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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직설(眞心直說)의 한 고찰(考察)
한기두(韓基斗) / 원광대학교 명예교수
目次
1. 서론(緖論)
2. 진심(眞心)에 입문(入門)하는 원리(原理)
3. 식망실천(息妄實踐)하는 주공부(做功夫) 길
4. 식망현성(息妄顯性)의 세계(世界)
5. 식망현진(息妄顯眞)의 구경(究竟)
6. 결 론 (結論)
Ⅰ. 서 론 (緖 論)
1. 진심직설(眞心直說)1]의 자료(資料)와 사상
(1) ?진심직설?에 대한 일반의 이해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이 진심직설(眞心直說)을 언제 어디서 찬술했는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일본의 ?불서해설대사전(佛書解說大辭典)? 6권에 보면 고려 희종 원년 겨울(熙宗 元年 冬1205)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에서 지은 것인 바, 지눌(知訥)의 나이 48세 때 저작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2]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근거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로는 아직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과 함께 이루어진 발문을 통해 보면 보조국사 중년의 저술이라는 추정이 가능할 정도로 보고있다.
다만 이 ?불서해설사전?에 보면 “조선의 선서(禪書) 중 대표적인 술작(述作)으로 일컬을 정도라고 밝히면서, 이 글이 한국선사상(韓國禪思想)의 가장 핵(核)을 이루는 저서”라고 높히 평하고 있다. 이 같은 생각을 한 글은 비단 이 자료에만 그치지 않는다.
홀활곡(忽滑谷)의 ?조선선교사(朝鮮禪敎史)?에 보면, “한국 불교 가운데 이로정연(理路井然)하고, 질서(秩序)있으며, 조직적(組織的)인 글로써 한국선서(韓國禪書)중에 가히 백미(白眉)를 이루는 자료라”는 평(評)을 하기도 한다. 3]
1] 眞心直說 : 진심직설은 普照國師가 禪과 敎를 총체적으로 회통하고, 통합하는 안목으로 우리의 本然인 진심(眞心)에 돌아 가게하는 길을 강령적(綱領的)으로 밝힌 가장 창의적(創意的)인 사상 내용이다. 따라서 본인은 이 글을 먼저 이해하는 데에 치중한 다음 이에 대한 논고를 개진할까 한다.
2]小野玄妙編纂?佛書解說大辭典?6卷 227面하에 보면 金의 章宗泰和5年 (南宋 寧宗開禧元年)高麗熙宗元年冬月(西紀1205年) 曹溪山 修禪社에서 誌함. 지눌48세시에 저작했다고 밝힌다.
3] 忽滑谷快天, ?朝鮮禪敎史?183
따라서 한국 학계 못지 않게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서도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아왔던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의외로 보조본비(普照本碑)에는 ?진심직설(眞心直說)?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후학들에게 의아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그 자료끝에 보조의 찬술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중국의 대장경인 대명삼장성교(大明三藏聖敎), 경산장(徑山藏), 대청삼장성교(大淸三藏聖敎), 대명석교휘목의문(大明釋敎彙目義門) 41卷, 열장지진(閱藏知津) 卷42에 입장(入藏)되어 있어 한국에서 보다 더욱 잘 전수되고 있다. 여기에도 한결같이 보조의 저술로 되어있다. 다만 한국의 자료이건만 한국에 전수된 과정이 근세에 있게 된 점이 크게 안타까움을 금할길 없다.
또한 일본 장경에도, 불교학계의 표준을 이루는 대정(大正)장경 48冊 999上., 속장경(續藏) 113冊에 수장되어 있고 또한 일본의 축쇄장(縮刷藏)에도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비해 진심직설의 바탕이 되는 이 나라 한국에는 그 자료의 전수가 18세기후반에 이루어지는 빈약함에 자못 안타까울 따름이다. 고간본(古刊本)에 수심결(修心訣)과 함께 합간(合刊)되어온 송광사판(水觀居士齊來本)과 동 정조(正祖)23년(1799)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 이상으로는 한국장서에서는 소급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또한 선문촬요(禪門撮要, 1908刊) 하권(下卷)에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 관심을 두고싶다.
아울러 현대판에는 보조전서(普照全書, 1989)에 수록되어 있고4],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 1982 4책)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종욱(李鍾郁)의 보조법어(普照法語, 1934)와 김탄허(金呑虛1968)의 보조법어(普照法語, 1963)에 수록되어 있다.
4]?禪門撮要? 下卷1, ?修心訣?․?眞心直說?․?定慧結社文?․?看話決疑論? 등이 收錄 됨.
그런데 수심결(修心訣)과 진심직설(眞心直說)이 함께 합간된 자료는 아직 입수되지 못하였다. 또한 세종조(世宗朝)의 국간본(國刊本)과 연산조(燕山朝)의 국역본(國譯本)에는 수록된 것이 눈에 뛰지 아니하는 아쉬움이 있다. 중국에서 보조국사의 찬술임에 틀림없이 밝혀져 있는 것만으로 동 저술에 있어 그 국적(國籍)을 찾는 데 다행한 일이다.
또한 중국에 수장(收藏)되었던 것으로 수관거사(水觀居士) 이충익(李忠翊)에 의해 중국에서 한국에 돌아와 귀장(歸藏)된 연대로 1799년 이상 소급된 자료가 아직은 확인되지 않고 있음이 안타까운 일이다. 이 자료에 앞서 밝혀진 발문(跋文)을 통해서 고찰해보기로 한다.
(2) 진심직설(眞心直說)의 보급과정(普及過程)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 제4책 723면(面)중․하(中․下) 끝에 보면 갑본(甲本) 을본(乙本) 병본(丙本)의 발문(跋文)이 게재되어 있다.5]
5]?韓國佛敎全書?4 眞心直說4-723中下
갑본(甲本)에는 수관거사(水觀居士) 이충익(李忠翊)이 중국에 전해 내려온 이 ?진심직설?을 한국에 귀장(歸藏)하게 되면서 밝힌 발문이다. 먼저 그 삼본(三本)의 발문 내용을 찾아보기로 한다.
갑본(甲本)의 발문(跋文) :
普照國師 爲曹溪修禪社 開山初祖 弘闡法寶 雨于震朝 其所詮著 悉而流通 而修心訣 眞心直說二書 自燕都藏中 爲余所獲 而叢林無傳 爲鶴岩奇師 乃於法華彫板之次 請以刊之本社 玆豈非時有晦顯而然歟. 卷末有淸學士明珠 印造大藏事 記在於康熙己未(1679) 則辛酉(1681)海舶之載經函 泊荏子島 當是明珠學士 法施之余力也. 東方禪子 飜刻宣布久亨其賜而不知其人矣 余故牽連記之 今日二書之復行於東國也 明珠學士 亦當爲功德無疑焉. 時嘉慶(1799)己未 七月日 水觀居士 李忠翊識.
여기의 발문은 국내에 전해지지 아니하여 중국 북경장본(北京藏本)에서 가지고 명 말에 와서 송광사(松廣寺)의 장경으로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계 수선사(修禪社)의 개산조의 법보(法寶)로 특히 ?수심결(修心訣)?과 ?진심직설(眞心直說)? 두 책이 북경의 장경에 유통되던 중 여기에 수용하게 된 것은 그 동안 조계총림(曹溪叢林)에 유전되지 않다가 학암(鶴岩)의 기사(奇師)를 위해 본사에 ?법화경(法華經)?을 조판하여 간행하던 중 청학사(淸學士) 명주(明珠)가 법보시하는 여력의 사업이 있어 1679년에 대장경을 인조(印造)하여 배편으로 임자도(荏子島)6]에 정박하기에 이르는 것이 1681년이었다. 이에 힘을 얻어 동방의 선자(禪子)들은 번각(飜刻)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아울러 수관거사(水觀居士) 이충익(水觀居士 李忠翊)은 청학사(淸學士) 명주(明珠)의 힘을 얻어 수심결(修心訣)과 더불어 진심직설(眞心直說)의 두 글들을 동국(東國)에 복행(復行)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명주(明珠)의 공덕이러라’ 라고 되어 있다.
6]荏子島는 절라남도 신안군 임자면에 속하는 섬으로 서쪽에 智島 동쪽 에는 水島가 있다. 고려시대부터 수군 통제사가 있던 군사요충지로서 중국과의 거래가 자주 있었으며 중국 송원대의 많은 자료들이 수장되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선사시대의 유적이 있는 곳으로 중국과 거래를 하는 첫길이기도 하다. 특히 이 임자도를 거처 靈光의 佛甲寺와 통하는 섬이었다.
이상의 발문의 발문은 갑본의 내용이고 다시 을본과 병본을 함께 밝혀보기로 하자.
을본(乙本)의 발문(跋文) :
奉佛弟子 太學士 明珠 室覺羅氏 謹發誠心 印造大藏經 於千佛寺 至誠供養 願將此功德 普及於一切 我等與衆生 皆共成佛道 康熙(1679) 己未 昞月
이외에는 모두 갑본의 발문과 같다고 밝혀져 있다. 따라서 몇 자를 더 첨부했을 뿐 갑본의 발문과 큰 차이가 없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갑본 보다는 을본이 연대상으로 앞선 점을 밝혀 볼 수 있다. 여기에는 1679년에 병월(昞月)이 발문을 쓰게 된 점이 다르다. 이 을본은 병월의 발문을 쓴 책이라는 점이 또한 특기할 점이다.
병본(丙本)의 발문(跋文) :
夫心者 是世間 出世間 萬法之 總相也. 萬法卽是 心之別相也 然別有五 一肉團心 狀如蕉蕾 生色身中 係無情攝 二緣慮心 狀若野燒 忽生忽滅 係妄想攝 三集起心狀如草子 埋伏識田 係習氣攝 四賴耶心狀如良田 納田無厭 係無明攝 五眞如心 狀同虛空 廓澈法界 係寂照攝 已上五心 前四皆妄 念念生滅 後一是眞 三際一如 若不揀辯分明 猶恐認妄爲眞 其失非小 故引佛經祖語問辯徵釋 開示迷妄根源 指陳修證 本末 次第一十六章始於正信 終乎所往 深明眞心之捷徑 故名直說 予獲是書 僅十餘載 朝夕觀覽 以爲棲神之秘要 一日出示衆 信善士感節菴 居士陳普忠 慨然樂施투梓流傳 庶修心之士觀之者 感悟眞心之妙 逈出直說之表也 是爲跋. 正統十二年歲在丁卯臘月八日大天界蒙堂比丘
병본의 발문은 오늘날 만자 속장경(卍字 續藏經)에 수장된 자료내용으로 이는 진심직설(眞心直說) 부록에 지눌지(知訥誌)라고 된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과 완산 정응선사 시몽산법어(晥山 正凝禪師 示蒙山法語.)와 동산숭장주 송자행각법어(東山崇藏主 送子行脚法語) 몽산화상 시중어(蒙山和尙 示衆語)들과 아울러 수록한 다음 진심직설(眞心直說)에 대한 후발문(後跋文)이 수록되어 있다. 이 후발문(後跋文)은 정통12년(正統12年 1447年 陰12月 8日)에 몽당비구(蒙堂比丘)가 12월 8일에 쓴 것으로 밝혀져 있다. 이 발문 내용 중에는 ?진심직설(眞心直說)?에 대한 사상을 간략하게 밝히고 이 자료에 대한 몇 가지 내용을 밝혔으며, 또한 그것이 저술 연대를 대체로 찾아 볼 수 있는 점에서 현재 보급된 자료 중에서는 가장 초기본(初期本)에 속하는 자료의 발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여러 가지 발문 중에 그 간행 연도는 갑(甲), 을(乙), 병(丙)본의 순으로 된 것은 고본(古本)의 순이 아니라, 현대 본을 기준으로 고본을 끝으로 밝혀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병본(丙本)이 1447년이라면, 을본(乙本)은 1679년이며, 또한 갑본(甲本)은 1799년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또한 갑본은 자료의 전수 문제를 밝힌 점에서는 한국 불교 선적(禪籍)의 수용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임에 틀림없다. 그 발문에서 ‘청학사 명매 (淸學士 明昧)’가 인조대장(印造大藏)한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그 이전부터 이미 ?高麗國 普照禪師 修心訣?과 함께 ?진심직설(眞心直說)?이 중국의 석판본(石版本)으로 있었던 것에 주목할 수 있다.
한가지 특기 할 점은 이종익(李鐘益)박사의 ?韓國佛敎의 硏究 (高麗. 普照國師를 中心으로)?7]에 보면, 그 책에는 水觀室壓의 주인(朱印)이 찍혀 있고 ?총독부 도서관?으로 된 등록번호 古23326號 라고 된 원인(圓印)이 찍혀있는 자료속에(1942년 추정)서 수관거사(水觀居士)라고 된 자료에 유독 눈이 가는 심정이 이해된다.
그러나 이 박사는 수관거사 후손의 기록이 전승(傳承)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수관거사의 발문이 1799년에 수록된 것이라면 비록 한국의 불적을 전승 수록하는 것으로는 어떤 이유이든지 대단히 늦은 후대의 글이지만 적어도 이 글이 한국에 수용된 자료 중에서는 ?진심직설(眞心直說)?의 원천적인 자료에 속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선문촬요(禪門撮要)? 하권(下卷)3에 수록된 ?진심직설?이 있다. 그런데 ?선문촬요?의 최초편찬이 1600년대의 서산 휴정(西山休靜, 1520-1604)에 의한 편집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다.8]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수관거사(水觀居士) 제래(齊來)의 자료에 앞선 1604년대 이전에 소급된 글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문촬요? 자체가 서산 당대에 이루어졌다는 근거가 분명치 않다. 안타깝게도 보급되고 있는 것은 1908년(隆熙2年) 경허(鏡虛)의 간행으로 된 것이고, 이것으로 인해 진심직설이 최초로 한국 세상에 보급된 인상이 든다.
7] 李鐘益著 ?韓國佛敎の硏究 (高麗普照國師を中心として) ?76
8] 駒澤大學 ?禪學大辭典?下卷 P. 705上에 보면, 淸虛堂休靜編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 연대가 隆熙二年(1908)刊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휴정의 연대와 다른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서산 당시 서산의 저술 번역 및 기타 편찬된 자료 속에는 ?선문촬요? 자체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심직설?이 서산 당시에 유행되었는지 안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병본의 발문을 쓴 자료를 검토한다면 이것은 한국에 전승되었는지 확인되지 아니한 가운데 현대판 ?속장경(續藏經)?에서만 찾아볼 수 있고, 을본도 전통적으로 한국에 수용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아직도 수관거사에 의해 한국 선학계(韓國禪學界)에 수용 전승된 것으로 1799년 발문을 적은 때가 최초로 보급된 때라고 잠정적으로 보아야 할 도리밖에 없다.
(3) 우리의 마음을 계발하는 진심직설(眞心直說)
진심직설(眞心直說)에는 참마음(眞心)이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하여 먼저 우리 평소의 마음부터 찾아 진심에 관심을 둔다. 그것은 마치 ?기신론(起信論)?에서 우리의 본연심(本然心)을 찾기 위해 공부의 시작을 먼저 ‘중생심(衆生心)’에서부터 찾기 시작하였듯이 진심의 본래에 우리의 본연심을 찾는 것이 그 시작이다.
?기신론(起信論)?에서는 진심(眞心)과 망심(妄心)을 구분하고 마침내 망심(妄心)을 쉬고 진심(眞心)을 찾아내려 했듯이 지눌도 다양한 방향에서 이 진심에 이르기 위한 조명(照明)을 하기 위해 순수한 본연심(本然心)을 찾는데서 출발한다. 이런 점에서 몽당(蒙堂)의 발문(跋文)에 설명한 마음에 대한 이해는 지눌의 ?진심직설?을 이해하는 데 크게 참고가 되는 사상으로 보아진다. 이에 간단히 그의 발문 내용으로 본인의 서문을 이끄는데 에서 해결해 보고자 한다.
몽당(蒙堂)의 발문(跋文)을 보면 세간이나 출세간을 막론하고, 만법(萬法)의 총상(總相)인 동시에 만법(萬法)의 별상(別相)이 곧 우리의 마음이라고 천명(闡明)하고 있다. 9]
9] ?韓國佛敎全書?4冊 723中下
그 마음을 몽당화상은 다음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① 육단심(肉團心), ② 연려심(緣慮心), ③ 집기심(集起心), ④ 뢰야심(賴耶心), ⑤ 진여심(眞如心).
이 다섯 가지 마음을 요약하여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육단심(肉團心)은 마음이 색신(色身)가운데 있어 마치 파초와도 같은 상태로 된 것이니, 이것은 유정(有情)의 마음에서 무정(無情)의 모든 세계를 포섭하는 마음이 곧 육단심(肉團心)이다.
연려심(緣慮心)은 마음의 상태가 언젠가는 갑자기 낳았고 또한 갑자기 죽어지는 마음상태이니, 이것이 곧 망상(妄想)을 포섭하는 인연의 마음이다.
집기심(集起心)은 마음 상태가 마치 풀 종자가 땅에 묻혀 있으면 밭에 있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는 마음이니 이것은 땅의 습기(習氣)를 포섭하는 마음이다.
뢰야심(賴耶心)은 마음의 상태가 마치 좋은 밭을 만나 좋은 종자를 심게되면 서로 실어하지 않는 것과도 같이 무명(無明)을 포섭하는 마음이다.
진여심(眞如心)은 그 마음이 저 허공(虛空)과도 같은 상태로서 법계(法界)에 확철하는 것과도 같으며 적조(寂照)한 것을 포섭하는 마음이다.
이상 육단심에서부터 뢰야심에 이르는 사심(四心)은 모두 망념(妄念)인바, 생각 생각이 생멸(生滅)을 일으키는 마음이요, 또한 뒤의 진여심은 곧 진심(眞心)이니, 이것은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의 삼제(三際)에 일여(一如)하는 마음을 이름이라.
이것을 보조(普照)는 16가지로 밝히고 있다.
제일 먼저 진심정신(眞心正信)에서 출발하여, 끝에는 진심소왕(眞心所往)에 이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 16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진심직설서(眞心直說序) 2.진심정신(眞心正信) 3.진심이명(眞心異名) 4.진심묘체(眞心妙體)
5.진심묘용 (眞心妙用) 6.진심체용일이(眞心體用一異) 7.진심재미(眞心在迷) 8.진심식망(眞心息妄)
9.진심사의(眞心四儀) 10.진심소재(眞心所在) 11.진심출사(眞心出死) 12.진심정조(眞心正助)
13.진심공덕(眞心功德) 14.진심험공(眞心驗功) 15.진심무지(眞心無知) 16.진심소왕(眞心所往) 등으로 되어있다.
진심직설서(眞心直說序)에서는 진심에 들어가는 마음은 평상심인바 이 평상심에는 알고 모르는데 속하지 않는 마음으로 열려진 마음임을 밝히고 있다.
진심정신(正信)에는 믿음이 곧 인과라고 보게 되면 이것은 곧 교학의 신이요, 자신이 곧 부처임을 믿게 되면 그것은 곧 선가(禪家)의 믿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모두를 바르게 믿는 것이 진심을 찾는 공부의 시작이다.
진심의 이명(異名)이란 진심에 대한 본질(本質)을 이해하기 위하여 선교간의 많은 선지식들의 진심에 대한 다양한 이름을 밝혔다.
교학(敎學)에서 12가지 이명(異名), 선학(禪學)에서도 12가지 이명(異名)을 밝혀 진심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간이(簡易)명석하게 하였다.
진심묘체(妙體) : 진심의 본래를 알고 보니 우주만유가 근본적으로 일치되는 것을 알아 많은 선가들은 이 묘체를 이해하고 나면 자연 일치된 묘체의 소식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묘체를 아는 것은 곧 한 말씀도 말로 할 수 없는 본연의 소식이 있음을 밝힌다.
진심묘용(妙用) : 진심의 묘용을 알 수 있는 것은 우주 만유가 근원적으로 생명력을 가진 것이어서 다양한 면에서 진심이 경계에 따라 묘용의 힘을 열게 된다.
진심체용일이(體用一異) : 진심은 곧 체와 용이 함께 있는 것으로 체와 용이 서로 다른 것임을 보게 되면 그것은 곧 상(相)에 바탕해서 체와 용을 보는 때요. 그 반면 진심이 성(性)에 바탕 하여 보면 체와 용이 서로 일치된다고 밝히고 있다.
진심식망(息妄) : 진심을 회복하기 위하여 망심을 쉬게 하는 노력이니, 이것으로 10대 식망(息妄)의 길을 밝혔다. 이 식망하는 길은 곧 각찰(覺察)과 휴헐(休歇)의 길을 먼저 밝힌다. 각찰은 곧 한 마음 바르게 내여 능히 식망하게 하는 공부라면 휴헐은 한 마음 크게 쉬어서 식망하는 길이다.
민심존경(泯心存境) 민경존심(泯境存心) 민심민경(泯心泯境) 존심존경(存心存境)의 네 가지 심경(心境)의 민존(泯存)공부가 있으니 이것이 곧 임제록(臨濟錄)의 사료간(四料簡)과 일치한다. 그러나 보조는 이 사료간에서 그치지 않고 그 위에 있는 문제를 찾아낸다. 그것은 심(心)과 경(境)을 내외(內外)라 하여 내외를 전체(全體)로 또 내외를 전용(全用)으로 행하는 길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내외전체(內外全體)․내외전용(內外全用)에서 내외는 곧 자심과 경계이니 이것이 근원적으로 일치하되 내외전체는 능히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본연의 하나가 되는 것이요, 내외전용의 길은 우주가 묘체의 원리에 따라 근원적으로 작용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우주가 하나로 작용되어 가는 모습이다.
그런데 보조는 이 내외를 하나로 만드는 것을 넘어서서 다시 진심의 체와 용을 활용하되 능히 체와 용이 대기대용이 될 수 있는 능력을 밝히는가 하면 그 체와 용을 다시 넘어서는 길을 투출체용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것을 다시 정리하여 밝혀보자.
즉체즉용(卽體卽用)은 곧 적적성성한 산 모습이 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투출체용(透出體用)이란 체용을 뛰어 넘는 원리를 의미한다. 이것은 곧 한 마음 열려진 모습을 이름하는 것으로 이것이 곧 창조적 활동을 하는 마음의 힘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상의 16개항의 내용은 모두가 진심(眞心)의 다양한 의미를 밝힌 사항으로 모두가 진심이란 말을 빼놓지 않고 있다.
이상 16개항을 한번 더 축약(縮約)하여 본 논문의 목차를 삼고자 한다.
1. 진심(眞心)에 입문하는 원리(原理)
①진심직설서(眞心直說序) ②진심정신(眞心正信) ③진심이명(眞心異名) ④진심묘체(眞心妙體) ⑤진심묘용(眞心妙用) ⑥진심체용일이(眞心體用一異) ⑦진심재미(眞心在迷)
2. 식망실천(息妄實踐)하는 주공부(做功夫) 길
⑧진심식망(眞心息妄) ⑨진심사의(眞心四儀)
3. 식망현성(息妄顯性)의 세계(世界)
진심소재(眞心所在) 진심출사(眞心出死) 진심정조(眞心正助)
4. 식망현진(息妄顯眞)의 구경(究竟)
진심공덕(眞心功德) 진심험공(眞心驗功) 진심무지(眞心無知) 진심소왕(眞心所往)
Ⅱ. 진심(眞心)에 입문(入門)하는 원리(原理)
1.진심공부(眞心功夫)의 출발: 진심직설서(眞心直說序)
1) 평상심(平常心)
고어에 “참 도(道)에 들어가는 데에 있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10]고 하였다. 그것은 진심(眞心)에 들기 위해서는 알고 모르는 것이 도리어 평상심을 방해하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알고 모르는 데에 속하지 않는 다고 한 뜻은 도(道)의 핵심이 우리의 마음속, 깊고,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소 일상적인 마음인 평상심(平常心)속에 있음을 밝히는 말이다.
10]大正51卷 276下 , 趙州從諗禪師條,
"異日 問南泉 如何是道
南泉曰 平常心是道 還可趣向否
南泉曰 擬向卽乖 不擬時如何
南泉曰 道不屬知不知 知是妄覺 不知是無記 若是眞達 不疑之道 猶如太虛廓然虛豁"
이 평상심은 비록 일상적인 마음속에 있지만 열려진 마음이기 때문에 알고 모르는 데에 속하거나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안다는 마음은 망상(妄想)이요, 모른다는 마음은 무기(無記)에 속함이라. 이 안목에서 선(禪)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평상심을 갖는 것이 망념(妄念)과 무기(無記)를 뛰어 넘고 능히 적적성성(寂寂惺惺)한 본연심에 들어가는 길이 어렵기 때문에 먼저 도에 들어가는 길로서 망념과 무기를 극복하고 툭 트인 평상심(平常心)에서 공부에 출발하는 길을 밝힌 것이다. 이 문제는 지눌이 ?진심직설? 끝장 앞인「진심무지(眞心無知)」장(章)에서 다시 결론으로 평상심(平常心)에 대해 밝히고 있다. 이것은 평상심속에서 공부가 시작이 되고 또한 평상심속에 결론을 지으려는 중요한 핵심이 담겨져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특히 비평상심(非平常心)은 곧 망심(妄心)에서 나온 것이라면 평상심은 진심(眞心)에 바탕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망심은 평상심을 잃은 마음이요, 진심은 곧 평상심을 얻은 마음이니, 우리는 이 마음을 회복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쓰게 된 것으로 밝히고 있다.
이 평상심에는 시비(是非)를 뛰어 넘어 본연의 마음이 있는 곳을 밝히고 있다. 시비 없는 마음이 도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따로 불조가 출현하여 무엇을 가르치려는 것은 도리어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일찍이 서산(西山 1520-1604)은 그의 ?선가구감(禪家龜鑑)? 서문(序文)에서 “불조출세에 무풍기랑(佛祖出世 無風起浪)”이라는 말에서 선문(禪門)을 시작한다.11] 불조가 출현하여 평범했던 세상에 파도만 일으키게 하는 의미 없는 작업을 한 것이라는 지적이 스스로의 글을 쓰면서 반성하는 말이다.
물론 그같이 근원적인 비판의 안목에서 보면 불조의 글들을 모두 태워버려야 할지 모르나, 근기의 차이로 낮은 사람에게는 글을 보여야 할 수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진심직설(眞心直說)?에서는 불조가 출현하여 중생들에게 일할 것이 있음을 또한 밝히기도 한다. “불조들이 나와서 스스로의 본성을 보게 하는 상담자(相談者)로서의 역활이 필요한 것”12]을 밝힌다. 그것은 중생들에게 본성을 보게 하는 필요성을 밝히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뜻은 ‘불조(佛祖)의 출현(出現)으로 중생에게 따로 법을 준다는 뜻이 아니라, 오직 自身의 本性을 보게 하는 것 이 외에 없다.’는 입장이다.
11]萬曆己卯 惟政 跋文 1638年度 開版 ?禪家龜鑑?,
“一物觀之則 人人面目 本來圓成 假他人 添詣着粉也.此出世之所以起波浪也. 虛空藏經云 文字是魔業 名相是魔業 至於佛語亦是魔業 是此意也 此直擧本分 佛祖無功能. 乾坤失色 日月無光.”
12] ?普照全書?47, ?眞心直說序?, “只要衆生 自見本性”
2) 자성(自性)의 묘고정상(妙高頂上)과 제이봉두(第二峰頭).
우리의 자성을 찾는 길은 오직 스스로의 마음을 발견하는 데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일찍이 華嚴에 보면 “모든 법을 알자면 우리의 평소 갖인 마음의 바탕이요, 마음의 근원인 자성(自性) 그 자체요 마음을 떠나서 자성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니, 그래서 지혜의 몸을 이루는 것은 오직 우리의 마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13]라고 밝힌다.
우리 자성을 찾는 것은 모든 불조(佛祖)들이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한 생각 휴헐(休歇)하여 자기 본성을 보고(自見本性) 그 본성을 회복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구도 입문자(入門者)에게 먼저 덕산(德山)의 방(棒), 또는 임제(臨濟)의 할(喝)로 지금 갖고 있는 마음을 쉬도록 하는 것이 선가(禪家)의 공부 길임을 보조는 밝히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마음의 극처(極處)인 묘고정상(妙高頂上)14]에 이르게 하는 길이다. 그 길은 모든 계교(計較)와 사량(思量)이 돈망하여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한 구경의 경지에 더 위 없는 길을 찾아 낸 경지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의 봉두에 오르는 길도 또한 중요한 과제이다. 그것을 지눌은 현실속에서 찾아야할 제이봉두(第二峰頭)라고 밝힌다. 제이봉두는 구경에 이르는 길을 능히 설명하는 길이요, 더위 없는 진경을 능히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세계이다. 이 길을 밝히기 위하여 제이봉두라고 창의적으로 밝힌 것이다.
우리는 이 제이봉두(第二峰頭)15]에 올라가는 길로서 조사(祖師)는 화회(話會)의 문을 열었고, 부처는 방편(方便)의 문을 세웠다. 여기에 이르러 비록 오천(五千)의 장교(藏敎)를 밝혔다 하나 그 중에 진심(眞心)을 깨닫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니, 이 것이 또한 중요한 문이라고 밝힌다.
13]大正10 ?華嚴經?, 89面上, “知一切法 卽心自性 成就慧身 不由他悟”
14]묘고정상(妙高頂上) : 공부인이 실천하기 위한 지극히 높은 경지. 제일의 경지.
15] 第二峰頭 : 둘째번 높은 자리. 묘고정상을 지나서 다음 번에 이르는 길.
보조는 이같이 선의 극처도 중요하지만 교학의 세계도 또한 필요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이 세계가 곧 입문자에게 걸어야 할 길로서 이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밝힌다. 특히 이 입도자에게 없어서는 안될 기본 요건을 지눌은 창의적인 용어로 기점(基漸)16]이란 용어를 쓴다.
그 기점이란 공부의 기초 단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을 밝힌 뜻이다. 이 기점의 의미 속에는 초발심에 알아야 할 공부의 기점(基點)이 있어야 하고 또한 점진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점수적(漸修的) 기초의 의미도 담겨져 있다. 이 중에 점숙 하는 문제를 그 동안 폄하(貶下)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보조(佛祖)는 점숙(漸熟)하는 길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기초로 밝힌 것이다. 이것은 곧 공부의 기초를 바르게 다듬고서 묘고정상에 이르게 하는 보조의 근본 사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보조는 제이봉두가 차지하는 것이 묘고정상과 함께 소중하게 아는 것임이다.
16] 基漸 : 점진(漸進)하는 기초(基礎). 불법의 기초에 이르는 기초. 입문에서 깊은 경지에까지 점숙해 들어가는 기본요지.
2. 진심(眞心)에 이르기 위한 믿음 : 진심정신(眞心正信)
1) 불교(佛敎)의 일반적(一般的) 신관(信觀)
공부의 시작은 평상심이지만, 그 평상심을 찾는 초보의 공부인에게는 신심(信心)에서 부터 다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중생이 부처가 되는 근거는 이 신심이기 때문이다. 신심없이 불법은 적막하고 험하며 구경의 길을 찾기 위해 괴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대단히 어려운 길이다.
따라서 일찍이 ?화엄경(華嚴經)?에서는 “신(信)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미라. 이것이 있어서 성태(聖胎)를 길러주고 모든 선근을 키워 준다.”17] 하였고, 또한 유식(唯識)에는 “믿음이란 마치 물을 맑게 해주는 구슬과도 같은 것이니, 이 구슬이 있어야 능히 탁한 물을 맑게 해주는 능력이 생긴다.”18]라고 하였다.
17] 大正10, ?華嚴經?(80卷)72中, “信爲道源功德母 長養一切諸善法(?普照全書?48에서는 善法을 善根으로)信能增長智功德 信能必到如來地.”
18]大正31 ?成唯識論? 29下, “立心經者 如水淸濁水 能淸濁水 漸等水”
또한 경전(經典)의 첫 머리에 공통적으로 쓰고 있는 구절, “이와 같음을 내가 듣자오니(如是我聞)”라고 하는 글에서부터 경전이 시작된다. 그 뜻은 공부인이 부처님의 말씀이 확실하다고 확인하여 부처님에게 올리는 신성의 표시이다. 따라서 이 경전을 통해 수지(受持) 독송(讀誦)하라는 뜻이 담겨진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곧 불교인으로 하여금 경전의 믿음을 지극하게 의지하도록 하는 법문의 성취를 뜻하는 것이다. 불교의 법문은 믿음을 통해 이루게 하는 기본 신앙을 확립하는 내용임을 밝힌 것이다.
여기에 따라 보조는 이 믿음도 후대에 이르러 교가의 믿음과 선가의 믿음이 각각 달리 밝히고 있음을 밝히면서 선교간의 믿음의 문제를 지눌(知訥)은 간명하게 소개한다.
2) 교문(敎門)의 믿음(信)
교문에서의 믿음을 지눌은 단적으로 인과(因果)의 믿음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인(因)은 곧 한 생각에 세상을 심고 가꾸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니 그 심는 내용이 세상에 선(善)을 심으면 선의 결실(結實)을 얻게 되고 악(惡)을 심으면 악의 결실을 거두게 되는 것을 믿는 것이 곧 교문의 믿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지눌은 이상 인과(因果)의 믿음을 역사적으로 다음 세 가지 흐름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것이 교문 전반의 신(信)의 강령으로 요약하고 있다.
① 인천(人天) 인과(因果)의 신(信) :
주로 인천인과(人天因果)의 믿음이 있으니, 그 중에 십선(十善)을 행함에 따라 그 사람은 하늘에 올라갈 수 있는 종자를 심었음을 믿는 것이니, 이것이 곧 인천(人天)에 들어가는 묘인(妙因)이요, 인천(人天)의 세계에 들어가 락(樂)의 결실을 얻게 되는 것을 인천(人天)에 올라 락의 과(樂果)를 얻는 믿음이라고 밝힌다.
② 이승(二乘)의 신(信) :
공적(空寂)을 인연으로 생멸인연(生滅因緣)을 믿는 것이 곧 정인(正因)이요, 고집멸도(苦集滅道)로 불과(佛果)를 즐기는 것을 일러 부처님의 정과(正果)의 믿음이라 한다. 이것은 먼저 밝힌 인천의 인과와 다른 것은 곧 부처님의 법을 믿어 생사 인연속에 부처님의 실천행인 고집멸도행(苦集滅道行)을 가르쳐 마침내 아라한(阿羅漢)과(果)를 얻게 하는 믿음이 이승(二乘)의 믿음이라고 밝힌다.
③ 대승(大乘)의 신(信) :
삼겁(三劫)에 이르도록 육도(六度 : 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만행(萬行)을 통해 가야 할 길을 믿어 행하는 것이 대승믿음의 인(大乘信因)이요, 보리열반(菩提涅槃)에 이르게 하는 것이 곧 대승의 정과(正果)를 받게 하는 결실의 믿음이라고 보는 것이 곧 대승의 믿음이다.
그러나 이 교문의 믿음(信)은 조사문에 들기 위한 기초 과정으로서 인천인과교(人天人果敎) 소승교(小乘敎) 대승교(大乘敎)로 보아온 규봉종밀(圭峰宗密)의 오종선(五種禪)에 외도선과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을 제외한 교학선의 체계를 갖고 밝힌 신관(信觀)임을 찾아볼 수 있다.19] 따라서 여기에서 찾아야 할 진정한 교와 선과의 양면 신앙의 문제를 찾은 것이라기보다는 선을 실천하기 위한 교문(敎門)신(信)의 과정을 넘어서서 선에 이르는 믿음으로 엿보인다.
따라서 믿음은 공부인의 입문하는 데에 더욱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사실은 부처님에 이르기 위한 과정에도 믿음이 더할 나위 없이 필요하고 또한 부처님 자신의 마음속에는 근원적으로 중생제도를 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의 믿음에 대한 새로운 길을 찾아야할 과제가 있음을 재고해 보고싶다.
19] 圭峰宗密撰?禪源諸詮集都序? ?五種禪?-禪의 四種과 達摩禪 鎌田茂雄著, ?禪の語錄9. 禪源諸詮集都序?, p.23.
3) 조사문(祖門)의 믿음(信)
교문(敎門)에서 주장하는 신관(信觀)은 유위(有爲)의 인과신앙(因果信仰)이라고 지적하고 나서 조사문(祖師門)의 신관을 찾는다면 자타간의 인과에 바탕한 신관(信觀)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님임을 철저히 믿게 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조사문중의 믿음이라고 밝힌다. 즉 자기 본래가 곧 부처인 것을 믿어서 이것이 조사문의 공부를 하는 데에 반드시 필수 불가결한 믿음이라고 보는 것이다. 20]
좀더 핵심적으로 밝혀보면 “천진(天眞)한 자성이 사람들 모두에게 구족(具足)해 있음을 믿는 것이 곧 조문(祖門)의 믿음이라.”21]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삼조(三祖) 승찬은 그 소식을 신심명(信心銘)에서, “우리의 자성은 무흠무여(無欠無餘)한 것이나 다만 취사 선택 함으로써 원만한 자성을 소유하지 못한다.”22]고 지적한 말씀은 이 안목을 밝힌 것이다.
20] ?普照全書?49, “眞心正信 ; 只要信自記本來是佛”
21]앞의 책49, “天眞自性 人人具足 涅槃妙體 箇箇圓成 不假他求 從來自備”
22] 僧燦, ?信心銘?, “圓同太虛 無欠無餘 良由取捨 所以不如”
또 지공(誌公)은 “유상(有相)한 몸 가운데 무상(無相)한 몸이 있고, 무명(無明)의 길 안에서 무생(無生)의 길이 있음이라.”23]고 밝혔으며, 또 영가(永嘉)는 “무명의 실성이 곧 불성이요 환화공신이 곧 법신이라.”24]하여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마음의 현주소에서 부처님이 살아 있음을 믿는 것이 가장 소중한 믿음이라고 밝힌 것이다.
23]誌公(全書 志公), “有相身中無相身 無明路上無生路”
24]大正48. 395中, 永嘉, “無明實性 卽佛性 幻化空身 卽法身”
그런데 선과 교가 모두 한가지 공통된 믿음으로 아울러 서로 믿어야 하는 것을 보조는 연명연수(永明延壽)의 법문에서 찾아낸다.
영명연수(永明延壽)의 유심결(唯心訣)의 글에 보면, “믿기만 하고 알지 못하면 무명(無明)만 자라게 되고, 알기만 하고 믿지 아니하면 사견(邪見)만 늘어난다.”25]고 한 것이니, 이것은 곧 교선의 신관(信觀)을 종합하여 밝힌 안목으로, 신과 해가 서로 겸해야만 능히 입도(入道)하게 된다고 보았다.26]
25]大正48. 唯心訣 996面, “信而不解 增長無明,解而不信 增長邪見.”
26] ?普照全書?49 眞心正信 “信解相兼 得入道矣”
믿음의 바른 길은 곧 교학의 믿음인 인과의 지혜와 선학의 믿음인 자성의 본연 혜복이 서로가 함께 아울러야 하는 것을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에 있음을 지적했듯이 비록 인과의 믿음과 자성의 믿음이 서로 다른 믿음의 발전단계를 밝힌 것이라고 하지만 교의 믿는 길, 선의 깨닫는 길이 함께 하는 문이 원만한 믿음의 문임을 밝힌 것이다.
4) 공부(功夫)의 시작(始作)은 신심(信心)에서
초발신심(初發信心)을 내어 입도(入道)하는 공부
불교인들은 믿음의 길이 공부의 시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특히 초발심(初發心)에서 믿음이 이루어져야 공부가 된다고 생각하여 이른바 초발신심(初發信心)이란 말을 한다. 아울러 ?기신론(起信論)?도 공부의 시작으로 믿음을 내기 위한 이론이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불교의 믿음이 필요 한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초발신심을 내어 입도하지 아니하면 공부하는 데 하등의 이익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과연 그럴까.
?기신론(起信論)?에 이르기를, “만약 사람이 법을 들으면 겁약한 마음을 내지 아니하고, 정진하는 사람은 바로 알라, 이 사람은 곧 불종(佛種)이라, 반드시 부처님에게서 어느 날인가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受記)를 받게 되는 사람이라고 까지 밝힌 바 있다.”27] 또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의 가득 찬 모래수와 같은 세계에 십선(十善)을 행한다 하여도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바로 믿고 바로 생각하는 이만 있다면 그 사람이 십선(十善)을 행하는 것보다 더욱 수승하다.” 라고 하였다.
?반야경(般若經)?에는 “한 생각 정신(正信) 하는 사람은 능히 무한한 중생을 제도하는 무량한 복을 얻게 될 것이다.”하였고, 또한 “마땅히 알라 만약 천리 길을 가자면 첫 발길이 옳아야 한다. 만약 첫 길이 흐트러지면 천리 길 마저 허물어지고 만다.”28]고 하였다.
27]大正32 ?起信論? 583上,“若人聞是法已 不生怯弱 當知是人 定紹佛種必爲諸佛之所授記.”
28] ?普照全書?49, “般若經云 是知 欲行千里 初步要正 初步若錯 千里俱錯”
그러므로 진정한 도에 들어가 무위국(無爲國)에 이르자면 먼저 초신(初信)을 바루라. 초신을 바루지 않고 이미 실수하면 만선(萬善)이 모두 허사가 되어지고 만다 29]하였고 또 삼조(三祖)는 “한 생각 조그마한 믿음의 차이가 생기면, 그 잘못은 천지(天地)처럼 멀어진다”30]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은 진심을 계발하고, 찾아지는 소중한 길임에 틀림없다.
29] ?普照全書?49, “入無爲國 初信要正 初信旣失 萬善俱退”
30] 대정 48. 376. 僧燦 信心銘 : 毫釐有差 天地懸隔
그러면 믿음은 공부의 시작에만 필요한 것인가. 진심(眞心)을 찾아 성불하는 그날까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천만 경계에 정진해야하는 길을 찾을 때에는 반드시 깨달음을 통한 믿음이 공부인의 반석(盤石)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공부의 시작은 분명히 바른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이 믿음이 깨달음을 통해 더욱 성숙하게 하는 자립하는 믿음이 요청되는 것이며, 또한 부처님의 중생 제도하는 마음이 또한 큰 믿음으로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3. 진심(眞心)을 조명(照明)하는 문(門) : 진심이명(眞心異名)
진심(眞心)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보조는 선교간(禪敎間)에 진심의 이름을 요약(要約)해 보고, 다시 크게 본연의 한 마음으로 섭렵(涉獵)하고 있다. 진심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해야만 이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심이 지닌 의미 속에는 크게 두 가지 마음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망념을 떠나야 되고, 또한 진성의 영감을 갖는 것이 곧 참 마음이라고 말한다. 즉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진심이란 곧 망념이 떠나면 곧 진(眞)이라 하고(離妄名眞),
영감(靈鑑)이 있으면 그것을 곧 마음이라 한다(靈鑑曰心).
이상을 능히 불교(佛敎)와 조교(祖敎)에 따라 이름이 서로 다른 말로 쓰여 온 것이다."
1) 불교(佛敎-敎門)에서 진심(眞心)을 밝힌 여러가지 이름들.
① 보살계(菩薩戒)에서는 이름하기를 ‘심지(心地)’라 부른다. 그 이유는 만선(萬善)이 발생하기(發生萬善)때문이다.
② 반야경(般若經)에서는 ‘보리(菩提)’라 부른다.그 이유는 각(覺)을 체(體)로 삼는 때문이다.
③ 화엄경(華嚴經)에서는 ‘법계(法界)’라 부른다.그 이유는 교철융섭(交徹融攝)하는 때문이다.
④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여래(如來)’라 부른다. 그 이유는 돌아올 것이 없는(無所從來) 때문이다.
⑤ 반야경(般若經)에서는 ‘열반(涅槃)’이라 부른다.그 이유는 중성이 돌아가 의지(衆聖所歸)하는 때문이다.
⑥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는 ‘여여(如如)’라 부른다.그 이 유는 진상불변(眞常不變)하는 때문이다.
⑦ 정명경(淨名經)에서는 ‘법신(法身)’이라 부른다.그 이유 는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이 각각 의지(依止)하기 때문이다.
⑧ 기신론(起信論)에는 ‘진여(眞如)’라 부른다.그 이유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기 때문이다.
⑨ 열반경(涅槃經)에는 ‘불성(佛性)’이라 부른다.그 이유는 삼신(三身-法身․報身․化身)의 본체가 되기 때문이다.
원각경(圓覺經)에는 ‘총지(摠持)’라 부른다.그 이유는 공덕(功德)이 유출(流出)하는 때문이다.
승만경(勝鬘經)에는 ‘여래장(如來藏)’이라 부른다.그 이유는 숨겨 덮고 하나로 포용(隱覆含攝)하는 때문이다.
요의경(了義經)에는 ‘원각(圓覺)’이라 부른다.그 이유는 어두움을 파(破)하고 홀로 빛나기(破暗獨照) 때문이다.
유심결(唯心訣)에 일법(一法)을 천명(千名)으로 응연하여 호(號)를 세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같이 여러 가지 이름이 있으므로, 다 갖추어 있을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이상과 같이 불교의 교학상 이름을 찾기로 하면 다양한 경전(經典)속에서 밝힌 그 핵심되는 참 마음에 대해 지적하고 나서 진심의 참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물론 이것은 몇 가지 예를 들은 것이지만 그 몇 가지 밝힌 이름들을 다시 한번 요약해 보기로 하자.
보살계(菩薩戒)에서 ‘심지(心地)’,
반야경(般若經)에서 ‘보리(菩提)’,
화엄경(華嚴經)에서 ‘법계(法界)’,
금강경(金剛經)에서 ‘여래(如來)’,
반야경(般若經)에서 ‘열반(涅槃)’,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여여(如如)’,
정명경(淨名經)에서 ‘법신(法身)’,
기신론(起信論)에서 ‘진여(眞如)’,
열반경(涅槃經)에서 ‘불성(佛性)’,
원각경(圓覺經)에서 ‘총지(摠持)’,
승만경(勝鬘經)에서 ‘여래장(如來藏)’,
요의경(了義經)에서 ‘원각(圓覺)’
등으로 각각 이름을 부쳐 비록 교학상 경전에서 쓰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여기에 부르는 진심(眞心)의 이름은 선교간(禪敎間)에 다분히 함께 쓰이고 있는 이름임을 찾아 볼 수 있다. 아무리 교학을 뛰어 넘는 사상이 선(禪)이라고는 하지만 여기에 쓰이는 이름을 선가에서 진심에 해당되는 이름을 쓰지 않기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진심이 들어야만 다음과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라면 없어서 안 되는 진심의 이름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진심의 이름을 그같이 쓰는 이유를 보조국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심지(心地):만선(萬善)이 발생하는 때문.
보리(菩提):각(覺)을 체(體)로 삼기 때문.
법계(法界):교철융섭(交徹融攝)하는 때문.
여래(如來):돌아올 것이 없는(無所從來) 때문
열반(涅槃):중성(衆聖)이 돌아가 의지하기 때문
여여(如如):진상불변(眞常不變)하기 때문이다.
법신(法身):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이 각각 의지(依止)하기 때문
진여(眞如):불생불멸(不生不滅)하기 때문.
불성(佛性):삼신(三身-法身․報身․化身)의 본체(三身本體)이기 때문
총지(摠持):공덕(功德)이 유출(流出)하기 때문.
여래장(如來藏):숨겨 덮어 하나로 포용(隱覆含攝)하기 때문.
원각(圓覺):어둠을 파(破)하고 밝음이 홀로 빛나기(破暗獨照) 때문.
이상은 분명히 진심(眞心)과 본연심(本然心)이 치연히 작용하는 모습을 불조(佛祖)들이 다양한 의미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대체로 요약해보면, 불가에서 다양한 의미을 밝힌 가운데 깨달음의 바탕이 되고, 모두를 사랑하며, 우리의 마음으로 세상을 표용하고, 지극히 회통적이며, 생멸이 없고, 어두움을 파하고 밝음이 홀로 비추며, 무한한 공덕이 세상이 출현하게 하는 것을 밝힌 것들이 곧 교가(敎家)에서 밝힌 진심(眞心)의 모습이다.
이 내용만으로 진심의 참 모습을 밝힌 데에 유감없는 다양한 표현이라고 보아진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서 진심의 참 모습을 요약한다면 진심의 묘체(妙體)와 진심의 묘용(妙用)을 설명한 것으로 보아진다.
2) 선가(祖門)에서 진심을 밝히는 여러 가지 이름들
조사문중(祖師門中)에서 다른 말로 밝히고자 한다면 그 이름들은 대체로 참의(參意)31]에 속하는 이름들이다. 물론 이 진심의 이름만으로도 형상할 수 없는 무한한 원리를 찾는 데에 다시없는 이름들이지만 이 교문을 뛰어 넘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보조는 이와 같이 교문의 다양한 문을 뛰어 넘는 세계로 교학의 흔적을 찾지 못하는 또 하나의 경지가 있음을 밝힘으로써 참의(參意) 의 한계를 벗어나 참구(參句)의 경지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게 하는 것임을 생각하면서 다시 조문(祖門)의 이름들이 밝힌 진심들을 찾아보기로 한다.
31] ?普照全書?, 102, 看話決疑論 11行,
參意: 話頭有 參意參句二義. 今時 疑破者 多分參意 未得參句 故 與圓頓門正解發明者 一般矣. 如是之人 觀行用心 亦有見聞解行之功 但不如今時文字法師 於觀行門中 內計有心 外求諸理 求理彌細 轉取外相之病耳. 豈可與參句門疑破 親證一心 發揮般若 廣大流通者同論耶.
조사들이 밝힌 이름은 모두 두절(杜絶)되어 한 이름도 세울 수 없다.
그러나 상황과 근기에 따라(隨機) 응감(應感)됨이 있어, 조문에도 그 이름을 또한 세운다고 지눌은 밝힌다.
① 어느 때는 자기(自己),
그 이유는 중생의 본성이기(衆生本性) 때문이며.
② 어느 때는 정안(正眼),
그 이유는 모든 유상을 보기(鑑諸有相) 때문이며.
③ 어느 때는 묘심(妙心),
그 이유는 허령이 적조하기(虛靈寂照)때문이며.
④ 어느 때는 주인옹(主人翁),
그 이유는 살아오는 동안 짐을 지고 살았기(從來荷負)때문이며.
⑤ 어느 때는 무저발(無底鉢) : 바닥이 없는 발우
그 이유는 어느 곳에서나 살아오게 되는(隨處生涯) 때문이요
⑥ 어느 때는 몰현금(沒絃琴) : 거문고 줄이 없는 거문고.
그 이유는 금시에 운이 나오는(韻出今時) 때문이며.
⑦ 어느 때는 무진등(無盡燈) : 꺼지지 않는 등불
그 이유는 중생의 미정을 조파하기(照破迷情) 때문이며.
⑧ 어느 대는 무근수(無根樹)
그 이유는 뿌리와 꼭지가 견고해지기(根蔕堅牢) 때문이요
⑨ 어느 때는 취모검(吹毛劒) : 털끝을 짜르는 칼
그 이유는 육근과 육진의 감각작용을 끊기(截斷塵根) 때문이요
⑩어느 때는 무위국(無爲國) :
그 이유는 바다가 고요하고 강물이 맑기(海晏河淸) 때문이며
⑪어느 때는 모니주(牟尼珠) : 큰 보배의 구술
그 이유는 빈궁한 중생들을 유익하게 구제하기(濟益貧窮) 때문이며
⑫어느 때는 무유쇄(無鑐鎖) : 열쇠 없는 잠을쇠
그 이유는 육정(六情)을 열고 닫는 능력이 있기(關閉六情) 때문이다.
이 외에도 니우(泥牛) 목마(木馬) 심원(心源) 심인(心印) 심경(心鏡) 심월(心月) 심주(心株) 등 많은 이명(異名) 들이 있다.
이 서로 다른 이름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 묘체를 설명하는 것과 묘용을 의미하는 것 등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자기(自己), 정안(正眼), 묘심(妙心), 무저발(無底鉢), 몰현금(沒絃琴), 무진등(無盡燈), 무근수(無根樹), 취모검(吹毛劒), 무위국(無爲國), 모니주(牟尼珠), 무유쇄(無鑐鎖), 그 외에 선설한 대로 니우(泥牛), 목마(木馬), 심원(心源), 심인(心印), 심경(心鏡), 심월(心月), 심주(心株)등 다양한 이름들을 붙이는 것은 우리의 평상심을 일상적인 곳에서 이해하되 평범 그대로의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한번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을 밝힌 것을 일심속에서 찾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이름 붙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보조는 일일이 제시한다.
자기(自己) : 중생의 본성(衆生本性)이기 때문.
정안(正眼) : 모든 유상(鑑諸有相)을 보기 때문.
주인옹(主人翁) : 살아오는 동안 부담을 져왔기(從來荷負) 때문.
무저발(無底鉢) : 어느 곳에나 살아오게 되는(隨處生涯) 때문.
몰현금(沒絃琴) : 금시에 운곡이 나오는(韻出今時) 때문.
무진등(無盡燈) : 중생의 미정을 조파하는(照破迷情) 때문.
무근수(無根樹) : 뿌리와 꼭지가 견고한 것이기(根蔕堅牢) 때문.
취모검(吹毛劒) : 육근과 육진의 감각작용을 끊기(截斷塵根) 때문.
무위국(無爲國) : 바다가 고요하고 강물이 맑기(海晏河淸) 때문.
모니주(牟尼珠):빈궁한 중생들을 유익하게 구제하기(濟益貧窮)때문.
무유쇄(無鑐鎖) : 육정(六情)을 열고 닫는 능력이 있기(關閉六情)때문.
이같이 보면 조사문에서 진심을 밝힌 것은 자심이 경계에 따라 작용하되 능히 상식을 뛰어 넘어 자유하는 길들을 찾아내어 밝힌 것임을 찾아 볼 수 있다. 조사문에서 밝히는 진심의 이름들을 보면 주로 자기(自己), 정안(正眼), 주인공(主人公)과 무위국(無爲國)등은 자신에 대한 관심에 찾아낸 진심의 이름들이라면 무저발, 몰현금, 무진등, 무근수, 취모검, 모니주, 그리고 무유쇄 등을 보면 마음의 본래 그릇의 모습이 경계에 따라 작용하는 자심의 내용을 밝힌 이름임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자신의 본래와 자심(自心)이 경계(境界)에 당해 작용하는 모습들을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진심이 경계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자성의 모습들을 구현하되 상식으로 쉽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식을 뛰어 넘어 자유자재하는 모습들을 상징하는 것들이 드러나 깊이 생각하게 하는 점들임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마음의 본래와 경계따라 마음 작용하는 모습들을 찾아 진심의 길을 밝힌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4. 진심(眞心)의 바탕이 되는 세계(世界) : 진심묘체(眞心妙體).
1) 인과(因果)에 초출(超出)하는 체(體)
진심의 바탕이 되는 세계는 무엇일까. 진심을 이해하는 의미에서 지난날의 불조(佛祖)들이 밝힌 내용을 찾아보기로 하자.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에 이르기를, “반야(般若)는 그 상(相)이 없는 것이며, 또한 생멸상(生滅相)도 없는 것이다.”32]라고 하였다.
또한 ?기신론(起信論)?에는, “진여(眞如)의 체(體)는 일체(一切)의 범부(凡夫)나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그리고 제불(諸佛)들과 하등 증감(增減)이 없으며, 일찍이 전대(前代)에 먼저 생(生)함도 없고, 또 후대에 늦게 멸(滅)함도 없는 것이니, 이런 점에서 진심(眞心)은 그 체(體)가 인과(因果)에 초출(超出)하고, 고금(古今)을 관통(貫通)하는 것이라.”33]고 하였다.
32] 大正45 ?肇論?, 般若無知論第3, 153 上,
“放光云 般若 無所有相. 無生滅相. 道行云. 般若 無所知 無所見”.
33]大正32 ?起信論? 579上,
“眞如自體相者. 一切凡夫 聲聞 緣覺 菩薩諸佛 無有增減 非前際生 非後際滅 畢竟常恒 從本以來 性自滿足 一切功德 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 遍照法界義故.”
2)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본성(本性)
이 경지에 이르면 모든 상대(相對)가 끊어진 자리라 생멸(生滅)이 없고, 유무(有無)가 없으며, 범성(凡聖)이 따로 없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체(體)를 찾아내면 그것은 곧 숙세(宿世)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요. 공겁전(空劫前)의 세존(世尊)이며. 공겁전(空劫前)의 자기(自己)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 특히 ?기신론(起信論)?에서는 그 근원적인 이해를 하는 데에 치중하는 진심의 근원된 의지(意旨)가 담겨져 있다.
특히 ?기신론?에서는 진경(眞境)에서 현상(現象)에 이르는 것으로 그 체를 일심(一心)이라 하였고 이 체가 현실과 관심을 두게 되면서 심진여(心眞如)와 심생멸(心生滅)등의 이문(二門)으로 설명했으며, 또한 체대(體大) 상대(相大) 용대(用大)등 삼대(三大)로 나누어 진심을 설명하였다.
일심(一心)은 곧 진여(眞如)의 전일성(全一性)을 일심이라고 한다.34]
따라서 이 일심(一心)속에는 중생심(衆生心)으로, 세간과 출세간(世間 出世間)의 법을 모두 포용하는 한 마음이 있으니 이것은 곧 체와 용과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일심이 다시 마음의 진여와 마음의 생멸로 된 두문(二門)으로 되어있다. 즉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으로 되어, 이 두 문이 다시 체(體) 상(相) 용(用)의 삼대(三大)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35]
이 중에 체대(體大)는 곧 심진여문(心眞如門)에 속하는 것으로 모두가 평등하고 생멸이 없으며, 또한 증감이 없는 본연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영명(永明)의 유심결(唯心訣)에는 “이 마음은 중묘(衆妙)하고 군영(群靈)하여 만법의 왕(王)이요, 삼승(三乘)과 오성(五性)이 명귀(冥歸:깊히 들어감)하는 곳으로, 천성(千聖)의 어머니요, 독존(獨尊) 독귀(獨貴)하여, 도(道)의 근원(根源)이 되고, 법(法)의 원천(源泉)이 된다”.36]고 밝혔다. 또한 심생멸문(心生滅門)에는 상대(相大)와 용대(用大)가 함께 수용되어 있어서 능히 모든 부처와 모든 중생의 모습과 작용이 곧 이 용대에 속한다.
여기에 먼저 이 체(體)를 단적으로 말하면 일체 중생(衆生)의 본성(本性)이라고 밝히고 있다.
34]大正32 ?大乘起信論? 575下, “一者法 二者義 所言法者 謂衆生心 是心卽 攝一切世間法 出世間法”
35]먼저책 575下,
“云何爲三 一者 體大 謂一切法眞如平等不增減故.
二者 相大 謂如來藏 具足無量性功德故.
三者 用大 能生一切 世間 出世間善 因果故. 一切諸佛所乘故.”
36] 大正48 ?唯心訣? 994中
3) 체(體)를 깨달은 소식
그러므로 세존(世尊)은 이 체(體)의 소식을 깨달아, 취봉(鷲峰)에서 양구(良久)하였고, 또한 선현(善現-須菩提)는 암하(岩下)에서 망언(妄言)하였으며, 또한 달마(達摩)는 소림사(少林寺)에서 벽관(璧觀)하였고, 아울러, 유마(維摩)는 비야(毗耶)에서 두구(杜口)했으니, 이것은 모두 진심(眞心)의 묘체(妙體)를 발견한 때문이라. 따라서 조사(祖師)의 문정(門庭)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먼저 이 심체(心體)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보조(普照)는 강조한다.
따라서 불교의 많은 교리를 밝혔으나 구경에 이르러 심체에 들어가야만 조사(祖師)의 문정(門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어서 선가의 기초는 이 심체(心體)를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진성의 묘체는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한 체성을 찾아내는 것으로 이 진경을 찾는 것이 주공부(做功夫)하는 기초라고 보아왔다.
그렇다면 교가(敎家)에서는 진심의 묘체를 밝혀 온 것이 선가보다 앞서온 것임을 잘 안다. 그러나 지눌은 이 묘체의 경지에 들어가서는 교와 선에 대한 구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묘체의 진경에 들어가서는 선과 교의 구분을 할 수 없고, 대승과 소승이 있을 수 없으며, 모든 분별의 세계가 모두 이 체(體)의 진경에 들어가서는 하나로 만난다고 보았다. 이것을 알게 되면 곧 마음의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5. 진심(眞心)이 작용(作用)하는 원리(原理) : 진심묘용 (眞心妙用)
1) 묘체(妙體)속에 살아 움직이는 묘용(妙用)
옛 사람의 말씀에 바람이 움직임에 마음의 나무가 흔들리고, 구름이 생겨남에 성품에 티끌이 생겨난다. 만약 금일의 일에만 매여 달리다 보면 본래의 사람에 매어 달림이라. 이것이 곧 묘체(妙體)에서 묘용(妙用)을 일으키는 것을 밝힌 뜻이다.
진심(眞心)의 묘(妙)한 체(體)는 진심의 본래가 부동(不動)하여 안정진상(安靜眞常)하되, 진체에 항상 묘용이 현전(現前)하고, 경계의 흐름에 따라 흩어지지 아니 하나니 이것을 불방수유득묘(不妨隨流得妙)라 한다.
그러므로 조사송(祖師頌)에 이르기를 “천만 경계에 따라 마음이 굴러다니나니 굴러가는 곳에는 진실로 그윽하다(轉處實能幽) 그 흐름에 따른 마음은 기쁨도 슬픔도 없는 성품임을 알게 되었음이라.” 37]
37]大正51 ?景德傳燈錄? 第22祖 摩拏羅 條, 214 “心隨萬境轉 轉處實能幽隨流認得性 無喜復無憂”
그런 작용을 알게 되면 심신의 작용이 모두 진심의 묘한 작용임을 알 수 있다.
범부가 옷 입을 때, 옷 입는 것을 알고, 밥 먹을 때 밥 먹는 것을 알며, 모든 사업이 다만 그 모습에 따라 궁굴린다. 따라서 일용으로 작용함에 있으나 모르고 목전에 있으나 모르는 것이 곧 중생이다.
그러므로 바라제(婆羅提) 존자는 말하기를,
"“태중(胎)에 있을 때는 신(身)이요,38]
세상(世上)에 처(處)해서는 사람(人)이요, 눈(眼)에 있어서는 보는 것(觀照)요, 귀(耳)에 있어서는 듣는 것(聽聞)이요, 코(鼻)에 있어서는 향기를 맡는 것(辨香)이요, 입(舌)에 있어서는 담론하는 것(談論)이요,
손(手)에 있어서는 집착하는 것(執捉)하는 것이며, 발(足)에 있어서는 바삐 다니는 것(運奔)이며,
널리 펴면 항하수 모래에 가득 차며(徧現具該沙界),
거두어 드리면 한 적은 티끌 속에 들어가나니(收攝在一微塵),
이것을 아는 사람은 불성(佛性)이라 하고, 모르는 사람은 정혼(精魂)이라 한다고 표현한다.“ 39]
38] ?景德傳燈錄?207과 ?修心訣?에는 身이나 ?普照全書?53와 ?한국불교 전서?4-717中에는 神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원문 격인 ?전등록(傳燈錄)?에는 身으로 되어있다.)
39] 大正51, ?景德傳燈錄? 218面 中 ‘波羅提尊者’ 條
이것이 곧 진심(眞心)의 묘용(妙用)인 것이다. 따라서 조사문중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이 소식을 보고
도오(道吾)는 홀(笏)대를 들고 춤을 추고,
석공(石鞏)은 활을 들어 보였으며(拈弓),
비마(秘魔)는 작살을 들었고(擎杈),
구지(俱胝)는 손가락을 세웠으며(竪指),
흔주(忻州)는 땅을 두드린 것이며(打地),
운암(雲岩)이 사자를 놀렸으며(獅子).
그 외로 많은 스님들이 이 그 체를 보고 대용(大用)을 활용해 왔으니, 일용 작용에 미(迷)하지 아니하면 자연히 종횡으로 걸림이 없는 것(於日用不迷 自然縱橫無碍)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이 불미한 용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
2) 경계(境界)에 매하지 않는 묘용(妙用)
여기에서 본 묘체(妙體)가 경계에 매(昧)하지 않고, 응용 자재하는 마음이 곧 진심의 묘용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연의 작용 그대로의 활동이 진심 묘용(眞心妙用)이라고도 보는 데 대하여 한가지 혼돈하기 쉬운 것이 있다. 천만 경계에 끌려 진성에 매하여 움직이는 것과 진성에 매함이 없이 움직이는 것과의 혼동이다. 이것은 진심의 묘용인 것과 묘용이 아닌 것을 분명히 할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진심이 경계에 매하지 아니하고, 묘체에 응용자제하면 그것이 곧 묘용(妙用)이다. 그러나 묘체에 매한 상태에서 경계에 끌려 움직이는 것은 그대로의 용(用)은 되나 묘용에 이르지는 아니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심지(心地)란 원래 요란(擾亂)하고, 어리석지 아니한 상태속에서 작용(作用)하면 그것이 곧 자성(自性)의 정(定), 자성(自性)의 혜(慧), 자성(自性)의 계(戒)에 속하여 묘용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요란한 상태가 경계에 끌려 움직인다면 그것은 심지의 묘체에 응한 묘용이 아니라 경계에 따르는 용(用) 곧 수용(隨用: 隨境界用)으로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에 끌려 다니는 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40] 따라서 묘체를 떠나지 않고, 묘용을 활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묘체를 떠나서 작용하는 행을 의미한다. 그것을 육조혜능(六祖慧能)은 “체를 떠난 설법은 상(相)에 잡힌 설법으로 그것은 언제나 자성에 미(迷)함이 된다.”고 밝히고 있다.
40]大正48 ?六祖大師法寶壇經? 358 下
“吾所說法 不離自性 離體說法名爲相說 自性常迷 須知一切萬法 皆從自性起用 是眞戒定慧法 聽吾偈曰
心地無非自性戒 心地無癡自性慧 心地無亂 自性定 不增不減自 金剛 身去身來本三昧.”
따라서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자성의 묘용(妙用)은 될지언정 자성을 떠나 경계(境界)에 끌려 다니는 경우 자성이 경계에 수용(隨用)하게 되는 것으로 이것은 곧 중생으로서 진여(眞如) 자성(自性)을 어둡게 작용하는 경우가 된다. 이렇게 된 안목은 진심의 묘용을 모르는 수용의 상태임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6. 진심의 체용의 관계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진심체용일이(眞心體用一異)
1) 진심의 같은 세계와 다른 세계.
진심의 체와 용은 서로 하나일 수 없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하나로 보아지기도 하고 또한 다른 것으로도 보아진다.
하나로 보아지는 경우와 다른 것으로 보아지는 경우를 밝혀 보면 보조는 다른 것으로 보아지는 경우는 상(相)에 의존하는 경우요, 둘이 아닌 경우는 성(性)을 통해 보는 경우라고 밝히고 있다.
상(相)의 안목에서 보면 비일(非一) : 하나가 아니요.
성(性)의 안목에서 보면 비이(非異) : 다른 것이 아니다.41]
41]?普照全書?53 “約相卽 非一, 約性卽 非理”
여기에 밝힌 성과 상의 안목을 찾는 것은 ?기신론(起信論)?의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으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즉 심진여문에 바탕해 보면 진심의 묘체와 묘용을 다름이 없는 것, 즉 비이(非異)로 볼 수 있고, 심생멸문에 바탕하여 보면 짐심의 묘체와 묘용은 서로 같은 것이 아니어서 비일(非一)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기신론(起信論)?에서 찾아야 하는 자성의 핵심이론이다.
이 상태를 ?기신론?에서는 마치 물과 파도와의 관계와도 같이 비유한다.
물이 파도와 다름이 없고, 파도가 물에 다름이 없어서(水不異波 波是水) 둘이 아닌 경지에서 보면, 물은 분명히 물이고, 파도는 또한 분명히 파도라(波是波, 水是水)는 점에서 서로가 둘이 면서도 둘이 아닌 안목을 밝힌 것이다. 42]
42] 大正32 ?大乘起信論? 579上,
“無差別之相 等同一味唯一眞如. 此義云何以無分別 離分別相 是故無二…”
먼저글 578下, “一者 差別緣 二者 平等緣.”
大正44 ?大乘起信論別記? 228中-下, “如不動水爲風所吹而作動水動靜雖異 水體是一.”
같은책 229上 “中如似水之動 名爲波終 不可說是動 非水之動”
2) 진심(眞心)의 성(性)과 상(相)
묘체(妙體)는 부동(不動)하여 절제대대(絶諸對待)한 것으로 상(相)을 떠난 성(性)품 자리이니, 이 이치는 측량하기 어려운 이치를 찾은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묘용(妙用)은 수연응만유(隨緣應萬類)한 상태이니 허상을 망립하는 상태로서 마치 형상이 있는 것을 찾음이 곧 비일(非一)의 상태로 보지 않을 수 없음이라.
여기에서 단적으로 찾아보면 체(體)는 용(用)에 의해 있고, 용은 체를 의지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마치 물이 습기를 떠나 있지 아니하고, 습기가 파도와 함께 하고 있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 문제는 근원적으로 진과 망심(眞妄心)의 소재를 찾아보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신심(信心)을 찾는 교학적인 의미에서 더욱 드러나는 의미로 보아진다.
따라서 진심에 있어 체와 용은 서로가 일치된 것으로 보면 체에 속하는 안목이라고 보아야할 것이요, 체와 용이 서로가 달은 안목에서 보면 자연히 현실을 이해하여 묘용의 일을 하는데 있어 근원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보조는 이 진심을 찾는 가운데 체와 용의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여 주공부(做功夫)하는 원리로 삼는데 의미가 있다.
7. 수이무수(修而無修)의 공부(工夫) : 진심재미(眞心在迷)
1) 진심을 매하게 하는 마음
진심(眞心)의 체(體)와 용(用)은 누구에게나 고루 갖춰져 있지만, 성(聖)과 범(凡)의 차이에 따라, 마음의 본래가 서로 같지 않음이니,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대답하길, 진심(眞心)은 원래 범(凡)과 성(聖)이 공동으로 동일(同一)한 것이지만, 범부(凡夫)는 망심(妄心)으로 물건을 보다가 정성(淨性-조촐한 성품)을 잃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사항이니, 이 때문에 진심(眞心)이 현전하지 못한다. 이것은 어두운 가운데 나무 그늘을 찾는 것과도 같으며, 지하의 원천수 흐르는 물이 있는 것과도 같아서 분명히 있으나, 사람들이 알지 못함과도 같음이라.
그러므로 경(經)에 이르기를, “마니보주(摩尼寶珠)가 오색(五色)을 만나 그 색깔을 비추면 그 색에 따라 자유롭게 비추는 것을 보고, 중생들은 마니보주를 잘못 이해하여 마니보주 자체가 그같이 오색이 영롱하게 담겨져 있는 구슬이라고 오해(誤解)하는 것과 같다. 원각정성(圓覺淨性)이 몸과 마음속에 실지로 담겨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곧 중생이 미한 탓임을 알아야 한다.”43]
?조론(肇論)?에 이르길, “하늘과 땅, 우주의 사이에 한 보배가 있으니, 그것이 형산(形山)44]속에 숨겨져 있음이라, 곧 진심이 시장속에 담겨져 있음을 밝힘이라” 45]하였다.
또 자은(慈恩)은 이르길, “법신(法身)은 제불(諸佛)들에 공유(共有)해 있음이라, 그러나 범부(凡夫)는 망심에 덮여서 있어도 깨닫지 못하고, 진심(眞心)이 번뇌에 덮인 여래장(如來藏)을 이름한다.”46]고 하였다.
또한 배공(裵公)은 “종일토록 원각(圓覺)이 빛나지만 아직 원각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은 한갓 공상(空想)이라. 그것을 보려는 사람은 범부(凡夫)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진심이 비록 티끌 속에 있다 하나 티끌에 물들지 아니함이 마치 옥이 진흙 속에 던져져 있으나, 그 색깔이 변하지 아니하는 것과도 같음이라.”47]고 하였다.
43] ?普照全書?54 眞心在迷行
44]形山 : 宇宙之間 中有一寶 秘在形山. 우주사이에 한 보배가 있으니 그것이 은밀하게 모양의 산에 있음이라. 현실의 제 문제를 한 세상안 형성된 산에 은밀하게 집합되어 있음이다.
45]大正45 ?寶藏論? 145中, “夫天地之內 宇宙之間 中有一寶 秘在形山識物靈照 內外空然 寂寞難見 其號玄玄”
46]大正45 ?寶藏論?145中, “乾坤之內 宇宙之間 中有一寶 秘在形山”
47] ?普照全書?54 眞心在迷, “眞心 雖在塵勞 不爲塵勞所染 如白玉投泥 其色不改也.”
2) 무수이수(修而無修)에 이르는 길
우리의 현실은 비록 어두운 밤 진흙 속에 숨겨져 있다 하나 근원적으로 변질되지 아니하는 것을 알아 행하는 것을 일러 진심의 미(迷)한 곳에 숨겨져 있는 본연심을 알아내어 현실 속에 담겨진 원리를 찾아야 하는 것을 지눌은 제시한다.
깨닫기 전에는 모두가 미(迷)한 것이지만 깨닫게 되면 본래 깨달아 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자칫하면 닦을 필요 없는 행의 길을 ‘닦되 닦아도 닦음이 없는(修而無修)행’을 할 것이나 미리 닦지 않는 닦음(無修之修)이라는 생각만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교문(敎門)에서는 무한생(無限生)을 거쳐 수행할 것을 찾다가 수행의 길이 한가지 상징처럼 되고 말게된 것이 문제였다면, 조문(祖門)에서는 본래 닦아 있는 것으로만 보고 끊되 끊을 것 없는 끊음(斷而無斷)을 행하되, 미리 끊을 것 없는 것으로만(無斷之斷) 오해하고 미리 닦고 끊을 것이 없는 것에만 사로잡혀 참으로 닦고 참으로 끊을 길을 못 찾고 닦고 끊을 것 없는 마음으로만 오해하여 바른 길을 놓아버리는 것이 된다. 이상과 같이 선교간 수행의 양극단(兩極端)의 틈에서 벗어나 정로(正路)의 길을 개척(開拓)하기 위해 보조는 다음 식망현진(息妄顯眞)하는 열 가지(十路)길을 밝히고 있다.
Ⅲ. 식망실천(息妄實踐)하는 주공부(做功夫) 길
8. 진심(眞心)을 찾기 위한 열가지 식망(息妄)의 길
1 진심식망(眞心息妄)
1) 심(心)과 법(法)을 함께 쉬(息)는 길
진심(眞心)이 망심속에 있는 것이 곧 범부이다. 우리 범부는 어떻게 망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데 선가(禪家)에서는 그 길을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옛말에 “망심만 없으면 그것이 곧 보리(菩提)요, 생사와 열반이 본래 평등(平等)함이라.”고 하면서 망심만 쉬면 그 자리가 곧 진심이라고 간단하게 밝히고 있다. 따라서 보조는 간명하고도 쉬운 불조(佛祖)들의 법문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서 준다.
?원각경(圓覺經)?에 “저 중생들이 허깨비 몸이 사라지면 허깨비 마음도 사라지게 되고, 허깨비 마음이 사라지면 허깨비 경계(境界)도 사라지게 되며, 허깨비 경계(境界)가 사라지면 허깨비가 사라진다고 하는 것 자체도 또한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허깨비 아닌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거울을 닦는데 때와 먼지만 사라지게 되면 본래에 가진 거울의 빛나는 모습은 되찾게 되는 것과 같다.” 48]
영가(永嘉)대사는 “심(心)은 곧 육근(六根)이요, 법(法)은 곧 육진(六塵)이라. 이 두 가지는 마치 거울 위에 있는 흔적이 있으니, 때묻은 흔적을 없애는 날, 비로소 광명은 나타나게 되리라. 이 심(心)과 법(法)이 서로 잊게 되는 성품이 곧 참이라 한다(心法雙忘性卽眞). 이것은 곧 망(妄)을 떠나 참(眞)을 이루어지게 된다는 의미이다.(出妄而成眞也).”49] 이상 심과 법이 함께 쉬는 공부를 찾고자 하는 원리를 심(心)과 경(境)을 함께 쉬게 하고, 또 함께 일하게 하는 공부를 하도록 하는 길을 보조는 개척하였다.
48]大正17 ?圓覺經? 914下,
“彼之衆生 幻身滅故 幻心亦滅 幻心滅故 幻塵亦滅 幻塵滅故 幻滅亦滅 幻滅滅故 非幻不滅 譬如磨鏡 垢塵明現”
49] 大正48 ?永嘉證道歌? 396中, “心是根 法是塵 兩種猶如鏡上痕 痕垢盡除 光始現 心法雙忘性卽眞”
2) 무심(無心)으로 식망(息妄)하는 공부
무슨 방법으로 망심을 다스릴 수 있을까.
무심의 법(無心法)으로, 망심(妄心)을 비우는 길 밖에 없다.
무심법은 곧 초목과도 같이 되는 것인데, 어떻게 망념을 다스려 무심법이 된다고 할 것인가.
지금 말하는 무심(無心)은 그 체(體)까지 없애라는 말이 아니다.(非無心體) 다만 마음 가운데 한 물건도 없음을 찾는 것이 곧 무심이라고 말한다(但心中無物 名曰無心). 가령 예를 들면 “마치 빈병(空甁)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병 그 자체가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병에 물건이 없는 것을 빈 병(空甁)이라고 하듯이, 마음속에 한 물건도 없는 것을 무심(無心)이라 한다.”50]이 의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조사(祖師)의 말씀에 심무사(心無事) 사무심(事無心)하야, 자연히 허해서 신령하고(虛而靈), 적적하여 묘하게 되는것(寂而妙)을 일러, 진심식망(眞心息妄)의 심지(心旨)라고 밝히고 있다. 이것을 진심을 키우는 큰 과정으로 주공부(做功夫)하는 길이 있다.
50]?普照全書? 55 眞心息妄 “今云 無心 非無心體 名無心也 但心中無物名曰無心 如言空甁 甁中無物 名曰空甁 非甁體無 名空甁也.”
8. 진심(眞心)을 찾기 위한 열가지 식망(息妄)의 길 2
1) 각찰(覺察):깨달아 살피자.
각찰(覺察)이란 곧 깨달아 살핀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宋史 沈倫傳,以倫與之同 列不能 覺察) 생각을 놓는 공부를 하기 위하여 한 생각 일어나면 그것이 망념인 줄 알아, 망념을 격파하기 위한 깨달음의 길을 의미한다. ?종경록(宗鏡錄)?에, “생각이 일어날 때면 먼저 생각을 잠재우는 깨달음이 앞서야 한다.”51] 또, “생각이 일어나면 먼저 깨달아라 깨달으면 그 망념은 없어진다.”52]하였고, 또, “깨달은 사람의 안목에는 비록 객진(客塵) 번뇌가 있어도 결국 모두 제호(醍醐)를 이룬다.”53]
망념(妄念)을 끊되, 망념을 없앤다는 마음 때문에 도리어 망념이 없어지지 않나니 그것을 여석압초(如石壓草)라 하여 보조는 크게 금기(禁忌)했다.54] 닦는 것이 오히려 길을 찾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55]
51]大正44 ?宗鏡錄? 222下 ; 大正48 638上, “不怕念起 唯恐覺遲”
52]?修心訣? 全書38 .大正48 ?宗鏡錄? 408上, “念起卽覺 覺之卽無”
53]?修心訣? 全書38, “悟人分上 雖有客塵煩惱 俱成醍醐 但照惑無本”
54]?修心訣? 全書38 참조
55]大正51. ?景德傳燈錄? 450上, “聲聞 心心斷惑 能斷之心 是賊”
그러므로 먼저 깨닫는 것이 보조(普照)에게는 공부(功夫)시작의 근원으로 본 것이다. 또한 이것이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하는 기초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보조가 주장하는 각찰의 깨달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깨달음으로 인해 망념이 가라앉는 기초가 되어야 한다. 그 깨달음으로 천만 경계에 사로잡힘을 얻지 아니 하는 것이 각찰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깨달음이 새 마음을 불러 일으켜서 그 동안의 사고방식(思考方式)과는 전혀 다른 생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각찰하는 마음 공부라고 보아진다.
따라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깨달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한 생각을 바르게 돌려 그 동안의 생각과는 다른 생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이면 그것이 곧 각찰(覺察)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각찰이라고 하는 것이 견성(見性)의 차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냐 하는 물음을 하게 된다면 물론 성품을 볼 정도와는 관계없고 생각을 전환할 정도의 마음가짐을 갖은 사람으로 견성의 능력과는 다른 것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의 심신작용을 하되 먼저 각찰을 하여 자기 마음을 챙길 정도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2) 휴헐(休歇)56]
(1) 허덕임(貪嗔心)을 놓고 툭 부려 쉬자.
벽암록(碧巖錄)에 휴헐(休歇)에 대한 글이 있다. “쉬고 또 쉬어버리니 무쇠나무(鐵樹)에 꽃이 핀다.”57]하였고 또 “편계(徧界)에 전기(全機) 독로(獨露)함이여. 당하는 곳에 모두 거리낌 없도다. 당하는 곳마다 드러나는 기틀이니, 그 귀밑(句下)에는 무사(無私)함이요. 곳곳이 살인(殺人)하는 뜻이라. 다시 말할 것은, 고인(古人)들은 필경 어느 곳에 향할까. 어느 곳에 휴헐(休歇)할까.” 58]라고 한데에서 휴헐이란 말이 시작된다.
고래로 휴헐의 뜻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써왔다. “각후(覺後)에 내 마음 아픈 것은 깨닫고 나서 휴헐(休歇)이 되지 않는 때 이러라.” 59]
또한 “영화(榮華)속에 있으면서 휴헐(休歇)함이 없게 되면, 장차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말라 버리게 되어도 모르는 것과도 같음이라”. 60]
56]證峯 林秋梧著, ?眞心直說白話註解? 臺南 開元禪寺發行:
休歇, 歇是止 說安住於大安心之處, 放棄諸念休息萬事. 這就叫做休歇.
57] 大正48 ?碧巖錄? 177下, “垂示云 休去歇去 鐵樹開花 有麽有麽 黠兒落節”
58] 大正48 ?碧巖錄? 187下, “垂示云 遍界不藏 全機獨露 觸途無滯 着着有 出身之機 句下無私 頭頭有殺人之意 且道 古人畢竟向甚麽處 休歇 試擧看.”
59]蔡琰의詩, 胡笳, “覺後痛吾心兮 無休歇時.”
60] 崔顥의 江畔老人愁詩 “直言榮華未休歇, 不覺山崩海將竭.”
보조는 ?결사문(結社文)?에서 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미친 마음이 쉬어 지는 곳이 곧 보리(菩提)며, 성품을 조촐히 하고, 밝게 빛나는 것이 결코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다.” 61]
이것은 곧 경계에 쉬는 마음을 갖게 되면 본연의 마음을 찾아 회복하게 된다는 뜻이 잠겨져 있다. 따라서 보조는 일찍이 육조혜능(六祖慧能)과 오조에게 받은 의발을 뺐으려고 찾아왔던 혜명(惠明)에게 내린 법문내용에서 “선(善)과 악(惡)을 사량하지 말라, 오직 지금 이때에 당한 혜명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 데에서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62] 이것이 휴헐이후 크게 얻은 진심의 힘이다.
61]?定慧結社文?, ?普照全書?30 5行, “狂心歇處 卽時菩提 性淨妙明 匪從人得”
62] 大正48 ?六祖大師法寶壇經?(宗寶本) 349中, “惠能云 汝旣爲法而來可屛息諸緣 勿生一念 吾爲汝 說 明良久 惠能云 不思善 不思惡 正與麽時 那箇是 明上座本來面目 惠明言下大悟.”
대유령(大庾嶺)에서 욕심으로 도를 구하러 온 혜명(惠明)에게 육조(六祖)는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하라. 바로 이때에 여하 명상좌 본래면목(如何 明上座 本來面目)이 무엇이냐 라고 물은 것이 명상좌에게는 마침내 크게 깨닫게 되었다는 일화이다.
곧 선과 악에 사로잡힘이 없고, 순경(順境)과 역경(逆境), 선연과 악연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한 마음 크게 쉬는 이른 바, 휴헐(休歇)속에서 한 생각이 밝아진다. 특히 여기에서 쉬는 마음을 다음과 같은 말로 비유한다.
“고인의 말씀에 한 가닥 흰 비단을 밟고 가듯이,
차가운 땅을 밟고 고요히 가듯이,
옛 사당 속의 향로에 한 촉의 향을 태워 적적한 마음속에 피어오르듯이, 편안히 쉬자.“ 63]
63]?普照全書?56 5行 ; 大正47 ?大慧語錄? 884下.
이것이 바로 세밀히 짜여진 여러 가지 망상을 끊고(絶廉織) 분별을 여읜(離分別) 마음으로, 마치 어리석은 듯, 우둔한 듯, 한 심경에서만 비로소 점진적으로 진심(眞心)이 상응(相應)하게 된다. 이것이 곧 휴헐식망하는 공부이다. 따라서 보조국사(普照國師)는 그의 ?수심결(修心訣)?에서 “순역경계(順逆境界)를 만나 진희시비(嗔喜是非)가 일어날 때면 객진번뇌(客塵煩惱)가 치연히 기멸(起滅)하는 것이 예나 다름이 없지만, 그때에 만약 반야(般若)의 끈질긴 공부력(功着力)이 없이 어떻게 무명(無明)을 대치하며, 대휴대헐(大休大歇)하는 큰 경지에 이를 것인가”64]라 하면서 반야의 끈질긴 힘에 의해서 능히 휴헐하고 휴헐의 힘은 다시 반야의 문이 열리게 되는 반야속의 휴헐, 휴헐속의 반야에 이르는 양면의 힘이 능히 열리게 되는 것이 곧 휴헐하는 공부이다. 이 휴헐의 뜻을 다시 몇 가지로 요약해보자.
64]?普照全書?37. 16行, “若不以般若 加功着力 焉能對治無明 得到大休 大歇之地.”
경계에 따라 마음이 일어나면 깨달으라.(念起卽覺)
한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쉬라.(心起便休)
인연을 만나면 바로 그 인연을 쉬게 하라.(遇緣便歇)
이상 경계따라 천만가지로 마음이 일어나면 깨닫고, 깨닫고 나도 마음이 생겨나면 크게 쉬며, 인연(因緣)을 맞나면 더욱 툭 부려 쉬어라 라고 한 뜻을 찾아보면 휴헐이 가진 참 뜻을 알아 큰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여기에서 쉬어야 하는 것은 곧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극복하여 쉬는 마음을 이름이니 모든 분별성(分別性)과 주착심(住着心)을 놓고 본연의 마음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바라는 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주공부(做功夫)하는 길
공부를 행한다는 의미로 쓰여왔다. 주(做)의 의미 속에는 주로 실천해 나가는 뜻이 담겨져 있다. 석상선사(石霜禪師)는 용공부(用工夫)라는 말로 쓰기도 하였다.65] 이 주공부를 밝힌 글은 ?선경어(禪警語)?66]속에 주공부라는 말이 24개로 나누어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보조의 ?진심직설?의 영향인 듯 하다. 이 공부길에는 크게 두 가지 실천 과제가 있다. 그것이 곧 선설한 내용 첫째, 각찰(覺察)의 길과 둘째, 휴헐(休歇)의 길이다.
각찰과 휴헐은 망심(妄心)을 놓고 진심(眞心)을 찾는 두 가지의 선(禪) 수행의 기둥이니, 곧 진심을 찾기 위해 밝음을 찾는 노력으로 깨달음의 눈을 뜨게 하는 공부가 곧 각찰(覺察)이라면, 또한 망심을 놓기 위해 한 생각 모두를 쉬게 하는 노력이 또 하나의 기둥이다. 특히 휴헐은 곧 산만한 마음을 쉬기 위해 눈을 감는 것이 곧 휴헐(休歇)하는 공부이다. 따라서 각찰과 휴헐은 진심을 계발하기 위한 두 가지 기본 기둥이요, 틀인 것으로 보조(普照)가 계발한 중대 사상(思想)의 하나이다.
65]石霜禪師道, “學人用工夫 須要純粹 潔白絶點 汚染同白練一樣” ; 證峯林秋梧著 ?眞心直說白話註解? p.68
66]鏡虛編, ?禪門撮要?339 第12章 博山無異禪師, 禪鏡語 24개 做功夫의 길을 밝혔다.萬曆30年(1608)
따라서 보조가 밝힌 존심(存心)의 길은 곧 각찰(覺察)에서 비롯하여 다양한 경계에서 눈을 뜨게 하는 공부라면, 민심(泯心)은 곧 휴헐(休歇)에서 비롯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눈을 감고 쉬게 하는 마음 공부이다.
따라서 식망현진(息妄顯眞)하는 공부는 깨달음을 밝히는 눈을 뜨도록 하는 공부와 망념을 놓기 위해 눈을 감고 쉬는 공부가 그것이다. 이것이 그 기초로서 마음과 경계를 나누어서 혹은 눈을 떠서 밝히고 혹은 눈을 감아서 마음을 잠재우는 공부가 그 중요한 과제였다.
따라서 이 공부로서 일찍이 ?임제록(臨濟錄)?에서는 사요간(四料簡)이라 하여, 탈인불탈경(奪人不奪境) 탈경불탈인(奪境不奪人)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 인경구불탈(人境俱不奪) 등으로 나누어 밝힌 바 있고,
보조는 이와 같은 의미로 민심존경(泯心存境)과 민경존심(泯境存心)하는 공부가 있으며 또한 민심민경(泯心泯境)과 존심존경(存心存境)을 밝히는 공부가 있다.
여기에서 먼저 민심존경에서부터 밝히고 있다.
3) 민심존경(泯心存境) : 마음을 놓고, 경계를 두는 공부
진심(眞心)을 찾아내고 망념(妄念)을 쉬게 하는 기본으로써, 마음(人)과 경계(境)의 양면으로 나누어 밝히고 있다.
공부인이 먼저 마음(人)작용함에, 산만한 마음을 닫는 공부이니, 이른바 민심(泯心)하는 길과 경계(境界)에 눈을 여는 공부이니 이른 바, 존경(存境)하는 길을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단적으로 마음의 문을 닫고 경계의 문을 여는 것을 일러 민심존경(泯心存境)하는 공부라 한다. 이것을 임제록(臨濟錄)의 사요간(四料簡)에서는 탈인불탈경(奪人不奪境)이라고 한다.
마음을 놓고 경계를 두는 것이라고 한다. 공부인이 모든 망념을 쉬기 위해서 밖에 있는 경계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게 하는 것이니, 스스로의 망심만 전일하게 쉬는 공부를 하는 기초 단계이다.
말씀에, “이곳에 꽃다운 풀들이 가득한데, 성안에는(六根門속에는) 아무 친구가 없도다.(是處有芳草 滿城無故人)”하였고, 또 방거사(龐居士)는 “다만 스스로가 만물(萬物)에 무심하면 만물이 나를 끊임없이 에워싼들 무슨 상관이랴. 쇠로 만든 소가 사자후에 놀랄 일이 없고, 마치 목인(木人)이 화조(花鳥)를 보는 것과도 같음이라. 목인의 자체가 원래 무정(無情)하거니 화조가 사람을 본들 놀랠 것 또 무엇이랴.” 67]
67] 續藏120 ?龐居士語錄?p.78下 6行,
“但自無心 於萬物, 何妨萬物 常圍 遶, 鐵牛不怕 獅子吼, 恰似木人 見花鳥, 木人本體 自無情, 花鳥逢人亦不驚.”
이것은 스스로의 망념을 놓고 오직 밖에 있는 경계를 바라볼지니, 이 경계속에 일어나는 일에 걸리고 막히지 않는 심경을 갖는 것이 곧 탈인불탈경(奪人不奪境)공부이다.
우리는 밖에서 놀라는 일들이 너무 많이 생긴다. 이것에 내 주관이 없는 상태에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경계를 당하게 된다면 천만 경계에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며, 또 두려워할 것이 있으랴. 이것을 방거사(龐居士)는 마치 철우(鐵牛)가 사자후(獅子吼)에 놀랠 것이 없고, 목인(木人)이 화조(花鳥)를 보는 것과도 같아서, 한 생각을 비우면 객관적(客觀的)인 조건(條件)에 파묻혀 흔들릴 것이 없지 않으냐는 심경에 돌아가 보아야 할 것임을 밝힌다.
이것을 주관의 편견으로 인해 사물에 대해서 왜곡된 견해를 갖인 것으로 보고 그 주관을 비우는 공부라고 보는 안목도 있다.68] 따라서 주관적인 요소들이 제거되어야 적어도 대상을 정상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68]吳經熊著 ?禪學의 黃金時代? 三一堂 1979 310面
이것은 오늘날같이 세상에 많은 경계속에 파묻혀도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도 이 세상에 사는 우리의 사람에게 시사해주는 것이 많음을 느끼게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마음 비우고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 공부를 하자는 것이니, 이것이 곧 거북이가 오래 사는 이유로서 다음 예화를 들게 된다. 거북이는 넓은 바다 속에 자유롭게 살 때에 갑자기 상어나 고래 등 엄청나게 큰 동물들을 만나게 되어도 추호도 요동함이 없이 사는 힘을 갖고 있다. 그 거북은 아무리 큰 동물이 잡아 삼키려 해도, 재빨리 머리와 꼬리 그리고 네 발들을 거북의 갑옷 속으로 숨어버리는, 이른바 육장(六藏)을 하게 된다. 그렇게 육장을 하면 큰돌처럼 되어 아무리 별 것이 거북을 삼켜 먹으려 해도 걱정없이 육장으로 안정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북은 이래서 능히 장수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는 일화이다. 이것은 천만 경계에 오직 한 마음만 죽지 않으려는 힘을 가지고 육장을 하게 되면 그것이 곧 단자무심 어만물(但自無心 於萬物)하는 심경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의 주변에 천만 경계가 휩쓸려 와도 우리의 육근(六根-眼耳鼻舌身意)만 마음속 깊이 파묻기만 하면 밖의 경계가 아무리 나를 잡으려 해도 깊은 내 마음을 잡아가지는 못하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천만 경계 속에도 산만한 마음을 능히 잠재우기만 하면 능히 살아 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4) 민경존심(泯境存心) : 경계를 놓고 마음을 두는 공부
공부인이 수행할 때 천만 경계가 비워 있는 곳에서도 오직 이 마음 홀로 드러나 일하는 공부단계이니, 일심(一心)이 들어서 본연의 마음을 독립해 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산만한 경계를 닫고, 오직 한 마음 자유로이 홀로 작용함을 일러 민경존심(泯境存心)이라고 한다. 또한 이것을 임제록(臨濟錄)의 사요간(四料簡)에서는 탈경불탈인(奪境不奪人)의 법문이라고 한다.
?임제록(臨濟錄)?에서 밝힌 탈경(奪境)의 소식 : 왕령(王令)이 이미 행하매 그 명령 천하에 두루 미침(王令已行天下徧)이라고 밝히면서 현상(現狀) 세계의 차별계를 모두 비우고, 절대의 심경에 이르게 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
불탈인(不奪人)의 소식 : 장군이 밖을 막으니 연기와 티끌이 모두 사라지게 하도다. 이 소식을 전연진(將軍塞外絶煙塵)하는 소식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독수변강(獨守邊疆)한 상태로서 모두를 막고 나서 살아 있는 존심(存心또는 不奪人)의 상태라고 밝힌 바 있다. 69]
이 뜻을 보조(普照)는 방거사(龐居士)가 마조(馬祖)에게 물은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고, 상대되지 아니하는 것”70]에 이르는 것이라고 본다.
69] 唯覺禪師,?臨濟禪師語錄講話?, 臺中市, 德源禪學院
70]?續藏經?120卷, 55面 上, 「不與萬法爲侶者」와 「不與諸塵作對」
이것은 물론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상대로써 천만 경계의 상대심을 떠난 심경에 이르는 것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한 마음 망심(妄心)을 쉬고, 진심(眞心)의 본연에서 능히 걸림 없는 마음을 찾아내는 상태를 의미한다. 특히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있는 “마음에 거리낌없고, 거리낌없으므로 아무런 공포가 없음.”71]이라고 한 것을 찾아본다면 여기에서 특별히 “전도와 몽상을 멀리 떠내 버린다”는 법문이 망심을 버리고 진심을 찾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경계에 거리낌없음에 따라, 한 마음 자유하는 힘을 의미한다.
민경존심(泯境存心)의 본연에서 민경(泯境)한 뒤에 존심(存心)하는 것은 당연히 활발한 마음 작용으로 살아 움직여야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아울러 “삼천검객(三千劍客)이 지금은 어데 있는가. 오직 장주(莊周)홀로 태평세계를 이루었도다.” 72]라고 하는 말이 모두 경계를 놓고 마음만 두어 망심을 쉬게 하는 공부를 의미한다.
또한 지눌(知訥)은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든다.
“동산에 꽃은 이미 다 떨어졌는데, 수레와 말은 아직도 붐비고 있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곧 탈경불탈인(奪境不奪人)의 한 소식이요,
“천만 바람은 잠잤는데 파도는 더욱 넘실거린다”는 비유도 또한 탈경불탈인(奪境不奪人)의 소식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수레와 말이 붐비는 것이나, 바람 없이 파도가 넘실거리는 것들은 또 한가지 객관적인 조건에 말려 있는 마음상태 임에 틀림없다. 그런 점에서 수레와 말이 붐비지 않고, 파도가 넘실거리는 것도 잠재워야 하는 또 하나의 과제가 남아 있다. 이것은 모두가 잠재워야 하는 과제는 다음 단계에 속한다.
71]?般若心經?,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72] 大正47, ?明覺禪師語錄?679, ?普照全書?56, “三千劍客今何在 獨計莊周定(致)太平”
5) 민심민경(泯心泯境) : 마음과 경계를 모두 잠재우는 공부.
공부인이 먼저 외경(外境)을 공적(空寂)하고, 뒤에 자심(自心)을 소멸하는 것이니,73] 안과 밖에 있는 마음과 경계를 모두 비워서 적적(寂寂)하게 하면 어느 곳에서 다시 망념이 나오게 할 것인가.
73] ?普照全書?56, “先空寂外心 次滅內心”
?임제록(臨濟錄)?에서는 이것을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 법문에 해당한다고 밝히고 있다. ?임제록(臨濟錄)?에서는 이 소식을 ‘병분절신(幷汾絶信)하야 독처일방(獨處一方)’이라고 밝히고 있다.
병주(幷州)와 분주(汾州)는 모두 산서성(山西省)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당대(唐代)에 오원제(吳元濟)가 반역하여 병분의 이주(二州)를 조반독립(造反獨立)케 하고 뒤에는 다시 채주성(蔡州城)에 거점을 두게 되었다. 그때 등주(鄧州)의 절도사(節度使) 이소(李愬)는 산천(山川)의 지세(地勢)를 이용하여 설야(雪夜)에 채주성을 진공하고 오원제를 죽여 마침내 이 땅을 다시 평정하게 되었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왔다.
오원제(吳元濟)가 병주분주(幷州汾州)를 반역하여 ‘절신행위(絶信行爲)’했던 것을 일러 탈경민경(奪境泯境)하는 소식이라고 밝히고, 또한 뒤에 오원제가 지키던 채주성(蔡州城)을 실함(失陷)시키고 마침내 오원제까지 죽게되는 이른 바, ‘실함인망(失陷人亡)’하는 역사는 곧 탈인민심(奪人泯心)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임을 밝혀서, 대혜종고(大慧宗杲)는 이것을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하는 면목이라고 밝히고 있다.(먼저 글, p.38) 이 설명을 통해 ‘민심민경(泯心泯境)’의 소식을 밝히고 있다.
이것을 최근 오경웅(吳經熊)은 현상계(現象界)에서 나오는 주체(主體)와 객체(客體)는 절대적 주체(絶對的主體)인 진심(眞心)에서 흘러 나오는 것임을 깨닫고, 객체가 동일한 근원을 찾기 위해서 현상계의 주체와 객체가 함께 잠자는 것을 일러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이라고 밝히고 있다. 74]
이상의 민심민경(泯心泯境)의 소식을 보조(普照)는 관계(灌溪)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시방무벽락(十方無壁落) 사면역무문(四面亦無門) 정나나적쇄쇄(淨裸裸赤灑灑)”라 하고 이것을 일러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의 소식이라고 밝히고 있다. 75]
74]吳經熊著, ?禪學의 黃金時代?, p.311
75] ?普照全書? p.56, ?明覺禪師語錄? 灌溪, 679面.
또한 말씀에, “구름이 흩어지고 물이 흘러가니, 적연(寂然)하여 천지가 비어 있도다.”(雲散水流去, 寂然天地空)이라 하였고,
또한 말씀에, “사람과 소가 다 보이지 않으니, 바로 이것이 달이 밝아지는 때이러라.”(人牛俱不見 正是月明時)라 하였다.
이중에 단적으로 밝혀야 할 것은 보명(普明)의 목우도(牧牛圖)에서는 제 팔도(第八圖) 상망(相忘)에 속하고 또한 곽암(廓庵)의 십우도(十牛圖)에게도 제팔도(第八圖) 인우구망(人牛俱忘)에 속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점이 없지는 않다.
보명의 제팔도는 소와 사람이 구름위에 떠서 하늘위에 올라가는 그림을 그린 것이라면 곽암의 제팔도는 소와 사람이 함께 없어지고 일원상만이 두렷이 나타나는 현상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인우구망(人牛俱忘)의 소식을 상징한 것에 대한 공통점이라고 보아진다.
“소와 사람이 함께 없어지니 참으로 달 밝은 때로다.”라는 표현을 한 곳이 이 두 가지 모두에게 함께 안정의 세계에 이르는 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소식 속에는 참을 찾기 위한 깊은 잠, 안정된 잠을 자고 나서 진심의 뚜렷한 달이 현전하는 것이 이장의 형태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면 마음도 없고, 경계도 없어진 본연의 상태속에 크게 잠드는 상태로서 죄망심명(罪忘心滅) 양구공(兩俱空)한 상태를 찾은 것이 민심민경(泯心泯境)의 소식이다.
6) 존심존경(存心存境) 경계도 두고, 마음도 두는 공부.
공부를 수행할 때에 마음은 마음의 자리에 두고(心住心位), 경계는 경계의 자리에 두어서(境住境位) 때로는 마음과 경계를 상대하게 되면 마음이 경계에 취하지 아니하고, 경계는 마음에 임하지 아니하여 서로 걸리지 아니함이 자연 망념이 생기지 아니 하게 하는 것이니, 그것이 도에 맞아 걸림이 없게 된 상태를 이름한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길, “이것은 법위에 법이 머물러 세간에 서로 상주(常住)함” 76]이라 하였다.
76] 大正9, ?妙法蓮華經?9中, “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또 ?임제록?에서는 이것을 일러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사람과 경계가 함께 뺐기지 아니 하는 법문”이니 이것을 곧 인경구불탈(人境俱不奪)법문77]이라 하였다.
따라서 말씀에 이르길, “한 조각 밝은 달이 바다위에 솟아나니, 몇집 사람들이 누각위에 오를까.”라 하였고, 또 이르길, “산의 꽃 천만 송이 핀 들에, 노니는 사람들 돌아갈 줄 모르더라.”라고 표현한 것이 이 단계의 소식이다.
또한 ?임제록(臨濟錄)?에서는, “왕이 보전에 오르니(王登寶殿) 들가의 노인들이 태평세계의 노래를 부른다.(野老謳歌)”라고 표현한 바 있다. 여기에서 왕이 보전위에 오른다는 뜻은 곧 존심(存心)의 경지에 이른 다는 뜻이요, 들가의 노인들이 태평세계의 노래를 부른다는 의미 속에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참 모습이 세상에 인정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존경(存境)의 소식이다.
이 소식을 단적으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이라”고 표현한 옛 선가(禪家)의 소식이 여기에 통한다. 이 소식에 이르러 임제는 곧 무의도인(無依道人)이 되고, 무위도인(無位道人)이 되는 경지로,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져 죽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의 소식을 얻은 경지라고 본다.78]
77] ?臨濟錄?, 柳田聖山著, (佛典講座30) 70, 王登寶殿 野老謳歌 泰平無事한 나라의 모습을 이름한다. 聖王이 宮殿에 登壇하니 田夫野人들은 소리를 合처 노래함. 이것은 堯의 治世를 稱하여 野老擊壤이라 한다. ?18史略? 卷首에 보인다.
78]吳經熊, ?선학의 黃金時代?, p.312
이것이 곧 경계도 두고, 마음도 두어 망념(妄念)이 자멸(自滅)하고, 진심(眞心)이 자현(自現)하는 소식을 이같이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 고비를 넘긴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 이후에 이르러야만 큰 일거리를 만들고 할 일을 더욱 크게 남아 있음을 발견하는 것을 보조는 찾고 있다.
7) 내외전체(內外全體) 안과 밖이 모두 한 체(體)성이 되는 것.
공부를 수행할 때에 산하대지(山河大地)와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안의 마음기관(內心)과 밖의 경계기관(外境)의 모든 법이 함께 진심(眞心)의 체가 되어 모두 한 덩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담연(湛然)히 허명(虛名)한 마음일 뿐, 호리도 다름이 없는 것을 일러 조금도 다름이 없음이라, 대천(大千)의 무량한 모래와 같은 세계를 부셔서 한 조각을 만드는데, 다시 어느 곳에서 망심이 나올 수 있겠는가 라고 밝힌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내외 전체(內外全體)란 곧 심경일여(心境一如)가 된 상태의 마음을 갖고 망심을 멸하는 방법임을 이름한다.
그동안 심(心)과 경(境)으로 나누어 공부하다가 그것이 내(內)와 외(外)로 나누어 있는 세상을 서로 한 덩이요 한 체성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내와 외를 전체로 삼아 진심(眞心)으로 멸망(滅妄)하는 공부이다. 특히 한 체성으로 삼는 것이란 이 산하대지와 일월성신(日月星辰)과 몸 기관과 모든 것들을 아울러 한 덩어리가 되게 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한 덩어리로 두드러지도록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타성일편이란 모든 사량(思量)을 버리고, 천차만별(千差萬別)로 벌려진 것들이 합하여 하나가 되는 소식을 이름한다.
여기에서 특히 타(打)의 뜻이 무엇인가. 타(打)는 속어(俗語)로 자주 쓰이는 용어이니, 다양한 의미 속에서도 특히 역동적인 실천을 할 때 쓴다. 그 중에도 격타(擊打)라는 말속에는 파괴성을 의미하지만 그 외로 역동적인 실천을 의미하는 말로 쓰는 경우는 가령 끽반(喫飯)을 타반(打飯)이라하고, 급수(汲水)를 타수(打水)라하며, 조어(釣魚)를 타어(打魚)라고 하였던 관용어로 이 타자(打字)를 써왔다.
따라서 ‘타성일편’의 타(打)는 역동적인 실천을 의미하는 행위로 쓴 글이다.
또한 편(片)은 둘로 나누어진 상태를 의미하지만 그보다 작아진다는 의미로도 쓰이고, 또한 누군가 관심 두지 않을 정도로 된 한 편이란 말로 쓰인다. 이것은 곧 모두를 하나로 모아 하나보다도 작은 한 조각이 된 모습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일심(一心)이 지극한 상태로 되어진 모습을 의미한다.
?벽암록(碧巖錄)?79]과 ?무문관(無門關)?80]에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의 선문용어가 보인다.
이것은 세상 사람에게는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오직 스스로만 관심을 두어 실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상이 한 덩어리가 되면 당연히 커져야 하는데 선가가 한 덩어리가 되면 오히려 작아지는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곧 참다운 하나의 진경으로 되어진 모습이다.
79] ?碧巖錄?6則, 評唱에 “長短好惡 打成一片 無門關 一則”
80] ?無門關?1則 評唱, “蕩盡從前惡知惡覺 久久純熟 自然內外 打成一片 如啞子得夢 只許自知.”
그래서 조법사(肇法師)는 이르길, “천지는 나와 더불어 한 뿌리요,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한 덩치라.”81]고 한 말씀이 내외전체(內外全體)의 소식이다. 이것은 안과 밖(內外)에 이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全體) 모든 망심을 멸하는 공부이다. 여기에서 내외 전체로 망(妄)을 멸하는 공부(內外全體 滅妄的工夫)라면 멸망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 법계(法界)의 평등일여(平等一如)가 되게 하는 공부를 한다고 하는 의미가 담겨있다.82]
81] 大正48 碧巖錄 178 上 40則 肇法師 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
82] ?眞心直說白話說話?, 78
8) 내외전용 (內外全用) : 안과 밖이 모두 용(用)이 되는 것.
공부를 수행할 때에 일체의 안과 밖, 몸과 마음, 그리고 기계(器界)등이 모두와 모두의 동(動)과 용(用)을 시행하기 위함이니, 이 모두를 살펴볼 때 이 세상 모두가 진심의 오묘한 작용이라. 모든 마음과 생각이 여기에서 생겨나나니, 바로 이것이 이 세상이 눈앞에 나타나는 묘용으로 되어 있음이라. 망심(妄心)이 어느 곳을 향하여 함부로 안착할 것인가.
이 중에 기계(器界)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삼장법수(三藏法數)에 보면 기계란 이 세계가 마치 그릇과 같으니, 이것은 곧 국토(國土)를 이름한다.83]
그러므로 영가(永嘉)대사의 말씀에, “무명(無明)에 가려진 실성(實性)들이 곧 부처님의 성품(佛性)이요, 허깨비같이 빈 몸이 곧 법신(法身)이라.”84] 하였고,
또한 지공(誌公)의 십이시가(十二時歌)에 이르기를,85] “새벽의 인시(寅時)여, 미치광이 같은 그 기틀 안에도 도인의 몸이 숨겨져 있고, 앉고 눕고 하는 데에도 원래는 그것이 도(道)임을 알지 못하고, 다만 이것으로 망망하게도 쓴 고통(苦痛)만 받아 고생속에 살았도다.”하였다. 이것은 안과 밖의 전부가 묘용의 작용을 알아 소통할 때 이것이 곧 식망하는 공부길이다.
83]三藏法數20 “器界者 世界如器 卽國土也”이 국토를 宇宙로도 說明할 수 있다. 眞心直說 白話註解 p.79.
84] 大正48 ?證道歌? 395下,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法身覺了無一物 本源自性天眞佛.”
85]大正51, ?景德傳燈錄? 450上, “平旦寅 狂機內隱道人身坐臥不知元是道 只麽忙忙受苦辛”
이런 안목에서 보면 이 세상 그 무엇 하나 진심(眞心)의 묘용이 아닌 것이 없다는 의미로 보아진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전체의 참 모습이 드러나, 내외와 심신과 일체 기계가 한 덩어리가 되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외 전용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 한 덩이의 작용을 보지 않으면서 전용의 모습을 볼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한 덩어리가 되는 공부속에 밖에서 오는 무한한 작용을 발견할 때, 그것은 밖의 작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외의 한 작용이요, 서로가 하나의 길로 움직이는 것을 찾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하나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이 세상 모두의 작용은 허덕거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의 무한한 조화를 갖고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작용이 모두 자신의 책임 속에 담겨진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도 비판의식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진리와 떠나지 아니한 마음으로, 진리와 떠나게 된 잘못된 현실을 다시 관찰하게 되는 이유로 이 현실의 내외 작용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서로 떠나지 않는 그 모습으로 진경이 살아 움직이도록 하는 길을 찾아내어야만 바른 길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
9) 즉체즉용(卽體卽用) : 그 체(卽體) 그대로가 곧 그 용(卽用)인 것.
공부를 수행할 때에 비록 진제에 명합해도 한 맛으로 공적하고 그 가운데 안으로 영명한 가운에 공적함이 숨어있으니, 그것을 일러 용이 곧 체라고 한다. 영명한 가운데 안으로 공적함이 숨겨져 있음이란 용(用)이 곧 체(體)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영가(永嘉)대사는 이르기를, “초롱초롱한 가운데 적적한 것은 옳고, 초롱초롱하되 망상이 있으면 옳지 않은 것이며, 적적한 가운데 초롱초롱한 것은 옳고, 적적하되 초롱초롱한 것은 그른 것이며. 그것은 적적한 가운데 무기(無記)는 용납하지 아니하고, 초롱초롱한 가운데 흩어지는 상태를 쓰지 아니하는 것이라면 거기에 어떻게 망심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바로 체가 곧 용이요, 용이 곧 체가 되는 것으로서 망심이 자멸하는 공부 길이다.” 86]
86] 大正48 ?禪宗永嘉集? 389中 -下,
“忘緣之後寂寂. 靈知之性歷歷.
無記昏昧昭昭 契眞本空的的
惺惺寂寂是 無記寂寂非
寂寂惺惺是 亂想惺惺非 若以知知寂 此非無緣知”
여기에서 적적 성성에 이르게 하는 설명으로서 영가(永嘉)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세상의 인연(世上因緣)을 잊은 뒤에는 반드시 적적(寂寂)해지는 것이요, 영지(靈知)한 성품(性品)을 단적으로 보면 역역(歷歷)한 것이라 한다.
여기에서 흔히 말하는 무기(無記)는 소소(昭昭)한 것을 잊고 혼매(昏昧)에 빠진 것이며, 또한 진심(眞心)이 본래 공(空)한 것으로, 이에 계합(契合)하는 것은 곧 적적(的的)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런 점에서, 적적성성(寂寂惺惺)은 옳은 것이고, 적적무기(無記)는 그르며,
성성적적(惺惺寂寂)은 옳은 것이고, 성성망상(妄想)은 그른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 마음 적적성성 또는 성성적적을 찾아 실천해 나가는 길을 밝힌 것이니, 이것이 곧 성성적적의 길 또는 적적성성의 길을 즉체즉용(卽體卽用)으로 설명하였다. 성성만이 있으면 그것은 살아 있기는 하나 뿌리 없이 살려는 것과 같아서 경거망동하는 망상에 빠져나가게 되기 때문에 큰길을 개척하지 못하고, 또한 적적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것은 편안하기는 하나 세상일에 무기력해지고 일을 당해도 책임지고 행하려는 힘이 없어지는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적적성성 또는 성성적적으로 마음 대종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동(動)과 정(靜)을 일여(一如)하게 갖기 위해서는 성품본래가 그 같은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일할 때는 그 바탕에 일 않고, 안정된 마음을 갖고, 또한 편안히 쉬는 때에는 일하는 때의 심경으로 일하는 준비를 하게 됨에 따라 동정일여(動靜一如)의 실천적인 일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 마음을 가지고 시간상으로는 동정에 일여한 심경을 갖고 공간상으로는 적적한 마음속에서 성성하고 성성한 마음속에서 적적하여 구경에 이 마음이 둘이 아닌 마음으로 되는 길을 찾아 나가게 하는 것이 즉체즉용(卽體卽用)에 이르게 되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10) 투출체용(透出體用) 체(體)와 용(用)을 함께 넘어섬
공부를 수행할 때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아니하고, 또한 동서남북도 가리지 않아서 사방 팔면이 다만 하나의 큰 해탈문이 되어 크게 원만한 자리에서 체와 용을 나누지 않음을 이름한다. 그리하여 티끌만큼도 빈틈이 없어 온 몸을 한 덩이로 두드려 만든 것이니 이런 곳에서 망심이 또 어디서 일어날 수 있으랴.
그 동안 체와 용을 나누어 공부한 것이라면 투출체용은 체와 용을 함께 하여 능히 자유 해탈에 이르는 공부를 이름한다. 따라서 그 동안의 공부는 어떤 방향으로나 나누어서 공부하는 길이었다면 이 투출체용은 체와 용으로 나누었던 것들을 극복하고 한 덩어리가 되어져 넘어서는 상태를 점을 찾아 볼 때, 그 동안의 공부와는 서로 다른 점이 엿보인다.
일찍이 옛 사람의 말씀처럼, “온 몸에 꿰맨 틈이 없고, 위 아래가 둥근 한 덩어리의 모습이러라.”87]라고 하였던 것이 바로 이 투출체용(透出體用)의 한 단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찍이 선가에서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곧 진심(眞心)의 참 모습 속에 사람이 그 무엇과의 관계없이 본래 그대로가 체용이 없는 길을 개척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곧 모두를 뛰어 넘어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구경의 공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검토해야 할 것은 자연 그대로 속에서 능히 자유로우면서도 그 힘이 바로 큰 공부를 할 수 있는 식망(息妄) 공부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수이수(無修而修)하고 부단이단(不斷而斷)이 되는 길로서 지극히 자연속에 본연의 수행 길을 개척하는 공부를 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구경의 공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87]?普照全書?58, 眞心息妄 條 第10 通身無縫罅 上下忒圝
11) 십대식망(十大息妄)의 조직(組織)
이상 열 가지 식망공부중 한 가지만 수행하여도 진심식망이 가능해진다고 보조(普照)는 주장한 바 있다.
“수도인이 한가지 길만 이라도 얻어서 정성스럽게 공부하여 그 뜻을 성취한다면 그것으로 망심은 자멸되고 진심을 얻게 된다” 88]고 밝힌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후학들에게 대단한 용기를 주는 법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열 가지 식망공부 중에서 한 가지만 행하게 되면 자연히 그것은 편벽된 공부가 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따라서 식망의 공부는 가능할 수 있으나 원만한 길을 찾아 나가는 현진(顯眞)의 원만한 길에는 문제가 있다고 밝히지 않을 수 없다.
88] ?普照全書?58, “十種做功夫法 不須全用 但得一門 工夫成就 其妄自滅 眞心卽現”
아울러 열 가지 식망공부 가운데에는 다분히 상대적인 문제와 단계수행의 과제들을 밝혔으며, 또한 진심 식망의 공부 중에 기초가 되는 주공부(做功夫)의 길이 있는 반면, 구경의 길을 밝힌 점을 찾아보면 한 가지만 이루면 모두가 함께 성취되는 것이라는 생각은 수긍하기 어려운 점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십종식망(十種息妄)하는 공부를 단계와 순서별로 정리되는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중요한 의미라고 보고 싶다. 그런 차원에서 공부인이 기점(基漸)을 이루는 공부를 실천하도록 하는 노력을 한 것이 아니냐고 다시 한번 새겨 보고 싶다. 이런 의미에서 구조별로 다시 검토해 보고 싶다. 그렇다면 다음 6가지로 정리해 보고 여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해보고자 한다.
① 성성(惺惺)의 길로써의 각찰(覺察)
② 적적(寂寂)의 길로써의 휴헐(休歇)
③ 심경(心境)의 네 가지 민(泯)과 존(存)
④ 내외(內外)의 전체(全體)와 전용(全用)
⑤ 체용(體用)의 온전한 상즉성(相卽性)
⑥ 체용(體用)을 크게 넘어섬.
1) 성성(惺惺)의 길로써의 각찰(覺察)
한 생각 혼침에 들었을 때, 마음속에 성성(惺惺)하도록 노력하는 공부이니, 눈을 뜨고 그 일 그 일에 각찰(覺察)하는 노력을 하자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각찰하느냐. 쉽게 한 마음 살아 있고, 또한 성성한 마음을 갖고 마음에 밝은 심경으로 명랑한 마음을 갖고 스트레스와 고민을 만들지 않는 길을 찾아내자는 것이니, 이것이 곧 경계를 대하되, 한 생각 편안한 가운데 밝은 심경에서 마음을 개척하자는 것이 각찰(覺察)하는 공부이다.
2) 적적(寂寂)의 길로써의 휴헐(休歇)
한 생각 산만한 인연이 담겨 있을 때 마음속 깊이 편안해지면서 적적한 심경을 갖자는 것이니, 이것이 곧 편안히 쉬는 휴헐(休歇)하는 공부이다. 마음이 작용하고 있는 것들을 잠재우는 것이니, 이것이 곧 편안하게 하는 공부, 안정되게 하는 공부, 작용하는 모든 것을 모두 놓고 크게 쉬는 공부, 천만가지 욕심을 잠재우는 공부를 하여 적적한 본연심을 갖도록 함양하는 것이 곧 휴헐 하는 공부이다.
3) 심경(心境)의 네 가지 민(泯)과 존(存)
① 한 마음을 잠재우고, 경계를 일깨우는 공부.
자신의 주견(主見)을 버리고 수도인의 공부를 하는 분위기 속에 접어들어 그 분위기를 찾아 새로운 자기 개척을 통해 진심이 살아 움직이도록 하는 길을 찾는 공부.
② 경계를 잠재우고, 마음을 일깨우는 공부.
밖의 경계(境界)에 사로잡힘이 없도록 하기 위해 마음을 잠재우고, 오직 자신의 주체를 세워 천만 경계에도 변함이 없이 자신의 부동심을 확립하고 본연심을 일깨우는 공부.
③ 마음과 경계 모두를 잠재우는 공부.
밖의 경계나 안의 마음을 모두 잠재우고, 한 단계 심과 경을 더욱 키우고 살찌기 위해 내심과 외경을 모두 함께 잠재워 쉬고 안정된 마음을 갖기 위하여, 일체의 분별과 집착을 없애고 모든 애착과 탐착도 놓고 편안한 마음을 갖는 공부.
4) 마음과 경계 모두를 일깨우는 공부.
밖의 경계나 안의 마음을 모두 살려서, 그일 그 일에 부처님을 발견하고 그 일 그 일에 일거리가 나타나며 그 일 그 일에 감사의 은혜 속에 드러나는 것을 이름이니, 이것이 곧 나와 경계 모두를 살리는 힘을 찾아내는 것을 이름한다.
④ 내외(內外)의 전체(全體)와 전용(全用)
내외(內外)란 선설(先說)한 마음과 경계를 의미하는 것이니 곧 안의 마음과 밖의 경계를 모두 합하는 것이 내외 전체와 내외 전용이 되는 것으로, 내외를 합하되 전체로 합하는 것, 그리고 전용으로 합하는 것 등, 두 가지 길이 있음을 지눌은 찾아냈다.
1. 내외를 합해 전체를 이룬다는 것이니,
안의 모든 마음과 밖의 산하대지와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일체 제법이 한 덩치가 되는 것을 일러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고 한다. 그 소식을 갖게 되면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으로서 “펼치면 시방에 가득 차고 모으면 한 미진속에 들어간다”89]하였으니 이 중에 전체에 이르는 것이 곧 이 소식이다.
89]?普照全書?32 ?修心訣? “遍現俱該沙界 收攝在一微塵”
2. 내외를 합해 전용이 된다는 것이니,
안의 모든 마음과 밖의 산하대지와 내외 심신의 일체 동작 행위가 알고 보면 모두 진심(眞心)의 한 묘용(妙用)이라, 이런 점에서 행주좌와(行住坐臥)와 모든 세간(世間) 출세간(出世間)의 법(法)이 모두 함께 불법(佛法)의 살아있는 작용(作用)이요, 도리(道理)인 것이다 이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이 곧 내외 전용의 모습인 것이다.
⑤ 체용(體用)의 온전한 상즉성(相卽性)
내외가 하나가 된 다음은 내외를 합해 작용하는 체(體)와 용(用)이 하나가 되는 것이니 내외가 하나가 된 체는 곧 체(體)인 동시에 또한 바로 그것이 용(用)이 되는 이치를 체와 용의 상즉성(相卽性)관계임을 발견하는 것이다. 한 물건이 체(體)인 동시에 또한 그 물건이 용(用)이 되는 것임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을 수행하는 측면에서 보조는 적적(寂寂)한 가운데 성성(惺惺)하고, 성성(惺惺)한 가운데 적적(寂寂)한 상태를 일러 체용의 상즉성(相卽性)이라고 밝히고 있다.
⑥ 체용(體用)을 크게 넘어섬.
1. 체(體)와 용(用)이 하나됨.
체용(體用)을 크게 뛰어 넘어서는 것은 능히 상대가 없는 이치를 찾아 실천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체용을 뛰어 넘는다고 한다. 체용이 함께 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한 덩이가 되고 나면 그 속에는 진과 망이 없는 본연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런 점에서 망심이 자연히 없어지는 것이니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일러 체와 용을 넘어 선다고 한다.
흔히 임제 이후의 선가(禪家)에서 자주 쓰는 용어중 대기대용(大機大用)이란 말이 있다. 이 대기대용은 체와 용으로 나누었던 것과는 달리, 기와 용이라는 표현을 하여, 선기(禪機)의 완벽한 활용을 대기대용이라고 뜻해 왔다. 임제종은 대기대용으로 자기만을 즐기는 보금자리에서 벗어나는 것, 하늘과 땅이 함께 뇌관을 울리는 것 등으로 밝혀 왔다.90]
90] 人天眼目卷上53丈 臨濟門庭 條.(慶聖寺刊 1357年), “臨濟宗者 大機大用 說羅龍出巢窟臼 虎驟龍奔 星馳電激 轉天關幹地軸 負衡天意氣 用格外提持”
2. 대기대용(大機大用)의 기초
기(機)와 용(用)이라는 의미는 일찍이 ?기신론(起信論)?에서 밝힌 체․상․용(體相用) 또는 체․용(體用)으로 나누어 밝혔던 참 진리를 개척하는 것에 대해 활불이 되는 우주진리의 참 모습을 개척하는 길로서 후대 선가에서 기용(機用)과 조용(照用)등과 함께 대기대용(大機大用)이란 말로 전환된 사상이 발전되었다. 특히 임제종(臨濟宗)과 운문종(雲門宗)에서 써온 이 용어는 다소의 생각 차이는 있으나 선가의 기틀로서 소중히 생각해온 용어임에 틀림없다.
그 효시로써 ?임제록(臨濟錄)?에 기권(機權)의 어로(語路)라는 말이 그 시작된 용어로 본다. “제방의 학인 들이 와서 주객(主客)의 상견예(相見禮)를 마치고 난 다음, 바로 일구자(一句子)의 말 꺼리가 있어, 저 학인들에게 보여줄 권기(機權)의 어로(語路)를 염출(拈出)한다.”91] 이 기권의 어로는 조주어록(趙州語錄)에는 권기(權機)라고 하여 어순을 바꿔 쓰기도 하였다. 92] 권기는 권도의 기용이라는 말이기 때문에 권도라고 하는 것과 서로 관계지었던 것으로 기권(機權)과 권기(權機)는 기의 내용에 있어 서로 통한다.
91] 臨濟錄 秋月龍珉著(禪の 語錄10) 96 道流 諸方有學人來 主客相見了 便有一句子語 辨前頭善知識. 被學人 拈出箇機權語路.---機權語路(機略이 있는 말투)
92] ?趙州語錄?, 秋月龍珉著(禪の語錄11)333, “未審權機喚作什麽 師云 喚作權機” 여기에서는 방편의 기용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의미다.
그러나 기틀이 살아 있는 모습이라는 점에서 자주 즐겁게 써온 용어이다. 특히 여기에서 기(機)에 관심두는 것은 체와 용이 함께 담겨져 있어 우주의 기틀이 열리는 데에 관심두게 된 마음을 계발하는 선가의 멋이다.
이것이 인천안목(人天眼目)에 와서 대기대용이란 말로 들어 난다. 이중에 남당(南堂)의 변험십문(辨驗十門)의 第九에 須大機大用이라고 밝혀지고 있다.93]
또한 한국 환성지안(喚醒志安1664-1729)의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에서는 임제(臨濟)의 제일구(第一句)를 삼요인(三要)로 보고 이 삼요의 제1 대기원응(大機圓應), 제2 대용전창(大用全彰), 제3 기용제시(機用齊施)를 설명하면서 선가(禪家)의 멋있는 심신작용을 이 대기대용(大機大用)에서 찾으려 한다.94] 이 소식이 체용(體用)을 뛰어 넘는 안목이나 대기대용을 설명하는 것이나 그 근본에 들어가서는 서로 일치한다.
93] 一 須信有 敎外別傳. 二 須知有 敎外別傳. 三 須會無情說法與有 情說法. 四 須見性如觀掌上了了分明一一田地穩密. 五 須具擇法眼. 六 須行鳥道玄路. 七. 須文武兼濟. 八 須摧邪顯正. 九 須大機大用. 十 須向異類中行.
94] 禪門五宗綱要 第1 臨濟宗 三句 參考
9. 간단(間斷)없는 수행(修行)길 진심사의(眞心四儀)
1) 식망(息妄)공부는 좌선(坐禪)과 다른 방법이 또 있는가.
식망(息妄)공부가 단순한 좌선에만 쓰이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좌선하는 것 외에도 수행은 해야 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한 관심을 보조국사는 중시한다. 경론(經論)등에서는 좌습(坐習)하는 것에 대해서 자주 밝히고 있다. 행주 등의 말씀은 많이 하나 그 것만으로 행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아니하다.
?기신론(起信論)?의 말씀에는 “지(止)를 닦는 자는 고요한 곳에서 머물고, 바른 생각으로 단좌(端坐)하며, 기식(氣息)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형색(形色)에도 의지하지 아니하며, 공(空)한 곳에도 의지하지 아니하고, 지수화풍(地水火風)에도 의지하지 아니하며, 또한 견문각지(見聞覺知)의 모든 상(想)에도 의지하지 아니하고, 생각에 따르는 것을 모두 제거(除去)하며, 버린다는 생각도 또한 버려야 한다. 모든 법은 본래 상이 없으니, 모든 생각들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지 않게 하여야 한다.”95]라고 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간단없는 수행의 원리요 길인 것이다.
95] ?普照全書? 眞心四儀 59 起信論云
“若修止者 住於靜處 端坐正意 不依氣息 不依形色 不依於空 不依地水火風 乃至 不依見聞覺知 一切諸想 隨念皆除 亦遣除想 以一切法 本來無想 念念不生 念念不滅 亦不得隨心 外念境界 後以心除心 心若馳散 卽當收來 住於正念”
2) 사위의선(四威儀禪)
이 간단없는 수행의 길을 연마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좌선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것은 한낱 습선(習禪)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주좌와(行住坐臥) 모두가 선(禪) 공부로 삼아야 하고, 또한 어묵동정(語黙動靜)도 또한 선 공부를 떠나서 안 된다는 공부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가대사(永嘉大師)는 말하길, “행역선좌역선 어묵동정체안연(行亦禪 坐亦禪 語黙動靜體安然)”96]이라고 밝힌 법문은 선수행(禪修行)의 핵심 강령이 되어왔다.
그러나 먼저 기초적인 행을 닦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을 ?원각경(圓覺經)?에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여래의 사마타행(奢摩他行)을 하고, 계율(戒律)을 굳게 지키며, 대중가운데 편안히 거하고, 고요한 밤에 조용히 앉으라.”97] 라고 한 것은 공부인의 기초이다. 따라서 보조는 이것을 초습(初習)공부라고 밝히고 있다.98] 이 초습을 닦지 않고서 간단없는 선 공부를 하려고 하는 것은 그 공부의 순서를 잘 모르기 때문에 뜻을 이루기 어렵다. 마치 곡식을 가꾸기 위해서는 먼저 그 땅에 잡초를 제거하고, 정지작업을 하고 난 뒤에 심어야 하듯이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사위의(四威儀)를 행하는 것 자체가 선의 순서요 간단없는 공부를 하는 작업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96]大正48 ?證道歌? p.396上. ?普照全書? 59. 11行.
97]大正17 ?圓覺經?914中. “先依如來 奢摩他行 堅持禁戒 安處徒衆 宴坐靜室”
98] ?普照全書?59 11行.
3) 무심(無心)에 이르는 공부
요약하면 앉기만 한다고 식심(息心)할 수는 없다. 또한 어떻게 행주(行住)등의 일을 한다고 해서 선이 되겠는가. 만약 이 같은 데에 공부가 된다면 천성(千聖)이 온다고 결코 놀라 일어나지 아니할 것이요, 또한 마귀들이 덤빈다 해서 굽어보지도 않을 터이니, 그런 심경으로 능히 행주좌와에 변동 없이 공부하게 되는 것이 참 공부에 이르는 것이다. 99]
그렇다면 고부는 사람이 이같이 무심히 앉아 일하니 어찌 네 가지 거동가운데 현전(現前)하지 않는다고 의심하랴. 다만 믿지 않을까 의심할 뿐이요, 만일 네 가지 거동(四威儀) 가운데서 도를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현전하지 아니한다고 의심할 것 아니라고 행하는 큰 공부는 반드시 일의 성취를 하는 길이 될 것이다.
99] ?普照全書?59, “若是用得 純熟底人 千聖興來驚不起 萬般魔妖不廻頭(顧)”
Ⅳ. 식망현성(息妄顯性)의 세계(世界)
10. 진심(眞心)의 체용(體用)이 살고 있는 곳 진심소재(眞心所在)
1) 진심(眞心)의 묘체(妙體)가 살고 있는곳
진심은 망심이 쉬면 그 곳에 진심이 있다 하는데 그러면 진심의 체와 용은 어디에 있을까.
진심의 묘체(妙體)는 어느 곳에나 두루 없는데 없다.
일찍이 영가대사가 이르기를 “진심은 당처(當處)를 떠나 있지 않고, 언제나 담연(湛然)히 있는 것이라. 그러나 의식하고 찾으면 그대가 볼 수도 없는 것임을 알게될 것이다.” 100]하였고 또한 경에 이르기를 “진심은 허공과 같은 성품이고, 언제나 부동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또 여래장(如來藏)속에 들어가면 기멸(起滅)이 없이 있기 때문이다.”101]라 하였다.
또한 대법안(大法眼)에 이르기를, “어느 곳에나 보리의 길이요(菩提路), 어느 일이나 공덕의 숲이라(功德林)” 102]하였으니 이것은 곧 당체가 담겨 있는 곳에 나타난 묘체(妙體)의 상징이다.
100]大正48 證道歌 396中
101] ?普照全書?61, 眞心出死, 經云, “虛空性故 常不動故 如來藏中 無起滅故”
102]?普照全書?60 眞心所在5行 大法眼云 “처處菩提路 頭頭功德林”
2) 진심(眞心)의 묘용(妙用)이 살고 있는 곳
이런 점에서 위부원화엄(魏府元華嚴)이 시중(示衆)한 것처럼 “불법은 일용처에 있고, 또한 행주좌와에 있으며, 차 마시고 음식 먹는데 있고 언어속에 서로 묻는데 있나니, 마음을 내어 생각을 움직이게 하는 데에는 도리어 아니다.”103] 이것은 곧 진심이 작용하는데 따라 있는 것을 의미한다.
103]大正51景德傳燈錄466中
“魏府華嚴長老示衆, 佛法事在日用處. 在爾行 住坐臥處喫茶喫飯處 言語相問處 所作所爲擧心動念 又却不是也 會麽若會得卽今無礙自在 眞人.”
이 같은 묘용은 느낌에 따라 나타남이니, “마치 골짜기에서 소리를 지르면 그 골짜기는 소리를 응해주는 것이 묘용이요.”
또한 법등(法燈)에 이르길 “지금은 옛날과 떨어져 있지 않음이니, 분명히 목전에 있음이라. 조각의 구름이 저녁 골짝에 생기고, 외로운 학은 먼 하늘밑에 춤춘다.”104]하였다.
104] ?普照全書?60 眞心所在 “古今應無墜 分明在目前 片雲生晩谷 孤鶴下 遙天”
이같이 묘용의 모습은 자유스러운 현상이니 이것이 곧 진심의 체와 용이 소재한 곳이라고 밝힌다.
진심의 체는 곧 일체처에 편만한 것이라면 진심의 용은 인연에 따라 정해지지 않음이니 무한한 세상에 또한 묘용이 없지 않음이라 그러므로 수심하는 사람은 무위의 바다에 들어가서 생사의 바다를 건지나니 이런 점에서 진심의 묘용은 정처가 없지만 이 정처없는 곳에서 무한한 작용을 하는 그 모습에 진실한 묘용의 세계라. 이런 점에서 일체처에 체가 있다면 그 묘용은 일체처에 무한한 작용을 하는 정함이 없는 세계를 이름한다.
11. 생사(生死)없는 진심 진심출사(眞心出死)
1) 생사(生死)없는 이치
한 사람이 묻기를, “견성한 사람은 생사의 바다에서 떠난다 하나, 과거에서 오늘에 이르도록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그렇다면 생사에서 떠났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냐.”는 질문 속에 보조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생사가 본래 없으나 세상에서는 망녕되히 있는 것으로 헤아리고 있음이라. 마치 눈병에 걸려 허공을 바라보면 허공속에도 꽃이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눈병 걸린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일 뿐 정상인은 허공에 꽃이 없는 것이라”105]는 뜻이다.
생사 없는 줄을 알면, 본래 생사가 있는 줄로 아는 것이 곧 생사가 한갖 환상에 잡혀 있는 것임을 알게 되는 때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생멸이 없는 본래 이치를 알게 되면 그것이 곧 생사를 해탈하는 길이 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105] ?普照全書?61 眞心出死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2) 생사(生死)에서 해탈(解脫)하는 길
그러나 생사 없는 이치를 말하지만, 현실적으로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누구나 현실적으로 생사에 끌려 다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곧 생사가 없는 이치는 알겠으나 막상 죽음 이후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문제는 일찍이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물었던 문답에서 찾아보고 싶다. 수산주는 생이 생아닌 세계임을 누구나 알겠으나, 분명히 생과 사는 인생에 있어 분명한 것인데 이것을 모르게 되는 것은 마치 대나무가 시작되는 대순이 자라날 때 그것도 대나무라고 그 대나무로 뗏목을 만들려 하는 어리석음과 같다. 대나무가 오래 오래 순숙되지 아니하면 대나무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생사를 뛰어 넘었다고 죽음의 길을 체험도 없이 간단히 해치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따라서 생사의 법을 바로 알고 그것에 체험을 하고서야 진정한 생사를 넘어서는 선법(禪法)이 된다.
12. 수행(修行)에 두 가지 방법(方法), 진심정조(眞心正助)
진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망심을 놓고 진성에 돌아가는 수행길 중에 휴헐(休歇)하여 무심으로 망심을 놓는 공부가 있고, 그 외로 수행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대치하는 공부가 필요하지 않을까.
1) 선(禪)에 있어 정(正)과 조(助)의 양면 수행
수행상의 무심으로 식망(息妄)하는 공부는 곧 정(正)으로 공부하는 길이 원천적으로 필요한 길이라면, 현실적으로 선행(善行)을 하는 것이 수행상 도움(助)을 주는 공부라, 이 두 가지 공부가 반드시 아울러야 한다고 보조는 밝히고 있다.
그 비유로서 명경(明鏡)의 비유를 든다. 변경이 본래 밝은 것이지만 때가 끼었을 때 그것을 닦아야 하는데 그 방법으로 손이나 걸레로 닦기도 하고 그래도 잘 안되면 적당한 약을 가지고 닦기도 한다. 여기의 비유는
먼지나 때는 곧 번뇌(煩惱)요,
닦는 공부는 곧 무심(無心)공부며,
거울이 밝아지면 그것이 곧 진심(眞心)이라.
이 비유는 ?육조단경?에서 북종의 신수가 오조에게 올린 게송속에 밝히진 내용과 일치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나 무심을 바탕으로 하고 이에 대한 대치공부로 보는 것은 남종과 북종을 두루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수심결(修心訣)?에서는 정(正)의 수행을 자성문정혜(自性門定慧)라 하고, 조(助)의 수행을 수상문정혜(隨相門定慧)라 하여 서로 아우르되 수상문정혜가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일일 때에는 세상의 선(善)을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정의 수행은 어떤 것이며 조의 수행의 길은 어떤 것일까.
?기신론(起信論)?에서 밝힌 내용 속의 발심을 가지고 신심을 내는 사람(信成就發心者)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밝힌다. 106]
106] 大正32, ?起信論?580下
첫째 직심(直心)이니 진여의 법을 바로 생각하는 마음이며,
둘째 심심(深心)이니 일체의 선행을 모으는 마음이요,
셋째 대비심(大悲心)이니 일체 중생의 고뇌를 제거하는 마음이다.
여기에서는 정과 조가 아울러 수행하는 길로 ?기신론?을 찾은 것으로 보아진다.
진여(眞如)를 찾기 위해 무심(無心) 공부로 만족하지 않고 온갖 선행을 닦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비유컨대 마니보주가 있어 그 체(體)와 성(性)이 밝고 깨끗한 것이지만 한없는 번뇌의 때가 끼어 헤아릴 수 없는 번뇌가 덮여 있어서 온갖 선을 닦아 다스리는 것이니 만일 선법을 수행하게 되면 저절로 진여의 법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신론?에 의하면 “망심을 쉬는 것을 정(正)으로 삼고 선행(善行)을 닦는 것을 조(助)로 삼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2) 조(助)의 필요성
망심을 쉬고 지심을 나타나게 하기 위해 크게 쉬는 공부는 당연히 행해야할 바른 수행의 길(正)로 삼아 이것이 선의 기준이 된다고 일반적인 생각을 한다. 그러나 선(禪)을 하는데 선행(善行)이 필요하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자성이 비록 마니주와 같은 모습이지만 그 구슬이 다생겁내 진세에 굴러오는 동안 다양한 방면으로 물들은 습관에 찌들려 세상 사람들에게 선행을 함으로서 점진적으로 진심의 길에 이룰 수 있다. 이것이 수행의 대치공부요 조(助)의 수행에 이르는 길이다.
선행(禪行)은 곧 인천인과(人天因果)의 길인 소승(小乘)의 신앙 및 선행의 길에서 비롯하여 대승에 이르도록 인과를 통한 선행이 곧 대치공부(對治工夫)에 비롯하는 것이지만 지눌이 이것을 수행의 조(助)로서 수용하는 것은 돈오돈수(頓悟頓修)만을 주장하는 임제선관(臨濟禪觀)과는 달리 다분히 포용적이다.
따라서 선(善)행의 수행은 비록 조의 공부방향이지만 선수행자가 바른 인격을 수행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소중함이 담겨져 있음을 생각해야 할 과제이다.
Ⅴ. 식망현진(息妄顯眞)의 구경(究竟)
13. 무심(無心)의 공덕(功德) 진심공덕(眞心功德)
유심의 공덕은 인(因)이 있는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으나 무심의 경우는 공덕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1) 무심(無心)을 통한 성공덕(性功德)의 계발
보조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유심(有心)으로 닦은 공덕은 그 인(因)이 유위(有爲)로 받은 것이고, 무심으로 닦은 공덕은 그 인(因)이 무위(無爲)로 받는 때문에 자연 망심이 없어지고 근원적으로 갖추어 있는 성공덕이 앞에 나타나게 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일찍이 ?기신론?에서 체대(體大)에서 용대(用大)에 이르기 위한 중간에 상대(相大)에 이르게 될 때 갖추어진 여래장(如來藏)의 성공덕(性功德)이 나타남에 따라 발견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무위로 받은 무심의 공덕은 곧 무루(無漏)의 성공덕이 자성 본래에 나타나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顯性功德)
이 공덕은 본래 이미 갖추어 있음이라 그러나 망심에 덮혀 밝게 드러나지 못하다가 이제 망심이 없어짐에 따라 그 공덕이 앞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107] 이런 점에서 성공덕을 설명하는 데에는 ?기신론?에서는 주로 거울(鏡)에 비유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108]이 거울을 닦는 것은 마치 밝은 거울을 성품(性品)으로 보고, 먼지와 때가 끼어 잘 보이지 않게 된 것은 번뇌(煩惱)로 인함이며, 이것을 여러 방면으로 닦는 것은 무심으로 수행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정공부(正工夫)의 결과요, 그 외의 대치공부도 수용해야 하는 것을 밝힌 것이 보조의 특색이다. 이 정(正)과 조(助)의 양면(兩面)수행의 방법으로 계발해온 것이 다분히 포용적인 것을 ?기신론?에 근거하여 밝힌 점이 지눌의 창의적인 사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107]性功德 :이 공덕의 의미는 如來藏의 힘으로, 볼래 갖추어 있는 성리의 모습을 性功德이라고 밝혔다. 이것은 이미 ?起信論?의 相大를 설명하는 데에 여래장이 구족해있는 의미로 쓰였다.
大正44 ?起信論別記?239下, “相大 謂如來藏 具足無漏性功德故”
大正44 ?起信論別記?233中 “因熏習者 此性功德 能作正因 熏衆生心”
108] 大正44 ?大乘起信論別記? 233中,
“此性功德 能作正因 熏衆生心 能起厭樂及諸加行 乃至 佛果言因熏習 一切製法悉於 中現 故名爲鏡”
2)제조사(諸祖師)들의 무심으로 성공덕(性功德)을 얻은 예
홍주(洪州)의 수료(水燎)화상은 마조(馬祖)에게 나아가 절을 하고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분명(的的)한 뜻입니까.”라고 여쭈었다가 마조화상에게 발길로 차여 거꾸러지다가 갑자기 깨닫고 일어나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으면서, “참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백천삼매와 무량한 묘의가 다만 한 털끝 위에서 근원을 알아 내었다.”109]하고 예배하고 물러났다. 이로써 보면 공덕이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자기에게 구족해 있음이라.
109] 大正51 ?景德傳燈錄?262下, “洪州水潦和尙 參馬祖問 ‘如何是西來的的意.’ 被馬祖一踏踏到 忽然發悟 起來撫掌大笑云 也太奇也太奇 百千三昧 無量妙義 只向一毛頭上 便一時識得根源去 乃作禮而退.”
사조(四祖)가 나융(懶融)선사에게 “대개 백천의 법문이 모두 마음으로 돌아가고 항하사 모래수처럼 많은 공덕도 다 마음에 근원해 있으므로 일체의 계율, 선정, 지혜 등의 여러 가지 문과 신통 변화가 모두 스스로 갖추어져 있는 너의 마음을 떠나 있지 않음이로다.”110]
110]먼저책 227上, “四祖謂懶融禪師曰 ‘夫百千法門 同歸方寸 河沙功德 總在心源 一切戒門定門慧門 神通變化 悉自具足 不離汝心’ 據祖師語 無心功德甚多. 但好事相功德者 於無心功德 自不生信耳.”
조사의 말씀에 의하면 “무심(無心)의 공덕이 한없이 많으나 다만 형상적인 공덕만을 좋아하는 사람은 무심의 공덕에 대하여 스스로 믿음을 내지 않을 뿐이니라.” 111]
111] ?普照全書?64 眞心功德, “一切戒門定門慧門 神通變化 悉自具足 不離汝心 據祖師語 無心功德甚多. 但好事相功德者 於無心功德 自不生信耳”.
14. 자신의 공부상태(工夫狀態)를 시험함. 진심험공(眞心驗功)
진심이 현전하면 어떻게 하여 진심이 성숙함을 알 수 있을까.
1) 소의 길들여지는 상태를 관조함.
공부인은 먼저 소 길들이는 것과도 같은 심경으로 되어야만 공부하는 마음대중을 하는 데에 가장 순조롭게 시험해 볼 수 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진심이 나타나더라도 그 동안의 습기는 아직 제거하지 못하여 습관에 익숙한 경우라면 때로 본연의 마음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므로 소를 길들이는 데 비록 길이 잘 들여져서 마음대로 어느 곳에나 끌고 다닐 수는 있지만 아직은 채찍과 고삐를 풀어놓지는 못하고 좀더 기다려서 마음이 조순(調順)해지고, 그 걸음이 평온하여 혹 곡식 심은 곳에 들어가더라도 곡식을 해치지 않게 되어야 비로소 놓아줄 수 있음과 같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목동(牧童)이 고삐와 채찍을 쓰지 않더라도 자연히 곡식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2) 풀밭(露地)의 흰소(白牛)
공부인이 진심(眞心)을 얻은 뒤에도 먼저 심공을 들여 스스로의 마음을 보호하고 잘 길들여 큰 힘을 발휘할 능력이 있는 날까지 노력해야만 비로소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 진심을 시험하려면 먼저 평상시에 싫어했거나 좋아하던 경계(境界)에 맡겨 때때로 면전에 있다고 생각해 보았을 때 만일 여전히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도의 마음이 아직 성숙치 못한 것이고, 만일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나지 않으면 그것은 도의 마음이 점점 성숙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게 성숙하였더라도 그것은 아직도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생각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시험하여 만일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경계(境界)를 취하게 하여서 그래도 그런 생각이 나지 아니 하여야만 그 마음이 비로소 걸림 없어 마치 노지(露地)에 놓아둔 흰 소가 남의 곡식을 해치지 않는 정도가 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112]
112] ?普照全書?64 眞心驗功12行
15. 경계(境界)속에서 진심(眞心)을 찾는 길 진심무지(眞心無知)
진심과 망심이 경계를 대했을 때 진심인지 망심 인지 어떻게 분별(辨別)하는가.
1) 경계(境界)속의 마음병(心病)치료.
경계를 대하면 한마음 일어나는 마음속에는 순경(順境)과 역경(逆境)을 만나 탐심(貪心)과 진심(嗔心)을 일으키며, 또한 경계를 대하는 가운데 치심(痴心)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미 경계위에 탐진치(貪嗔痴) 삼독(三毒)을 일으키면 그 마음이 망심(妄心)인 것을 알게 된다.113]
113] 大正48 ?信心銘? 376中 欲得現前 莫存順逆 違順相爭 是爲心病 不識玄旨 徒勞念靜.
?普照全書?의 ?眞心直說?에는 順逆相爭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에는 하등 차이가 없다.
조사의 말씀에 “역경(逆境)이나 순경(順境)에 서로 다투게 되면 그것은 마음의 병(心病)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을 대립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망상(妄想)이다.” 진심(眞心)이란 곧 분별하는 마음 없이 알아서 공평하고 원만히 비추므로 초목(草木)과 다르고,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망심(妄心)과 다르니, 곧 경계를 대하여도 마음이 비워지고 밝아져서 미워하거나 애착하지 않고 아는 것 없이 아는 것(無知而知)이 곧 진심(眞心)의 앎이 된다.114]
114] ?普照全書?65 “無知而知 是以 無知卽知 無以言異於聖人心也”
그러므로 경계속에 순역간에 서로 대립하는 마음은 곧 망심(妄心)이요. 마음 병임을 지적하고 나서 한 마음 공평하고 원만한 마음을 발하는 것은 초목과 다르고,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망심과 다른 그 마음이 곧 지눌이 서문에 밝혔던 ‘지와 부지(知 不知)’에 속하지 않는 마음을 찾는 것이 다름이 아닌 초목(草木)과 다르고, 망심(妄心)과 다른 원만한 마음의 계발인 것이다.
2) 마음의 도둑(盜賊)을 진심(眞心)인줄 오해하지 마라.
만약 진심이 알고 모르는데 속하지 않은 것이 본연의 마음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유무(有無)에 떨어지지 않고, 또 항상 중도(中道)에 처해야 한다. 그러므로 조사께서 이르기를 “인연을 따라 조차 가지도 말고, 공(空)이라는 생각 속에도 머무르지 말며, 한결같이 마음을 공평하면 망심은 저절로 없어진다.”115]하였다.
?조론(肇論)?에 이르길, “그래서 성인(聖人)은 유(有)에 처하되 있지도 아니하고, 무(無)에 거하되 없지도 아니하며, 또한 유무를 취하지도 아니하지만 또 유무를 버리지도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진로(盡勞)의 고달픔이 화광(和光)이 되어 오취(五趣-五惡趣-육도중 어려운 걸림돌의 세상)를 두루 선회(周旋)116]하며 중생을 접화해 가는 것이 비록 왕래하되 왕래함이 없음이라.”117]
그것은 진심과 망심이 교학상에서는 서로 같이 볼 수도 있으나 실제는 진심(眞心)이 평상심(平常心)이요, 망심(妄心)은 평상심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따라서 망심을 진심으로 오해하여 진심과 망심을 혼돈하는 경우를 찾아 크게 주의하는 공부심을 가질 것이다.
115]大正48 ?信心銘?376中, “不逐諸緣 無住空忍 一種平懷 泯然自盡”
116]주선(周旋) : 두루 선회함. 여기저기 돌아다님.
117]大正45 ?肇論?154中, “是以 聖人 處有不有 居無不無. 雖不取於有無然 不捨於有無 所以 和光塵勞 周旋五趣 寂然而往 怕爾而來 恬淡無爲”
3) 경계속의 평상심(平常心)과 불평상심(不平常心)
무엇이 평상심인가. 누구에게나 갖춰 있는 한 점의 영명(靈明)함이 맑기가 허공과 같아서, “어디에나 두루 미치지 않은 곳이 없나니 세속 일에 대해서는 방편이름(假名)으로 이성(理性)이라 하고, 망식(妄識)에 대해서는 방편(權號)으로 진심(眞心)이라고 부른다. 털끝만큼도 분별이 없으되, 인연을 만나면 매(昧)하지 아니하고, 한 생각 취사심이 없으되 물건을 대하면 모두 두루하여 만 경계에 끌려 다니지 아니하여 설사 흐름을 따라 묘한 작용을 얻더라도 당처의 담연한 것과 떠나지 아니함이라.” 118]
118] ?普照全書?66 眞心無知 “人人具有 一点靈明 湛若虛空 遍一切處 對俗事 假名理性 對妄識 權號眞心. 無分毫分別 遇緣不昧 無一念取捨 觸物皆周 不逐萬境遷移 設使隨流得妙 不離當處湛然 覓卽知君不見 乃眞心也.”
그러므로 찾으려하면 그대가 오히려 보지 못하는 것이 곧 진심(眞心)이라 한다.
경계(境界)에는 성과 범이 있고(聖凡), 경계에는 염과 정이 있으며(染淨), 경계에는 이와 사가 있고(理事), 경계에는 동과 정이 있고(動靜), 경계에는 거와 래가 있으며(去來), 경계에는 호와 추가 있고(好醜), 경계에는 선과 악이 있고(善惡), 경계에는 인과 과가 있나니(因果), 상세히 논해보면 천만가지의 차별(差別)이 있으나, 지금 여기에서는 간명하게 열 가지의 차별을 들어 보인 것이니(十對), 모두 이것은 평상(平常)이 없는 경계를 이름한다. 119]
119] ?普照全書?66 眞心無知8行.
마음에 따라 평상이 없는 경계에서 생(生)하고, 마음에 따라 평상이 없는 경계에서 멸(滅)하며, 불평상(不平常)의 경계심, 대전의 평상진심 마음이 먼저 평상진심을 상대하나니, 그러므로 이름하여 불평상심은 곧 망심(妄心)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진심(眞心)은 본래 갖추어져 있어, 평상하지 못한 경계를 따라 갖가지 차별이 이러하나니, 그러므로 평상의 진심이라고 이름한다.120]
120]?普照全書?66 眞心無知, “心隨此不平常境而生 不平常境而滅 不平常境心 對前平常眞心 所以 名不平常妄心也. 眞心本具 不隨不平常境生 起種種差別 所以名平常眞心也.”
묻기를 진심은 평상하여 모든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없는 것인데, 부처님께서는 왜 선악과 인과의 보응을 설(說)하셨나이까.
답해 말하길, 망심이 갖가지 경계를 쫓아다니지만 종종(種種)의 경계들을 잘 알지 못하고 마침내 갖가지 생각을 일으킨다. 부처님께서 갖가지 인과 법문을 말씀하시어 망심을 다스리신 것이니 그래서 인과법을 말씀하시어 망심을 다스리는 것이니 그러므로 인과를 세운 것이니라.121]
121] 普照全書66 眞心無知 : 曰 妄心逐種種境 不了種種境 遂起種種心 佛說種種因果法 治伏種種妄心 須立因果也. 若此眞心 不逐種種境 由是不起種種心 佛卽佛說種種法 何有因果也.
4) 경계(境界)속에도 한마음 일어나지 않을 때, 그것이 진심(眞心)
진심은 갖가지 경계를 쫓아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갖가지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갖가지 법을 말씀하실 필요 없이 양구했던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니 그 경지에 어찌 따로 인과(因果)가 있겠느냐. 진심은 때로 베풀고 작용하지만 경계에 따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묘용(妙用)의 작용으로 노닐어 인과(因果)에 어둡지 않게 움직일 뿐이다. 이것이 곧 경계속에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반드시 진심의 참 모습이 발견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그대로 진심이다.
16. 구경(究竟)에 입명(立命)할 곳 진심소왕(眞心所往)
진심에 요달(了達)하지 못한 사람은 진심(眞心)에 미(迷)하기 때문에 선악(善惡)의 인을 지으며, 선인(善因)을 지었기 때문에 좋은 세계에 나고, 악인(惡因)을 지었기 때문에 악한 세상에 들어가게 된다. 이와 같이 업(業)을 따라 생을 받는 것은 의심 없는 이치이지만 진심을 요달한 사람인 경우에는 망령된 생각이 다 쉬어서 진심에 계합(契合) 되고, 증득 되었으므로, 선악의 원인(原因)이 있을 수 없으니, 몸이 없어지고 나면 영혼은 어디에 의탁(依託)할 것인가.
1) 의탁(依託)할 곳 있는 중생계와 의탁할 곳 없는 부처의 세계.
의탁할 곳 없는 것은 낙엽(落葉) 같이 불쌍한 인생으로 여기고, 귀신이나 주인 없는 고혼(孤魂)처럼 되여 특히 의탁할 데 있는 편을 구하자는 것이 이 물음인가.
성품에 요달(了達)하고 나면 그렇지 않다. 온갖 중생이 깨달은 본성에 미혹(迷惑)하기 때문에 망령된 생각과 탐욕으로 업(業)을 짓게되고, 이것이 인(因)이 되어 육취(六趣-六途)에 태어나 선악(善惡)의 보(報)를 받게 된다. 가령 하늘의 업을 심었으면 꼭 하늘의 과를 받을 뿐, 다른 세계에 태어날 수가 없게 된다. 다른 세계도 이와 같아서 그 업을 따르기 때문에 태어날 곳으로 낙을 삼고, 낳지 아니할 곳에는 낙이 되지 않는 것이 되며, 낳는 곳에 의탁할 곳이 되고, 낳지 않을 곳에는 다른 이의 의탁할 곳이 된다.122] 그 까닭은 망령된 생각이 있으면 망령된 인연이 있고, 망령된 인연이 있으면 망령된 결과가 있으며, 망령된 결과가 있으면 의탁(依託)하는 것이 있고, 의탁하는 있으면 여기 저기로 나누고, 여기 저기가 있으면 옳고 그름이 있게 되는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진심(眞心)을 요달하게 되면 생멸이 없는 깨달음의 성품에 계합해서 생멸이 없는 묘용(妙用)을 불러일으키게 되나니, 묘체(妙體)는 진상(眞常)하야 본래 생멸이 없는 것이나, 묘용(妙用)은 인연을 따라(隨緣) 마치 생멸이 있는 것 같음(似有生滅)이라, 그러나 체로부터 용이 나오는 것이라, 용(用)이 곧 체(體)이니 어찌 생멸이 있을까. 달인(達人)은 진심의 본체를 증득한 사람이니 생멸이 어떻게 간섭하겠는가.
122] ?普照全書?67 眞心所往 8行 : 旣從其業 故 合生處爲樂 不生處爲非樂 以合生處 爲自己依託 不生處 爲他人依託 所以 有妄情 則有妄因 有妄 因 則有妄果 有妄果 則有依託 有依託 則分彼此 分彼此則有可不可也. 今達眞心 契無生滅之覺性 起無生滅之妙用 妙體眞常 本無生滅 妙用隨緣 似有生滅.
2) 물과 파도는 하나
마치 물(水)이 습성(濕性)으로 체(體)를 삼고, 물결(波浪)으로 용(用)을 삼는 것과 같으니, 습성(濕性)은 원래 생멸이 없으므로 물결(波浪)중에 있는 습성(濕性)이야 또 어찌 생멸이 있으랴. 그러나 파랑이 습성을 여의고,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파랑도 또한 생멸이 없는 것임을 알게 되리라.
그러므로 옛 어른은 말씀하기를 “온 대지가 사문의 한 쪽의 바른 눈(一隻正眼)이며, 온 대지가 하나의 도량(是箇伽藍)이니 이런 이치를 깨달은 이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게 된다.” 하였다.
이미 진심을 통달하였다면 사생과 육도가 일시에 녹아 떨어지고, 산하대지가 다 이 진심(眞心)이 되나니, 이 진심을 떠나 다른 곳에 의탁할 곳이 또 없는 것이 된다.
이미 삼계의 망인(妄因)이 없음이니, 반드시 육취(六趣-六途)의 망과(妄果)가 없음이라. 망과(妄果)가 이미 없으면 무슨 의탁한다는 말을 할 수 있으며, 의탁할 곳이 없으면 따로 피차(彼此)가 있을 수 있고, 이미 피차가 없으면 옳고 그름이 또 있으랴. 그런 즉 시방세계가 오직 한가지 진심(眞心)이요. 전신(全身)으로 수용함에 의탁할 곳이 없음이라.
3) 법신(法身)에 바탕한 시현문(示現門)
시현문(示現門)123]가운데 인연 따라 임의로(隨意) 왕생하되 아무런 장애가 없는 것이 곧 임의자재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온조상서(溫操尙書)가 규봉에게 여쭙기를 “이치를 깨달은 이가 일생의 목숨(一期壽命)을 어디에 의탁합니까.” 124]하니 규봉선사께서 “일체중생이 신령하고 밝은 깨달음이 있으므로 부처와 더불어 다름이 없거니와, 만일 성품(性品)이 곧 법신(法身)인 줄 깨달으면 본래 나은 바 없는데 어디에 의탁할 것인가.” “영명불매(靈明不昧)하야 요요상지(了了常知)라” 오는 것이 없고, 또한 가는 것도 없음이라. 다만 공적으로 자체가 될지언정 색신(色身)에서 체(體)를 삼으려는 오인(誤認)을 하여, 망심(妄心)에 따르지 말지니라. 만일 망녕된 생각이 일어나게 되면 도무지 따르지 않으면 목숨을 마칠 때에도 능히 업에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요. 비록 중음신(中陰神)으로 있으나 향하는 바가 자유로워 천상 인간에 임의대로 기탁하게 되리니 이것이 곧 진심의 몸을 마친 뒤에 왕래하는 것이 된다.
123]示現門 : 한생을 마치고 중음신이 다시 현생에 돌아오려는 마음. 菩薩이 現實에 나타나려는 문을 示現門이라 부른다. 示現生이라고도 부른다(安國論221)
124] 大正51, ?景德傳燈錄?307 溫操尙書, “問奎峰曰 悟理之人 一期壽終 何所依託 奎峰曰 一切衆生 無不具有 靈明覺性 與佛無殊 若能悟此性 卽是法身 本自無生 何有依託 靈明不昧 了了常知 無所從來 亦無所去.”
Ⅵ. 결 론 (結論) :
진심직설(眞心直說)이 선가(禪家)에게 주는 의미
1. 보조는 신회(神會)의 사상에 입각하였는가.
흔히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선사상을 보고 초기선인 신회(神會)의 선관에 입각(立脚)한 사상처럼 보고 신회와 상통하는 사상으로 보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물론 지눌이 밝힌 ?법집별행록절요 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並入私記)?의 첫 귀절에서 하택 신회에 대한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125] 또한 절요에서 지눌이 신회의 사상을 인용한 귀절도 나온다.126]
125] 牧牛子曰 荷澤神會는 是知解宗師 雖未爲曹溪嫡子 然悟解高明 決擇 了然 密師 宗承其旨 故於此錄中 伸而明之 豁然 可見 今爲因敎悟心之 者. 除去繁詞 鈔出綱要 以爲觀行龜鑑
126] 先以 荷澤所示言敎 決擇自心性相體用 不墮空寂, 不滯隨緣, 開發眞正 之解 然後歷 覽洪州 牛頭二宗之旨 若合符節 豈可妄生 取捨之心也
이것은 모두 하택의 입장에서 진심(眞心)에 돌아가려는 기초를 밝힌 내용이 담겨진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점에서 보조가 이 하택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아니한 선가라고 생각하기 쉽다.127] 그러나 과연 그렇게 보아야 할 것인가.
127]忽滑谷快天?朝鮮禪敎史?183-187
분명한 것은 보조가 하택(荷澤)의 사상을 수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보조는 하택을 수용하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고, 당시 하택과 대결해 오던 북종(北宗)의 신수(神秀) 사상까지도 수용했던 내용이 담겨져 있음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다. ?수심결(修心訣)?에 이미 자성문정혜(自性門定慧) 못지 않게 수상문정혜(隨相門定慧)도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을 이미 주장했던 것으로, 수상문정혜는 상(相)에 따라 대치(對治)하는 문(門)이라 하였고, 자성문정혜를 찾는 데에는 정혜(定慧)쌍수 공부를 바탕에 두고 함께 응용해야 하는 것임을 밝힌 점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진심직설(眞心直說)?에서는 수행에 있어 무심공부(無心工夫)에 이르는 것이 소중한 것이지만 또한 순역경계(順逆境界)에 대치(對治)하는 공부도 필요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마니보주(摩尼寶珠)는 본래가 밝게 비추는 것인데, 따로 닦고 대치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하여 보조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본래가 닦지 않아도 밝게 빛나는 원리가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마니보주가 참으로 빛날 수 없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 본래가 무심공부(無心工夫)를 하면 자연히 정(正)의 공부가 된다고 보나 정(正)이 되는 공부를 한다고 놓는 공부만 하여도 그 마니보주가 어떻게 빛나더냐, 결코 그렇지 않다. 비록 옥이 빛나는 것이지만 닦고 노력해야만 이루어지는 이치가 있으니 그것은 대치문중(對治門中)의 공부라, 이것을 조(助)의 공부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공부는 정(正)에 이르는 공부 못지 않게 경계에 대치하는 노력을 조(助)의 공부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조의 공부가 있어야 마니보주가 밝아지는 것이다.128]
128]若人 修念眞如 不以方便 修種種熏習 亦無淸淨 以垢無量 遍一切法故修一切善行 以爲對治 若人 修行 一切善法 自然歸順 眞如法故.
이와 같이 북종(北宗)의 대치(對治) 사상까지도 수용했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찾아 불 수 있다.
2. 기점(基漸)으로 입도(入道)하는 문
?진심직설(眞心直說)?의 서문(序文)끝에 지눌이 밝힌 독특한 구절이 발견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제 미모(眉毛)129]가 떨어지는 것을 불사하고, 몇 장(數章)의 글들을 써서 진심(眞心)을 발명(發明)하도록 하여, 입도(入道)하는 기점(基漸)이 되게 할지로다”130]라고 한 글이다. 이중에 “입도(入道)하는 기점(基漸)”이란 별로 써보지 않은 느낌이 든다. 이 뜻은 무엇인가. 이 의지 속에는 점(漸)에 바탕을 두라는 말인가. 그 동안 선가(禪家)들이 점(漸)이라고 하면 신경질적으로 폄시(貶視)해 왔다. 그러나 보조는 오히려 이것을 수긍하면서 기점(基漸)을 밝힌 반면, 보조는 신회(神會)의 입장도 또한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수용했던 것으로 보아진다.
129]不惜眉毛 : 고담에 불법을 모르면서 설법하면 눈썹이 떨어져 버린 다는 일화가 있음. 눈썹이 떨어질 것을 불구하고 그 법문을 기록한다는 의미로, 자기비하의 말씀이다.
130]普照全書47 今不惜眉毛 謹書數章 發明眞心 以爲入道之基漸也 是爲 序.
이런 점에서 보조는 반드시 신회의 입장을 무조건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 학무상사(學無常師)의 안목에서, 세상 사람들이 다 비판하는 지해종사(知解宗師)지만 신회의 입장을 높이 평가했고, 또한 신회가 평생 비판해왔던 북종(北宗)의 신수(神秀)사상도 대치문중(對治門中)의 공부라 하여 경우에 따라 수용했던 것이니, 그 같은 선(禪) 수행의 길이 곧 입문자가 닦아야하는 기점(基漸)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곧 점진적인 공부를 실천하는 것으로 이는 보조의 원만한 수행의 길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보조는 당시 선가들이 자칫 마디만 말만하면 방(棒)을 치고, 할(喝)을 질러야 하는 것들을 반드시 바른 선지라고 보지 아니한다.
선의 첨단인 묘고정상(妙高頂上)의 길이 선가가 지향하는 길이라고 보는 것을 선가의 상식처럼 보아 왔으나 그것에 매달려서 세상의 길을 도외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 것을 지적한 것이 보조의 입장이 아니였던가. 따라서 보조는 묘고정상에 올라가는 것 못지 않게 제이봉두(第二峰頭)에 올라가 능히 방편(方便)을 수용하는 원리를 찾지 않으면 입도(入道)의 길에 들 수 없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기점(基漸)의 길을 밝힌 것이다. 이 진심직설 서문에 있는 것이 곧 진심직설의 눈(眼目)인 동시에 선가의 바른 눈이 될 수도 있게 하는 길이다.
그러나 과연 진심직설이 제이봉두에 헤매이는 기점(基漸)의 길에만 닫혀져 있었던가. 보조 시대에도 크게 유행해온 선가(禪家)의 첨단(尖端)이었던 임제선(臨濟禪)을 수용했다. 따라서 보조는 임제의 사상을 크게 수용한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임제록에 가장 소중한 선법(禪法)은 아무래도 사료간(四料簡)의 선지(禪旨)이다. 보조도 이 사료간의 공부를 크게 연마했던 선지식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보조는 임제(臨濟)의 사료간(四料簡)을 결코 구경(究竟)의 선법으로 보거나 기초(基礎)의 선법으로 보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선 공부의 한 과정(過程)속에 이루어지는 이른바 “과정(過程)의 선법(禪法)”으로 본 것임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사료간을 거처야 하는 선법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보조는 임제(臨濟)의 탈인불탈경(奪人不奪境) 탈경불탈인(奪境不奪人)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 인경구불탈(人境俱不奪)의 네 가지 요간(料簡)을 바르게 수용하고 나서 보조 자신의 독자적 이름으로 바꾼다. 누가 주고 뺏는 선이 아니라 비우고 잡고 하는 선의 관계로 본 보조는 그 이름을 ‘민심존경(泯心存境) 민경존심(泯境存心) 민심민경(泯心泯境) 존심존경(存心存境)’으로 밝히고 있다. 이것은 그 동안의 선가들이 살아온 경지를 간명(簡明)하게 요약하고 나서, 그 자리에 합당한 것을 분석한 것이다.
따라서 사료간 속에 모든 선가들의 경지를 밝히지만 사료간을 이루는 기초로써 두 가지로 나누어 밝힌다.
즉 각찰(覺察)과 휴헐(休歇)의 길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사료간 이전에 연마해야할 양면(兩面)의 선법으로, 스스로의 눈을 뜨게 하는 각찰(覺察)의 길과 스스로 마음을 쉬도록 하는 휴혈(休歇)의 길을 밝힌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료간 의 기초로서 각찰과 휴헐의 수순을 밟고서 사료간에 들도록 하는 것이니, 각찰과 휴헐이 선 수행의 기초가 되는 두 기둥의 선지(禪旨)가 되는 것이다. 이 사료간 속에는 심(心)과 경(境)으로 분화된 양면을 하나로 통합(統合)하게 하기 위하여 내외전체(內外全體)와 내외전용(內外全用)의 길을 밝힌다. 이것은 심과 경이 그 동안 분화되어 공부했던 것에서 전반(全般)의 하나로 만나되 능히 체(體)와 용(用)의 작용을 하게 하는 길을 밝혔으며, 또한 이 체용의 길도 분화된 양면을 극복하도록 하는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즉체즉용(卽體卽用)의 길이다.
이것은 자칫하면 어려운 선행인 것같이 생각되기 쉬우나 선의 기초를 다지는 길로서 성성적적(惺惺寂寂) 또는 적적성성(寂寂惺惺)의 선법을 행하면 이것이 곧 즉체즉용(卽體卽用)의 길이 된다고 보조는 밝히고 있다. 끝으로 이 체용의 형식에서 뛰어 넘는 길에 이루도록 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투출체용(透出體用)의 길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곧 열 가지 식망의 길 중에 최후의 식망법(息妄法)이다.
3. 양구(良久)하는 대기대용(大機大用)
임제 이후에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선기(禪機)를 강조하는 것이 선의 활기를 찾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의외로 보조 당시에는 이 대기대용(大機大用)에 대한 활구(活句)의 선지가 별로 찾아 볼 수 없다. 물론 보조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으로 보면 전혀 없었던 시대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보조는 이 대기대용의 선지를 의도적으로 쓰려고 하지 아니한 인상이 든다. 다만 진심의 묘체와 묘용을 밝혀 ?기신론(起信論)?에 바탕한 체(體)와 용(用)의 안목을 밝혀 기(機)와 용(用)으로 대치되는 대기 대용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나 차라리 체와 용의 의지에서 선의 진경(眞境)을 발견해 나가는 데 더욱 관심을 두려고 한 것 같다.
물론 대기대용의 사상을 불러 일으켜 선기(禪機)에 대해 보조가 이해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보조는 어디까지나 기점(基漸)의 선지에 입각하여 분발하는 착실하고 강인함이 보조의 선지(禪旨)였음이 분명하다
흔히 선가에서 진심을 찾아 들어가는데 타성일편(打成一片)의 소식을 저버리지 않고서 진경에 들지 않을 수 없고 또한 타성일편없이 대기대용의 선기에 들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타성일편의 소식으로 활구(活句)에 이르는 것은 가능하나 대기대용만을 강조하면 선(禪)의 병(病)에서 깨어나기 힘든 점을 보고, 보조는 양구(良久)한 것이다. 분명히 대기대용에 바탕한 임제의 삼요(三要)131]에 대한 소식을 몰랐으리라고는 보지 않지만 보조가 그 문을 두드리지 않고 있는 뜻이 보조에 있어 한 가지 화두(話頭)이다.
131] 喚醒志安(1664-1729) 撰 禪門五宗綱要에 臨濟禪은 곧 機와 用을 밝히는 宗이라하고, 그바탕에는 三要로 밝힌다. 三要는 1. 大機圓應 2. 大用全彰 3. 機用齊施로서 大機大用의 意旨이다.
당연히 타성일편은 기와 용을 계발하는 활구(活句)의 선지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타성일편의 길을 내외전체(內外全體)의 소식속에서 설명하면서도 대기대용의 활불(活佛)이 되는 활구(活句)의 수순을 밟지 않은 것은 보조가 기점(基漸)에서 출발하려는 선의 입문에 더욱 착실하게 다져온 데에 그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싶다.
공부인의 성실한 방법으로 진심에 돌아가 언젠가 진심소왕(眞心所往)의 길에 이르러, 우리의 안심입명(安心立命)에 돌아가게 하는 큰 길을 발견하면 대기대용의 소식은 차라리 양구(良久)한 가운데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진심에 입문하기 위한 구체적인 성리의 길을 깨닫게 하고 식망 실천의 길을 밝히는 데 중심을 두었다. 이것은 곧 식망을 위한 실천의 길을 거처 식망으로 현실속에 현성하도록 하며, 다시 그 힘으로 진경(眞境)에 이르는 구경(究竟)의 길을 삼았던 것은 아닐까.
4. 평상심(平常心)에서 평상심(平常心)으로
보조가 준 선지(禪旨)는 평상심(平常心)에서 시작하여 평상심에 돌아 오도록 하는 공부였다. 평상심은 알고 모르는데 속하지 않는 것이니 아는 마음은 망상(妄想)에 떨어지거나 무기(無記)에 빠지고 만다고 밝혔다. 이것은 곧 보조가 공부하는 서문(序文)에 공부인이 관심을 두어야 하는 안목으로 밝히고 나서, 한 가지 잘못된 일방적인 관념에 빠지거나 탐진치(貪嗔痴)의 망상으로는 이 평상심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평상심속에는 부처님의 경전(經典)이나, 조사들의 법문(法門)을 넘어선 것이 된다. 이것은 평상심을 통해 툭 트인 그 마음을 발견하도록 하는 길이니, 이것이 곧 공부인의 한 마음이요 이 마음이 진심을 찾아 영원하도록 평상심이 지속하는 것이다.
보조는 이 평상심의 지속 속에 공부의 영원한 길이 발견된다 고 본것이다. 일찍이 영가대사(永嘉大師)가 밝힌 법문처럼, “행역선(行亦禪) 좌역선(坐亦禪) 어묵동정(語黙動靜) 체안연(體安然)”이라고 밝힌 법문을 보조는 즐기면서 어느 곳에서나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길을 개척하였다. 아울러 대법안(大法眼)의 법문에 밝힌 것처 럼 “처처 보리로(處處菩提路) 두두 공덕림(頭頭功德林)”이라고 한 것은 평상심의 힘으로 국한 없는 시간과 아울러 국한 없는 공간 속에 평상심을 찾아 나가는 길을 본 것이다.
이 평상심은 영원히 거래할 때까지 평상 그대로의 마음을 갖는 것이지만 경계에 따라서 불평상심(不平常心)이 되는 것을 지적했다. 경계에 따라서 탐진치(貪嗔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은 오직 상대심(相對心)을 없애는 길과 스스로의 탐심을 놓는 각찰과 휴헐의 길 밖에 없다. 이것을 극복하게 되면 자연히 평상심을 이루어지게 된다. 그것이 곧 진심(眞心)이 되어 부처와 다름없는 길이 열리게 된다.
진심직설이 지향하는 길을 이 평상심으로 능히 영생을 거래하여도 변함없는 본연의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니, 이것을 보조국사는 진심의 본연에 돌아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큰 주인이 되는 것으로, 진심직설에서 시작하여 영원히 변함없이 전개하는 길을 밝힌 것이 이 진심직설의 의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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