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심청심] ‘초기불교 통역관’ 전재성 박사
“니까야는 부처님 원음이 생생히 담긴 보물 창고…
덤으로 사는 인생,부처님께 회향해야죠”
자신이 하는 일을 천직이라 여기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견디기 힘든 삶의 무게를 감내하면서까지 자신의 일에 끈을 놓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무소의 뿔처럼 살기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회장 전재성 박사. 80년대 유행했을 법한 롱코트에 헝클어진 머리, 정돈되지 않은 턱수염. 현대적 감각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외모만큼이나 그는 분명 이 시대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당장 한 끼 먹을 것도 해결하기 힘든 가난과 생사를 넘나드는 병고에도 시대와 쉽게 영합할 줄 모르고 오직 자신의 길만을 걸어가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 경전 번역의 길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꿋꿋하게 걷고 있다.
특히 국내 최초로 완역한 한역 아함경의 원조격인 『쌍윳다니까야』 12권과 『맛지마니까야』 6권은 한국 초기불교 연구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 일반인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쉽게 번역한 점은 시대적인 요구에 부응하려는 그의 치열한 고민에서 비롯된다.
니까야는 부처님의 원음에 가까운 고대인도 언어인 팔리어로 전승되어온 경전모음집이다. 서구에는 이미 100년전에 영어로 완역됐다.
같은 한역권인 일본에서도 60년 전에 완역이 끝났지만 한국은 전 박사가 손을 대기 전까지 요원하기만 한 일이었다.
시련이 끊이지 않는 삶
함흥에서 부산으로, 전쟁을 피해 고향을 등진 실향민 집안에서 태어난 전 박사는 네 살 되던 해 그의 삶의 지도를 완전히 바꾸게 되는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된다.
단칸방에 부엌이 달린 조그만 집에 살던 그는 실수로 펄펄 끓는 물에 그만 빠지게 됐다. 서둘러 병원을 향했지만 심한 화상으로 병원에서조차 치료를 포기한 채 죽음을 기다려야만했다. 하지만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을까?
1년여의 꾸준한 치료와 아버지가 권해준 민간요법으로 다행히 죽음을 면했지만 그는 평생 잊지 못할 흉터와 그 보다 짙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화상의 흔적은 그에게는 늘 콤플렉스였다. 대중목욕탕도, 수영장도 어린 그가 가기엔 너무나 무서운 곳이었고 친구들에게 ‘얼룩소’라고 놀림 당하는 것도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던 그에게 한줄기 빛으로 다가온 것이 바로 불교였다. 중학교 시절 우연한 기회에 학교 참선반에 가입하게 된 그는 이 때부터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그에게 불교는 고상한 철학이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 하는 절박한 실존의 문제였던 것이다.
1972년 서울대 농화학과에 입학한 그는 그 해 농대 불교학생회를 조직했다. 또 서울대 불교학생회 회장을 맡으며 본격적인 불교의 사회참여 운동에 적극 나섰다.
불교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가 민중불교 이론을 주창하고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전서암이라는 가명으로 한국불교가 현실을 외면하고 산중불교 기복불교로 치닫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민중운동의 기수로 떠올랐지만 반면에 군사정권의 요주 인물로 낙인 찍혔다. 각종 시위, 집회가 있을 때면 그는 늘 사전검거 대상이었다. 남산 중앙정보부를 필두로 서울시내 대부분의 경찰서에 구금돼 취조를 받은 것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수행 통해 새 세계 눈 떠
이 때문일까. 아픈 몸으로 반강제적으로 입대해야 했다. 병은 깊어져 갔고 혹독한 훈련으로 늑막염이 생기고 폐결핵으로 악화돼 갔다. 결국 1년만에 의가사제대를 했지만 독한 약을 먹을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그의 몸과 마음은 가을 풀잎처럼 야위어 갔다. 생사의 갈림길에선 늘 죽음의 유혹을 느꼈지만 그는 그것이 비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에서 인간의 내면으로 관심이 옮겨온 것도 이 때다.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 속에서 그는 요가난다의 자서전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참선과 명상 등 수행에 무서우리만치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불교를 더욱 깊이 연구해야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81년 동국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러나 사회는 그에게 ‘운동권’이란 딱지를 붙이고 이를 통해 그를 감시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학생들 데모가 있을 때면 언제나 경찰서에 구금돼 조사를 받는 것이 일쑤였고 그럴 때면 피를 토하는 폐결핵의 고통을 다시 느껴야 했다.
세상이 싫었고 사람이 미웠고 자신이 한없이 혐오스러웠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82년 독일로의 유학은 그에게 일종의 탈출이었다. 돈 한 푼 없이 시작된 유학생활. 학비는 커녕 한 끼 식사 해결도 어려운 그에게 하루하루는 죽음을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다.
페터 노이야르와의 만남
이 때 절망의 깊은 수렁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페터 노이야르 선생이다. 그는 철저히 무소유와 계행을 지키는 그에게서 부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팔리경전을 모두 암송하는 페터 선생은 그에게 수많은 부처님 말씀을 들려줬다. 한 없이 뻗어있는 라인강의 강변을 함께 걸으며 그의 당부대로 팔리경전을 한글화할 것을 다짐했다.
굳건한 서원에도 힘겨운 삶의 무게는 줄어들지 않았다. 87년 친구 여동생과 자의반 타의반 결혼을 했고 아들도 낳았다. 단돈 50만원으로 시작한 결혼생활. 가난은 쇠사슬이 되어 온 몸을 조여왔다. 설상가상으로 관광비자로 입국한 아내의 체류기간이 말소돼 더 이상 독일에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89년 가족과 함께 귀국한 그는 먼저 일자리를 찾았다. 그는 초기경전의 번역을 지원하겠다는 돈연 스님과 함께 경전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7년 간의 독일 유학을 통해 수집한 번역 자료와 마지막으로 교정을 보던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경전연구소의 갑작스런 화재로 한 줌 재로 변한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잉걸불보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가난-고통, 벗으로 알고 산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나마 한 둘 있던 후원자도 없어졌고, 당장 번역사업을 추진하기란 불가능해졌다. 이렇게 몇 년이 훌쩍 지나가고 마침내 97년 한국빠알리성전협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광주 광륵사의 지원으로 다시 『쌍윳따니까야』 번역에 착수했다. 그러나 열악한 재정으로 빚만 쌓일 뿐 일의 진척은 없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IMF가 터지면서 그가 다니던 한국불교대학마저 문을 닫게 됐고, 또다시 끝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당장 먹을 것을 해결하기도 급급했다. 궁여지책으로 그의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하와이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처제에게 보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난과 좌절의 세월. 그러나 이도 그의 원력을 막을 수는 없었다.
번역 후원자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고, 일부 스님들과 불자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10여 년의 눈물겨운 노력 끝에 펴낸 것이 바로 『쌍윳따니까야』12권과 『맛지마니까야』 6권.
특히 『맛지마니까야』는 대한민국학술원으로부터 우수도서로 선정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내 삶은 덤으로 사는 거예요. 부처님 덕에 살아났으니 부처님께 회향해야죠. 지금 번역하는 니까야는 부처님의 원음이 생생하게 담겨있는 보물창고와 같습니다. 정말 주옥같은 부처님의 말씀들이 불자들의 삶의 나침반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계속된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오직 끊임없는 노력으로 부처님 말씀을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초기불교 통역관 전재성 박사. 가난과 고통을 벗 삼아 오직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은 그를 학자라기보다 수행자의 모습으로 먼저 와닿게 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02)2678-3372
권오영 기자
[출처: 법보신문 | 2004.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