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대성사에 계시는 현각스님은 열네살에 스님이었던 이모님의 손을 잡고 오대산 월정사 지장암으로 입산해서 올해 일흔두 살이 되셨습니다. 대단히 선이 굵은 내면을 지니신 스님은, 그러나 아직도 소녀처럼 곱고 순수한 모습을 지니고 계십니다. 이틀에 걸쳐 스님의 한평생 살아오신 말씀을 들으면서 생사해탈이라는 대 과제를 지닌 채 출가자로 한 생을 산다는 의미, 순수의 진정한 의미, 부처님과 스승을 믿는다는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스승의 말씀을 받들어 ‘목숨을 바쳐 기도를 한다’는 게 무엇인줄을 실감하게 하셨습니다.
지난겨울 초입, 전나무가 수행승의 푸른 기상처럼 아름다웠던 오대산에 들렀다가 강릉으로 스님을 찾아뵈었을 때 노스님은 그러셨습니다.
“나는 누구한테 선뜻 기도하라는 소리 못해요. 나는 목숨을 바쳐했으니까.. 죽으라고 했으니까..기도를 하려면 그렇게 해야지 어설프게 해서는 안돼요.”
다녀와서 스님의 말씀을 정리하고 나서 멀리 강릉 대성사를 향해 합장했습니다.
그리고 정리 노트 맨 끝에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현각스님! 당신과의 인연에 감사합니다.”_()_
서른 살, 죽음을 눈앞에 두고 뜨겁게, 처절하게 부처님께 기도해서 목숨을 건진 노스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스님들은 말이다. 밥만 잡수면 부처님을 쳐다보고 ‘나무이피타불’만 한다!”
1940년대 오대산 적멸보궁으로 기도를 하러 다니던 소녀의 고모는 절에만 다녀오면 식구들에게 그렇게 오대산 소식을 전했습니다.
나무이피타불..
나무이피타불..
소녀는 뜻도 모른 채 그 소리를 가만 따라해 보곤 했습니다.
소녀의 고모는 또 부처님처럼 자애로우신 한암큰스님의 모습이며 눈푸른 스님들 살아가는 모습을 얘기해주곤 했습니다.
“한암노스님은 참, 자비로우신 게 꼭 부처님 같다.”
스님들이 찾는 부처님은 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실까?
자비로운 그 할아버지 스님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소녀는 부처님의 모습이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교적 넉넉한 집안 살림에도 불구하고 왜놈의 말로 공부하는 게 마땅찮은 아버지는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학교에 가면 뭘 하니? 왜놈말로 무슨 공부를 한다고..?”
아버지의 애국심으로 인해 소녀는 동무들과 들로 바다로 쏘다니면서 자유롭게 어린시절을 보냅니다. 그럼에도 마음 한 쪽 구석엔 ‘지금 사는 여기는 갇힌 것 같고, 이 세상 밖에 아주 기가 막힌 세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외갓집에 갔더니 머리를 빡빡 깎은 이모가 와 있었습니다.
예전의 고운 이모 모습이 아닌 머리칼이 하나도 없는 이모는 진짜 무서워보였습니다. 여자가 머릴 왜 저렇게 깍았을까? 비구니스님을 난생 처음 본 소녀는 정면에 나서지 못하고 문 뒤에 숨어서 스물 몇 살의 이모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아, 저 분을 따라가 부처님을 좀 구경했으면... ’ 하는데, 그 심정을 꿰뚫은 듯 이모가 그릅니다.
“너, 나 따라갈래?”
머리칼이 하나도 없는 이모스님 모습이 무서워 죽겠는데도 그렇게 궁금한 부처님을 구경하려고 앞뒤도 가리지 않고 소녀는 이모를 따라나섰습니다. 막내 이모의 옷을 몇 벌 빌려서 보퉁이에 싸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길을 그렇게 떠났습니다.
“처음 들어올 때 아무 것도 모르고 왔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이모스님 하고 어머니하고 나를 스님 만든다는 약속을 했더라구요. 내가 팔자가 세서 남동생이 안 자란다고, 또 세속에 두면 스무 살을 넘지 못할 사주라고 누가 그랬던가 봐요. 그래서 이모스님이 데려간 건데, 아버지하고 나하고만 몰랐죠. 아버지께선 나중에 아시고, ‘애미 애비가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저 첩첩산중 속에 데려다 놓았다고 야단이 났었다고 하더군요.”
이모와 함께 탄 트럭이 눈이 펄펄 내리는 대관령 고개를 넘어가자 비로소 어머니, 아버지 생각에 소녀는 눈물이 쏟아집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 건가..귀신에 홀려 가는가.. 도깨비한테 홀려 가는 건가.’
눈물을 거두고 월정거리에서 내려서 어둑한 길을 이모와 함께 걸어 들어갔는데,
아, 슬픔은 어디로 물러나고 멀리서 들리는 월정사 저녁예불 소리가 천상에서 들리는 듯 기가 막혔습니다.
‘아.. 드디어 부처님을 구경할 수 있겠구나.’
그러나 야속하게도 이모는 금방 부처님을 보여주지 않고 월정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장암에 소녀를 사흘 동안 뒷방에 놓아두더니, 사흘 째 되던 날‘나오렴. 옆 암자에 계신 스님께 인사드리러 가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모스님은 지장암 곁의 자그만 암자로 가더니 법당으로 소녀를 데리고 들어갑니다. 마침 저녁예불 시간이었습니다.
법당문이 열리자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처님을 우러러 봅니다.
‘오, 저걸 가지고 부처님이라고 하는구나.’ 동(구리)으로 조성해놓은 검은 빛의 부처님을 바라보면서 소녀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부처님이 저리 생기셨구나..’
열네살 소녀는 그렇게 처음 부처님을 뵙고는, 어머니 아버질 잊어버린 채 지장암에 이미 와 있던 또래 소녀들을 데리고 산으로 냇가로 쏘다니면서 노는 재미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미리 와 있던 아이들이 한 달에 한 번 있는 삭발하는 날에 머리를 파르라니 미는 걸 보면 부럽기 그지없었습니다.
‘나도 깎았으면...’
그렇게 몇 달이 지나서 드디어 머릴 깎는 날이 왔습니다.
‘자, 너도 머릴 깎자구나...’
삭발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더구나 출가의 길이 무엇인지, 수행자의 길이 얼마나 고행의 길인지, 또 얼마나 수승한 길인지 더더욱 모른 채 머리를 깎습니다.
머리를 깎은 날, 얼마나 하늘을 날듯 기분 좋았던지 그 뜨거운 여름날, 도랑에 나가 해가 지는 줄 모르고 물놀이를 합니다. 저녁에 돌아왔더니 뜨거운 햇볕에 그간 단발머리로 가려져 있던 귀를 데어 진물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머리를 삭발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바로 다음날부터 알게 됩니다. 노스님들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해야 했고, 선배스님들을 따라 지게를 지고 나가 나무도 하고, 도랑 옆의 큰 밭에서 풀도 뽑고 감자도 캐고 하는 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어쨌든 중노릇 잘 하면 좋단다...’
일을 가르치면서 지장암의 총책임자인 인홍스님(전 석남사주지)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일을 하는 틈틈이 글도 배웠고 또 어른스님들을 따라 몇 시간은 걸어서 올라간 상원사에서 한암스님의 법문을 듣기도 합니다.
속가에 있을 때, 고모가 월정사에 다녀오면 그렇게 입이 마르도록 전해주었던 한암스님의 모습을, 이제 일흔두 살 노스님이 되신 현각스님은 이렇게 회상하셨습니다.
“한암노스님은 진짜 인자하셨어요. 그대로 부처님이셨어요.
한 번은 우리 아이들끼리 보궁에 올라가게 되었어요. 어렵사리 어른스님들께 쇳대를 얻어 가지고 너무 좋아서 뛰어서 적멸보궁으로 올라가는데 옆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보니까 한암노스님이셨어요.
가을 단풍이 들었을 때 오대산은 나무 밑이 황금빛이 납니다.
한암노스님이 그 단풍든 나무 아래서 정진하시다가 우리가 뛰어가니까, 당신도 놀래 가지고 기침소리를 내셨죠. 주장자를 탁- 집고 황금빛이 나는 숲속의 나무 밑에 앉아 계셨던 노스님의 모습이 너무너무 안 잊혀집니다.”
추운 오대산의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밭농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몇일 연달아 깨밭이며 팥밭을 매고 나서였습니다.
돌멩이 투성이인 밭을 매고 나서 양쪽 손이 벗겨지고 피가 철철 나자, 우연히 만난 화장실 옆 자리에서 이모스님이 슬그머니 떠봅니다.
“일을 이렇게 해서 살겠나? 집에 갈래? ”
소녀는 잠시 생각해 봅니다. 그리곤 단호히 고개를 저으면서 말합니다.
“난, 죽으면 죽었지 못 가요!”
당시를 떠올리던 노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삭발한 머리가 부끄러워서 도저히 못가겠더라고...”
맨머리가 부끄러워서 집에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순수 그 자체였던 열다섯 사미니는 그로부터 15년 후,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몸이 실하고 건강해서 ‘여장군’ 소리를 들었고, 출가해서도 건강할 땐 풀을 베어 하루 오십짐씩 해 나를 정도로 건겅했던 스님이 너무나 몸이 아파서 염불도 할 수 없고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열일곱살 때부터 아프기 시작했으나 참고 견디며 살았는데, 울산 석남사에서 살 때였습니다.
몸이 시원치 않아 그토록 동참하고 싶었던 한국 비구니 최초 삼년 결사로 일컬어지는 결사에도 빠진 채 총무 소임을 볼 때였습니다. 삼년 동안 산문 밖을 한 발자욱도 나서지 않고, 3개월 동안을 단 한숨도 자지 않으면서 화두 하나에 목숨을 건 결제대중에게 너무 부끄러워서 아프단 이야기는 차마 입밖에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몇 년 전 들렀던 한약방에선 늑막결핵이라고 했으나, 한약 한 재 한번 먹고는 견디었고 그나마 자신의 병이 같이 사는 대중에게 전염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나날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신심이 없어 아픈 게지 하는 자책 때문에 신음 소리 한번 제대로 내보지 못했던 터였습니다.
이십대 중반에는 이모스님이 계신 절로 갔습니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바위틈에 앉아 있다가 죽을 생각을 한 것이죠. ‘이 몸뚱이는 짐승들에게 보시나 하자’ 하고 앉아 있었지요. 그 만큼 병세가 악화되었던 것입니다.
“어른들이 공부한다고 워낙 한 점 빈틈없이 사시니까 아프다는 표를 낼 수도 없고, 아픈 자체가 부끄럽고 대중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으로 살았죠.
내가 하도 오래 앓으니까‘아픈 중, 아픈 중’그렇게 소문이 났었거든요. "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 근무하고 있던 외국인 수녀 한 분이 석남사에 놀러왔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석남사 인홍노스님이 현각스님을 건너다 보며 그러셨습니다.
“현각아, 너도 이번 기회에 병원에 한번 가보자.”
오래 전부터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젊은 게 신심이 없어 그렇지.’ 하면서 냉정하게 무시해버렸던 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주위에서 ‘아무래도 현각스님, 병원에 한번 데리고 가야겠습니다.’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몸이 좋지 않았던 다른 몇몇 스님들과 함께 병원에 들러 진찰을 했을 때, 외국인 병원의사가 깜짝 놀라면서 그랬습니다.
“아니! 이런 상태로 어떻게 견뎠단 말입니까? 당장 입원을 해서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병명은 복막결핵. 복막염을 너무 오래 방치해 두어서 균이 결핵으로 옮겨갔다고 했고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목숨에 지장이 있다고 했습니다.
함께 갔던 노스님은 이 소리를 듣고 ‘이처럼 많이 아팠는데 그렇게 미련하게 견뎠단 말이냐?’ 하고 나무라면서도, 너무 무심하게 두었던 걸 미안해했습니다.
“병원에 가기 전까지 대중이 내 병이 그 정도인지 몰랐거든. 근데 그 병은 얼굴은 더 좋아지는 거야 그러니 멀쩡한 게 꾀병 앓는다고 오해를 받았어요.
막상 X-RAY 사진을 찍으니 아예 폐 한쪽이 물에 차서 사진이 나오질 않았어요. 입원을 하고 폐에 물을 빼내는데 끝없이 노랑물이 나왔어요.
그때서야 노스님이 너무 놀라셨죠.”
그런데 문제는 다음부터였다고 합니다.
입원을 하고 수술을 하려면 환자복으로 갈아입어야 하는데, 현각스님이 죽어도 절대 환자복을 입지 못하겠다는 거였습니다.
“죽어도 이 먹물 옷을 안 벗으려고 했지. 내가 환자 옷을 입고 있다가 죽으면 나는 속인으로 죽는다, 그 생각뿐이었어요. ‘나, 이 옷 안 입는다’고 버텼지요.” 젊은 아이가 꾀병 부린다고 그렇게 평소에 엄하게 야단했던 노스님이 손자상좌에게 사정사정을 합니다.
“현각아, 괜찮다. 며칠 일만 벗고 있자. 응?”
그러나 스님은 막무가내였습니다.‘나는 이 옷 못 벗는다고, 죽어도 못 벗는다고, 속인으로 죽을 순 없다고’ 하면서. 노스님이 끝내 설득시키지 못하자 이번엔 간호사가 와서 조릅니다.“스님, 잠깐이면 됩니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자 이번엔 의사가 들어와 사정을 합니다. ‘꼭 낫게 해드릴 테니 그때까지만 이 옷 입으십시다’라고 하니,
“그러니 어째요? 할 수 없이 먹물 옷을 벗고는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스님 세상을 완전히 떠난 것 같은 게.. 너무 마음이 아파서 울었어요.”
스님은 환자복을 입고 독방에 누워 있으면서 지난 15년의 나날들을 돌아봅니다.
열일곱에 ‘초발심자경문’의 뜻을 전부 선도리(禪道理)에 비유해서 가르치는 강사스님 말씀을 듣고 ‘남이 이렇게 시커멓게 뱉어놓은 찌꺼기를 핥고 있으면 무슨 맛이 나겠는가. 치워버리고 직접 먹어보자’하는 마음을 먹고 삼만배를 하고 나서 성철큰스님께 화두를 받으러 갔던 일, 큰스님께서 목침을 손끝에 들이대며 ‘지금 당장 죽어도 화두만 들테냐?’ 하시면서 추궁(?) 하던 큰스님께 ‘정말이지 목숨을 바쳐 한평생 화두를 놓지 않고 공부하겠다’고 맹세했던 일을 떠올립니다.
스님은 기가 막혔습니다. 공부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속인 옷을 입고 앉아서 수술을 기다리자니 비로소 정신이 번쩍 나는 것이었습니다. 속인 옷을 입고 앉아 병원에서 이렇게 죽을 순 없다! 더군다나 음식이라곤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은 수도 냄새가 나서 못 먹겠고, 음식을 잘 먹어야 한다면서 고기에, 파 마늘이 들어간 반찬들을 한 술도 뜰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그릇을 그냥 내놓자 병원에선 미음을 끓여다 주었으나, 이번에도 수도냄새가 나서 먹지 못합니다. 수술할 날이 다가올 즈음, 간신히 환자복을 입혀놓고 석남사로 돌아가셨던 노스님이 3일만에 다시 오셨습니다.
“오셨는데, 나는 죽어도 절에 가서, 절마당에 들어서서 죽어야지 여기서는 못 죽겠다고 퇴원시켜달라고 막 졸랐어요. 그러는 나를 못 당하신 노스님은 드디어 나를 데리고 석남사로 돌아오셨습니다.”
“아니, 치료를 받으시러 왔다가 그냥 나가신 거예요? 수술도 안 받으시구요?”
“그랬지. 수술을 마다하고 병원을 나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지만 죽어도 절에 가서 죽을 생각이었어요. 석남사 저 구석쟁이 뒷방에 있으면서 노스님이 가져다주시는 것을 먹으면서 견디었죠. 그런데 그러고 있으려니 대중들에게 미안해서 도저히 안 되겠더라구요.
은사스님께 말씀드리고 태백산 한 암자로 갔으나 사정이 생겨서 다음에 간 곳이 해인사 극락전이었어요. 그곳에서 죽을 생각이었죠. ”
마침 와사병이 와서 극락전에서 기도를 하고 있던 은사스님 곁에서 머물며 죽음 기다리고 있을 때 사숙되시는 스님 한 분이 찾아와서 그랬습니다. 어린 아들 둘에게 새어머니를 얻어 주고 출가해서 공부를 누구보다 혹독하게 하고 있던 스님이었습니다.
“현각! 이왕에 죽을 건데 백련암 성철 큰스님에게 인사나 하고 죽지... ”
그 소리에 스님은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래, 어떻게 내가 화두를 받았던가?
큰스님과 어떤 약속을 했던가. 인사도 드리지 않고 죽어서야 되겠는가?
화두 가지고 공부하면서 경계가 들려서 찾는 것 아니고는 큰스님께 가는 것은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으나, ‘그래, 죽기 전에 가서 인사나 하고 죽자. 철조망을 뚫고라도 들어가서 만나뵙자.’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당시 성철스님은 백련암에 오시기 전 파계사 성전암에 철조망을 두르고 공부하면서 세상에 나오지 않을 때였습니다.
드디어, 세 분의 선배 스님들이 아파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스님을 데리고 길을 나섰습니다. 허리에 장삼 끈을 매가지고 한 분 스님이 앞에서 끌고 한 분은 뒤에서 밀고 가파른 산길을 올라 갑니다. 열이 나서 콧물이 줄줄 흐르고 정신을 거의 잃을 지경인 스님은 가다가 드러눕고 가다가 쓰러지고 하면서 몇 시간을 걸어 성전암으로 올라갔습니다.
미리 전언을 해놓았던 터라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고 간신히 성철스님이 계신 문지방을 넘는 순간 날벼락이 떨어집니다.
“니, 와 왔노?”
미리 스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성철스님은 노발대발했던 것입니다.
‘살 길이 있는데 신심 없이 물러서 있다가 왜, 다 죽어서야 왔느냐’는 안타까운 마음이 섞인 꾸중이란 걸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똑같이 느낍니다. 워낙 딴 말씀 없이 일언지하 본론으로 들어가는 성격의 큰스님은 그 날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간신히 삼배를 올리고 쓰러질 듯 앉아 있는 후학에게 묻습니다. 그 부리부리한 큰 눈에 빛을 소낙비처럼 내뿜으며, 이제 한창 공부할 나이인 서른 살 비구니에게 묻습니다.
“니, 죽고 싶나? 살고 싶나? ”
“많은 사람들이 큰스님을 찾아와서 병이 낫고 하는 영험이 있을 때였죠. 아무 말씀 없이 ‘죽고 싶나? 살고 싶나?’ 하고 계속 물으시는데 내 생각에 살고 싶다고 하면 기도하라고 하실텐데, 그 당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때였어요. 그러니 하지도 못할 기도를 스님께 한다고 거짓말 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대답을 못하는데 내 앞으로 왔다가 물러났다 하시면서
‘니, 죽고 싶나? 살고 싶나?’를 물으시는데 어쩔 도리가 없더라구요.
‘살고 싶습니다.’ 라고 했죠.”
“그래, 살고 싶제? 살고 싶제? ”
큰스님은 몇 번이고 확인하시더니 이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 그러면 기도해라. 너거 스님 삼천배 하고 있제? 니도 따라 해라. 알겠제?”
그러나 스님은 대답을 못합니다. 서너 번만 하면 피를 토하고 죽을 건데, 하는 생각에 대답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걸음도 걷지 못하는 내가 절을, 그것도 삼천배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끝까지 대답을 못하고 성전암을 나온 스님은, 그러나 해인사 극락전으로 돌아와 정신을 차리고 큰스님 말씀을 떠올립니다.
“내가 부처님 밥 먹은 세월이 얼만데 그냥 죽을 수야 없지 않나? 부처님 멱살이라도 한번 잡아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나? ”
스님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결론을 내립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진데, 단 한 번 절을 하다가 죽어도 이 몸뚱이는 부처님에게 바치자. 죽은 후 내 영혼은 성철스님이 알아서 해주겠지”
스님은 굳게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하루 한 번은 꼭 목욕을 하고 화장실에 가는 옷과 신발을 따로 하고 법당에 들어가 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 8시에 들어가 법당 중앙에서 절을 하는 은사스님을 따라 절을 하는데, 천장이 땅이 되고 땅이 천장이 되는 어지러움을 느낍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너무 아파서 제발 죽었으면 하고 엎드리면 고개가 들리고, 또 죽어야지 하고 엎드리면 다시 고개가 들려지고 했어요. 그렇게 첫날, 천 배를 지나니 천 배를 하고 나니까, ‘아.. 내가 내 자신한테 내가 너무 속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자신에게 너무 속았다는 분심이 하늘 끝까지 올라왔어요. ‘내가 이 송장덩어리인 나한테 수십 년을 속아 가지고 허송세월을 보냈구나..” 스님은 비로소 ‘왜 이제 왔느냐고’ 소리를 지르면서 야단치셨던 성철큰스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렇게 못난 내게 속고 살면서 은사스님은 물론 여러 대중들을 괴롭혔다니.. 나는 죽어야 한다,’ 스님은 앙심이 생겨 도저히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첫날 삼천배를 해내고, 삼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절을 합니다. 몸도 가누지 못하던 스님이 첫날 뿐 아니라 이틀 연속 삼천배를 하자 놀란 것은 은사스님이었습니다. 그러나 반가움은 잠깐, ‘이렇게 멀쩡하게 절을 하는 아이가 십수 년 물러서서 나를 애 먹였구나’ 하는 괘씸한 마음에 쳐다보지도 않고 속도를 더 내서 절을 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의 소리도 더 빨라졌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내리신 가피는 단지 사흘 뒤에 나타나고 맙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절을 하는데, 사흘 되던 날 아침이었습니다.
그간 힘이 하나도 없어서 산을 하나 매달아 놓은 것처럼 엉덩이가 무거웠는데, 그래서 엉덩이가 도저히 올라가지 않았는데 사흘 째 아침, 누군가 엉덩이를 덜렁덜렁 들어주는 것처럼 가뿐하게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절이 빨라지기 시작하자, 은사스님이 그러시더군요.‘니는 무슨 절을 그리 빨리 하노?’은사스님이 절을 좀 늦춰주었으면 하시면서 내가 따라 하던 것이 뒤바뀌어졌던 겁니다.
스님은 그동안 자신에게 속은 것이 괘씸해서 ‘먹던 약을 다 끊고 49일동안 기도해라. 7일 하고 나서 7일 쉬고 그렇게 49일 동안 절을 해라.’하고 과제를 주셨던 성철스님의 말씀을 어기고, 49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삼천배를 하고야 맙니다.
그 동안 무릎은 다 벗겨지고 피가 흘렀지만, 몸은 점점 가벼워졌고 정신 또한 명료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49일 동안 하루에 반드시 한 번씩 극락전에 들러서 스님을 보고 가시는 한 분 스님이 있었습니다. 해인사 지족암의 일타노스님이었습니다. 태백산 홍제사에 살 때 그 위 작은 암자에 홀로 정진하면서 스님이 다 죽어갈 만큼 아픈 것을 보았기 때문에, ‘과연 저 아이가 살아날까? 혹시 내일은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 하면서 와 보셨다고 합니다. 큰절에 머물면서 하루 한 번씩 와서 보고는, 점점 얼굴이 좋아져 가는 스님을 보고 일타노스님이 하루는 물었다고 합니다.
“니, 얼굴에 화장했나?”
일타노스님의 극락전 출근은 곧, ‘다 죽어가는 아이가 극락전에서 삼천배 기도한다’는 소문으로 이어져, 해인사 강원과 선원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이 구경을 왔다고 합니다.
마침, 그때 일타스님의 맛상좌인 혜인스님(현 단양 광덕사 회주)이 해인사 장경각에서 하루 5천배 백일기도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일타스님은 두 군데를 오가면서 후학들을 격려하셨던 것입니다. 스님은 49일 기도를 마치고 성전암으로 올라갔습니다.
누구의 부축 없이도 혼자 멀쩡히 올라온 스님에게 성철스님이 한 마디 하시더랍니다.
“니, 안 죽었네? 죽으라고 시켰더니만 안 죽었네? ”
그리곤 또 다시 과제를 내주셨습니다.
“49일 더 해라.”
두 번째 기도를 가볍게 마치고 다시 가니 성철스님께서 그러시더랍니다.
“그래, 이렇게 살 길이 있는데 십수년을 나자빠져 있었느냐?”
그리고 세번째엔 49일, 그리고 다음엔 백일기도를 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이제 하루 삼천배의 반씩만 해도 된다.”
“백일 기도를 마치고 가니 큰스님께서 ‘진단서를 받아 가지고 오너라’ 그러시더군요. 대구 동산병원에 가니까, 의사가 내 상처를 보고는 ‘고생 했네요’ 소리를 몇 번이나 해요.
그리곤 ‘아무 이상 없습니다.’ 그러는데 믿기지 않아서 내가 또 물어봤는데, 정말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진단서를 하나 떼어서 큰스님께 갔더니, ‘니 조금 더 있다가 기도하는 보살들이 나오거든 보고 내려 가거라’ 그러세요.
서울과 부산 신도들이 와서 기도할 때거든요.
그래서 내가 ‘왜요?’ 하고 여쭈었죠.”
그러자 큰스님이 부탁하셨다고 합니다.
“니, 처음 병원에 입원할 때 따라갔던 보살들이 네가 살아 있다는 소식 듣고 믿지 않는다.
네가 죽어서 저 세상 사람 된지 오래 되었다’고 하더구나. 그러니 살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가라. 얼마 전 유명한 박사 마누라가 한사람 와서 양쪽 귀에서 소리가 나는데, 뭐 전 세계를 다녀도 안 낫는다나 해서 기도를 시켰더니, 한쪽 귀는 조금 소리 나는데 이젠 더 못한다고 울어 쌌는다. 네가 좀 보고 가라.”
조금 있으니까 기도시간이 끝났는지 사람들이 들어와서는 스님을 붙들고 ‘아이구...스님 정말 살아 계셨네요?’ 하고 울어댔다고 합니다.
스님께서 긴 기도 이야기를 마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그렇게 내가 살아났습니다. 거의 일년을 기도한 셈이지요. 그런데 기도하고 병이 나으니까 전생의 인연 인과라는 것을 확실히 느껴졌어요. 의술로도 안 되는 것을 기도해서 났다는 것은 반드시 전생의 죄를 참회한 거지요. 바늘 끝만 한 것도 인과 아닌 게 없어요. 우리네 사는 게 좋은 일이고 나쁜 일이고 전생에 자기 눈으로 찍고 녹음해 놓은 필름이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모습은 필름 돌아가는 과정이예요. 사진 잘 찍은 데는 편안하고, 고통 받는 것은 전생에 안 좋은 마음을 썼기 때문에 나타나는 거죠. 조금도 어긋나지 않아요. 전부 다 인연 인과, 자작자수,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성철스님은 그 뒤 성전암을 나오셔서 해인사에 머물며 한국 불교사에 길이 남을 ‘백일법문’을 포효할 때 대중들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보라! 이렇게 마음의 힘은 무한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 이야기를 전하시면서 현각스님은 그러셨습니다.
“몸만으로 절을 해서 기도를 하는 것보다 대참회와 함께 염불해가며 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우리가 뜻을 내서 몸과 마음이 같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몸은 절을 하고 입으론 염불하면서 참회를 하면 업장소멸이 빠릅니다. 큰스님께선 염불을 할 때도 아무리 힘이 없어도 큰소리를 내서 하라고 하시더군요. 염불기도를 할 때 소리를 크게 내서 하면 주위의 있는 혼, 귀신들이 다 환희심을 내서 발심하고 좋은 생각을 낸다고 하셨어요.”
(원출처-금강불교입문에서성불까지 승진행님글 재구성)
수보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haha723/13336818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