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 보리심 수행
입행론의 지혜품에는 다른 종교와 불교 내 하의종의에 대해 반박하는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어떤 연유로 이것이 잘못돼 저것이 잘못됐다고 반박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종교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종의철학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주종교에서 부류를 나눈다면 창조주를 인정하는 부류와 인정하지 않는 부류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두 부류 가운데 불교는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입니다.
그럼 불교는 어떤 종교인가? 타종교에도 있듯 불교에도 사랑과 자비에 관한 가르침 있지만 불교의 사랑과 자비는 좀 더 광범위합니다. 사랑과 자비를 성립시키는 논리로써의 연기가 불교 사상의 근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 그 누구도 얘기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연기사상으로 사랑과 자비를 설명할 때 심원하고 광범위해집니다. 연기사상이 불교의 뿌리가 되므로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을 굴리셨을 때 사성제의 법륜을 말씀하신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행복과 고통이라는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기기 때문에 원치 않는 고통과 이것의 원인 집(集), 원하는 행복과 이것의 원인 혹은 이루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 바로 사성제입니다.
불교사상의 근본은 바로 연기입니다. 연기에는 인과의 연기가 있는데 이것은 불교의 종의(宗義)에서 공통으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인과 연기는 더욱 심층적인 것으로 ‘의지하여 가설된 연기’에 근거하는데 즉 의지하여 가설된 것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라는 연기사상은 불교 가운데 중관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과의 연기사상을 모든 종의에서 말하는 부분이고 의지하여 가설된 연기는 중관에서 중점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의 기초로 가유(假有)라는 용어가 설일체유부에서 점차 나오기 시작합니다. 설일체유부를 비롯한 하위철학에서 상위체계로 가면서 깊이를 더하게 됩니다. 불교의 모든 종의에서 언급하고 또 인정하는 근본이 연기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에서도 깊은 신앙심은 필요합니다. 창조주에 대한 깊은 신앙은 필요하지만 그 절대적 믿음이 다른 사람들도 같아야 한다거나 그렇지 않아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땐 문제가 발생합니다. 각자에게 깊은 신앙심은 필요하지만 사회 전체를 생각해 볼 때 인간에게 다양한 종교가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는 긍정적 사고도 필요합니다.
깊은 신앙은 자신의 종교 안에서 중요한 것이지만 사회 전체를 볼 때 다양한 존재와 신앙의 존재가 당연하고 그것이 현실입니다. 특히 불교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신앙과 존중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의 종교와 진리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에게 하나의 종교와 진리를 강요하고 믿어야 한다는 식으로 전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conversion(개종)' 이것은 문제가 됩니다. 아마 이전에는 가능했던 일일 것입니다.
각자의 영토에서 자신의 한 종교를 믿고 의지했던 시대에는 한 영토 내에서 종교 전파가 전혀 문제시 되지 않았습니다. 티베트의 경우 옛날에는 우리 영역 안에서 법을 전파했던 것은 무리가 없었지만 지금 시대에 외국에 가서 불교와 전혀 관련 없는 곳에서 억지로 불교를 전하려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이전에 제가 몽고에 갔을 때 몽고에 한국인 기독교인 몇 사람이 있더군요. 원래 기독교인들과 친분이 있었지만 한국 선교단이 저를 만나러 왔기에 “몽고는 불교사회라 기독교를 선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얘기 했습니다. 얼마 전 이탈리아에서도 이에 관해 한 기자가 묻기에 종교가 서로 화합해야지 무리하게 선교하여 개종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 기독교 신문에 제가 한 얘기에 대한 비판의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선교가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겠지요. 비판을 하더라도 저는 사실을 말할 수밖에요. 이것은 말썽을 일으킬 뿐 도움이 안 됩니다. 따라서 조상 때부터 믿어왔던 종교를 믿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한국의 경우 옛부터 불교국입니다. 지금은 많은 기독교인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서로 화합하는 것이죠. 모든 종교를 존중해야 함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여러분 모두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철학적 근거가 있는 모든 종교는 사랑이 교훈이어서 인간에게 도움이 되며 지금까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 종교의 핵심은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형식과 전통의 두 가지 면모를 드러내게 됩니다. 형식처럼 관습적인 면과 종교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면,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교는 얘기했듯이 사랑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인욕과 만족도 가르칩니다. 이러한 것이 성립하는 근거로 창조주를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는 다양한 사상을 얘기합니다. 종교는 수천 년을 지내왔기 때문에 어떤 종교라도 존재한 곳의 문화 관습과 연관성을 가집니다. 때문에 종교는 전통적인 면모를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두 가지 측면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 얘기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떤 종교도 철학적 교훈적인 면이 있습니다. 철학적 부분은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다양한 철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두 사랑과 자비를 근본으로 하는 공통점 때문에 종교가 서로 화합할 수 있는 것이고 다양한 철학도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다른 쪽에서는 인정하는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하지만 이것은 필요합니다. 인간 각자의 성향과 기질이 다르고 시대와 장소에서 원하는 바가 달라 다양한 견해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불교 안에서도 중생의 근기와 성향 기질이 다양하기 때문에 대승과 소승이 있고 다양한 사상 견해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이러한 다양한 철학들은 따질 것 없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이루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사랑과 자비라는 것입니다. 이런 공통점 때문에 종교가 서로 화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 종교의 핵심과 전통이라는 두 가지 측면 중 핵심을 따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힌두교든 기독교든 불교든 대부분이 핵심을 잃고 형식과 관습적인 면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평소 아는 인도인들에게 얘기하곤 합니다. 아니 모든 종교인들에게 얘기 합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고 안 믿고는 각자의 자유지만 종교를 믿지 않는 것이 더 행복하다면 종교를 가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의 종교를 가진 후에는 바른 자세로 핵심을 따져 믿음을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고 ‘나는 이 종교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이름 뿐 그 종교의 가르침이나 적용, 실천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관습에 따른 종교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은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불교인은 법당에 가서 염불 기도 하지만 밖에 나가서는 이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모습이 종교에 존재합니다. 종교를 믿지만 전통과 관습에 의할 뿐 실제 어떤 가르침이 있는지 알고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모든 종교는 방금 얘기 했듯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지만 종교를 존중하는 것도 역시 중요합니다.
존중한다고 해서 신앙해야 하는가라고 한다면 이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존중과 신앙은 다릅니다. 각자의 종교를 신앙하되 여타 모든 종교를 존중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 존중할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교리를 가진 주종교들은 인간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에 각자의 신앙을 갖고 존중하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의 신앙과 종교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의 신앙과 진리는 종교에서 필요합니다. 개인에게 하나의 종교와 진리가 중요한 것은 일념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않는 귀의’라고 합니다. 이렇게 불교 안에서도 절대적인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절대적 신앙이라고 해서 다른 종교를 부정하면 문제입니다.
사랑과 자애를 얘기할 때 종교와 관련을 짓습니다. 수천 년 사이 인간사회에 종교라는 것이 발생했습니다. 여러 종교가 있지만 태양이나 불을 숭배하거나 거기에 신이나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는 종교에는 특별한 사상이나 철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사상과 철학이 있는 종교들, 인도의 경우에는 3천 년 전부터 종교에서 철학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종교적 믿음을 규명합니다. 유태교든 기독교, 이슬람교든 사상적 뒷받침이 있는 종교들은 교훈으로 선한 마음이나 사랑, 인욕, 만족에 해당하는 삼학(三學)을 얘기하는 것은 같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각 종교에서 핵심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인간 본래에 존재하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랑과 자애의 중요성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자애에서 말하는 사상의 배경과 방법은 다양하다 하겠습니다. 어떤 종교는 창조주의 존재를 얘기합니다. 창조주는 곧 주인이므로 창조주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실천해야 하며 창조주의 창조물에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면 코란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전에 무슬림 스승과 얘기한 적 있습니다만 코란에는 창조주가 창조한 모든 생명체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창조주가 창조했다고 하지만 실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사랑의 필요성인 것입니다.
사랑과 자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갈등과 충돌이 생기기 때문에 인욕의 필요성과 만족에 관한 가르침이 나오게 됩니다. 역시 핵심은 사랑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21세기, 과학과 물질이 최고에 이른 지금도 세계 곳곳에 종교를 믿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의무나 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익과 필요성을 인식한 인간 스스로가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물질의 발전은 육체적 안락을 가져 옵니다. 이것은 외부적 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육체적 안락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분별, 생각으로 인한 좋고 싫음이 생기고 이로 인한 행.불행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마음 안에서 방법들을 찾아야 합니다. 분별로 생긴 좋고 싫음과 원인은 마음에서 찾아야지 외부적 조치인 수술이나 돈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육체적 행.불행을 예로 들면 굶주림이나 더위, 추위는 좋은 외부환경으로 육체적 안락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과 물질을 최상의 조건으로 갖췄다 해도 마음이 불행해 고통을 느끼는 이들이 많습니다. 마음의 불행은 외부 조건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잘못된 생각에서 오는 불행입니다.
즉 없애야할 고통과 이뤄야할 행복에는 육체적 감각에 의한 행.불행과 마음에 의한 행.불행 두 가지가 존재함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비중이 있는가 하면 바로 내면의 생각 마음 상태를 근거로 한 정신적인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여러 가지 육체적 고통을 정신적 만족으로 감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정치적 목적과 뜻을 이루기 위해 육체적 어려움을 감내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들은 해탈과 성불을 위해 굳이 거창한 목표가 아니더라도 각자의 종교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육체적 어려움을 자처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자처해 어려움을 겪는 것이지 원하지 않은데 생긴 어려움은 아닙니다. 이는 마음의 만족이 육체적 어려움과 고통까지 자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불행이 생기는 대신 오히려 마음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이 가능합니다.
반대로 마음이 불행하면 아무리 좋은 외부조건을 갖춘다 해도 마음의 불행을 가시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에 의해 행.불행의 비중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 감각에 의한 행.불행에서 고통을 피하려는 점은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행.불행이 동물에게도 있지만 인간만큼은 아닙니다.
인간이 마음에 의한 행.불행을 더 강하게 느끼는 것은 동물보다 월등한 사고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뇌체계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동물보다 다양한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인간의 뛰어난 사고력으로 다양한 분별이 생기고 이로 인해 다양한 행.불행이 생깁니다. 따라서 동물과 인간 중 인간이 다양한 분별의 결과로 정신적 행.불행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육체 감각에 의한 고통을 없애고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 외부의 물질적 진보가 필요합니다. 한편 마음에 의한 행.불행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고 외부적 조치만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의 훈련을 통해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이루는 법을 구해야 합니다.
- 달라이 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