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

발심수행장 發心修行章

수선님 2019. 4. 21. 11:54

발심수행장 發心修行章1)

분황사 사문 원효 지음

芬皇寺沙門 元曉述2)

1) 저본(底本)은『한국불교전서』제1책(동국대학교출판부, 1979)에 수록(p.841a1~

c6)된『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이다. 이에 대한 교감본으로 갑본(甲本)은 1570

년에 무위사(無爲寺)에서 개간(開刊)된『발심수행장』이고, 을본(乙本)은 1579년

에 신흥사(新興寺)에서 각판(刻板)한『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이고, 병본

(丙本)은 1635년에 운주(雲住) 용장사(龍藏寺)에서 간행한『초발심자경문』이고,

정본(丁本)은 1883년에서 해인사(海印寺)에서 간행한『초발심자경문』이다.『한

국불교전서』에서는 정본(丁本)을 저본으로 하였다.

2) 저본(底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첨가되어 있다. “해동의 초조이며 모든 산

을 유행하고 역섭한 화엄강사 원효화상은 경주 사람이다. 수나라 때 종남산 우

두종 지현의 스승이며, 황룡사를 창건하였다. [시호는] 대성화정원효국사이다.”

(韓1, p.841a4~6. 海東初祖, 遊歷諸山, 華嚴講師元曉和尙, 慶州人也. 隋時終

南山牛頭宗智賢師, 刱黃龍寺. 大聖和靖元曉國師.)


무릇 모든 부처님들께서 적멸궁(寂滅宮)3)을 장엄하신 것은

많은 겁해(劫海)4) 동안 탐욕을 버리고 고행하심이며,

 

중생들이 화택문(火宅門)5)에 윤회(輪廻)6)하는 것은

한량없는 세월 동안 탐욕을 버리지 않은 때문이다.

夫諸佛諸佛, 莊嚴寂滅宮, 於多劫海, 捨欲苦行,

衆生衆生, 輪廻火宅門, 於無量世, 貪欲不捨.

3) 적멸궁(寂滅宮)은 열반(涅槃)의 궁전이라는 말이다. 적멸(寂滅, nirvāna)은 불

이 꺼지듯 모든 번뇌가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이다. 궁(宮)은 법

왕인 부처님이 거주하는 궁전이라는 의미이다.

4) 겁(劫, kalpa)은 일반적인 시간의 단위로 잴 수 없을 만큼 매우 길고 긴 세월을

가리키는 말이다. 겁해(劫海)라고 해(海)를 붙인 것은 많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

한 것이다.

5) 화택문(火宅門, ādīptāgāra)은『법화경(法華經)』의 화택비유에서 유래된 것이

다. 중생이 삼계(三界) 가운데 거주하면서 미혹의 괴로움을 받고 있으나 몸이

괴로움 가운데에 있는 줄 알지 못하는 것을 집이 불타는 것에 비유했다.

6) 윤회(輪廻, samsāra)는 중생이 끊임없이 생사를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아무도] 막지 않는 천당에 가서 이르는 자가 적은 것은

삼독(三毒)7) 번뇌8)로 자기 집의 재물을 삼음이며,

[아무도] 유혹하지 않는 악도(惡道)9)에 가서 드는 자가 많은 것은

사사(四蛇)10)와 오욕(五欲)11)으로 망녕되이 마음에 보배를 삼기

때문이다.

無防天堂, 少往至者, 三毒煩惱, 爲自家財,

無誘惡道, 多往入者, 四蛇五欲, 爲妄心寶.

7) 삼독(三毒)은 탐욕(貪欲)·진에(瞋恚)·우치(愚癡)의 세 가지 번뇌를 의미한다.

『대승의장(大乘義章)』에서는 “삼독이 삼계의 온갖 번뇌를 포섭하고, 온갖 번뇌

가 중생을 해치는 것이 마치 독사나 독용과 같다”고 하였다.

8) 번뇌(煩惱, kleśa)는 혹(惑), 수면(隨眠), 염(染), 누(漏), 결(結), 박(縛), 전(纒),

액(軛), 폭류(暴流), 사(使) 등으로 쓰이기도 한다. ‘나’라는 존재에 집착하여 일

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작용이며, 눈앞의 괴로움과 즐거움에 미혹하여 몸과

마음을 혼란하게 하는 정신작용이다.

9) 악도(惡道)는 나쁜 업을 지은 과보로 태어나는 나쁜 곳이며, 보통 지옥·아귀·

축생의 세계를 가리킨다.

10) 사사(四蛇)는 네 마리의 뱀인데, 여기에서는 사대(四大)를 의미한다. 즉 물질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를 네 마리의 뱀에 비유한 것이다.

11) 오욕(五欲, pañca-kāmāh)은 중생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허망한 다섯 가지 욕심

(財·色·食·名·睡)을 말한다. 또 오근(五根)의 대상이 되는 색(色)·성(聲)·향

(香)·미(味)·촉(觸)의 오경(五境)을 의미한다. 이 오경은 욕구의 대상이고 욕구

그 자체는 아니지만, 이 다섯 가지가 모든 욕망을 일으키는 원인이므로 오욕이

라 한다.


[어느] 사람이 누가 산에 돌아가 도(道)12)를 닦고자 하지 않으랴마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애욕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 수풀에 돌아가 마음을 닦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힘을 따라서 선행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人誰不欲歸山修道, 而爲不進, 愛欲所纏.

然而不歸山藪修心, 隨自身力, 不捨善行.

12) 도(道)는 인행(因行)이며 성불의 길을 가리킨다. 즉, 불과(佛果)인 무상보리에

이르는 길이다.


자신의 즐거움을 능히 버리면 [다른 이가] 믿고 공경하기를 성인과 같이 하며,

어려운 행을 능히 행하면 [다른 이가] 존중하기를 부처님과 같이 할 것이다.

물질을 아끼고 탐함은 마(魔)13)의 권속이며,

자비로 보시(布施)14)함은 법왕의 아들15)이다.

自樂能捨, 信敬如聖, 難行能行, 尊重如佛.

慳貪於物, 是魔眷屬, 慈悲布施, 是法王子.

13) 마(魔)는 마라(魔羅, māra)의 준말이며, 선한 일을 방해하고 수행을 방해하는

것으로서 번뇌를 뜻한다.

14) 보시(布施, dāna)는 단나(檀那)라고 음역하기도 하며, 자비심으로 다른 이에게

조건없이 베풀어 주는 것이다. 보시바라밀은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하나

이다. 보시는 재물을 베푸는 것[財施]·법을 베푸는 것[法施]·두려움을 없애는

것[無畏施]의 세 가지로 나눈다.

15) 법왕의 아들[法王子, kumārabhūta]은 동진(童眞) 보살이라고도 한다. 세간의

국왕에게 왕자가 있듯이, 법왕인 부처님에게는 보살이 있다. 이 보살은 미래에

부처님이 될 자리에 있으므로 법왕자라고 한다. 특히 문수보살이나 미륵보살을

가리켜 법왕자라고 하기도 한다.


높은 산과 높은 바위는 지혜있는 사람이 거주할 곳이며,

푸른 소나무와 깊은 골짜기는 수행자가 살 곳이다.

주리면 나무 열매를 먹어서 그 주린 창자를 위로하고,

목마르면 흐르는 물을 마셔 그 목마른 정을 쉬어라.

高岳峩巖, 智人所居, 碧松深谷, 行者所棲.

飢餐木果, 慰其飢腸, 渴飮流水, 息其渴情.


맛있는 것을 먹여 사랑해 길러도 이 몸은 반드시 무너지고,

부드러운 것을 입혀 지켜 보호하여도 목숨은 반드시 마침이 있다.

메아리 울리는 바위굴로 염불당을 삼고,

슬피 우는 기러기로 기쁜 마음의 벗을 삼아라.

喫甘愛養, 此身定壞, 著柔守護, 命必有終.

助響巖穴, 爲念佛堂, 哀鳴鴨鳥, 爲歡心友.


절하는 무릎이 얼음과 같더라도 불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으며,

굶주린 창자가 끊어질 것 같더라도 밥을 구하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홀연히 백년에 이르거늘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라고 닦지 않고 방일하겠는가.

拜膝如氷, 無戀火心, 餓腸如切, 無求食念.

忽至百年, 云何不學, 一生幾何, 不修放逸.


마음 가운데 애욕을 여읨을 사문(沙門)이라 이름하고,

세속을 그리워하지 않음을 출가(出家)라고 이름한다.

행자가 그물에 걸리는 것16)은 개가 코끼리 가죽을 입는 것이고,

도인이 연모해 그리워하는 것은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가는 것이다.

離心中愛, 是名沙門, 不戀世俗, 是名出家.

行者羅網, 狗被象皮, 道人戀懷, 蝟入鼠宮.

16) 나망(羅網)은 탐애의 그물, 인연의 그물에 걸림을 말하며, 수행자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경계한 말이다.


비록 재주와 지혜는 있으나 마을 집에 사는 자는

모든 부처님께서 이 사람에게 슬퍼하고 근심하는 마음을 내시고,

설사 도행은 없으나 산실(山室)에 머무는 자는

많은 성인들이 이 사람에게 환희심을 내신다.

雖有才智, 居邑家者, 諸佛是人, 生悲憂心,

設無道行, 住山室者, 衆聖是人, 生歡喜心.


비록 재주와 학식이 있으나 계행(戒行)17)이 없는 자는

보배 있는 곳18)으로 인도하나 일어나 가지 않는 것과 같고,

비록 부지런히 행함은 있으나 지혜가 없는 자는

동방으로 가고자 하나 서방을 향해 가는 것이다.

雖有才學, 無戒行者, 如寶所導, 而不起行,

雖有勤行, 無智慧者, 欲徃東方, 而向西行.

17) 계행(戒行)은 계율을 지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율법을 수

지(受持)하면 능히 계체(戒體)를 수순(隨順)할 수 있다.

18) 보배 있는 곳[寶所]은 열반(涅槃)을 비유한 말이다.[『법화경(法華經)』(大9

p.26a7)]


지혜가 있는 사람이 행하는 바는 쌀을 쪄서 밥을 짓는 것이며,

지혜가 없는 사람이 행하는 바는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이다.

모두들 밥을 먹어 주린 창자를 위로할 줄은 알지만,

법을 배워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은 알지 못한다.

행과 지혜를 구비함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자리와 이타는 새의 두 날개와 같다.

有智人所行, 蒸米作飯, 無智人所行, 蒸沙作飯.

共知喫食, 而慰飢腸, 不知學法, 而改癡心.

行智俱備, 如車二輪, 自利利他, 如鳥兩翼.


죽을 얻어 축원하되 그 뜻을 알지 못하면

또한 단월(檀越)19)에게 수치스럽지 않겠으며,

밥을 얻어 소리 높여 칭송20)하되 그 지취를 통달하지 못하면

또한 현성(賢聖)21)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得粥祝願, 不解其意, 亦不檀越, 應羞恥乎,

得食唱唄, 不達其趣, 亦不賢聖, 應慚愧乎.

19) 단월(檀越, dāna-pati)은 시주(施主)라고 번역한다. 다나(dāna)는 베푼다는 의미

로 시(施)라고 번역하고, 빠티(pati)는 주인이라는 의미로 주(主)라고 번역한다.

단(檀)은 보시를 뜻하고, 월(越)은 보시한 공덕으로 빈궁의 바다를 건너 열반의

피안에 이른다는 뜻이다.

20) 칭송[唄, bhāsā]은 곡조를 붙여 경을 읽거나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는 것을 말

한다.

21) 현성(賢聖)은, 견도(見道)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지만 악을 여읜 사람을 ‘현(賢)’이

라 하고, 견혹(見惑)을 끊어 견도 이상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성(聖)’이라고 한다.


사람은 꼬리 달린 벌레가 깨끗하고 더러움을 가리지 못하는 것을 미워하고,

성인은 사문이 깨끗하고 더러움을 가리지 못하는 것을 미워한다.

세간의 시끄러움을 버리고 허공을 타고 천상에 올라감22)

계(戒)가 좋은 사다리가 된다.

그러므로 파계하고 다른 이의 복전(福田)23)이 됨은

날개 부러진 새가 거북을 업고 허공을 나는 것과 같다.

人惡尾蟲, 不辨淨穢, 聖憎沙門, 不辨淨穢.

棄世間喧, 乘空天上, 戒爲善梯,

是故破戒, 爲他福田, 如折翼鳥, 負龜翔空.

22) 천상은 진리의 하늘을 의미하고, 천상에 올라감은 생사의 큰일을 초월하여 자

유인이 됨을 뜻한다.

23) 복전(福田, punya-ksetra)은 공양 받을 만한 법력이 있는 이에게 공양하면 복이

되는 것이, 마치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려 다음에 수확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비유

한 말이다.


자신의 죄를 벗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죄를 속바칠24) 수 없다.

그러니 어찌 계행이 없이 다른 이의 공급을 받겠는가.

수행이 없는 헛된 몸은 길러도 이익이 없고

무상(無常)한 뜬 목숨은 사랑해 아껴도 지키지 못한다.

自罪未脫, 他罪不贖. 然豈無戒行, 受他供給.

無行空身, 養無利益, 無常浮命, 愛惜不保.

24) 속바치다[贖, vkrī]는 속죄하다, 지은 죄를 용서한다는 뜻이다.


용상(龍象)25)의 덕을 바라 능히 긴 괴로움을 참고,

사자좌(獅子座)26)를 기약하여 길이 욕락을 등져야 한다.

행자가 마음이 깨끗하면 모든 천신들이 함께 칭찬하고,

도인이 색(色)27)을 그리워하면 선신이 버리고 떠난다.

望龍象德, 能忍長苦, 期獅子座, 永背欲樂.

行者心淨, 諸天共讚, 道人戀色, 善神捨離.

25) 용상(龍象, nāga)은 모든 아라한들 가운데서 수행이 용맹하여 가장 힘센 부처

님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대중에서 학덕과 식견과 역량이 가장 뛰어난 큰스님

들을 상징적으로 비유한 말이다.

26) 사자좌(獅子座, simhāsana)는 부처님이 앉으시는 자리를 말한다. 사자가 여러

짐승의 왕이듯이 부처님은 인간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분이므로 사자

에 비유한다. 또는 설법할 때 쓰는 높고 큰 상을 말하기도 한다.

27) 색(色)은 이성, 또는 물질을 가리킨다.


사대는 홀연히 흩어져서 보호하여 오래 머물지 못하니,

오늘도 [벌써] 저녁이니 자못 아침부터 수행해야 한다.

세간의 즐거움은 뒤의 괴로움이니 어찌 탐착할 것이며,

한 번 참음이 긴 즐거움이니 어찌 닦지 않겠는가.

도인의 탐(貪)은 수행자의 수치이고,

출가자의 부(富)는 군자의 웃음거리이다.

四大忽散, 不保久住, 今日夕矣, 頗行朝哉.

世樂後苦, 何貪着哉, 一忍長樂, 何不修哉.

道人貪是行者羞恥, 出家富是君子所笑.


막는 말이 다함이 없지만 탐착을 그치지 않으며,

다음[第二]28)이 다함이 없지만 애착을 끊지 않으며,

이 일이 한이 없지만 세상 일을 버리지 않으며,

저 꾀가 끝이 없지만 끊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遮言不盡, 貪着不已, 第二無盡, 不斷愛着,

此事無限, 世事不捨, 彼謀無際, 絶心不起.

28) 다음[第二]은 이번만 하고 다음에는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미루는 말이다.


오늘[만이라는 말]이 다함이 없지만 악을 짓는 날이 많으며,

내일29)[부터라는 말]이 다함이 없지만 선을 짓는 날이 적으며,

금년[만이라는 말]이 다함이 없지만 한없이 번뇌하며,

내년[이라며 미루는 말]이 다함이 없지만 보리30)에 나아가지 않는다.

今日不盡, 造惡日多, 明日無盡, 作善日少,

今年不盡, 無限煩惱, 來年無盡, 不進菩提.

29) 현재 악업(惡業)을 지으면서 ‘내일부터는 선업(善業)을 지어야지’ 하고 미루는

생각을 계속 하기만 한다는 뜻이다.

30) 보리(菩提, bodhi)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불교의 이상인 불타 정각

의 지혜, 즉 불과(佛果)를 의미한다. 두 번째는 불타 정각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즉 불과에 이르는 길을 의미한다.


시간과 시간이 지나고 지나서 밤낮이 빨리 지나가며,

날과 날이 지나고 지나서 빨리 한 달이 지나가며,

달과 달이 지나고 지나서 홀연히 내년이 이르고,

해와 해가 지나고 지나서 잠깐 동안에 죽는 문에 이른다.

時時移移, 速經日夜, 日日移移, 速經月晦,

月月移移, 忽來年至, 年年移移, 暫到死門.


부서진 수레는 가지 못하고 노인은 닦지 못한다.

누우면 게으름만 생기고 앉으면 어지러운 생각만 일어난다.

몇 생이나 닦지 않고 헛되이 밤낮을 보냈으며,

얼마나 사는 헛된 몸인데 일생을 닦지 않는가.

몸은 반드시 마침이 있으리니, 그 뒤의 몸은 어떻게 하겠는가.

급하지 않겠는가! 급하지 않겠는가!

破車不行, 老人不修. 臥生懈怠, 坐起亂識.

幾生不修, 虛過日夜, 幾活空身, 一生不修.

身必有終, 後身何乎. 莫速急乎! 莫速急乎!










실론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gikoship/15783089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