는 ‘疑’의 필요성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참선함에 있어 반드시 세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하는데, 하나는 대신근이요, 둘은 대분심이요, 셋은 대의정이다. 이 중 하나만 모자라도 다리가 없는 鼎과 같아서 마침내 쓸모없는 것이 된다.
부처님이 이르시기를 성불에는 信을 근본으로 한다하시고,
영가스님은 도를 닦는 자는 먼저 반드시 뜻을 세워야 한다하시고,
몽산스님은 참선하는 사람이 言句를 의심하지 않는 것은 큰 병이 된다하시며,
또 이르기를 대의정 아래서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하신다."28]
28](『卍續藏』 80), p.738하.
"參禪須具三要, 一有大信根, 二有大憤心, 三有大疑情. 苟闕其一, 如折足之鼎, 終成廢器.
佛云成佛者信爲根本,
永嘉云修道者先修立志,
蒙山云參禪者不疑言句是大病,
又云大疑之下必有大悟.”
疑는 간화선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건이다. ‘의정이 크면 반드시 크게 깨닫는다’한 것처럼 간화선수행은 疑를 가장 중시한다. 만약 疑가 없다면 화두공부의 진전을 기대할 수 없으며 깨달음의 경지에도 들 수 없다. 대의정은 바람이 가득 한 큰 풍선과 같다. 풍선 속에 바람을 계속 불어 넣어 가득 차면 최후에 반드시 터지는 것처럼 화두위에서 의정 일으키는 것도 이와 같다. 매우 빵빵한 풍선은 손끝만 대어도 뻥하고 터진다. 마찬가지로 의정이 크면 한 순간에 부처님과 조사들의 경지를 깨닫는다. 화두는 수행자의 내면에서 나오는 문제이며 본인의 심심(深心)속에서 솟아오르는 간절한 자신의 문제이다. 이 내심의 의단이 간화선수행의 관건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수행에서 ‘의’는 깨닫기까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건이다. 화두가 간화병통을 다스리는 시작이라면 올바른 의정은 시작에 속도를 붙게 하는 가속제이다. 이처럼 화두와 의정은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를 성립한다. 그래서 선인(先人)들은 의정이 크면 깨달음도 크지만, 의정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으며 의단이 치성하면 힘을 쓰지 않아도 면면히 현전하여 오욕팔풍이 들어올 틈이 없다29]고 한다.
이처럼 대혜의 간화선법은 대의정을 가지고 생사심의 근원인 일체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분별심과 차별심을 끊어야 한다. 그리고 죽어야만 쉰다는 각오로 앞뒤를 생각지 않고 도에 장애가 되는 번뇌 또한 내지 않으며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오직 화두만을 간했을 때 위없는 깨달음에 이른다.
29]『禪關策進』卷1 (『大正藏』48), p.1099중하.
"心下疑團愈盛。不著用力。綿綿現前。一切聲色五欲八風。皆入不得。"
3. 打成一片 看破疑團
몽산스님이 제시한 대신심과 대분심 그리고 대의심은 화두수행의 주요요소이다. 그러나 간화선수행에서는 화두, 의정, 간절한 마음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이룬다. 이 셋이 하나가 되었을 때 간화선은 그 지향하는 바를 달성한다.
화두위에서 의정이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면 의단이 홀로 들어나게 되며 일상생활에서도 화두가 성성하여 참구자와 화두가 하나 되며 의단이 일시에 타파되어 모든 차별상을 여윈 경지에 이른다. 대혜는 일상생활에서의 화두참구로 자신의 본래면목 철견할 것을 강조한다. 『大慧法語』, 「示卾守熊祠部」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만일 나아감은 있으나 물러남이 없이 평상시 일상생활 하는 가운데에서도 항상 조금도 끊어짐이 없이하면 깨달음에 이르는 찰나와도 그리 멀지 않다. … 다만 일상생활 하는 가운데에서 분명하게 하기를 오래도록 하면 자연히 본래면목을 깨닫게 된다. "30]
30]『大慧語錄』卷21 (『大正藏』47), p.899상.
"若有進無退。日用二六時中應緣處不間斷。則噴地一下亦不難。... 但於日用應緣處不昧。則日月浸久。自然打成一片"
기쁘거나 화나고 슬프고 즐겁고, 공무를 처리하거나 혹은 친구와 왕래하고, 가족과 함께 있거나, 마음 가운데 좋고 나쁜 것을 사량하는 등, 주변의 어떠한 환경조건과 부딪혔을 때와 관계없이, 이 모두는 다 재채기 한 번에 깨달을 시절이다 는 것이다. 일상생활 중 화두위에서 지해를 일으키지 않고 순일하게 끊임없이 공부를 지어가면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어 본래면목을 깨닫게 된다.
무문혜개(無門慧開,1183-1260)의 「無門關」 제 일칙에서도 화두위에서 의심하기를 삼백육십개의 골절과 팔만사천개의 털구멍으로, 즉 온몸으로 의단을 일으켜 무자화두참구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며, 벌겋게 달구어진 쇠 덩어리를 삼켜 토해내고 싶어도 토해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목숨을 걸고 간절하게 오래도록 하여 순숙되면 자연스럽게 안과 밖이 타성일편 된 경지에 이른다.
황벽선사도 낮과 밤을 구분하지 말고 일상생활 중에 무자화두를 참구하여 순일하고 끊임없이 공부하기를 오래도록하면 타성일편 한다고 한다.31] 이처럼 선사들은 한 결 같이 타성일편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화두위에서 올바른 의정을 끊임없이 순일하게 오래도록 하여 공부가 순숙되면 자연스럽게 이르게 된다고 주장한다.
타성일편의 경지에 이르면 부처, 조사, 생, 사를 의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의심치 않는 곳에 다다름이 바로 부처의 지위이며, 부처의 지위 위에는 본래 의심이 없어, 깨달음, 미혹, 생, 사, 유, 무, 열반, 반야, 부처, 중생도 없고, 또한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없고, 이 말 또한 받지 않으며, 받지 않은 사람도 없으며, 받지 않음을 아는 사람도 없으며, 이렇게 받지 않음을 말하는 사람도 없다.32]
불견, 법견, 중생견을 짓고 사량분별하고 도리를 설하더라도 서로 방해롭지 않다. 어리석은 사람은 경계를 없애고 마음은 없애지 않으며,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은 없애도 경계는 없애지 않는 것처럼, 일위에서 일없음을 통달하면 색을 보고 소리를 듣더라도 눈멀고 귀머거리가 아니다.
의단이 타파되면 모든 곳에 마음이 없어 갖가지 차별경계도 자연히 없어진다.이처럼 진실로 의심치 않는 곳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어떠한 수승한 경계를 드러내 보이더라도 봐도 보지 않음과 같다.
그렇다면 화두참구로 생사심을 타파해도 차제(次第)를 요하는가? 대혜는 다시 차제는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33]
31]『黃檗斷際禪師宛陵錄』卷1 (『大正藏』 48), p.387중.
32]『大慧語錄』卷28 (『大正藏』 47), p.932상. "悟時亦無時節。亦不驚群動衆。……亦無恁麽說不受者"
33]"만일 생사심을 타파하면 다시 무슨 정신을 맑게 하고 생각을 안정하기를 설할 필요가 있겠으며, 다시 무슨 종횡방탕을 설할 필요가 있겠으며, 다시 무슨 내전과 외전을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나를 마치면 일체를 마침이요, 하나를 깨달으면 일체를 다 깨달음이요, 하나를 증득하면 일체를 다 증득했다 말할 수 있다. 마치 한 타래의 실을 끊을 때 한번 끊으면 일시에 다 끊어진 것과 같은 도리이다. 무변법문을 증득 한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 다시 차제는 없다."
(『大慧語錄』 卷27 (『大正藏』 47), p.925하. "當此之時。縱橫無礙之說。……更無次第")
4. 了事漢
화두위에서 크게 의심을 일으켜 화두일념하여 그 기연이 성숙되면 크게 깨닫는다. 이를 일대사를 마친 대장부라고 일컫는다. 그렇다면 이미 일을 다 마친 대장부도 수행을 요하는가? 「答李參政」에서 대혜는 다음과 같은 답을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있어 마땅히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 正性을 도려내고 그 助因을 제거하며 그 現業을 끊으면,
이는 일 마친 사람의 방편 없는 가운데의 참 방편이며,
닦고 증득함이 없는 가운데 참으로 닦고 증득함이며, 취하고 버림이 없는 가운데 참 취하고 버림이다.
고덕(약산)이 이르되 "피부가 남김없이 다 벗겨졌더라도 오직 한 진실은 있다.
또한 전단의 번성한 가지가 떨어져 다하면 오직 참 전단만 남는 것과 같다." 하시니
이것이 현업을 끊고 조인을 제거하고 정성을 끊는 극치이니, 그대는 생각해 보라.
이와 같은 말도 일을 마친 대장부의 분상에서는 한 자루의 섣달 부채와 매우 흡사하니,
아마 남쪽 지방에는 추위와 더위가 한결같지 않으니, 이 또한 없어서도 안 될 것이다."34]
34]『大慧語錄』卷25 (『大正藏』 47), p.920중하.
"然日用之間。當依黃面老子所言。
刳其正性。除其助因。違其現業。
此乃了事漢。無方便中眞方便。
無修證中眞修證。無取捨中眞取捨也。
古德云。皮膚脫落盡。唯一眞實在。
又如旃檀繁柯脫落盡唯眞旃檀在。
斯違現業除助因刳正性之極致也。公試思之。
如此說話。於了事漢分上。大似一柄臘月扇子。
恐南地寒暄不常也。少不得。一笑"
일 마친 대장부는 어떠한 수증을 요하는가? 에 대한 대혜의 답이다. 깨달은 후에도 음심과 진심을 베어 내고, 이를 돕는 오신채를 제거하며, 현재의 번뇌 망상을 끊으라는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닦고 증득함이 없는 가운데 참 수증을 해야 한다. 이와 같이 참 수증을 하는 사람의 경지는 가슴 속이 환하고 밝음이 마치 백 천 개의 해와 달 같아서 시방세계를 한 생각에 밝게 알며 가는 실 털끝만큼의 다른 생각도 없어 바야흐로 구경과 상응하는 깨달음의 세계가 펼쳐진다35].
깨달은 후에는 닦고 증득함이 없는 참수증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참수증이 필요한 것일까? 무명은 일시에 소멸되지만 오음으로 이루어진 실사(實事)는 차례에 의하여 끊어진다는 것이 대혜의 견해이다 .36]
35]『大慧語錄』卷26 (『大正藏』 47), p.922상 "願左右快著精彩。……始得與究竟相應。"
36]"이치는 몰록 깨달을 수 있으며 깨달음을 타고 모두 소멸되지만, (五陰妄想의) 일(事)은 점점 제거되며 차례를 인하여 다하게 되니, 일상생활 하는 일체시에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大慧語錄』卷25 (『大正藏』 47), p.920상.
"理則頓悟乘悟倂銷。事則漸除因次第盡。行住坐臥切不可忘了")
Ⅳ. 맺음말
간화선수행에서 나타난 병통은 대부분 지해로 인해서 일어난다. 그래서 대혜는 알음알이 짓는 것을 매우 경계한다.
불조의 언구, 조사의 격외도리를 행위로 보여주는 것과 화두와 관계해 일어나는 알음알이, 이를 문자로 인증하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아무 일 없음에 빠져 있거나,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을 가지고 화두를 참구하는 등의 병통 모두는 공부진전에 방해가 되며 도를 막는 생사의 근본이 된다.
忘懷와 管帶는 간화선수행 시 昏沈과 掉擧를 불러온다. 때문에 대혜는 평상시 애써 지니려는 마음을 일으키거나 마음을 메마르게 하여 뜻을 잃어버리게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필자는 간화십종병통을 정식활동의 빈도와 그 내용에 따라 안주, 지해, 인증, 대오 등 넷으로 나누었다. 이것과 忘懷, 管帶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安住 → 忘懷 → 昏沈 → 斷見.
知解, 引證, 待悟 → 管帶 → 掉擧 → 常見.
간화십종병통에서 안주는 망회와 관계가 있으며 혼침의 원인이 된다. 이는 단견에 귀결시킬 수 있다. 지해와 인증 그리고 대오는 관대와 관계가 있으며 掉擧의 원인이 된다. 이것은 상견에 귀결시켜 볼 수 있다.
이상을 종합하면 일대사를 해결해 일 마친 대장부가 되려면 우선 화두참구로 일체의 사량분별을 단절해 구경에 직입해야 한다. 구경에 직입코자 하는 이의 근성이 영리하고 둔함은 무관하지만37], 어떠한 환경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주재할 수 있는 확고부동한 뜻(決定志)38] 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를 가지고 평상시 모든 일을 함에 분에 따라 덜어 버리고 경계와 인연을 만나더라도 스스로 차별상을 짓지 않아야 하며39], 차별심을 낸 곳엔 항상 화두를 들되, 다만 이 화두만을 살펴야 한다. 그러나 절대 속효심을 내서는 안 된다.
37]『대혜서』곳곳에서 근성과 관련된 내용이 보인다. 근성에 대한 대혜의 견해를 종합 정리해 보면, 근성이 둔한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 근성이 둔함을 아는 자는 결정코 둔하지 않으며, 취하고 버리고 둔하고 영리함은 사람에게 있고 마음에는 있지 않으니, 둔하다는 그 생각을 화두 위에 되돌려서 참구하되, 생각 생각에 머리에 붙은 불을 끄려는 것과 같이 공부를 해도, 徹見하지 못했을 때, 비로소 근기가 둔하다고 말할 수 있다. 화두 참구와 근성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음을 분명히 한다.
『大慧語錄』卷26 (『大正藏』47), p.922c. "但相聽能知根性鈍者。決定不鈍。……若有二則法不平等矣。". 上同, p.924a. "決欲今生打敎徹。……打未徹時方始可說根鈍耳。"
38]『大慧語錄』卷30 (『大正藏』47), p. 942a. "學此道須有決定志。……則把得住作得主宰。"
39]대혜가 宗直閣에게 보낸 서신에서, 사물은 본래 自性이 없으며, 경계도 본래 차별이 없으나, 미혹한 사람이 스스로 차별할 따름이다 하며, 차별경계와 공부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大慧語錄』卷28 (『大正藏』47), p.933b. "物本無自性。……則非佛法矣。"
간화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위에서 올바른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만약 화두위에서 올바른 의심을 일으키지 못하면 그 화두는 사구가 된다. 그러나 화두위에서 올바른 의심을 일으켜 이를 끊임없이 순일하게 하기를 오래도록하면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는 타성일편의 경지에 이르며 일 마친 대장부가 된다.
대혜간화선은 화두참구에서 병통과 그 해결방법이 모두 이루어진다. 화두가 간화선수행방편문이지만 참구자가 이것을 철저히 자신의 문제로 삼아 간절하게 참구해야만 깨달음의 문에 단도직입한다.
간화선수행에서 화두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며, 여기에 올바른 의정이 더해졌을 때 간화선수행은 진행되고, 이에 절대 화두를 놓지 않겠다는 간절하고 절실하며 한 순간도 물러남이 없는 간절한 마음, 이 셋이 하나가 됐을 때 화두는 타파된다. 간화병통을 다스리는 약으로 화두는 물론이고 화두위에서의 올바른 의정, 이 둘이 어긋나지 않고 순일하였을 때 병통은 대치된다. 이처럼 화두, 의정, 간절하고 지극한 마음은 불가분리의 주요삼대요소이며 하나만 어긋나도 이상적인 간화선수행은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본래면목 또한 철견할 수 없다.
간화병통은 화두위에서 일어난 선병이지만 병의 근원을 알면 그 치료법 또한 쉽게 찾을 수 있듯이 이 병통을 화두위에 되돌려 깨달음의 문을 만들면 "삼독을 되돌려 삼취정계를 만들고, 육식을 돌이켜 육신통을 만들며, 번뇌를 돌이켜 보리를 만들고, 무명을 돌이켜 대지혜를 만든다."40] 한 것처럼 병통이 곧 깨달음의 문이 된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간화선의 본질적인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올바른 화두참구는 우리의 일대사를 해결하는 중요한 방편이며, 화두가 바로 나 자신이였을 때 간화선의 생명력은 우리와 함께 한다.
40]『大慧語錄』卷25 (『大正藏』47), p.917a.
"當恁麽時。始能回三毒爲三聚淨戒。回六識爲六神通。回煩惱爲菩提。回無明爲大智。"
참고 문헌
『大慧普覺禪師語錄』卷25-30, (大正藏 47)
『禪家龜鑑』, (卍續藏 80)
『禪關策進』卷1, (大正藏 48)
『無門關』卷1, (大正藏 48)
『黃蘗斷際禪師宛陵錄』卷1, (大正藏 48)
柳田聖山, 椎名宏雄共編,『禪學典籍叢刊』卷4, 日本: 臨川書店, 2000년 4월.
원융,『간화선』, 서울: 장경각, 1999.
정성본,『간화선의 이론과 실제』, 서울: 동국대, 2005.
조계종교육원불학연구소편저,『간화선』,서울: 조계종출판사, 2006.
월암, 『간화정로』, 부산: 현대북스, 2006.
이덕진, 「간화선의 ‘구자무불성’에 대한 일고찰」『한국선학』 제 1호, 2000년 1월
김영욱, 「간화선의 화두 공부와 그 특징」『가산학보』 제 10집, 2002년 6월.
<中文提要>
從看話病痛看看話修行法
-以《大慧書》爲中心-
慧達 / 東國大 禪學科 講師
本論文是『大慧書』中所提到的看話病痛與其對治方法中,考察看話禪的修行方法.
『大慧書』中所見之看話十種病痛, 案其內容而分四種, 是想理解或猜話頭的「知解」、坐在無事甲裡認爲覺悟的「安住」、以經典和祖師言句來分析話頭或引證話頭的「引證」、擧話頭時以求悟之心來參究話頭的「待悟」等.「知解」、「安住」、「引證」、「待悟」在生死之岸, 是無處可用之觸髏和情識之事, 這都是話頭上不起懇切地疑情, 而産生的病痛, 這些病痛造成不能進展參究話頭之結果.
大慧對治這些病痛之方法, 提出了起病痛之處參究話頭, 話頭上起疑心, 疑情不斷, 純一而純熟, 話頭與吾成一, 到達打成一片之境界, 爲「了事漢」.
大慧的看話禪修行方法, 以參究話頭中引起的病痛, 以參究話頭來對治, 引起病痛和其解決方法都在參究話頭上的事. 對治病痛之藥是話頭和話頭上所起的疑情, 這兩種符合而純一時, 病痛可對治, 並且話頭和疑情、懇切地心是不可分離之主要的三大要素, 其中缺一, 不能期待理想的的看話修行.
* 關鍵詞
看話禪, 話頭, 看話病痛, 看話禪修行法, 大慧宗杲
/ 普照思想 제29집(2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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