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가 상좌 혜국에게***
“고독만이 공부의 대협조자”
사람 노릇 하려면 공부 못한다.
공부는 천대 받는 생활에서 시작된다.
고독만이 공부에 대협조자이다.
앉아서 졸지 마라.
고인의 걸식정신으로 담박생애 수연지족하고 한 생각만
일으켜도 화두간단 되거던 하물며 이야기하랴.
오직 최후까지 용맹심 이 대오로 위칙이니라.
참선 강조한 스승 일타
나태 경계한 격려 편지
용맹 정진으로 이끌어
1999년 11월말, 제주 남국선원에서 동안거 정진을 하고
있던 혜국(慧國)은 서둘러 하와이행 비행기를 탔다.
수행을 최우선으로 하는 혜국이 결제 중에 선방을
비우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이번만은 예외일
수밖에 없었다.
은사 일타(東谷日陀, 1929~1999)가 하와이에서 입적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혜국에게 있어 일타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명이 짧으니 당분간 절에 살아야 한다’는 부모님에 이끌려
절 생활을 시작한 혜국.
눈 감으면 떠오르는 어머니와 고향 생각에 슬며시 눈물을
떨구던 열세 살 소년에게 은사 일타는 늘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울타리였다.
일타 또한 어린 상좌 혜국을 향한 마음은 유별났다.
대강백이었던 일타의 스승 고경이 입적 직전 ‘물 건너에서
다시 태어나 오로지 참선만 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고
우연인지 혜국은 이듬해 고경의 생일날 ‘물 건너’ 제주도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일타는 혜국을 고경의 후신이라 믿었다.
그런 까닭에 계율은 물론 경전과 선에도 두루 밝은
일타였건만 혜국에게만은 늘 참선할 것을 강조했다.
유난히도 책을 좋아했던 혜국에게 일타는 “그 짓 그만두고
선방에 가라”거나 “참선만 해야지, 주지 노릇은 당찮다”라며
대중법회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참선 공부.
처음 혜국은 깨달음을 쉽게 생각했다.
며칠 용맹정진하면 깨달을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공부는 목숨을 걸 각오로
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단이 필요했다.
그것도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비장한 결단이….
연지공양(燃指供養). 매일 5000배씩 삼칠일간 참회기도를
드린 혜국은 1969년 은사 일타가 그랬듯이 손가락을 불살라
부처님께 바쳤다.
살이 타는 냄새가 해인사 장경각을 진동했고 혜국의
얼굴에서는 땀과 눈물이 비 오듯 흘렀다.
그 순간 일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나의 스승도 이러했으리라….’
다섯 살 어린 나이에 천수경을 줄줄 외워 ‘중새끼’라는
별칭을 얻었다던 스승 일타.
온 집안이 신심 장하기로 정평이 나있었고, 심지어 외증조
할머니인 평등월 보살이 입적했을 때는 7일간 방광을 했을
정도였다.
그런 돈독한 불교집안에 태어난 스승이 14세에 출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어쩌보면 당연했다.
통도사 강원을 졸업하고 자운율사로부터 율장을 전수 받은
동시에 전국의 제방선원을 두루 거치며 화두일념으로
참선정진과 중생교화에 매진해 왔던 선승.
1954년 여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매일 3000배씩 일주일간
용맹정진 했던 스승은 반드시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다짐하며 손에 붕대를 감싸고 기름을 먹였다.
그리고 『능엄경』의 연비(燃臂) 구절을 떠올리며 마침내
오른손 열두 마디에 불을 붙였다고 했다.
‘내가 열반한 뒤에 어떤 비구가 발심하여 결정코 삼매를
닦고자 할진대는 능히 여래의 형상 앞에서 온몸을
등불처럼 태우거나 한 손가락을 태우거나 이 몸 위에
향심지 하나를 놓고 태우면 내가 말하는 이 사람은
비롯 없는 숙세의 빚을 한 순간에 갚아 마치리니 길이
세간을 멀리 떠나 영원히 모든 번뇌를 벗어나리라.’
‘나 또한 이 생명을 다 바치더라도 반드시 깨우쳐 모든
번뇌를 여의리라.’ 연지공양을 마치던 날 맑은 하늘에
비가 왔다던 은사의 말처럼 혜국의 손가락이 타고 뼈만
앙상하게 남을 무렵 푸르던 하늘에서 맑은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 후 혜국은 스승이 연지공양 후 6년 동안 서슬 퍼런 정진을
했다던 태백산 도솔암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혜국은 참으로 치열하게 정진했다.
깊은 산속 암자에서 홀로 생쌀과 솔잎을 씹었고 수마(睡魔)를
물리치려 장좌불와를 고집했다.
그럼에도 밀려드는 졸음에 대들보에 줄을 묶어 고개를
집어넣기도 하고, 물을 가득 부은 두툼한 쇠발우를 머리 위에
얹은 채 고독한 투쟁을 계속했다.
혜국은 태산 같은 의지로 밀어붙이고자 했으나 화두는
미꾸라지마냥 이리저리 빠져나갔고 망상은 도가니 속의
쇳물처럼 들끓었다.
그는 깊은 우물 속으로 떨어지는 조약돌처럼 절망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쇠발우의 물을 쏟기는 여전했고, 수마는 정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난공불락의 요새 같았다.
혜국은 좌복에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생사진로 벗어남이 예삿일이냐, 척량골 바로 세워 부닥쳐
보리라. 사무치는 뼈 속 추위 겪지 않고서, 코를 쏘는 매화향기
어찌 맡으리.’
망상과 피눈물 나는 투쟁을 하던 중 문득 한 생각이 스쳐갔다.
‘파도와 바다가 하나이듯 중생과 부처가 하나다.
파도를 없애려면 바람을 잠재우면 되듯 망상을 없애려는
것은 무모하다. 망상 하나하나를 화두로 바꿔 나가야 수행이
제대로 되고, 그럴 때 망상이 부처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화두일 것이다.’
한 생각 돌이키자 화두가 들어왔다.
그제서야 왜 스승이 “세속의 공부는 별 이익이 없다”고
했는지도 비로소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화두가 성성해지자 시간은 이미 의미를 잃었다.
하루 종일 앉아있어도 머리 위 쇠발우에서는 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고, 거센 수마의 공세도 더 이상 그를
옭아맬 수 없었다.
그렇게 2년 7개월, 산을 내려온 혜국은 전국의 선방을
떠돌며 정진을 계속했다.
하지만 조금씩 세월이 흐를수록 내심 ‘이게 깨달음의
경지 아닐까’ ‘이만큼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아상과 나태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 무렵인 1976년 가을 은사 일타에게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정성이 오롯이 담긴 글, 공부는 고독과
천대 받는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스승의 자비로운 질타였다.
그런 스승의 극진한 배려 앞에 혜국은 다시 용맹정진을
다짐하며 깨달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그 스승이 입적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혜국은 일타의 세연(世緣)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몇 해 전부터 연지공양을 한 오른손 끝에서 생사리(生舍利)가
나오기 시작한 것을 비롯해, 특히 얼마 전 당신의 목걸이와
함께 건네준 편지 때문이었다.
진실한 말로 내 그대들에게 전별을 고하노라.
파도가 심하면 달이 나타나기 어렵고
방이 그윽하면 등불이 더욱 빛나도다.
그대들에게 마음 닦기를 간절히 권하노니
감로장을 기울어지게 하지 말지니라.
혜국과 몇몇 상좌들에 둘러싸인 은사 일타는 “미국에서 태어나
학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와서 출가하리라.
그래서 부처님과 같은 대도(大道)를 이루어 일체중생을
제도하리라”는 말을 남기고 고요함에 들었다.
낡은 옷과 그 옷만큼이나 주름진 육신 그리고 열두마디
손가락이 불살라진 뭉뚝한 오른손.
혜국은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라고 늘 강조했던 스승,
그는 사바세계의 청초롱한 연꽃이었고 삶 자체가 법공양이었다고
생각했다.
혜국은 먼 훗날 스승 일타가 제자의 모습으로
다시 올 것을 믿는다.
그 때에는 자신이 눈 밝은 스승이 되어 제자에게 바른 길을
일러주리라.
자신의 스승 일타가 그러했듯이….
이재형 기자
<2005-07-27/813호> [법보신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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