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원효지음
-동국역경원
이 경을 해설하기 위해 육문(六門)으로 분별하는데, 첫째는 대의(大意)를 서술하고, 둘째는 경종(經宗)를 나타내며, 셋째는 제명(題名)을 해석하고, 넷째는 연기(緣起)를 밝히며, 다섯째는 교(敎)를 판별하고, 여섯째는 글을 해석하는 것이다.
一. 대의를 서술함
반야는 지극한 도(道)이다. 그러나 도와 도가 아닌 것도 없고, 지극함도 지극하지 않은 것도 없으며, 소연(蕭然)히 고요하지 않음이 없고 태연(泰然)히 움직이지 않음이 없다. 그래서 진실한 모양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모양 아닌 것이 없고, 참 비춤은 밝음이 없기 때문에 밝음 아닌 것이 없다.
밝음도 없고 밝지 않음도 없는데 누가 우치(愚癡)의 어두움을 멸하며, 슬기의 밝음을 얻으며, 모양도 없고 모양 아님도 없는데 어찌 거짓 이름을 부수고 진실한 모양을 말할 것인가. 그렇다면 거짓 이름과 허망한 모양이 참 성품 아님이 없어서 사변(四辨)도 그 모양을 말할 수 없나니 실상(實相)의 반야는 현(玄)하고 현하며, 탐욕의 더러움과 우치의 어두움이 다 슬기의 밝음이어서 오안(五眼)으로도 그 비춤을 보지 못하나니 관조(觀照)하는 반야를 훼손하고, 또 훼손하는 것이다.
지금의 이 경은 반야로 그 종(宗)을 삼나니, 말함이 없고 보임이 없으며 들음이 없고 얻음이 없어 모든 희론(戱論)을 뛰어난 격언(格言)이다. 보임이 없기 때문에 보이지 않음이 없고 얻음이 없기 때문에 얻지 않음이 없으면서, 육도(六度)의 만행(萬行)이 여기서 원만해지고 오안(五眼)의 만덕(萬德)이 여기서 나서 자라나나니, 보살의 긴요한 창고요, 모든 부처의 참 어머니다.
그러므로 위없는 법왕(法王)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려고 반야를 존중하여 몸소 자리를 펴실 때, 하늘은 사화(四華)를 내려 공양하였고 땅은 육변(六變)으로 움직여 경희(驚喜)하였으며, 시방의 보살네는 치우친 변방에 있다가 멀리서 왔고, 이계(二界)의 천인(天人)들은 높은 빛을 내려 멀리서 이르렀었다. 상제(常啼)는 7년으로 서 있으면서 골수(骨髓)의 꺾임을 돌아보지 않았고, 한 자리의 하천(河川)은 법을 듣고는 곧 보리의 기별을 얻었던 것이다.
더구나 당후(요임금과 순임금)는 천하를 덮었고, 주공(周孔:주공과 공자)은 군선(群仙)의 으뜸이지마는 하늘이 가르침을 베풀 때, 그 하늘의 법칙을 감히 거역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우리 법왕님의 반야 진전(眞典)은 모든 하늘이 받들어 우러러 믿으면서 감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지 못하나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그 거리가 멀거늘 어찌 같은 날에 논(論)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구(四句)를 받들어 믿으면 그 복이 허공처럼 광대하여 항사(恒沙) 같은 신명(身命)을 버려도 비유하기 어려우며, 비방하는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 죄가 오역(五逆)보다 중하여 천 겁 동안 무간(無間)지옥에 떨어져 있어도 보상하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마하반야바라밀이란 저 서역(西域)의 말로서 한문으로는 대혜도(大慧度)라 번역한다. 아는 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알지 못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혜(慧-슬기)라 하고, 이르는 것이 없으므로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도(度-건너감)라 한다. 그러므로 능하지 못하는 것이 없어 위없는 대인(大人)을 내며, 끝이 없는 대과(大果)를 나타내나니 이런 이치로 「대혜도(大慧度)」라 하는 것이다.
이른바 경(經)이란 상(常)이요 법(法)이니, 상(常)의 성품은 소유가 없기 때문에 과거 현인과 미래 성인의 떳떳한 길이요, 법의 모양은 필경의 공(空)이기 때문에 흐름을 돌이켜 근원으로 돌아가는 참 법이다.
이 경은 모두 육백 육십분(分)인데 앞의 사백 분을 초분(初分)이라 하며 초분 안에는 칠십 팔품(品)이 있다. 그 중에서 앞에서는 이 경의 연기(緣起)를 밝혔기 때문에 초분연기품(初分緣起品) 제 일(一)이라 한다.
二. 경종(經宗)을 나타냄
이 경은 반야를 종(宗)으로 삼는다. 통틀어 말하면 반야에 삼종(三種)이 있으니, 첫째는 문자(文字) 반야요, 둘째는 실상(實相) 반야이며, 셋째는 관조(觀照) 반야이다.
그런데 지금 이 경은 다음의 둘로 종을 삼는다. 왜냐하면 문자반야는 나타내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며, 뒤의 둘은 나타내어지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제 종의(宗義)를 나타내기 위하여 대략 삼문(三門)을 짓는다. 첫째는 실상을 밝히고,
둘째는 관조를 밝히며, 셋째는 이 이종(二種) 반야를 합해 밝히는 것이다.
1. 실상 반야의 상(相)을 밝힘
모든 법의 실상에 대해서는 학설이 같지 않다. 어떤 이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의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에 나타나는 진여가 전연 없는 것을 실상이라 하나니, 그것은 의타기성은 실로 공(空)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다.
* 의타기성(依他起性)): 남을 의지해서 존재가 가능한 성품으로 인연이 화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인연에 의하여 이루어진 환(幻)과 같은 거짓 존재.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망상된 것.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같음. 변계는 그릇된 견해, 그 그릇된 견해에 의하여 집착되어 있는 성품의 뜻.
유가론(瑜珈論)에는,
『만일 명언(名言)에 훈습(熏習)된 생각으로 세운 식(識)이 반연한 색(色) 등의 모양과 일을 색 등의 성품이라 헤아리면 그 성품은 실물(實物)이 있는 것도 아니며 승의(勝義)가 있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하고, 그것은 오직 변계소집의 자성이니, 그러므로 그것은 가유(假有)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명언에 훈습된 생각의 세운 식을 버리면 그 색 등의 모양과 일의 반연 같은 것은 언설을 떠난 성품이니, 그러므로 그 성품에는 실물이 있고 승의(勝義)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였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의타기성도 공(空)이며 진여도 공이니, 이런 것을 모든 법의 실상이라 한다.』하였는데, 이것은 하문(下文)에,
『색(色)은 소유가 없어 얻을 수 없고 수(受)·상(想)·행(行)·식(識)도 소유가 없어 얻을 수 없으며, 내지 법성(法性)의 실제(實際)도 소유가 없어 얻을 수 없다.』
한 것과 같고, 또
『모든 법의 실상은 어떤 것인가. 모든 법의 소유가 없는 것이니, 이런 일을 모르는 것을 무명(無明)이라 한다.』고 한 것과 같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의타기성은 유(有)이기도 하고 공(空)이기도 하나니, 세속이기 때문에 유(有)이며, 승의(勝義)이기 때문에 공(空)이다. 공(空)은 곧 진여요, 진여는 곧 공이 아니니, 이런 것을 모든 법의 실상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하문(下文)에,
『세속의 법이기 때문에 업보가 있다고 하지마는 제일의(第一義)에는 업도 없고 보(報)도 없다.』
한 것과 같으며, 유가론에서,
『승의 뒤에 다시 승의가 없기 때문이다.』
한 것과 같다.
또 어떤 이는 말하를,
『이제(二諦)의 법문은 다만 가설(假說)일 뿐이요 실상이 아니다. 진(眞)도 아니요 속(俗)도 아니며 유(有)도 아니요 공(空)도 아닌, 이런 것을 실상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하문(下文)에,
『소득(所得)이 있고, 소득이 없는 것이 평등한 그것을 소득이 없는 것이라 한다.』
한 것과 같고, 논에는
『만일 전도(顚倒)가 조금이라도 실(實)이 있다면 제일의제(第一義諦)에도 또한 실(實)이 있을 것이다.』하였다.
물음: 이상의 여러 스님의 말에 어느 것이 옳은가?
답: 여러 스님의 말이 다 옳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 성전(聖典)과 틀리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법의 실상은 온갖 희론(戱論)을 뛰어나 그런 것도 없고 그렇지 않은 것도 없기 때문이니, 마치 저 석론(釋論)에,
『일체가 진실이요 일체가 진실이 아니며, 일체가 진실이면서 또한 진실이 아니요, 일체가 진실이 아니며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닌 것이 바로 모든 법의 실상이다.』한 것과 같다.
생각하면 여기서 사구(四句)를 다 실상이라 한 것은, 차례로 사설(四說)을 허용한 것이니, 집착을 떠나 말하면 다 맞기 때문이다. 만일 집착이 있으면 말을 그대로 취해 모두를 파괴하기 때문에 실상이 아니며, 사구(四句)를 뛰어나 파괴할 수 없어야 그것을 실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저 광백론(廣百論)의 게송에,
유(有)라거나 비유(非有)라거나 다 글렀나니
온갖 종(宗)은 모두 다 적멸(寂滅)인 것을
거기서 의심을 일으키려 한다면
그는 끝내 그 뜻을 알지 못하리
한 것과 같다.
또 어떤 이는 이 대반야경애 의지하여 여래장으로써 실상반야(實相般若)를 삼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래서 드는 이취분(理趣分)중의 말과 같다. 즉,
『그 때 세존께서 다시 일체주지장법(一切住持藏法)인 여래의 모양을 의지하여 보살네를 위해, 반야바라밀다의 일체 중생이 주지하고 두루 가득 찬 매우 깊은 이취승장(二趣勝藏)의 법문을 말씀하시니, 이른바 「일체 중생이 다 금강장(金剛藏)이니, 금강장의 씻음을 받았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이 다 정법장(正法藏)이니 모두 바른 말을 따라 하기 때문이요, 일체 중생이 다 묘업장(妙業藏)이니 일체 사업의 가행(加行)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주지심심이승취승장(住持甚深理趣勝藏)의 법문을 말씀 하시고는, 다시 금강수(金剛手)보살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누구나 이런 두루 가득한 반야 이취승장 법문을 듣고서, 믿고 이해하며 받들어 지니고 읽고 외우며 닦아 익히면, 그는 곧 승장법성장(勝藏法性藏)을 통달하여 빨리 위없는 정등(正等) 보리를 증득할 것이다」』
하신 것과 같으며, 또 보성론(寶性論)의 게송에서
원래부터 있어 온 성품
모든 법들의 의지함 되네
의지하는 성품에 온갖 도 있고
또 열반과(涅槃果)를 깨달아 얻네
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런데 그 장행(長行)의 해석에,
『이 게송은 어떤 이치를 밝혔는가. 「원래부터 있어 온 성품」이란 저 경에 이른바,
「부처님이 여래장에 의하여 중생들이 본제(本際)가 없어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한 것과 같다.』
이른바 성품이란 저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에,
『세존의 여래장이란 법계장(法界藏)이요 출세간의 법신장이며 출세간의 상상장(上上藏)이요 자성이 청정한 법신장이며 자성이 청정한 여래장이다.』
한 것과 같다. 그런데 이 오구(五句)에 의하여 섭대승론과 불성론에서는 오의(五義)로 무상(無相)을 해석하였으니, 그 논에서는,
『이른바 성품이란 스스로 오의(五義)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종류의(自性種類義)요, 둘째는 인의(因義)이며, 셋째는 생의(生義)요, 넷째는 불괴의(不壞義)이며, 다섯째는 비밀의(秘密義)이다.』
하였다.
지금 이 경에서,
『일체 중생이 다 여래장이니 보현보살의 자체가 두루하기 때문이다.』
라고 한 것은, 이른바 이 보살이 일체 중생이 오직 한 법계요 중생이 따로 없다고 생각한 것이니, 이런 이치로 그는 오랜 동안 훈수(熏修)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변해 일체 중생을 두루하여 그 자체로 삼은 것이니, 이렇게 보살이 분(分)을 따라 관심(觀心)하는 것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여래의 원만한 관심이겠는가. 그러므로 일체 중생이 다 여래장에 포섭되어 이름을 여래장이라 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저 불성론에서,
『일체 중생은 다 여래의 지혜 안에 있나니 그들은 다 여래에게 포섭 되기 때문이며, 포섭 되는 중생을 다 여래장이라 하는 것은 여래에게 포섭되는 것은 다 여래장이기 때문이다.』
한 것과 같다.
금강장의 씻음(灌灑)을 받기 때문이란, 이른바 부처 자리에 있는 대원경지에 상응하는 깨끗한 식(識)에 포섭 되는 종자가 변하여, 일체 중생이 되는 것을 등류과(等流果)로 삼기 때문에 씻음을 받기 때문이라 한 것이다.
모두 바른 말을 따라 변하기 때문이란, 이른바 보현보살이 변하여 중생들이 되어서는, 때때로 스스로의 바른 말을 따라 변함이 생기기 때문에 일체 중생이 다 바른 법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묘업장이란, 여래장으로 그 마음을 훈습(熏習)한 힘 때문에 모든 중생의 이종(二種)의 업, 즉 괴로움을 피하고 즐거움을 구하는 업을 낸다는 것이니, 모든 좋은 사업과 일체 가행(加行)의 선심(善心)이 다 이 이업(二業)에 의하여 생기기 때문에 일체 사업이 가행을 의지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런 이치로 그것을 묘업이라 한다.
2. 관조 반야(觀照般若)의 모양을 밝힘
이것은 저 논(論)에서,
『모든 보살은 처음으로 발심한 때부터 일체종지를 구하면서 그 중간에 모든 법의 실상을 아나니, 그 지혜가 곧 반야바라밀이다.』
한 것과 같다.
통틀어 말하면 그렇지마는 그것을 분별하면 이하의 논과 같이 여러 주장이 같지 않다. 이제 그 중에서 대략 사의(四義)를 인용한다. 즉,
첫째 사람은 말하기를,
『무루(無漏)의 혜안(慧眼)이 곧 반야바라밀의 상(相)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지혜 가운데 제일의 지혜를 반야바라밀이라 하나니, 그것은 무루의 혜근(慧根)이 곧 제일일이기 때문이다.』
한다.
둘째 사람은 말하기를,
『반야바라밀은 곧 유루(有漏)의 지혜이다. 왜냐하면 보살은 도수(道樹) 밑에 나아가 번뇌를 끊었기 때문이다. 즉 먼저는 비록 큰 지혜가 있고 무량한 공덕이 있었더라도 번뇌를 끊지 못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보살의 바라밀은 곧 유루의 지혜인 것이다.』
한다.
셋째 사람은 말하기를,
『보살의 유루의 지혜와 무루의 지혜를 모두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왜냐하면 보살은 열반을 관(觀)하면서 불도를 수행하나니, 그러므로 그것은 무루일 것이며, 번뇌를 끊지 못하고 일을 성취하지 못했으니 그러므로 유루라 한다.』
고 한다.
넷째 사람은 말하기를,
『이 반야바라밀은 어떻다 형용할 수 없는 것이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상(常)이기도 하고 무상이기도 하며, 공(空)이기도 하고 실(實)이기도 한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로서 어떤 계입(界入)에도 포섭 되지 않는다. 유위(有爲)도 아니요 무위도 아니며, 법도 아니요 법 아닌 것도 아니어서, 취할 것도 아니요 버릴 것도 아니며 나는 것도 아니요 멸하는 것도 아니며, 유무(有無)의 사구(四句)를 뛰어나 어디에도 집착하는 곳이 없다.
마치 화염(火炎)을 사방(四方) 어디에서도 만질 수가 없나니 손을 태우기 때문인 것처럼, 반야바라밀도 만질 수가 없나니 사견(邪見)의 손을 태우기 때문이다.』
한다.
물음: 이상 여러 사람의 주장에서 어떤 것이 진실인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거기 다 일리(一理)가 있으니 그것이 모두 진실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저 경에 이른바,
『오백 비구들이 각각 이변(二邊)과 중도(中道)의 이치를 말할 때, 부처님은 다 도리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한 것과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제일 끝의 사람(네째)의 말이 진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파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법이 털끝 만큼이라도 있다고 하면 그것은 다 잘못으로서 파괴할 수 있는 것이요, 없다고 해도 또한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으며,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 것도 또한 없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도 또한 없다. 이것을 적멸해서 걸림이 없고 희론(戱論)이 없는 법이라 하나니, 그러므로 파괴할 수 없는 것을 진실한 반야바라밀로서 가장 뛰어나 그에서 지나는 것이 없는 것이라 한다.
마치 전륜성왕이 여러 적을 항복 받으면서 잘난 체하지 않는 것처럼, 반야바라밀도 그와 같아서 일체의 말과 희론을 능히 깨뜨리면서도 깨뜨려진 것이 없나니, 이것은 제십일 위(位:십지 다음,묘각보살)에 즉중(卽中)하여 나온 것이다.』한다.
생각하면 이 중에서 앞의 삼의(三義)는 자취에 의하여 실(實)을 나타낸 것으로서, 지전(地前)과 지상(地上)의 반야의 유루와 무루를 통틀어 취해 그 이치를 따라 설명한 것이요, 제사의(四義)는 오직 지상(地上)의 무분별지(無分別智)만을 나타내어, 실상은 온갖 희론을 끊고 사구(四句)를 뛰어나고 오상(五相)을 멀리 떠났다는 것을 증회(證會)한 것이니, 그러므로 맨 끝의 답이 진실이라 한 것이다.
이것은 가장 훌륭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것이지마는 그래도 일체의 지혜를 다 포섭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여러 주장에 다 이치가 있다고 말한 것이니 이것은 그 하문(下文)에서,
『반야바라밀은 일체의 지혜를 다 포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살이 불도를 구할 때에는 일체의 법을 배우고 일체의 지혜를 얻어야 하는 것이니, 이른바 성문의 지혜와 벽지불의 지혜와 부처의 지혜인 것이다.
이 지혜에 삼종(三種)이 있으니, 유학(有學)과 무학(無學)과 유학도 아니요 무학도 아닌 것이며, 유학도 아니요 무학도 아닌 지혜란 건혜지(乾慧地)·부정(不淨)·안반(安般)·욕계계(欲界繫)·사념처(四念處)·난법(煖法)·정법(頂法)·인법(忍法)·세제일법(世第一法) 등이다. 』
*안반(安般): 수식관(數息觀), 안나반나의 줄임말로서 안나는 내쉬는 숨, 반나는 들이쉬는 숨이다. 내쉬고 들이쉬는 숨을 헤아려 마음의 흔들림을 막는 것. 선관(禪觀)의 첫문.
*난법(煖法):4선근(善根) ·4가행위(加行位)의 첫 자리인 난위(煖位)를 법으로 이름하여 난법이라 한다.
*사가행위(四加行位)=사선근위(四善根位)
: 보살의 계위(階位)인 5위(位)의 제2. 난(煖)·정(頂)·인(忍)·세제일(世第一). 이 4位는 10회향의 지위가 원만하여, 다음 통달위(通達位)에 이르기 위하여 특히 애써서 수행하는 자리, 또, 이를 순결택분(順決擇分)이라고도 한다.
* 보살의 계위(階位)인 5위(位) : 불도 수행상에 대한 5종의 계위(階位)
1. 자량위(資糧位) 2. 가행위(加行位) 3. 통달위(通達位) 4. 수습위(修習位) 5. 구경위(究竟位)
*가행(加行): 방편이라고도 한다. 공용(功用)을 더 행한다는 뜻. 목적을 이루려는 수단으로서 더욱 힘을 써서 수행하는 일
3. 2종(二種)의 반야를 합해 밝힘
일(一)이 아니기 때문에 짐짓 이종(二種)이라 말하지마는 능소(能所)를 떠나면 결국에 다름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살이 반야를 수행할 때, 모든 법의 성상(性相)을 추구하지마는 나[我]가 있다거나 나가 없다거나, 상(常)이라거나 생(生)이라거나 멸(滅)이라거나 유(有)라거나 공(空)이라거나, 이런 일체를 전연 얻지 못하여 일체의 취해지는 상(相)을 얻지 못하고 일체의 취하는 견(見)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때에는 일체의 상견(相見)을 멀리 떠나, 모든 법의 실상은 둘도 없고 다름도 없으며, 처음도 없고 끝도 없으며, 남[生]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있는 것도 아니요, 공(空)도 아니어서 일체의 말의 길을 뛰어 넘고 일체의 마음의 가는 곳이 아주 끊어졌음을 평등하게 깨달아 아나니, 거기 어떻게 이종(二種)의 반야가 있겠는가.
다만 모든 법이 다 같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억지로 모든 법의 실상이라 한 것이며, 일체의 분별을 떠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또한 분별이 없는 지혜라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혜이면서 실상 아닌 것이 없고 실상이면서 지혜 아닌 것이 없나니, 그것은 저 논에서
『보살은 모든 법을 상(常)도 아니요 무상(無常)도 아니며, 아(我)도 아니요 무아(無我)도 아니며, 유(有)도 아니요 무(無)도 아닌 것으로 보면서 또한 그렇게만도 보지 않나니, 이것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라 한다. 이것은 일체의 관(觀)을 버리고 일체의 말을 멸하며 일체의 마음을 떠나 본래부터 생멸이 없다는 뜻이니, 이 열반의 모양과 같이 모든 법도 다 그러한 것을 모든 법의 실상이라 한다.』
고 한 것과 같다.
물음 : 관조반야에 삼분(三分)이 있는가? 만일 견분(見分)이 있다면 어째서 견(見)이 없다고 하며, 만일 견분이 없다면 어떻게 관조라 할 수 있겠는가? 만일 자증분(自證分)이 있어서 자체(自體)를 깨달아 안다면 이 지체(智體)는 실상과 같지 않거늘 어떻게 둘도 없고 다름도 없다 할 수 있겠으며, 만일 견분도 없고 자증분도 없다면 그것은 허공과 같아서 지혜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답: 어떤 이는 이 지혜는 『견분(見分)은 있으나 상분(相分)은 없다』하며, 어떤 이는 이 지혜는 『상분도 없고 견분도 없으나 오직 자증분이 있어서 그 자체를 증지(證知)한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만일 다름이 있다는 개분(開分)에 의하면 삼분(三分)이 모두 없고, 만일 다름이 없다는 가설(假說)에 의하면 삼분(三分)이 모두 없는 것이다.』
하나니, 이것은 이른바 이 평등함 가운데서 상분이 없음을 상분으로 삼고 견분이 없음을 견분으로 삼으며, 자증분이 따로 없으면서 자증분이 아닌 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자증분은 증지하지 않는 것이 없나니, 모든 법의 실상은 자증분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자증분은 모두가 견분인 것이며, 실상을 보는 이는 바로 보는 것이 없나니 보는 것이 있는 이는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견분은 실상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삼분(三分)은 바로 다 일미(一味)이니, 만일 이와 같이 보거나 보지 않는 것에 아무 장애가 없으면 그것은 곧 해탈이다. 그러나 만일 견분이 있다면 그것은 유변(有邊)에 떨어지는 것이며, 만일 견분이 없다면 그것은 곧 무변(無邊)에 떨어지는 것이니, 그 변(邊)을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곧 결박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 논의 게송에,
만일 반야를 보았다 하면
그는 곧 결박을 받고
반야를 보지 못했다 해도
그도 또한 결박을 받는다
만일 반야를 보았다 하면 그는 곧 해탈을 얻고
반야를 보지 못했다 해도
그도 또한 해탈을 얻는다
한 것이다. 이상은 제2의 경종을 나타낸 것이다.
三 . 제명(題名)을 해석함
마하(摩訶)는 대(大)란 뜻이요, 반야(般若)는 혜(慧)란 뜻이며, 바라밀(波羅蜜)은 도피안(到彼岸)이란 뜻이니, 저 논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 제명을 해석하기 위해 삼문(三門)으로 분별한다. 즉 첫째는 대(大)요, 둘째는 혜(慧)이며, 셋째는 도피안(到彼岸)이다.
1. 대(大)를 밝힘
이른바 대(大)란 통틀어 말하면, 모든 대사(大事)·대법(大法)과 불가사의한 신력과 위덕은 다 반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대(大)라 한 것이니, 이것은 하문(下文)에 이른바,
『반야바라밀은 큰 일을 위해 일어났고, 불가사의한 일을 위해 일어났으며, 일컬을 수 없는 일을 위해 일어났고, 무량한 일을 위해 일어났으며, 짝할 것 없는 일을 위해 일어났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五바라밀을 함유하고 있고, 내공(內空)과 내지 유법(有法)·무법(無法)의 공을 함유하고 있으며, 사념처 내지 팔성도를 함유하고 있으며, 부처님의 십력과 내지 일체종지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관정왕(灌頃王)은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은 이로서, 모든 관사(官事)는 다 대신에게 맡겨 두고, 국왕은 안락하여 무사한 것처럼, 이와 같이 수보리여, 모든 성문·벽지불의 법과 보살의 법과 부처의 법이 다 반야바라밀에 있으므로 반야바라밀은 그 일을 잘 변통하느니라.』
한 것과 같다.
그러나 다시 나누어서 논하면 거기는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마는, 지금은 대요(大要)만 뽑아 대략 사의(四義)로 해석하나니, 첫째는 훌륭한 힘이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다문(多聞)을 얻기 때문이며, 셋째는 대인(大人)을 낳기 때문이요, 넷째는 대과(大果)를 주기 때문이다.
첫째, 훌륭한 힘이 있기 때문에 대(大)라 한다는 것은, 이른바 보살네는 반야바라밀을 잘 배우기 때문에 불가사의하고 수승한 신력(神力)이 있다는 것이니, 그러므로 저 경에,
『한 털로 삼천대천세계의 국토에 있는 모든 수미산을 타방(他方)의 무량아승지 국토 밖에 던져 버려도 중생들이 놀라지 않게 하려 하거든 반야바라밀을 배우라.』한 것이다.
둘째, 다문(多聞)을 얻기 때문에 대(大)라 한다는 것은, 이른바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우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이미 말하고 장차 말하실 설법을 두루 다 듣는다는 것이니, 그러므로 저 경에,
『과거 부처님네가 이미 말씀하셨고, 현재 부처님네가 지금 말씀하시고, 미래 부처님네가 장차 말씀하실 것을 다 듣고, 듣고는 스스로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려 하거든 반야바라밀을 배우라.』
하였으며, 그리고 그 논에는,
『보살에게는 관삼세제불삼매(觀三世諸佛三昧)라는 삼매가 있으니, 그들은 이 삼매에 들어가 삼세 부처님네를 다 보고 그 설법을 듣는다.』
고 한 것이다.
물음 :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음성이 현재에 이르기 때문에 보살이 듣는 것인가? 그 음성이 현재에 이르지 않는데 삼매의 힘으로 이미 멸하고 아직 나지 않은 그 음성을 듣는 것인가? 만일 그 음성이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미 멸한 것이 다 현재에 나며, 어떻게 나지 않은 것이 먼저 지금에 나타나는가? 만일 그 음성이 지금에 이르러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음성은 이미 멸했고 아직 나지 않은 것이니, 아직 나지 않고 이미 멸했다면 그것은 없는 소리인데, 어떻게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답 : 그 과거 · 미래의 음성이 비록 지금에 이르지 않더라도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삼매의 힘 때문이다. 마치 바깥 빛깔이 비록 물건에 가리웠다 하더라도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천안(天眼)의 힘 때문인 것처럼, 과거· 미래의 음성도 그와 같아서, 비록 시간의 간격이 있더라도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것은 과거에 있었고 장차 있을 소리를 듣는 것이고, 이미 멸하고 아직 나지 않은 없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다.
만일 과거· 미래 부처님네의 힘 때문에 그 음성이 지금에 이르러 모두 듣게 한다면 범부와 이승(二乘)도 다 들을 수 있을 것이니, 그렇다면 그것은 반야 삼매의 힘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이 경에,
『미래의 말씀이란 곧 장차 있을 음성이며, 과거의 말씀이란 곧 일찍 있는 음성이다.』
한 것이다.
물음 : 보살은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데 어째서 부처님은 그 음성을 현재에 이르게 하시지 못하는가? 만일 그것을 지금에 이르게 한다면 앞의 힐난은 받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시 나거나 이치에 거스림은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답 : 부처님이 그 음성을 지금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고 누가 말하던가? 다만 그 음성이 지금에 이르기 때문에 듣는다는 것은 반야의 힘이 아니라고 말했을 뿐이다.
알아야 한다. 즉 부처님의 법륜(法輪)의 음성은 삼세에 두루하여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이르게 하거나 이르러지는 일은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저 화엄경에,
『비유하면 문자(文字)가 다 일체의 수(數)에 들어갈 때 들어가도 들어감이 없는 것처럼, 법륜도 또한 그와 같아서 부처님이 법륜을 굴리실 때 삼세에 이르지 않는 곳이 없지마는, 굴려도 굴림 없어 구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미래의 음성이 지금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다시 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이치에 어그러지지도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삼세의 장구한 겁이 곧 아주 빠른 한 찰나 사이인 줄을 아시지마는 그 겁을 촉박하게 한 것도 아니요, 또한 찰나를 길게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그 소리가 지금에 이르러도 다시 나거나 이치에 어그러지는 허물이 없는 것이다. 마치 저 경에 이른바,
무량하고도 무수한 겁이
바로 한 찰나 사이이니라
그 겁을 촉박하게 하지는 않았지마는
결국 그것은 찰나의 법이니라
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잔말은 그만 두고 다시 본종(本宗)을 말하리라.
셋째, 대인(大人)을 낳기 때문에 대(大)라 한다는 것은, 이른바 사종(四種)의 대인이 다 반야에서 나오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저 논에 말하기를,
『일체 세간의 시방 삼세에 부처님네가 가장 크고, 다음에는 보살과 벽지불과 성문이 있으니 이 4대인이 다 반야에서 나오기 때문에 대(大)라 한다.』한 것이다.
넷째, 대과(大果)를 주기 때문에 대(大)라 한다는 것은, 이른바 일체 중생에게 무량 무진한 큰 과보를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논에,
『다시 중생들에게 무량 무진한 큰 과보를 주되, 그것은 항상되어 변괴(變壞)하지 않나니, 이른바 열반이기 때문에 대(大)라 하고, 그 이외의 오종(五種)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대(大)라 하지 않는다.』
한 것이다.
이상의 사의(四義)에 의하여 반야를 대(大)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육종(六種)의 해석 가운데서 이것은 유재석(有財釋)이다.
*유재석(有財釋) :범어의 문법에서 말하는 육합석(六合釋)의 하나. 즉 앞에서 말하고 있는 육종(六種)의 해석 가운데 하나로 복합사(復合詞)를 형용사로 이해하는 것을 말함. 예를 들면, 「多味」라고 하는 말을 「많은 쌀을 가진 사람」과 같이 해석하는 것.
2. 혜(慧)의 뜻을 밝힘
혜(慧)의 뜻을 해석하면. 해료(解了)의 뜻이 곧 혜(慧)의 뜻이니, 일체의 알아지는 경계를 잘 알기 때문이요, 무지(無知)란 뜻이 곧 혜(慧)의 뜻이니 아는 바가 있으면 실상을 알 수 없기 때문이며, 파괴란 뜻이 곧 혜(慧)의 뜻이니 일체 법의 말할 수 있는 성상(性相)을 파괴하기 때문이요, 파괴하지 않는다는 뜻이 곧 혜(慧)의 뜻이니 가명(假名)을 깨뜨리지 않고 실상을 증득하기 때문이며, 멀리 떠난다는 뜻이 곧 혜(慧)의 뜻이니 일체 집착하는 생각을 멀리 떠나기 때문이요, 떠나지 않는다는 뜻이 곧 혜(慧)의 뜻이니 모든 법의 모양을 깨달아 알기 때문이다.
또, 떠남도 없고 떠나지 않음도 없다는 것이 곧 반야의 뜻이니 일체의 법에 대해 전연 떠남도 없고 떠나지 않음도 없기 때문이요, 파괴함도 없고 파괴하지 않음도 없다는 것이 곧 반야의 뜻이니 일체의 법에 대해 영원히 파괴함도 없고 파괴하지 않음도 없기 때문이며, 앎도 없고 알지 않음도 없다는 것이 곧 반야의 뜻이니 아는 것도 없고 알지 않는 것도 없기 때문이요, 이치도 없고 이치 아닌 것도 없다는 것이 곧 반야의 뜻이니 일체의 이치도 얻지 못하고 이치 아닌 것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뜻은 저 논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이런 십종(十種) 반야의 뜻에 있어서, 만일 경지(境智)가 일(一)이 아니라는 뜻에 의하면 관조를 혜(慧)라 하나니 이것은 지업석(持業釋)이요, 실상을 혜(慧)라 하나니 이것은 의주석(依主釋)이며, 만일 능소(能所)가 둘이 아닌 문에 의하면 실상도 일(一)이요 반야도 지업석이다.
*지업석(持業釋 ):육합석(六合釋)의 하나. 두 개의 말이 복합하여 하나의 복합어를 만드는 경우, 앞의 말이 뒤의 말에 대하여 형용사, 부사, 또는 동격의 명사라고 하는 관계를 지어 이해하는 것. 예를 들어 「나쁜 사람」이라든가 「지극히 길다」하는 경우임.
*의주석(依主釋):복합어를 구성하는 앞의 말이 뒤의 말에 대해 그 성격을 제한하고 규정한다고 보는 해석으로, 예를 들면 「因明」을 의주석으로 보면 「因」은 이유(理由)이며 이 이유를 밝히는 (明)은 (學問)으로 해석하는 것. 즉, 「明」은 「因」을 밝히는 학문이다.
물음: 저 반야란 이름은 우리 말로 지혜인데 무엇 때문에 논에는 이 둘이 맞지 않다고 말했는가? 즉 하문(下文)에,
『지혜라고 이름한 것은 맞지 않는 것이다. 반야의 실상은 매우 깊고 극히 무거운데 지혜는 가볍고 천박하다. 그러므로 맞지 않다는 것이다. 또, 반야는 많고 지혜는 적기 때문에 맞지 않으며, 또 반야는 이롭게 하는 일이 넓어, 이루기 전에는 세간의 과보를 주고 이룬 뒤에는 도의 과보를 주며, 또 끝까지 다 알기 때문에 일컬을 수 있다고 한다. 반야바라밀은 일컬어 알 수 없는 것이니, 상(常)이라거나 무상이라거나 실(實)이라거나 허(虛)라거나 유(有)라거나 무(無)라는 등, 이런 것은 다 일컬을 수 없다는 뜻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답: 이 논은 바로 지혜란 이름이 반야의 체(體)에 맞지 않다는 것을 밝힌 것이며 반야라는 일컬음이 지혜라는 이름에 맞지 않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논에 지혜라고 이름을 일컬은 것은 이름을 일컬어 지혜라함을 지적한 것이며, 반야는 매우 깊고 극히 무겁다는 것은 반야의 체(體)가 말을 떠나고 생각을 뛰어난 것을 나타낸 것이며, 지혜는 가볍고 천박하다는 것은 지혜라는 이름은 말과 생각을 떠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그러므로 이 이름은 그 체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또 반야는 많고 지혜는 적다는 것은, 이른바 반야의 체는 무량무변하며 알고 깨닫는 것이 한량이 없기 때문이며, 지혜란 이름은 한량이 있어 오직 한 이름만을 일컫고 알 수 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적은 이름이 많은 체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또 반야의 이롭게 하는 곳이 넓다는 것은, 반야의 체는 이롭게 하는 곳이 넓어 지혜라는 이름으로는 나타낼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니 그러므로 맞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또, 끝까지 다 알기 때문에 일컬을 수 있다는 것은, 지혜의 체는 다 안다고 일컬을 수 있지마는, 반야의 체는 아는 것이 전연 없음을 밝힌 것이니, 이른바 상(常)이라거나 무상이라거나 허(虛)라거나 실(實)이라거나 유(有)라거나 무(無)라는 등 이런 일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맞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그 체상(體相)을 다 알기 때문에 그것을 체상이라 일컬을 수 있지마는 반야의 상
(相)을 알 수 없는 것은 상(常)·무상(無常) 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이런 이치로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 사의(四義)로 맞지 않음을 해석한 것이니, 이것은 이름과 체의 서로 맞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물음: 반야의 체는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다 아는 것과 맞을 수 없다면, 앞에서는 해석해 말하기를, 「앎이 없다는 뜻이 곧 지혜의 뜻이라」하였으니 이것을 반야의 체라 할 수 있는가?
답 : 앎이 없다는 이름도 체라 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은 바로 차전(遮詮)으로서 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만 지(知)만 막았을 뿐이요 무(無)를 나타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전(遮詮):불교 논리학에서는 부정적인 판단을 가리킨다. 또는 부정적 판단의 형식을 취한 주장의 명제를 가리킴.
물음 : 만일 그 매우 깊고 극히 무겁다는 말이 곧 그 체를 들어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표시한 것이라면, 능히 표시했기 때문에 그것은 맞을 수 없는 것이 아니며, 또 만일 매우 깊다는 말도 맞지 않다면 어째서 이 말이 곧 체를 들어 말한 것이라 하겠는가?
답: 매우 깊다는 말도 또한 차전이다. 그러나 다만 천박함을 막았을 뿐이요, 그 깊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이 말도 체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논주(論主)의 뜻은 반야의 체를 향해 이렇게 말한 것이며, 반야의 이름에 대해 경박하다고 말한 것도 이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체를 들었다는 것도 매우 깊다는 말이 반야의 체에 맞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물음 : 그렇다면 앞에서 십의(十義)로 반야의 이름을 해석한 것은 다 지혜의 체에도 맞지 않고, 또 반야의 업에도 맞지 않는데 어째서 그것을 지업석(持業釋)이라 하는가?
답 : 반야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이름에 해당되지 않지마는, 또 그런 것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에 여러 이름에 해당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지업석에 있어서는 그것은 가설(假說)이요, 실로 그렇다고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틀리지 않는다.
3. 도피안(到彼岸)의 뜻
도피안의 뜻을 해석하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그러나 이 경론에 의하여 대략 사의(四義)를 말한다.
첫째는 생사의 이 언덕에서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기 때문에 도피안이라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저 논석(論釋)에,
『삼승(三乘)의 사람들이 이 반야로써 저 언덕의 열반에 이르러 일체의 근심과 고통을 멸하기 때문에 바라밀이라 한다.』
고 한 것이다.
둘째는, 유상(有相)의 이 언덕에서 무상(無相)의 저 언덕에 이르기 때문에 도피안이라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저 논석에,
『이 반야바라밀 등은 색심(色心)의 이법(二法)을 추구하여 견실하지 못한 것을 파괴하기 때문에 바라밀이라 한다.』한 것이다.
셋째는 원만하지 못한 지혜의 이 언덕에서 구경지(究竟智)의 저 언덕에 이르기 때문에 도피안이라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저 논석에,
『일체지와 변지(邊智)를 다한 것을 피안이라 하고, 또 파괴할 수 없는 상(相)이라 한다. 파괴할 수 없는 상이란 곧 여법(如法)한 성품의 실제(實際)이니 실제이기 때문에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삼사(三事)를 반야 가운데 거두어 들이기 때문에 바라밀이라 한다.』
고 한 것이다.
넷째는 피차(彼此)가 있는 언덕에서 피차가 없는 언덕에 이르는 것이니, 이르는 것이 없기 때문에 도피안이라 한다. 그러므로 금고경(金鼓經)에,
『생사와 열반이 다 망견(妄見)이니 무여(無餘)를 능히 건너기 때문에 바라밀이라 한다.』
고 한 것이다.
이상의 사의(四義) 가운데서 제1과 제 3은 인(因) 가운데서 과(果)를 말한 것이니 이것은 유재석(有財釋)이며, 제2와 제4는 이미 이른 것을 말한 것이니 이것은 지업석(持業釋)이며, 만일 이 대혜도(大慧度)의 이름으로 잘 나타내었다면 그것은 의주석(依主釋)이다.
四. 연기를 밝힘
저 논(論)에, 어떤 이가 묻기를,
『부처님은 무슨 인연으로 마하반야바라밀경을 말씀하셨는가. 모든 부처님법에는 일이 없거나 조그만 인연으로는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나니, 그것은 마치 저 수미산왕이 일이 없거나 조그만 인연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데 지금 부처님은 무슨 인연이 있기에 이 경을 말씀하셨는가?』
고 하였다. 그 답에는 여러 가지 인연을 말하였지마는 지금 그 중요한 것을 뽑아 대략 육인(六因)을 들어 본다.
첫째는 보살의 행을 널리 보이기 위해서요, 둘째는 모든 하늘의 청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이며, 셋째는 사람들의 의심을 끊기 위해서요, 넷째는 중생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이며, 다섯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말하기 위해서요, 여섯째는 모든 논사(論事)들을 항복받기 위해서이다.
1. 보살행을 널리 보이기 위함
저 논에서 말한 것과 같나니, 이른바,
『부처님이 삼장(三藏) 가운데서 갖가지 비유를 인용하여 성문들을 위해 설법하시면서도 보살도는 말씀하시지 않았고, 오직 중아함본업경(中阿含本業經)에서, 부처님이 미륵 보살에게 장차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하셨을 뿐, 갖가지 보살행은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미륵 보살 등을 위해 보살행을 널리 말씀하려고 이 경을 말씀하신 것이다.』
고 한 것이다.
2. 모든 하늘의 청을 어기지 않기 위함
저 논에서 말한 것과 같나니,
『그때 보살은 보리수 밑에서 악마들을 모두 항복 받은 뒤에 위없는 정각(正覺)을 얻었다. 이때 삼천대천세계의 주인인 시기라는 범천왕(梵天王)과 색계(色界)의 여러 하늘들과 제석천(帝釋天)과 욕계(欲界)의 여러 하늘들은 부처님께 나아가 법륜 굴리시기를 청하였다. 부처님은 본원(本願)과 큰 자비로 그 청을 받아들이시고는, 모든 법 가운데 가장 깊은 것은 이 반야바라밀이라 생각하셨기 때문에 이 경을 말씀하셨다.』
한 것이다.
3. 사람들의 의심을 끊기 위함
저 논에,
『사람들은 부처님이 일체지를 얻었다는 데 대해 의심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무량무수한데 어떻게 혼자서 일체의 법을 다 알 수 있는가고 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의 실상이 청정하기 허공과 같은 무량무수한 법 가운데 머무르시면서 스스로 성언(誠言)을 내시기를, 「나는 일체지의 사람으로서 일체 중생의 의심을 끊으려 한다」하시고 그 때문에 이 경을 말씀하셨다.』
하였다.
생각하건대, 여기서 성언(誠言)을 내었다는 것은 이른바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그것은 긴 혀가 있기 때문이다. 혀가 길어 코를 덮으면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것으로서 세전(世典)에도 있는 말이다. 이 비량(比量)에 의하여 성도한 것을 증명하고 부처님 말씀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부처님은 일체지로써 중생들의 의심을 끊는다는 것이다.
4. 중생들의 병을 고치기 위함
저 논에,
『원래부터 중생들이 번뇌의 병에 괴로워 하지마는 아무도 그것을 고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외도(外道)와 악사(惡師)들의 오도(誤導)를 받는다. 나는 지금 세상에 나와 대의왕(大醫王)이 되어 온갖 법의 약을 모았나니 너희들은 이것을 먹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경을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5. 제일의제를 말하기 위함
『부처님은 제일의제의 실단상(悉檀相)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이 반야바라밀경을 말씀하셨다. 실단에는 사종(四種)이 있으니, 이른바 첫째는 세계 실단이요, 둘째는 각각의 사람을 위하는 실단이며, 셋째는 대치(對治)하는 실단이요, 넷째는 제일의의 실단이다. 이 四실단은 일체의 12부 경전과 8만 4천 법장을 다 포섭하였지마는 그것들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하였다.
*실단(悉檀) : 실단은 종(宗). 이(理)․성(成)이라고 한역. 즉 어느 학파의 정해진 정설을 말함
세계 실단이란, 모든 법은 인연을 따라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별다른 성품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수레는 멍에채와 바퀴살과 덧바퀴 등이 화합하여 된 것이기 때문에 수레라는 것이 따로 없는 것처럼, 사람도 그와 같아서 오중(五衆)이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란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물음: 저 경에 『한 사람이 나오면 많은 사람이 구제를 받는다.』
하였고,
또 불이야경(佛二夜經)에는,
『부처님이 도를 이루신 밤으로부터 열반에 드시는 밤에 이르기까지, 이 두 밤 사이에 말씀하신 일체의 가르침은 다 진실하여 틀림이 없다. 』
하였다. 만일 실로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사람들에게 법을 말씀하셨겠는가?
답 : 사람들의 세계이기 때문에 있지마는 제일의제가 있기 때문에 없는 것이요 여여(如如)한 법성이요, 실제(實際)의 세계이기 때문에 없지마는 제일의이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사람 등도 그와 같아서 제일의이기 때문에 없는 것이지마는 세계이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중(五衆)의 인연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있는 것이니, 그것은 한 사람의 둘째 머리나 셋째 손과 달라서 그 인연이 없으면서 가명(假名)만이 있을 뿐이니 이런 모양을 세계 실단이라 한다.
각각의 사람을 위한 실단이란 이른바 사람들의 마음 활동을 관찰하여 설법하는 것으로서, 한 가지 일을 듣기도 하고 듣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저 경에서 이른바,
『잡업보(雜業報) 때문에 잡세간에 태어나 잡촉(雜觸)과 잡수(雜受)를 얻는다.』
는 것과 같으며, 또 다른 경에는,
『촉(觸)을 얻는 사람도 없고 수(受)를 얻는 사람도 없다.』
하였으니, 전자는 단견(斷見)을 가진 사람을 위한 것이요, 후자는 상견(常見)을 가진 사람을 위한 것이니, 이런 모양을 각각의 사람을 위하는 실단이라 한다.
대치하는 실단이란, 이른바 어떤 법을 대치하는 것으로 실성(實性)이 있으면 곧 없다는 것이다. 저 부정관(不淨觀)은 욕심의 병에 대해서는 좋은 대치법이 되지마는 분노의 병에 대해서는 좋은 대치법이 아닌 것처럼 자심(慈心)은 분노에는 좋지마는 욕심에는 좋지 않은 것이니, 이런 모양을 대치라 한다.
제일의의 실단이란 이른바 일체의 법성(法性) ․ 일체의 논의(論議) ․ 일체의 시비(是非) 등을 낱낱이 다 부수지마는, 모든 부처 ․ 벽지불 ․ 아라한 등이 행하는 진실한 법은 부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이것은 위의 3실단에는 통하지 않지마는 여기서는 통하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통틀어 말하면 일체의 교문(敎門)은 이종(二宗), 즉 이제(二諦)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만 세제(世諦)에는 많은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 중에서 이종(二宗)를 내고 그 이외는 다 처음의 일(一)에 속한다.
그 중의 두 실단은 무엇이 다른가. 통틀어 말하면 사람을 위하는 실단이 대치 아닌 것이 없고 대치 실단도 또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한 일 가운데 이설(異說)이 있으니,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을 위한다 하지만 병이 다르다 하여 다른 약을 주는 것이 아니니, 오직 이 한 일 때문에 대치라 하지 않는다.
만일 다른 법으로 다른 병을 고친다면 병이 다르고 약이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대치라 하지만, 한 일 가운데서 사람이 다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을 위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이 이종(二宗)을 제하고 세속 일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다 세계 실단에 포섭 되는 것이다.
물음: 모든 부처님의 설법이 모두 사람을 위한 것이며 모두 중생들의 병을 대치하는 것인데, 어째서 처음과 뒤의 이종(二宗) 실단만이 사람을 위한 것도 아니요 병을 대치하는 것도 아니라 하는가.
답 : 통상(通相)으로 말하면 그 질문과 같다. 그러나 다만 세속의 가명(假名)을 바로 보이고, 또 승의(勝義)의 실상을 바로 나타내기 위한 것이니, 이런 이종(二宗)은 제(諦) 때문에 다른 것이요, 사람이나 병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초후(初後)의 둘을 따로 세운 것이다.
물음: 만일 사람 등 세제(世諦) 때문에 한 사람에 둘째 머리 등이 있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온계처(蘊界處) 가운데의 어느 법에 속하는가? 또, 만일 사람이 있다는 것은 곧 「나」가 있다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독자부(犢子部)의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답: 살바다종에서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둘째 머리와 같나니 온 ․ 계 ․ 처의 법에 포섭 되지 않기 때문이며, 독자부에서 실로 인법(人法)이 있어서 부즉불리(不卽不離)라 말하는 것은 비록 온 ․ 계 ․ 처에는 포섭 되지 않더라도 제5 불가설장(不可說藏)에 있는 것이다.
지금 대승에서 인연 때문에 있지마는 별성(別性)은 없다고 말하는데, 색심(色心) 등의 법도 다 그와 같은 것이다. 만일 참으로 사람이 있다 하면 그것은 증익변(增益邊)이요, 또 전연 사람이 없다 하면 그것은 손감변(損減邊)이다. 그러나 대승은 그렇지 않나니 인연을 따라 있다 하기 때문에 손감변을 떠났고 별성이 없다 하기 때문에 증익변을 떠난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온 ․ 계 ․ 처 중의 어느 법에 포섭되는가. 심불상응행온(心不相應行蘊)에 포섭 되고 24 가운데의 중생동분(衆生同分)에 포섭되는 것이니, 그것은 법계법처(法界法處)에 포섭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잔말은 그만 두고 본종(本宗)으로 돌아가 말하리라.
6. 모든 논사를 항복 받기 위함
저 논에,
『장조 범지(長爪梵志) 등 대논사들로 하여금 불법을 믿게 하기 위해 이 경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만일 반야의 기분(氣分)이 사구(四句)를 뛰어난 제일의의 법이란 말을 듣지 못하면 조그만 믿음도 얻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도과(道果)를 얻겠는가. 』
하였다.
장조 범지 등 논사들의 인연은 거기서 자세히 말했을 것이요, 그 나머지와 인연의 자세한 것은 저 논과 같다.
이상은 경의 연기를 대략 말한 것이다.
五. 교를 판별함
불교를 판별하는 데에는 여러 학설이 같지 않다. 지금은 우선 이설(二說)을 인용하여 시비(是非)를 공평하게 말하리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일화(一化)의 교문(敎門)이 두 길을 벗어나지 않나니, 첫째는 돈교(頓敎)요, 둘째는 점교(漸敎)다. 점교 안에는 오시(五時)가 있으니, 첫째는 사제교(四諦敎)요, 둘째는 무상교(無相敎)이며, 셋째는 억양교(抑揚敎)요, 넷째는 일승교(一乘敎)이며, 다섯째는 상주교(常住敎)이다. 이것은 얕은 데서 깊은 데로 점차로 말한 것이니, 이 경 등 모든 반야교는 제2시(時)의 무상교이다.』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한다.
『출세(出世)의 교문(敎門)은 3품(品)에 지나지 않나니 이른바 경에서 말한 삼종의 법륜인데 저 해심밀경(解心密經)의 말과 같다. 즉 승의생(勝意生) 보살이 부처님께 사뢰기를,
「세존님께서 처음 첫 번째로 파라니사(波羅泥斯)의 선인(仙人)들이 사는 시로림에 계실 때에는 오직 성문승(聲聞乘)에 발취(發趣)한 사람만을 위하여 사제상(四諦相)으로써 바로 법륜을 굴리셨습니다. 그 법문이 비록 매우 기특하고 희유하였지마는 그것은 유상(有上)이요 유용(有容)이며 요의(了義)가 아니어서, 여러 쟁론이 발 붙일 곳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존님께서는 옛날 두 번째로 오직 대승을 닦기에 발취한 사람만을 위하여 모든 법은 공(空)하여 자성(自性)이 없고 생멸이 없으며 본래 고요한 열반에 의해 은밀상(隱密相)으로써 바른 법륜을 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법륜도 또한 유상(有上)이요 요의(了義)가 아니어서 여러 쟁론이 발 붙일 곳이 있었습니다.
세존께서는 지금 세 번째로 일체승에 발취한 사람을 두루 위하여, 일체의 법이 공하여 자성이 없고 생멸이 없으며 본래 고요한 자성 열반으로서 자성이 없는 성품에 의해 현료상(顯了相)으로써 바른 법륜을 굴리십니다. 이것은 무상(無上)이요 무용(無容)이며 요의이어서, 여러 쟁론의 발 붙일 곳이 아닙니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대품(大品)과 여러 반야는 다 이 제2의 법륜에 포섭되는 것이다.』
물음 : 이상의 두 스님의 주장에 어느 것이 진실인가?
답 : 2종의 교문과 3종의 법륜을 한 가지로 말하면 다 일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판별에 이 대품경 등은 다 제2시(時)에 속하는 것이지마는 제2 법륜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니 그것은 경론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 논석(論釋)의 필정품(畢定品)에,
『수보리야, 법화경의 말을 듣고 만일 부처님에 대해 조그만 공덕을 짓거나 내지 우시게로 「나무불(南無佛)」이라고 한 번이라도 부르면 그는 차츰 나아가 반드시 부처가 되리라.』
하고, 또, 『아비발치품(品)의 물러남과 물러나지 않음을 들으면 그것은 법화경 필정여경(畢定餘經)의 물러남이 있고 물러나지 않음이 있다는 말과 같으니, 그러므로 지금 물은 것이 필정인가. 필정이 아닌가.』
하였다.
이로써 징험해 본다면 이 경을 말씀하신 때가 법화경 뒤임을 알 수 있는데 제2時라고 바로 보인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물음: 만일 이 경이 법화경 뒤에 된 것이라면 그 말은 어떻게 통하는가. 저 인왕경(仁王經) 같은 데서는, 『그 때 대중들이 서로 말하기를, 대각 세존께서 전에 이미 우리 대중을 위하여 29년 동안 마하반야(摩訶般若) ․ 금강반야(金剛) ․ 천왕문반야(天王問) ․ 광찬(光讚)반야바라밀 등을 말씀하셨는데, 오늘 여래께서 큰 광명을 놓으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고 하지 않았는가.
답 : 마하반야는 하나만이 아니고 여럿이 있다. 어떤 것은 앞에 말하고 어떤 것은 뒤에 말했다. 저 논에서는 이 경이 2만2천게(偈)라 하고, 대반야는 10만게, 용왕궁 ․ 아수라궁 ․ 천궁(天宮) 등에 있는 것은 천 억 만게라 한다…그러므로 그것은 서로 틀리지 않는다.
또 이 논에는,
『또, 2종의 설법이 있으니 첫째는 쟁처(諍處)요, 둘째는 무쟁처(無諍處)다. 쟁처는 다른 경과 같지마는 지금은 무쟁처를 밝히기 위해 이 마하반야바라밀경을 말하는 것이다. 』
하였으니, 이로써 이 경은 제3의 현료(顯了)의 법륜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으니, 그것은 저 쟁론의 발 붙일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 등을 판별할 때, 제2의 법륜으로 보인 것은 이 경을 쟁론으로 삼은 것이므로 저 논설을 무쟁이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이 경에는,
『삼승의 보리를 구하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하고, 또,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얻을 수 있는 법이 없더라도 거기는 삼승의 가르침이 있다. 』
하였다. 그러므로 해심밀경에도,
『일체의 성문 ․ 독각 ․ 보살이 다 하나의 묘하고 청정한 도이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이 경은 저 제3의 일체승에 발취된 사람들을 두루 위한다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현료상으로써 바른 법륜을 굴린 것이다. 그렇다면 저 제2 법륜에서, 「오직 대승 닦기에 발취한 이만을 위한다」는 것이 어떻게 이로써 저 제2에 속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 이 경의 여화품(如化品)에,
『만일 법에 생멸이 있다면 그것은 허깨비와 같으며, 만일 법에 생멸 즉 광상(誑相)이 없어서 열반이면 그것은 변화가 아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기를, 「만일 부처님 말씀대로 모든 법성(法性)이 공(空)이라면 그것은 성문이 지은 것도 아니요 내지 부처님이 지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열반 一법만이 허깨비와 같지 않겠습니까?」하였다.
부처님은 말씀하기기를, 「그렇다. 일체 법성은 항상 공이다. 만일 새로 발심한 보살이, 일체 법성은 다 공이며, 내지 열반이요, 또 다 허깨비와 같다는 말을 들으면 그들은 다 놀랄 것이니, 그러므로 그들을 위해 분별하여 생멸하는 것은 허깨비와 같고 생멸하지 않는 것은 허깨비와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하셨다.
수보리는 사뢰기를, 「세존님, 어떻게 하면 저 새로 발심한 보살네로 하여금 이 법성의 공임을 알게 할 수 있겠습니까?」하자,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모든 법이 먼저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가.」하셨다.』
하였으니, 이 문증(文證)으로써, 이 경에서 말한 열반법도 자성이 없음을 알 수 있고, 저 제2 법륜에서 모든 법은 생멸이 없고 본래 고요하며 자성이 열반이라 말하면서 열반에 자성성(自性性)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제3 요의의 법륜 중에서는 모든 법은 생멸이 없고 내지 열반에도 자성성이 없다 하였으니, 이로써 지금 이 경종(經宗)은 저 제2와 제3을 다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화엄경에,
생사와 열반
모두 허망하나니
어리석은 지혜도 그와 같아
거기에 모두 진실이 없네
하였고, 또 이 경에도,
『색 ․ 수 ․ 상(色受想) 등이 허깨비와 같고 꼭두각씨와 같으며 꿈과 같고, 내지 열반도 꼭두각씨와 같고 꿈과 같은 것이다. 만일 이 열반보다 더 뛰어난 어떤 법이 있다 해도, 나는 또한 그것도 꼭두각씨와 같고 꿈과 같다 하니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이 경도 저 화엄경처럼 무상(無上)이요 무용(無容)이어서 끝까지 요의*了義)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다만 그 교문이 각각 다르고 같을 뿐이다.
이상은 제5의 교의 판별을 대략 말한 것이다.
제6의 글의 해석은 저 논의 광석(廣釋)에 의한다.
무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nature0820/13757480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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