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스크랩] 반야경의 중심사상 - 공(空)

수선님 2019. 2. 17. 13:05

1. 반야경의 의미

 

반야경의 명칭

다른 많은 경전과 달리 다만 <반야경>이라는 이름의 경은 없다. <반야경>은 <반야경>이라 칭하는 많은 경전의 총칭이다. 이를테면 <유마경><무량수경><대일경><대반열반경>과 같은 것들은 모두 하나의 독립된 경전이지만 <반야경>은 정확하게는 <반야바라밀경>이라 하는데 그것을 일컫는 경(經)은 매우 많이 있다. 이것이 다른 경전과 <반야경>의 큰 차이이다.

 

먼저 반야경의 명칭에 대해서 알아보자.<반야경>은 인도에서 만들어졌으므로 본래는 범어(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다. 대승경전은 모두 산스크리트어로 찬술되고 기록되었다.

 

 <반야경>은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이라는 명칭이 가장 많다. 범어로는 <마하 프라즈냐 파라미타 수트라. MAHA PRAJNA PARAMITA SUTRA) 라고 한다. 이것을 중국 번역가들이 소리나느대로 옮겼다. (이를 음사(音寫) 또는 음역(音譯)이라 한다)

 

범어와 한자는 전혀 다른 계통의 언어이므로 번역을 한다는 것은 대단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쉬운 번역도 있었지만 어려운 번역도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수트라(SUTRA)를 한역에서 '경(經)'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수트라나 한자의 경은 본래 옷감을 짤 때의 '세로의 실'이라는 의미이므로 안성맞춤의 번역이라 할 수 있다. 이 세로 실에 가로 실을 합쳐서 옷감이 짜진다. 그와같이 기본이 되는 것 또는 짧은 것 그것이 '수트라'이고 '경'의 본래 의미였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번역할 수 없는 언어도 몇개 있었다. '마하(HAHA)'를 대(大)'라고 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프라즈냐(PARAJNA)'를 뭐라고 번역하느냐는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고민끝에 '반야(般若)'라고 음사했다.

 

프라즈냐(PRAJNA)와 파라미타(PARAMITA)의 의미 

반야(般若)’라는 말은 범어로 ‘프라즈냐(Prajna)’ 라고 하며, 팔리어로는 ‘판냐(panna)’라고 한다.  반야를 굳이 번역한다면 ‘지혜(智慧)’라고 옮길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지혜가 아니라, ‘최고의 지혜, 즉 깨달음에 이르신 부처님의 밝은 지혜’를 의미한다. 지혜와 비슷한 단어로 지식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지식’은 ‘지혜’와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번역가들은 한자어로 억지로 옮기지 않고 소리나느대로 음사를 하였다.

 

바라밀다(波羅蜜多) 는 범어로 ‘파라미타(Paramita)’라고 한다. 그 뜻은 굳이 한자로 번역한다면 도피안(到彼岸) 등으로 표현 할 수 있다.  이 단어에서 중요한 말은 '타'라는 말이다. 여기서 '타'란 이쪽 기슭에 대한 저쪽 기슭을 일컫는다. '파라'라는 말은 지금 우리들이 방황하고 있는 이쪽 세계 즉 차안(此岸)에 대해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 그것이 '파라'라는 말이다. 이말에 '간다'라는 뜻dml i 가 붙고 거기에 다시 ta 를 붙여서 추상명사가 된 것이다.i" rk 자세하게는 이바라’가 ‘저 언덕[피안]’, ‘밀다’가 ‘건넌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이를 앞의 ‘마하반야’와 함께 번역하면, ‘크나큰 지혜로 피안의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이 된다.

 

옛날 경전을 번역했던 사람들은 모두다 범어를 상당히 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구마라집이나 현장같은 사람도 범어를 상당히 잘 구사할 수 있었겠지만 '반야' 나 '바라밀'이라는 것을 음사했다는 것은 이 용어에 그만큼 어려운 의미와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 일 것이다.

 

2. 반야경의 종류

 

12종류의 반야경

<반야경>은 여러가지 경전군(經典群)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교학자에 따라서는 다음과 같이 12종류로 분류하고 있다.

 

(1)소품(小品) - 이것만으로도 현재 15종류의 <반야경>이 있다. 대반야경의 4와 5가 이속에 포함된다. 

(2)대품(大品) - 여기에는 9종류가 있다. 대반야경의 제2와 3이 포함되어 있다.

(3)범어본 - 10만송의 <반야경>이 있다. 대반야경의 제1에 해당한다.

(4)금강경(金剛經) - 정확히는 <금강반야경>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은 10종류가 있다. 대반야경의 9번째 해당한다.

(5)문수반야경 - 7종류가 있다. 대반야경의 제7번째에 해당한다.

(6)수수반야경 - 2종류가 있다. 대반야경의 제8에 해당한다.

(7)승천왕반야경 - 2종류가 있다. 대반야경의 제6에 해당한다.

(8)이취경(理趣經) - 밀교와 깊은 관계가 있다. 9종류가 있다. 대반야경의 제10에 해당한다.

(9)대반야경의 나머지 - 제 11-16까지 한 묶음. 여기에는 3종류가 있다.

(10)반야심경 - 14종류의 텍스트가 있다.

(11)인왕경 - 이것은 인도가 아니고 중국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

(12)이상의 것에 들어가지 않는 2종류가 있다.

 

이처럼 많은 <반야경> 중에서 맨먼저 만들어진 경전은 어떤 것이 있을까. 다시 말하면 원시반야경은 어떤 것일까. 이 문제는 중국에서 이 경을 언제 번역했느냐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 <반야경>이 처음으로 번역된 것은 179년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후 중국에서는 어느 것이 오래된 것이고 어느 것이 새로운 것인가 하는 논의가 계속돼 왔다.

 

대체로 현재의 학계의 정설은 앞서의 분류 (1) 소품 내지 소품 계통 그리고 그중의 여러 경에 공통되는 최초의 부분 그것이 원시 반야경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부분은 한역은 물론 범어본도 남아 있다. <소품>은 이름이 말하듯이 양은 과히 많지 않다. <소품>전체는 범어의 경우 시로 쓰여져 있다. 이 시의 숫자의 약 8천송이 된다. 그뒤 멀지않은 시대에 증대되어 (2)대품, 대품계통이 만들어져 나갔다고 생각된다. 대품의 범어본은 시의 숫자가 약 2만 5천송이나 된다. 이것이 (3)10만송이라는 식으로 확대되었다. 이와같이 반야경은 처으에는 적었지만 차차로 보완되고 증대되어 갔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현장이 번역한 <대반야바라밀다경>이 6백 권이라는 방대한 것으로 발전했다. 이 6백권을 어떤 계산으로는 48만자라고도 하는데 어쨌거나 대단한 양임에는 틀림없다. 현장은 매우 많은 불전을 번역했지만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대반야경>의 완역이다. 이 경은 읽는 것만도 큰일인데 그것을 번역까지 했다는 것은 보통의 사람으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다. 이 경전은 현재에도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방대한 경전이 만들어지자 수행자나 재가자들 모두다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거꾸로 간결하면서도 과감하게 짤막하게 축소시킨 <반야심경>이 만들어졌다. 다시말하자면 <반야경>은 한편에서 가장 방대한 경전과 가장 간결한 경전 두 가지가 생기게 되었다.  

 

3. 반야경의 사상

 

공 = 반야경의 중심사상

<반야경>이 맨 먼저 제시했던 주제 즉 중심이 되는 사상은 空 이라는 사상이다. <반야경>을 보면 공이라는 용어가 참으로 많이 나온다. 이 점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어느 <반야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널리 알려져 있는 <반야심경>은 유명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말이 있다.

 

이  공이라는 말은 범어로는 순야(Sunya) 라고 한다. 공 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無 와는 약간 다르다. 무 라고 하는 말은 有 라는 말에 대응되는 것이다. 그리고 無라는 것은 有 라는 것의 부정이다. 즉 有 가 결여 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책상위에 꽃이 있다는 것과 

꽃이 있다고 하는 상태를 전제로 그 꽃이 제거된 상태를 말한다. 책상위에 꽃이 없다는 것은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有와 無는 반드시 상대적 개념이다. 無 라고 할때에는 有 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 有를 제거하면 無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매우 알기 쉬운 것이고 조그만 지식만 있어도 이해가 된다.

 

공과 제로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 유와 무 이외에 또 하나의 사고방식을 만들고 이를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그것이 공(空 = 0. Sunya) 이다. 예를들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수학적으로 말해 숫자의 가장 기초 단위는 1이라는 숫자이다. 여기에 대응되는 것은 마이너스 1이라는 숫자이다. 즉 마이너스 1이 있고 그리고 마이너스 2라는 식이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수는 1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0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십이라고 할때는 1다음에 0를 쓴다. 백일 때는 100 이라고 쓴다. 그뒤 101, 102 로 써 나간다. 이것은 희랍이나 로마에서 백이라고 할 때 C 를 쓰고 II 를 쓰는 것과 전혀 다른 방법이다. 인도에서는 백이라든가 C 라든가 하는 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1과 0이라는 문자를 나란히 놓고 한마디로 자리에 따라 수를 포현해 가면서 101,102 ... 또는 그 이상의 어떤 큰 수도 모두 그것만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여기에는 인도에서 발견한 0이 교묘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것을 기초로 해서 숫자의 자리잡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0(제로)이란 플러스 1과 마이너스 1의 중강에 위치한다. 그리고 그 0에 대응하는 숫자는 없다. 1에는 반드시 마이너스 1이라는 식의 대응하는 것이 있는데 0에는 플러스 0도 마이너스 0도 없다. 이 0 이라는 숫자는 인도인이 발견하고 아라비아인이 인도로부터 배워서 유럽에 전했다. 

 

그런데 이 0 이야말로 <반야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순야(sunya) 즉 공이다. 순야라는 말 자체가 숫자의 0을 뜻한다. 0 라는 것은 대단히 재미 있는 숫자이다. 우리가 흔히들 102라고 할 때 십자리를 차지하는 수는 없으므로 0 를 쓴다. 그런데 없다고 해서 떼어 버리면 12가 된다. 전혀 다른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도무지 제거 할 수가 없는 것이 0 라는 숫자 이다.

 

이처럼 0 은 실은 없지만 그러나 없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그 실물에 상당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없는데도 그것을 제거할 수가 없다. 이른바 아무것에도 대응하지 않고 또한 실물이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그러한 것이 0 라는 숫자이다. 이것이 범어에서 말하는 순야(Sunya) 라는 것이다.

 

공과 허(虛)의 실체

한자의 空 은 빈 것(虛. 빌허)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컵이 있다고 예를 든다면 그 컵이라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 내부가 비어 있는 것이 실은 컵이다. 비어 있으므로 물로 채울 수가 있다. 만일에 내부에 물이 있다면 채울 수가 없다. 즉 컵이란 무엇이냐 물으면 물이 들어가는 것이 컵이지만 그것은 비어 있고 실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 아무것도 없는 그것을 우리는 컵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교실을 예를 든다면 사방이 벽과 천장으로 둘려져 있고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교실이다. 그러므로 그곳에 책상이 들어가고 사람이 들어 갈 수 있다. 만일 그곳이 꽉 차 있다면 사람도 책상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면 그곳은 교실이 아니다. 이와 같이 공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며 그 아무것도 없는 그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 공이다. 

 

보통 空 이란 말은 "실체가 없다" 는 표현으로 설명하곤 한다. 즉 "실체" 라는 의미는 그것만으로 존재하고 있고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독립된 존재 그러한 것을 "실체" 라고 한다. 이를테면 책상 위에 컵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컵이라는 컵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컵이라는 실체이다.

 

대체로 있다던가 없다던가 할 때에는 뭔가 있고 없고 함으로써 즉 개개의 것, 個物 (개물) 이 있다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를테면 컵이라고 할 때에는 주로 물을 마신다는 것을 생각해 컵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니까 물을 마실 경우에는 이 컵도 또는 다른 컵으로도 물을 마시면 되는 것이고 즉 컵이라는 실체를 가지고 있다면 어떠한 컵이라도 관계가 없다. 즉 개물이 아니고 우리는 실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물의 이름이라는 것은 실은 그 실체에 붙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계라고 할 때에도 요컨대 시각을 표시하는 것이고 그런 것을 시계라고 말하고 있다. 보통 다만 시계라고 할 때에는 어느 시계라든가 이 시계라든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한 개물에서 어떤 의미로 추상화 된 개념으로서 실체라는 것이 있다.

 

실체를 부정한다

불교에서 "실체가 없다" 고 하는 설명이 空 에 관해 행해지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부파 불교인들이 이 실체라는 개념을 중요시해서 이 실체라는 것에 어떤 의미로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실체라는 사고를 부정하고 파괴함으로써 어떤 대상을 실체화 하는 것을 타파하는 도구로 순야(Sunya) 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실체가 없다" 고 하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즉 실천적인 면에서 말하면 실체라는 사고는 실천의 경우에는 "사로잡힘(집착)" 이라는 것이 된다. 실체라는 것은 사로잡힘으로써 개물로 부터 추상되어 성립된다. 예를 시계라는 것은 시각을 표현한다는 개념을 추구해 나감으로써 개개의 시계로 부터 시계의 실체가 탄생한다. 그래서 空 이란 것을 실천적인 의미로 보면 사로잡힘을 없애는,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공을 설명하는데 실체가 없다는 것은 하나의 논리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실천적인 표현이다. 부파불교 시대의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실체를 생각하고 또는 실천에서도 어떤 제약에 사로 잡혀 있었다. 이런 자세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그것을 배척하며 나아가서는 부처님의 원음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슬로건으로서 대승불교의 그리고 <반야경>의 공이 설해지고 주장되었다. 

 

<반야경>을 보면 거기에 많이 나오는 공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설명이 전혀 되어 있지 않으므로 어떤 의미에서 곤혹스럽기 까지 하다. 실천적으로 사로잡히지 않음(無執着) 이라는 표현, 이것은 간단한 듯 하나 막상 그것을 실천하려 하면 매우 어렵다.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그 일에 열중하면 그것은 거꾸로 사로 잡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전혀 설명할 수 가 없다. 그러므로 반야경은 거듭 거듭 空 이라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다시한번 공이라고 말하고 마침내 " 공은 역시 공이다" 

이라고 말한다.

 

용수와 연기사상

"사로잡히지 않는다" 또는 "실체가 없다" 고 하는 것을 어떠한 형태로 논리적으로 또 실천과 결부 시켜 훌륭하게 설명하느냐 하는 문제는 초기 <반야경> 시기에는 적지 않는 무리가 따랐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나가르주나(용수) 라는 뛰어난 학자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空 의 논리는 마침내 용수라는 사람에 의해서 우수한 이론으로 성립이 되었던 것이다.


용수는 [중론(中論)] 이라는 책에서 空 의 이론을 "연기" 라는 것을 도입하여 설명했다. 연기(緣起)는 불교의 중심적 사상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인연에 의해서 일어 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이 원인이고 이것이 결과라든가 이것이 이유이고 이것이 귀결이라든가 그러한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서 초기불교에서는 연기가 논해졌다. 또한 인연이란 말도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관계성이라는 것이다. 원인과 조건, 그리고 결과라는 것을 포함한 개념으로서의 연기는 초기불교 시대를 지나 점점 발전되어 왔다. 

 

연기사상이란

발전된 연기사상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뭔가를 말을 할 경우 그 어떤 것을 반드시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에 놓고 생각한다. 즉 A 라는 것은 A 만으로 실체로서 독립돼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B 라는 것과의 관계에 있다. 그리고 B 도 A 라는 것과의 관계에서 있다. 더욱이 이것은 다만 A와 B라는 두개의 관계가 아니고 C에 또는 D 에 혹은 X 에도 여러 관계로 가지고 있다. 따라서 A는 어떤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고 따라서 실체라는 것은 성립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이 컵을 보아도 어떤 사람은 컵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글라스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룻이라고 하는 등 여러가지 견해와 말이 있다. 그것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고정된 실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좀더 예를 들어 본다면, 어떤 여자가 있다고 하면 그는 어머니이며 딸이며 아내이다, 그밖에도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에 서 있다. 즉 넓게는 국민이고 유권자이기도 하다. 이처럼 다양한 한 여자를 하나의 고정된 존재로서 볼 수는 없다. 용수는 [중론] 이라는 책에서 이것을 거듭 거듭 강조하고 말하고 있다. 그러함으로써 어떤 고정된 견해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한다.

 

공과 연기

이런 용수의 학설에 따라 앞에서 말한 "논리적으로 실체를 부정한다" 는 것과 "실천적으로 사로 잡히지 않는다" 는 것 두가지가 성립이 되는 것이다. 그런뜻에서 [중론]은 대승불교에서 지극히 중요한 책이다. 이책은 전부 450송의 시로 되어 있고 그것이 27장으로 나누어 있다. 이 책의 한귀절에는 "눈이라 하면 우리는 보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눈은 자기 눈을 볼 수가 없다. 자기 눈을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볼 수 있는가. 본다고 하는 작용을 눈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눈이 눈을 보지 않는다." 

 

중론은 공을 연기설로 설명하였고 그때까지 [반야경]을 설했던 사람들은 이로 인해 空 의 참뜻을 바로 이해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空 에도 사로 잡히지 않게 되었다.

 

 

 



출처 : 붓다의 옛길
글쓴이 : 실론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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