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 보리심 수행

[스크랩] 시간과 공간을 뚫고

수선님 2019. 1. 20. 12:20

 

 

불교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교(敎), 증(證) 두 가지 법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세친보살의 논서가 잇을 것입니다. 세친보살의 구사론에서

 

 

“교조의 정법은 두 가지 형태이니 교법과 증법의 본질이다.” 

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의 법에는 교법과 증법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럼 교법과 증법은 어떻게 지니는가?

 

 

“그것을 지니는 것은 설함과 성취하는 것뿐이네.”

즉 설한다는 것은 들어서 배움을 의미하고 성취는 수행을 의미합니다. 교법은 배움을 통해서 지니고 증법은 수행을 통해서 지닌다는 뜻입니다. “성취하는 것뿐이네” 라는 말은 ‘이것만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없다.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  증] 의 부처님 법을 지니고, 지키고, 전개시키기 위해서는 배움과 수행을 통해야 합니다.

 

 

여기서 주된 것은 행복을 이루고 불행을 없애기 위해서 법을 수행하는 것이지, 행복을 이루고 불행을 없애지 못하는 법이라면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법이란 말, "다르마" 라는 말은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어디에서 벗어나는가? 바로 "고통에서 벗어난다" 는 의미입니다. 그럼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인과의 연기. 이것은 사물의 기본 방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치 않는 고통에서 벗어 나려면 그 원인에서 벗어 나야지, 그 원인에서 벗어나지 않고서 그 원인에서 빚어진 결과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르마’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말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란, "고통을 가져오는 원인을 막음으로 벗어난다" 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티베트어에서 법은 ‘고친다’ 는 의미입니다.

 

 

그 말은 고통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데서 비롯되니 제어되지 않은 마음을 고쳐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로 티베트에서 법을 얘기합니다.

 

 

법은 고통을 줄이거나 없애는 방법을 의미해서 교, 증 가운데 증법(證法)이 중심이 됩니다. 증법을 통하여 즉 수행하여 각자가 체득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미래의 고통을 차치하고라도 이생에 생로병사의 고통과 불행의 나쁜 조건이 생겼을 때 이것을 보살도의 원인으로 삼거나 어려움을 감수함으로 나쁜 상황에 부딪혔지만 이로 인한 마음의 불행이 생기지 않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체득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경험이 없다면 말만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증법이 더 중요합니다. 수행 말입니다.

 

 

어떻게 가능한가? 불교는 이유를 사유함으로 가능하지 믿음만으로 가능하다 말하지 않습니다. 지혜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것이죠. 만일 믿음으로 충분하다면 초전법륜을 굴리셨을 때 믿는 것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하셨을 텐데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많은 종교가 교주를 믿으면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했지만 부처님께서 이치에 맞지 않음을 보시고 부처님 자신의 경험으로 일체종지로써 고통은 원인에서 생겨남을 보시고 인을 없애지 않고 귀의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고통의 원인을 막아야 합니다. 어떻게 원인을 없앨까? 예로 살생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을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유가 약합니다. 여기에 스스로 이유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과라는 것이 무엇인지 뿐만 아니라 살생의 대상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행복을 원하고 불행을 원치 않으며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나와 남 모두 죽음을 원치 않으므로 타인을 살생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를 사유하여 받아 들여야할 부분이지, 무조건은 아닙니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 가능하다면 티베트역의 많은 경장도, 초전법륜 때 사성제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성제를 설하고 나서 연기에 대해 세세히 말씀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대승의 반야경에서 다루는 무수한 법과 근(根)의 규정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정리가 필요함과 근을 이해하기 위한 수많은 말씀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까?  이치를 생각하고 원인을 봄으로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지, 이치를 모르고 그저 ‘귀의합니다’ 라는 말로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따라서 지혜와 이성을 중요하게 말씀하신 것이죠.

 

 

불교에서 믿음이란, 지혜를 바탕으로 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지, 지혜가 없는 믿음, 그냥 ‘귀의합니다’ 라는 식의 '신앙은 어리석은 이들이 하는 맹신' 입니다. 때문에 어떤 이유의 바탕이 되는 것, 근(根)을 알아야 합니다.

 

 

[내외종파의 교의를 요약하여 두 가지 총괄과 차별을 설하노라.]

 


쫑카파 대사의 비밀도차제론 앞부분에 나옵니다만 외도가 있든 없든 우리 자신의 마음에 전도된 견해의 습기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견해를 알고 옳고 그름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쫑카파 대사가 계셨던 당시 티베트에는 외도라고 할 만한 이들이 없었습니다. 타지에 존재하는 외도들이야 티베트와 관계가 없었고 그래서 쫑카파 대사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현재 우리는 다양한 견해 속에 살고 있습니다. 티베트의 경우 나라를 잃은 후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었고 또 그 관계가 필요해졌습니다. 세상 어디에 산들 다양한 견해 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구가 하나의 사회, 지구촌이라는 하나의 지역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전체가 하나의 지역으로 하나의 지구촌이라는 마을 속에 다양한 문화와 종교,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 티베트에서 법을 설할 때처럼 보리도차제론이나 논서 중심의 방식은 이제 시대가 지난 것입니다.

 

 

외. 내도의 다양한 견해를 알아야 합니다. 외도 역시 예전 인도에서 존재했던 외도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천주교. 무슬림. 유태교 그리고 봄베이에 본산이 있는 조로아스트교, 이들 종교의 구조나 다양한 견해 사상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양철학 특히 인본주의에 입각한 사상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대과학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모두 자세히 알기는 힘들지만 요점과 핵심을 알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마 우리 티베트보다 한국이 더 좋은 조건일 것입니다. 한국에도 다양한 종교, 사상, 철학이 존재합니다. 그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과학에서 한국은 큰 발전을 했고 많은 학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일반인을 위한 보편의 가르침과 특정인을 위한 가르침,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합니다. 옛날 티베트의 ‘쑹럽바’라는 분이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보편적 가르침과 특별한 가르침 이를 잘 구분해야 합니다. 지금 다양한 내외사상 철학체계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보편적 가르침의 형태이며 반드시 필요합니다.

 

 

특정한 가르침은 특별한 한 사람에 한해 여러 가지 다 알 필요 없이 한 가지 가르침을 통해 수행하는 형태로도 가능합니다. 이를 염두한 가르침에 근거해 수행법과 수행을 이끄는 형태가 있습니다.

이것이 특정한 사람을 위한 특별한 방식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구상의 종교 하나로 설명할 때 내외사상을 전체적으로 알고 다른 사상을 관련해 이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전의 스승들이 법을 펼친 것은 보편적인 형태였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뛰어난 성취자들은 특정 법기를 위한 특별한 가르침을 다양하게 펼치기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럼 논서를 보십시오. 거기에 이런 말이 있지요." 

 

 

[실상(實相)을 터득한 지혜가 없으면 염리심과 보리심을 수행해도 윤회의 뿌리를 끊을 수 없기에 이런 연유로 연기를 깨닫는 방편에 힘쓰라.]

 

 

‘지혜로 실상을 깨달은 즉 연기의 진여를 깨달은 지혜 없이는 절대로 해탈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실상을 깨달은 지혜가 없어서는 안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상을 깨달은 지혜와 무아사상에 대해서 불교의 모든 종의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무아라는 것은 제법의 존재방식 혹은 진면목 실상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깨달은 지혜를 불교 4대 철학세계에서 모두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실상, 진여는 어떤 것인가? 바로 연기의 진여를 의미합니다. 연기의 진여라고 하는 연기는 어떤 것인가? 연기사상 가운데 가장 심원한 유명가유(有名假有: 제법이 오직 이름만으로 가설돼 성립 존재하는 것), 식이 가설함으로 존재 성립하는 것 그러한 연기를 근거하여 가장 심원한 연기사상이 얻어지는 실상이 존재하고 그 실상이 궁극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 궁극의 심원한 실상을 알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연기의 진여를 알기 위해 제법이 의지해서 성립 존재한다는 상호관련 연기법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 연기법을 알기 위해 인과의 연기법을 알아야 합니다. 즉 가장 심원한 연기사상을 알기 위해 먼저 이해되어야 할 사상들이 존재합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사물의 실태를 알아야 합니다. 보편의 사물 본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사물의 본질을 얘기할 때 요즘 흔히 얘기하는 물리학, 심리학, 화학이라는 것이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굉장히 광범위해 집니다. 연기라는 말 속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요소가 이 연기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불교라는 것은 이성과 지혜를 총체적으로 사용하여 이것으로 내면의 마음을 제어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륵보살이 보성론에서 ‘대오과(大五科)-다섯 가지 학문을 경시하지 마라.’ 라고 말씀하셨듯이 다양한 학문의 필요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대오과는 인도에 존재했던 5대 학문을 의미합니다. 대오과 가운데 의학을 제외하고는 현대학문이 여기에 모두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외사상을 모두 알아야 하고 그것을 앎으로써 상위체계의 더욱 심원한 사상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견해의 잘못된 바를 끊고,  그것을 끊기 위해 자신의 종교 철학은 물론 다른 이들이 인정한바 즉 이전의 타종교나 철학에서 인정했던 것이나 지금의 타종교나 철학에서 인정하는 바를 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무아조세(無我粗細)의 순서를 이해하기 위해 무아사상에서 조세의 차이와 특징을 안다면 각 무아사상의 깊이와 특성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그저 ‘아 심원한 무아사상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는 정도밖에는 되지 않겠지요.

 

 

무아를 인정하는 불교의 4대 철학이 인정한 방식을 이해하면 무아를 인정하는 점에선 같지만 무아에 대한 다른 이해 - 깊고 얕음이라고 할까요, 심오한 차이랄까, 이성과 지혜를 통해 세세한 부분까지 고찰하면 이로 인한 이해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이런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큰 도움이 되기에 무아조세의 순서 이해를 위해 내외의 교의를 알아야 합니다.

 

 

[요약하여 두 가지, 총괄과 차별을 설하노라. 첫 번째 둡타(성극일종의:成極一宗義)라고 하는 말은 임의로 지은 것이 아니니 이는 부처님의 경에서 이미 말씀한 까닭이다.]

 

 

둡타(종의)라고 하는 것은 깊이 사유하고 분석 통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즉각적 사고나 행동, 햇볕이 뜨거울 때 피하고, 추울 때 찾거나 뜨거움을 피해 그늘을 찾는 것은 동물도 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태양은 어떤 것인가? 태양의 온도는 어떤가? 태양이 얼마큼 오래 되었나, 미래에 어떤 변화를 가질 것인가' 따위를 동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만이 이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점점 깊이 연구하다보면 태양 또한 한계가 있고 태양의 한계를 5~60억만년 정도라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 지구가 생성된 지 50억년이라고 합니다. 지금 자세히 기억나진 않습니다만 결과적으로 태양에 대한 이해를 가집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어째서 태양이 생긴 것일까 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측량한 것 아마 이것을 common sense 즉 보편적으로 체험 인식되는 것

행불행의 감각이 일어나는 것 이러한 것을 일반상식이라 하며 우리들 추측에 의한 비량에서 현량에 이른다는 것은 결국 일반상식을 근거로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이유를 밝히는 과정에서 우리의 일반상식인 common sense가 존재하지 않는가? 누가 보더라도 부정할 수 있는 선에서 진실을 규명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바탕에 근거해 여러 가지로 측량한 결과, '이럴 수밖에 없다' 는 자신의 판단에 성립된 기준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생각 된다’ 고 하는 것은 한가한 소리지요. 분석하여 깊이 사유하고 이치를 따져 ‘내 생각에 틀림없다’ 고 하는 통찰의 기준이 생기게 됩니다. 성립되는 기준을 두는 것 이를 종의라고 합니다.

 

 

‘둡바’라는 것은 ‘존재 성립함’ 이란 뜻이고 ‘타’라는 것은 통찰을 통해 기준점을 두는 것. 이것을 종의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일반적으로 인(人)이라 하면 ‘나’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나’ 라는 생각을 가진 이를 인(人)이라고 규정합니다.

 

 

생명체라면 하찮은 미물이라도 모두 ‘나’ 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나라는 생각 때문에 작은 벌레조차도 자신을 귀히 여기는 생각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로 얼마 전 일입니다만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며칠이 지나도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혹 물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물방울을 조심스럽게 옮겨 떨어뜨려 주었더니 만족스러운 듯 몸을 뒤집어 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벌레에게도 나라는 강한 생각이 존재하고 그 생각이 상황에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벌레의 반응을 이렇게 봤지요. 기도를 하며 계속 지켜 봤더니 다시 몸을 뒤집어 물이 입에 닿았는지 만족스러워하는 듯 했습니다.

 


이렇게 벌레조차도 나라는 생각이 존재합니다. 작은 벌레지만 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고통을 원치 않고 행복을 원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미물의 행불행이란 즉각적인 행불행일 뿐 이외의 것엔 어떤 생각도 없습니다.

 

 

이렇게 인(人)이라고 할 때는 판별력이 있는 것과 없는 부류가 있습니다.

 

 

사고력을 가지고 있는 부류 가운데 일반적으로 접하는 대상이 인간입니다. 인간 가운데 또 나누어 농사를 짓는 농부나 티베트의 유목민, 한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농부나 어부들은 생업이외의 일들에 관해서 관여하거나 큰 관심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이가 종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자이고, 종의에 영향을 받는 이는 보다 지적인 부류라 할 수 있습니다.

 

 

태어난 곳이 유목지라도 깊은 사유와 분석을 통해서 이런 학자들의 사상을 따른다든지, 이를 바탕으로 발전된 새로운 기준을 규정한다든지, 과학자 경우는 기계를 이용하여 측정하고 정도를 파악하여 사물의 실상을 규명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들도 종의제창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나누면 종의에 영향을 받는 이와 종의에 영향을 받지 않는 두 부류이다. 전자는 경서를 익히지 않고 분석하고 검토하지 않아 태어난 그대로의 생각으로 금생의 행복에만 뜻을 둔다. 후자는 경서를 익혀 근(根)과 도(道)와 과(果)의 삼 규정에 대해..”

 

 

이 부분은 논란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외도 종의제창자의 경우 외도 순세파 가운데 한 부류는 전생과 내생을 인정하지 않고 현재에 보이는 것 이외의 것을 인정 않으므로 근본요소들은 말하겠지만 이에 근거한 도과(道果)는 말할 수 있을지 아니면 이외는 내생을 인정하지 않고 현세에 보이는 대로 본래 갖고 있는 생각만으로 인식하려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에서 더욱 진보한다든지 그에 근거한 다양한 수행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대로라면 '경서를 익히지 않고 분석 검토하지 않아 태어난 그대로의 생각으로

이생의 행복에만 뜻을 두는 이' 가 종의에 영향 받지 않은 자입니다.

 

 

종의에 영향을 받는 자는 '경서를 익혀 근과 도와 과의 삼규정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으로 성립한

이치를 경(經), 정리(正理)의 도(道)로 논하는 자' 로 순세파의 경우는 경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각 교의를 교조의 말씀이라 한다면 그런 의미로써의 경은 인정한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근과 도, 과 삼규정에 대해 자신의 생각에서 성립된 이치를 경과 정리의 도를 논하는 자이다.]

 

 

종의의 석명(釋名) 또한 <선명사의소(善明詞義疏)>에서 이르길,

 

 

"이룸의 궁극(둡타-종의)이란 이치와 말씀으로 보이신 대로 자신의 견해를 성립한 이것에서 다른 곳으로 더 갈 곳이 없음으로 궁극이다" 라고 하신 것처럼 경과 이치 가운데 어떤 것에 의지하든 이에 의지하여 확정하고 성립된 성립된 종지(宗旨) 그것만이 자신의 생각에 있어서 그 이치와 달리 넘어서는 것이 없음으로 이룸의 궁극이라 하신 것입니다.

 

 

“외도와 내도 두 가지로 분류한다. 외도와 내도의 차이가 있으니 마음속 깊이 삼보에 귀의하는 자가 불교도이고 삼보에 의지하지 않고 세속의 신에게 마음으로 귀의하는 자가 외도인 까닭이다.”

 

 

이것도 대부분의 외도로 해석해야 합니다. 순세파처럼 신을 인정하지 않는 외도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불보 법보 승보 이렇게 세 가지를 두고 이런 삼보를 바른 의지처로 인정하는 이를 불교도라고 합니다. 삼보를 자세히 알지는 못해도 불법과 법을 보이신 부처님, 길을 감에 있어 선지식역할을 하는 승가, 이런 삼보를 마음 깊이 믿는 자가 불교도입니다. 이외는 외도가 되는 것이지요.

 

 

'귀의'는 외도에게도 가능한 얘기입니다. 특히나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에게 자신의 삶 전체가 달려있다고 여긴다면 이런 창조주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또 순세파처럼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한다면 특별한 귀의처를 얘기할 수 없습니다.

 

 

“외도와 불교도의 종의제창자(提唱者)의 차이 또한 있으니 교조 교법 견해 이 세 가지에 의해 구분하는 까닭이다. 불교의 교조는 덕이 원만하고 교법은 유정에 해로움이 없고 견해는 상일주재(常一主宰)의 아(我)가 없음을 인정하는 세 가지 차이가 있다.”

 

 

제행무상. 일체유루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이 그것이지요. 이러한 사법인을 인정하는 이를 불교종의제창자, 이를 인정치 않는 이를 외도종의제창자로 규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조께서 보이신 사법인을 얘기할 때 제행무상. 일체유루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인데 먼저 제행무상이라 할 때 변화성을 얘기합니다. 변화성을 가지는 법은 무루와 유루로 나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유루는 일반적으로 번뇌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유루에 영향을 받는 모든 것은 고통이다. 즉 제행이 변화하므로 무상하고 그런 유루와 무루 중에 유루는 고통의 본질이다' 이것이 일체유루개고(一切有漏皆苦)입니다. '이런 고통을 없앨 수 있는가 하면 고통의 근원은 탐진이고, 탐진의 뿌리는 아집이다.'

 

 

아집이 만일 전도된 지견이 아닌 바른 지견이면 이와 상위되는 지견은 존재할 수 있지만 이를 다스릴 대치법(對治法)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집은 전도된 지견이며 전도된 지견인 이상 이것을 다스리는 지견이 존재합니다.

 

 

아닌 것을 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전도된 지견이 된 것입니다. 실제 존재방식은 진실상에 머물고 이것을 언젠가 깨닫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진실을 깨달은 의식이 전도된 지견에 대적하는 지견이 되고 대치법은 정당성을 가져 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제법이 공하고 무아이므로 아집이 전도된 지견이라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아집에 대치법이 존재하고 이로 인해 아집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완전히 아집을 제거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줄일 수 있음을 우리의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뿌리를 없애는 것은 많은 사유를 통해 가능합니다.

 

 

'아집이 대치법에 의해 멸했을때 고통의 근심에서 벗어난 열반' 입니다. 이것이 열반적정입니다. 이러한 것을 설명하므로 비로소 해탈에 관한 얘기가 나오게 됩니다. 해탈이 어느 특정한 장소인 정토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탈이란 고통을 초래한 번뇌의 허물이 사라지는 것이고 번뇌의 뿌리는 아집이고 무아인 의미를 깨달은 지견이 아집을 멸할 때 지견으로 생긴 고통도 사라지는 것이죠. 따라서 모든 근심을 넘어 고통에서 벗어난 해탈을 얘기하는 것이죠.

 

 

이 이치를 보이는 교조야말로 다른 교조와 다른 특별함을 가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교조들이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 무아를 말씀하시는 분은 오직 부처님 한 분뿐 그 누구도 없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교조는 모든 허물이 다하여 덕이 원만하고 교법은 유정에게 해가 없으며”

  

 

교법에서 유정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것으로 치면 나형파가 불교보다 낫습니다. 외도승자(勝者大雄-Rsabha Jina)를 따르는 이들을 나형파라는 것은 그 때문일 것입니다. 교조이므로 승자라고 합니다. 아마 비폭력 행위에 있어서는 불교보다 더 앞서 있습니다. 그들은 비폭력은 실로 대단합니다. 이것은 사실이며 모두가 인정해야할 바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비폭력' 을 행해야 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자비' 에 있습니다. 물론 10 가지 불선업의 계율을 가르칠 때 타인에게 해를 입히면 그 결과로 고통이 돌아온다는 고통의 과보를 두려워하므로 해를 가하지 않도록 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불교는 자비에 뿌리를 둔다' 는 말씀처럼 '타인은 나와 마찬가지로 고귀한 존재이며, 그 대상에게 해를 입혀서 안 된다' 는 생각에 있습니다.

 

 

그러나 초심자에게는 해를 입히는 것이 악업이며 곧 자신에게 해를 초래한다는 식의 나쁜 결과를 보임으로 그 원인을 없애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자비가 가능한 이유는 오늘 아침 말씀 드린 것처럼 사법인과 관련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해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번뇌로 인한 고통의 시달림에 연민의 마음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안됐다고 생각하는 정도겠지요. 별다른 생각이 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번뇌를 제거할 수 있음을 안다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벗어나지 못하고 시달리는 것을 보면 강한 연민이 일 것입니다.

 

 

벗어날 방법이 보이는데 벗어날 방법을 구하지 않고 고통을 원치 않으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어쩌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나겠지요. 더욱 강한 자비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지혜로 일어난 자비심이란 많은 고통들이 존재하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알았을 때 일어나는 자비심입니다. 이성과 지혜가 함께 하는 자비심이지요.

 

 

고통을 없앨 방법을 모른다면 고통에 시달림을 보고 ‘어떻게 하나’ 하고 자포자기해서 한숨 쉬는 것 외에 별도리가 없겠지요. 이것은 지혜가 없는 자비심입니다. ‘비폭력’ 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비폭력을 이끌어내는 사상에서 불교가 가지는 다른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교법은 유정에게 해로움이 없으며 견해는 상일주재의 아가 없음을 인정하는 세 가지 차이가 있다.”

 

 

대종의론에서 이르기를 “아집의 경계를 막고 막지 않는 내외의 두 가지 지견이 있네.”  여기에 뜻이 다 드러납니다.

 

 

아집의 경계인 아의 독립적 실체를 성립하는 것 외에도 이를 막는 혹은 막으려 노력하는 이가 불교도입니다. 견해는 상일주재의 아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불교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외도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외도의 종파들은 이와 반대로 교조에게 허물이 있고 덕을 원만히 갖추지 않았으며

교법은 유정을 해하거나 살생함이 있고 견해는 상일주재의 아가 있음을 주장하는

세 가지 차이가 있다.”

 

 

'상일주재의 아(我)' 라는 것은 이전 티베트와 인도에 전해지지 않았던 기독교나 이슬람 유태교에서 말하는 '영혼의 개념'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고 나서 정토나 천계를 가거나 혹은 악도에 떨어지는 영혼이 있다' 고 생각합니다.

 

 

이 삶이 다하여 다른 곳으로 가는 주체가 있지요. 우리가 인정하는 전생과 내생의 개념으로 다음 생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천국이나 지옥에 감을 얘기합니다. 죽음으로 몸이 무너지기 때문에 오온과 다른 나, 영혼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외도들이 ‘상일주재 아(我)’  하는 이들은 ‘전생에서 이생으로 이생에서 내생으로 감이 존재한다. 이 몸의 상태에서 나를 얘기한다면 몸이란, 무너지는 것이고, 전생으로부터 이생에 오거나 후생으로 갈 수 없다. 따라서 이 몸에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인 나라는 것이 필요하다!’ 이로써 오온과 별개의 대상인 ‘나’ 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는 영원불멸한 상(常고)이고 유일하며 오온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주재자(主宰者)인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지금 불교 이외의 종교 대부분은 모두 그럴 것입니다. 제가 모두라고는 하지 못해도 말입니다. 대부분이 상일주재의 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집의 경계를 막고 막지 않는 내외의 두 가지” 라는 말씀이 지난 3천 년 간 지속되고 있는 셈입니다. 불교가 전해진 때부터면 3천년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오신 2500년 전부터 지금까지라 할 수 있겠지요. 

 

 

'두 번째 유경(有境)의 세 가지는 인(人.보트가라), 식(識), 능전성(能詮聲) 세 가지로 첫 번째 수교행경부(隨敎行經部)는 온(蘊)의 상속(相續)이 보트가라의 사례이다.' 이 부분은 앞의 설일체유부와 동일합니다.

 

 

'수이행경부(隨理行經部)는 의식(意識)을 보트가라의 사례로 인정한다. 두 번째 량(量)과 비량(非量)의 두 가지 심식이 있으며 량에는 현량(現量)과 비량(比量) 두 가지이다.'

 

 

'현량에는 근현량(根現量) 의현량(意現量) 자증현량(自證現量) 유가현량(瑜伽現量) 네 가지이며' 

'근유색(根有色)은 량일 수 없으니 명료의식으로 존재하지 않고 경계를 인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교의에서는 량(量)을 식(識)으로 규정합니다. 유무는 량식이 인식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대상을 요량하는 식이 요량한대로 실제 존재하고 요량한 식이 있다면 그 또한 착란이 아닌 식이 대상을 요량하면 그 대상이 존재한다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식에 대상이 현현함으로서 대상을 인식하더라도 인식한 대로 존재하지 않을 때는 착란식이 됩니다. 인식한 대로 실제 존재하지 않아 그런 식을 전도식 혹은 착란식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유무는 인식체인 량식의 유무에 따라 결정되고 량식의 존재는 자증분에 의해 성립합니다.

대상의 존재는 인식 수단인 량식의 유무에 따르고 이런 량식의 성립은 자증분에 의해 성립됩니다.

량식에 관해서 중관에서의 설명이 좋습니다. 쉽게 수긍이 갑니다.

 

 

명언으로 존재함은 대상에 식이 현현하고 그것을 인지한 식이 있고 식이 인식한 대로 다른 식으로도 인식되는 것 이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처음 인식한 후 두세 번 확인해본 그대로 인식되거나 또 다른 측면에서 분석 가능하다면 앞서 ‘이것이 있구나’ 라고 인식된 것이 분석 후에도 계속 그대로일 때 그 식이 바른 의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인식한 상태에서는 바로 량식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두 가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량식이 존재하는 것은 자증분에 의해 성립되지만 그 식이 량식인지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대상의 존재는 량식으로 성립되고 량식의 존재는 자증분으로 성립됩니다. 일반적으로 량식이든 비량식이든지 간에 어떤 식이든 그에 해당하는 자증분이 있지요.

 

 

량식의 존재를 자증분으로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량식(바른 의식)' 인 것은 어떻게 성립할까요?

그렇지요. 다른 의식으로 성립 입증되는 것이지 자증분 그 자체로는 량식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일반상식에서 말한다면 무엇인가를 보았을 때 다시 살펴보고 또 다시 확인하여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서 '나는 이렇게 보인다. 너도 그렇게 보이느냐' 고 물어 보고 이것을 또 확인되었을 때 있다는 것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인식한 의식이 바른 의식 량식임을 그제야 확신할 수 있습니다.

 

 

평소 과학자들이 조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사람이 분석하여 얻은 결과가 있다면 한 사람의 결과로써 결론을 내리지 않고 거듭 반복하여 분석 확인하고 다른 사람이 같은 방법을 써서 분석했을 때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면 있다고 결정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이 바른 의식임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측면에서 사유 분석을 통해 량식이란 것을 확인하지 않고는 량식임을 알기 어렵습니다. 어쨌든 량식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량식이 량식임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측면에서의 점차적인 분석을 통해서만이 가능하지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현량에는 근현량, 의현량, 자증현량, 유가현량”

 


자증분이라는 것을 설명하자면 일반적으로 식에는 자증분과 타증분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소취행상과 능취행상이 있습니다.

 

 

소취상이 있는 것은 타증분이라는 것이고, 인식대상의 식과 인식하는 식이 둘이 아닌 상으로 인식하는 식 이것을 능취행상이라 합니다. 다른 소취는 인식하지 않고 식 그 자신을 인식하는 식이므로 자증분이라 합니다.

 

 

유가현량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관수행, 어떤 대상에 습을 들인 것으로 인해 대상이 분명하게 인식되는 것이 유가현량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비량의 심식에 재결식(再決識)”

 


량식이란 것은 대상에 거짓되지 않는 것 바른 것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식 자신의 힘으로 바른 식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 찰나의 의식은 첫 번째 찰나에 존재했던 량식을 뒤따른 것이므로

식 스스로의 힘으로 대상에 바른 식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량식은 대상을 새롭게 바르게 인지하는 의식이어야 한다는 설명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재결식은 대상을 인식한 그대로 실제 그렇기 때문에 량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귀류논증은 이것을 량식으로 인정합니다. 이 교의에서는 량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대상을 새로이 인식하는 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각각의 종의에서 인정하는 량식이라는 것은 의식 그 자체의 힘으로 어떤 대상을 바르게 새로이 인식하는 식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바르게 인식하는 식으로 정의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대상의 자상(自相)을 인정하기 때문에 가지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물의 의존성, 명언가유를 얘기하는 교의에서는 다소 량식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비량(非量)의 삼식(三識)에 재결식(再決識), 전도식(顚倒識), 의(疑)”

 


의문을 대개 끊어야할 대상으로서 규정할 때는 번뇌의 성질을 가지는 의문을 얘기합니다. 알아야할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의문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취해야할 의문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예를 들어 경서를 배울 때 경서의 앞머리에 사종요지를 말씀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경서를 배우는 대근기들이 처음에 경서의 내용이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이러한 가르침의 내용이 필요한가라는 필요성, 필요에 의해 이루는 궁극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하여 경서의 내용이 있고 내용이 일반적 이야기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뜻을 이루는데 도움과 관련성이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 이것은 또한 일시적으로 지식의 습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앎으로써 가지게 되는 이익과 궁극의 목적, 이렇게 내용과 필요성 궁극적인 목적을 알고 나서 이러한 관련성을 알 때 비로소 경서를 배우려고 하는 진지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경서를 봄과 동시에 혹은 어떤 스승이 말씀했다는 이유만을 가지고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는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함에도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라는 의지에 대한 가르침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아무튼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의심이나 의문이 없으면 확인하려 하지 않습니다. 분석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분석하기 않을 것이고 분석하지 않으면 뜻을 끝까지 규명하여 완전한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것 같다고 두는 것은 대략적으로 아는 것에 그치는 것입니다.

 

 

분석을 통하여 확신을 얻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은 사의(伺意)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이유를 생각하고 분석하여 바로 이것이다. 틀림없다. 이것밖에 길이 없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요새말로 백퍼센트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백 퍼센트라고 할 때는 확신한다는 얘기지요. 몇몇은 백보다 천이 더 많은 수라고 해서 천 퍼센트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 아무튼 이유를 사유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유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분석하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하고 분석하려는 마음이 생기려면 의문과 의심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의문과 의심은 취해야할 바입니다. 실제 그러한 것에 스스로 잘못된 이유 생각으로 인해

의심 즉 취해야할 바를 취하여 매진하는데 방해가 되는 의심은 번뇌의 의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결식, 전도식, 의” 번뇌의 의심인지 아닌지는 의심이 가는 대상에 관련해서 얘기할 수 있습니다. 사의(伺意)는 우연히 보게 된 것 알게 된 사실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사의라고 합니다.

 


“현이불지(現而不知)는 다섯 가지이다.” “이러한 것에서 현량(現量)과 현이불지(現而不知)의 두 가지 심식은 반드시 무분별식과 착란식이며” 현이불지는 오근식의 안식이 형상에 착하고 있는 상태에는 의식이 소리를 듣되 인지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비량(比量)과 사의, 의 세 가지는 오직 분별식이다. 식이 대상을 요량할 때 유상(有相)으로 지각하고” 조금 전에 설일체유부처럼 무상(無相)이 아닌 유상으로 식이 대상을 인식할 때 대상의 상이 현현하는 것을 지각하는 것을 말하는 듯합니다.

 


“세 번째 어떤 소전(所詮)을 이해하게끔 하는 청취대상이 능전성(能詮聲)” 이 부분은 특별한 것이 없네요.

 


“이를 소전에 의해 분류하면 전종성(詮種聲)과 전취성(詮聚聲)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또 이를 표전방식으로 분류하면 전법성(詮法聲)과 전유법성(詮有法聲) 두 종류이다.” 다른 대상의 특성을 배제하는 소리와 않은 것을 의미하지요. ‘소리의 무상성’ 에서 무상성은 병이나 기둥의 무상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소리의 무상성은 다른 대상의 무상성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소리는 무상하다’ 라고 할 때는 직접적으로 소리는 무상이라는 것만을 의미할 뿐, ‘화병은 무상하다’ 라는 사실을 배제한 소리의 무상성을 따로 전달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지요. ‘소리의 무상성’ 은 전법성(詮法聲)이고 ‘소리는 무상하다’ 는 전유법성(詮有法聲)입니다.

 

 

“도(道)는 도의 소연(所緣)은 사제(四諦)의 무상(無常)을 비롯한 십육행상(十六行相)이며 세품무아와 세품인무아를 동의어로 인정한다.” 이 교의에서는 법무아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인(人)의 상일주재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조품인무아(粗品人無我)이며 인이 주체적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세품인무아(細品人無我)로 인정한다.”

 


“도(道)의 소단(所斷)에는 인아집(人我執)과 구번뇌(具煩惱)인 무지와 구번뇌가 아닌 무지 등의 명칭 정도만을 인정하며 이외의 법아집과 소지장(所知障) 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유부와 같다.”

 


“삼승의 도를 수도오위(修道五位)로써 설명하고 지(知), 인(忍)의 16찰나를 견도(見道)로 인정한다.”


“현량의 현현하는 경계(顯境)는 반드시 자상(自相)이어야 함으로 세품인무아를 성문의 견도 무간도의 인지대상(能取所緣)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견도의 무간도가 유가현량이 되고 이것의 인식 대상인 세품인무아는 차전(遮詮)이므로 자상이 될 수 없지요. 따라서 인아(人我)가 공한 행온(行蘊)이 직접 요량되는 대상으로 규정합니다.

 

 

네 가지 종의를 자세히 구분하여  이 논사는 이 종의의 견해를 가지고 있고, 저 분은 저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구별하는 것은 아마 티베트의 논사들에게 강하게 보이는 경향인 것 같습니다.

 


앞의 논사 중에 예를 들어 집경론의 주석을 지으신 시와중네라는 분은 용수보살과 무착보살의 견해가 일치한다고 인정하면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티베트의 논사들이 아주 자세히 연구한 결과로써 확연히 판별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장하는 바에 있어서 근(根), 도(道), 과(果) 세 가지 가운데 근에 관한 주장에 있어 경(境)을 말하자면 모든 소지(所知)가 삼성(三性)으로 귀납됨을 인정하니” “제행(諸行)을 의타기성(依他起性), 제법성을 원성실성(圓成實性), 이외의 것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 인정하는 까닭이다.” 
 

 

사대 종의철학에서 속제에 대해 인정하는 바가 다르고 주로 무아사상의 뜻을 이해하는 정도와 깊이에 따라 사대 종의철학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먼저 초심자들이 탐.진의 마음을 줄여가는 방법이 무엇인가. 예를 들어 탐.진을 비롯한 번뇌가 일어날 때 좋아 보이는 대상에 탐착이 생기고 미워 보이는 대상에 싫어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대개 타인에게 좋아 보인다는 이유로 나에게 탐착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미워 보이는 이유로 나에게 분노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좋아 보이고 미워 보인다는 것 좋고 싫어 보이는 것이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굉장한 차이가 있지요. 나와 관련해서 좋고 싫은 대상을 두는 것입니다.

 

 

따라서 좋아 보이는 대상에 집착하고 미워 보이는 대상에 분노하는 것은 나라는 아집이 강할수록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의 벗과 적에 대한 구분이 더 강해지지요. 나라는 아집이 다소 줄어든다면 나의 벗과 적이 존재할 수 있지만 나의 벗과 나의 적이라는 이유로 생기는 탐.진의 강한 마음은 다소 줄어들 것입니다.

 

 

평소에 자주 비유합니다만 예를 들어 시계가 상점에 진열되어 있을 때 나의 시계라는 것을 사기 전에는 좋은 점을 보고 좋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구입한 후에 나의 시계가 되었을 때는 상점에 진열되어 있을 때보다 더 좋아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나의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대상에 대해 더 강한 집착이 생기는 것이지요.

 

 

따라서 먼저 탐,  진의 거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 나만이라는 고집과 독단적인 마음을 줄여나갈 방법' 을 강구할 것을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언가 하면 어제 그제 이미 말씀드렸듯이 나의 몸, 내 가족, 내 벗, 내 머리, 내 가슴이라 할 때 이 모든 것의 바탕인 고정된 나라는 것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떠오른 대로의 ‘나’ 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고정된 나라는 생각이 적어질수록 나의 형제, 나의 벗, 나의 것에 집착하는 마음이 다소 줄어들 것입니다. 그런 집착의 마음이 줄어들수록 거기에 해가 되는 반대편에 대한 미움이 줄어들 것입니다.

 

 

석명론에 “아집에서 분노가 일어나니” 라고 말씀하셨듯이 집착의 마음이 강할수록 분노와 미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탐, 진의 마음을 줄이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 나라는 강한 집착을 줄이기 위해 ‘상일주재의 아가 없다’, ‘오온과 다른 별개의 상일주재의 나라는 것이 없다', '오온에 의지하지만 오온을 주관하는 주재자로써 독립적인 나는 없다’ 는 것을 사유하고 확신을 얻어 습을 들인다면 나라는 마음이 줄어들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로 나에게 좋아 보이고, 싫어 보인다고 인식하는 '나' 는 인무아를 수행함으로써 줄이는 것뿐만 아니라 좋아 보이고 싫어 보이는 '대상' 에서 무아를 생각해 본다면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법무아를 설하신 것이 이것입니다. 오온을 비롯한 법 또한 그러합니다.

 

 

‘아(我)’가 보이는 대로 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물론 중관학파에서 말하는 진실로 존재하지 않음의 의미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라는 고정되고 진실로 여겨지는 대상이 없단 것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누리는 대상인 법 또한 고정되고 독단적이며, 진실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립시키는 하나의 논리로 외경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얘기합니다. 모든 것이 인식하는 심식 상에서 습기가 드러날 뿐이지, 심식에 나타나는 대상이 실체로써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바깥의 경계 자체에서 고정되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꿈속의 현현과 같다고 한다면, 예를 들어 대개 사람들이 꿈속에서 집착했던 것을 꿈에서 깨어났을 때 ‘무슨 소용이 있나, 내 의식에 그렇게 나타난 것일 뿐이다.’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바깥 경계에 지목할 수 있는 벗과 형제를 향해 강한 집착이 생길 수 있지요.

 

 

지목의 대상인 집착이 생기는 대상은 자신의 마음에서 습기가 나타난 것일 뿐이다. 심식에서 현현한 것일 뿐이라고 한다면 외경으로부터 고정된 진실로써 존재한다는 것으로 여겨서 탐, 진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유식의 경서에서 말하는 법무아입니다.

 

 

오온의 법 또한 보이는 대로 존재하지 않음이 법무아입니다. 인무아와 법무아 두 가지 집착하는 나와 집착하는 대상, 이 두 가지 모두 독립적이고 진실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실유의 의미에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외경으로 성립된 진실이 없다는 것, 승의로써 성립하지 않는 법이 각각의 존재 방식으로 성립되어 있는 궁극의 자성으로 보입니다.

 

 

'자성으로 성립한다면 자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승의로 성립하는 것이고, 어떤 경계의 자성을 규명해 들어 갈수록 그 자성이 분명해져야 하는데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승의로써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색을 비롯한 제법이 승의로써 성립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합니다. '더 들어가서 어떤 대상이 보일 때 대상자체에서 성립하는 것 같지만 대상자체에 성립되는 것이 없다. 저편에 가설한 것 명언가유다' 라고 설명합니다.

 

 

명언가유로 인과와 행위, 행위자를 규정할 수 있다면 마음의 아집과 실집을 가장 강력히 대적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저쪽에 성립된 것이 결코 없다. 오직 이름으로 가설된 것뿐' 이라는 것이 가장 강력합니다.

 

 

명언가유의 이치로 행위와 행위자를 규정하지 못하면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방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성 없이 연기라는 이유로써 무자성과 진실로써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이해를 한다면

아집이나 실집에 이보다 더한 대치법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종의철학을 단계적으로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 달라이라마 법문

출처 : 수보리
글쓴이 : 아침이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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