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법화경종요』로 본 일승통일
1. 머리말
2. 『법화경종요』의 일승
3. 일승의 실행
4. 맺는 말
1. 머리말
원효의 『법화경종요』에 관한 연구는 열 편 정도의 논문이 알려져 있고 이 글
들에 대해서는, 가장 최근의 「법화종요」연구로서 1997년의 불교학회지에 실린
「법화종요의 교리 체계」라는 글머리에서 모아서 소개하고 있다. 관련한 연구들
에 대한 상호의 관심이 모아지고 평가되면서 정립되어 사람들의 실용세계에 효
율적으로 지원되고 결실로 빛날 날을 기대해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초작업을 외면하고 어른의 지혜를 곁눈질로만 훔쳐온
것도 사실이다. 대개의 불교관계 업적들이 그렇듯이 원효의 「법화종요」도 여태
한문으로만 전해져 글이 늘 생경하고 맛이 얼어있다. 더러는 빠진 글자와 오랜
세월에 잃어버린 문단을 두고도 약간의 시도만 있었을 뿐 방치해 오고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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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1) 元曉의 r法華宗要』는 저술의 명칭도 r東文選』(서울태학사 영인본,1975) 제 3권에서는
r法華經宗要』 「序」라 하여 '經' 자를 잦추었고, 初述大意만을, 잃은 글자없이 보전하고 있다. (p.91이하), 『新修藏經』(『대정장』 34. p.810이하)에서는 제 6, 消文義의 마지막 단원이 빠진 二和寺 장본이란 걸 실었고, 동국대학교의 『韓國佛敎全書』에서는 이에 『동문선』 등을 참조 하여 보정작업을 더했다. 『불교전서』의 예로 보면 심한 경우, 제 1대의에서 15字 6行의 90字 중에서 9字가 빠지고 없기도 하다.
#058
이 글의 경우에도 연구는 커녕 원안마저 채 갈무리되지 아니한 상황에서 뿌리
인지 줄기인지를 마음대로 뜯어내어 나라의 통일이론으로 다급히 짜맞추기란
여간 주저되고 외람된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논문의 기준도 학회의 요청인 남
북통일이라는 현실의 기능에 맞추지 못하고 교리일반의 일승개념에 따라 통일
의 문제를 부응하기로 하였다.
2. 「법화경종요」의 一乘
「법화종요」는 첫머리의 대의부분에서 '법화경은 삼세의 여러 부처가 세상에
나타난 큰 뜻을 담았고 여러 중생이 하나의 도로 들어가는 큰 문(弘門)이라'고
했다.2) 도가 무엇이며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중생과 하나
인 도와의 접점에 있음직한 큰 문이요 여러 중생을 하나의 세계로 인도하는 일
에 본분을 둔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로 가는 큰 문을 찾고자 우선 「법화종요」,
의 대강을 보고자 한다.
『법화종요』는 제 1 대의(大意), 제 2 경종(經宗), 제 3 전용(詮用), 제 4 제명
(題名), 제 5 교섭(敎攝), 제 6 문의(文意)의 여섯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3)
제 1의 대의에서는 앞의 소개처럼 「법화경」이 부처출세의 큰 뜻을 전하며 여
러 중생이 하나로 가는 큰 문이라 하고, 특히 크다(廣大)와 깊다(甚深)라는 말
로서 대의를 강조하고 있다. 글이 교묘하고 뜻이 깊어서 실상과 현상계를 두루
하며, 크고 깊기에 둘도 없고, 다른 법도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둘도 없다는 말
은 부처의 하나의 큰 일(一大事因緣)4)을 지적한 것이고, 다른 법이 없다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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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불교전서」 1책, p.487c. "妙法遺華經者 斯乃 十方三世 諾佛出世之大意 九道四生 滅入 道之 弘門也."
3) 6개 항목의 목차를 제시하는데 항목마다 述, 辨, 明, 釋, 題의 일을 말하나 마지막 항목에서는 '消文義' 라고 한 바, 『大慧度經宗要』의 예와 같은데, 이 술어를 통한 원효의 의도를 찾는 일은 6항의 본문을 찾는 일과 함께 기초과제의 하나이다.
4) 「법화경」 「방편품」본문의 제불(諸佛)출세(出世)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말한다.
#059
것은 삼승의 평등과 동일을 말함이며 이들 두고 짚고도 묘한 것이라고 말한다
는 것이다.
제 2장은 경종(經宗)이라는 항목으로 다루고 있다. '법화경의 종요' 라는 뜻이
다. 곧 「법화경」은 넓고 크고 깊은 '일숭의 실상'을 으뜸(宗)으로 삼는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어른은 경의 으뜸인 일승실상을 실체나 법체라 하지 않고 경
종이라 표현했다. 그렇다고 해서 원효가 실체에 대해서 무심했다는 말은 아니
다. 스스로 「법화론」의 체법(體法)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법(理法)이 둘이 아닌
것을 체법이라 하고 둘이 아니라는 것은 무량법이 곧 일법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일승법을 지적하고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실상을 존재론적 실
체개념이 아니라 경전이 지향하는 실행적 요구로서의 으뜸원리(宗要, 宗旨) 정
도로 본 것이다.5)
원효가 흔히 쓴 '종요'라는 말은 그냥 '줄거리'라는 뜻에서 나아가 '높은 줄
기, '향해가는 줄거리' 등으로 새겨 체법 아닌 용법적 관심에서 본 바로 이해
된다.
그래서 일승실상의 원리는 인간의 문제이자 현실의 문제로 전개되어, 주체로
서의 하나인 인간(一乘人)과 인간이 나아갈 바 하나의 길인 일승법(一乘法)으
로 나누어 풀고 있다.
먼저 일승인의 범주에는 3승인과 4아라한과 4생(四生) 등이 모두 보살로서
또는 불성(佛性)을 지닌 자로서 이에 포함되며, 인간과 천상의 무리마저도 일승
인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에서도 원효는 '크다' 와 '깊다' 라는 표현을 붙이고 있
는데, 부처의 제자 아닌 이가 없으니 큰 것이고, 중생의 세계가 곧 열반의 세계
가 아닐 수 없으니 같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중생계를 떠나지 아니한 여
래장이기에 중생을 일승인이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길은 하나의 이법(理法)과 교법(敎法)과 인연(因綠)과 과보(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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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천태학에서는 경전의 철학적 원리를 經體라 하고, 『법화경』의 경체는 一乘實相이라고 한 대신, 인과의 실천원리를 經宗이라고 했다.
#060
報)의 넷으로 설명한다. 진리를 인간의 실행문제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첫째 하나의 이법이란 쉽게 말해서 하나의 도가 있는 세상(一法界), 또는 세상
에는 '하나의 도' 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여래의 법신이든 여래장이라고 하던
간에 하나의 도는 일체의 중생이 공유하여 있고 따라서 일체의 중생을 하나의
세계로 성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는 하나만의 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
나의 도리, 하나의 세계만임에도 불구하고 여래가 3승법을 말한 까닭에 대해서
는 세상의 차별, 사람의 차별을 보여준 것이며 도리의 차별이나 행법의 차별을
말한 것은 아니라고 밝힌다.
부처의 법이 달리 있고 진리의 세계가 달리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이 각각이
어서 다르게 말했다는 것이다.
즉 부처가 삼승법을 말한 것은 중생의 바탕을 셋으로 본 것이지 법을 셋이라
고 한 것은 아니며, 법신은 평등이며 중생이 평등하게 지니며 중생을 평등하게
근본으로 실어다 준다. 이러한 법을 일승의 본성이라 하고 일승의 이법이라 한
다고 했다.6)
둘째의 하나의 교법이란 성도에서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말씀이 모두를
일체지(一切智)에 이르게 하는 하나의 같은 말로서 일송을 위함으로 시방삼세
에 두루하여 크고 넓으며 깊고 깊은 한 맛 한 모습이므로 하나의 교법 이라 한다
는 것이다.
셋째 하나의 인연이란 본성의 인연(性因)과 작위의 인연(作因)으로 가르는데
본성의 인연이란 중생이 본성중에 간직한 오도(悟道)의 성품(佛性)으로 말미암
아 마땅히 성불하리라는 근본적인 가능태로서의 인연을 말하며, 작위의 인연이
란 자비나 원력과 같이 일체의 작위와 작선(作善)이 하나의 실상에 바탕한 하
나의 인연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방편품」에서의 말처럼 산란한 마음으로 어쩌다가 흉내
삼아 '나무불'이라고 말했을 지라도 불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하나의 근본인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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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국불교전서』1책, p.488b, "如來說三乘者 是地差別 非乘差別 說人差別 非乘差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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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으로 돌아가는 원인이 되므로 일승의 인연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하나의 실상에서 일체를 구하니 큰 것이요 끝까지 하나로 이루니
깊고 깊은 하나의 인연이라고도 했다.
마지막의 일승관보에 대해서 도 본유과(本有果)와 시기과(始起果)로 갈라 말
하는데 본유의 과보란 법신보리로서, 법신은 실체가 있는 게 아니므로 실상이
아니고, 그렇다고 없다고도 못하므로 허상도 아닌- 그러한, 유무(有無)가 아
니기도 하고 상즉하기도 하면서 불생. 불생멸 등 언표의 밖에 있는 실상보리라
고 했다.
이러한 경우 불전에서는 묘한 표현을 보게 된다. '진리의 말이 아니므로 같지
아니하고, 세속의 말이 아니므로 다르지 아니하다'는 말이다. 진언(眞言)은 하
나이고 속어(俗語)는 늘 여러 가지로 다르다는 뜻이다. 말을 보태면, 말은 진리
가 아니기에 하나이지 못하고, 그런가 하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은 세속적인
말의 세계가 아니므로, 상대적이고도 현상적인 말의 세계와는 달리, 다르지 아
니한 하나의 세계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시작의 과보란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의 보리로서 시간적인 생성
점을 갖는 완성과보를 말한다. 그런데 어떠한 중생일지라도 만행(萬行)의 수
행으로서 이러한 과체(果體)를 성취할 수 있으므로 하나(一乘)의 과보라고 이
름 했다.
이렇게 일승- 하나의 법을 이법 등의 넷으로 본 것도 결국은 하나의 큰 일
의 내용인 개시오입(開示悟入)에 해당하는 넷으로 보인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
음 장에서 언급한다.
경종에 이은 제 3 전용(詮用)이란 용법. 작용 등의 뜻이다. 본문에서는 '여러
보살의 깨달음이 다 『법화경』에서 나온다. 방편의 문을 열어서 진실을 풀어내는
일은 『법화경』이 지닌 빼어난 작용(勝用)이다'라 하고는 그 작용을 나누어 개
교(開敎)와 시교(示敎)로 설명한다. 곧 3승의 방편문을 여는 개교와 일승의 진
실상을 보여주는 시교의 둘을 전용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본 경의 표현으로는 제불출세의 큰 인연을 개교와 시교에 이어 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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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悟道)와 입도(入道)의 네 가지로 말하고 있으나 「종요」에서 뒤의 둘을 거론치
아니한 것은 경전의 작용 아닌 중생의 수행과 성취의 소관으로 남겨 준 탓이 아
닐까 한다.
네 번째 제목의 해석에서는 묘법의 의미를 교묘(巧妙), 승묘(勝妙), 미묘(微
妙), 절묘(絶妙)의 넷으로 나누어 풀고 있다. 즉 묘법을 개시오입의 일대사의 인
연에 따라서 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처럼 원효는 네 단계의 이론구조를 거듭하는데 앞서 경종의 문단에
서도 일승법을 해설하면서, 일승인이 타는 수레는 크게 보아 네가지로 되어 있
으니...7) 라고 했듯이, 여기에서도 중첩된 4단 해설을 하고 있다. 즉 위의 4묘에
대해서 다시 네 가지씩의 해석을 부연하는 데 교묘에 대해 ① 「법화경」은 교묘
히 방편의 문을 열고 ② 교묘히 3승의 접착을 없애며 ③교묘히 진실상을 보이
고④ 교묘히 하나의 지혜를 일으킨다라고 새기듯이, 거듭된 네 가지 일(開示俉
入의 四事)의 구조로 풀어 헤치고 있는 깃이다. 물론 승묘와 미묘와 절묘에 대
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마지막 절묘의 경우에는, 구경의 일승에 오입(悟入)한 경 계를 ① 광대,② 심
심,③ 이언(離言), 멍 절려 (絶慮)의 순서 로 네 가지 일의 과정으로 연출하고 있
다. 원효는 옅반의 성취, 곧 4성제의 멸제(滅諦)를 말을 여의어 가는 오도로의
진입과정으로 보고, 따라서 사고와 언로(言路)가 끊어진 채로 현행하는 일승실
상을 입도(入道)의 경계로 보아 일승의 행도로 설정하고자 한 의도있는 논리의
구축으로 보아진다.
이로서 원효는 네 말수레(四馬一乘)8)와 같은 표현의 틀 속에서 무엇인가를
담고 있는 듯 하다. 물론 네 마리 말이 하나의 실상을 실은 한 수레(一乘)을 이
끌 듯이 '넷' 이라는 법수(法數)의 해법은 아마도 원효의 법화경관에 뿌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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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국불교전서」1책, p.488b. "此一乘人 所乘之法 略而說之 有四種...."
8) 『한국불교전서』 1책, p.490a "猶如四馬 更互相應 共作一運 故說四馬 名爲一乘當知 此中道理 亦爾."
#063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네 말수레의 넷의 일은 곧 「법화」 본경에서 말한 세존 일대사인연
의 개교(開敎), 시교(示敎), 오도(悟道), 입도(入道)의 네 가지 일이기 때문이다.
중생을 마주하여 건너 볼 때에는 이법이지만, 중생과 함께 한다면 개교가 되고,
중생을 가르친다는 교법이지만, 그것은 곧 실상의 교시이며, 인연은 성취의 원
인이며 도(道)와의 접속이고 과보는 도에 들어있는(入道) 일승의 실상세계를
말할 따름이다. 그러니 이법의 개교 교법의 시교 인연법의 오도, 일승과 법에로
의 입도가 격조를 맞추어 짝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니 경문자체를 논리적으로 풀거나 부연하지 아니하고, 경전을 신뢰하고9)
경문에 따라서만 자기논리를 전개했던 원효로서는 『법화경』의 사상기반이 일대
사의 네 가지일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종요』
에서 중층적 4법의 법수로 이론을 전개한 것은 아닐까 한다. 불교교리의 근본이
4성제라고 하듯이 원효의 묘법해석은 일승 4법의 크고 깊은 전개와 회귀 그리
고 4제적인 분석과 비유를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제 5의 교섭(敎攝)이란 「법화경」이 교의적으로 요의(了義)와 불요의
(不了義)의 어느 쪽에 속하는 가를 다루고 있다.10) 물론 「법화경」은 요의경이라
고 결론하지만, 여기서 보게 되는 원효의 특징은 모든 경설이 타당하리라는 전
제에서 출발하여 그 근거를 밝혀서 일체간에 화통하게 한다는 점이다. 본문의
예로 '두 주장이 서로 다르니 어느 쪽이 사실이고 좋은 것이냐' 라는 질문에 대
해 '모두가 경론이거늘 어찌 참되지 않은 게 있을까... 다 중생의 근기에 맞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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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 예로 중요의 본문 중에서 『법화경』의 우열을 논하는, 때로는 상반되기도 하는 여러 경론의 주장에 대해서 '皆是經論 有何不實'라는 견해표명이다. 경전 뿐만이 아니라 논서마저도 함부로 삿대질을 않으려는 조심성이 보인다. 바로 신행의 세계이자 그의 사상의 한 단면일 것이다.
10) 『법화종요』에는 두 가지 교판설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교판설을 기준하여 경전의 우열을 논하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고 자신의 교판설을 내세우지도 아니한다, 다만 경전의 포용적인 해석 쪽에 동의를 표할 따름이다. 따라서 이 부분을 근거로 한다면 원효의 교판설에 대한 논의는 재고되야 할 것이다. 교판설이 自是他非의 근거가 되든 경전의 해석구실을 하건간에 원효의 거론이 아닌 주장이거나 사상으로서는 걸맞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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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따로 조화와 통달을 도모한 탓이다' 라고 화답하고 있다.
또한 「해심밀경」을 인용하여 일체의 성문과 연각과 보살이 '한가지로-모두
-함께-하나로(同皆共一)' 청정한 묘법에 같이 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경종으
로 삼는다 라고 했다. 원효의 의도는 '한가지-모두-함께-하나로'라는 말
속에 '한 가지의 이법과 모두의 교법과, 함께 하는 온갖 일로 하나의 과보'라는
실상의 세계를 담아내려 한 듯 하다.
3. 一乘의 실행
『법화경』의 종요는 일승실상이다. 다시 말해 원효의 『법화종요』라는 글은 하
나의 실상을 논술한 글이다. 원효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보면 '이 경전은 바로
광대하고도 심심한 일승실상을 경종으로 삼는다'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크다
(광대)와 깊다(심심)라는 두 수식적인 표현으로 일승실상을 정의하는 데모든
불자가 부처의 진리를 이을 것이므로 또는 모든 이가 부처의 제자이므로 '크
다'라 하고 중생의 세계가 곧 열반의 세계이기에 또는 중생계를 떠나지 아니한
터에 여래장이 있기에 '깊다' 라는 말을 쓴다고 했다.
결코 잠정적이거나 미완의 상태거나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영원히 완성자인
하나의 실상이 『법화경』의 핵심내용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일승실상이라는 표
현에서 하나로 완성된 통일조국의 미래를 연상함직하고 그 실상의 이론체계에
서 통일의 원리나 이념을 탐색할 만도 하다. 그래서 원효의 논리를 따라 일승실
상의 참의미와 길을 담아내 보고자 한다.
앞의 『종요』에서 본 바로, 일승실상의 실행주체는 일승인이라고 이름했지만
그 내용을 보면 성문 연각 보살의 3승인과 4아라한과 4생(四生)이며 심지어는
인간과 천상의 무리마저 포함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4생과 인천(人天)의 무리
를 지적한 것은 일체에 대한 포괄적 의미로, 그리고 4아라한은 수행의 수준이나
경례에 따른 차이로도 이해할 수 있으나, 삼승이야 말로 중생과 중생의 삶에 대
#065
한 질적인 차이를 말한 게 아난가? 그럼에도 하나의 중생이라 한 사유가 궁금
하다. 이에 대한 『종요』 속의 정답은 사람이 각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각각인
사람이 한편으로는 여래장을 공유한 한 가지 사람, 곧 일승인이기도 하다는 2중
성(二重性)을 보인다. 그래서 이 2중성을 풀기 위한 부사의의 열쇠가 이법이요
묘법이라는 부사의의 중복일 따름이요, 오히려 혼란에 가깝다. 그러나 무엇으로
표현하건 여기에는 인간을 대단한 것으로 보려는또 하나로 보고자 하는 의지
와 의도가 있다. 그것을 원효는 크다.깊다'라고 한 것이다. 그는 크기에 모두
요 깊기에 하나라고 했다. 모두는 커서 이루 헤아릴 수 없고 하나는 깊어서 말
을 가지고는 들어갈 수 없는 경지이기에, 묘법을 일대사의 네 가지 일에 맞추는
중에서 도 오도(悟道)와 입도(入道)의 경지를 광대(廣大) 심심(甚深)에 이어 말
을 떠난(離言), 또 생각이 끊어진(絶廬) 경지라고 적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효의 인간관은 일승이나 삼승같은 데 있는 게 아니라 차라리 인간
을 크고 깊은 것으로 본 데에 있다고 해야겠다. 이 말은 인간을 가장 윗자리에
두고자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일승인이다. 원효가 말하고자 한 일승의 이념이
나 실행은 여기에서 비롯하게 된다. 즉 인간을 최고의 위치에 두고 차별화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일승실상을 실현하는 일승인이 되는 길인 것이
다. 이러한 뜻은 종요의 앞부분에서 r법화경의 대의를 말하는 데서 부터 볼 수
있는데11) 둘이 아니다(無二)라고 함은 오로지 하나의 큰 일을 말한다 라고 하여
중생을 전제한 큰 일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것이 없다(無別)라
는 뜻은 삼승이 평등하다는 뜻으로 삼승과 삼승인이 모두 같다라는 뜻이라고
거듭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원효의 『법화종요』의 현존문서 에서 찾아 본 '크다. 깊다'라는 말과
의 관련내용을 보면, '크다'라는 쪽으로 ① 부처의 제자 아닌 이는 한 사람도
없다, ② 이 교법은 무량무변하게 두루 통한다, ③ 모든 선근은 부처성품에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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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한국볼교전서』 1책, p.487c. "理深泰者 無二無別也... 言無二者 唯一大事... 行無別者
種平等 諸乘諸身 皆同一揆...."
#066
왔다,④사람마다4법으로 인연화합한다' 등이고,12) '깊다'라는쪽으로는, ①중
생계가 곧 열반의 세계이다, ② 한 말 한 마디가 한 모양 한 맛이다, ③ 한 근본
으로 돌아간다, ④다시 지나치거나 느는 법이 없다' 라고 한 일승법의 수식들인
데, 줄여서 말한다면 교법과 인연법을 '크다'라 하고, 이법과 과보법을 '깊다'
라고 한 것으로 갈라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일승실상의 실행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핵심 적인 내용은 역시 네 말수
레(四馬一乘)의 운행이다. 일승인에 의한 이법과 교법과 인면과 과보의 4법 증
에서 완성과보인 일승파보와 관련한 『종요』에서의 설법은 상식의 미망함에 일
침을 가한다.
바로 대운(大雲) 보살이 미래세의 박복한 중생을 위하여 일승법의 설법을 청
하자 '어찌 미래에만 치우치리오 삼세를 두루하리라'는 대답으로서, 법륜은 삼
세에 두루한다는 진실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곧 미래세의 성불이라 할지라도 오로지 하나인 일승실상의 완성법이므로 과
거나 현재라 하여 미완이거나 부족한 상태로 남거나, 또는 과거로서 사라져 버
린다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중생의 미망심이 만들어 낸 차
별의 삼세일 뿐이기 때문이다. 완성은 시간마저 완성하는 법이다. 과거도 미래
도 현재도 하나의 일승시간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원효는 이를 '옛날의 소원을 이미 만족했기 때문이다' 라고 표현했다. 이것이
일승의 과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머리를 현실의 통일문제로 나가보면, 법신보리의 기준에서 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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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한국불교전서』 1책,
① 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斯則無一衆生 而非佛子 所以廣大 此衆
生界卽涅槃界 是故甚深(p428b).
② 是故遍通 十方三世 無量無邊 所以廣大 故一言一句 皆爲佛乘 相一味 是故甚深(p.488c).
③ 若凡若聖 一切衆生 內道外道 一切善根 皆出佛性 同歸本原 如是本來 唯佛所窮 以是善
故 廣大是探(p.489b).
④ 人人四法 因緣和合 遠離諸邊 不可破壞 除此更無 若過若增 如是名爲 廣大甚深 (p490b).
#067
민족의 뿌리로서 일관되게 하나인 나라와 겨레의 실상이 통일이다. 그런가 하
면 보신과 화신의 기준에 맞추더라도 미래의 통일이거나, 염원 속의 통일이거
나 아니면 잠정적인 통일의 정황일지라도, 그것은 완성된 통일의 실상으로 우
리와 함께 하는 진실일 수밖에 없다는 말로도 들린다.
그리고 일승법의 네바퀴가 서로 상응하여 일승인을 일승으로 성취한다고 말
하나, 미래의 일승과보는 어디까지나 미래의 한 마리 말이거나 바퀴에 불과하
며 현재는 역시 현재로서 한 쪽이 기우는 세 말의 수레일 뿐이지 않은가라는 질
문을 벌이고는 다음의 네 가지 대답을 늘어놓는다. 이른바 네 말 운행(四馬共
運)에 관한것이다.
1)은 사람들이 현세의 사악에 물들어 선근종자가 시든다고 하더라도 이에 웃
도는 과보불(네 말 수레)의 가피력이 자비심을 일으킨다.
2)는 현재의 중생이 간탐 등에 헤맨다 하더라도 과보불의 네 말수레가 화신
(化身)으로 현응(現應)하여 교화한다.
3)은 지쳐 좌절 포기 한 상태라 할지라도 수기(授記)에 따라 당연히 보리를 이
룬다.
4)는 일승과보의 일체종지(一切種智)는 '끝내 다하지 않는 법이 없고, 갖추지
아니한 덕이 없는 지혜인지라 능히 바닥의 중생을 실어 성취의 세계에 이른다'
고 하여, 앞서 본 시 간의 완성에 이어 ①가피력, ②감응, ③수기 ④일체종지
의 넷에 의한 네 말 운행설로서 일승법의 실행을 구제화하고 있다.
크게 보아 과보불의 시간의 완성과 한 맥락이라고도 하겠으나, 이미 바닥의
중생심에 각인된 행여라도 하는 일심의 마지막 의지처를 중생다운 마지막 몸부
림의 근원에 일치시켜 일체화한 자각적, 논리의 침투가 네 말의 기본구조가 아
닌가 한다.
만약에 기대함직한 미래상황의 현재적인 효능을 민족의 통일과 결부하여 생
각할 때, 통일은 역사와 국제사회의 질곡에도 불구하고 당연시 되는 어쩌면 운
명과 같은 일치된 목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국민 모두의 이상이자 삶의 좌표로서 자각되어지고 따라서 그러한 이상
#068
이 현실을 조정하고 통제하는 현응의 기능은 필연일 것이며, 역으로 말해 현재
화할 수 있는 통일의 기능과 효과로부터 통일의 과업은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분단국가는 통합을 완성하고, 혼합국가는 분리독립하는 새
로운 역사의 괘도를 가고 있다. 우리도 통일에 대한 역사의 수기를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당장에 일체종지와 같은 중생의 역량과 지혜를 창출한 역사개
혁의 초석으로서, 일승인으로서의 신념과 네 말수레의 현실석 효과를 통일을
충족시키는 근본으로서 확인하여 갈 때, 비로소 일승의 실상은 한 수레 말로서
의 몫을 맡아가게 될 것이다.
'네 말 한 수레'에 이은 일승법의 용법은 '네 가지 승용(四種勝用)' 이라는 것
이다.13) 『종요』의 전용(詮用)에서 개시법(開示法)을 밝히는 마지막 합명개시(合
明開示)에서 개법의 삼승과 시법의 일승관계를 네 가지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회삼귀일(會三歸一) 등으로서 분리된 셋과 통일된 하나와의 관계설이
라고도 할 수 있겠다.
간추려 보면 1)은 삼승의 교법이 그대로 일승의 교법으로 된다,2)는 삼승의
중생이 더불어 일승의 과보에 이른다,3)은 삼승의 인과가 모여서 일승의 이법
이 된다,4)는 삼송각별의 집착을 깨면 일승이 된다는 것이다,
먼저 개시법에서 일승의 진승(眞乘)이 3승을 강제하지 않고, 오히려 3승의 개
교가 일승의 개시를 선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는 통일이라는 목표
설정에 앞서서, 분단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파악과 각성이 통일의 전제가 되어
야 함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교법이란 본래 중생의 근기에 순응한 것이므로 분단사회의 현실구조
와 가치체계가 일승통일의 체계로 연장되기를 바란다. 그런가 하면 분단의 각
주체들이 통일의 이익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하며, 분단역사의 인과관계가 통일
의 이념적 근본이 되어야 할 것이며, 분단에 고착하려는 이익집단은 해체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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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第三合明開示用者.開示中合有四義 一者用三 爲一用前三乘之敎 卽爲一乘敎故, 二者
將三致一 將彼三乘之人同敎 乘果故, 三者 會三歸, 會昔所說三乘因果 還歸於本乘理
故. 四者破三立一 破彼所執 三乘別趣以立同歸乘義故, 此經具有 如是 四種勝用."
#069
야 한다는 등의 의미로 새겨볼 수 있겠다.
일승법이 네 말한 수레 또는 일대사의 네 가지 일로서 운용되듯이, 통일은 비
록 어떤 주체에 의해서 강제된다 하더라도 그 기능은 바닥세력의 크고 깊이있
는 응집에 의해서만 효력을 갖기 마련이다. 그런가 하면 분단은 대규모 이익집
단의 갈등에서 비롯하기에 특히 분단의 이익에 고착하는 것과 같은 삼승 각별한
집착은 우선적으로 해소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삼승의 중생이 평등히 일승
의 과보에 이르러야 한다고 했다. 똑같이 모두에게 좋은 과보 그것은 결국 일승
실상의 경계이다. 삼승 모두의 모든 인과가 모아져서 개시되어 투명하게 일승
실상의 이념으로 신목(神木)처럼 솟았을 때, 그 현실은 똑같이 좋은 과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맺는말
원효의 『법화종요』에는 하늘같은 명령이 있다. 곧 '사람에 맞추어라'는 말이
다. 관련된 글부분을 그대로 뽑아 옮겨본다.
"모든 일이 사람의 근기에 합당하면 저마다 화통하게 된다(皆當物機 各得和
通). 도리를 따져보면 한 쪽은 뜻이 좁고 모자라는 이들이고(若就道理 判其勝負
者, 彼師義狹而且短) 두 번째의 사람들은 뜻이 너그럽고 커서 , 폭이 좁고 모자
라는 글들을 감싼다. 글 폭이 좁으면 뜻이 상하지도 않고 쉬이 모아진다. 이런
까닭에 너그러운 쪽이 좋다(第二師 義寬而復長... 用寬長義 容短狹文 文狹則無
傷義則易會 由是道理 後說爲勝)"라는 글이다.
한마디로 사람을 위해야 진실이 된다. 사람의 근기에 맞추면 평화와 통일도
얻을 수 있다. 그렇지 않는 한 다투고 힘이 지배하기 마련이다. 이제 힘의 수단
이 군대 아닌 경제와 정보로 옮기고 있을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원효가 『종요』
에서 말한 성문승의 성불하지 못하는 까닭 세 가지를 소개하고 이 글을 맺을 까
한다.
① 천성이 열악하여 ② 자비심이 박약하여 ③ 힘든 일을 두려워하여 라는 세
가지 탓으로 일승실상에 들지 못한다는 방편법문이다. 그러나 끝내 일승 통일
의 의미가 역시 생소하듯이 사람의 눈앞에 주어질 통일의 의미는 어떤 모습일
까? 쟁의 때의 실력행사도 시위로 얻은 집단이익도, 아니면 자본시장의 장악,
아니면 미래라는 이름의 사회는 흔한 말로 정보 문화와 생활의 공유로서 의미
지어지는 통일일까? 현실로서의 통일은 어떤 모습으로 구상하고, 또 어떤 가닥
의 이념이 가치와 기능으로서 움직이고 통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원효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틀림없이 『법화종요』의 이론구성이 늘 그랬듯
이, 통일의 길은 개방적이고(開), 진실이 살아나고(示), 모두의 자각이 선도되고
(悟), 통일의 실상을 체험하도록(入) 실현되어야 한다고 일대사인연설(一大事
因緣說)로서 대답할 것이다.
불종사 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01193704043/12410975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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