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과 수행

[스크랩] [현응스님 `깨달음과 역사` 세미나] 깨달으면 기타도 칠 수 있다고?

수선님 2019. 2. 3. 11:05

깨달으면 기타도 칠 수 있다고?

현응스님의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세미나 성료
한국불교에서 금기시해왔던 문제 제기에 장내 후끈



“불교의 길은 지혜의 길-이해하는 불교로 가야”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라는 세련된 주제의 학술세미나가 9월 4일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렸다. 현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스님의 첫 저서 <깨달음과 역사> 발간 25주년을 맞춰 열린 이날 세미나에서는 현응 스님이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를 발제하고 이에 대한 조성택 교수(고려대 철학과), 홍창성 교수(미국 미네스타주립대 철학과), 정경일 새길기독교사회연구원장의 논평, 그리고 종합토론 순으로 진행됐다.
 

현응 스님의 발제는 ‘깨달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으로 세미나 이전부터 논쟁의 소지가 농후했다. “수십 년을 투자해도 현실적으로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는 조계종 승가교육 수장의 지적은 사실 불가(佛家)의 열린 전통이 아니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사건이다. 깨달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평생을 노력해도 성취할 수 없는가? 돈오(頓悟)라는 말이 민망하다는 현응 스님의 이날 질문은 선가에서는 그야말로 ‘돌직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선방은 아직 말이 없다. 내로라하는 조실, 방장, 선원장, 구참 수좌들도 침묵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너그러운 집안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껍데기만 남은 다 죽은 집안이어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 이런저런 곳에서 나오는 피상적 반박이나 비판은 논외로 하고.
 

현응 스님은 깨달음을 ‘마음을 확실히 깨닫는 것, 몸과 마음의 완성된 경지이자 모든 번뇌를 끊고 고매한 인격을 이룬 높은 경지’라고 파악했다. 현응 스님은 그러나 문제는 이런 깨달음의 내용이 추상적이며 부정확하다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현응 스님은 모두에 이 글이 “깨달음에 대한 한국불교의 현실적 흐름을 대폭 변화, 전환시키자는 의미의 글”이라고 밝혔다.
 

현응 스님은 ‘깨닫는다’는 뜻을 ‘이해(understanding)의 뜻으로 말한 것 같지는 않다’면서도 달리 뚜렷한 대안을 찾기 어렵다는 현실을 토로한다. 결국 스님은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는 내용을 최초로 서술한 <마하박가(대품율장)>을 인용한다. 율장은 경장보다 먼저 송출된 기록이므로 <마하박가>야말로 가장 앞선 시기에 결집한 서술이라고 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발제를 하고 있는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스님.
 

“깨달음이 잘 이해하는 것이라면 수준이 떨어지는가?”
 

<마하박가>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직후 그 내용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음미하면서 점검하는데 그 내용은 삶의 괴로움을 연기(緣起)의 관점, 즉 원인, 조건, 결과, 생성, 소멸의 관점으로 파악하는 것이었다는 데 주목한다. 이어서 다섯 수행자에게 첫 설법하는 내용을 서술하는데 그 내용은 연기의 관점으로 괴로움의 발생, 원인, 소멸, 소멸로 이끄는 방법(사성제)을 말하는 것이며, 앎의 지혜와 봄에 대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현응 스님은 이를 근거로 부처님의 깨달음은 ‘연기관의 이해를 확립함’이며, ‘삶의 괴로움의 문제를 이러한 통찰과 이해로서 해결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즉 <마하박가>의 서술은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몸과 마음의 고준한 경지’라는 엄청나게 높은 단계의 목표로 설정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주장이다.
 

이런 류의 주장이 ‘깨달음’의 경지를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이라는 일각의 비판도 의식한 듯 현응 스님은 묻는다.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수준이 떨어지는가?”

 
현응 스님은 다양한 예시를 들어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했다. 결국 내린 결론은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설법, 토론,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었으며, 부처님은 가르침을 청할 때 삼매와 선정을 통해 수련하라고 지도하지는 않으셨고, 설법을 했고 듣는 이는 질문과 대화를 통해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곤 했다”고 결론지었다. 다면 “대화와 토론을 위해서는 자기 생각이 정리되어야 하니 이를 위한 사유행위가 뒷받침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현응 스님은 “초기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불경이 설법, 문답과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음은 이런 까닭이다”라고 강조했다.

 
“정념은 잘 기억하여 사유하는 것, 삼매가 결합되면서 본질 벗어나”
 

불교언어에 대한 독특한 해석도 눈길을 끌었다. 예컨대 정념(正念)의 표현인 사띠(念, 憶念)의 의미가 ‘잘 기억하여 사유하는 일’이라는 본래적인 의미에서 부처님의 설법의 양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테마별로 기억하는 요령, 즉 신수심법의 네 가지 테마로 부처님의 설법내용을 정리하여 기억하는 사유방식인 사념처(四念處), 37조도품의 염근, 염력, 염각지 등으로 변화하다가 나중에는 이것들을 삼매(선정)와 결합한 위파사나 방식으로 성찰하는 식으로 변화해갔다는 해석이다.


현응 스님은 원래의 사띠에다 삼매와 선정이 결합하는 집중적 수행법이 대두되었고,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는 층위가 생겼고, 그 기준에 사선, 팔정, 구차제정 등 선정의 수준 정도도 포함되었으며, 이런 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불교는 ‘이해하는 깨달음’에서 ‘이루는 깨달음’으로 변화해갔다고 주장했다.
 

현응 스님은 특히 중국 선불교의 간화선도 인도의 사띠와 거의 같은 성격으로 태동되고 변화되었다고 주장했다. 조사선은 스승과 제자들의 문답, 대화, 여러 가지 제스쳐와 자극적인 행동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했으며, 그 대화와 행동들의 사상적 기반은 반야(공, 연기적 통찰)나 불성(여래장) 등 대승불교사상이었고, 표현과 행동양식은 은유, 파격, 역설을 넘나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원래의 간화선 방법은 송나라 말기를 지나 원나라 시대에 ‘이야기(화두)’ 속의 특별한 구절이나 단어 한 글자에다 마음을 집중하거나, 의심하거나, 성찰하면서 선정에 깊이 드는 방식으로 변했으며, 이때부터 선, 또는 간화선은 외형적으로는 좌선을 중시하는 앉은뱅이 불교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스님은 조계종풍을 펼친 혜능은 좌선을 배격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현응 스님은 은유, 파격, 역설의 선적인 이야기를 평소 기억하고 있으면서 그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음미하며 그 의도와 핵심을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 기존의 간화선 방식이라면, 특정한 어귀(語句)에 집중하여 선정에 깊이 드는 것을 강조하는 선은 그 성격과 패러다임이 전혀 다르다고 강조했다.

 
“사띠와 선이 본질에서 벗어나는 과정 흡사한 것, 흥미로워”
 

현응 스님은 인도의 본래적 사띠, 즉 말씀을 기억하여 사유하는 수행이 훗날 삼매와 결합한 위빠사나 수행으로 변모하였듯이, 중국 선불교도 조사스님들의 이야기와 대화를 탐구하는 본래적 간화선에서 선정에 집중하는 선정 위주의 간화선으로 변화하였다는 그 유사점은 대단히 흥미롭다고 밝혔다.
 

자신의 논지의 배경을 인도의 정념과 중국의 선을 통해 개괄한 현응 스님은 이어 현대사회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에 대한 자신의 평소 견해를 털어놨다. 즉 깨달음이 모든 존재들의 연기성과 공성을 잘 이해하는 것이라면, 즉 이해의 수준이라면 여러 가지 의문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고 전제한 스님은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이라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텐데, 과거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평생을 수행한다고 애쓰는 스님들은 무엇인가? ▲연기성과 공성을 잘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이라면, 어느 시대나 동일한 수준의 이해인가? ▲오늘날 현대 문명사회의 현대인이 잘 깨달으려면(이해하려면) 어떤 방법으로 노력해야 하나? 라는 질문을 던졌다.  
 

현응 스님은 ‘깨달음과 역사’에서 ‘깨달음’과 ‘역사’가 서로 연계되어야 하지만 다른 차원의 영역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깨달음은 연기를 잘 이해한다는 영역이고, 역사는 방향과 내용을 선택하여 구체적으로 행위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 둘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다른 차원의 두 영역을 하나의 삶에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 현응 스님의 주장이다. 즉 깨달음과 역사는 다른 차원의 영역이지만 이 둘을 결합하면 보디사트바(보살)가 된다는 것이다. 현응 스님에 따르면, 연기와 공을 잘 이해하는 깨달음을 얻어 존재들의 변화성과 관계성을 통찰함으로써 실재의식으로부터 해탈한 자유정신을 얻은 자가 곧 아라한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에 도달한 아라한이 그가 살고 있는 역사에 현실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마음을 내어서 실제로 각종 바라밀행(다양한 방편행)을 하는 사람, 이를 일러 보살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현응 스님은 이어 ‘깨달음이란 이해(understanding)다’라고 하는 전제 아래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첫째, 불교의 깨달음이란 것이 존재들의 속성을 잘 이해하는 정도의 것이라면 불교는 일반적 사상이나 철학과 무엇이 다른가? ▲둘째, 연기나 공을 잘 이해하면, 불교신자라 할 수 있나? 일반인도 사상적 호기심으로 연기나 공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수 있고, 그럴 경우 얼마든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며, 심지어 다른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도 이해의 경지에 도달하면 불교신자인가? ▲셋째, 이해하는 정도의 깨달음을 가지고 와서 과연 생사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가 그것이다.


지정토론문을 발표하고 있는 미국 미네소타주립대의 홍창성 교수. 
 

“실천적 원리에 깨달음이 작동하는가? 이것이 중요”
 

현응 스님은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문제, 즉 실천적 원리에 깨달음이 작동하는가? 이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자동차로 비유할 경우, 엔진을 잘 만드는 것과 서울 부산으로 잘 갈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디사트바, 즉 깨달음과 역사가 결합된 형태가 보살의 삶이라는 것이다.
 

사실 현응 스님의 이같은 주장은 깨달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 제기와 함께 권오민 교수(경상대)로부터 촉발된 제2의 정혜 논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응 스님의 주장은 구체적인 표현이나 예시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불교의 두 길, 즉 지혜의 길과 선정의 길 가운데 지혜의 길을 주창한다는 점에서 그 맥을 같이 한다.
 

권오민 교수는 ‘지성불교’의 회복을 주장하며, 과연 한국의 불교에서 지성은 작동하고 있는가? 라는 물음을 불교계에 던진 바 있다. 권 교수는 이 같은 주장과 함께 선정의 길을 지지하는 입장의 슈미트하우젠 교수를 비판한 바 있다. 또한 슈미트하우젠 교수의 주장에 동조하는 조성택 교수(고려대 철학과) 등 국내 학자들에 대한 지적도 논문을 통해 밝힌 바 있다. 권 교수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서는 조준호 박사가 토론문 형식으로, 다른 여타의 불교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반박을 했고, 이어 권 교수가 재반박을 한 바 있다. 이후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불교학계에서 정혜논쟁은 지속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발제가 이번 세미나에서 ‘지성불교의 중요성’을 다시금 거론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선정의 길’ 쪽에 비중을 둔 것으로 알려졌던 조성택 교수가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에 대한 지정토론문에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지혜의 길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선회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성택 교수는 ‘깨달음과 역사에 대한 독법’이라는 제목의 지정토론문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조성택 교수 “불교사는 불설에 대한 해석의 역사”

 
“불교사는 불설에 대한 해석의 역사였다. 부처님께서 법을 펴신 이래 그 법에 대한 해석은 시대에 따라 늘 변모되어 왔으며 때로는 서로 다른 다양한 해석들이 공존하기도 하였다. 상좌부, 대승, 밀교, 선 등은 새로운 해석의 결과물들이며, 대승전통에서도 반야, 유식, 화엄, 정토 등 서로 다른 해석들이 같은 시대에 공존하기도 하였다. 불교사가 해석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조 교수의 이런 주장은 그 표현 및 내용에서 권오민 교수의 논문 내용과 다르지 않다. 조 교수가 선정의 입장에서 지혜(지성)의 입장으로 선회한 연유는, 지혜의 입장에 선 현응 스님의 발제에 대한 예우차원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본인의 소신을 바꾼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기왕에 권오민 교수로부터 시작된 정혜 논쟁이 이번 현응 스님의 발제와 조성택 교수의 동조 토론문 등을 계기로 보다 건설적이고 활발발한 방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불자들이 적지 않다.
 

조성택 교수는 지정토론문에서 ‘불교전통, 특히 대승불교 전통에서 ’기억‘의 문제는 단지 ’저장기억‘과 같은 암기적 기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갱신되는, ’시간이 활성화된‘ ’활력적 기억‘이라고 생각된다. 대승불교를 통해 부처님은 ’과거‘의 존재가 아니라 보살의 ’기억‘을 통해 늘 현존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이어 ”한국불교가 그리고 현응 스님의 ’이해하는 깨달음‘ 그리고 ’깨달음의 역사‘가 그 새로운 ’수레‘를 견인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창성 교수 "가끔은 이런 분도 태어나는구나!"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 교수는 ‘깨달음과 자비 그리고 깨달음과 열반산출성의 원리’라는 제목의 지정토론에서 현응 스님의 주장에 적극 동조했다. 홍 교수는 미국에서 책과 발표한 글을 통해 현응 스님과 만났다. 그는 현응 스님의 글을 읽으면서, 앵무새가 아닌 자기 소리를 하는 철학자를 정말로 오랜만에 만난 기쁨을 맛보았다고 고백했다. 홍 교수는 현응 스님을 일러, 한국에도 가끔씩 이런 분이 태어나는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며 최고의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홍 교수는 열반에 든 깨달은 이들이 왜 자비행을 실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4가지 단계를 통해 답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홍 교수가 제시한 4단계 답은 이렇다.
 

1. 불자는 연기의 진리와 모든 유정물이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2. 불자는 깨달음과 열반 산출성의 원리와 극대화의 원리로 그것이 보편적으로 적용됨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즉 불자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깨달음을 산출하는데 기여하는 일을 함이 좋고 옳다고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3. 자비행은 깨달음을 산출하는데 기여한다.
4. 열반에 들어 있는 깨달은이들도 불자들이다. 그러므로 열반에 들어 있는 깨달은 이들도 자비행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추구하는자들도 자비행을 실천해야 한다. 
 

정경일 원장 “현응스님의 불교적 성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선물”
 

정경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은 ‘깨달음, 그리스도인을 위한 선물’이라는 제목의 토론문에서 현응 스님의 발제를 ‘탈-신비화, 탈-경계화, 탈-종교화’라는 세 가지 ‘탈’의 주제로 이해하면서, 그의 ‘불교적’ 성찰이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선물이 될 수 있는지를 탐구했다. 정 원장은 ‘세 가지 탈(脫)의 주제로 살펴본 현응 스님의 성찰은 ’불교의 현대화‘로 요약할 수 있다며 오늘의 불교가 직면하고 있는 현대적 상황은 종교적 다원성과 사회적 고통의 지구화라고 규정했다. 정 원장은 “이제 모든 종교와 모든 고통이 모든 곳에 있다”며 “이런 현대적 상황에 충실히 참여하며 응답할 때 불교의 깨달음은 모든 종교에게, 아니 모든 인류에게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당대성에 철저히 참여하면서 깨달음과 역사를 연결한 현응스님의 성찰이 동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도 의미 있는 선물”이라고 강조했다.  
 

지정토론에 이어 종합토론이 진행됐다. 시종 열띤 분위기 속에서 토론이 진행됐다. 토론은 일문일답식으로 정리했다. 
 

정경일 원장 “궁극적 실재 믿는 그리스도인도 깨달을 수 있나?”
 

정경일 원장-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불교를 공부하느냐? 어떻게 불교를 수행하느냐? 라는 질문을 받을 때, 한 가톨릭의 신부와 일본의 야마다 선사 이야기를 떠올린다. 가톨릭 신부의 ‘그리스도인은 선을 공부할 수 없느냐?’는 질문에 선사는 ”가톨릭 신부는 몸을 갖고 있지 않느냐?‘고 답했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그리스도인이 깨달음과 해탈에 이를 수 있나? 궁극적 실재, 즉 있음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선(불교)을 잘 이해해서 해탈에 이를 수 있을까? 과연 예언자적 보살은 가능한가? 한국사회에서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가 나눠져 있고, 불의한 방식으로 나눠져 있는 현실에서 보살은 불의한 자들의 편에 서서 싸울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대한 불교적 답을 해달라?


열띤 종합토론 시간. 시종일관 열기 속에서 진행됐다. 
 

현응스님 “실재를 실제로 믿는 분들이라면 글쎄…선정은 내용없는 깊이”
 

현응 스님- 저의 발제 의견은 한국불교의 변화를 모색하기 위한 현실적 목적을 가진 글이라고 전제했다. 정 원장의 글을 통해 참고가 많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와 불교,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은 기독교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몇 해 전 가톨릭공의회에서 새롭게 역사와 조응하는 선언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선언을 통해서 과학과의 화해, 더 이상 창조론에 연연하지 않는 것, 힘 있게 강조하지 않는 유연한 가톨릭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창조론에 매몰되지 않는 기독교, 그 대신에 사랑의 기독교로 가는 과정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불교도, 마치 기독교가 창조론을 고집하지 않고도 사랑의 종교로 갈수 있듯이, 깨달음, 체험적 깨달음을 강조하지 않고도 자비의 가르침으로 얼마든지 갈 수 있고, 그렇게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교도 그 길로 가야한다.


또 하나는 한국불교가 역사의식의 빈곤, 왜 한국불교는 빈곤한가? 언젠가부터 방법론만 말하는 불교의 한계가 극복되어야 한다. 삶의 문제, 강자와 약자의 대립 문제 등에 대해 이론적으로 성찰하고 대안을 마련하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늘 이 무엇인가? 참나가 무엇인가? 즉 깨달음을 이루는 방법론에만 국집하고 현실적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국불교는 엔진의 발전을 생각하지 않고 늘 외양, 디자인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불교에게 무엇인가를 물으면, 거기에 대해서는 '아이 해브 노 아이디어!'다, 오직 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면 다 해결된다는 듯이 답한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한국불교는 우리 사회와 삶속에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본다.


선정과 삼매는, 저는 내용 없는 깊이 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용 없는 깊이, 내용성이 없는 과정이다. 삼매의 깊이나 순일도는 있지만, 내용 없는 깊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까 말한 예언자적 보살은 불교적으로 충분히 가능하지만, 현재의 모습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방향을 바꾸고 내용을 달리하면, 본래 자비행을 중시하는 불교로 되돌아온다면 충분히 예언자적 보살이 가능하다고 본다.


궁극적 실재론에 근거한 그리스도인들이 해탈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하겠다. 실재를 실제로 믿는 실재론도 있고, 실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실재론적 입장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대승에서 말하는 불보살 신앙은 의도적으로 필요해서 만들어진, 의도된 불보살, 만들어진 불보살이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라는 것도 있는데, 사실 그 원래 제목은 <미혹으로서의 신>이다. 어쩌면 불교에서의 불보살이 <만들어진 신>이라고 할 수 있다. 공, 가, 중의 만들어가는 실재, 실재가 필요하니까, 실제로 만들어진 불보살이 위로가 되고, 그래서 만들어서 의지하듯이 만들어진 실재론을 활용하듯이 그런 실재라면 그리스도인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확고한 신념체계로서의 실재론이라면 어떨지 모르겠다.
 

홍창성 교수 “현응스님이 청와대 주인이라면 사회복지 어떻게 해결하겠나?”

 
홍창성 교수- 제 지정토론문은 사실 현응 스님의 글이 멈춘(미완성된) 그곳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백 명의 철학자를 붙들고 너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반대하나? 라고 물으면 99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묻겠다. 한사람이 버스운전사가 있다. 이분이 야간 불교대학을 다니면서 불교를 열심히 공부해서 연기와 공을 깨달았다. 이 분에 있어서 적정한 방편바라밀은 무엇인가? 그리고 현응스님이 교육원장 그만두고 버스운전을 시작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방편바라밀을 실천하실 것인가?


또 하나, 현응스님이 청와대 주인인데,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공과 연기를 깨달았다면 사회복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두세 개 예를 들어서 설명해 달라.
 

현응스님 “연연하지 않고 유연하고 자유스럽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현응 스님- 홍 교수의 토론문은 사실 제가 앞으로 관심을 갖는 그 부분이다. 자비의 문제는 늘 화두처럼 가지고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단체도 만들어서 민중불교, 대승불교 운동을 해왔는데, 언젠가부터 정리된 제 생각은 깨달음으로서 역사의 문제(자비의 문제)를 표현하거나 구사하거나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고자 한다.


헤겔과 막스의 문제, 즉 헤겔은 정신에서 물질의 문제, 막스는 물질에서 정신의 문제를 말하는 것처럼, 불교인들은 반드시 먼저 깨달음이 우선한다. 나는 바로 이것을 뒤집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체적 삶속에서 자비의 문제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삶이 먼저다. 깨달음은 없어도 된다. 자비에는 중생연, 법연, 무연의 세 가지 자비가 있다. 혈연관계에서의 자비(중생연), 조건적 관계의 법연(계약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자비), 세 번째 단계가 무연인데 이것은 조건이 없는 자비이다. 혈연관계도 아니고 사회적 조건에 따른 법연도 아닌, 스스로의 윤리적 판단과 결단에 의해 조건이 없는 자비가 있다. 흔히 불교는 허무주의라고 말하면 불교인들은 허무주의가 아니라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허무주의라고 생각한다. 우리 인생이 사실 허무하지 않나? ‘인터스텔라’라는 영화를 보니까 시차가 다르지 않나. 허망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었나. 연연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는 허무주의는 버릴 것이 아니다. 부정할 것이 아니다. 이런 정신으로 시대적 상황적 윤리적 기준이 바뀐 것처럼 연연하지 않고 유연하고 자유스럽고 그런 자비가 가능하지 않나.


불교는 역시 깨달음이 먼저고 그 깨달음의 내용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겠나. 금리 인상률을 얼마로 할 것인가에 깨달음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만일 내가 환속을 해서 세속에서 산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경제정책도 잘 세울 수 없고 정치도 잘 할 수 없다. 고도의 정치적 판단으로 하는 것을 깨달음으로서 한다? 모든 현실 사트바의 문제는 사트바의 내용으로서 선의의 판단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봉정상에 앉아 있어도 선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시내 한복판에 있어도 깨달음이 손상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삶이 먼저라는 것이다. 불교의 문제는 삶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삶을 어떻게 조망할 것인가가 불교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사회적 삶을 다 이끌기 위해서는 별무소용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효용이 없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실천에 대한 공부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의 가치가 줄어들거나 손상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기적 상상력의 삶이 매우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비실재에 있으면서도 사회적 적용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불교만이 가진 특징이다.
 

조성택 교수- 깨달음의 실체가 없다지만 현응스님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들을 때마다 사실 나는 많은 것을 깨닫는다. 94년 종단개혁이후로 사실 깨달음은 의미가 사라졌다. 사실 저는 깨달음의 역사를 말해왔는데, 현응스님은 한 발 더 나아가 깨달음과 역사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로드맵을 아직 제시하지 않고 계신데 조금이라도 제시해주시면 좋겠다.


현응 스님- 앞으로 제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윤창화 민족사 사장- 전반적으로 현응 스님의 발제에 공감한다. 현응스님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리 오랜 시간 걸리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깨달음은 사실 연기나 공 등에 대해 합일하면 된다.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후기에 와서 그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간 것이다 특히 몽산덕이에 와서 오매일여, 동정일여 같은 개념들이 나왔는데 이런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또 하나는 깨달음의 내용이나 목표가 없으니까 깨달은 자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잘못된 깨달음에 대한 관점을 앞으로 고쳐나가는 계기가 오늘 이런 자리에서 시작되었으면 한다. 깨달음의 실체가 지혜와 자비라고 한다면 이 두 가지에 있어서 많은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제열 법사 “깨달음 약화시키는 행위…그런 주장에 경전적 근거 있나?”
 

이제열 법사 (법림선원)- 현응 스님의 책을 읽고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깨달음에 대한 부분이다. 요즘 들어서 특히 조계종단에서 전통적인 깨달음을 부정하고 깨달음을 약화시키는 행위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 한 분이 교육원장 현응스님이 아닌가 생각한다. 문제는 깨달음에 대한 설명이나 주장에 경전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주장에는 반드시 경전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깨달음에 대해 두 가지를 생각해봤다. 이해의 영역으로 보고, 선정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는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이해의 영역, 선정을 통하지 않고 깨달음을 얻지 않았는지 근거를 대 달라.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도 포함한다고 하면 오해가 없지만 이해의 영역으로만 보면 문제가 된다. 쌍윳다니까야에 무실라 존자가 연기에 대해 설명을 듣고 내가 잘 이해했다. 그런데 그 이외에 다른 연기를 깨닫는 특별한 길이 있는가? 라고 묻는다. 그러자 싸빗다 존자가 답하기를 특별한 길이 있다고 말했다. 연기는 전승이나 이해나 믿음이 아니라 특별한 지혜, 체험으로 얻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현응스님 “수없이 많은 불교해석들, 경전적 근거 있는가?”
 

현응 스님- 이 자리는 각자의 의견을 말하는 자리라고 본다. 조성택 교수의 토론문에서처럼 불교는 해석의 역사라고 하듯이 불교도 그렇다. 법화경, 정토신앙이 나오는데 그것이 니까야 어디에 나오는가 묻는다면 어디에 그것이 있는가? 모든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 법성=연기성=불성=공성이고, 공성을 공가중으로 설명하는데 그것이 니까야 어디에 있나. 반야바라밀을 말하는 육조스님, 마조부터는 즉심즉불로 패러다임이 달라진다. 또 임제의 무위진인이 경전 어디에 근거가 있나? 다양한 해석과 주장이 나오면서도 불교가 하나의 종교로 존재하는 이유는 법성의 문제다. 선정을 통해 깨달은 예는 선종사에 무수하게 많다. 율장이나 니까야에서도 그런 부분이 보이고 있다고 알고 있다.


삼매와 선정이 인도 고유의 문화의 한 형태로 불교가 수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윤리적 고민을 통해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다고 본다. 해인삼매는 삼라만상이 고요해서 해인삼매라고 했다고 본다. 8정도에도 정정이 있고, 삼학에서도 정이 있지만, 출가하는 사람이 고요히 선정에 드는 것, 참 좋은 일이라고 본다.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서 있을 때에도 다 역학적 균형점이 있는 것 아닌가.


이제열 법사- 조성택 교수에게 묻겠다. 깨달음을 말할 때 열반과 해탈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 가지는 동시 발생한다고 경전에서 말한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으면 열반과 해탈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12연기를 다 이해한 사람을 아라한이라고 말하지 않고 수다원이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의 법성이 엄청나게 약화되고 그런데 무엇인가?
 

조성택- 나는 이제열 법사는 불교본질적인 입장에 있다고 본다. 원리적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다. 기독교에 구약이 있는데, 신약에 의해 재해석되지 않는 구약은 존재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대승에 의해 재해석되지 않은 초기불교는 문제가 아닌가. 다른 기회에 진지하게 논의하고 싶다.
 

현응 스님- 저는 수다원과 그런 것들 잘 안 믿는 사람이다. 저는 대승적 해석을 더 좋아한다. 자유로움을 보는 관점이 반야경, 유마경에서 많이 달라지고 있다. 사랑하는 마음, 이해하는 마음 등의 속성을 잘 이해해서 그것의 공성, 비실재성을 이해해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닌가. 수다원, 사다함 그 문제도 금강경의 논리로 이해하고 있다. 대승적 해석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한형조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티베트 속담에 승려 숫자만큼의 불교가 있다고 한다. 다양한 불교가 있는 것은 대단한 장점이다. 현응 스님의 불교가 있고, 이제열 법사의 불교가 있다고 본다. 현응 스님의 이 글이 래디칼하다고 볼 수 있으나 저에게는 편하게 읽혔다. 이제열 법사는 경전적 근거를 물었는데, 제가 보기에는 4성제에 그 답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발제의 한 부분에 불교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듯한 표현이 있는 것 같다. 지상으로 불교를 끌어내리면 불교가 존재할 수 있을까? 교단이나, 출가가 필요할까? 여기에 대한 대책을 세워놓고 계신지?
 

현응 스님- 출가교단이 필요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은 독신의 자유로움, 독신만이 갖는 장점이 있는 한 출가교단은 존재할 것 같다는 것이다. 독신이 갖는 사회문화적 시장성이 있다. 저는 불교인을 이런 사람으로 생각한다. 첫째 연기를 이해하고, 불법승 삼귀의를 존중하고, 연기, 환, 공 등에 대해 어떤 공포나 불안 등에 대한 불보살 신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영화가 필름의 연속이지만 영화를 볼 때는 몰입하듯이, 만들어진 신, 불보살 신앙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불보살 신앙, 불자라면 불보살 신앙을 가지는 사람, 마지막으로 바라밀 실천을 해야 하는데, 이 경우는 깨달음을 전제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다. 각자의 위치에서 윤리적, 도덕적 입장에서 처신하고 살아가는 가의 문제라고 본다. 불교의 바라밀은 각자의 서있는 곳에서 실천적인 윤리적 과제요 자기의 몫이라는 것. 십바라밀 지바라밀은 당대의 조건을 잘 파악하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져도 그것을 해낼 역량이 있어야 한다는 역바라밀, 그것을 구체적으로 이뤄내는 방법으로서의 방편바라밀이다.


저는 달라이라마의 <종교를 넘어>라는 책을, 아주 좋은 책으로 주위에 권한다. 종교를 넘은 어떤 가치관을 수용하는 시대가 왔다. 종교를 넘은 보편적인 실천을 중시하는 것을 보았다. 물은 보편적 가르침이지만 음료나 커피, 차는 각각 필요한 방법(편)이라고 보는 것이다.
 

김근수 “깨달음보다 가난한 사람이 사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김근수- 토론을 지켜보면서 역시 불교는 가톨릭의 형님누님 종교로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2층 건물의 1층은 깨달음이 살고, 2층은 보살행이 산다.

예수는 '따라서 하라'고 했다. 예수는 사랑을 정의한 적 없고 그 예시만 했다. 역시 실천이 중요하다. 그동안 종교에서 철학이 과잉되고 역사가 약화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성서도 역사 이야기의 시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바울 등이 철학으로 써서 가난한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종교가 되고 말았다. 깨달음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김재성 교수- 현응 스님의 발제 중에서 오(5)비구가 선정 없이 깨달았다는 것은 오해이시다. 달라이라마는 이제 보리심이 조금 일어나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한국불교는 너무 깨달음을 어렵게 보지 않는 풍토가 있다. 부처님은 역사적으로 활동하지 않으셨다. 단지 사람들이 너무 역사에 비중을 두니까 불교가 빈약해지는 게 아닌가?
 

현응 스님- 제가 말하는 깨달음은 깨달음을 너무 높게 보지 말자. 깨달음을 하향조직화하자. 아라한의 경지는 필요 없다. 허망함을 알고, 연기성을 알고 실천하는 불교를 만들자는 의견이고, 기억과 억념, 성찰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기억이 단순히 깨달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고 한국불교의 빈곤문제는 역사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에, 깨달음의 내용에 관심이 없이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의 방법론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비명상을 말하는 분들이 많은데, 자비를 명상하면 자비심을 일으킨다는 것인데, 실제로 자비를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비명상도 자비를 실천하지 않는 자비명상으로 자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불교가 빈곤하다는 것이다. 삶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문제의식이다.

 

한국불교의 주류 트렌드는 자비를 실천하는 바라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모습은 그것이 잘 안 되고 있다. 깨달으면 기타를 칠 수 있다고 말하는 불교, 그런 불교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문학적 수준, 철학적 수준이 아주 뒤떨어진다는 것이다.
 

정경일 원장- 불교 안에서 오늘 터뜨린 이런 뇌관이 앞으로도 계속 터졌으면 좋겠다. 한 가지 느낌은 불교의 데바닷다는 선정삼매에 수승한 분이었다고 들었는데 그분이 왜 마왕이 되었나? 성찰해보면 좋겠다.
 

홍성창 교수- 원론을 재확인하는 것만큼 필요한 것이 어디 있겠나라는 말이 생각난다. 우리는 조금 더 열심히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문화가 필요한 것 같다. 오늘 이 자리에 와보니까 질문들이 너무 크다. 나는 이런 입장이다. 질문의 폭을 좁혀야 건설적 토론이 가능하다.
 

조성택 교수- 현응스님 글을 학술적 논문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현응스님은 2600년 불교사의 가장 끝에 서 있다. 초기불교의 초기는 언제인가. 제가 생각하는 초기불교는 부처님 열반 후 500~1000년 정도 시점이 아닌가 한다. 그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재단해서는 곤란하다. 이런 문제를 기회가 주어지면 논의했으면 좋겠다. 이학종 기자
 

☞ [현응스님 발제문 전문]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바로가기]


[출처: 미디어붓다 | 2015.09.07]


출처 : 海印의 뜨락
글쓴이 : 석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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