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 보리심 수행

[스크랩] 근원이 맑아야

수선님 2019. 1. 20. 12:20
 

 

논쟁이 때로는 약이 될 수 있다

 

첫째, 논쟁은 구술(口述)로 해야 한다.
 
 
둘째, 논쟁의 내용을 양측에서 기록한 다음, 기록자는 자신의 서명을 한 뒤 대담자에게 그 기록문의 인정 서명을 받아야 한다.
 
 
셋째, 대담자는 인용하는 책과 논문의 명칭을 정확히 밝혀야 한다.
 
 
(중략)
 
 
다섯째, 첫 시간은 기독교 측에 부여하고, 그 시간은 불교의 허위성을 제시하기 위해서만 사용할 것, 그 다음 시간은 불교 측에 부여하고, 불교 측은 불교의 허위성에 관한 기독교의 주장에 대해 필히 변론한 후 기독교의 허위성에 대해 반론해야 한다.
 
 
(중략)
 
 
여덟째, 양측 어느 쪽도 논쟁 중 소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책임져야 한다.
 
 
아홉째, 논쟁 중 논쟁자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조용히 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 협정서에 서명을 한 사람은 청중들이 평온하고 냉정을 기하도록 그 책임을 부여한다.
 

<파아나두라 대논쟁> (석오진 편역, 운주사)에서 인용 참고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8월 하순의 스리랑카.
 

서해안에 자리 잡은 고요한 섬마을 파아나두라에 난데없이 1만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군중들의 앞자리에는 스리랑카의 스님들과 기독교를 대표하는 유럽의 목사들이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불교와 기독교가 한판 붙어보자고 모인 자리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33년 전인 1873년 당시 스리랑카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을 때였습니다. 영국이 네덜란드로부터 지배권을 물려 받고서 모든 분야에서 수탈이 자행되었는데 특히나 불교 국가인 스리랑카를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나라로 규정짓고 기독교로 개종해야만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국교인 불교에 대해서도 엄청난 탄압이 가해졌습니다.
 
 
 스님들은 분개하였고 결국 공개토론을 제안하였습니다. 세 차례의 논쟁이 벌어진 뒤 마지막으로 1873년 8월26일과 28일 양일에 걸쳐 다시 한 번 논쟁은 벌어졌습니다.
 

얼핏 보아서는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의, 미신을 숭배하는 무리들’ 에 비해 자신만만한 강대국 목사들의 기세는 말할 것도 없이 스님들의 패배를 짐작케 합니다. 하지만 두 종교의 대표자들은 위의 원칙에 의거해 논쟁을 시작하였습니다. 상대 종교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표명을 조목조목 따지되 그것을 글로 적어서 기록에 남겼습니다.
 

논쟁이 끝난 뒤 불교와 기독교 양측은 서로 자기들의 승리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그 논쟁의 승리는 불교 측의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논쟁의 여파가 흥미롭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이 서구 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와 정체성에 엄청난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스리랑카는 남방 상좌부 불교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양식있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불교를 알아 보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미국인 육군대령 울코트는 아예 불교에 귀의하고 스리랑카로 들어와서 매우 활발한 불교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은 상당히 주목할 만합니다.
 

35살의 청년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루고 초전법륜 이후 향한 곳은 당시 강대국이었던 마가다국에서 가장 신망이 두터웠던 바라문 가섭 삼형제의 처소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백세를 훌쩍 넘겼으니 나이로 보나 계급으로 보나 거느린 제자들로 보나 ‘새파란 청년’ 붓다가 상대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과감히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쳤고 그들의 교리와 종교의례에 대한 오류와 맹점을 지적하였습니다.
 
 
 결국 가섭 삼형제는 청년 붓다에게 귀의하였고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 또한 부처님의 위력을 절감하고 독실한 제자가 됩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종교들이 요즘 부쩍 ‘대화’ 하고 ‘화해’ 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가급적 논쟁은 피하자고 합니다만 과연 논쟁 없이 이루어지는 대화가 얼마나 진실한지는 짚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논쟁이 있어야만 상대 종교를 알려고 머리와 가슴을 열 것이요, 양식 있는 종교인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종교를 반성하고 진심으로 받아 들여야 할 종교가 무엇인지를 선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망언을 하는 바람에 전 세계 무슬림들의 맹비난을 받자, 일종의 화해의 몸짓인 듯 인구 99%가 무슬림인 터키를 방문하였습니다. 문제의 본질을 짚지 않고 슬쩍 넘어 가려는 교황의 몸짓에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의 눈빛이 곱지만은 않습니다. 원탁 토론이라도 벌여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교황이 흔쾌히 승낙했으면 좋을 텐데 싶습니다.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열다섯 살 때 넘어져 머리를 바닥에 부딪쳤는데 그만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가난한 살림에도 어떻게든 시력을 되찾게 하려고 그의 어머니는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 번 다시 밝은 세상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암흑 속에서 하루하루를 절망에 빠져 보내던 청년은 아주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큰스님이 법회를 여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스님을 친견하기로 하였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운명을 탓하며 사람다운 일을 하나도 하지 못하고 살아 가느니 어떻게든 덕이 높은 스님을 뵙고 그 분의 법문 한 자락이라도 들어보고 죽는 것이 그나마 보람 있는 일이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그들은 전 재산을 다 팔아서 여비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생 끝에 스님이 법문을 여는 도시에 도착하였습니다.
 

앞을 보지 못해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도시로 몰려들고 있는지 청년은 직감으로 알아 차렸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큰스님의 손을 한 번 잡아보거나 가사라도 한 번 만져본다면 그 고되고 긴 여행은 의미가 있을 성 싶어 청년과 어머니는 인파를 헤치고 가장 앞줄로 나아갔습니다.
 

스님은 사람들 틈 속에서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가 청년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동안 어떤 치료를 받아 왔는지, 지금의 상태는 어떤지를 세심하게 물어보았습니다.
 

청년의 딱한 사정을 들은 스님은 자신의 주치의에게 이 청년을 한번 검진해줄 것을 부탁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다음 날 의사는 믿기 어려운 희소식을 하나 가지고 청년을 찾아 왔습니다. 어떤 젊은 스님이 자신의 안구를 기증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망한 자의 안구기증도 아니고 젊디젊은 스님이 제 눈을 떼어서 주겠다는 제안인 것입니다.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리거나 환호성을 지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청년은 무덤덤하였습니다. 그는 한동안 가만히 앞을 응시하다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젊은 스님은 며칠 전에 저를 찾아와 안구를 기증하겠노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 제안을 받고는 처음에는 하늘을 날아 오를듯 기뻤습니다. 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니 그 스님의 제안을 받아 들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몇 해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괴로움이 얼마나 큰지는 당해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저로 인해 그 고통의 길을 걸어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 스님의 안구를 받을 수 없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을 바라며 어머니와 함께 가재도구를 다 팔아서 떠나온 순례 길이었습니다.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기적이 청년 앞에 벌어지려는 찰나였습니다. 청년은 손을 내밀어 제 몫의 행운을 움켜쥐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행운을 사양하였습니다. 자기 때문에 고통을 겪을 사람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자·비·희·사’ 이것은 내가 내 이웃과 낯선 사람 그리고 말 못하는 짐승들에게까지 품어야 할 네 가지 마음가짐입니다. 흔히 ‘자비심’ 또는 ‘자비’라고 줄여서 말합니다. 자(慈)는 다른 사람을 벗으로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정 어린 마음으로 가깝거나 낯선 이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비(悲)는 나의 벗에게 슬프거나 고통스런 일이 생기면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참 안됐구나!” 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내게 일어난 일처럼 여겨서 내 마음이 아프고 내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희(喜)는 나의 벗에게 생긴 기쁜 일을 내 일처럼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사(捨)는 담담한 마음입니다. 맘껏 아파하고 맘껏 기뻐하지만 감정에 이끌려서 자신을 놓쳐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전 재산을 톡톡 털어 순례 길에 나선 앞 못 보는 청년은 누가 보아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구호와 자비의 손길에 가장 먼저 의지해야 할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안구기증을 제안한 젊은 스님을 염려하는 그 마음 속에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깊은 자비가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토록 아픈데 다른 이까지 아프게 할 수 없고, 다른 이가 아플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 없다는 그 마음이 자비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청년의 이야기는 <용서>(달라이 라마ㆍ빅터 챈 지음, 류시화 옮김, 오래된 미래, pp.185~190)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화내는 것에 대해서 관대한 종교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 팔다리가 다 베여도 화를 내지 않는 인욕선인의 교훈이라든지,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까지 내주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말이야 쉽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보면 부처님이 아니고서야 불뚝 불뚝 치솟는 분노를 참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게다가 ‘화를 내는 일은 옳지 않다’ 고 알고 있으면서도 치솟는 화를 억제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일만큼 참기 힘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막 믿음을 일으킨 한 남자가 모처럼 부처님과 승단의 스님들을 모두 초청하여 아주 맛난 음식을 대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남자는 자기 집에 부처님과 천 명이 넘는 스님들이 몰려오자 말할 수 없는 자부심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는 손수 스님들의 발우에 음식을 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스님들은 그날 아침에 하필이면 미리 죽을 먹어서 속이 든든하였습니다. 이미 배가 불러 있던 스님들은 “조금만 주시오” “조금만 주시오” 라며 자꾸만 사양하였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좀 서운해졌습니다. “스님, 믿음을 일으킨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의 공양이라서 조금만 받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음식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조금도 사양하지 마시고 맘껏 드십시오.”
 

스님들이 대답했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죽을 배불리 먹고 왔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남자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대체 이 스님들은 나의 공양초청을 받았으면서도 오늘 아침에 죽을 먹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애초에 계획했던 커다란 보시는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남자는 불쾌해지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스님들에게 모욕을 주려고 발우에 넘치도록 음식을 채우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 드시든지 가져가서 드시든지 맘대로 하십시오.”  자기는 온갖 정성을 들여서 귀한 음식들을 준비하느라 고생했는데 스님들은 ‘얻어먹는 주제에’ 고맙게 받아서 먹지 않고 이미 배부르다고 사양하는 것이 아니꼬웠던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공양을 마치고 부처님과 스님들이 떠나자, 집에 홀로 남은 남자는 곰곰 생각에 잠겼습니다. 암만 생각해도 자기가 오늘 한 짓이 잘한 일 같지가 않았습니다. 돈과 정성을 쏟아 붓고도 화를 내고 심술을 부렸으니 이익은 커녕 해를 자초한 것입니다.
 

그는 불현듯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서둘러 부처님 계신 곳으로 달려가서 자초지종을 아뢰었습니다.
“아, 부처님. 저는 부처님께서 떠나신 뒤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후회합니다. 저는 오늘 참 많은 일을 하였지만 그렇게 화를 내고 불쾌해 하며 심술을 부리고 스님들을 모욕하였으니 복을 지은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제가 오늘 한 일은 복된 일일까요, 복되지 않은 일일까요?”
 

부처님은 과연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꾸짖으셨을까요? 하지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오늘 승단을 초청하던 그 순간부터 그대는 많은 복을 쌓았소. 또한 비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음식을 주었던 그 순간에 이미 그대는 많은 복을 쌓았소. 보시를 크게 하였으니 큰 복을 받을 것이오.”
 

이 말을 들은 남자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떠나갔습니다. 그 남자가 떠나간 뒤에 부처님은 스님들을 불러서 조용히 꾸짖으신 뒤에 재가자의 초청을 받은 날은 다른 사람이 제공한 음식을 미리 먹어서는 안 된다는 율을 제정하였습니다. <마하박가>
 

기껏 고생하며 남 좋은 일 해놓고는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여 버럭 화를 내는 바람에 오히려 원성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를 내는 것이 옳지 않음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화를 내고 후회하는 남자에게 부처님이 그것을 문제 삼아 질책하지 않고 “좋은 일했다” 며 그의 선행과 장점만을 인정하고 격려해준 것이 의외였습니다.
 

그럼, 걸핏하면 화를 내는 사람은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요? “길 잃은 사람이 서둘러 길을 바꿔야 하듯이 분노를 일으킨 사람은 뉘우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속으로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후회하고, 분노에 사로잡혔던 일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라고 <출요경>에서 일러주고 있습니다.
 
 
젊은이여. 오늘 이 맑은 아침에 그대는 부모님의 유언에 따라 온 세상을 향해 공손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구려. 나는 깨달은 자, 붓다요. 그대의 진지한 모습 속에는 세상을 현명하고 알차게 살아가고픈 바람이 담겨 있기에 내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성자들이 전해주는 처세술을 들려 주고자 하오. 그대에게 들려 주는 이야기에 귀기울여 보지 않겠소?
 

그대는 부자가 되고 싶소?  그렇다면 돈을 모으는 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지금의 재산이 줄어 들지 않도록 다음의 여섯 가지를 명심하길 바라오.
 

첫째, 술에 빠지면 안 되오.
 
 
둘째, 노름이나 도박에 시간을 보내지 말아야 하오.
 
 
셋째, 방탕한 짓을 하지 말아야 하오.
 
 
넷째, 어디 구경거리가 없는가에 정신이 팔려 다니면 안 되오.
 
 
다섯째, 악한 벗과 사귀지 말아야 하오.
 
 
여섯째, 게으르지 말아야 하오.
 

그대는 사업상 또는 순수한 교제를 이유로 자주 술자리를 갖게 될 것이오. 하지만 술에 빠지진 말아야 하오. 술에 빠지면 재물이 없어지고, 몸에 병이 생기며, 자주 싸움을 벌이게 되고, 나쁜 이름이 퍼지며, 성품이 사나워지고, 머리가 둔해지오. 만약 그대가 술 마시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대의 집안 살림은 날로 줄어들 것이오.
 

노름이나 도박은 절대로 하면 안 되오. 여기에 빠지면 당연히 재산이 날로 줄어들고, 도박에서 이기면 원한을 사게 되고, 현명한 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게 되고,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 기울이거나 신뢰 하지 않게 되고, 사람들이 자꾸만 멀리하게 되고, 결국 남의 재산을 훔칠 마음을 내게 되오. 노름을 그치지 않으면 그의 재산은 날로 줄어들 것이오.
 

방탕하면 자기 몸을 보호하지 못하고, 재물을 보호하지 못하며, 가족과 자손을 보호하지 못하고, 언제나 깜짝깜짝 놀라고 두려워하게 되며, 항상 온갖 괴로움과 불행이 그를 따라다니며, 허망한 일을 당하게 되오. 방탕한 행동을 그치지 않는 사람의 재산은 날마다 줄어들 것이오.
 

구경거리에 정신이 팔리면 모임이 있을 때마다 가수를 구하느라 춤꾼을 구하느라 온갖 악기를 구색 맞추느라 시간과 돈을 허비할 것이니 그의 재산은 날마다 줄어들 것이오.
 

악한 벗과 사귀면 속임수를 배우게 되고, 으슥한 곳만 찾아다니게 되며, 남의 아름다운 사랑을 망치고, 남의 소유물을 탐하게 되고, 재물과 이익만 따라다니게 되며, 남의 허물 들춰내기를 좋아하게 되오. 게으름의 해악은 다음과 같소.
 
 
지금 형편이 넉넉하다고 해서 장래를 위해 굳이 일하려 들지 않는 것이요, 지금 가난하고 궁핍한데도 부지런히 일하려 들지 않는 것이요, 추우면 춥다고 일하려 들지 않는 것이요, 더우면 덥다고 일하려 들지 않는 것이요, 때가 이르면 이르다고 일하려 들지 않고, 때가 늦었으면 늦었다고 일하려 들지 않는 것이오. 게으름피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의 집안 살림은 날로 줄어들 것이오.
 

그대는 어떤 친구를 사귀고 있소? 혹시 누군가 비굴한 모습으로 친하게 지내려 다가온다면 경계해야 하오. 왜냐하면 그런 이들은 자기가 준 것을 반드시 빼앗을 것이요, 적게 주고 많은 것을 그대에게 바랄 것이요, 그대의 세력이 두려워 억지로 친한 척 하는 것이요,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친한 체하기 때문이오.
 

그리고 술을 마실 때에 사귄 사람, 도박할 때에 사귄 사람, 음란한 짓을 할 때 사귄 사람, 유흥가에서 사귄 사람이 친하게 지내자며 다가 오거든 경계해야 하오. 그런 자는 그대에게 악한 벗이 되어 반드시 그대에게 손해를 입힐 것이기 때문이오.
 

그대는 어떤 친구를 사귀고 싶소? 잘못을 그치게 하는 사람,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사람, 남을 이롭게 하는 사람, 고락을 함께하는 사람을 사귀기 바라오. 이런 사람은 그대에게 매우 유익할 것이고, 그대를 구원하고 보호하리니 그대는 서둘러 그런 사람과 친해지려 해야 하오.
 

남을 이롭게 하는 사람은 상대가 게으르지 않도록 지켜봐주고, 상대가 게을러 재산을 잃지 않도록 보호해주며, 상대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켜주고, 따끔하지만 유익한 충고를 남몰래 건네는 사람이오.
 

정말 좋은 친구를 사귀고 싶거든 이런 사람을 찾아야만 하오. 이런 사람이라면 어둔 밤길을 비추는 불빛처럼 그대의 삶을 환히 비춰줄 것이오. <장아함 선생경>
 
 
젊은이여, 사람은 자기 이름 석 자로만 불리기 보다는 누구의 자식, 누구의 부모, 어떤 회사의 직원, 누구의 선배 혹은 후배…라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게 마련이오.
 

부모가 없다면 그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터이니 세상의 인간관계 속에서 부모자식 보다 더 소중한 관계가 있을까 모르겠소. 그대가 누군가의 자식이라면 명심해야 할 것이오. 그대는 부모를 받들어 모셔서 부족한 것이 없도록 세심하게 살펴야 하오.
 

어디를 가거나 무슨 일을 하기에 앞서 항상 부모에게 알려야 할 것이요, 부모가 하는 일을 거스르지 말고 따라주어야 하오. 그리고 부모의 바른 명령을 어기지 말 것이요, 부모가 하던 바른 가업을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하오.
 

만약 그대가 누군가의 부모라면 자식이 악한 일을 할 때 그냥 넘어 가서는 안 되고, 가르치고 타이르되 모범이 되어야 하며, 자식 사랑이 뼛속까지 사무쳐야 하며, 자식에게 좋은 짝을 구해 주어야 하고, 자식에게 필요한 것을 적절한 때에 대어주어야 하오.
 

또한 젊은이여, 만일 그대는 한 여자의 남편이라면 예의를 갖추어서 아내를 대해야 하오. 그리고 위엄을 지킬 것이요, 아내에게 궁핍한 기색이 보이지 않도록 집안경제를 책임져야 하고, 아내가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도록 옷과 장신구를 사주어야 하며, 의심하지 말고 아내에게 전적으로 집안일을 맡겨야 할 것이오.
 

만약 그대가 한 남자의 아내라면 다섯 가지 일을 명심해야 하오. 남편보다 먼저 일어나고 남편보다 나중에 앉으며, 부드러운 말을 건네고 남편의 뜻을 따라주고 남편의 기색을 잘 살펴서 먼저 그 속마음을 알아주어야 할 것이오.
 

친척들이 화목하게 어울리고 고루 잘 살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더 힘을 낼 수 있소. 친척을 대할 때 다음의 일들을 기억해야 하오. 친척에게는 무조건 베풀어주고, 상냥한 말을 건네며, 이익이 생기면 함께 나누고 속이지 말아야 하오. 그리고 친척이 게을러 재산을 잃지 말도록 보호해주고, 두려운 일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지켜주고, 친척의 단점을 일러줄 때도 남몰래 해야 하며, 절대로 친척을 비난하지 말고 칭찬해주어야 하오.
 

젊은이여, 그대에게는 학교 은사이거나 집안의 어른이거나 하는 웃어른이 계실 것이오. 그럴 때 그대가 모시는 윗사람이 필요한 것을 대주어야 하고, 공손한 마음으로 모셔야 하며, 존중하고 우러러 받들어야 하며, 윗사람의 가르침을 어기지 말고 따라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잘 기억해야만 하오.
 

만약 그대가 누군가의 윗사람이라면 법대로 아랫사람을 잘 길들여야 하고, 아랫사람이 듣지 못한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하고, 아랫사람이 의문을 품으면 시원스레 해답을 주어야 하고, 좋은 벗을 소개해 주어야 하고, 조금도 아까워하지 말고 그대가 알고 있는 모든 기술과 지식을 다 가르쳐 주어야 하오.
 

젊은이여, 그대는 분명 직장을 다니거나 뭔가 일을 하고 있을 게요. 그렇다면 그대에게는 분명 고용주나 직장상사가 있을 터이고 그대는 또 누군가의 상사이거나 선배일 것이오. 만약 그대가 누군가의 고용주거나 직장선배라면 다섯 가지 일을 기억하길 바라오.
 
 
아랫사람의 능력을 잘 살펴서 그에 알맞게 일을 주어야 하고, 양질의 식사를 제때에 맞추어 제공해야 하며, 보수를 늦추거나 거르지 말고 제때에 줄 것이요, 고용인이나 직장 후배가 병이 나면 제대로 된 검진을 받게 하고 건강을 회복하게 해야 하며, 몸과 마음의 재충전을 할 수 있도록 휴가를 주어야만 할 것이오.
 

그리고 그대가 만일 누군가의 고용인이거나 직장 후배라면 그대는 출근시간을 비롯한 모든 약속된 시간을 어겨서는 안 되며, 빈틈없이 일을 처리해야 하고, 그대 노동의 대가가 아니면 다른 몫을 바라지 말아야 하고, 일을 하되 조리 있고 순서에 맞추어 진행할 것이요, 그대의 고용주나 직장 선배의 명예를 위해주어야만 하오.
 

관계 속에서 살아 가면서 이런 일들을 다 실천하기 어렵다면 네 가지만은 기억해두기 바라오.
 
 
풋풋한 인심으로 항상 상대에게 무언가를 주고,
절대로 사나운 말을 건네지 말고 부드럽고 조리에 맞는 말을 건네며,
언제나 자기보다 상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함께 일하고 함께 이익을 나누시오.
 
 
이 네 가지만 기억한다면 그대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요, 설혹 어려움에 처했더라도 그대의 편이 되어주는 이들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오.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에 귀 기울여 준 그대에게 한없는 행복이 있기를 바라오.<장아함 선생경>
 
 
찬 바람이 부는 추위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찬 바람 속에서는 아무런 의욕도 나지 않습니다. 뭔가 계획을 세워 의욕적으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일어나지 않고 안온함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추위는 또 그렇다 쳐도 소음과 매연으로 뒤덮인 도심에서는 맑은 대기, 청명한 하늘을 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추위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종일 더운 방 속에서 편안하게 누워 있거나 따뜻한 거실에서 하루를 보내는 일일 것입니다. 이 춥고 차가운 바람이 몸을 움추리게 막는 곳을 떠나 맑고 따스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도망 가고픈 심정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뒤덮여 고함치고 미워하고 시기하느라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차갑고 매정한 생활 속에서 외로워 하고 있다면 이와는 정반대인 세상이 있습니다. 대기는 맑고 깨끗하며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그 누구를 만나도 즐겁고 행복한 세상, 바로 열반의 경지입니다. 모처럼 찾아온 겨울 연휴에 가장 어울리는 캠프지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멋진 캠프지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런 곳이 있는지 조차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열반이라는 캠프지에 가는 방법을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혼탁하기 그지없는 세상에서 나쁜 짓을 저지르며 악에 물든 채 그냥 저냥 묻어가는 사람들에서부터 맑고 청량한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하여 정착한 사람까지 해서 모두 일곱 종류의 사람을 비유로 들면서 말입니다.
 

첫 번째는 항상 물속에 누워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과 행동이 더러움에 물들어 매일매일 열 가지 나쁜 업을 짓고 그에 따른 괴로운 과보를 받으며, 나고 죽는 윤회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물에서 나왔다가 다시 빠지는 사람입니다. 불자라면 언제나 잊지 말고 실천해야 할 다섯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 계율 지키기, 남에게 베풀기, 법문 많이 듣기, 지혜롭기입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사항을 닦고 익히기는 했지만 견고하게 익히지 못하여 잃어 버리는 사람이 바로 두 번째에 해당합니다.
 

세 번째는 물에서 나와 머무는 사람입니다. 앞의 다섯 가지 실천법을 잘 닦고 익혀서 수행의 기본이 견고하게 잡힌 사람입니다.
 

네 번째는 물에서 나와 머물고 머문 뒤에는 살펴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다섯 가지 실천법을 완전히 몸에 익힌 뒤에는 그에 멈추지 않고 다시 현실을 자세히 살펴 봅니다. 그리하여 괴로움, 괴로움의 집기,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정확하게 압니다. 그리하면 덧없는 자기에 대한 집착과 계율에 얽매이는 일과 의심이라는 세 가지 번뇌를 끊고 성자의 첫 번째 지위에 올라 괴로움을 없애게 됩니다.
 

다섯 번째는 물에서 나와 머물고 머문 뒤에는 살펴보고 살펴본 뒤에는 건너가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네 번째 사람의 경지를 모두 밟은 뒤에 한 걸음 더 나아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진 단계로서 성자의 두 번째 지위에 해당합니다.
 

여섯 번째는 물에서 나온 뒤에는 머물고 머문 뒤에는 살펴보고 살펴본 뒤에는 건너가고 건너간 뒤에는 저쪽 언덕에 이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다섯 가지 실천 사항을 모두 닦아 익힌 뒤에 사성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며, 이로써 욕심과 성냄과 자기는 영원하다는 그릇된 견해와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일과 의심이라는 다섯 가지 번뇌를 끊습니다. 성자의 세 번째 지위에 해당합니다.
 

일곱 번째는 물에서 나온 뒤에는 머물고 머문 뒤에는 살펴보고 살펴본 뒤에는 건너가고 건너간 뒤에는 저쪽 언덕에 이르며, 이른 뒤에는 언덕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다섯 가지 실천 사항을 모두 닦아 익힌 뒤에 사성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며 이와 같이 알고 보았으므로 모든 번뇌에서 그 마음이 완전히 해탈하였습니다.
 
 
또한 자기가 해탈한 줄을 알고는 영원히 윤회에서 떠난 사람으로 성자의 네 번째 지위에 해당합니다. (중아함 수유경)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겨울 시즌과 명절 연휴철. 하지만 매번 바쁜 일정에다가 교통 체증, 혼잡한 인파에 시달리느라 정말 몸과 마음을 개운하게 쉬고 오기가 힘듭니다.
 

혹시 내년 시즌에는 열반이라는 캠프로 떠나보실 계획 한번 세워보시겠습니까? 지금부터 믿음과 계율 지키기, 남에게 베풀기, 법문 많이 듣기, 지혜롭기의 다섯 가지 사항을 차분하게 실천해 가신다면 아마 내년 겨울에는 가장 완벽한 갬프에서 행복해 하실 것입니다.
 
  - 이미령(동국역경원 역경위원)

 

출처 : 수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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