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통해 본 一心의 원리
은정희*
1. 일심의 원리를 찾게된 사회적 및 교학적 배경
2. 생멸 즉 현상의 세계
a. 불각의 현상
b. 각으로의 환원
3. 진여 즉 본체의 세계
4. 생멸․진여 불이의 근원으로서 一心
1. 一心의 원리를 찾게 된 社會的 및 敎學的 배경
元曉가 그의 학문 연구의 절정기에 달했던 新羅 社會는 초기의 護國佛敎가
圓光과 慈藏 등에 의하여 그 整地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으나, 여전히
고구려, 백제와의 영토 전쟁으로 사회적으로 혼란의 극에 처해 있었으며, 민생
은 계속되는 전쟁의 와중에서 매우 고단하게 영위되었던 때였다. 이러한 어려
운 사회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승려들은 出世間的인 이상 세계만을 추
구하느라 중생들의 世間的인 고통을 외면하였으며, 불교계는 왕실 내지 귀족
중심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元曉는 불교의 본래 목적인 중생 구제라는 대승 정
신에서 이탈하려 하는 당시의 불교 경향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인 생각을 가
졌던 것 같다.
드디어는 스스로 집필의 붓을 꺾고 지방의 촌락이나 街巷을 두루 돌아다니며
무애박을 두드리고,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도다."
________________
*서울교대 도덕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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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구절로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가무와 잡담 중에 불법을 널리 알려 일반 서
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처음에 그가 추구했던 出世間的인 眞如
의 세계에서 마침내 世間의 現象的인 것과 出世間의 本體的인 것이 둘이 아님
을 깨달은 데서 나온 것이었다. 이는 또한 그보다 1200년 전 브라만을 하나의 절
대적 진리로 상정하는 형이상학적 태도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 인간의 現實苦에
대한 해결을 우선적 과제로 삼았던 釋迦의 모습의 再發現이라고 할 수 있지 않
을까?
元曉가 世間的인 것과 出世間的인 것이 둘이 아님을 깨달은 그 깨달음의 문
제는 바로 마음의 문제며, 이러한 그의 사상적 기반을 집약적으로 대변한 것이
『大乘起信論』이라고 그는 보았다. 그의 『大乘起信論』에 대한 아홉 종의 연구 저
서 중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大乘起信論疏』를 통하여, 그는 世間的인
것과 出世間的인 것의 不二 관계, 즉 一心의 원리를 어떻게 규명하려 하였는가?
『犬乘起信論』은 6세기 초 인도의 불교학계에서 마음의 청정한 면(心眞如門)을
주로 강조한 中觀學派와 마음의 물든 면(心生滅門)에 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唯識學派와의 대립을 지양, 종합하여 마음의 청정한 면과 마음의 물든
면은 별개의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고, 서로 여읠 수 없는 不二 관계로서 결국
一心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음을 드러낸 불교학의 명저로 알려져 있다.
世間的인 것과 出世間的인 것이 둘이 아님을 깨달은 元曉에게 『大乘起信論』
이야말로 이 깨달음을 더욱 명료화하고 재확인하게 하는 최상의 적격서였음은
물론이다. 이리하여 현실적으로 사회 현상의 분열과 갈등 문제를 해결함에 있
어 이론적,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안내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르침을 만나게
된 元曉의 기쁨은 『大乘起信論』에 대한 주석을 통하여 유감 없이 발휘되고 있음
을 볼 수 있다.
2. 生滅 즉 현상의 세계
a. 不覺의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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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間的인 것과 出世間的인 것이 볕개의 존재가 아니고 양자는 서로 여읠 수
없는 관계로서 一心으로 환원될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밝히기 위하여, 먼저
世間的인 것, 즉 생멸 세계에 대하여 『大乘起信論』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보자.
『大乘起信論』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본래 깨달은 상태(本覺)로 규정한다. 그
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은 미혹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온갖 번뇌
망상에 시달리며 괴로워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원래 깨달은 상태에 있는
우리의 마음이 어째서 이러한 미혹의 모습을 띄게 된 것인가? 그것은 無明(근
본적인 어리석음)의 훈습 때문이라고 본다. 원래 자성이 청정한如來藏에 無明
이 훈습함으로써 生滅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데, 여기서 청정한 如來藏과 生滅
하는 마음이 화합하여 같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을 阿賴耶
識이라고 한다.1)
원효는 이를 고요한 상태에 있는 물이 무명이라는 바람에 불리워져 파도가
일어나는 것에 비유한다. 파도와 원래의 바닷물은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바탕이 물이라는 점은 한 가지이며 원래의 바닷물에 의하여 파도가 일어난
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자성이 청정한 如來藏과 생멸하는 마음의 관계도 이
러한 도리와 같다.2) 이것은 생멸하는 마음(심생멸)의 측면에서 보는 인간의 마
음이 미혹된 모습과 깨친 모습, 더러운 모습과 깨끗한 모습이 뒤섞여 있음을 뜻
하며, 따라서 이 아라야식에는 각의와 불각의 의 두 가지 뜻이 있게 된다. 不覺義
는 원래 청정한 자성, 즉 本覺(각의)을 가지고 있는 범부가 현실적으로 미망의
상태에서 헤매고 있는 상황을 의민한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 불각의에 세 가지 미세한 움직임을 가진 마음상태인
無明業相, 轉相, 現相의 三細와 여섯 가지 거친 움직임의 마음 상태인 智相, 相
續相, 執取相, 計名字相, 起業相, 業繫苦相의 六麤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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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정장?32책(이하에서는 ?대정장?32로 표시함. p.576b-c. "心生滅者....明위아뢰야식"
2) ?대정장?44, p.228b. "如不動水, 爲風所吹......當知此中道理亦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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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청정한 眞如 自性이 無明에 물들어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것을 無明業相이라고 한다. 元曉는 이 無明業相에 대하여 비록 미세
한 움직임은 있으나, 그 작용이 매우 미미하여 能所 미분의 상태이며3) 또한 이
無明業相은 아직 오지 않은 生相4) 의 마음이 장차 곧 작용하려는 때에 이른 것
과 같다고 한다.5) 다음 無明業相이라는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에 의하여 외계 사
물을 바라보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轉相, 또는 能見相이라고 하며 元曉는 이
能見相이 비록 能緣의 작용은 있으나 아직 所緣境相, 즉 바라보는 대상은 드러
내지 못하고 다만 밖으로 향하고 있을 뿐 대상 경계에 의탁하지 않고 있는 상태
이며, 또한 이 轉相은 아직 오지 않은 生相의 마음이 막 작용하는 때에 이른 것
과 같다고 한다.6) 그 다음 이 바라보는 마음에 의하여 이제는 대상 경계가 헛되
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를 現相 또는 境界相이라고 한다. 元曉는 이 境界相에 대
하여 마치 맑은 거울이 물체의 모습을 비추어 나타내는 것처럼 現織의 마음이
언제나 마음대로 일어나 항상 눈 앞에 있는 상태라고 하며7) 또한 이 現相은 아
직 오지 않은 生相의 마음이 현재 지금 막 이른 것과 같다고 한다.8) 元曉가 이
세 가지 미세한 마음을 모두 生相으로 보고, 또 이들 모두가 아라야식의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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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정장? 44, p.212a, "然此業相 雖有動念 而是極細 能所未分"
4) 生相: 小乘의 說一切有部에서는 有爲法은 모두 무상하여 因緣力에 의하여 未來位
로부터 현재위에 생겨나지만, 순간적으로 멸하여 過去位가 된다. 여기서 生相이란 有爲法
이 미래위로부터 현재위에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대승의 法相宗에서는 四相假立, 過未無體를 주장하여 그 중에 本無今有를 有爲法의 생이라 한다. ?석마하연론? 권3에서는 根本無明이 본각을 薰染할 때 생기는 獨力의 業相, 獨力의 현상을 아라야식의 자리에 두고, 이들을
生相으로 보았다.(?대정장? 44 p.209b), "生相一者....名爲生相“
5) ?대정장? 44, p.209b."一名業相....
6) ?대정장? 44, p.212b, 209b.
7) ?대정장? 44, p.212b."譬如明鏡持諸色
8) ?대정장? 44, p.209b. “三者現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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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특이하다.9)
三細相이 無明의 原因(無明因)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에 비하여 다음의 六麤
相은 三細相 중 마지막 단계인 境界相의 인연에 의하여 일어난다.10) 境界相이
마음에서 나온 현상인 줄 모르고 실재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분별을 내는 마음을 智相이 라고 한다.11) 智相을 第七識으로 보았으며12)
이 智相에서 邪. 正, 得. 失을 판단하는 심리 작용인 慧數가 비로소 생겨서 我
와 我所를 분별해 낸다고 한다.13) 我와 我所를 분별한다는 것은 주관과 객관이
분화되어 인식 작용을 시작하게 된다는 뜻이다. 주관이란 我執이 부착된 妄念,
즉 범부의 自我를 뜻하며, 元曉는 『疏』에서 이 第七織인 智識을 我癡, 我見, 我
愛, 我慢의 네 가지 번뇌와 상응하는 識이라고 말한다.14) 『논』에서 智相을 좋아
하거나 싫어하는 분별을 내는 마음이라고 한 것에 대하여, 元曉는 이 智相은 相
續相의 所依根으로서 智相에 의하여 苦樂의 생각을 내는 것이 相續相이므로,
智相이 細相이고 捨受임에 비하여 相續相은 麤相이고 苦. 樂受를 함께 일으키
며, 따라서 智相의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힘은 매우 미약하다고 한다. 즉, 지상이
주. 객관을 분별하기는 하나 안으로 반연하여 머물 뿐 마음 밖에 따로 객관 대
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잠자고 있는 상태와 같은 반면, 상속
상은 객관 대상에 대한 집착이 깊어져서 대상 경계가 실제로 외계에 있다고 생
각하여 覺觀으로 分別하기 때문에 마치 깨어 있는 상태와 같다고 한다.15) 六麤相
의 두 번째는 相續相이다. 元曉는 이 상속상 이하 起業相까지를 生起識이라고 하
_____________
9) 이것은 元曉의 ?기신론?어구 해석이나 분과의 거의 대부분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法藏과는 다른 점이다. 法藏은 업상만을 生相으로 보고, 전상 이하 相續相까지를 주상으로 보았다.
10) ?대정장? 44, p.216a "依境界緣故 相應心得起"
11) ?대정장? 44, p. 257b “由無明迷...”
12) ?대정장? 44, p.212a “第四智識者 是第七識....”
13) ?대정장? 44, p.212c “....心法之者....”
14) ?대정장? 44, p.209b “住相四者....”
15) ?대정장? 44, p.213a “依前智相爲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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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16) 또한 대상 경계를 분별한다는 점에서 分離識, 또는 과거와 미래, 안과 밖의
여러 가지 사상을 분별한다는 점에서 分別事識이라고도 하여17) 이를 第六 意識
의 자리에 둔다. 상속상은 앞의 지상의 분별력에 의하여 대상 경계에 대하여 고
락의 생각을 내고 그 생각이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는 자리다.18) 이 상속상은 지
상의 미세한 분별과는 달리 거친 분별이므로 元曉는 이를 五蘊 중의 識으로 보
았다.19) 육추상의 세 번째는 執取相이다. 앞의 상속상에 의하여 대상 경계를 반
연하고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분별한 나머지 고락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元曉는 이를 受蘊이라고 하였다.20) 이 執取相에서는 상속상에서의 고락의 생각
이 더욱 집착되는 자리다. 육추상의 네 번째는 計名字相이다. 앞의 집취상의 잘
못돤 집작 때문에 다시 그 대상 경계에 대하여 거짓 이름을 세워 그 거짓 이름
의 상을 분별하고 계탁하는 자리다. 元曉는 이를 想蘊이라고 하여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등의 名言相을 분별하는 것이라 한다.21) 육추상의 다섯 번째는 起業相
이다. 앞서의 계명자상에서 집착한 명언상에 의하여 다시思數22)를 일으켜서 선
악의 행위를 만들어 내는 자리다. 元曉는 이 기업상을 行蘊이라고 하였다.23) 육
추상의 여섯 번째는 업계고상이다. 이는 위의 상속상에서 기업상까지의 생기식
으로부터 생긴 과보로서 앞서의 행온, 즉 기업상이 만들어낸 행위에 의하여 三
界와 六趣의 괴로운 과보를 받아 자재하지 못한 상태이다.24) 이상으로 원래 청
정한 본성을 가진 인간의 마음이 무명의 훈습으로 인하여 그 미세한 작용으로
부터 거친 작용에까지 단계적으로 물들어 가는 모습을 『大乘起信論』과 元曉의
해석에 따라 살펴보았다. 무명에 의하여 일어난 삼세와 육추의 染相이 細麤의
________________
16) ?대정장? 44, p.212c “此四相者...”
17) ?대정장? 44, p.214b “...業識分別六塵”
18) ?대정장? 44, p.214a “法執相應...”
19) ?대정장? 44, p.213a “第二相續相者...”
20) ?대정장? 44, p.213a “第三執取相者....”
21) ?대정장? 44, p.213a “第四計名字相者....”
22) 心王과 心所를 구사하여 善惡 등의 일을 일으키는 작용을 하는 心所
23) ?대정장? 44, p.213a “第五起業相者...”
24) ?대정장? 44, p.213a “第六業繫苦相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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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는 있으나, 제법의 실상을 깨닫지 못한 점에서는 같으므로 모든 染法이 다
不覺相임은 물론이다.25) 무명 때문에 제법의 실상을 깨닫지 못하고 미망에 빠져
있는 우리 인간의 현실은 편견과 오해로 인하여 自是非他를 일삼지 않을 수 없
고, 나아가 사회적인 반목과 대립의 양상으로 치닫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이러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결과된 사회적 분열과 대립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의 마음
은 본래의 깨달음(本覺)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無明에 의한 미
혹의 상태, 즉 번뇌를 거두어 없애는 실천적 과정, 즉 始覺이다.
h 覺으로의 환원
始覺이란 本覺의 훈습력, 즉 眞如法이 무명을 훈습하는 힘에 의하여 우리의
미혹한 마음이 점차로 깨달음의 작용을 갖게 되어 궁극에 이르러서는 本覺과
일치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본각이 중생의 마음에 본래 존재하는 깨달음이라
는 뜻을 나타내려 하는 것이라면, 시각은 그 깨달음의 과정을 강조하는 데에 차
이가 있다. 즉 본각을 강조하는 경우에는 마음의 본성인 깨달음 그 자체를 보다
근원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입장이며, 시각은 미혹함에서 깨달음으로의 전환,
또는 번뇌에서 벗어난 깨달음으로 다가가는 과정에서 깨달음의 작용이 부분적
으로 점차 드러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다.
『大乘起信論』에서 시각이 나타나기 위한 실천의 문제는 본각과 불각의 관계
속에서 그 성격이 드러난다. 중생의 현실적인 미혹의 상태(不覺)를 유발하는 번
뇌는 그 실체성이 없는 것이며, 무명에 의해 本覺으로서의 마음이 동요하여 환
영처럼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여기서 실천의 과제로 등장하는 것은 번
뇌 자체를 끊는다기보다는 그 번뇌가 실은 비실재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각이란 번뇌가 헛되이 나타나는 모습에 대해 파악해 나가는 것이
며, 점차로 진전되어 번뇌의 근본 원인인 무명에 의해 마음이 동요하는 최초의
________________
25) ?대정장? 44, p.213a-b, "是故當知無明住地能生...."
170
순간을 통찰하여 그 본질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무명이 완전히
제거되고 마음의 본질에 대한 참다운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실천
인 것이다.26)
『大乘起信論』에서는 궁극적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不覺, 相似覺, 隨分覺, 究
竟覺의 네 단계로 나눈다. 미망의 현실을 형성하는 원인인 망념을 얼마나 철저
히 배제하였는가에 따라서 단계를 나눈 것이다. 망념을 배제한다는 것은 망념
이 비실재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므로 깨달음의 네 단계는 마음의 별상, 이상,
주상, 생상의 네 가지 모습이 사실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 결국 마음
에 이 네 가지 모습이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에 각각 대응한다.27)
시각의 첫 번째 단계는 不覺이다. 십신 전에서는 身. 口의 일곱 가지 惡念
(殺生, 愉盜, 邪淫, 惡口, 兩舌, 妄語, 綺語), 곧 滅相을 일으켰으나, 이제는 이미
불선인 줄 깨달았기 때문에 앞으로의 멸상을 그치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
는 단계다. 비록 멸상이 불선인 줄은 알았지만, 아직 멸상이 망념인 줄은 깨닫
지 못하였으므로 불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곱 가지 악업이 나쁜 것임을 알고
다시는 그 악업을 짓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깨달음의 단초가 되는 것이므로 이
를 시작의 첫 단계로 삼은 것이다.
시각의 두 번째 단계는 相似覺이다. 무명이 我癡, 我見, 我愛, 我慢 등의 住相
과 화합하여 일으키는 我와 我所가 空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貪. 瞋. 癡.
慢. 疑. 見의 여섯 가지 번뇌(즉 異相)을 일으켜, 주. 객관을 분별하고 집착하
다가, 三賢 菩薩이 되면 無我임을 분명히 깨닫고 점점 지혜롭게 되어 異相의 망
념으로부터 깨달아 가는 단계다. 이 단계에서 는 逆境界와 順境界를 분별하여
탕. 진 등을 일으키는 麤分別執着相은 버렸으나, 아직 無分別覺28)은 얻지 못했
_________________
26) 조은수, 「?대승기신론?에 있어서의 깨달음의구조」(서울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6)
pp53-54
27) 같은 책 p.60참조
28) 주관과 객관의 相을 버리고 평등을 요달하여 眞如를 체득한 것. 진여의 모양은 우리들의 언어나 문자로써 어떻게 형용할 수도 분별할 수도 없으므로 분별심을 가지고는 그 체성에 계합할 수 없다. 그리하여 모든 생각과 분별을 여읜 모양 없는 참 지혜로만 비로소 알 수 있으니 이것이 무분별각이다.
171
으므로 相似覺이라고 한다.
시각의 세 번째 단계는 隨分覺이다. 전 단계에서는 무명이 三細의 生相과 화
합함에 의하여 네 가지 주상을 일으켜 마음 밖에 대상 경계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더라도 人執29)과 法執30)을 가지고 안으로 반연하여 머물렀으나, 이제 초지 이
상 십지 보살이 되어서는 二空31)에 통달하여 無分別智를 가지게 되면서 주상의
망념으로부터 깨닫게 되는 단계다. 인집과 법집을 떠나 무분별각을 얻었지만
아직 생상의 망념에서는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수분각이라고 한다.32)
시각의 마지막 단계는 究竟覺이다, 無垢地33)의 보살(等覺菩薩)이 마음의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닫는 단계다. 앞서는 무명에 의하여 업상, 전상, 현상의 세 가
지 생상을 가지게 되어 이 때문에 마음의 본체를 미혹하므로 마음이 동요되었
으나, 이제 이 단계에서는 본각을 떠나서는 불각이 없다는 것, 바로 동념 이 靜心
인 줄을 증득하게 된다.34) 그리하여 이 단계에서는 마음에 최초의 일어나는 모
습, 즉 업상 등의 微細念까지 완전히 없애어 佛地에 이르게 된다. 앞의 세 단계
에서는 심원에 이르지 못하여 생상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아서 마음이 生滅하
고 무상하였으나, 이제 이 究竟位에 이르러서는 무명이 영구히 없어지고 一心
의 근원에 돌아가 다시는 동념을 일으킴이 없게 되어 마음이 상주한다35) 이미
마음의 본성을 보아서 본래 이 마음에 생. 주. 이. 멸의 변화가 없는 줄 깨달
았으므로 고요히 쉬는 것도 없어지고 항상 스스로 一心이 一如의 자리에 머무
르게 된다. 여기서는 더 나아갈 바가 없으며,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아니하므로
____________________
29) 五蘊이 화합하여 성립된 몸에 상일주재의 실아가 있다고 주장하는 집착
30) 객관인 물심 현상을 실재인 것처럼 잘못 알고 고집하는 것.
31) 인집과 법집을 깨친 것, 즉 인공과 법공을 말함. 인공이란 중생은 오온이 화합한 것이므로 我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것. 법공이란 오온의 자성도 공하다는 것이다.
32) ?대정장?44, p.210a, "第三位中...."
33) 離垢地(菩薩의 第二地)의 異名 그러나 여기서는 等覺菩薩을 無垢地菩薩 또는 金剛心菩薩이라고도 함(������四敎儀? 5참조)
34) ?대정장?44, p.210b, "今乃證知...."
35) ?대정장?44, p.210b, “前來三位...”
172
구경각이라고 한다.36) 이는 실체가 없는 망념에 의해서 그 존재가 설정된 불각이
본각과 다름없는 한 가지 마음으로 파악되는 질적인 전환을 뜻한다. 본각과 같
아진 시각의 마지막 단계인 구경각에서 무명이 아주 없어져 심원에 이르게 됨은
이미 언급하였다. 이제 이 심원에 이른 경지에는 智淨相과 不思議業相이라는 두
가지 모습이 있으니 이 두 가지 모습 또한 본각과 다르지 않음은 물론이다.
지정상이란 인간 본래의 眞如心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인 훈습력에 의하여 완
전히 수행하여 마지막 무구지의 단계에서 수행이 완성된 모습이다. 수행이 완
성되면 和合識(즉 아라야식) 중의 生滅相이 없어지고 不生不滅하는 본성이 나
타나 해탈지견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때 業. 轉. 現 등의 相을 없애어 드디어
심원에 돌아가게 하여 순정한 지혜를 이루게 된다.
不思議業相이란 수행인의 마음이 순정지를 이루게 될 때의 작용을 뜻한다. 즉
아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면 이 지혜의 힘에 의하여 한량없는 공덕상을 끊임없
이 나타내면서 중생의 군기를 따라 절로 상응하여 여러 가지로 化現하면서 중
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元曉는 이 지정상과 불사의업상을 『寶性論』에 의거
하여 각각 自利行과 利他行으로 해석한다.37) 이는 수행인의 자리행에는 이타행
이 저절로 수반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며, 자리행 이후의 이타행이라기보다는 자
리행과 이타행의 동시적 수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정상과
불사의업상은 해탈의 경지에서의 두 가지 모습, 즉 해탈의 양면적 성격이기 때
문이다. 마음의 근원 자리에 이르면 이미 染淨과 善惡, 眞妄의 차별이 있을 수
없게 되며, 주관과 객관의 구분마저도 없어진다. 이 경지에서는 범부니 부처니
하는 구분마저도 없어지고 彼我의 개념도 초월되어 절로 우주 만유의 존재는
한 몸, 즉 동체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同體大悲에 의한 利他行이 자연적
__________________
36) ?대정장?44, p.210b, "今旣見心性...."
37) ?대정장?44, p.210b, "寶性論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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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수반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38)
3. 眞如 즉 본체의 세계
『大乘起信論』에서는 "大乘의 本體는 衆生心이며, 이 중생심은 世間法과 出世
間法을 포괄한다"39)고 하고, 또 이 중생심 즉 一心법에 의하여 心眞如門과 心生
滅門이 있다고 한다.40)중생심이란 중생의 심성, 즉 중생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진여심이며, 그러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미망에 허덕이는 인간 심성을 의미한다.
현실적으로 미망에 빠져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인간 심성의 현상에 대해서는 앞
서 2장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이제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다는 진여심이란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元曉는 이 심진여문에 대하여 『楞伽經』에서 "寂滅이라는 것은 一心이라고 이
름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해석한 것으로 보았다. 즉 모든 존재 현상은 그 본
래적인 입장에서는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적정하여 오직 一心일 뿐
이라고 한다.41) 한편 心生滅門에 대해서는 『능가경』에서 "一心이란 如來藏을 이
름한다."는 말을 해석한 것으로 보았으니 一心의 체가 본래는 깨달은 상태이지
만, 무명에 따라서 움직여 生滅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 生滅門에서 여래의 본성
이 숨어 있어 나타나지 않는 것을 如來藏이라고 이름한다고 한다42) 여기서 심
진여문은 인간 심성의 본체적인 면을, 그리고 심생멸문은 그 현상적인 면을 각
각 지칭한다고 할 것이다.
『大乘起信論』에서 심진여란 一法界의 大總相(진여)法門의 體라고 한다.43) 元
__________________
38) ?원효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 김형효, 신오현, 은정희, 목정배, 조동일 공저(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pp.247-249
39) ?대정장?32 p.575c "摩訶衍者...."
40) ?대정장?32 p.576a "依一心法有....."
41) ?대정장? 44 p.206c "寂滅者, 名爲一心..."
42) ?대정장? 44 p.206c "一心者 名如來藏...."
43) ?대정장?32 p.576a. “心眞如者....”
174
曉에 의하면 일법계란 진여문이 의지하는 본바탕으로서 바로 一心을 뜻하며,
여기에는 生滅門까지도 포괄하고 있다고 본다. 대총상이란 別相인 生滅門을 제
외하고 이 중에 다만 총상법문, 즉 진여문만을 취하였음을 뜻하며, 대총상의
'大' 는 총상의 四品(如實空鏡, 因薰習鏡, 法出離鏡, 緣熏習鏡) 중에서 三無性(相
無性, 生無性, 勝義無性)이 나타내는 진여를 뜻하므로 대총상이라고 한다. 법이
란 궤범으로서 참된 이해를 나타낸다는 뜻이며, 체란 일법계 전체가 생멸문이
되는 것처럼 일법계 전체가 진여문이 된다는 뜻이다.44) 심진여문을 설명함에 있
어 말과 생각을 떠나서 진여의 뜻을 나타내는 방법과 언설에 의해서 분별하는
방법을 취한다. 먼저 離言絶慮의 방법으로는 삼무성에 의하여 진여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첫째, 마음의 본성은 평등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三際를 떠나 있으므
로 심성은 生滅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圓成實性에 의하여 진여를 나타내는
것이다.45) 둘째 일체의 모든 존재 현상은 오직 망념에 의하여 차별이 있는 것이
므로 만약 망념을 여의면 곧 일체의 대상 경계가 없다고 한다. 이는 計所執性에
대한 무상성 즉 진여의 絶相을 나타낸 것이다.46) 셋째 依他性의 존재 현상은 훈
습에 의하여 차별이 나타날 뿐 본래 말할 만한 본성의 차별을 여의었으므로 음
성이나 名句로 설명할 수 없고, 名言分別로도 반연할 수 없다. 일체의 언설은 다
만 망념을 따른 것이어서 임시적이고 상대적 이름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 실체
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의타성의 뜻에 의하여 진여의 離言을 나타
내었다.47) 이상 삼무성의 뜻에 의하여 진여라고 말하였으나, 실로 진여라고 할
만한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설의 궁극은 말에 의하여 말을 버리
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진여가 언설이나 명구로 설명할 수도 없고 명언분별로도
___________________
44) ?대정장? 44. p.207a "言卽是一法界者....."
45) ?대정장? 44. p.207b "一者當眞實性...."
46) ?대정장? 44. p.207b "二者對分別性而...."
47) ?대정장? 44. p.207b "三者就依他性以..."
175
반연할 수 없어서 우리의 인식을 초월한 것이라면 어떤 방법에 의하여 그 진여
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大乘起信論』은 "만약 모든 법
이 설명되기는 하지만 설명할 수도 설명할 만한 것도 없으며, 생각되기는 하나
생각할 수도 생각할 만한 것도 없는 줄 안다면 이러한 中道觀의 방법에 의해서
분별하는 생각을 여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진여의 세계 즉 正見에 드는 것이
된다"고 한다.48) 진여가 언설과 사고 작용을 떠난 것이기는 하지만 언설과 사고
작용에 의하지 않고는 그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여기에 언설에 의한
설명이 있게 된다. 이 언설에 의한 설명 방법에서 다시 如實空과 如實不空의 뜻
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여실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여라는 세계에는 能. 所의 분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일체의 염법과 상응하지 않으며, 따라서 모든 존재 현상의 차별되
는 모양을 여의었다. 진여의 세계에는 취하는 대상(所取相)이 없으므로 취하는
주관(能取見)이 없으며, 따라서 헛된 심념이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소취상과 능
취견이 없다는 뜻에서 '空' 이라고 한다.49) 여실불공이란 이미 진여의 본성은 허
망한 요소가 없어 공하기 때문에 바로 이는 진심이며, 이 진심은 항상하여 변하
지 않고 정법이 다 갖추어져 있다는 뜻에서 불공이라 하는 것이다.50)
불공이라고 표현하였으나 이 진심의 자리에는 취할 만한 상이 있는 것은 아
니므로 불공은 공과 다르지 않은 不二의 관계임은 물론이다. 元曉는 이처럼 분
별하고(能取) 반연하는 바(所取)를 여읜 경계는 오직 無分別智에 의해서만 증
득이 가능하다고 본다.51)
4. 生滅. 眞如 不二의 근원으로서의 一心
______________________
48) ?대정장?32 p.576a. "若知一切法..."
49) ?대정장? 44. p.207c "言一切染法不相應者...."
50) ?대정장?32 p.576a. "所言不空者 ...."
51) ?대정장? 44. p.208a-b "雖曰不空而...."
176
『大乘起信論』에서는 중생심이 모든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포괄하며, 또한 이
중생심 즉 一心에 心眞如門과 心生滅門이 있다고 한 데서 심진여문을 출세간법
에, 심생멸문을 세간법에 각각 대응시키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생심은 진여의 즉면에서 본다면 生滅하지 않으며, 본래 적정한 것이다. 즉
마음의 진여로서의 모습은 언어나 문자나 사유개념에 의해 파악할 수 없어 우
리의 인식을 초월해 있다.
마음의 본래 모습은 불생불멸하고, 본래부터 깨달음의 지혜(本覺)를 갖추고
있는 것이지만, 무명이라는 조건 때문에 동요를 일으키게 되어 生滅의 모습을
띄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다면 다시 마음의 근원으로 돌
아와 마음에는 동요가 없어지고 상주하게 된다. 이처럼 본래 깨달은 상태인 진
여로서의 마음이 현상 세계에서 각. 불각의 모습으로 生滅하고 있는 마음의 동
적인 체계 그 전체를 心生滅門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문은 각각에 일체의 모든 법을 다 포섭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元曉는 '그것은 마음이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다 포괄한다는 뜻' 이라고 한
다.52) 중생의 마음은 二門으로 되어 있으며, 일체의 모든 법은 세간법과 출세간
법 외에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문은 일체법을 어떻게 포섭하는가? 元曉에
의하면 진여문은 염과 정의 通相이며, 통상을 떠나서 따로 염정이 있는 것은 아
니므로 염정의 모든 법을 총섭한다. 한편 생멸문은 염법과 정법을 각기 드러내
보이어 염정의 법이 모두 그에 포함되지 않음이 없으므로 또한 일체의 모든 법
을 총섭한다고 한다.53) 진여문인 통상과 생멸문인 별상이 다르기는 하지만 두
문이 모두 각각 일체법을 총섭하는 데서 두 문의 不二, 不相離의 관계가 도출된
다. 元曉는 또한 微塵과 질그릇의 비유로 통상인 진여문과 별상인 생멸문이 서
로 여읠 수 없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임을 말한다. 즉 미진이 여러 가지 질그릇
의 통상이며, 통상을 떠나서 따로 질그릇이 없어서 질그릇들이 모두 미진에 포
__________________
52) ?대정장? 44. p.207a "言是二種門...."
53) ?대정장? 44. p.207a "欲明眞如門者....一切諸法"
177
섭되는 것처럼, 진여문은 생멸문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 미진의 성질이
모여서 별상인 질그릇들을 이루지만, 이 질그릇들은 항상 미진의 성질을 잃지
않기 때문에 질그릇들이 바로 미진을 포괄하는 것처럼 생멸문은 진여문을 여의
지 않는다는 것이다.54)
한편 『大乘起信論』에서는 마음을 세 가지 특징으로 설명한다. 즉 "心眞如門은
대승(즉 중생심)의 본체만을 보이는 것이며, 心生滅因緣相은 대승 자체의 모습
(相)과 작용(用)을 보인다"55) 심진여의 측면에서는 그 마음이 본체로서만 파악
될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의 인식 범주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심생멸의
입장에서는 그 마음 자체에 체도 있지만 상과 용이 있으므로 인식에 의해 파악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元曉는 진여문 중에서는 바로 대승의 체라고 하
였으나, 생멸문에서는 自體의 相. 用이 있다고 하여 따로 體大를 말하지 않은
것은 생멸문의 자체는 그 체가 상에 종속하기 때문이라고 한다.56) 元曉는 여기
서 '생멸인연상이 대승의 체(자체)를 나타낸다'는 것은 생멸문 중의 本覺心을
가리킨 것이며, 이 본각심은 生滅의 體, 生滅의 因이므로 이는 생멸문 내에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57) 『大乘起信論』의 서두에서 중생심을 대송의 본체라
고 하였을 때, 이것은 현실적인 범부의 마음, 즉 중생심에는 진여의 모습이 내재
해 있음을 뜻한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은 엄연히
부처와 차별될 수밖에 없으나, 절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범부와 부처는 구별
되지 않는다. 마음의 본래적인 측면에서 현실 세계에 처해 있는 범부의 모습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으며, 다시 현실 세계에 처해 있는 범부의 모습에서 어떻게
마음의 본래적인 측면이 그대로 발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규명하는 것이
________________
54) ?대정장? 44. p.207b "眞如門是.....生滅門亦如是"
55) ?대정장? 32. p.575c "是心眞如相.....體相用故"
56) ?대정장? 44. p.206b "然眞如門中.....不別說也"
57) ?대정장? 44. p.206b "言能示摩訶衍....在於生滅門內"
178
『大乘起信論』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면, 이런 점에서 심생멸문 내에 상. 용 이
외에 '자체'를 설정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심진여문에서의 체는 生滅
하는 마음을 총괄하는 기본적인 세계로서 설정된 것이며, 生滅하는 마음이 불
각의 상태에서 각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진여문이 심생멸문과 서로 떠날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음은 이로써 자명
하다.
心眞如의 세계가 覺과 不覺으로 生滅하는 세계를 총괄하는 기본적인 전제며
나아가 불각에서 각으로 돌아가는 근거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긍
정적 태도라고 보여질 수 있다. 이러한 심진여의 세계는 단순히 염에 대한 정,
악에 대한 선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염과 정, 선과 악을 뛰어넘는 세계, 즉
모든 상대적인 자치 체계를 벗어나 있어서 염과 정, 선과 악의 구분이 필요없는
절대의 세계다. 元曉는 馬鳴이 『大乘起信論』을 지은 의도는 "도를 배우는 사람
으로 하여금 온갖 경계를 길이 쉬어서 드디어 一心의 근원에 돌아가게 하려는
것"58)을 밝혔다.
'一心의 근원'은 바로 眞如와 生滅이 不一不異의 관계로 圓融되어 있는 세계
이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닌 세계다.
元曉가 당시의 신라 사회에서 그가 추구하던 절대의 세계로부터 뛰쳐나와 대
중교화라는 실천 수행에 뛰어 든 것은 곁코 절대의 세계를 부인한 것이 아니었
다. 그것은 다만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고 오직 出世間的 가치만을 지향하려고
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우리가 처해 있는 世間的 삶 속에서, 혹은 번뇌와 미혹에
덮여 있는 중생의 마음 속에서 절대의 세계가 그대로 구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
을 몸소 실천을 통하여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원효의 태도는 自
是非他의 편견과 오해, 사회적 내지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분열 현상들을 화해
시키는 '一心의 원리' 바로 그것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_______________
58) ?대정장? 44, p.202b "爲道者永息萬境 遂還一心之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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