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스크랩] 참선수행과 선병(禪病)의 문제

수선님 2019. 2. 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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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수행과 선병(禪病)의 문제

 

 

鄭茂煥(性本)*

 

 

 

目 次

 

Ⅰ. 시작하는 말
Ⅱ. 선병이란 무엇인가?
Ⅲ. 참선수행과 선병
Ⅳ. 선의 생활과 선병 - 陸沈의 선병
Ⅴ. 맺는 말 - 참선수행과 선병의 치료

 

한글 요약

 

선병은 불법의 근본정신과 사상을 철저하게 깨달아 체득하지 못하고 반야의 지혜를 구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법의 안목으로 올바른 참선수행의 방향과 방법을 실천하지 못한 무지[無明]로 자신의 주관적인 사고나 생각으로 만들어 낸 마음의 병이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남을 의지하지 말고 자신을 등불로 삼고 불법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도록 自燈明, 法燈明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가 불법을 실행하는 주체이며 불교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지혜와 인격을 구현하는 종교이다.

 

자등명 법등명을 대승불교에서는 자각의 주체이며 중생심의 일체 번뇌 망념을 초월한 불성을 깨닫는 見性과 불법의 대의인 반야지혜를 체득하여 일체 경계를 초월하고 불심의 반야지혜로 창조적인 삶을 실행하도록 강조하고 있다.

 

경전과 어록은 중생들의 심병(心病)을 치료하기 위해 자비심으로 84000 많은 방편법문을 설한 것이다. 경전과 어록을 읽고(看經 看話)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고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참선수행을 해야 한다.

 

반야의 지혜로 중생심으로 업장을 만드는 선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며, 진실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구족할 때 지금 여기 자신의 삶을 불안과 공포, 두려움이 없고, 마음의 해탈로 걸림 없고, 자유로운 보살행을 할 수가 있다.

 

주제어: 참선수행, 선병, 선잠, 무무관.

 

 

Ⅰ. 시작하는 말

 

참선수행은 경율론 삼장의 가르침과 선승들의 어록에서 설한 법문을 배우고 익혀서, 불법의 근본정신과 사상, 지혜와 인격를 체득하여 자기 자신이 지금 여기의 자신이 하는 시절인연의 삶을 통해서 불보살의 원대한 원력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구족하는 것이다.
불법의 올바른 가르침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불보살의 원력을 세우고, 중생심을 초월한 불심으로 불법의 진수인 근본정신과 사상(불법대의),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는 공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참선수행이란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수행이며, 불심의 지혜로 자신이 세운 원력을 보살도의 실천으로 회향하는 생활이다. 그런데 참선수행을 하면서도 올바른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수행자의 병폐가 많이 있다.

경전에서는 중생심의 번뇌 망념으로 생긴 병이라고 하여 심병(心病)이라고 하지만, 선에서는 이러한 병폐를 선병(禪病)이라고 한다. 심병과 선병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양하지만, 그 대략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불법의 가르침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문제, 잘못된 생각과 착각, 눈앞에 보이는 사물이나 경계에 대하여 상대적인 차별심이나 분별심을 일으키고 집착하며, 편견과 고정관념 등이다.
참선수행에서 이러한 선병은 불심의 지혜의 작용을 장애하며, 도리어 번뇌 망념의 중생심으로 수많은 고통을 초래하는 업장을 짓고, 삼계에 생사윤회하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본 논문에서는 무문관 禪箴에서 무문혜개(無門慧開) 선사가 지적한 문제점을 중심으로 선병과 그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정법의 안목을 점검하며, 참선수행에 도움이 되는 교훈과 지침을 배우는 인연을 나누고자 한다.

 

Ⅱ. 선병이란 무엇인가?

 

불법수행에서 정법의 안목을 갖추지 못하고 선수행을 하는 사람은 선병(禪病)에 떨어진 환자로 취급한다. 선병은 마음으로 사량분별하는 중생심에서 생긴 병이기 때문에 심병(心病)이라고도 한다.

 

대반야경 331권 원행품에는 ‘보살이 여섯가지 종류의 바라밀다를 실천할 때에 여러 중생들(有情)을 살펴보니 몸과 마음(身心)에 병이 있다. 몸의 병은 風病, 熱病, 담병(痰病: 천식), 바람 등 여러 가지 잡다한 병이 있다. 心病으로 탐하는 병, 성내는 병, 어리석은 병, 게으른 병 등 모든 번뇌의 병이 있다’ 고 설하고 있다.1)

 

신심명 에 ‘위배하고 순응함이 서로 다투니 心病이 된다’라고 읊고있다. 심병은 周易 說掛에 나오는 말인데, 조주록 에도 심병은 고치기 어려운 불치병이라고 주의하고 있다.2)

 

심병은 고치기 어려운 병이라는 의미로 임제록 (13-22) 등 많은 선어록에서는 고황(膏肓)의 병이라고 한다. 고(膏)는 심장의 하부, 황(肓)은 격막의 상부를 말하며, 즉 심장과 횡격막 이 사이에 생긴 병은 의사도 손을 쓸 수 없고, 절대로 고칠 수 없다는 병이라고 비유하고 있다.3)

 

1) 대반야경 331권, 「원행품」 ( 大正藏 6冊), p. 695下. 대반열반경 제11권 現病品에도 다음과 같이 설한다. 「世尊 一切衆生, 有四毒箭, 則爲病因, 何等爲四, 貪欲, 瞋恚 愚癡, 憍慢, 若有病因則 有病生.」

( 大正藏 12冊), p. 428中에도

2) 신심명 에 「違順相爭 是爲心病」 ( 大正藏 48冊, 376쪽 中). 조주록 卷中에 「若與空王爲弟子, 莫敎心病 最難醫」 라고 설하며, 전등록 제28권 ( 大正藏 51冊), p.446쪽中. 조주의 법문에도 전한다.

3) 임제록 시중에 선지식이 방편으로 제시한 시설 경계에 집착한 것을 고황병(膏肓病)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황병에 대하여 선요 등 선어록에서는 많이 언급하고 있다.

 

 

선에서 말하는 심병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지 못하고 불심으로 반야지혜를 활용하지 못한 중생심의 차별심과 번뇌 망념으로 생긴 삿된 견해의 병이다. 반야경 에서 설하고 있는 것처럼, 탐진치 삼독심과 교만심, 즉 중생심으로 선과 악, 미워하고 좋아하는 취사선택하는 중생심의 망념으로 고통의 인과를 초래하며 업장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조당집 제14권에 마조도일선사의 제자인 명계(茗溪)는 대중들에게 다음과 같은 설법하고 있다.

 

 

"(명계)선사는 어느 날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나에게 큰 병이 있으니 세상의 의사로서는 고칠 수가 없다.’
어떤 스님이 명계화상의 이 말을 들어 조산(曺山)선사에게 질문 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에게 큰 병이 있으니 세상의 의사로서는 고칠 수가 없다”라고 하였는데, 그 병은 어떤 병을 말합니까?’
조산선사가 말했다.

‘몸과 마음의 모든 병이 함께 뭉쳐서 생긴 병이라 어떤 병이라고 말할 수 없는 병이다.(攢蔙不得底病)’

(즉 신체의 한 부위에 생긴 귀병이나 눈병이나 심장병이이 아니다)
그 스님은 다시 질문했다. ‘일체 중생에게도 이 병이 있습니까?’
조산선사는 말했다. ‘사람마다 모두 이 병이 있다.’
그 스님은 물었다. ‘일체 중생은 어지 그 병을 앓지 않습니까?’
조산선사는 말했다. ‘중생이 만약 그 병에 들면 중생이 아니다.’
그 스님은 또 물었다. ‘화상께서도 이 병이 있습니까?’
조산선사는 말했다. ‘병이 일어나는 곳을 곧장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正覓起處不可得)’
그 스님은 물었다. ‘부처님들도 이 병이 있습니까?’
조산선사는 말했다. ‘있다.’
그 스님은 물었다. ‘있다면 어째서 병들지 않습니까?’
조산선사는 대답했다. ‘그는 또렷또렷하기 때문이다.(爲伊惺惺)’ "

 

 

마치 유마경 에 유마거사가 중생이 병들어 있기 때문에 나도 병들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명계화상이 ‘나에게 큰 병이 있으니 세상의 의사로서는 고칠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4)

 

4) 莊子讓王편에도 유마의 병과 같은 심병(幽憂之病)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堯가 천하를 許由에게 양도하려 하자 허유는 승낙하지 않았다. 또 자주지보(子州支父)에게 물려 주려고 하자, 자주지보는 말했다. ‘나를 천자로 삼는 것도 좋지만, 나는 지금 심한 우울증(幽憂之病)이 있어 이 병을 치료하고 있는 중이요.천하를 다스릴 만큼 한가하지 않소. 천하는 지극히 소중한 것이요. 그러나 그것 때문에 자기 목숨을 해칠 수는 없다. 하물며 다른 사물 때문에야 더욱 그럴 수는 없지 않는가! 천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낄 수가 있다.」

 

 

명계화상이 말한 큰병에 대해서 조산선사는 ‘몸과 마음의 모든 병이 함께 뭉쳐서 생긴 병이라 어떤 병이라고 말할 수 없는 병이다.(攢蔙不得底病)’ 라고 설명하고 있다.

찬선(攢蔙)이란 말은 몸과 마음의 병이 함께 뭉친 모든 병이기 때문에 신체의 한 부위에 생긴 귀병이나 눈병이나 심장병이다 라고 규정해서 말 할 수가 없다. 또 그 병의 원인과 환부(患部)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 명계화상이 말하는 큰 병은 심병(心病) 혹은 선병(禪病)을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들도 이 병이 있다고 하면서 이 병에 들지 않는 것은 자각적인 불심의 지혜작용이 또렷또렷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대승기신론 에서 논리적으로 설하고 있는 것처럼, 부처와 중생은 모두 똑같은 진여 본성의 一心을 구족하고 있지만 중생은 불법에 대한 無知와 無明과 미혹으로 반야경 에서 설하는 탐진치 삼독심과 교만심으로 心病에 걸린 환자가 되지만, 부처는 불법의 정신과 사상을 체득한 반야의 지혜로 지금 여기 자신의 시절인연의 일에서 불심의 지혜로 살고 있기 때문에 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즉 부처는 번뇌 망념을 자각하여 삼업이 청정한 지혜로운 삶을 살지만, 중생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도 당시에 지바카(Jivaka)라는 세상의 명의(名醫)는 중생들 육체의 병을 고치는 의사라고 하고, 부처님은 중생의 심병을 고치는 훌륭한 의사(良醫)와 같다고 하였다. 육체의 병을 고치는 기술은 상대하는 육체나 사물에 대한 병을 치료하는 지혜이기에 업통(業通)이요, 마음의 병을 고치는 지혜는 신통(神通)이기에 불법의 대의와 반야지혜의 안목을 구족하지 않고서는 불가능 하다. 그래서 세상의 명의라고 할지라도 이 몸과 마음의 병이 함께 뭉쳐서 생긴 이 병을 고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병이란 불법의 대의와 근본정신을 알지 못하고, 진여 평등의 이치와 반야지혜를 체득하지 못하여 중생심의 생사망념과 사견으로 생긴 심병이다. 그래서 참선 수행의 올바른 방향과 방법을 할 수가 없고, 正法인지 外道法(邪法)인지도 판단하지도 못한 중생심이기 때문에 바른 수행을 실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범부에서 성인이 되려고 하고, 미혹을 벗어나 깨달음을 추구하려고 하며, 마음 밖에서 불법이나 도, 깨달음이라는 목적을 찾아 헤매는 업장을 짓는 중생이기 때문에 영원히 생사망념에 윤회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참선 수행의 선병을 지적한 말로 잘 알려진 내용은 돈황본 육조단경 19단, 33단에는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하여 생각을 하지 않고 망념을 없애려고 하지 말라.’ 라고 주의한 일절이다. 참선 수행자가 중생심의 번뇌 망념을 끊어 없애려고 수행하고 있는데, 번뇌 망념을 없애려고 하는 그 마음이 그대로 중생심의 번뇌 망념이 되기 때문에 영원히 번뇌 망념을 벗어 날 수가 없는 것이다.5)

5) 정성본 역주, 돈황본 육조단경 (서울: 한국선문화연구원, 2003년 5월 간행), p. 101, p. 178 참조.

 

이러한 선병을 선관책진 아호대의선사의 법문에는 ‘육체의 형체를 잊고, 번뇌의 마음을 죽이려고 하지 말라. 이것이 의사도 고칠 수 없는 가장 심한 병이다(莫只忘形與死心, 此箇難醫病最深)’ 라고 읊고 있다.6)

6) 藤吉慈海, 禪關策進 (日本: 築摩書房, 1970), p. 34.

 

이와 같이 선병은 불법을 배우고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여 보살도의 위대한 삶을 실현하기 위해 정신하는 참선수행자들이 불법의 대의와 사상을 잘 못 이해하고 실천하는 착오로 생긴 선병이기에 무의미한 수행과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일이다.

"좌선의"에 마구니의 경계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미리 마구니 경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언급하는 것처럼, 선병에 떨어지는 과오를 범하지 않는 수행자가 되기 위해서는 불법의 대의와 사상, 정신, 지혜 인격, 보살도의 실천 등을 정확하고도 완전하게 체득하여 자기 자신의 지혜와 인격으로 실행해야 한다.

 

 

Ⅲ. 참선수행과 선병

 

무문관 에는 무문혜개(無門慧開)선사가 선잠(禪箴)이라는 제목으로 참선 수행의 선병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여 수행자들에게 명심하도록 하고 있다.

 

禪箴
循規守矩. 無繩自縛. 縱橫無礙. 外道魔軍. 存心澄寂. 黙照邪禪. 恣意忘緣. 墮落深坑.
惺惺不昧. 帶鎖擔枷. 思善思惡. 地獄天堂. 佛見法見. 二銕圍山. 念起卽覺. 弄精魂漢.
兀然習定. 鬼家活計. 進則迷理. 退則乖宗. 不進不退. 有氣死人.

且道. 如何履踐. 努力今生須了卻. 莫敎永劫受餘殃.

 

좌선하는 방법과 규칙에만 의존하는 것은 끈도 없이 자기 자신을 속박시키는 것이요.

자유 분방하게 규칙을 무시하고 걸림이 없는 것은 외도의 마구니이다.
마음을 통일하고 고요하게 하려는 수행은 적정주의 침묵에 떨어진 삿된 수행이요,
자기 마음대로 시절의 인연을 무시하는 것은 어두운 암흑의 함정에 깊이 빠진 것이다.

언제나 깨어있는 마음으로 미혹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목에 형틀을 걸어두는 것이다.
선과 악을 분별하는 마음은 천당과 지옥의 상대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며, 부처와 불법에 집착하는 견해는 두 겹으로 둘러싼 철위산에 가쳐 있는 것이다.
번뇌 망념이 일어나면 곧바로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는 좌선은 영혼(精魂)을 가지고 노는 놈이다.

앉아서만 좌선을 하는 사람은 흑산에 사는 귀신과 같은 지혜없는 생활이다.
선법에 나아가려고 하는 것은 불법의 도리를 상실하는 것이요 후퇴하면 종지를 위배하게 된다. 그러나 나아가지도 않고 후퇴하지도 않으면 숨만 쉬고 있는 죽은 사람이다.

자 ! 그러면 어떻게 참선 수행을 해야 할 것인가? 말해보게나. 각자 노력하여 금생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영원히 생사 망념의 업장에 대한 과보(재앙)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 大正藏 제48권, 299쪽 上)

 

 

무문혜개의 「禪箴」은 그의 상당 시중의 법문으로 참선 수행의 禪病을 치료하기 위한 노파심으로 무문관 에 첨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箴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침(針) 이라는 의미인데, 선병을 치료하기 위한 꼭 기억하고 경책해야 할 말을 침으로 비유한 것이다. 무문은 이러한 선병의 문제점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면 올바른 참선 수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문제를 잘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무문이 여기서 선병의 문제로 제시한 내용을 10가지로 정리해서 살펴보자.

 

1) 계율이나 청규, 좌선하는 방법과 규칙을 의식하는 것은 끈도 없이 자기 자신을 속박시키는 것이다.

(循規守矩. 無繩自縛)

 

선원의 수행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계율과 선원 청규를 잘 숙지해야 하며, 또한 좌선의 에서 제시한 좌선의 방법과 수행체계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러나 계율과 청규, 좌선의 방법 등은 완전히 수지한 뒤에는 몸에 베이고 익혀서 그러한 규칙과 법칙이 있는지 없는지 의식하는 일없이 생활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계율과 청규, 좌선의 방법과 법칙을 의식하고 그 규칙에만 사로잡힌 선병의 수행을 지적하고 있다. 조사선, 간화선, 묵조선 등의 수행방법에 사로잡혀 불법의 대의와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는 불교수행의 본분을 상실하고 있는 선병이다. 이러한 선병에 걸린 수행자는 스스로를 좌선 수행의 규칙에 묶어두어 자유를 잃어버리게 하고 있기 때문에 무승자박(無繩自縛)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참선수행은 좌선법이나 규칙을 완전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오히려 법칙과 규칙에 자신이 속박되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無繩自縛은 自繩自縛과 같은 말로 법규나 법칙, 계율 등이 자신의 수행 생활로 자연스럽고 무심의 경지에서 실행되지 못하고 그 법규나 규칙을 의식하며, 자기 자신이 번뇌 망념과 착각, 환상의 의식으로 자신을 얽어 메는 것을 말한다.
-좌상에 집착 (남종선)

 

 

2) 규칙을 무시하고 걸림이 없는 수행은 외도 마구니 이다.
(縱橫無. 外道魔軍)

 

불법을 깨닫고 중생교화의 보살도를 실행하도록 제시한 불교의 가르침은 여법한 수행을 체득할 때 가능한 것이다. 제불 조사도 이러한 불법을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와 조사로서 불법의 지혜와 인격을 구족했고
중생들을 구제하는 여법한 방향제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自燈明 法燈明은 여법한 수행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열반경 에도 사람에 의거하지 말고 법에 의거하라, 지식에 의거하지 말고 지혜에 의거하라고 설하고 있다.

참선수행자가 여법한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불법의 가르침(法)에 의거해야 한다. 참선수행의 교육에 入格出格이란 말이 있다. 入格이란 불법의 수행에는 반드시 불법의 가르침에 따르고 자기와 시키는 공부를 말한다. 불법의 정신과 사상과 반야의 지혜와 자비심의 보살도를 실행하는 인격을 구족하도록 다양한 가르침을 직접 몸과 마음으로 배우고 익혀서 자신의 몸에 완전히 베이도록 하는 수행이다. 이러한 참선수행을 불법의 純熟, 혹은 習性化 라고 한다. 참선수행을 통해서 불법의 정신과 사상, 반야의 지혜를 완전히 익혀져서 조금도 부자연 스럽지 않고, 무심의 경지에서 자신의 보살도 삶으로 자연스럽게 실행 할 수 있는 경지를 出格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부의 수행자가 불법을 잘 못 이해하고 자유분방한 생활과 무애자재한 경지의 선생활을 강조하면서 아예 불법을 공부하지도 않고, 반야 지혜와 인격은 물론, 선원의 생활 법칙과 규칙까지 무시하고 참선수행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잘못된 선수행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참선수행의 규칙이나 불법이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불보살이 되는 자기 향상의 길과 방향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불법의 사상이나 가르침, 선수행의 방향과 방법의 법칙과 기준을 무시하면 불법의 지혜와 인격을 이루는 수행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外道 마구니의 무리라고 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불법의 가르침을 아예 무시하고 임의대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는 단체나 사상가들을 외도라고 하난데, 선에서는 주로 영혼(靈魂)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선니외도(자이나교도)와 인연법을 무시하는 노장자의 자연외도를 비판하고 있다.7)

특히 불교인들이 불법의 정신과 불성사상, 반야 지혜를 체득하지 못한 안목없는 사람들이 불성을 영혼으로, 중생심을 불심으로 착각하는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전등록 제28권 남방의 종지를 주장하는 선승이 ‘몸은 생멸이 있지만, 심성은 생멸이 없다고 주장하자, 혜충국사가 이러한 주장은 선니외도의 주장이라고 비판하고 있다.8)

 

7) 열반경 제39권 ( 大正藏 12冊), p. 590下 등에서 영혼의 존재를 주장한 것을 비판한 先尼外道와 중국의 노장사상을 인연법이 없는 自然外道라고 비판하고 있다. 임제록에서도 불법의 사상과 반야지혜를 구족하지 못하는 사람을 외도의 견해라고 비판한다.
8) 전등록 제28권 남양혜충국사의 어록 ( 大正藏 51冊), p. 437下. 이 문제점에 대해서는 정성본 「六祖壇經의 成立과 諸問題」 (傳統佛敎硏究院 제9회 국제학술대회,1989년 10월), 김지견 편, 六祖壇經의 世界 (서울: 민족사. 1989년 12월), p.247-297에 수록된 논문을 참조 바람.

 

 

3) 마음을 통일하고 고요하게 하려는 수행은 적정주의 침묵에 떨어진 삿된 수행이다.

(存心澄寂. 照邪禪)

 

대개 좌선 수행은 마음을 안정시키도록 하고 본래 청정한 고요적정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참선수행의 본질과 선사상을 모르는 주장이다. 특히 마음을 고요히 하는 좌선 수행이 그대
로 본심이 묵묵한 경지이고, 불심의 지혜가 묵묵히 비추는 작용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산란한 마음을 붙잡아 마음을 맑히고 고요하게 하려는 좌선수행의 선병을 지적하고 있다. 좌선 수행의 선병으로 수마에 떨어지는 昏沈과 잡념의 번뇌 망심에 마음이 산란스럽게 되는 도거(悼擧)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좌선 수행에서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하면 마음은 더욱 산란스럽게 된다.

 

하택신회가 북종선에서 주장하는 ‘산란된 마음을 수습하여 선정에 들도록 하고, 마음의 움직임을 멈추어 청정함을 간하게 하고, 마음을 일으켜 밖으로 지혜를 비추게 하고, 마음을 수습하여 안으로 깨닫도록 하게한다(凝心入定, 住心看淨, 起心外照, 攝心內證)’ 는 좌선 수행법을 어리석은 자의 수행법이라고 비난하고 있다.9)

9) 돈황본 신회어록 에 수록된 「壇語」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 「하택화상잡징의」 등에 언급하고 있고, 임제록 의 시중에도 인용하고 있다. 하택신회의 북종선 비판에 대해서는 정성본 중국선종의 성립사 연구 (서울. 민족사. 1991년 3월), p. 526 참조 .

 

무문혜개도 마음을 통일하고 고요하게 하려는 수행은 적정주의 침묵에 떨어진 삿된 수행(存心澄寂. 黙照邪禪)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일절은 또 간화선의 입장에서 묵조사선(黙照邪禪)을 비판하고 있다.

원래 黙照라는 말은 僧肇의 肇論에서 ‘성인의 깊은 마음은 조용(黙)하면서 지혜를 비춘(照)다’라고 하고, 灌頂의 대반열반경소 제11권에 ‘佛智란 黙照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원래 명상의 의미이며 번뇌 망념이 일어나지 않은 근원적인 본래심에서 반야 지혜가 작용하는 경지를 말한다. 즉 黙은 고요하고 묵묵하게 하는 좌선으로 寂黙을 말하며, 照는 照用으로 불심의 영묘한 지혜작용을 말한다.10)

10) 승조의 肇論, 「答劉遺民書」 ( 大正藏 45冊), p. 156上. 灌頂, 대반열반경소 제11권 ( 大正藏 3冊), p. 103下

 

좌선수행은 黙照가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달마의 면벽좌선과 많은 수행자가 묵조선을 기본으로 하고 있고, 天童宏智는 黙照銘을지어 묵조선을 선양하고 있다.

 

그런데 무문이 지적하는 선병은 마음을 차분히 하고, 고요하게 하여 맑은 물과 같이 하려고 하는 좌선수행은 적정을 최고로 삼는 묵조의 삿된 선이며, 조작된 마음으로 의도성과 작위성에 떨어진 잘못된 선병이된다.

앉아서 좌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의 坐相에 떨어지고, 고요하게 하려는 마음이 시끄러움과 고요함을 나누어 구별하는 차별심에 떨어진 선병이 된다.

대혜종고(大慧宗杲)도 이러한 묵조사선을 비판한 것인데,묵조선과 묵조사선의 차이점을 잘 알아야 한다.11)

 

11) 정성본 간화선의 이론과 실제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5년, 6월), p. 175 이하 「대혜종고와 묵조사선비판」 참조.

 

 

4) 자기 마음대로 시절의 인연을 무시하는 것은 어두운 암흑의 함정에 깊이 빠진 것이다.

(恣意忘緣. 墮落深坑)

 

불법의 정신과 사상을 보살행으로 전개하는 시절인연의 할 일을 무시하고 임의대로 참선수행을 하는 것은 중생심으로 무지와 무명의 어두운 곳에서 지혜없이 살고 있는 어리석은 삶이다. 참선수행은 구체적인 일상생활에서 반야의 지혜로 불보살의 행원을 실천하는 깨달음의 생활이 되고, 시절인연의 중생구제를 함께하는 보살행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불법의 근본정신도 무시하고 보살도의 시절인연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현실경계에 매몰된 어리석은 중생의 삶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달마의 이입사행론 에도 인연에 따라서 깨달음을 실행하는 수연행(隨緣行)을 강조하고 있고, 임제도 항상 지금 여기 자싱의 일에서 인연에 따라 업장을 소멸하라고 하며, 지금 여기서 곧바로 해탈을 하라(隨處解脫), 지금 여기서 삼업이 청정한 깨달음의 생활이 되라(隨處淸淨), 지금 여기서 자신이 깨달음의 주인이 되라(隨處作主)고 강조하고 있다.12)

 

업장을 소멸하는 일은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깨달음의 생활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당집 제14권에 대주해혜선사도 ‘신구의 삼업이 청정하면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한 것이요, 삼업이 청정하지 못하면 부처가 없어져 버리는 것’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13)

 

올바른 불법의 사상과 지혜가 구족되지 않는 수행과 선의 생활은 한평생 무의미하게 세월을 보내는 어리석은 수행자가 된다.

 

12) 전등록 제30권, 「보리달마 이입사행론」 ( 大正藏 51冊), p. 458中. 정성본 역주, 임제어록 (서울: 한국선문화연구원, 2003년 12월), p. 91, p.97 등 참조.

13) 조당집 제14권 대주화상전 (4-44)

 

 

5) 언제나 깨어있는 마음으로 미혹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목에 형틀을 걸어두는 것이다.

(惺惺不昧. 帶鎖擔枷)

 

참선수행자가 언제나 깨어있는 불심으로 마음으로 미혹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목에 형틀을 걸어두는 것이다(惺惺不昧. 帶鎖擔枷).
성성(惺惺)은 본래의 불심으로 깨달음의 지혜가 분명하게 작용하고 있는 상황을 말한다. 앞의 조당집 에도 부처는 깨어있기 때문에 심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깨어있는 불심의 지혜작용은 일체의 선병과 심병을 초월한 경지이다.

무문관 제12칙에 당대의 서암(瑞巖)화상이 자신을 자각시키는 방편으로 「주인공아! 예! 깨어 있어라(惺惺着)」 라고 주의주고 있는 것처럼, 중생심을 초월한 불심의 지혜로 지금 여기 자신의 시절인연의 할 일, 보살행의 일을 무심의 경지에서 몰입하도록 하는 자각적인 수행이다.14)

14) 무문관 제12칙 ( 大正藏 48冊), p. 294中. 자기의 본래 주인공(불심)을 부르는 자각적인 참선수행은 조주록 卷中, 조당집 제6권 동산화상전 등에서도 많이 주장하고 있다.

 

조당집 제10권 경청(鏡淸)화상전에 다음과 같은 선문답이 있다.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깨어 있는(惺惺)데 어째서 도리어 뜨거운 고통을 받습니까?’
경청선사가 말했다. ‘저쪽(열반의 경지를 체득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저쪽(彼岸) 사람입니까?’

경청선사는 말했다. ‘이쪽(此岸)에서 건너간 (열반의 경지를 체득한) 사람이다.’
스님이 질문했다. ‘이쪽을 어떻게 해야 건너갑니까?’
경청선사가 말했다. ‘깨어있으면서(惺惺)도 깨어있지(惺惺) 않은 것이다.’
스님이 물었다. ‘깨어있으면서(惺惺)도 깨어있지(惺惺) 않을 때가 어떠합니까?’
경청선사가 말했다. ‘바보(魯班)가 손을 잃어버릴 때이다.’ "15)

15) 조당집 제10권 경청화상전 (3-52)

 

 

이 대화에서 경청선사가 ‘깨어있으면서(惺惺)도 깨어있지(惺惺) 않은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깨어있다는 의식도 없이 지금 여기 자신의 일에 몰입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바보가 손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도 자기 손이 무슨 일을 한다는 의식도 없이 무심의 경지에서 자신의 일을 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 것이다.

참선 수행자가 항상 깨어 있어야지 하는 분별의식을 가지고 참선수행을 하는 것은 중생심의 의식작용이기에 스스로 불심의 지혜작용을 장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에 형틀을 짊어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깨어있는 참선수행이란 자아의식도 초월하고, 身命을 돌보거나 의식하지 않아야 지금 여기 자신의 일에 몰입할 수가 있는 것이다. 깨어 있는 불심의 지혜로운 삶이란 번뇌 망념의 중생임을 초월한 무심의 경지, 불심의 경지에서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일과 하나가 된 主客一如의 선의 생활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6) 선과 악을 분별하는 마음은 천당과 지옥의 상대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思善思惡. 地獄天堂)

 

六祖壇經에는 黃梅山 五祖弘忍선사의 문하에서 혜능이 홍인문하의 대표적인 제자이며 敎授師인 神秀와의 깨달음의 노래(心偈)로 홍인의 佛法과 그 印可證明인 袈裟를 전해 받은뒤 홍인의 친절한 전송을 뒤로하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大庾嶺에서 혜능의 뒤를 추적해온 慧明과 만나서 전개되는 드라마틱한 장면과 혜능 최초의 전법의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원래 이 이야기의 신회어록 의 혜능전에 처음 등장되고 있는데, 단경 의 작자는 이것을 소재로 하여 혜능전을 문학적으로 전개 하고 있는 것이다.16)

 

돈황본 단경 에는 수백명이 혜능을 해치고 가사를 빼앗으려고 뒤쫒다 모두 돌아가고, 옛날 三品將軍을 지내고 성품이 난폭한 陳慧順(慧明이 아님)이라는 사람만이 대유령에 까지 따라와서 혜능에게 덤벼들었다.

혜능은 곧 法衣를 돌려주었으나 반가이 받으려 하지 않고, ‘내가 이렇게 일부러 멀리 온것은 법을 구하기 위한 것,가사는 필요치 않다’ 고 말했다. 혜능은 대유령에서 곧 법을 혜순에게 전했다. 혜순은 혜능의 설법을 듣자 마자 곧 마음이 열렸다. 혜능은 慧順을 북쪽으로 가서 교화 하도록 하였다라고 간략히 전하고 있다.17)

 

16) 楊曾文 編校 神會和尙禪語錄 (北京,中華書局. 1996년,7월), p. 109 이하 참조.
17) 楊曾文 校寫 敦煌新本 六祖壇經 (중국, 上海古籍出版社. 1993년, 10월), p. 13 이하 참조.

 

사실 여기는 혜능이 황매산 홍인의 문하에서 육조의 지위와 홍인의 법을 받고 다시 영남으로 돌아오는 어려운 구법이야기의 한 대목이기에 대유령에서 혜능이 혜순에게 어떠한 법을 설하였기에 곧 바로 깨닫게 되었는지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사실 우리들이 일찌기 육조단경 을 통해서 알고있는 이 대목의 이야기는 혜능이 혜명에게 ‘善도 생각지 말고 惡도 생각지 말라’고 내린 유명한 법문인데 돈황본에는 이 말이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이야기가 최초로 등장되고 있는 자료는 현재로선 돈황본 神會語錄인데,18) 황벽의 傳心法要에서 단경 의 이야기를 한층 더 구체적이고 또한 선사상적으로도 발전시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8) 楊曾文神會和尙禪語錄 (壇語) , p. 9 참조. 「知識 一切善惡 總莫思量」

 

 

"만약 믿지 못했다면 어찌 道明상좌가 大庾嶺 고개까지 六祖를 찾아 좆아 왔겠는가?

그 때 六祖께서 질문했다. ‘그대는 무엇을 구하러 왔는가? 가사를 구하려고 하는가? 법을 구하려고 하는가?’ 도명상좌는 ‘가사를 구함이 아니고 오직 법을 구하기 위함’ 이라고 대답했다.

육조는 설법했다.

‘그대는 잠시 생각을 거두어 들여서 善과 惡을 모두 한꺼번에 사량하지 말라(善惡都莫思量)!’

도명상좌가 이 말씀을 품승 하였다. 육조는 말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와같을 때 父母未生의 도명상좌 본래면목을 나에게 가져오라!’ 도명은 言下에 홀연히 깨닫게(黙契) 되었다.

그리고 곧 예배하면서 말했다.

‘마치 물을 마시고, 물의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알게 되는 것 같이 제가 五祖대사의 회상에서 30년 공부를 잘 못하다가 오늘 비로소 지난날의 잘못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육조가 ‘그렇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 비로소 조사가 서쪽에서 오셔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지시(直指人心)하고, 성품을 깨달아 성불(見性成佛)케 하심이 言說에 있지 않음을 알 것이다’라고 말했다.

( 大正藏 48권 383쪽 下)"

 

 

무문관 제23칙에도 전하고 있는 유명한 일단인데, 육조 혜능이 ‘一切善惡 都莫思量’하라고 설법하자 도명이 言下에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선과 악의 상대적인 차별경계를 초월한 본래면목을 체득한 사실을 전한다.

 

祖堂集제3권에 南陽慧忠章에도 다음과 같은 일단이 있다.

 

"王詠의 門徒인 志心이 질문했다. ‘어떻게 해야 성불 할 수가 있습니까?’
선사가 대답 했다. ‘부처와 衆生을 동시(一時)에 놓아 버리(放却)면 當處에 해탈 한다.’

또 질문했다. ‘어떻게 해야 (부처와) 상응(相應)할 수가 있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善惡을 모두 함께 사량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佛性을 깨닫게 된다.’
(1-119)"

 

전등록 제8권에도 南泉普願이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말라. 善惡을 모두 생각하지 않을 때 나의 本來面目을 자각하라(不思善,不思惡,思總不生時,還我本來面目來)」라고 설하고 있다.19)

19) 傳燈錄 8권, 「南泉普願章」 ( 大正藏 51冊), p. 259上

 

 

황벽은 宛陵錄에도 어떻게 해야 三界를 벗어날 수가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善惡을 모두 한꺼번에 思量하지 않는다면 當處에서 곧바로 삼계를 벗어난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처럼, 선악을 모두 한꺼번에 사량하지 않는다면 見性成佛도 이루고, 중생들이 고통받는 三界도 초월할 수가 있으며, 해탈할 수가 있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는 남종의 조사 혜능의 설법으로 잘 알려진 「善도 생각 말고 惡도 생각 말라. 善惡을 모두 한꺼번에 생각하지 말라.」 라는 일단에 주목해보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이 말은 신회의 壇語에서 처음 주장한 선불교의 실천 사상인데, 신회는 북종의 觀心看淨(자기의 마음을 관하고,마음의 청정함을 살핌)의 좌선을 비판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남양혜충의 설법에도 보이는 것으로 볼 때 당시 남종선의 실천사상으로 널리 주장된 말임을 알 수있다.

또한 마조어록 에도 ‘어떤 견해를 가져야 도에 통달 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자성은 본래 구족한 것이다. 단지 善惡의 차별에 구애되지 않는 사람을 수도인 이라고 한다. 善을 취하고 惡을 버리며, 空을 觀하여 선정에 들려고 하는 것은 조작된 마음이다. 또 만약 밖을 향해서 구하려고 한다면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라고 설한다.20)
20) 馬祖語錄 ( 續藏經 119冊), p. 406上

 

선을 취하려고 하는 마음, 악을 멀리 하려고 하는 이 마음이 다름아닌 조작된 망념이니 이러한 조작된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하고 있다. 이와 똑 같은 마조의 설법으로 ‘평상심이 道이다’ 라고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도는 수행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번뇌 망념으로 불심을 오염(汚染)되지 않도록 하라.

무엇이 더럽힘(汚染)이 되는가?

중생의 生死心으로 번뇌를 일으키는 마음, 작위성으로 조작하여 취향하려고 하는 마음이 모두 汚染이 된다. 만약 곧바로 도를 알고자 한다면 平常心이 道이다.

평상심이란 조작이 없고, 是非가 없고, 取捨도 없고, 斷見 常見도 없으며, 凡聖 등의 차별심이 없는 근원적인 본래심인 것이다.21)

21) 傳燈錄 28冊 마조의 설법 ( 大正藏 51冊), p. 440上

 

 

마조는 평상심에 대하여 作爲性(造作)이 없는 마음, 善惡, 是非, 取捨, 斷常, 凡聖 등상대적인 분병이나 차별심이 없는 근원적인 본래의 그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조는 이러한 조작과 분별심을 汚染이라고 한다. 중생은 불법의 대의와 반야지혜가 없기 때문에 미혹하여 善惡, 凡聖, 取捨등의 상대적인 분별심과 차별심을 일으켜 번뇌 망념으로 청정한 불심을 미혹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불법의 사상과 반야지혜의 안목이 있어야 한다.

 

 

7) 부처와 불법에 집착하는 견해는 두 겹으로 둘러싼 철위산에 갇혀 있는 것이다.

(佛見法見. 二圍山)

 

부처에 대한 고정관념과 불법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집착하는 견해는 두 겹으로 둘러싼 철위산에 갇혀 있는 것이다(佛見法見 二銕圍山).

이 말은 선문염송 제2권 (60칙)에 ‘ 諸佛要集經에서 말했다. “천왕여래는 문수사리가 홀연히 불견과 법견을 일으킴으로 인하여 두 철위산 사이에 빠뜨렸다.” 라는 일단에 의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제불요집경 이이 말은 전등록 제27권에도 인용하여 설법하고 있다.22)

22) 竺法護 번역 제불요집경 卷下 ( 大正藏 17권), p. 763上. 전등록 제27권 ( 大正藏 51冊), p. 436上

 

벽암록 제26칙 평창에는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남전화상이 말하길, ‘문수와 보현보살이 어젯밤 三更에 佛見, 法見을 일으켰기에 각각 20 방망이씩을 쳐서 두 철위산으로 귀양 보내 버렸다.’라고 하자, 그 때 조주선사가 대중 가운데서 나와 말했다.

‘스님을 누구 더러 한 방 먹이라고 할까요?’ 남전이 ‘나에게 무슨 허물이 있느냐?’ 라고 하자, 조주는 절을 올렸다.23)"

 

23) 이 일단의 출처는 조당집 제16권 남전장과 전등록 제8권 남전장인데, 불견과 법견, 철위산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아마도 벽암록 은 제불요집경 의 문수보살 이야기에 의거한 것이라고 본다. 원오극근은 원오불과선사염고 제42칙 ( 大正藏 47冊),p. 792中에도 인용하고 있다.

 

 

선문답에서 부처란 무엇인가? 불법이란 무엇인가? 불법의 정확한 대의란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를 중심으로 참선수행을 하고 있는데, 부처나 불법에 대한 올바른 안목을 갖추지 못하면 정법의 바른 사상과 인격은 물론 반야지혜를 활용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좋은 인사말로 ‘성불하십시오’ 라고 한다. 부처를 이루도록 하라고 하지만 부처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정법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면 올바른 참선수행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소위 부처라고 하면 32上을 구족한 부처의 모습이나, 법당에 모신 부처에 대한 이미지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거나 불법이 무엇이라는 의식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중생심의 사량분별심에 사로잡혀 반야의 지혜가 없는 무명의 철위산(중생심)에 갖혀 버리고 만다.

그래서 조당집 제6권 동산화상전에 어떤 스님이 ‘옛 사람이 말씀하시길 “부처에 집착하는 선병은 가장 고치기 어렵다(佛病最難治)” 라고 했는데, 부처가 병입니까? 부처에 병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동산선사는 ‘부처가 바로 병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다.24)

24) 조당집 제6권 동산화상전(2-68). 조당집 제11권 제운화상전(3-101) 등.

 

또 단하천연선사와 조주선사가 ‘부처라는 한 글자 나는 듣고 싶지도 않다(佛至一字 吾不喜聞)’ 라고 극단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도 부처라는 말에 걸려서 자신을 중생심으로 전락시키는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25)

25) 조주록 상권에 「佛至一字 吾不喜聞.」 전등록 제14권 단하천연장에도 같은 주장이 보인다.

 

그래서 임제는 ‘만약 조작된 마음으로 부처를 구하려고 하면, 부처는 생사망념의 중생심에 떨어지게 하는 조짐이 된다(若欲作業求佛, 佛是生死大兆)’라고 하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라’ 고 주장하고 있다. 임제가 죽이라고 한 말은 부처나 조사에 대한 명칭과 고정관념에 떨어진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떨쳐 버리고 텅 비워버리라는 말이다.26)

26) 정성본 역주, 임제어록 (서울: 한국선문화연구원, 2003년 12월), p. 91, p. 187 등 참조.

 

또한 불법의 가르침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편견도 선병이다.

금강경 에 다음과 같은 설법을 보자.

 

 

"수보리가 말했다. ‘제가 부처님이 설한 불법의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아뇩다라삼막삼보리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결정적인 법(無有定法)이 없으며, 또한 여래가 설하였다고 할 만한 고정된 법도 없습니다.’
( 大正藏 제8권 749쪽 中)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길,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고 말하지만, 수보리야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라는 고정된 실체의 법이 없기에(無有實法) 부처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체득한 것이다.’
( 大正藏 제8권 751쪽 中)

 

 

‘어떤 실체의 법도 없다(無有實法)’ ‘어떤 고정된 법도 없다(無有定法)’ 라고 누누이 설하고 있는 것처럼, 불법은 일체의 모든 불법은 방편법문이다.
그래서 반야경 제8권 幻聽品에 ‘만약 어떤 법이 있어 열반의 경지 보다도 더 수승하다고 할지라도 나는 역시 환화 같고 꿈과 같다고 설하리라(若當有法 勝於涅槃者, 我說亦復如幻如夢)’ 라고 주장하고 있다.27)

27) 반야경 제8권 ( 大正藏 8冊), p. 540下. 반야경 의 이 일절은 길장이 대승현론 제1권 ( 大正藏 45冊), p. 22上을 비롯하여 종밀의 도서 ( 大正藏 48冊), p. 402下. 承襲圖, 임제록 , 백장광록 등에도 인용하고 있다.

 

참선수행은 경전에서 설하는 불법의 가르침을 토대로 각자가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는 공부이기 때문에 올바른 불법의 정신과 사상, 지혜를 정확하게 알고 실천해야 정법의 지혜와 인격을 체득하여 보살도를 실천할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선병에 떨어지고 삿된 법문을 공부하는 외도의 수행자가 되기 때문이다.

철위산(銕圍山)은 법화경 보탑품 등에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불교의 세계관에서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9山과 8海가 있고 그 외측에 철로 만들어진 산이 둘러싸고 있다는 주장인데, 인간이 살고 있는 염부제주(閻浮提洲)이다.28)

28) 법화경 , 「보탑품」 ( 大正藏 9冊), p. 33中

 

 

8) 번뇌 망념이 일어나면 곧바로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는 좌선수행은 영혼(精魂)을 가지고 노는 놈이다.

(念起卽覺. 弄精魂漢)

 

종색(宗賾)선사의 坐禪儀에 「망념이 일어나면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라.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면 망념은 없어진다.」라고 설하고 있다. 앉아서 이러한 좌선만을 하는 수행은 자신의 불성을 가지고 장난치면서 노는 녀석이다.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불법의 안목으로 지혜로운 생활이 되도록 하는 것이 참선인데 앉아서 망념만 자각하는 좌선 수행에 빠져 있는 수행을 지적하고 있다.

임제도 ‘이미 일어난 妄念은 妄念이 계속되지 않도록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妄念은 그냥 내버려 두라.(已起者莫續,未起者 不要放起)’ 는 일절은 사실 좌선 수행의 기본 요체가 되는 설법이다.29)

29) 임제어록 ( 大正藏 47冊), p. 500下. 정성본 역주, 임제어록 , p. 191. 정성본, 「선의 수행과 깨달음의 내용」, 한국불교학 제42집 (서울: 한국불교학회, 2005년) 참조.

 

이미 일어난 妄念(번뇌)을 쫒지 말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妄念은 신경쓰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라는 말이다. 지나간 妄念과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또한 닥치지 않은 미래의 일에도 신경쓰지 말고, 오직
지금, 여기서 자신의 본래심을 자각하여 자신의 일이 깨달음의 생활이 되도록 하라는 말이다.

 

조당집 제6권 洞山章 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다.

 

 

"問. 무엇이 病 인가(如何是病)?
師曰. 잠시 일어나는 妄念이 病이다(瞥起是病).
進曰. 무엇이 藥인가(如何是藥)?
師曰. 妄念이 계속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藥이다(不續是藥).30)"

30) 조당집 6권 동산장, (2-56)

 

 

이 일단은 종경록 38권에도 인용되고 있는데,31) 좌선 수행은 번뇌망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번뇌 망념(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극복하고 실천해야 하는 하는지 그 처방(藥)을 제시하고 있다.

 

달마의 이입사행론 에도 ‘잠깐 망념이 일어나면 곧 바로 생멸심에 떨어진 것(瞥起卽 便是生滅)’ 이라고 하고, 황벽의 완릉록 (14단)에도 ‘잠깐 한 생각이 일어나면 망념의 경계(瞥起一念便是境) 라고 설하고 있다.

전등록 제14권 운암장에도’ 한 생각의 망념이 일어나 (一念瞥起) 마구니 경계(魔界)에 떨어질 때는 어떻습니까?‘ 라는 질문도 있는 것처럼, 번뇌 망념이 일어나면 중생심이고, 번뇌 망념을 자각하면 불심이 된다.32)

 

일념별기(一念瞥起)는 출처가 분명치 않으나 징관의 화엄경소 15권에도 「잠깐 일어나는 번뇌 망념은 참된 지혜가 아니다(瞥起 亦非眞知)」 라는 말이 보이는 점으로 보아 당시의 成句로 사용된 것 같다.33)

 

31) 종경록 38권 ( 大正藏 48冊), p. 638上
32) 완릉록 14단 ( 선의 어록 , p. 132). 달마의 이입사행론 3단. ( 선의 어록 , p. 47) 전등록 14권 운암장. ( 大正藏 51冊). p. 315中
33) 징관의 화엄경소 15권 ( 大正藏 35冊), p. 612中

 

잠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번뇌 망념을 자각하는 것을 돈오견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번뇌 망념을 자각하지 못하면 번뇌 망념의 중생심으로 업장을 짓는 생활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빨리 마음속에서 일어난 번뇌 망
념을 자각하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망념의 자각이 선수행의 요체가 되는 것인데, 망념의 자각이 곧 頓悟見性이며, 불성의 지혜작용인 것이다.

 

무문은 참선 수행하는 사람이 항상 번뇌 망념이 일어나면 자각하는 일만 계속하는 것은 영혼을 가지고 놀면서 세월 보내는 한심한 사람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참선 수행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경전과 어록에서 제시한 불법의 가르침을 깊이 사유하고 성찰하여 부처와 조사들이 제시한 불법의 정신과 사상, 반야지혜를 체득하는 공부이다. 불법의 대의를 깨닫고 반야지혜를 체득해야 일체 중생들이 세간의 잡다한 가치관에서 집착하고 차별심 분별심, 전도 몽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의 심병과 선병을 출세간의 지혜로 병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구족할 수가 있다.

그런데 정작 해야 할 참선 공부는 하지 않고 좌선의에서 언급하고 있는 망념의 자각만 하고 있다면 올바른 참선수행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상생활하는 가운데 언제 어디서나 번뇌망념이 일어나면 자각하여 중생심을 불심으로 전환(廻心)하고, 불심으로 看經, 看話하여 경전과 어록을 통해서 불법의 정신과 사상,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는 참선 공부를 해야 일상생활하는 가운데 불법의 지혜와 인격으로 지금 여기 자신의 삶을 선의 생활로 살 수가 있다.

 

 

9) 앉아서만 좌선을 하는 사람은 흑산에 사는 귀신과 같이 지혜없는 생활이다.

(兀然習定. 鬼家活計)

 

참선수행은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모두 깨달음의 지혜로운 생활이 되도록 해야한다.

유마경 상권 제자품에 사리불이 청정하고 조용한 산중의 나무 밑에서 좌선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시끄러움을 피하여 조용함을 선택하는 차별심과, 선정이라는 고정관념에 속박된 선병을 지적하고 있다.34)

선원에서 꼼짝 않고 앉아서 선원이나, 한가하고 조용한 산중에서 꼼짝않고 앉아서 선정을 닦는 수행은 불법의 지혜로운 생활을 하지 못하는 죽은 사람의 삶이다. 깜깜한 암흑의 산중, 귀신 소굴에서 지혜작용이 없는 중생의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은 임제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여러분! 내가 마음 밖에는 진리가 없다고 말해도 수행자는 알지 못하고, 그러면 마음 안에 있는 것인가? 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는 벽을 쳐다보고 꼼짝 않고 좌선하며, 혀는 잇몸을 떠받치고, 조용히 움직이지도
않는다. 이렇게 좌선하는 것이 조사 문중의 불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크게 잘못된 것이다.

만약 그대들이 움직임이 없는 청정한 경지를 조사문중의 불법이라고 여긴다면 그대들은 저 무명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길 ‘깊고 깊은 캄캄한 구덩이는 정말 무섭다’ 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35)"

 

34) 유마경 , 「제자품」 ( 大正藏 14冊), p. 539下. 정성본, 중국선종의 성립사 연구 , p.531 참조.
35) 정성본 역주, 임제어록 , p. 205 참조.

 

 

무문은 임제의 설법을 알고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혜종고는 서장 에서 ‘黑山下鬼神窟의 活計(살림)’ 이라고 하며 ‘성문 연각 二乘 禪寂의 斷見 경계’ 라고 지적하고 있다.36)

 

수행한다고 산중의 선원에 앉아서 좌선하는 형식에 속박(相縛)된 좌선은 조사선의 정신을 읊은 증도가 의 ‘行住坐臥 語黙動靜 體安然’ 이라고 읊은 말과, 육조단경 에서 행주좌와가 모두 선이라고 주장한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선사상을 모르는 무지인 것이다.

또한 선정(定縛)에 탐익하고 집착하거나, 중생심의 번뇌를 싫어하고 고요한 선정을 좋아하는 편견, 시끄러움을 싫어하고 조용한 산중에 은거하여 좌선 수행하는 차별적인 사고에 속박된 것은 소승의 선정이다.
이러한 소승적인 좌선은 보살도의 정신과 사회성이 결여된 편협된 수행자가 되기 때문에 임제도 임제록(13-5)에서 이러한 좌선 수행은 외도의 가르침이라고 비판하고 있다.37)

 

36) 대혜어록 , 「대혜서 答陳少卿 ( 大正藏 47冊), p. 923中 등.
37) 정성본 역주, 임제록 , p 158 참조.

 

즉 선원에서 꼼짝 않고 앉아서 선정을 닦는 수행은 좌선의 모양(坐相)에 과 선정에 집착한 정박(定縛)이며, 조용함에 속박된 정박(靜縛)의 수행자이기에 불법의 지혜로운 생활을 하지 못하는 죽은 사람의 삶이다. 그래서 깜깜한 암흑의 산중, 귀신 소굴에서 지혜작용이 없는 중생의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이다.

불심의 지혜작용이 없이 중생심으로 사량분별에 빠져 업장을 짓는 삶을 선어록에서는 ‘암흑의 동굴(無明)에서 살림살이하는 것(黑山鬼窟裏活計)’이라고 한다.

원래 일 말은 구사론 제11권 세간품에 남섬부주 가운데 북쪽을 향해서 세 곳에 각기 三重의 黑山이 있고, 암흑으로 惡鬼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중생심의 情識, 사량분별에 빠져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는 불법의 지혜광명이 없는 어두운 암흑구멍에 비유하고 있는 말이다.38)

 

38) 經律異相 제46권에 흑산은 긴나라(緊那羅)가 사는 곳이라고 하며, 「긴나라는 수미산의 북쪽에 산다. 소철위산을 지나 대흑산이 있다. 또한 十寶山의 사이에 있는데, 불법과 日月星辰의 빛이 없다」 ( 大正藏 53冊), p. 240上. 鬼窟에 대해서는 法苑珠林 제9권에 五道苦經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아귀는 저 두 철위산의 중간에 산다. 그래서 게송에 두 철위산의 중간에 日月의 광명을 볼 수가 없다. 아귀는 그 가운데 모이니 그의 宿罪를 갚기 위한 것이다.」 ( 大正藏 53권 311쪽 中)

 

 

대혜서 답부추밀 제2서에서는 묵조사선을 비판하면서, 「切不可 一向沈空趣寂, 古人喚作黑山下鬼家活計, 盡未來際, 無有透脫之期」 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운문광록 상권에는 「똥통속에서 살림살이하는 것(屎坑裏作活計)」 이라고 비난하고 있다.39)
39) 대혜서 上卷 ( 大正藏 47冊), p. 921下. 운문광록 上卷 ( 大正藏 47冊), p. 550下. 如淨어록 전등록 18권 현사장 등 선승들의 법문에 엉터리 참선수행을 비판하는 말로 많이 인용하고 있다.

 

벽암록 42칙 수시에는 ‘중생심으로 의의(擬議)를 작용하면 해골(髑髏) 앞에서 귀신을 보고, 사량 분별심을 일으키면(尋思) 흑산의 귀신굴 속에 앉아 좌선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즉 미혹과 차별, 분별심의 작용인 중생심으로 번뇌 망념의 경계를 깨달음의 경지로 착각하고 그러한 경지에 안주하고 있는 잘못된 참선수행을 비판하면서, 불심의 지혜작용이 없는 중생으로 생사윤회의 업장을 짓는 선병을 비판하고 있다.

 

 

10) 깨달음을 얻으려고 나아가는 것은 불법의 도리를 상실하는 것이요, 후퇴하면 불법의 대의(종지)를 위배하게된다. (進則迷理. 退則乖宗)

그렇다고 해서 나아가지도 않고 후퇴하지도 않으면 숨만 쉬고 있는 죽은 사람이다.

(不進不退. 有氣死人)

 

禪林名句辭典에 ‘번뇌를 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선병이 증가하고, 깨달음(진여)에 나아가려고 하면 이 역시 삿된 것이다.(斷除煩惱重增病,趣向眞如亦是邪)’ 라고 읊고 있다. 어떤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목적의식
을 지적한 말이다.40)

40) 禪林名句辭典 (일본: 國書刊行會, 昭和50년), p.405에는 이 말이 禪林類聚 제1권의 말이라고 인용하고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

 

생사를 버리고, 열반을 취하려는 마음, 번뇌를 버리고 보리(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 범부에서 성인이 되려는 마음,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하려는 마음, 시끄러운 곳을 떠나서 조용한 곳을 취하려는 마음, 싫은 곳에서 좋은 곳으로 나아가고 取捨選擇하는 取捨心은 또 다른 집착을 향해 나아가는 중생이다.

또한 한국 선에서 교학을 버리고 선수행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교입선(捨敎入禪)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역시 불법의 대의와 사상을 모르는 말이다. 취하고 버리는 취사선택의 분별심과 목적의식의 중생이 되도록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부처가 되려는 목적의식, 수행하기 위해서, 깨달음을 증득하고 도를 이루기 위한 생각, 생사해탈을 위해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행을 하기위해서, 불법을 전하기 위해서, 불국토를 건립하기 위해서, 극락왕생하기 위해서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은 모두 목적의식에 떨어진 중생으로 선병의 환자이다.

선어록에 ‘무엇을 하려고 생각하면 곧 불심과 어긋나고(擬心卽差), 번뇌 망념이 일어나면 깨달음의 지혜작용과 멀어진다(動念卽乖)고 주장하는 말이 있다. 목적의식에 나아가려고 하는 생각 뿐만 아니라, 게으른 마음과 퇴굴심도 불심의 지혜작용과는 멀어진다.
그래서 나아가지도 말고, 물러서지도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부처나 조사가 되려는 목적의식과 깨달음(覺)과 道法, 한소식을 얻으려는 목적의식은 깨달음을 기다리는 대오선병(待悟禪病)이다. 마조도일이 좌선하여 부처가 되려고 하는 作佛의 목적의식에 떨어진 선병을 지적하고 바르게 교시한 것이 스승 회양이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하는 사례로 직접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전등록 15권 협산선회장에도 ‘학인이 저는 왜 깨닫지 못합니까?’ 질문하자, ‘그대가 단지 깨달으려고 하는 그 마음이 도리어 그대를 미혹하게 하고 있다.’라고 대답한다.41)

41) 전등록 제5권 남악회양장( 大正藏 51冊), p. 240下. 전등록 15권 협산선회장( 大正藏 51冊), p. 324上

 

임제어록 에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제방에 많은 사람들이 불법을 수행하고 깨달음을 증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설사 수행하여 얻은 것이 있다고해도 그것은 모두 생사 번뇌 망념으로 지은 업장이 될 뿐이다. 보살의
육바라밀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많은 수행을 닦는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두 업장을 짓는 일이다.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일도 지옥에 떨어지는 업장을 짓는 것이다. 보살이 되려고 하는 것도 업장을 짓
는 일이고, 경전을 읽고 교학을 연구하는 일도 업장을 짓는 일이다. 부처와 조사는 번뇌 망념의 업장을 짓지 않는 무사인(無事人)이다.42)"

42) 정성본 역주, 임제어록 , p. 157.

 

조작된 번뇌 망념의 마음으로 부처를 구하고 수행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모두 목적의식이 작용하는 작위성으로 중생심의 업장을 짓는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반야심경 에 ‘얻을 지혜도 없고, 얻을 것(깨달음이나 부처)도 없다. 왜냐하면 얻을 수 있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라고 설하며, 금강경 에서도 ‘고정된 법도 없고(無有定法), 고정된 실체의 법도 없다(無有實法)’고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본래 텅 비어 이름도 모양도 형상도 없는 공(一切皆空)의 세계에서 무엇을 구하고 얻을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선에서 無所求. 無所有. 無所得을 강조 하며 구하려고 하는 생각도 번뇌 망념이고, 구할 대상이 있으면 상대적인 차별 경계에 떨어지며, 또한 집착과 분별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모두 괴로움과 업장을 만드는 일이기에 고통을 초래한다. 그래서 구함이 있으면 모두 괴로움(有求皆苦)이라고 설한다.

부처란 무엇인가? 불법이란? 불도란? 깨달음이란? 이러한 기본 문제를 불법의 대의와 반야의 지혜로 확고히 파악한 정법의 안목이 있어야 올바른 참선수행을 할 수가 있다.
그래서 임제나 많은 선승들이 마음 밖을 향해서 진실과 진리나 불법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마음 밖에서 불법이나, 道, 진리, 깨달음을 구하려고 하는 것을 향외치구(向外馳求)라고 하는데, 수능엄경의 고사로 연야달다의 이야기를 예를 들어 임제도 마음 밖에서 도를 구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비난하고 있다.

어리석은 중생은 불법의 근본 대의와 실천방법에 미혹하여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찾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번뇌 망념의 중생심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환상과 같은 불도나 깨달음을 추구하는 목적의식에 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불가능 한 일에 헛된 시간낭비를 삼계에 윤회하는 업장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騎牛覓牛)고 하며, 불을 가지고 불씨를 구하러 먼 길을 가는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하고 있다.

잠시도 마음을 여의지 않고 함께 자고 생활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이 부처인줄 모르고, 마음을 찾고 부처를 찾아 헤매는 것(日用而不知)이다. 善慧大士어록 에 ‘부처와 함께 자고 부처와 함께 일어나면서 부처란 무엇인
가? 찾는다. 부처라고 말하는 그 소리가 부처이다’ 라고 읊고 있다.43)

 

43) 대일본속장경 120권, p 12下 . 열반경 20권, 「범행품」 ( 大正藏 12冊), p.485 上.정성본 간화선의 이론과 실제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5년 6월), p. 273 참조.

 

마조도 ‘마음이 부처(卽心是佛), 마음 밖에 달리 부처는 없다(心外無佛)’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의 마음 이 외에 달리 불심이나 佛性, 眞心, 진여자성, 여래나 부처가 없는데, 불심이나 진여 자성이 있다고 착각하고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구하는 어리석음은 영원히 마음을 찾을 수도 없고, 불법의 지혜를 체득 할 수도 없다.(無所得, 無所求) 구하려고 하는것은 모두 고통을 초래한다(有求苦)

 

미래지향적인 목적의식과 來世에 천당과 극락에 태어 날 것이라는 안위를 보장받으려고 하는 목적의식의 종교관은 불확실한 일이며,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질 일을 상상하는 것은 환상적인 희망이다. 비현실적인 가상의 미래에 대한 망상, 착각, 전도몽상은 불법의 대의를 모르는 무지이며, 어리석음(痴)은 현재 지금 여기서 자신의 확실한 삶을 상실한다. 그래서 수행자는 원력과 목적의식을 혼동하지 말고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반야의 지혜로 잘 판단해야 한다.

 

무문은 ‘그렇다고 해서 나아가지도 않고 후퇴하지도 않으면 숨만 쉬고있는 죽은 사람이다.(不進不退. 有氣死人)’ 라고 수행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불법 수행을 위해 정진하여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거나, 용기가 없어 물러서려고 하는 마음은 중생심의 의식적인 번뇌 망념의 작용이기 때문에 進退나 善惡, 凡聖, 美醜와 같은 상대적인 차별심에 떨어지며 업장을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불법 수행자가 자신의 할 일도 모르고 나아가지도 못하고 물러서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 역시 불법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여 참선수행의 방향과 올바른 실천 방법을 모르는 지혜가 없는 중생이라는 말이다.
선어록에서는 정법의 안목과 반야의 지혜를 구족하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의 삶을 죽은 사람(死人)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등록 제14권 운암장에 「본래의 주인이 잠시라도 외출하면 죽은 사람과 같다(暫時不在 如同死人)」 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혜종고는 대혜서 등에서 ‘혼이 흩어지지 않은 죽은 사람(魂不散底死人)’이라고 비난하고 있다.44)

 

44) 조당집 13권 보자화상전에 「這虛生浪死漢」이라고 함. 대혜서 答宗直閣 ( 大正藏47권 933쪽 中), 답부추밀 ( 大正藏 47권 922쪽 上). 전등록 14권 운암담성장( 大正藏 51권 315쪽 上).

雲門은 일체의 경계에 떨어져 불심의 지혜작용이 없는 중생을 「平地上死人」이라고 한다.

 

 

자각의 주체인 불심의 지혜 작용이 없는 사람은 몸은 살아 움직이지만 마음은 죽은 사람과 같다는 말이다. 불심의 지혜작용이 없이 중생심으로 사량분별에 빠져 업장을 짓는 삶을 ‘암흑의 동굴(無明)에서 살림살이하는 것(黑山鬼窟裏活計)’ 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의미인데, 그래서 임제가 ‘언제 어디서나 자기 자신이 곳에 따라 주인이 되라(隨處作主)’ 고 강조하고 있다.

 

또 정법의 안목이 없는 어리석은 중생은 선어록에서 주장하는 평상 無事와 無心이 道라는 말의 의미와 설법의 정신을 잘 못 알고, 일없이 무사 안일하게 빈둥 빈둥 놀면서 무사 안일하게 세월만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중생 역시 진퇴의 방향도 모르는 어리석은 중생이다.
마조가 ‘평상심이 도’ 라고 한 설법이나, 운문이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 이라고 한 말, 임제가 주장한 ‘평상 無事人’ 혹은 ‘無事是貴人’ , 증도가 에서 ‘絶學無爲閑道人’ 이라고 설한 법문의 의미와 선사상을 잘 못
이해하고 글자 그대로만 자의적이고 편의적으로만 해석하여 선종의 종지를 왜곡시킨 사람과 그러한 주장을 따르는 사람도 모두 지혜작용을 상실한 죽은 사람이며, 선병의 환자라고 할 수 있다.

 

무문혜개선사는 당시 참선수행자들이 이상과 같은 10개 항목의 선병에 떨어져 있는 점을 지적하여 후학들에게 잘 명심하도록 주의 주고 있는데,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와같은 선병에서 벗어나 올바른 정법을 체득하는 참선 수행을 할 수 있을까?

 

무문은 ‘잘못된 수행으로 생사 망념의 업장을 만들어 생사에 윤회하는 과보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莫敎永劫受餘殃)’ 라고주장하고 있다. 출가하여 불법을 배우고 중생을 제도하는 원대한 원력을 세웠다고 할지라도 불법의 대의와 사상,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는 올바른 방향과 수행 방법을 실천하지 못한 잘못된 참선수행은 또 다른 생사에 윤회하는 타락된 중생의 어리석은 삶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제시한 10개 항목의 선병을 잘 명심하여 항상 자신의 참선 수행이 선병에 걸린 잘못된 것인지 살펴보고 확인하여 정법의 참선수행자가 되도록 노파심에서 요약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참선 수행자는 반드시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 선지식을 친견하고 불법의 대의와 선사상을 철저히 배우고 익히며 불법사상을 자신의 지혜로 체득하여 활용 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

 

 

Ⅳ. 선의 생활과 선병 - 陸沈의 선병

 

불법의 가르침은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불심으로 전향하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불심의 반야지혜로 일체의 고통을 초래하는 업장의 인연을 만들지 말고, 身口意 三業이 청정한 창조적인 삶을 보살도의 정신으로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통해서 회향하는 것이다.

경율론 삼장과 대소승의 모든 가르침이 중생심의 사바세계(穢土)를 초월하여 정토의 법계를 건립하도록 간절히 설하고 있는 말씀이기에 불법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서 누구나가 깨달음의 경지인 보리 열반의 세계, 혹은 진리의 세계인 법계나 정토의 세계, 출세간의 眞諦나 道, 불가사의한 해탈의 경지를 구체적인 현실생활 속에서 실행해야 한다.

 

선의 수행은 구체적인 일상생활에서 번뇌망념에 떨어진 자신을 자각하여 불심을 깨닫고,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불심의 반야지혜로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보살도의 정신인 원력과 회향의 삶으로 실행하도록 강조하고 있다.

 

유마경 에서 제시한 것처럼, 연꽃이 진흙탕 속에 피지만 흙탕물에 물들지 않는다(處染常淨)는 말은 중생이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사바세계에서 법계의 정토를 구현하는 不二法門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불법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여 사물과 경계에 집착하고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현실 생활하는 지금 여기 자신의 삶을 번뇌 망념의 중생심으로 수많은 업장을 짓는 일을 거듭 거듭 반복하고 있다.

경전과 어록의 말씀을 잘 알고, 불법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을지라도 구체적인 현실생활에서 삼업이 청정하고 불심의 지혜로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보살도로 실행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눈앞의 경계나, 보고 듣고 느끼는 중생심의 감각과 경계에 현혹되어 자신의 본래심을 상실하고 사물경계에 매몰되어 주체를 상실한고 만다. 이런 경우 불법의 진실과 윤리적인 가치관을 알고 모르고 관계없이 중생심으로 전락되어 윤회의 고통을 초래하는 업장을 짓는 행위를 하게 된다.

무주(無住)선사가 엮은 사석집(沙石集) 제4권에 묵언(黙言)하면서 좌선 수행하는 선승들이 경계에 떨어져 자신의 할 일을 망각하고 있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느 산사에 네 사람의 수행승들이 도량을 장엄하고 모든 잡다한 인연을 끊고 묵언을 하면서 참선수행을 하였다. 어느 날 밤중에 등불의 기름이 떨어져 불이 끄지자 갑자기 주위가 깜깜해 졌다. 그 때 등 불 옆에 앉아 참선수행하는 스님이 ‘어이 시자야! 등불이 꺼졌으니 기름을 가지고 오너라!’ 라고 고함쳤다. 그러자 그 옆 자리에 앉아있는 스님이 ‘어이 자네! 지금 묵언 수행하고 있는 중인데 왜 입을 열고 큰 소리 치는가!’ 라고 나무랐다.

그러자 그 옆에 앉아있는 스님이, ‘여보게 자네도 역시 입을 열고 말하고 있구만!’ 이라고 핀잔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한 스님은 의기양양한 소리로 ‘그래도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은 사람은 나뿐이군!’ 이라고 말하면서 자만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45) "

45) 日本古典文學大系 沙石集 (日本: 岩波書店. 1978년), p. 167.

 

 

이 이야기는 현실생활하는 가운데 자신이 지금 여기서 참선수행하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할 일을 망각하고 주위에 일어난 일과 상황 경계에 떨어져 본래심을 잃어버리고 번뇌 망념의 중생심으로 업장을 짓는 모습이다. 인간은 자신의 허물과 잘못은 보기 어렵고 남의 허물을 보기 쉽게 눈이 밖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경계에 떨어진 중생심으로 온갖 번뇌 망념과 분별심을 일으켜 지금 여기 자신의 할 일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선에서는 현실생활의 사물과 경계에 떨어져 자신의 본래인을 상실한 사람을 불심의 지혜작용이 없는 죽은 사람(死人)이라고 하며, 흑산에 떨어져 귀신의 소굴에서 살림살이하는 사람, 혹은 육지에 빠져 죽은 사람이라고 한다.

 

선어록에 육침(陸沈)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육지 평지에 빠져 죽은 것을 말한다.

 

벽암록 76칙에 서천 28조, 동토 6대의 모든 조사들이 보배의 그릇을 가져와 허물을 이루었다. 그 허물이 너무 깊어 찾을 수가 없네. 천상 인간이 한결같이 육지에 빠졌다.’ 라고 말한다. 빠진다고 하는 것은 원래 물속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육지에 빠진다는 것은 본래 청정한 불심이기에 빠질 곳이 없고 과오가 없는데, 역대 조사가 불법을 전한 어떤 보물이 있다고 착각하고 깨달음이라는 허물을 만들어 스스로 번뇌 망념을 만들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속하여 자유를 얻지 못하여 삼계에 빠져 생사에 윤회하는 선병을 말한 것이다.

 

불법의 함정과 해탈의 구렁텅이를 중생심의 번뇌 망념으로 스스로 만들어 자기 자신을 빠지게 하고 지혜작용이 없는 죽은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삼계에 사는 모든 중생이 번뇌 망념의 허물에 빠져 지혜로운 삶을 건립하지 못하고 생사고해에 빠져 윤회하고 있는 것이다.

 

육침이란 말은 원래 장자 즉양편에 근거한 말로 원래는 성자의 은거를 말한다.

 

공자가 초나라로 가다가 의구(蟻丘)의 여관에 머물렀다. 그 때 이웃의 부부 남녀 종들이 지붕마루에 올라가 내려다 보고 있었다. 자로(子路)가 ‘저기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은 무엇하는 사람들 입니까?’ 하고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저들은 성인의 종이다. 그 성인은 백성들 속에 뭍혀서 스스로를 밭두둑에 감추고 있다. 그의 명성은 들리지 않지만, 그 정신은 무궁한 대도에 노닐고 있다. 그는 입으로 말은 해도 결코 본심을 말하지 않고, 세속에서 멀리 동떨어진 채 세속과 함께 있음이 깨끗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는 속세에 숨기를 마치 육지에 몸을 가라앉히듯(陸沈)이 하는 자이다. 그는 아마 성인의 노예(市南宜僚)일 것이다.’

장자에서는 성인이 세속인과 함께 거주하면서도 세속인과 조금도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은거자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진나라 왕강거(王康琚)의 시에서 주장하는 市中에 은거하는 대은(大隱)과 같은 의미이다.
-은거

 

논형(論衡) 사단(謝短)에 ‘옛 것을 알고 지금을 알지 못하는 것을 육침이라고 한다(夫知古 不知今)’이라는 말과 抱朴子 심거(審擧)에 ‘도를 지키는 자를 육침이라고 한다(謂守道者 爲陸沈)’ 는 말을 토대로 옛 성인의 가르침과 도를 지키고 세속의 현실에 따르지 않고 세속을 알지 못한 어리석은 삶을 비판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선에서는 자신이 현실생활의 사물 경계에 매몰되어 자신을 잃어버리고 불법의 대도를 실행하지 못하는 중생의 선병으로 지적하고 있다.

 

벽암록 제93칙에 어떤 스님이 ‘장경선사가 재를 올리고 축하한 것이다’라고 말한 의미는 무엇인가 질문하자 대광화상은 춤을 추었는데, 이 공안에 대하여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조계의 물결이 이와 같다면, 수많은 무고한 양민이 육지에 빠져 죽는다.
(曹溪波浪如相似, 無限平人被陸沈)46)"

46) 정성본 역해 벽암록 (서울, 한국선문화연구원.2006년 5월) 582쪽 이하 참조.

 

즉 조계 혜능으로부터 전래된 선불교가 대광화상이 보여준 것처럼, 요즘 여기 자신의 일을 통해서 불심의 지혜작용을 춤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인데, 안목이 없는 사람은 불법이 단순히 춤이나 추고 방망이나 휘두르고 고함이나 치는 흉내나 내는 형식적인 모양이라고 생각해 버린다면 선은 고정된 관념과 망상의 틀에 박혀 죽게 된다는 말이다.

 

즉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 독자적인 지혜를 갖추어 지금 여기 자신의 생활속에서 불법의 대의를 지혜작용으로 전개하는 선승이 없으면 수많은 천하의 납승이 모두 육지에서 빠져 죽는 중생이 되고 만다는 의미로 읊고 있다.

 

공자가 이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무진히 노력하고 윤리관과 도덕을 제시하였고, 수많은 불보살과 조사들이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갖춘 해탈의 법문을 설해도 지금 여기 자신의 삶에서 불심으로 반야의 지혜를 실행하지 못하면 생사의 고통에 빠져 죽는 중생이 된다는 의미이다.

 

운문선사는 ‘일상생활하는 지상에서 지혜작용이 없이 생활 경계에 매몰되어 중생심으로 업장을 짓는 죽은 사람(死人)이 무수히 많다(平地上死人無數)’라고 하고, 보자(報慈)화상도 ‘헛되이 태어나 지혜작용도 없이
죽은 삶을 사는 녀석(這虛生浪死漢)이라고 질타하고 있다.47)

 

그래서 임제는 지금 여기 자신의 삶에서 일체의 경계나 사물에 사로잡혀 자신을 상실하지 말고, 경계를 반야지혜로 자유자재로 활용 할 수 있는 사람(乘境底人)이 되라고 강조한다.

 

47) 雲門錄 中卷 ( 大正藏 47권), p. 554中. 조당집 제14권 보자화상전(4-14).

 

 

Ⅴ. 맺는 말 - 참선수행과 선병의 치료

 

이상 무문관 의 禪箴에서 지적한 선병에 대하여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사실 경전과 선어록에 언급된 참선수행자의 선병의 종류는 增上慢, 宗師病, 悟病, 法身病, 空病 등등, 실로 다양하다. 이러한 선병을 잘 알지 못하면 자신도 올바른 참선 수행자가 될 수가 없고, 또한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지 못하면 중생들의 선병이나 심병을 진단 할 수가 없다.
임제록 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내가 설하는 법문은 천하 일반 사람들이 설하는 법문과는 다르다. 문수 보현이 내 앞에 나타나 ‘화상께 불도에 대한 자문을 구합니다’ 라고 한마디 할 때 나는 벌써 그의 심중을 파악해 버린다. 노승이 앉아 있는 곳에 어떤 구도자가 찾아와 서로 상견할 때 나는 단번에 그의 본심을 완전히 파악해 버린다. 왜냐하면 나의 견해(안목)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밖으로 凡聖에 대한 차별심을 일으키지 않고, 안으로 근본에 안주하지 않으며,
철저히 불법을 깨달은 견해로 추호의 의심 의혹이 없기 때문이다.48)

48) 정성본 역주, 임제어록 , p. 115 참조.

 

 

범성, 선악 등 일체의 상대적인 차별심에 떨어지지 않고, 깨달음의 근본 당처에도 안주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불심의 지혜로 문수나 보현뿐만 아니라, 어떠한 사람이 찾아와도 그들의 심병과 선병을 진단하고 치료
할 수 있는 정법의 안목과 진정한 견해를 구족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마치 금강경 에 부처님이 저 많은 국토 가운데 있는 중생의 여러 가지 종류의 마음을 여래는 모두 다 안다 라고 하는 설법과 같다.49)

49) 금강경 ( 大正藏 8冊), p. 751中, p. 750下. 금강경 에서 여래는 불지혜로 다 안다고 하는데, 대승기신론 에서는 「如來能知」 혹은 「唯佛能知」 라고 한다.

 

지공(誌公)화상은 불법의 지혜를 대승의 法藥이라고 한다. 중생의 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法藥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본래 병이 없었던 본래의 건강한 모습을 되찾는 것이며,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대승의 불법(지혜)을 자신의 보살도 삶으로 사는 것이다.50)

50) 황벽의 전심법요 에 「誌公云, 未逢出世明師, 枉服大乘法藥」 이란 말을 2회 인용하고 있고, 종밀의 원각경대소초 제2권下에도 인용하고 있는데, 정확한 출처는 未詳. 전등록 제29권 「지공화상14과송」에도 「法性本來圓明, 病愈何須執藥, 了知諸法平等, 修然淸虛快樂」 ( 大正藏 51권, p. 451上) 이란 말이 보인다.

 

 

대승경전에 부처님의 설법이나, 유마경 에서 유마거사가 소승의 가르침(法)에 집착되고 대승 불법의 근본정신을 모르는 부처님의 제자와 보살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不二法門으로 대승의 법약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선승들의 선문답이 모두 대승의 법약으로 중생심의 심병과 선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즉 대승의 법약인 불법의 대의란 대승불교의 핵심정신이며 출세간의 지혜인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는 것이다. 반야의 지혜를 체득해야 중생들이 세간적인 가치관으로 일어나는 일체의 차별경계와 대상, 분별심,
전도몽상의 착각에서 벗어나고, 생사대사의 윤회를 초월하고 자유자재로 무애자재한 해탈을 체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불법을 깨달아 여법하게 반야의 지혜로 보살도를 실행해야 생사를 초월한 깨달음의 경지에서 부처나 보살의 삶을 살 수가 있다. 법을 깨닫는 것이란 반야의 지혜를 직접 체득한 것을 말한다. 그래서 如法한 수행, 불법에 의거한 수행(依法), 여법한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여법이란 반야 지혜로 일체의 업장을 초월한 출세간의 지혜이다.
즉 번뇌 망심과 자의적인 차별 분별 의식의 중생심으로 전개되는 생사윤회를 초월하고 신구의 삼업(三業)이 청정한 출세간의 지혜로 보살도의 삶을 실행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망심과 의지와 감정과 분별의식의 중생심으로 작용하는 세간, 혹은 세속적인 지혜나 가치관의 삶이 아니다. 중생심의 작용은 대상의 사물이나 의식작용이기에 업장이 남고 윤회를 초래하는 자취가 남는다.

불법은 출세간, 즉 세속적이고 상대적인 가치, 의식의 대상을 초월한 불심의 반야의 지혜작용이기에 삼업이 청정하여 일체의 업장과 흔적이 남지 않는다. 그래서 三業淸淨한 삶이 불교 수행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삼업청정은 부처가 출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51)

51) 조당집 제14권 대주화상전에 「身口意 삼업이 청정함은 佛出世한 때(時)라고 하고, 삼업이 청정하지 못함은 부처가 열반한 때라고 한다.」 (4-44) 선가귀감 에도 「身口意淸淨 則 佛出世」 라고 인용하고 있다.

 

법화경 에서 부처님의 출세와 일대사(一大事) 인연을 개시오입(開示悟入) 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즉 부처님은 중생들에게 해탈 열반의 경지를 체득하도록 하기 위한 자비의 교화로 출세간적인 지혜를 체득할 수있는 불법을 열어 보이시고, 각자 불법의 대의를 깨달아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도록 제시한 것이다.

如法이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불보살의 반야지혜로 중생구제의 삶을 자리이타로 보살행을 하는 삶을 말한다. 그래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지 못한 사람은 불법의 안목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삶이 중생심으로 업장을 짓는 생활이 되지만, 불법의 대의를 완전히 깨달아 철저하게 체득한 사람은 출세간의 지혜, 반야의 지혜로 일체 경계에 걸림없이 다양한 방편의 지혜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일체의 업장을 남기지 않는 삼업청정한 깨달음의 생활을 할 수가 있다.

 

유마경 에서는 진흑탕으로 비유되는 사바세계에서 진흙탕 물에 오염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연꽃처럼 청정한 삶을 보살행으로 사는 불보살의 모습을 처염상정(處染常淨)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참고문헌

 

대반야경 ( 大正藏 6冊)
법화경 , 「보탑품」 ( 大正藏 9冊)
유마경 ( 大正藏 14冊)
징관, 화엄경소 15권 ( 大正藏 35冊)
종경록 30권 ( 大正藏 48冊)
信心銘 ( 大正藏 48冊)
전등록 ( 大正藏 51冊)
무문관(無門關) ( 大正藏 48冊)
대승기신론 ( 大正藏 32冊)
마조어록 ( 續藏經 119冊)
육조단경 ( 大正藏 48冊)
임제어록 ( 大正藏 47冊)
대혜어록 ( 大正藏 47冊)
日本古典文學大系, 沙石集 (日本: 岩波書店, 1978년)
정성본 역주, 임제어록 (서울: 한국선문화연구원, 2003년 12월)
정성본, 간화선의 이론과 실제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5년 6월)
정성본, 중국선종의 성립사 연구 (서울: 민족사, 1991년 3월)
정성본 역주, 돈황본 육조단경 (서울: 한국선문화연구원, 2003년 5월)
藤吉慈海, 禪關策進 (日本: 築摩書房, 1970년)
楊曾文 編校, 神會和尙禪語錄 (北京: 中華書局, 1996년 7월)

 

 

[Abstract]

 

Ch’an Practice and the Problem of Ch’an Sickness

 

Moo-whan, Jung(Seong-bon)

 

Ch’an sickness is a sort of mental hindrance that a meditator causes with his own subjective and obsessional ideas during the practice of Ch’an meditation. It is mainly brought by ignorance not following practically the right path and method of Ch’an practice with a sense of discrimination of the right Dharma because the meditator does not thoroughly realize and experience the fundamental idea and thought of the Buddha-dharma, and does not complete prajñā-wisdom.

 

The original teachings of Buddhism are emphasized on the words, “dwell making yourselves your island(lamp), making yourselves, not anyone else, your refuge; making the Dhamma your island(lamp), the Dhamma your refuge, nothing else your refuge.” These words signify that one is the subject to practise the Buddha-dharma, and that Buddhism is a religion to embody insight and personality on the basis of the teachings of Buddha.

 

In this regard, Mahāyāna buddhism more specifically emphasizes that one is the subject of self-realization, and that he, transcending all the circumstances, creatively lives his life in a positive manner with prajñā-wisdom which is the mind of Buddha after he has completely seen Self-nature to realize the Buddha-nature transcending all the defilements of living beings, and has completed prajñā-wisdom that is the substance of the Buddha-dharma.

 

Described in the scriptures and the records of Ch’an masters, the 84000 types of various and different teachings of Dharma are to be preached in skillful means to cure Ch’an sickness by the mind of love and compassion. Therefore, after studying them, one has to develop the Ch’an practice which gets to realize the substance of Buddha-dharma and to possess a sense of discrimination of the right Dharma.

 

By the help of prajñā-wisdom, when one diagnoses to cure Ch’an sickness that causes karmic hindrances in the mind of living beings, and possesses the eyes of insight which can truly see reality, he can freely live his life here and now without fear and anxiety, and fulfill the path of Bodhisattva with the deliverance of mind.

 

Key-words: Ch’an practice, Ch’an sickness, Admonition to cure, The Analects of Ch’an master Mumun

 

 

 

韓國佛敎學 第 五十輯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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