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화엄학
- 廣嚴과 普法의 긴장과 탄력 -
高 榮 燮*
Ⅰ. 언어와 깨달음
인간이라는 동물은 언어를 통해 사유한다. 직립이라는 사건을 통해 언어(문화)를 발견하고 도구(문명)를 발명한 현실적 인간은 언어를 매개하여 언어 이전의 세계를 경험한다. 때문에 인간의 경험은 언어의 세계와 언어를 넘어선 세계와의 부딪침 속에 자리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현실적 삶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依言) 세계와 표현할 수 없는(離言) 세계 사이에서의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현실적 인간은 사물의 총화인 세계와 부딪침(六觸)으로써 느끼고 언어를 매개함으로써 분별(인식)한다.
비로소 꽃이 되고 하나의 의미를 획득한다. 우리에 의해 꽃이라고 불려지기 이전의 바람에 흔들리던 ‘것’은 시간적으로 변화하고 공간적으로 점유하는 몸짓으로서의 ‘것’일 뿐이다. 그 이름이 붙여지기 이전의 ‘것’을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 것인가.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물을 해석함으로써 분별지를 발생시킨다. 때문에 언어는 진리를 전달하지만 왜곡하기도 한다. 전달이나 왜곡의 측면에서 인간의 언어는 극대의 공능을 지닌다. 언어의 공능의 측면, 즉 효용의 측면에 있어 시니피앙(記標)과 시니피에(記意)의 관계는 언제나 긴장과 탄력의 지평 위에 존재한다. 바로 그 지평 위에서 지시어(能詮)와 지시대상(所詮)의 관계는 팽팽한 줄다리기를 지속하는 것이다.
원효가 보여주는 언어 이해 역시 마찬가지이다. 언어를 통한(依言) 세계나 언어 이전(離言)의 세계의 표현은 언어의 ‘립’(立)과 ‘불립’(不立)의 문제인 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술어를 잘못 이해하면 우리는 커다란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 말은 언어의 극한값까지 가 본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깨달음의 一聲이다. 때문에 ‘불립’이라는 술어는 언어에 대한 무한한 긍정을 역설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원효의 언어 이해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립’(立)의 목적어는 ‘문자’ 그것이 아니라 ‘문자에 대한 집착성’이라는 것이다. 그는 ‘언어로써 언어를 버리는’(以言遣言), 즉 ‘언어를 끊어버린 언어’(絶言之言)의 상태를 지향하고 있다. 불교에서의 언어에 대한 부정은 언어에 대한 긍정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일 뿐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다. 즉 언어가 지니고 있는 분별과 차별의 함의를 부정함으로써 언어의 긍정적 기능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원효의 화(쟁)회(통)의 방법도 바로 언어에 대한 이러한 그의 견해로부터 출발한다.
원효의 눈은 시니피앙(손가락)에 겨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니피에(달)에 겨냥되어 있다. ‘도리는 말을 떠나고 생각을 끊는 것이어서’, ‘어떻게 지목할지 몰라서’, ‘억지로 불러서’(强號) ‘일심’이라 한 것이라는 원효의 이 표현은 시니피에(지시대상)에 대한 그의 이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언어관은 일심이라는 언어를 실체화하지 않기 위해서다. 일심은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의 마음의 근원적인 작용을 일컫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효는 언어의 속성을 깊이 통찰한 뒤 언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의 깨달음은 진리가 언어로 인한 분별(龕․墳) 내지 집착(前․今)에 있지 않다는 것을 통찰한 지점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는 원효를 어느 한 종파의 사상가로 자리매김 할 수 없다. 그의 87종 180여권의 저술목록을 계통별로 분류하면 정토, 유식, 화엄 계통의 저서가 상대적으로 많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그가 정토와 유식 그리고 화엄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또 정토나 유식이 그의 대표적인 사유체계라고 말할 수만도 없다. 중국불교의 13종에 근거하여 평가하더라도 원효의 사유는 어느 한 종파에 한정할 수 없을 만큼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원효의 저술 가운데에서 현존하는 것은 집일(輯逸)․단간(斷刊)․시가(詩歌)류를 포함하여 23부 20여권에 이른다. 그는 ?華嚴經疏?(10권, 일부 存), ?華嚴綱目?(1권, 失), ?華嚴經宗要?(失), ?華嚴經入法界品抄?(2권, 失), ?普法記?, ?大乘觀行?(1권, 失) 등 6~7종의 화엄관련 저술을 남겼다. 고려 義天의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藏敎藏總錄, 3권) 권1에 의하면 미완성이었던 ?화엄경소?는 워낙은 8권이었는데 제5권을 둘로 나누고 ?화엄종요?와 합하여 10권으로 새로이 편집했다고 한다. 현존하는 것은 ?화엄경소?의 「서문」과 제3권에 들어있는 제5품의 「여래광명각품소」(如來光明覺品疏) 뿐이다. 때문에 원효의 화엄에 관한 자료 역시 이 텍스트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삼국유사? 권4 「義解」편의 ‘元曉不覊’ 조목에는 “일찍이 원효는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를 찬술하였는데 제4 「십회향품」에 이르러 끝내 붓을 꺾고 말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과연 원효의 절필은 사실인가? 원효는 절필 이후에 다시는 붓을 잡지 않았는가? 다시 집필하지 않았다면 원효는 가장 말년에 ?화엄경소?를 저술한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의 대표적 저술인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보다 뒤에 10권짜리 ?화엄경소?를 새로이 집성한 것이 된다. ?화엄경소?는 원효의 ?普法章?의 경우처럼 의상이 귀국한 671년 이후의 저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저술이 671년 이후의 저작이라면 의천의 기록대로 원효는 그의 입적년인 686년까지 ?화엄경소? 8권을 저술하고 제5권을 분권하여 9권으로 만든 뒤 종래의 ?화엄종요? 1권과 합본하여 10권본 ?화엄경소?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四敎判에서 一乘滿敎로서 華嚴(普賢敎)을 가장 나중에 자리매김한 것도 이러한 까닭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원효가 화엄과 같은 일종 일파에 입각한 사상가로 여길 수는 없다. 그는 교판을 절대시하여 자종의 우월성을 드러내려는 시각에 대해 “마치 소라껍질로 바닷물을 퍼내고, 갈대구멍으로 하늘을 보려는 것과 같을 뿐이라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원효의 전 사상에 있어 華嚴은 중국 13종 중의 1종이 아니라 오히려 1종 내지 12종을 다 포괄하는 사유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원효에게 있어 화엄은 그의 전 사유의 ‘종합’ 혹은 ‘통일’적 입장을 대표하는 사유체계로 보인다.
원효의 개인적 깨달음은 이미 義湘과의 제2차 입당 유학의 길(661)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의 사회적 깨달음은 분황사 서실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발심하는 존재, 서원하는 존재로서의 보살의 願行을 담은 화엄의 담론을 사교판의 최상위에 두었던 원효는 분황사의 서실 안에서 文字香과 書卷氣에 취해 「(金剛幢菩薩)十廻向品」(현행 제21품)의 疏를 계속 지어나갈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붓을 꺾고 文香과 書氣가 그윽히 서린 분황사 서재를 박차고 나아가 현실적 인간들을 직접 만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원효에게 새로운 깨달음의 계기를 마련해 준 ‘廣嚴’과 ‘普法’, ‘無碍’와 ‘自在’, ‘卽入’과 ‘無障碍’의 의 축으로 구축한 그의 화엄학은 어떠한 얼개를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Ⅱ. ?기신론?과 ?화엄경?
?대승기신론?과 ?대방광불화엄경?은 대승불교의 정화를 담고 있다. 원효는 ?기신론?을 통해 개인적 깨달음을 성취하였고, ?화엄경?을 통해 사회적 깨달음을 성취하였다.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이 두 저술은 모두 그의 깨달음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원효 사상의 철학적 기반이 된다. 아울러 이 두 텍스트의 주요담론인 二門 一心과 二起 一乘의 기호는 불교의 궁극적 지향임과 동시에 원효의 사상과 실천의 주축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시각은 원효사상의 기반인 ?기신론? 사상이 화엄사상과 깊은 연관 속에서 구축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화엄경?의 주요 담론은 緣起와 性起, 즉 二起의 기호 중 특히 여래성의 출현이자 연기의 구극인 性起에 집중되어 있어 ?기신론?의 일심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효에게 있어 모든 것의 근거이자 인식의 근원인 一心은 여래성의 출현이자 연기의 구극인 性起와 같은 것임은 그의 저술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의 기록처럼 고려시대까지 원효의 ?화엄경소?(10권)가 유통되었다면 처음 원효는 「世間淨眼品」(60권본 첫품)부터 필요한 부분을 차례대로 주석 했음이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세간정안품」부터 「盧舍那佛品」(제2품), 「如來名號品」(제3품), 「四諦品」(제4품)은 현존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如來光明覺品疏」(제5품) 이후의 「菩薩明難品」(제6품)부터 마지막의 「入法界品」(제34품)까지도 유통되지 않는다.
그러면 「여래광명각품」의 앞 품들인 「사제품」과 「여래명호품」은 어떤 내용을 머금고 있는가? 「여래명호품」은 여래의 명호가 시방세계에 가득하여 여래의 身業을 헤아릴 수 없음에 대해 설하고 있다. 또 「사제품」은 사바세계와 시방세계 중생들에게 맞는 四聖諦 법문을 통하여 여래의 口業을 헤아릴 수 없음에 대해 설하고 있다.
때문에 「여래광명각품」에서는 앞의 두 품에서 말하고 있는 如來의 名號와 진리의 名稱이 시방 일체세계에 두루하다는 그러한 여래의 경계에 대하여 생길 수 있는 이해하기 어려운 의문을 풀어주고 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유일한 원효의 ?화엄경소? 속의 「여래광명각품소」는 이러한 의문을 풀어주는 것으로부터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존의 60권본 ?화엄경?의 品次로 보면 「(金剛幢菩薩)十廻向品」은 총 34품 가운데에서 제21품으로 자리해 있다. 보살이 취해야 할 열 가지 회향의 내용에 대해 설하고 있는 「십회향품」은 원효의 절필을 있게 한 품명이다. 아울러 요석공주와의 인연 역시 원효의 개인적 깨달음을 성취한(661년) 뒤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의 사회적 깨달음을 통한 원효의 무애행은 특히 ?화엄경? 「보살명난품」의 “일체에 걸림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벗어났느니”라는 구절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원효는 이 구절을 따서 이름하여 ‘장애가 안 되는’(無碍) 도구를 가지고 전국의 촌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읊고 돌아다녔다. 그 결과 가난뱅이나 코흘리개 아이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일제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無碍’와 ‘自在’는 ?대승기신론?에도 보이지만 이 두 술어는 특히 화엄 보살행의 專用語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애와 자재는 연기에 대한 사무친 통찰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보살의 願行에 기초하는 술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효의 사회적 깨달음은 화엄의 사유에 근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1. 無碍와 自在
원효의 삶과 생각은 一心과 和(諍)會(通)과 無碍의 축으로 전개된다. 화회는 일심과 무애를 가능케 하는 매개항이 된다. 또 무애와 자재는 화회에 의해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함으로써(歸一心源) 중생들을 풍요롭고 이익되게 하는(饒益衆生) 보살행의 핵심 코드이다. 그러므로 화회는 일심과 무애를 가능케 하는 방법론이며, 깨달음과 중생교화를 가능케하는 매개항인 것이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소?의 서두에서 이 논서의 특징을 ‘立破無碍’와 ‘開合自在’로 언표하고 있다. 그는 “여래의 광대하고 깊은 법의 헬 수 없는 뜻을 총섭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기신론?을 설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면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논서의 뜻은 이미 이와 같아서, 펼치면 헬 수 없고 가없는 뜻(無邊之義)을 근본으로 삼고, 합치면 두 문(二門) 한 마음(一心)의 법을 요체로 삼으니 두 문의 안에 만 가지 뜻을 받아들이면서도 어지러움이 없고, 가 없는 뜻이 한 마음과 같아서 혼융되어 있다. 그러므로 펼침과 합침이 자재하고(開合自在) 세움과 깨뜨림에 걸림이 없어서(立破無碍) 펼쳐도 번거롭지 않고, 합쳐도 협소하지 않으며, 세워도 얻음이 없고 깨뜨려도 잃음이 없다.
원효 사상의 특징과 핵심인 ?기신론?의 二門 一心사상 안에는 전개와 통합에 自在하고, 수립과 타파에 無碍하다는 이 논서의 논지를 자기의 것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이 ‘무애’와 ‘자재’는 바로 그의 평생의 화두인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함으로써’(歸一心源)과 ‘중생들을 풍요롭고 이익되게 한다’(饒益衆生)는 명제의 다른 표현이다.
이 두 술어는 ?晋譯화엄경소? 서문에서 다시 ‘無障 無碍의 법계의 법문’으로 표현되고 있다.
대저 막음도 없고(無障) 가림도 없는(無碍) 법계의 법문이란, 법이 없으면서도 법 없음이 없고 문이 아니면서도 문 아님이 없다. 이에 크지도 않고(非大) 작지도 않으며(非小), 빠르지도 않고(非促) 느리지도 않으며(非奢), 움직이지도 않고(不動) 고요하지도 않으며(不靜), 하나도 아니며(不一) 여럿도 아니다(不多). 크지 않으므로 지극히 작더라도 남는 것이 없고, 작지 않으므로 지극히 크더라도 남는 것이 있다. 느리지 않으므로 능히 삼세의 겁(三世之劫)을 머금고, 빠르지 않으므로 몸을 들어 한 찰나(一刹那)에 들어간다. 고요하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므로 하나의 법(一法)이 전체의 법(一切法)이고, 전체의 법(一切法)이 하나의 법(一法)이다. 이러한 막음도 없고 가림도 없는 법이 법계 법문의 묘한 기술이니 모든 보살이 들어갈 곳이요, 삼세의 모든 부처들이 나올 곳이다.
원효에 의하면 一法이 一切法이고 一切法이 一法인 無障 無碍의 법문의 세계는 모든 보살들이 들어갈 곳이요 삼세의 모든 부처들이 나올 곳이다. ‘막음도 없고 가림도 없는(無障無碍) 법계의 법문’과 ‘법이 없으면서도 법 없음이 없고 문이 아니면서도 문 아님이 없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원효의 화엄학이 ‘무애’와 ‘자재’의 틀 속에 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애와 자재는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세계이다. 즉 미혹의 세계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러 얻는 것이 곧 무애와 자재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에서의 무애와 자재의 획득은 곧 ‘집착 버리기’(滅執)와 ‘지혜 채우기’(滿空)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원효의 四敎判이나 그것에 입각한 普法의 四門 역시 이러한 無碍와 自在의 코드 위에서 구축된 것이다.
2. 一心과 一乘
?대승기신론?의 핵심어인 一心과 ?화엄경?의 핵심어인 一乘은 원효 사상의 철학적 기반임과 동시에 화엄철학의 기반이다. 모든 것의 근거이자 우리 마음의 근원인 二門 一心과 여래성의 출현이자 연기의 구극인 性起 一乘은 원효 사상 속에서 행복하게 만나고 있다. ?기신론?에서 一心은 여래장 혹은 아뢰야식으로도 표현되고, ?화엄경?에서의 一乘은 여래성의 출현인 性起로도 해명된다.
불교의 궁극적 지향은 미혹의 세계를 전환시켜 깨달음의 세계를 여는 것(轉迷開悟)이며, 번뇌의 의식을 전환시켜 지혜를 얻는 것(轉識得智)이다. 때문에 “唯識의 일심이 妄心이고 여래장심이 眞妄和合心이라면, 화엄일심은 眞心이니 如來性起心이다. 원효의 일심이 진망화합의 여래장심에서 여래성기의 화엄일심으로 전환되었다고 하겠으니, 그것은 원효의 화엄과의 관계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원효는 二門 一心(一味)과 二起 一乘(性起)의 축을 통해 자신의 화엄학을 구축하고 있다. 그러면 일심에 대한 원효의 생각을 살펴보자.
무엇을 一心이라 하는가? 더러움(染)과 깨끗함(淨)의 모든 법은 그 성품이 둘이 아니고, 참됨과 거짓됨의 두 문은 다름이 없으므로 하나라 이름한다. 이 둘이 아닌 곳에서 모든 법은 가장 진실되어(中實) 허공과 같지 않으며, 그 성품은 스스로 신령스레 알아차리므로(神解) 마음이라 이름한다. 이미 둘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가 있으며, 하나도 있지 않거늘 무엇을 두고 마음이라 하겠는가. 이 도리는 언설을 떠나고 사려를 끊었으므로 무엇이라 지목할지 몰라 억지로 一心이라 부른다.
원효에 의하면 진여문(淨)과 생멸문(染)은 두 문이 아니고 진식(眞)과 망식(妄)의 두 문은 다름이 없다고 한다. 이문의 근거가 일심이기 때문이다. 일심은 모든 것의 근거이자 이문의 근거이며 언설을 떠나고 사려를 끊은 것이다. 그런데 이 일심 속의 진여문에도 染과 淨이 있고 생멸문에도 眞과 妄이 있다. 하지만 진여문은 染과 淨을 통섭한 모습(通相)이고 생멸문은 染과 淨을 별도로 드러내므로(別顯) 차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여문은 더러움(染)과 깨끗함(淨)을 통틀은 모습(通相)이다. 통틀은 모습 밖에 따로 더러움과 깨끗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더러움과 깨끗함의 모든 법을 총섭할 수 있는 것이다. 생멸문은 더러움과 깨끗함을 별도로 드러낸 것(別顯)이다. 더러움과 깨끗함의 법은 포괄되지(該)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또한 모든 법을 총섭하는 것이다. 통틀은 모습과 별도의 모습은 비록 다르지만 서로 배척하는 것이 없다. 이 때문에 두 문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진여문은 우리들 마음의 染分과 淨分을 통틀어 보는 측면이다. 이 말은 진여문 안에 이미 染과 淨의 두 측면이 내재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반면에 생멸문은 染分과 淨分을 분리해서 보는 측면이다. 이것은 더러움과 깨끗함을 포괄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별도로 드러내기 때문에 생멸문인 것이다. 하지만 원효는 생멸문 역시 진여문과 함께 하므로 두 문은 분리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원효는 이 두 문이 일심을 각기 나누어서 본 일심의 부분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진여문은 이미 일심의 通相으로 자리하는 것이고 생멸문은 일심의 別相으로 자리하는 것이므로 각기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것이지 일심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설사 두 문이 비록 별개의 몸체는 아닐지라도, 두 문이 서로 어긋하고 통하지 않는 것은 곧 진여문 속에 理만 포섭하고 事는 포섭하지 않고, 생멸문 안에 事만 포섭하고 理는 포섭하지 않는 것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두 문은 상호 융통하여 제한을 둘 수 없다. 그러므로 각기 모든 理法과 事法을 두루 포섭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진여문 속에도 染과 淨, 理와 事가 있고 생멸문 속에도 理와 事, 染과 淨이 있다. 그런데 이 두 문이 서로 어긋나고 통하지 않는 것은 우리들의 차별심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분별심에 의해 진여문 속에다 理 혹은 淨 하나만 포섭하고, 생멸문 속에다 染 혹은 事 하나만 포섭하기 때문에 어긋남과 막힘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차별은 부분과 전체, 하나와 여럿을 구분하여 바라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生滅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기신론?과 ?화엄경?의 궁극적 지향은 무차별 혹은 무분별의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眞如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진여의 관점에서 보면 ‘한 법이 곧 모든 법’(一法卽一切法)이요, ‘모든 법이 곧 한 법’(一切法卽一法)이며, ‘하나가 곧 여럿’(一卽多)이요, ‘여럿이 곧 하나’(多卽一)라는 담론이 된다. 즉 부분은 전체의 일부분이 아니라 이미 전체를 포괄한 하나의 부분이 되는 것이다. 동시에 전체는 부분의 종합이 아니라 이미 부분을 포괄한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여의 인식은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있다’(一味塵中含十方)거나, ‘한 생각이 곧 헬 수 없는 겁이다’(一念卽是無量劫)고 보는 것이다. 이들 담론은 모두 ‘각기 다른 事象들이 서로 걸림이 없다’(事事無碍)는 언표와 상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기신론?의 染(생멸)과 淨(진여) 두 문과 ?화엄경?의 理(성기)와 事(연기) 두 문이 모두 二門 一心과 二起 一乘의 근거가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중생계로 뛰어들어 일승 화엄의 무애정신을 몸소 실천한 원효의 실천행은 화엄보살행이며 그것은 바로 如來出現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如來出現은 如來性起이니 원효의 일심은 화엄의 如來性起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화엄경?과 ?기신론?은 모든 것의 근거이자 인식의 근원인 一心과 연기의 구극이자 여래성의 현현인 性起(一乘)가 둘이 아님을 보여준다. 원효의 사상을 ?기신론?의 핵심사상인 ‘二門 一心’이라 하고 ?화엄경?의 ‘二起 一乘’이라 할 수 있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 원효의 개인적 깨달음의 계기를 준 ?기신론?과 사회적 깨달음의 전기를 마련해 준 ?화엄경?의 담론은 자재와 무애, 卽入과 無障碍의 지평에서 이처럼 하나로 통섭되는 것이다.
Ⅲ. 원효의 화엄학
1. 四敎와 四門
붇다의 가르침을 시간, 방법, 내용 등에 의해 일정한 방식으로 체계 지우는 해석틀인 敎相判釋은 일찍이 인도에서부터 유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판은 중국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남북조 시대에 본격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교판은 흔히 ‘南三北七’ 등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불학자들의 보편적인 학문방법론이었다. 하지만 수당 이후의 교판은 점점 “가장 나중에 오는 장작이 제일 위에 자리하는”(後來居上) 원리처럼 자종이 근거하고 있는 소의경론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변질되었다.
원효 역시 당시 동아시아의 보편적 불학 방법론인 교판을 정립하였다. 원효 교판의 특징은 자종의 소의경론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종래 불학자들의 교판과 변별된다. 원효의 4교판은 三乘과 一乘의 두 축을 다시 別敎와 通敎, 分敎와 滿敎의 틀에 의해 지극히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이 제시되고 있다. 그는 삼승의 별교와 통교의 변별 기준을 ‘法空’에 대한 이해 여부에 근거하여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실천행에 입각하여 일승을 다시 분교와 만교로 갈라 설명하고 있다.
원효의 현존 저술인 ?화엄경소?의 단간본에는 사교판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원효의 사교판은 원효의 화엄에 영향을 받았던 여러 학자들의 저술에 인용되어 있다. 원효의 화엄을 계승한 것으로 보이는 表員 등의 저술에 인용된 사교판은 이러하다.
신라의 원효법사도 네 교판(四敎)을 세웠다. 첫째는 삼승의 별교(四諦敎, ?緣起經? 등)요, 둘째는 삼승의 통교(般若敎와 ?(解)深密經? 등과 같음)이며, 셋째는 일승의 분교(?瓔珞經?과 ?梵網經? 등과 같음)요, 넷째는 일승의 만교(?華嚴經?, 普賢敎를 이름)이다. 삼승이 함께 배우는 것을 삼승교라 하는데 그 가운데에서 아직 법공(法空)을 밝히지 못한 것을 별상교(別相敎)라 하고 법공을 두루 설하는 것을 통교(通敎)라고 부른다. 이승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을 수분교(隨分敎)라 하고, 보법(普法)을 완전히 밝힌 것을 원만교(圓滿敎)라 한다.
이것을 보기 쉽게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三乘別敎 ???? 四諦․緣起經 등 ?????? 未明法空
????? 三乘通敎 ???? 般若․解深密經 등 ?????? 諸法空
????? 一乘分敎 ???? 瓔珞經․梵網經 등 ???? 隨分敎
????? 一乘滿敎 ???? 華嚴經․普賢敎 ??????? 圓滿敎
이 4교판에 따르면 원효는 삼승과 일승의 변별 기준을 법공(法空)의 이해 여부로 삼는다. 즉 그는 아직 존재(法)의 공성(空性)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을 삼승별교라 가름하고, 존재의 공성에 대한 이해가 있는 것을 삼승통교라 가름한다. 동시에 이승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分敎와 달리 일체법에 두루하여 걸림이 없이 서로 투영되고(相入) 서로 동일하다(相是, 相卽)는 ‘普法’의 유무를 통해 일승의 만교로서 화엄을 설정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원효는 이승과 함께 하지는 않지만 보법(普法)이 드러나지 않은 것을 隨分敎라 하며, 보법을 밝게 궁구한 것을 圓滿敎라 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보법을 완전히 밝혔다’는 기준에서처럼 원효의 화엄 이해에는 매우 구체적인 관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일승을 설정하는 기준에 별상으로서의 보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뒤에 기술하겠지만 총상으로서의 ‘廣嚴’은 ‘보법’에 상응하는 또 하나의 코드이다. 원효는 화엄을 보법의 기호로만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광엄의 기호를 통해 화엄을 해명하고 있다. 그러면 먼저 보법의 정의와 보법의 구체적인 근거인 四門에 대해 살펴보자.
‘普’란 ‘두루 미치다’는 뜻이니 이를테면 ‘두루하다’는 의미가 곧 ‘보’이다. ‘法’이란 자체의 뜻이 궤칙(軌則)이라는 의미이니 일체법이 서로 투영되고(相入) 서로 교섭하는(相是) 것을 일컫는다.
원효에게 있어 보법은 卽入과 無障碍 재천명 된다. 이 卽入와 無障碍는 곧 공간, 시간, 운동, 구조 등의 측면에서의 相卽相入과 無障碍로 구체화 된다. 원효는 보법이 머금고 있는 네 가지 특성, 즉 ‘四非四不’의 중도를 통해 자신의 화엄을 체계화하고 있다. 그의 四非四不의 중도는 용수의 八事八不의 중도와 대비된다.
龍樹의 八事八不 | 원효의 四非四不 | ||
不生不滅 | 원인론과 결과론의 초월 | 非大非小 | 공간적 상대성의 초월 |
不常不斷 | 단견론과 상견론의 초월 | 非促非奢 | 시간적 상대성의 초월 |
不一不異 | 동일성과 차이성의 초월 | 不動不靜 | 운동적 상대성의 초월 |
不來不出 | 다가옴과 옮겨감의 초월 | 不一不多 | 구조적 상대성의 초월 |
용수는 ‘八事八不’을 통해서 원인론과 결과론, 단견론과 상견론, 동일성과 차이성, 다가옴과 옮겨감의 이항을 넘어서서 붇다의 중도의 가르침을 재천명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중론?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緣起-無自性-空(性)의 담론으로 구체화된다.
이에 비해 원효는 ‘사비사불’을 통해 공간적 상대성, 시간적 상대성, 운동적 상대성, 구조적 상대성을 넘어서는 화엄의 無障 無碍한 법계의 법문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용수와 원효의 대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반야중관학에서나 화엄학에서나 그 추구하는 바가 모두 붇다의 중도의 가르침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진리의 세계는 어떠한 상대적인 언어(개념)에 의해 규정될 수 없다. 언어는 이미 사물의 총화인 세계를 분별하고 차별하기 때문이다. 용수가 말하는 生과 滅, 常과 斷, 一과 異, 來와 出과 원효가 말하는 大와 小, 促과 奢, 動과 靜, 一과 多는 모두 인간의 언어적 외피가 지니고 있는 분별의 세계인 것이다. 우리는 이 이항 분별의 세계를 넘어서야만 진리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
진리의 세계는 언어를 매개하는 상대의 세계를 넘어선 지평에 자리한다. 때문에 용수의 ‘팔사팔불’과 원효의 ‘사비사불’은 모두 분별과 차별을 넘어서 진리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한 논법이다. 원효는 ‘사비사불’의 문을 통해 無障 無碍 법계의 법문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무장 무애의 법계의 법문은 먼저 언어의 상대성을 넘어선 지평에 자리한다. 때문에 이 법문은 卽入와 無障碍로 표현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무애와 자재는 언어가 지닌 분별과 차별로부터의 무애요 자재이며, 나아가 물리적인 사물에 대한 인식의 걸림 없음이요 자유로움이다. 존재의 공성에 대한 통찰인 ‘法空’과 공간, 시간, 운동, 수량의 四門에 걸림 없는 相卽 相是(相入)하는 ‘普法’ 역시 바로 무애와 자재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四門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보법의 근거라 할 수 있다. 원효는 먼저 공간, 시간, 운동, 수량을 ‘사비사불’의 방식을 통해 여러 장애를 화회해 가고 있다. 이 장애는 다름 아닌 언어의 상대성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법은 이러한 언어의 상대성을 넘어서는 기제이다. 그 때문에 보법은 크고 작음(大小, 공간), 빠르고 느림(促奢, 시간), 움직이고 고요함(動靜, 운동), 하나와 여럿(一多, 수량) 등 四門의 대립항이 경계를 넘어 서로 투영되고 서로 같아지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四門은 무장 무애의 법계의 법문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다. 無障碍의 법계는 사문으로 표현되는 언어적 상대성을 넘어선 중도의 세계이다. ‘大虛’와 ‘隣虛’의 다른 표현인 ‘至大’와 ‘至小’는 다시 ‘無外’와 ‘無內’의 기호를 통해 相卽하고 相入한다.
원효가 화엄에서 설정한 四非四不의 四門의 세계는 공간적 상대성, 시간적 상대성, 운동의 상대성, 수량의 상대성을 넘어선 진리의 세계다. 그것은 곧 원효가 ?진역화엄경소?의 서문에서 밝힌 무장 무애의 법문의 세계를 일컫는다. 따라서 ‘卽入’과 ‘無障碍’는 바로 원효 화엄의 핵심 코드이며, ‘廣嚴’과 ‘普法’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2. 卽入과 無障碍
원효는 普法을 일체법이 大小와 促奢와 動靜과 一多의 범주에 아무런 걸림 없이(無碍) 자재하여 상즉(相是)하고 상입(相入)하는 넓고 큰(廣蕩)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相入과 相是(卽)하는 廣蕩한 ?화엄경?의 세계를 普法이라는 축으로 표현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광엄(廣嚴)과 보법(普法)의 축으로 표현되는 원효의 화엄은 智儼과 法藏의 십현(十玄)의 코드나 의상(義湘)의 수십전유(數十錢喩)와는 변별되는 새로운 축을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다. 먼저 그는 相卽과 相入하는 無障碍의 근거를 열 가지 원인(十種因)으로 설명하고 있다.
1) 하나와 전체가 서로 거울과 그림자가 되어 제석천궁의 그물과 같기 때문이다.
2) 하나와 전체가 서로 인연으로 모여 동전의 수와 같기 때문이다.
3) 모든 것이 識일 뿐이니 꿈의 경계와 같기 때문이다.
4) 모든 것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니 허깨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5) 同相과 異相이 전체에 통하기 때문이다.
6) 지극히 큰 것과 지극히 작은 것 모두가 하나의 양이기 때문이다.
7) 法性의 緣起는 自性을 여의기 때문이다.
8) 一心의 法體는 같지도 다르지도 않기 때문이다.
9) 걸림 없는 法界는 가장지리도 없고 가운데도 없기 때문이다.
10) 法界는 법과 같아서 막힘도 없고 덮힘도 없기 때문이다.
원효는 열 가지 원인을 제시함으로써 일체법의 卽入과 無障碍의 근거를 삼고 있다. 그런데 이 열 가지 원인 가운데에서 원효는 특히 여섯 번째 원인인 ‘지극히 큰 것과 지극히 작은 것이 같은 양이기 때문’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華嚴經? 「十住品」의 “지극히 큰 것에 작은 모습이 있음을 알고자 하는 보살은 이로 인하여 보리심을 일으키게 된다”는 구절에 대해 아래와 같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지극히 크다’(至大)는 것은 이른바 ‘밖이 없는 것’(無外)이니, 밖이 있다면 지극히 크지 않기 때문이다. ‘지극히 작다’(至小)는 것 또한 그와 같아서 이른바 ‘안이 없는 것’(無內)이니, 설사 안이 있다면 지극히 작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밖이 없는 큼은 이른바 크나큰 허공(太虛)이며, 안이 없는 작음은 이른바 미미한 티끌(隣虛)이다. 안이 없기 때문에 또한 밖도 없으니 밖과 안은 반드시 서로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지극히 작은 것은 지극히 큰 것과 큰 것과 같다는 것이다. 태허는 밖이 없기 때문에 또한 안도 없는 것이다. 이는 곧 지극히 큰 것은 지극히 작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큰 것에는 작은 모습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만일 이와같이 크고 작음이 같은 양임을 안다면 모든 크고 작음에 막는 것과 가리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곧 不可思議한 解脫이다. 그러므로 ‘因이 곧 初發心’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극히 큰 것(至大)은 밖이 없다’는 것과 ‘지극히 작은 것(至小)은 안이 없다’는 것은 공간적 상대성을 넘어서게 되면 無碍하고 自在한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안이 있다’면 지극히 작은 것이 될 수 없고, ‘밖이 있다’면 지극히 큰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크나큰 허공인 大虛와 미미한 티끌인 隣虛는 서로 통하는 것이다.
至大와 至小가 같은 양이라는 인식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화엄이 추구하는 無碍와 自在, 無內와 無外의 화엄세계를 묘사하는 것이다. 같은 논법으로 볼 때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운동․수량도 마찬가지이다. 원효는 이렇게 사문의 틀을 넘어선 자리가 곧 막음이 없고(無障) 가림이 없는(無碍) 세계인 不可思議한 해탈의 세계라 말한다. 그리고 이 不可思議한 세계는 곧 初發心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동전 열 개를 세는 비유’도 일체법의 卽入과 無障碍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이 비유는 화엄 2조인 智儼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원효와 의상 그리고 법장과 균여 등의 화엄가에게서 자주 사용되었다. 원효는 이 數十錢의 비유를 원용하여 자신의 화엄학을 정초하고 있다.
원효가 말하기를, 이 동전 열 개를 세는 데에는 두 가지 문이 있다. 첫째는 (하나에서 열로) 세어서 올라가는 것이고, 둘째는 (열에서 하나로) 세어서 내려오는 것이다. 세어서 올라가는 데에는 열 개의 문이 있다. 첫째는 하나(一)이니, 그 까닭은 만일 하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면 둘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열번째는 하나에 즉(卽)한 열(十)이니, 그 까닭은 만일 하나란 것이 없다면 열(十)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니 연(緣)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세어서 내려오는 데에도 또한 열 개의 문이 있다. 첫째는 열(十)이니, 그 까닭은 열이 없으면 아홉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열번째는 열에 즉한 하나이니, 그 까닭은 만일 열이 없으면 하나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이것에 준하여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 하나의 동전 가운데에 모두 열 개의 문을 갖추어서 각기 서로 상즉(相卽)함과 같이, 일체의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하나와 전체가 더불어 연기하여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임을 알아야 한다. 이 동전을 세는 법은 지엄 법사가 시작한 것인데 또한 도리가 있기 때문에 이제 그것을 취하는 것이니, 이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이제 하나란 열에 포섭된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간략하게 처음과 끝을 들어서 하나라 하고 열이라하여 시작하는 문(門)의 처음으로 삼지만, 하나에 포섭된 것은 열 개의 문이 마찬가지이니, 이른바 열이라고 하는 것은 열이 하나에 포섭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열 개의 동전은 모든 존재 전체를 비유한다. 어떤 하나의 동전과 나머지 동전들 사이의 관계는 곧 하나의 사물과 무수한 다른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확산된다. 모든 것은 연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열 개의 동전을 세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에서 세면서 열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둘째는 열에서 세면서 하나로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의 것은 연(緣)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一)이며, 뒤의 것은 하나에 즉(卽)한 열(十)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라고 할 때, 이 하나는 자성이 있는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연(緣)으로 이루어진 하나이다. 그 때문에 일체의 자연수는 이미 그 안에 성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체라는 수에서 하나, 즉 하나의 인연(一緣)을 빼면 일체가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원효는 하나라는 수 역시도 연(緣)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것은 그 하나를 실체화하거나 존재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인연으로 해서 생긴 하나이므로 그 인연으로 이루어진 하나에는 모든 수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 속에 여럿이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있으며, 동시에 하나가 여럿이며 여럿이 하나라는 無盡(가로, 理)과 重重(세로, 事)의 무애를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원효의 사교판에서 언급된 보법의 이치에 부합되는 것이다. 理事의 無碍라는 관점은 현존하는 그의 ?화엄경소?의 「광명각품소」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
원효는 「광명각품소」의 10게송 중 1송에서부터 10송에 이르기까지 각 송구의 의미를 간단하고 명료하게 해석하고 있다. 그는 특히 제1송인 문수보살의 법문에 주목하여 많은 양을 할애하여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원효는 열 명의 보살들이 등장하여 설한 법문에 대해 하나하나 해석해 가는 문수(文殊, 濡首)․각수(覺首)․재수(財首)․보수(寶首)․덕수(德首)․목수(目首)․정진수(精進首)․법수(法首)․지수(智首)․현수(賢首)보살 등 해당 분야의 최고(首) 보살들이 설한 10송의 법문에 대해 각각 풀이해 가고 있다.
문수보살의 법문에 나오는 일다(一多)무장애문은 일법(理)과 일체법(事)의 무애를 말하는 이사(理事)무애법계를 설명하는 것이며 이는 비실체의 실체(眞空妙有, 非實而生)를 말하는 반야사상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는 자는 지닌 것이 없고 보이는 대상 또한 없으며, 일체법이 저 세간을 능히 비춤을 명료히 알며, 한 생각으로 여러 부처들이 세간에 출현함을 보고도 실로 일어남이 없는 그 사람을 큰 이름이라 일컫는다.
큰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이는 일으키는 바가 없어 소유도 없고 보이는 대상도 없다. 그는 이미 언어적 상대성에 근거한 일체의 분별과 차별을 모두 다 떠나 끊임없이 실체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사는 지혜로운 존재이므로 두려움이 없다. 문수(濡首)보살의 게송에 대해 원효는 “진리는 있음과 없음을 여의었고, 부처는 줄어듦과 늘어남이 없다”고 풀이하고 있다.
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또한 패함과 무너짐도 없어서, 마치 이같은 모습을 전환하면 그는 곧 위없는 사람이 되리니, 하나 속에서 전체(無量)를 알고 전체(無量) 속에서 하나를 알며, 끊임없이 실체가 아니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지혜로운 사람은 두려움이 없게 되네.
일체의 분별을 넘어선 지혜로운 사람은 자아도 없고 세계도 없으며 또한 폐함도 없고 무너짐도 없다. 그는 하나 속에서 無量을 보고 무량 속에서 하나를 보아 위 없는 사람이 된다. 이 사람은 곧 무애와 자재 속에서 살게 된다. 계속되는 문수보살의 게송에 대해 원효는 이렇게 해명하고 있다.
먼저 人과 法이 얻을 것이 없는 문으로 중생을 교화함을 밝히고, 나중에 하나와 전체가 막음과 가림이 없고(無障礙) 두려워 할 것이 없음(無所畏)을 드러낸다. 일체의 법이 하나의 법에 스며들기 때문에 하나 가운데에서 無量을 알고, 하나의 법이 일체의 법에 들어가기 때문에 無量 가운데에서 하나를 안다. 그러므로 능히 서로 스며들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서로 거울과 그림자가 되어 생겨나고 실체가 없이 생겨나므로 막음과 가림이 없다.
不可思議한 진리의 세계는 나와 대상이 서로 얻을 것이 없고, 하나와 전체가 서로 장애가 없고 두려움이 없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서로 스며들고 서로 어우러져서 한 법 속에서 일체법을 알고 일체법 속에서 한 법을 안다. 장애가 없고 두려움이 없게 되므로 하나 속에서 無量을 알고 無量 속에서 하나를 알게 된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서로 거울과 그림자가 되어 실체가 없이 생겨나기 때문에 막음도 없고 가림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막음도 없고’ ‘가림도 없기’ 때문에 相卽하고 相入하는 것이다.
‘相入’이란 원효가 “모든 세계가 한 티끌에 들어가고, 한 티끌이 모든 세계에 들어가며, 삼세의 모든 겁이 한 찰나에 들어가고, 한 찰나가 삼세의 모든 겁에 들어가서, 크고 작음(大小)과 <빠르고> 느림(促奢)이 서로 침투하듯이 나머지 일체의 문이 서로 삼투하는 것도 그러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설은 ‘相是’도 마찬가지여서 일체의 법(一切法)과 일체의 문(一切門)에서 하나가 곧 전체요(一卽一切), 전체가 곧 하나다(一切卽一)이다. 이와 같이 넓고 넓은 것을 보법(普法)이라 한다.
원효는 보법의 ‘보’는 넓음(博)이니 두루(徧)한다는 뜻이며, ‘법’은 자체(自體)나 궤칙(軌則)을 뜻한다고 풀이하면서, 보법은 일체법이 서로 투영되고(相入) 서로 같아지는(相是) 것이라 일컫는다. 때문에 一切世界 一微塵, 三世諸劫과 一刹那, 一과 一切, 大와 小, 促과 奢 등 이항들이 상호 투영(相入)하고 상호교섭(相卽, 相是)한다. 서로 막음이 없고(無障) 서로 가림이 없어(無碍) 넓고 넓으므로 보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문이 없는 문의 경지인 보법은 相卽하고 相入하며 무장하고 무애한 법계의 법문인 것이다.
3. 廣嚴과 普法
원효는 ?화엄경소? 「서문」에서 자신의 화엄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명인 ‘대방광불화엄경’ 일곱 글자의 풀이에서 그는 ?화엄경?의 근본 뜻을 한 마디로 ‘광엄종’(廣嚴之宗)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원효는 자신의 ?화엄경소? 「서문」에서 비유를 원용하여 문 없는 문인 普門의 경지를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봉황이 푸른 구름을 타고 올라 (자신이 날던) 산악의 낮음을 내려다보고, 물 신(河伯)이 큰 바다에 이르러 (자신이 놀던) 냇물의 좁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배우는 사람은 이 경의 문 없는 문(普門) 경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종래의 배움(曾學)이 잗달았음(齷齪)을 알 것이다. 허나 날개가 짧은 새는 작은 숲을 떠나지 못하고, 여울의 작은 고기는 좁은 내(涓流)에 안온히 깃들어 있다. 그러므로 얕고 속된 문자의 가르침(敎門)을 또한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원효는 삼승과 일승을 차별의 관점에서 설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을 입는 것처럼 자신의 깜냥에 따라 순차적인 것을 인정할 뿐이다. 그러나 원효는 일승만교의 가르침인 ?화엄경?의 문이 없는 문(普門)의 경지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얕고 속된 三乘의 배움을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이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자종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논쟁을 일삼고 있는 중국인들의 불교 이해를 비판한다. 그런 뒤에 자기의 좁은 세계에만 머물러 있는 삼승의 교문을 버리고 一乘의 더 넓은 ‘푸른 창공’과 ‘큰 바다’로 들어 올 것을 촉구하고 있다.
현실적 인간들은 ‘높은 곳’에 오르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세계가 낮고 보잘것없음을 알게 되고, ‘문이 없는 문’(普門)의 경지에 들어와서야 겨우 종래의 배움을 반추해 보게 된다. 하지만 날개가 짧은 새나 여울의 작은 고기처럼 현실에 안주하는 이에게는 오랫동안 자기 세계가 온세계인냥 착각하여 얕고 속된 가르침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작은 숲’과 ‘좁은 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인식 전환의 계기가 요청된다. 그런 점에서 나의 몸과 마음의 본체인 ‘法界’와 나의 업식의 무화과정인 ‘行德’은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전환하는 근거와 기제가 된다.
大方廣佛華嚴이라 한 것은, 법계(法界)의 끝없음이 대방광(大方廣)이며, 행덕(行德)의 가없음이 불화엄(佛華嚴)이므로 대방(大方)이 아니고서는 불화(佛華)를 넓힐 수 없고, 불화가 아니고서는 대방을 장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방(方)과 화(華)를 아울러 들어 광엄(廣嚴)한 뜻을 밝힌 것이다.
經이라 한 것은, 원만한 진리의 바퀴가 시방의 세계에 두루 들리게 하며, 남김 없는 세계가 삼세에 두루 끝없는 중생들을 교화하는 지극한 법도와 궁극의 표준이 되는 까닭이다. 이제 그 근본 뜻을 들어 표제로 삼아 대방광불화엄경이라 한다.
원효는 대방광을 보여지는 대상(所證法)으로 보고, 불화엄을 보는 주체(能證人)로 보아 대방이 아니면 佛華를 두루하게 할 수 없고, 佛華가 아니면 大方을 장엄할 수 없다고 하여 방(方)과 화(華)를 모두 들어 광엄(廣嚴)의 종지를 표현하고 있다.
법계의 무한함이란 존재의 세계가 크고 바르게 되어야 붇다의 행을 넓혀갈 수 있고, 붇다의 행과 덕이 있어야만 크고 바른 존재의 세계를 아름답게 꾸며갈 수 있다. 이처럼 화엄의 가르침은 공간과 시간, 가로와 세로, 천상과 지상을 넘어선 세계를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卽入과 無障碍, 즉 무애와 자재인 것이다.
원효가 정립하는 ‘廣嚴’이란 용어는 ‘普法’과 더불어 그의 화엄 이해를 보여주는 주요 술어이다. 즉 광엄의 ‘광’은 불화(佛華)를 넓히고, ‘엄’은 대방(大方)을 장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광’을 통해 법계를 끝없이 드리우는 불세계의 빛(光明)을 넓히고, ‘엄’을 통해 행덕을 가없이 펼쳐내는 크고 바른 깨달음(覺)을 장엄하는 것이다.
화엄의 세계는 막음이 없고 가림이 없는 법계의 법문이기 때문에 생사가 열반이고 열반이 생사이며, 진(涅槃, 眞, 淨)과 속(生死, 妄, 染)의 무애의 세계이며, 一法이 一切法이고 一切法이 一法이며, 한 생각(一念)이 삼세의 겁이고 三世의 劫이 一念이며, 一切世界가 一微塵이고 일미진이 일체세계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곧 理(一法)와 事(一切法)의 무애를 나타낸 것이다.
때문에 무애와 자재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기호인 廣嚴은 원효의 세계관 내지 법계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법계(法性)는 내 마음 바깥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뚱어리와 사물의 총화인 세계 사이에서 一心으로 펼쳐지는 긴장과 탄력의 영역 자체이다. 즉 현실적 인간인 나의 “몸과 마음의 본체이며 본래부터 신령스럽게 밝아 막힌 데가 없으며 넓고 커서 텅 비고 고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습(形貌)이 없되 대천세계를 펼쳐놓고 가장자리(邊際)가 없되 만유를 함용(含容)한 것”이다. 때문에 법계의 ‘법’이란 우리의 인식기관이 대상화하여 맞이하고 있는 삼라만상인 모든 생물과 무생물인 존재이며, ‘성’이란 현실적 인간인 나의 인식기관이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있지만 대상화하여 분석할 수 없는 본래의 성품이다.
원효는 평생을 이 법계(법성)의 끝없음을 묘체(妙體)로 삼고 행덕의 가없음을 묘용(妙用)으로 삼아 실천하였다. 아알라야식의 전환을 통해 일심을 발견한 원효는 法界와 行德을 몸체(體)와 몸짓(用)으로 삼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법계와 행덕의 긴장과 탄력 위에서 번뇌가 있는 의식(有漏識)을 전환하여 번뇌가 없는 지혜(無漏智)를 증득함(轉識得智)으로써 땅막(土龕)과 무덤(鬼鄕, 墳)이 둘이 아님을 통찰했다. 그리하여 원효는 분황사의 서실에서 붓을 꺾고 뛰쳐나와 걸림없는(無碍) 자재행을 통해 보살도를 전개하였다. 원효의 원효다움은 바로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원효는 법계의 끝없음과 행덕의 가없음을 통해 ‘廣嚴’의 종지를 드러내었고 일체법에 두루하여 걸림이 없는 화엄 일승 원교의 가르침을 ‘普法’의 의미로 보편화시키고 있다. 광엄과 보법은 원효가 화엄을 인식하는 핵심 코드이다. 우리가 화엄을 ‘광엄종’ 혹은 ‘보법종’이라 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Ⅳ. 光明과 覺觀
원효는 「여래광명각품」의 품명을 풀이하면서 여래가 시방에 두루 방광(放光)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번뇌(闇障)를 없애게 하여 여래의 몸이 법계에 두루함을 깨닫게 하며, 또한 붇다의 광명은 모든 의혹을 없애주기 때문에 ‘광명각품’이라 한다고 말한다.
이 품에는 여래가 발바닥 아래(足下)로 빛을 나투어 시방의 우주를 널리 비추자 그 빛이 일대천(一大千)을 비추고 십대천(十大千)에 이르러 점차 넓어져서 법계에 두루 비추어 믿음을 일으키는 자(發信者)로 하여금 붇다의 지혜의 경계가 크고 다함이 없음을 깨닫고 자기의 법신(法身) 지행(智行) 또한 모두 동등함을 깨닫아 지혜의 눈을 밝게 열어서 과지(果地)의 깨달음을 이루게 하는 십신위(十信位)를 밝힌 법문이다.
여기서 광명이 나온 곳인 천폭륜상(相輪)은 곧 마음을 일으킨(發心) 자의 믿음과 실천을 상징한다. 여기서 광명(光明)과 깨달음(覺)은 상호연관성을 지닌 술어이다. 광명은 붇다가 쏟아내는 빛이지만 믿음을 일으킨 자를 깨닫게 하는 원천이며, 깨달음은 붇다의 광명에 촉발되어 믿음을 일으킨(發信) 자의 자발적인 행위의 결과이다.
그런데 품명에서 보여지는 대로 ‘여래가 빛을 쏟아내어 깨닫게 하는 장’인 「여래광명각품」은 인간들의 어둠과 고통의 굴레를 걷어내어(除滅) 빛과 깨달음을 주는 장이다. 이 장은 제3품인 「여래명호품」과 제4품인 「사성제품」에서 제기하는 두 가지 의문에 대해 풀이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래의 빛이 의혹을 걷어내고 여러 재난을 뿌리뽑게 한다고 말한다.
원효는 「여래광명각품」의 큰 뜻(大意)과 경문 풀이(釋文)를 통해 이 품을 풀이하고 있다. 첫째는 믿음과 이해를 일으키고, 둘째는 정진하여 수행하게 하고, 셋째는 빛이 나온 출처를 밝히고, 넷째는 빛이 비추는 처소를 밝히는 것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이중에서 원효는 먼저 광명이 나온 출처를 밝히고 난 뒤 광명이 비추는 처소를 밝히는 것에 상당한 양을 할애하고 있다.
현존하는 원효의 화엄관련 저술이 겨우 이 품의 주석뿐이어서 제한적이지만 서문 등을 통해 그의 화엄학을 재구할 수 있다. 원효는 언어와 깨달음, ?기신론?과 ?화엄경?, 무애와 자재, 이문 일심과 이기 일승, 四敎判과 四門, 상즉 상입과 무장 무애, 광엄과 보법, 십종인과 수십전 등의 대비를 통해 자신의 화엄학을 구축하고 있다.
그의 6~7종이나 되는 화엄 관련 저술이나 4교판이 보여주는 것처럼 원효는 모든 교학의 이해 위에서 화엄의 세계를 펼쳐나갔다. 원효에게 있어 화엄은 총상과 별상을 아우르는 사유체계이자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틀이었다. 그것은 곧 총상으로서의 ‘광엄’과 별상으로서의 ‘보법’의 코드로 표현되고 있다.
원효는 ?기신론?의 담론을 원용하여 땅막과 무덤의 불이(不二)의 근거인 一心을 깨달았으며, ?화엄경?의 담론 속에서 여래성의 현현인 性起心을 깨달음으로서 붓을 꺾고 현실적 인간들의 삶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원효의 화엄학은 개인적 깨달음을 얻게 된 ?기신론?의 二門 一心사상과 사회적 깨달음을 얻게 된 ?화엄경?의 二起 一乘사상의 무애와 자재였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광엄(총상)과 보법(별상)의 축으로 펼친 相卽 相入과 無障碍의 세계였다고 할 수 있다.
불종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01193704043/12410770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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